세 남자 섬긴 충선왕 숙비의 발원 담긴 수월관음도

2016. 4. 4. 10:51美學 이야기



       [중앙SUNDAY] 세 남자 섬긴 충선왕 숙비의 발원 담긴 수월관음도/박종기(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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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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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불화(佛畵)는 고려청자와 함께 한국 미술을 대표할 정도의 빼어난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불화 약 160점은 대부분 원(元)나라 간섭기인 14세기 전반 50년 동안에 제작되었다. 지금부터 700년 전이다. 그중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불화는 흔히 말하는 탱화이다. 붙박이 벽화가 아니라 두루마리 형식으로 실내에 봉안하거나 사찰 바깥의 야외 법회용인 괘불(掛佛)의 두 가지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원의 간섭을 받던 무렵 고려엔 새로운 지배층인 권문세족이 등장한다. 이들은 발복(發福)을 위해 불화를 제작해 특정 사찰이나 저택에 원당(願堂)을 지어 이를 안치했다. 불화는 이때부터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유홍준의 한국미술사2』, 2012).

   고려불화의 초기 모습은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에서 찾을 수 있다(그림1 참조). 사경(寫經)은 글자 그대로 베껴 쓴 경전이다. 변상도(變相圖)는 불교경전 안에 들어 있는 불교 전설이나 설화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긴 불화인데, 불교 경전을 쉽게 대중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그린 것이다. 따라서 사경변상도는 ‘읽는 경전’이 아니라 ‘보는 경전’이라 할 수 있다. 불화는 역시 변상도와 같이 불교 경전의 내용을 그린 것이지만, 그 내용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점에서 변상도와 다르다. <그림1>의 변상도엔 보현보살이 연화대(蓮花臺) 위에 앉아 설법을 하는데, 그 앞에 선재동자가 그려져 있다. 『화엄경』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고려불화 역시 『화엄경』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다.


 



화엄경을 소재로 한 그림 많아
   “착한 남자여, 남방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에 관자재(觀自在)라는 보살이 있다. 그대는 그를 찾아가 어떻게 보살의 행동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의 도리를 닦는지 여쭈어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노래를 읊었다. ‘성현들이 사는 바다 위의 산, 보물들로 장식된 지극히 깨끗한 곳, 꽃과 과일나무 숲이 우거진 곳, 샘물과 연못이 넘실대는 곳, 용맹장부 관자재보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 산에 있다. 그대는 가서 공덕을 물어라. 그대에게 큰 방향을 알려주리라.’ 그때 선재동자(善財童子)는 이 노래를 듣고 보살의 발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직하고 길을 떠났다…… 바위 골짜기 사이로 샘물이 흐르고, 울창한 숲에 보드라운 향내 나는 풀이 땅에 깔려 있는데, 관자재보살이 금강보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

보살은 ‘깨달음’, 즉 불교의 진리를 구하는 존재다.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수행자가 보살이다. 깨달음을 찾아 길을 나선 선재동자가 인도 남부 보타락가산에 가서 관음보살 앞에서 예배를 올리는 장면이 하나의 그림처럼 기록되어 있다. 이런 내용을 담은 불화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다. 달이 물에 비친 듯이 흰 천을 걸친 청정(淸淨)한 보살이란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고려 때 제작된 수월관음도 가운데 최고의 명품은 충선왕(1308~1313년 재위)의 비(妃)인 숙비(淑妃)의 발원으로 제작된 것이다. 길이 419.5cm, 너비 254.2cm(원래 크기 500cm, 너비 270cm)로 제작돼 현존 불화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크기 자체가 우선 다른 불화를 압도한다. 또한 현존 불화 가운데 최고의 예술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그림 속에 고려 불화의 아름다움과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그림 2 참조).

그림의 중앙에 아미타불이 붉은 색 대의(*설법용 옷)를 입고서 연꽃으로 장식된 자리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꽃과 구슬로 장식된 얇은 흰 비단천을 머리에서 두 팔을 거쳐 다시 아래로 길게 내려뜨리고, 아미타불은 은근한 미소를 띠면서 우측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아래 선재동자가 보살을 올려보면서 서원(誓願)을 빌고 있다. 보살 뒤로 기암괴석을 뚫고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이 불화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왼쪽 상단의 관음보살 머리에서 하단 오른발까지 대각선 구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원만한 얼굴 모습과 둥근 어깨, 풍만한 가슴은 전체적으로 우아하면서 부드러운 형태미를 보여준다. 옷 주름과 흰 사라천의 뚜렷한 선과 붉고 검은 필선이 대조를 이루어 유려한 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보관에 금으로 그려진 정교하기 짝이 없는 연화당초문무늬, 사라천 끝단의 굵고 탐스런 금색 당초문 무늬, 연꽃무늬, 꽃무늬 그림은 화려함과 치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문명대, ‘한국 괘불화의 기원문제와 경신사장 김우문필(鏡神社藏 金祐文筆) 수월관음도’, 2009).


 



당대 최고의 화가 다섯 명이 제작
   이 불화에 기록된 화기(畵記)에 따르면 충선왕의 비인 숙비(淑妃)가 발원하여 화사(畵師) 김우(金祐)와 화직(畵直) 이계(李桂)·임순(林順)·송연색(宋連色)·최승(崔承) 등 다섯 명의 화가가 1310년(충선왕2) 5월에 완성한 것이다. 화가가 소속된 관청은 왕명을 전달하고 왕실의 각종 물품을 관장한 액정국(掖庭局)과, 교서와 각종 문서를 작성한 예문춘추관이다. 한마디로 고려왕실이 주도하고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제작한 것이다. 숙비 김씨는 원래 충렬왕비인 숙창원비(淑昌院妃)였으나, 1308년 충렬왕 사후 충선왕비가 되어 숙비(淑妃)로 호칭이 바뀌었다. 숙비 김씨는 몽골군과 함께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1218년 몽골과 형제맹약을 주도한 명신 김취려(金就礪)의 증손녀였다. 명문가 출신인 김씨는 처음 진사 최문(崔文)과 결혼했다. 사별 후 충선왕의 주선으로 충렬왕 비가 되었다. 충렬왕의 사후 충선왕은 김씨를 간통하고 다시 비로 삼았다. 이로 인해 세간의 여론은 좋지 않았다.

   “충선왕이 부왕(*충렬왕)의 비인 숙창원비를 간통하자 우탁(禹倬)이 흰옷에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서 거적자리를 깔고 비난의 상소를 올렸다. 근신들이 놀라서 왕 앞에서 감히 상소문을 읽지 못했다. 우탁은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그대들은 근신으로 국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은 죄를 알고 있는가?’ 하고 꾸짖었다. 국왕 좌우의 신하들은 두려워하고, 충선왕도 부끄러워했다.” (『고려사』 권109 우탁 열전)

   우탁은 고려에 성리학을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김씨를 간통한 충선왕에게 목숨을 걸고 간언했던 것이다. 숙비 김씨는 미모가 출중한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때문인지 세 번이나 결혼을 했고, 두 국왕의 사후 모두 그녀의 집에 빈소를 차릴 정도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다. 충선왕은 재위 5년간 줄곧 정비(正妃)인 원나라 출신의 계국대장공주와 원나라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국내의 중요한 정사에 숙비 김씨가 깊숙이 관여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충선왕의 비가 된 후 세간의 비난이 쏟아져 그의 마음 한 구석엔 번뇌와 우수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불화는 어떻게 제작했을까? 불화는 비단 바탕 위에 광물질로 만든 안료를 사용해 만들어진다. 불화의 주 색깔인 붉은 색과 녹색·청색은 각각 주사(朱紗)·석록(石綠)·석청(石靑)이라는 광물성 안료를 재료로 한 것이다. 해당 원석을 갈아 가루를 만든 후, 맑은 아교물을 부어 여러 차례 걸러서 입자를 크기별로 분류한다. 큰 입자의 안료는 짙은 색, 작은 입자의 안료는 옅은 색을 내는 데 사용된다. 아교는 동물 가죽 등에서 추출한 천연 접착제인데, 이를 물에 녹여 적당히 농도를 조절한 후 여기에 안료가루를 개어 사용한다. 불화 채색 방법은 바탕천의 뒷면에 색을 칠하는 배채(背彩)법 혹은 복채伏彩)법이다. 뒷면에 색을 칠해 안료가 앞으로 배어 나오게 한 후 앞면에서 채색하여 음영을 보강하는 기법이다. 이는 빛깔을 보다 선명하게 하면서 변색을 지연시키며, 두텁게 칠해진 안료가 바탕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채색 때는 얼룩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배채법이 고려불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오랫동안 보존해준 중요한 기법이다(국립중앙박물관, ‘고려불화의 제작기법’, 2010년).

물론 고려불화는 고려 후기에 처음 제작되지 않았다. 고려 중기인 의종(1146∼1170년 재위) 때도 불화를 제작해 사용했다.

   “(영의는) 국왕(*의종)에게, ‘만일 장수하시려면 반드시 천제석(天帝釋)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섬겨야 합니다’라고 했다. 국왕은 두 부처의 그림(*불화)을 많이 그려 중앙과 지방 사원에 보내 국왕의 장수를 위한 법회를 열게 했다.” (『고려사』 권123 영의(榮儀) 열전)

   이 기록은 이미 고려 중기에 불화가 성행했다는 사실과 함께 불화의 용도를 알려준다. 불교에서 신앙의 상징은 불상(佛像)과 불화다. 불화는 불상이 표현하지 못하는 신앙의 세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해주는 기능이 있다. 불상 제작엔 많은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다. 서원의 내용에 알맞은 불상을 안치하기 힘들 경우엔 불화를 신앙 대상으로 삼았다. 불화는 불상 제작에 따른 비용과 노력을 절감해주는 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고려와 원나라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가운데 새로운 지배층 권문세족 사이에서 개인의 원당을 세우는 게 유행하면서 불상 대신 불화를 제작했던 것이다. 고려 후기에 불화의 수요가 많아진 것은 이 때문이다.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1607

출처 : 중앙SUNDAY 기사보도 201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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