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시리즈-29) ▶일본 가가미진자(경신사) 소장 '고려 수월관음도' ●달처럼 맑고 아름다운 고려불화 ‘수월관음도’~ 나는 오래된 문화재 앞에 서면 가슴이 떨리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천수백년 의연히 서있는 석탑이라든가, 고색 찬란한 사찰의 건물 이라든가, 그리고 그 안에 장엄된 퇴색한 단청 같은 것이라든가, 절벽 면에 새겨진 마애불 같은 것을 보면 그 안에 묻어있는 가늠할 수 없는 장구한 시간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 앞에 떨곤 한다.
어떻게 그 모질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용케 견뎌 왔는지를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뭉클해지고 그들 앞에서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미미하고 하찮은 존재인지를 절감하게 된다. 두려움의 존재, 오늘은 또 다른 존재 앞에 내가 서 있다. 바로 ‘고려불화’ 앞이다. 불화도 그냥 불화가 아니라 그 유명한 일본 가가미진자(鏡神社)에 있는 ‘고려수월관음도’이다. 비록 사진 앞 이긴 하지만 2009년 5월에 통도사에 특별 전시된 그 수월관음도를 봤을 때의 그 감동을 다시 느껴 본다.
나는 10년 넘게 박물관에 다닌 덕분에 ‘불교회화(불화)‘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불화에 대한 학문적 소양이나 도식적 설명은 아직도 미숙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전문 교수들의 강의를 수 없이 듣고 책을 봤어도 그 때뿐, 조금 지나면 모두 까먹고 막상 그림을 보고 설명 하라면 손을 들고 만다.
나의 불화 감상 성향은 대략 아래 3가지 유형의 욕구로 채워진다.
첫째로 불화에 담겨진 복잡한 그림들을 하나, 하나 해석하고 싶은 욕구이고, 둘째로는 불화를 불교적인 사상과 신앙심으로 바라보고 싶은 욕구이고, 그리고 세 번째는 순수한 예술(미술)적 감성으로 바라보는 욕구이다. 이 세 가지 욕구만 내 양식(良識) 속에 채워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이러한 나의 성향은 비단 불화만이 아니고 모든 불교문화재는 동일하다.
이중 첫 번째 불화에 대한 도식적 분별력은 노력으로 배워서 알 수 있겠지만 두 번째, 세 번째의 사상이나 신앙심 그리고 예술적인 감성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안목은 지금으로서는 거의 불가능 하니 남의 쓴 책이나 읽어 욕구를 채우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을 듯 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이니 나의 문화재의 욕구도 너무 과하여 오히려 모르니 만 못할 것이니 조금 아는 체를 여기서 멈추고자 한다.
2009년 5월쯤인가, 벌써 3년이 다 된 듯 하다.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고려수월관음도’ 특별 전시회 가 있었다. 수월관음도는 일본의 가가미진자(鏡神士)에 있는 것을 잠시 빌려 온 것이었다. 그때 나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아 그 앞에서 수 없이 절을 올리고 있는 불자들 보다 더 간절한 마음이 되어 불화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겐 불화를 볼 줄 아는 식견과 안목, 그리고 신앙심마저 부족했으니 그저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전시회 스님의 안내로 그 자리에서 간단한 예불을 올린 다음 수월관음도에 대하여 스님이 자세히 설명을 해 주셨지만 그 설명을 담을 그릇이 내겐 너무 작았다. 그날 같이 간 친구에게 난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저 불화 말이야, 일본X들이 약탈해 간 것이니 다시 돌려주지 않으면 어떨까?”
아마도 나뿐이 아니고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고려불화는 이제까지 모두 160여점이 발견됐는데 대부분 일본에 가 있고, 미국, 유럽 등지에 10여점이 있다한다. 그 중 ‘고려수월관음도’는 세계 미술계가 인정하는 최고의 걸작 미술품으로 모두 40여 점이 전해지는데 역시 대부분 일본에 가 있다고 하니 참으로 원통하고 분하다. 그러나 우리 것을 지키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으니 지금은 일본에 가 있더라도 안전하고도 온전히 보존되기를 기원 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일본이 납작 엎드려 모두 반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가가미진자 소장 ‘수월관음도’ 보다 더 멋진 불화가 수두룩하고, 그 중 센소지(淺草寺) 소장 ‘물방울관음도’는 백미 중에 백미라 하는데 우연곡절 끝에 지난 2010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에 특별 전시된 바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보지 못했으니 이 또한 불화에 대한 내 시각이 좁은 탓이 아니겠는가 싶으니 배우지 못한 것이 원망스럽기 그지없다.
그림은 붓으로 그린다. 작가의 영감에 의해서 하얀 여백에 채색해 나간다. 그리고 한 점의 그림이 탄생한다. 그러나 불화는 다른 부류의 그림과는 확연히 다르다.
불화에 대한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불화를 조금 주의 깊게 보면 가슴 벅차게 느끼게 되는 점이 있다. 바로 숨 막히게 하는 전율이다. 극한적인 인내심과 시간, 그리고 고통이 고스란히 그림 속에 담겨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깊고도 간절한 신앙심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불화는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장엄하다는 생각에 앞서 너무나 섬세하여 어쩌면 사람이 손으로 그린 것이 아닌 신의 손으로 그린 듯 신비하게 느껴진다. 여백이 한 곳도 없이 화폭 가득히 그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복잡함 안에 여백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머리카락 같은 세필(細筆) 하나로 주체의 피부의 털 한 오라기까지, 옷자락 비단의 한 올, 한 올까지 그려 넣었으니 불화 한 점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 절감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찌 시간과 정성뿐이겠는가. 그림을 완성 했을 때는 시각과 청각도 한계점에 다다랐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림의 발원자나 화공의 정신이야 말로 신앙과 도(道)의 정점에 다다라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야만 한 점의 완벽한 불화를 그려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림을 그린 시간 보다는 잘 그리게 해달라는 기도 시간이 더 길었을지도 모른다. 고려 불화를 그리는 데는 특정한 염료와 배채법(背彩法)이란 특별한 채색 기법을 이용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수 백 년이 지나도 채색의 선명도가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이리라.
불화는 고려시대에 절정에 이르다가 조선 전기 시대를 지나면서 첨차 쇠퇴기를 맞는다. 근대의 불화는 화학염료를 가미하여 몇 십 년은 고사하고 몇 년도 못가서 퇴색 되여 빛을 잃는다고 한다. 지키지 못한 우리의 전통 불화를 잃은 아픔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전통 기법과 정신을 살려 고려불화를 재현하는 노력이 필요할 듯 하다.
>미지로의 생각
■註釋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란? 수월관음이란 명칭은 '화엄경' 보다락가산의 유지(幽池)위에 비치는 달처럼 맑고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는 보살이라는 뜻으로 '화엄경'의 마지막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의 안내를 받아 보리심을 발하고 선지식을 찾아 마지막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53선지식을 만나 구법의 순례를 하게 된다. 이 가운데 바다 위 온갖 보배로 된 청정한 곳으로 꽃과 과수들이 우거지고 맑은 샘과 시냇물이 흐르는 보다락가산에 상주하고 계신 관음보살을 만난다는 장면을 묘사해내고 있는 것이 수월관음도이다.
▸일본 가가미진자(경신사) 수월관음도는
1310년 고려 충열왕 시대 궁정화가 8명이 공동 제작한 뒤 1391년 경신사로 전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약탈 해 간 것인지 그 전래된 출처를 알 수 없다. 지금은 일부가 훼손돼 세로 4m30cm, 가로 2m54cm 크기로 남아 있다.
▸일본 경신사 ‘고려수월관음도’ 복원 완성
현존하는 고려불화 가운데 가장 크고 기법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일본 경신사의 ‘수월관음도’가 2011.11월 복원돼 오늘 일반에 공개됐다. 경북 영천 은해사는 성보박물관에서 주지 돈관스님 등 300여 명의 사부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서경대학교 박미례 교수가 3년 만에 복원을 끝낸 수월관음도 점안식과 친견 대법회를 가진바 있다. 아래 사진이 바로 복원된 ‘수월관음도’이다. 사진은 인터넷에서 켑쳐 한 것이다.
서경대 박미례 교수(51·불교미술)가 ‘국민들에게 수월관음도의 존재가치를 널리 알리고 사라져가는 고려시대 비단 그림의 전통을 살리기 위해’ 3년에 걸쳐 제작했다. 2009년 1월부터 복원품 제작에 나서 2011년 초 원래 크기대로 완성했다.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이기도 한 박 교수는 “국민들이 원본을 쉽게 대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며 “전통불화의 아름다움과 제작기법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