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스승과 벗으로 삼게 - 삽교 안석경

2016. 4. 10. 04:55잡주머니



       127. 자연을 스승과 벗으로 삼게 -삽교 안석경 | 고전산문

낙민 | 조회 14 |추천 0 | 2016.03.10. 03:08


 

   학문을 할 때 사우(師友)와 떨어져 있어도 학문이 거칠어지지 않고 굳건히 대성하는 사람이 있다. 뜻을 굳게 정하여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산천과 목석이 모두 나의 사우이기 때문이다. 만약 뜻이 정해지지 않아 스스로 학문을 내쳐버린다면 앞에 엄한 스승이 있고 곁에 곧은 벗이 있다한들 아무리 작은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겠는가?

 

   마천(瑪川)이휘백(李輝伯)은 자못 학문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인데 나에게 외가 동생뻘이 된다. 올해 나는 그를 만나러 갔다. 그의 집은 강가에 있는데 맑은 강물과 흰 모래가 시원하게 10여 리 뻗어 있다. 강가에는 산이 있고 산은 높고 깊어 우뚝 자란 나무들이 푸르다. 산의 겉면은 모두 바위인데, 그 모습이 강물에 어리비친다. 정원의 대나무는 수천 그루쯤 된다. 마을 주위에는 큰 소나무가 푸르고 울창하다. 휘백은 책을 읽으며 그 사이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는 기뻐하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말하였다.

 

“휘백의 집은 참 좋소.”

 

휘백이 말하였다.

 

“내 집은 좋은 곳이 아니오. 가까운 주변에 어울려 노닐 사우가 없어 종일 외롭게 지내고 본받을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분발할 수 있겠소? 내 집은 좋은 곳이 아니오. 나는 어릴 적에 아버지를 잃어 집이 가난하고 형제도 없소. 다행히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는데, 아침저녁 문안인사를 거르고 봉양을 그르치면서까지 스승을 따르고 벗을 찾으려고 멀리 갈 수가 없소. 나는 고단하고 무식하여 학문을 이루지 못할 것 같소.”

 

내가 말하였다.

 

“어찌 그렇겠소? 이것은 휘백에게 달린 일이요, 휘백의 뜻에 달린 일일세. 뜻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스승을 모신 자리에서 가르침을 받더라도 바람으로 바위를 씻는 격이요, 벗과 강학을 하더라도 기름이 물 위에 뜬 격이니, 오랫동안 스승을 따르고 부지런히 벗을 찾더라도 스승과 벗의 도움을 바라지 못할 걸세. 뜻이 정해졌다면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스승과 벗의 도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네. 물에서 스승 삼을 점은 맑게 흘러 멀리까지 이르는 것이요, 산에서 스승 삼을 점은 육중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일세. 문식이 빛나고 바탕이 확고한 점은 바위가 스승이고, 마음이 비고 절조가 분명한 점은 대나무가 스승이며, 늠름하여 남에게 잘 보이려 들지 않고 우뚝하여 시세에 따라 변하지 않는 점은 소나무가 스승이라네. 묵묵한 가운데 오고 가는 것이 있어 성품과 기질이 절로 통할 것이니, 어찌 번거롭게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학문을 이루면 또 벗으로 삼을 수 있을 테니 벗으로 삼을 방도가 없다고 근심할지언정 벗이 없다고 근심할 필요는 없고 스승으로 삼을 방도가 없다고 근심할지언정 스승이 없다고 근심할 필요는 없네. 그러니 휘백은 먼저 뜻을 세우도록 하시게.”

 

숭정(崇禎) 기원후 두 번째 계해년(1743), 흥주후인(興州後人) 안석경(安錫儆)이 이 내용을 휘백의 정사(精舍)에 적는다.

 

學而離師友。能不荒墮。凝然大有成者。盖以志則一定。而左之右之。山川木石。無非吾師友也。若無定志。自外於學。則雖前有嚴師。旁有直友。抑何受毫縷之益歟。瑪川李輝伯。頗亦有志於學者也。於吾爲外弟。是歲吾往見之。其居有江。江澄沙白朗然十餘里。江上有山。山崇深雲木作翠。山面皆石。色映江爛焉。園竹可數千挺。環村多大松蒼聳。輝伯讀書。方靜坐於其間。見余喜。與余從容語。余曰。善哉輝伯之居也。輝伯曰。吾居之非善也。旁近無師友從遊。終日倀倀。靡所瞻式。吾何以自振。吾居之非善也。吾早孤家貧。無兄弟。幸奉老母以居。曠定省違供養而從師求友。顧有不可以遠者。吾恐單陋蕪棄。學之不底於成也。余曰。何爲其然也。是在輝伯。是在輝伯之志。志之未定耶。師席之授。如風灑石。朋榻之講。如油泛水。雖久於從師。勤於求友。無望乎師友之益矣。志之已定耶。不待遠求。而師友之益在此矣。水於師。其淸通而遠至也。山於師。其崇重而不遷也。文輝而質確。石則師也。心虛而節明。竹則師也。凜乎不媚於人。卓乎不變於時。松則師也。默默之中。有來有去。性氣相通。何煩言語。學之旣成。又可友也。患無以友之。不患於無友矣。患無以師之。不患於無師矣。是故願輝伯立志。崇禎紀元後再癸亥。興州後人安錫儆以此書輝伯之精舍。

- 안석경, <마천정사기(瑪川精舍記)>《삽교집(霅橋集》

 



        ▶ 백천교(百川橋) 중 부분_겸재 정선 / 조선후기

- 안석경, 〈마천정사기(瑪川精舍記)〉《삽교집(霅橋集》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33집《삽교집(霅橋集)》권4, 기(記), 〈마천정사기(瑪川精舍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세상이 온통 실용적인 학문에만 쏠려 있다. 좋은 기술자를 만나 그 비법을 전수받아 단숨에 대가의 반열에 서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는 학문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스승은 만나기도 쉽지 않고, 설사 만난다 하더라도 마음을 다스리는 학문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지닌다면 삼라만상, 우수마발(牛溲馬勃)이 모두 스승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옛사람의 공부방식이다.

 

 

   삽교(霅橋) 안석경(安錫儆, 1718-1774)은 은자다. 세상에 나아가 벼슬하는 데 뜻을 두지 않았다. 이 글을 지은 것은 26세 때인 1743년이다. 안석경은 충주 가흥(可興)에서 태어나 부친을 따라 서울을 오가다가 이 해 원주의 흥원(興原)으로 내려와 살았다. 이 무렵 외가 쪽으로 아우가 되는 이영봉(李榮鳳, 자는 輝伯)이 양주의 한강가에 있는 마천정사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를 위하여 이 글을 지어 준 것이다.

 

안석경은 젊은 시절에는 산사를 오가며 홀로 독서를 하였다. 그는 뛰어난 스승이나 벗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만 굳으면 자연이 스승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안석경은 자연이야말로 훌륭한 스승과 벗이라 하였다. 높이 솟은 산에서 흔들리지 않는 몸가짐을 배우고, 흐르는 물에서 맑고 원대한 정신을 배우라 하였다. 바위를 보면 찬란한 문식과 단단한 바탕을 배우고, 대나무를 보면 텅 빈 마음과 분명한 절조를 배우며 소나무를 보면 늠름하고 우뚝한 기상을 배우라 하였다. 이처럼 자연을 스승과 벗으로 삼을 방도를 생각하여야지, 스승과 벗이 없다고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선비는 자연을 스승과 벗으로 삼았다. 김시습(金時習)<사심이 없음(邪無思)>이라는 글에서 자신이 학문을 닦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산에 오르면 그 높음을 배우려 하고, 물가에 임하면 그 맑음을 배우려 하며, 바위에 앉으면 그 굳음을 배우려 하고, 소나무를 보면 그 곧음을 배우려 하며, 달빛을 대하면 그 밝음을 배우려 한다.”

 

김시습의 공부 방식과 안석경의 공부 방식이 비슷하지 않은가? 




cafe.daum.net/jangdalsoo/dLRp/127   장달수






삽교집(霅橋集)-안석경(安錫儆)| 20世 안석경(安錫儆)

바른정보(안정의) | 조회 6 |추천 0 | 2010.01.11. 11:40


삽교집(霅橋集)-안석경(安錫儆)

 

형태서지
권수제 霅橋集
판심제 霅橋集
간종 활자본(목활자)
간행년 1906年刊
권책 7권 4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2.0×15.8(㎝)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古3428-261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33


저자
성명 안석경(安錫儆)
생년 1718년(숙종 44)
몰년 1774년(영조 50)
 叔華
 霅橋, 完陽, 卓異山人
본관 順興
특기사항 林配垕, 閔百順, 成大中과 교유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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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申
 

기사전거 : 墓碣銘(裵縉煥 撰, 松窩集 卷6), 韓國系行譜, 順興安氏族譜 등에 의함
행력
왕력서기간지연호연령기사
숙종441718무술康熙5717월 3일, 忠州 可興에서 태어나다.
영조31727정미雍正510가을, 세자익위사의 하급직을 전전하던 부친을 따라 서울에서 지내다 낙향하는 부친을 따라 다시금 가흥으로 돌아가다.
영조41728무신雍正6116월, 李麟佐의 난을 피해 堤川의 陶村으로 거처를 옮기다.
영조131737정사乾隆220공조 좌랑으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서울로 가다.
영조141738무오乾隆321洪川 縣監으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가다.
영조161740경신乾隆523원주 興原으로 이거하다.
영조191743계해乾隆826白雲洞書院을 배알하다.
영조201744갑자乾隆927부인 潘南朴氏를 곡하고 제문을 짓다. ○ 堤川 縣監으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제천으로 가다. ○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 ○ 가을, 鄭公述과 義林湖를 유람하다.
영조211745을축乾隆1028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
영조221746병인乾隆1129〈夢中到燕記〉를 짓다.
영조251749기사乾隆1432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 ○ 龍門山을 유람하다.
영조271751신미乾隆1634華山 白雲臺에 오르다. ○ 가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
영조281752임신乾隆1735여름, 雉岳山 大乘菴에서 독서하다. ○ 과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는 聖藏山에서 독서하다. ○ 12월 26일, 원주 興原에서 부친 安重觀이 졸하다.
영조311755을해乾隆20386월, 아우 安錫佁를 곡하고 제문을 짓다.
영조321756병자乾隆2139九月山을 유람하다.
영조331757정축乾隆2240원주 蓀谷 安山里에 우거하다.
영조341758무인乾隆2341朴淵을 유람하다.
영조361760경진乾隆2543五峯書院에서 孔子의 畫像을 배알하다.
영조371761신사乾隆2644여름, 경포대, 설악산 등 관동지방을 유람하다.
영조411765을유乾隆30488월, 閔百順과 금강산을 유람하다. ○ 江原道 橫城 霅橋에 우거하다.
영조421766병술乾隆3149閔百順, 成大中, 林配垕 등과 易을 강론하고, 함께 배를 타고 翠屛山 등을 周遊하며 시를 수창하다.
영조431767정해乾隆3250遺逸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영조451769기축乾隆3452遲齋 金焌을 찾아뵙다.
~~~~~~~이즈음 삽교만록을 쓰다.
영조501774갑오乾隆39577월, 민백순을 곡하다. ○ 8월 18일, 가흥에서 졸하다.
고종431906병오光武10- 문집이 간행되다.

기사전거 : 墓碣銘(裵縉煥 撰, 松窩集 卷6), 筆寫本霅橋集, 順興安氏族譜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한문학사에서 조선후기에 성립된 새로운 문학 장르인 한문단편의 작가로 주목받고 있는 인물인데, 관직을 지내지 않았고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묘도문자도 적어 행력이 불분명한 점이 많다.
1786년 從弟 安錫任이 쓴 別集序文(필사본삽교집 하권)에 의하면, 저자의 저술이 적지 않으므로 부친의 유고(悔窩集)를 四集으로 나누었던 것처럼 본고도 전집, 후집, 속집으로 나누고 漫錄, 藝學錄, 識聞은 별집으로 편차하여 훗날 점차 간행 도모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저자의 유고가 간행을 준비할 정도의 수준으로 정미하게 편차되지는 않은 듯하다. 당시 정리본의 일부로 보이는 필사본 「삽교집」이 일본 東洋文庫에 소장되어 있어 棲碧外史海外蒐佚本으로 아세아문화사에서 상, 중, 하 3권으로 영인되었다. 이 가운데 중권은 간행본을 영인한 것이고, 하권은 漫錄과 藝學錄을 수록한 별집이며, 상권은 불분권 5책으로 각 책마다 문체에 관계없이 저작 연대순으로 1739년~1770년까지의 文 188편이 실려 있다. 상권에는 詩가 한 편도 실려 있지 않고, 제목마다 點, 圈, 後라는 표시가 있어 이것으로 원집, 속집, 후집으로 나눌 작품을 구분한 듯한데 이 중 49편의 文이 간행본에 실려 있다. 또 題名도 ‘霅橋集’, ‘霅橋遺集’, ‘霅橋文叢’ 등 여러 가지이며, 1757년~1762년의 글은 책5의 금강산유람일기인 〈東行記〉를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아, 이 필사본은 安錫任이 정리한 초본의 일부라고 생각된다. 하권은 漫錄 6권 5책과 藝學錄 3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의 自序에 의하면 부친을 모시고 지내며 들은 것을 후에 기억하여 쓴 것이라 하니, 일종의 箚錄이라고 할 수 있다. 安錫任은 서문에서 藝學錄은 가장 정비되고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후 100여 년이 지나도록 초본의 상태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던 유고는 1904년 부친의 「悔窩集」 발간을 계기로 다시 편찬에 들어가게 된다. 이에 저자의 5세손인 安鍾轍이 裵縉煥에게 부탁하여 묘갈명을 받고, 오랫동안 유고의 초본을 검토해 온 저자의 외현손 李種元이 刪定을 맡아 7권 4책으로 편차하였으며, 이를 종5대손인 安鍾學과 安鍾弼이 1906년 목활자로 간행한 것이다.《초간본》 현재 이 초간본은 규장각(古3428-261)과 장서각(4-6111)에 소장되어 있다. 金鶴鎭의 서문에 따르면 저자의 유문이 13책, 漫錄이 7책 있었는데, 漫錄의 일부가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였으며, 李種元의 발문에서는 家藏草本이 12책이고 그 외 漫錄, 藝學錄, 識聞 등이 몇 책 되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7권 4책으로 산정하였다고 하였다. 책수의 차이는 약간 있으나 12, 3책의 유문을 바탕으로 詩文 약간 편만을 골라 문집으로 편차하여 애초 安錫任이 의도했던 바와는 달라진 것인데, 부친의 「悔窩集」도 安鍾學의 識에서는 原集, 後集, 續集, 散筆로 발간하려고 했으나 원집 발간에 그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권말의 安鍾弼이 쓴 識에서는 詩 345수, 文 106편을 7권 4책으로 편차했다고 하였는데 간행본은 詩 351수, 文 98편으로 차이가 나며, 연도도 ‘崇禎甲申後三百二十三年丙午’(1966)라고 잘못 쓰여져 있다. 본집은 권별로 실린 목록과 실제 내용간에도 약간의 차이가 나는데, 예를 들면 권4의 목록은 〈擬作梅岡園記〉, 〈赤嵒書堂記〉로 시작되나 본문에서 이 두 편은 권3의 마지막에 실려 있다. 이러한 착오는 간행과정에서 가감이 있었거나 편집이 精緻하지 못했던 탓인 듯하다.
본서의 저본은 1906년에 활자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이 중 卷7의 第1ㆍ3板은 卷次가 6으로 誤記되어 있다.

기사전거 : 序(金鶴鎭 撰), 跋(李種元, 安鍾弼 撰), 筆寫本霅橋集, 漢文短篇 作家의 硏究(李明學 著, 李朝後期 漢文學의 再照明)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7권 4책으로, 맨 앞에 金鶴鎭이 쓴 서문이 있고, 목록은 권7을 제외하고 모두 권별로 머리에 실려 있다.
권1~2는 詩이다. 모두 296題의 시가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권1에는 1736년에 舅氏에게 보내는 시를 필두로 하여, 부친인 安重觀과 함께 三淵 金昌翕에게 수학한 岳下先生에게 올리는 시, 과거에 낙방하고 돌아가면서 읊은 시, 九月山 일대를 유람하면서 읊은 시 등이 있다. 권2에는 宋時烈의 후손 宋能相의 尊王攘夷 정신을 기린 〈悼宋士能先生〉이 눈에 띄며, 그 외 오죽헌과 경포대, 낙산사 등 강릉 일대와 총석정, 해금강 등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 霅橋의 생활을 읊은 시들이 있다. 序文에 의하면 저자의 시 중 “滿地塵埃高鳥見 渾天雨露野花知”(次寄成士執)라든가 “楊柳微風春酒滴 杏花纖月曉江高”(安昌點易軒曉起偶占) 같은 시구는 인구에 회자되었다고 한다. 함께 시를 수창한 사람들로는 丁範祖(法正), 鄭弘祖(士述), 朴敦性(士欽), 丹室 閔百順(順之), 鄭履煥(身之), 林配垕(厚而), 成大中(士執) 등이 있다.
권3~4는 序와 記이다. 序(21)는 친구 朴仲明, 默者 權實甫 등을 전송하는 送序, 申君敬의 「遠遊篇」을 비롯해 「萍翁遺稿」, 「桂塘遺藁」 등 타인의 문집에 써 준 서문, 친구 趙光楫과 권실보의 장남을 위해 字를 지어 주고 쓴 字序, 스승 遲齋 金焌 등을 위해 쓴 壽序 등이 있다. 그 밖에 〈霅橋漫錄序〉가 있는데, 삽교만록은 저자가 만년에 橫城 霅橋에 은거할 당시 완성된 것으로, 손수 농사를 짓는 여가에 사람들과 한 얘기를 특별한 次第 없이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단순히 삽교에 있을 때 들은 얘기만이 아니라, 저자가 부친을 따라 원주, 제천, 홍천 등지를 전전해 살면서 도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서민들의 생활상을 몸소 느끼고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부각시킨 내용이 한문단편이란 형식으로 담겨져 있기도 하다. 그러한 의식이 서문에서는, “大하고 精한 것을 가려뽑지 않고 大小 精粗를 모두 되는 대로 기록한 것은 大小 精粗 할 것 없이 모두가 사람이 알고 행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여 오히려 小와 粗를 부각시킨 데서 드러난다 하겠다. 記(26) 가운데 金鍾厚(伯高)의 樂生軒, 朴孝伯의 赤嵒書堂에 지은 기문 등 20편은 타인의 軒, 亭, 堂에 지어 준 것이고, 〈龍村記〉는 驪州 林伯厚가 龍村으로 自號한 데 대해 써 준 것이며, 〈記林白湖語〉는 豪傑之士인 林悌란 인물이 임종시에 남긴 말을 기록한 것이며, 나머지는 〈擬修皇明…〉, 〈夢中到燕記〉, 〈南漢山城…〉, 〈熙政堂…〉 등 4편은 모두 북벌의식을 고취한 내용으로, 北征時 선봉으로 自期했던 저자의 강개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권5~6 앞부분은 跋, 說, 論, 頌, 贊, 銘, 書이다. 跋에는 朴思伯이 소장한 李白 詩의 書後와 文忠公 閔鎭遠의 奏議에 대한 書後 등 모두 7편이 있고, 說에는 心의 중요성과 귀함을 논한 〈明德說〉과 雉岳山에서 독서할 당시 禪僧과 함께 약초를 캐면서 깨우친 바를 쓴 〈山中雜說〉 2편이 있다. 論(5)에서는 역사적인 인물인 王猛, 房玄齡, 諸葛孔明 등을 논하였고, 頌에는 〈建文皇帝賢臣頌〉 1편이 있다. 贊에는 魯의 두 儒生, 嚴光, 司馬徽, 龐德公 등 漢 나라의 節操 있는 인물들을 논한 〈漢之高士贊〉, 諸葛孔明, 安期生 등 중국 인물에 대한 贊 등 5편이 실려 있고, 銘에는 1743년 중양절에 벼루를 重陽硯이라 명명하며 지은 〈重陽硯銘〉, 선조를 잊지 말 것을 경계하며 朴敦性에게 지어준 〈念齋銘〉 2편이 실려 있다. 편지는 모두 6편으로 丁範祖, 鄭弘祖, 閔百順, 李明夏, 韓器夫에게 보낸 것이다.
권6 뒷부분~7은 傳, 行狀, 祭文, 誄詞, 雜著, 對策이다. 傳은 高城에서 興原으로 온 金保業을 立傳한 〈小高城傳〉 등 3편이고, 行狀(1)은 蓀谷에서 은거해 살며 부친 安重觀과 교유하던 雙溪 朴樞에 대한 것이다. 祭文(13)은 尤庵에 대한 遷葬祭文 및 李洸, 申君敬 등과 일가에 대한 것이고, 誄詞(4)는 朴景心, 鄭應五 등에 대한 것이며, 雜著로는 역시 大明天下를 복구해야 한다는 비분강개한 내용을 담은 〈論華陽洞萬東祠作碑事〉 1편이 있다. 권7은 1편만 실려 있기 때문인지 목록이 따로 없으며, 卷首題도 ‘霅橋遺集’으로 되어 있다. 〈擬大庭對策〉은 당시 국정 전반에 걸친 제반 문제의 시정책으로 93板에 달하는 長文이다.
맨 뒤에는 외현손 李種元이 1904년에 쓴 발문과 종5대손 安鍾弼이 1906년에 쓴 識가 실려 있다.

 

 

 

題嚴子陵釣魚圖

 

故人天下定。我有桐江魚。釣石堪終古。雲臺眇太虛。幡然莘野幤。倐爾渭川車。獨往君何意。今時古不如。

 

 삽교집(霅橋集) > 霅橋集卷一 > >

 

 

 

寄璨淵上人五臺山中 戊午

石深易定水。雲邃自高松。雨後東溟月。亭亭第幾峰。

삽교집(霅橋集) > 霅橋集卷一 > >

 

 

 

塵勞 庚申

丈夫不可久塵勞。安得山齋萬丈高。月滿中天雲滿地。經書一卷儼靑袍

삽교집(霅橋集) > 霅橋集卷一 > >

 

 

 

 

順興白雲洞書院。謁文成公晦軒先生廟

穆穆吾祖文成公。排邪扶道正大東。小白山邃竹溪長。廟食千秋棟宇崇。童孫齊遬遠來趍。一路循溪向山通。德業卓朗天地間。氣像澄嚴松栢中。始以何者示童孫。苦旱甘雨澤遍蒙。更以何者示童孫。光風霽日開眞衷。一雨一霽無非敎。童孫再拜正發曚。釰斫燕雲非先務。筆參馬杜亦何功。欲學吾祖學晦翁。戰戰兢兢大英雄。

삽교집(霅橋集) > 霅橋集卷一 > >

 


cafe.daum.net/ahnjustice/Ob5Z/7   순흥안씨 찬성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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