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늙어가고 싶다> / 화선지(畵禪智) 조정육
2016. 4. 3. 15:18ㆍ美學 이야기
<이렇게 늙어가고 싶다>
무진당 2007.12.21 23:05
<이렇게 늙어가고 싶다>
“저...죄송한데요. 이 수건 좀 짜 주시겠어요?”
목욕탕에서 나오기 직전. 입구에서 간단하게 물로 헹군 후 곁에서 샤워를 하는 젊은 여자의 목욕 마무리가 끝나기를 기다려
수건을 내밀었다. 수건을 몸에 대고 한 손으로 꾹꾹 눌러봤지만 물이 질질 흐르기는 마찬가지여서 아무래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까 두리번거리다 제일 건장해 보이는 여자를 골랐는데 대답이 너무도 의외였다.
“제가 손이 아파서 못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바라보던 그 여자의 눈빛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삼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긴 머리에 가무잡잡한 피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요란스럽게 몸에 뭔가를 바르고 씻고 또 바르고 씻기를 반복해서
저 정도로 기운이 넘치는 사람이라면 이까짓 수건의 물기를 짜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리라 생각했던 여자.
그런데 똑같이 손이 아파도 수건 짤 능력도 안되면서 뭐하러 목욕탕에 왔느냐는 듯이 그 여자는 나를 쳐다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듣고 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져서 서 있었다.
거절당할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아무리 손이 아프더라도 저렇게 자기 몸을 열심히 닦고 씻는 것을 보면 수건의 물기를 짜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거절당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서 한 손으로 수건의 물을 쥐어짜고 있었다.
그녀는 수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내 곁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몸을 헹구는 중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왼손 쓰는 일이 드물어졌다.
무거운 물건을 들 때나 손바닥을 짚고 일어설 때면 손바닥이 송곳으로 찌른 듯 아팠다.
그러나 그러려니 했다.
조금 있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
항상 아픈 것도 아니고 특별나게 표시가 나는 것도 아니라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바닥에 비누를 묻혀서 문지르는데 팥알만한 것이 손에 걸렸다.
그래서 손바닥을 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문지르면 또 뭔가가 걸렸다. 문지르면 만져지고 보면 보이지 않는 뭔가를 느끼며 며칠이 지났을까.
왼손 바닥이 부풀어 올랐다. 손바닥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손금과 가운뎃손가락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무슨 일을 하세요?”
병원에 갔을 때 나를 빤히 쳐다보던 의사의 첫마디였다.
손을 보아하니 막노동하는 사람같지는 않아 보였는지 그렇게 물었다.
대답을 기대하며 한 질문이 아니라 직업상 습관적으로 물어본 듯
의사는 그 자리에서 주사바늘로 손바닥을 찔러 물을 빼냈다.
지금 여기 꽈리처럼 부풀어 있는 곳에 물이 차서 빼냈으니
다시 붙을 때까지 가급적이면 손을 쓰지 마세요. 여기 꼭 누르세요.
손바닥에 밴드를 붙여주며 무신경하게 말하는 의사를 보며 나는 밀린 원고를 생각했다.
손가락을 계속 쓰면 어떻게 되나요?
그럼 다시 물을 빼내야 되고 그래도 안되면 수술해서 이 부분을 도려내야지요.
그 날 이후 나는 오른손으로만 타자를 쳤다.
두 손을 쓰다 한 손만으로 타자를 치려니 생각의 속도를 따라주지 못하는 오른손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왼손은 그저 조연에 불과한 줄 알았는데 왼손이 오른손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타자를 칠 때도 당근을 자를 때도 왼손이 필요했다.
하물며 단추 하나를 잠글 때도 두 손이 다 필요했다.
한손으로 가방을 들고 한손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이제 다시는 왼손을 오른손만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이 드러날 수 있는 것은 왼손의 뒷받침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란 걸 기억하리라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왼손처럼 드러나지 않게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생각했다.
왼손을 자유롭게 쓸 수는 없었지만 워낙 급한 원고는 왼손의 검지손가락을 이용해서 타자를 쳤다.
무를 썰어야 할 때는 팔목으로 누르고 썰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검지손가락이 움직일 수도 없을만큼 저렸다.
어찌됐거나 왼손을 쓰지 못함으로써 더딘 일을 보충하려면 잠을 더 줄이는 수 밖에 없었다.
새 책 교정을 보느라 거의 잠을 못자고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오던 날 밤
집에 와 보니 식구들이 깜짝 놀랬다.
오른쪽 눈이 빨간 잉크를 풀어놓은 듯 흰자위가 온통 붉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버스를 타고 오는데 눈에 무슨 막이 낀 듯 조금 답답하더라니. 그러나 통증은 없었다.
“실핏줄이 터져서 그래요. 당분간 무리하지 말고 무거운 짐을 들거나 고개를 수그리지 말고 충분히 쉬세요.”
그러고 보니 내가 참 많이 내 몸을 혹사시켰구나.
말을 할 수 없는 나의 손과 눈이 나의 욕심에 맞춰주느라 묵묵히 일만 하면서 많이 힘들었겠구나.
이젠 좀 쉬도록 놓아줘야겠다. 그동안 그림 보고 글 쓰느라 고생 참 많았다.
나의 눈과 손가락아.
안과에 다녀 온 사흘 후에 목욕탕에 갔다.
여전히 눈은 붉은 색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색이 점점 갈색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이대로 조심하면 일주일이나 열흘이면 정상이 될 것 같았다.
그동안 나는 손가락을 쓸 수 없다는 것이 불편했지만 그것 때문에 서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물수건을 짜달라는 나의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정말 내가 영원히 손을 못쓰게 되면 이런 수모를 당하며 살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망연해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래도 아까 어떤 할머니가 등을 밀어달라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고 한 손으로 밀어드렸는데...
당신 정말 너무하는군요.
당신도 한 번 아파보세요.
이 작은 거절이 상대방한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지 알거예요.
당신은 영원히 안아플 줄 아세요.
당신은 아직 젊어서 모르겠지만 언젠가 당신의 그 몸도 고장이 날 때가 있을 거예요.
여전히 샤워를 계속하고 있는 그녀 곁에서 수건을 몸에 대고 물기를 짜면서 나는 그렇게 되뇌었다.
그리고 목욕탕 문을 열고 나왔다.
수건은 오른손으로 계속 주물렀지만 여전히 물기가 가득해서 몸을 닦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옆에 학생으로 보이는 듯한 여자가 몸 닦은 수건을 통에 넣고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나는 아까 거절당한 경험도 있고 해서 기대하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는 말로 그녀에게 부탁했다.
“저...죄송한데요. 이 수건 좀 짜 주시겠어요?”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던 그녀가
한 팔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나를 보더니 얼른 수건을 받았다.
그리고는 수건의 물기를 두 번 세 번 거듭 짜더니 탈탈 털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또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받게 되는 호의.
자기 복은 자기가 짓는다더니 그 말이 딱 맞구나, 싶었다.
당신은 오늘 내게 베푼 공덕만으로도 평생 행복하실 겁니다.
당신은 아직 젊으니 당신이 살아가면서 지을 공덕이 얼마나 많을 지 모르겠군요.
부디 복을 많이 지어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수건을 주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녀에게 무한한 축복을 보냈다.
그녀가 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고 몸을 닦으며 두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나를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도 정말 나처럼 손이 아팠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며칠이 지나서였다.
상반된 두 여자의 모습이 내게 어떤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역시 며칠 후였다.
그래. 그래. 내가 축복했던 여자나 내가 원망했던 여자나 모두 나의 스승이지.
한 사람은 서운한 모습으로, 또 한사람은 자비스런 모습으로 나타나 내게 말해준 거야.
내가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야 하는 것을.
첫 번째 여자의 거절이 없었다면 두 번째 여자의 자비를 나는 읽어낼 수가 없었을 거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을 테니까.
사소해 보이는 자비라도 받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것인가를 내게 깨우쳐주기 위해 두 사람이 온 거야.
그랬던 거야.
왼손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손이 아팠던 것처럼 그녀들도 그렇게 내게 온 거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내게는 그랬던 거야.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은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없고 나의 인연에 의해 오는 거야.
그런 거야. 그래서 감사하고 감사해야 되는 거야.
이젠 오른손만큼 왼손도 소중하게 생각해야지.
내 가슴을 아프게 했던 사람도
내가 사랑했던 사람만큼 소중하게 생각해야지.
어쨌든 나의 인생안에 들어온 사람이니까.
감사하고 감사해야지...언제까지나...
내게 불친절했던 사람은 원망하고
내게 도움을 준 사람만 축복하는
어린애같은 상태에서 벗어나
똑같이 감사해야지...한결같은 마음으로...
http://blog.daum.net/sixgardn/13677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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