띄어쓰기를 하지 않았으니 한 번 끊어보시앞. <行狀略> / 張崏 先生治易書詩春秋之學窮意言象數之藴明皇帝王霸之道著書十餘萬言研精極思三十年 觀天地之消長推日月之盈縮 考隂陽之度數 察剛柔之形體 故經之以元紀之以會參之以運終之以世又又斷自唐虞迄于五代本諸天道質以人事興廢治亂靡所不載其辭約其義廣其書著其旨隠嗚呼美矣至矣天下之能事畢矣先生少事北海李之才挺之挺之聞道於汶陽穆脩伯長伯長以上雖有其傳未之詳也先生既受其學則又游於河汾之曲以至淮海之濱涉於濟汶達于梁宋茍有達者必訪以道無常師焉廼退居共城廬于百原之上大覃思於易經夜不設寢日不再食三年而學以大成大名王豫天悅博達之士尤長于易聞先生之篤志愛而欲教之既與之語三日得所未聞始大驚服卒捨其學而學焉北面而尊師之衛人乃知先生之為有道也年三十餘來遊于洛以為洛邑天下之中可以觀四方之士乃定居焉先生清而不激和而不流遇人無貴賤賢不肖一接以誠長者事之少者友之善者與之不善者矜之故洛人久而益尊信之四方之學者與士大夫之過洛者莫不慕其風而造其廬先生之教人必隨其才分之髙下不驟語而強益之或聞其言若不適其意先生亦不屑也故來者多而從者少見之者衆而知之者尚寡及接之久察其所處無不中于理叩其所有愈久而愈新則皆心悅而誠服先生未嘗有求于人或饋之以禮者亦不茍辭洛人為買宅丞相富公為買園以居之仁宗嘉祐中詔舉遺逸留守王公拱辰以先生應詔授將作監主簿今上熙寧之初復求逸士御史中丞呂公誨龍圖閣直學士祖公無擇與今丞相吳公充又以先生為言補潁川團練推官皆三辭不獲而後従命然卒稱疾不之官先生年六十始為隠者之服曰病且老矣不復能従事矣隆寒盛暑閉門不出曰非退者之宜也其于書無所不讀諸子百家之學皆究其本原而釋老技術之說一無所惑其志晚尤喜為詩平易而造于理有擊壤集二十巻自為之序熙寧十年春得疾踰百日氣益耗而神益明矣七月癸丑啓手足于天津之南道徳坊之第初先生葬其父于伊闗神隂原今従其兆父以明經教授鄉里及先生之長退老于家先生雖貧養之終身致其樂弟睦事先生甚謹飲食起居必身臨之惟恐不得其志葢如先生之事其父母也不幸早亡
【元會運世】<원회운세> 一世는 30년 / 一運은 12世 [30 X 12= 360년] / 一會는 30운 [360 X 30 = 10800년 / 一元 = 10800 X 12 = 129600년] *즉 129600년 만에 한 세상이 끝나고 다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고 한다. 【帝極】<제극>【皇極】<황극>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중정(中正)의 도(道). 제왕(帝王)이 국가(國家)를 다스리는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道). 또, 사방의 만민(萬民)의 범칙(範則)으로 하기 위하여 제왕이 정한 대도(大道). 극(極)은 지극(至極). / 하늘. 상천(上天). / 황위(皇位). 임금의 자리. 【皇極殿】<황극전> 중국 황제의 전각.
【皇極經世書】<황극경세서> 소강절의 주 저작은 <황극경세서>와 <이천격양집>이다. 전자는 철학서이고 후자는 시집이다. 황극(皇極)은 삼황이라는 한자문화권의 본래 모습을 형성했던 문화적 영웅들의 가르침, 그러므로 가장 존귀하고 궁극적인 표준이라는 의미이고 경세(經世)는 천하를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이 책은 내편과 외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내편은 소강절이 직접 지은 것이고 후편은 문인들이 기록한 어록들이다. 그런데 아쉽게 이 책의 일치된 판본이 없다. 남겨진 내용들이 조금씩 다르거나 어느 곳은 많고 적은 차이가 있다.
주된 내용은 주역을 토대로 하고 있는데, 주역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역이 성립하는 이유를 해명하고 있다. 주역의 핵심은 64괘인데 이괘가 생겨나는 이유를 가일배법(加一倍法)이라고 하는, 즉, 밑이 2이고 공비가 2인 수열을 토대로 주역이 생겨났다고 한다. 가일배법이 인위적이 아니고 자연적인 과정이며 마음의 법칙이라고 부르면서, 마음과 사물이 도라고 하는 질서를 따르고 있음을 주장한다. 지금의 주역을 보면 하도와 낙서를 먼저 제시하고, 다음으로 복희팔괘와 문왕팔괘를 싣고 있는데, 이 두 가지 팔괘의 배열은 먼 옛날부터 전해진 것이 아니고 소강절이 주역을 해석하고 있는 틀이다. 실제 우리가 생각하는 주역에 대한 선입견은 모두 이 사람이 제시한 것이다. 소강절 이전과 이후를 중심으로 주역의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 선천역과 후천역이 출발된 것도 소강절부터이다.
소강절은 수학에 대해서 밝았는데, 한자문화권의 수학은 서양의 수학과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소강절의 수학은 수의 추상성보다는 수의 상징성에 주목을 해서, 수의 변화패턴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래서 그 수를 가지고 우주의 변화를 설명한다. 잘 알려진 것은 원회운세(元會運世)라는 수의 패턴인데, 1원은 129600년으로 환산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신종교에서 가지고 있는 우주론의 이치론이기도 하다. 소강절은 이 수를 이용해서 미래의 변화의 패턴을 추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앞날을 잘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앞날을 알았는지 알 수 있는 문헌적 자료가 거의 없다. 매화역수니 하는 것은 소강절이 지은 것이라기보다는 소강절의 명성과 그가 제정한 수학을 응용해 원대나 명대에 그의 이름을 빌어 지어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으며, 소강절이 미래를 그런 식으로 알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소강절은 임종시에 세상에서 말하는 운명은 모르지만, 천명은 공부를 해서 알고 있다고 했다. 미래를 알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대부분 사적인 이기심에 근본하기 때문에, 술수에 빠지기 쉽다는 경고이다. 술수로 운명을 알면 그것 때문에 인생이 꼬이고 마는 것이다.
소강절은 우리나라의 훈민정음의 언어철학적 기초에 큰 영향을 주었다. 소강절은 아버지 소고의 학문을 이어받아, 당시 성운학(지금말로 언어학, 음운학)에 밝았다. 실제 이 소(邵)씨 부자로부터 중국의 음운학이 본궤도에 올랐다고 말할 수도 있다. 소강절은 매우 독창적인 인물이었다. 철학적인 면에서 그의 시집은 중국문학의 소위 철학시(哲學詩)의 시조가 되었으며, 언어학 등등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학풍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런데 소강절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갈라진다. 유가의 입장에서 그는 도가적 성향이 농후한 인물로 평가되고, 도가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도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술수학의 분야에서 그는 최고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신유학 즉, 주자성리학을 통해서 소강절을 이해했지만, 화담 서경덕은 소강절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소강절의 철학사상을 직접 연구한 것들이 눈에 띠인다. 주로 우주론 분야이고, 근대 우주론이 수입될 때 경합할 수 있는 이론 구실을 볼 수가 있다.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총 12권은 매우 난해한 책이다. 특히 내편보다는 외편이 더욱 그렇다. 소강절이 제시한 선천역학은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현대과학과 더불어 융통의 길이 열리기를 바란다.
【邵雍】<소옹> [1011-1077] 자는 요부(堯夫), 시(諡)는 강절(康節). 범양(范陽) 출신이다. 소옹의 집은 대대로 은덕(隱德)을 본지로 삼아 벼슬하지 않았다. 그도 몇 번인가는 소명을 받았지만 끝내 관도(官途)에 나아가지 않았다. *天津은 소옹이 공부하며 살던 고장.
<사상> 학계를 보면 진단(陳搏) ― 충방 ― 목수(穆脩) ― 이지재(李之才) ― 邵雍으로 되어 있다. 학조(學祖)인 진단이 송초의 도가였기 때문에 그의 학문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관물편(觀物篇)〉을 위시하여 그 저서를 세밀히 보면 도가적 논리보다도 오히려 《역(易)》의 논리에 기초를 둔 특색있는 선천심학(先天心學)이라고 하겠다. 그에 의하면 현상계(現象界)의 구조는 결국 음양(陰陽)의 대대(對待)요, 그와 같이 되어 있는 궁극의 자기 원인은 1기(一氣)이며, 천지의 ‘중(中)’이며 1동1정(一動一靜)의 ‘간(間)’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간이나 중은 바로 사람의 마음의 작용 그것이기 때문에 천지인(天地人) 3자가 이 세계구조의 전체를 나타내는 상응체계(相應體系)이다. 현상에 상즉(相卽)하는 현상 그 자체의 자기 원인이나 나(我)속에 있다. 나의 마음의 작용 그 자체는 즉 세계 구조의 궁극적인 유일 자(者)인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작용이라는 것이다. <저서> 〈관물편〉, 〈어초문답(漁樵問答)〉,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선천도(先天圖)〉, 〈황극경세(皇極經世)〉 등이 있다. 【五代十國】<오대십국> 唐이 망하고 宋이 일어나기 전, 907년에서 960년에 걸친 약 반세기 동안 黃河 유역의 中原 지방에는 後粱. 後唐. 後晉. 後漢. 後周의 五代가 교체했다. / 中原 이외의 지역에는 吳. 南唐. 吳越. 閩. 楚. 荊南. 前蜀. 後蜀. 南漢. 北漢(東漢)이 902년에서 979년[北漢이 망]에 걸친 약 70여 년간 열 개의 나라가 割據 竝存하고 있었다. 이를 十國이라고 한다. 【李之才】<이지재> 북송의 道家 쪽의 철학자. 자가 挺之. 穆修를 사사, 圖書 象數의 변화에 통달하였다. 【穆脩】【穆修】<목수> 북송 사람. 李之才의 스승. 자가 伯長. 고문에 밝았다 【必訪以道】<필방이도> 언제나 도의 문제를 가지고 찾아가다. 【百原】<백원> 다른 본에는 百源, 혹은 百泉으로도 나온다. *邵雍은 삼십 세 전에는 共城에서 살았으며, 蘇門百源[蘇門山百源之上]에서 독서했다고 하였다. 【大覃思】<대담사> ....에 대하여 크게 고심하다. *自是大覃思於周易 이로부터 주역만 자나깨나 생각하니. 【大名王豫天悅】<대명왕예천열> 大名의 王豫 天悅. 【王豫】<왕예> 邵雍의 제자. 자가 悅之. 또는 天悅. 大名 사람. 瑰偉博達의 士로 특히 易에 정통하였다. 그가 소옹의 篤志를 소문 듣고 그를 가르치려고 찾아가 대화를 하였는데, 300일 만에 그가 도리어 소옹의 생각에 습복되었다. <宋元學案> 【長者事之】<장자사지> [이하 같은 구조의 문장]. 이 글의 주체는 소옹이다. “소옹은 어른들을 섬기고, 어린이들을 우애롭게 대하고, 착한 자와는 함께하고, 착하지 못한 자에 대해서는 긍휼히 여기었으므로.....” ◉長者事之에서 之는 長者를 의미하는 대명사. 事長者의 구문을 音數 조절 등의 문제로 목적어인 長者가 앞으로 나오고 대신 목적어 자리엔 之가 들어간 형태. 목적어를 따로 빼어 之 뒤에 오게 하는 경우도 있다. 예) 樹之以桑. 【不苟辭】<불구사> 구차스럽게 거절하지도 않았다. *辭 : 말하다. / 헤어지다. / 거절하다. 【爲買宅】<위매택> [그를] 위하여 집을 사주다. *爲 : ...을 하다. / 위하다. / 때문에 【詔擧】<조거> 천자가 조서를 내려 천거하다. *이에 응하는 것이 應擧이다. 言補 【爲言補】<위언보> 그를 위해 ....에 보임되도록 건의하다. 【三辭不獲】<삼사불획> 세 번을 거절했으나 [당신 뜻대로 하자라는 답을] 얻지 못하다. 【擊壤集】<격양집> 邵雍의 시집인 <伊川擊壤集>의 준말. 【啓手足】<계수족> 曾子가 죽음에 임하여 자식들에게 “啓予手 啓予足...”하였다. → 啓手足은 임종, 또는 죽음의 의미. 【天津】<천진> 지명. 소옹이 살며 공부하던 곳. / 은하수. *天津은 당나라의 명필 顔眞卿이 잡혀 죽었던 곳이기도 하고, 근세의 天津條約의 곳이기도 한 유명한 도시. 그리고 소옹이 살던 곳이기도 하고 邵雍의 “聞杜鵑聲”의 곳이기도 하다. *北上天.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다음 가는 중국 제3의 도시이다. 중앙 톈진(직할시의 도심)은 중앙 베이징의 남동쪽으로 약 96㎞, 황해의 보하이 만[渤海灣]으로부터 약 56㎞ 내륙에 자리 잡고 있다.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마찬가지로 국무원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다. ▴톈진은 원나라(1279~1368) 때부터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상하이 다음 가는 중국 제2의 공업 중심지이며, 화북 지방의 첫째 가는 항구이다. 톈진은 19세기 유럽인 무역상 집단의 출현 훨씬 이전부터 대도시중심지로 유명했다. 바다와 인접해 있고, 베이징의 상업적 관문으로서의 역할은 민족적으로 다양하고 상업적으로 혁신적인 주민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聞杜鵑聲】<문두견성> 가장 먼저 王安石을 비난한 인물은 邵雍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英宗 治平 年間에 이미 洛陽의 天津橋를 산보하다가 杜鵑이 울음 소리를 듣고 王安石의 등장을 예견하였다고 한다 [康節先公 - 治平間 與客散步天津橋上 聞杜鵑聲 慘然不樂 客問其故 則曰 ‘洛陽舊無杜鵑 今始至 有所主‘ 客曰 ‘何也‘ 康節先公曰 ‘不三五年 上用南士爲相 多引南人 專務變更 天下自此多事矣‘ - 至熙寧初 其言乃驗 異哉] 邵伯溫(邵雍의 子)의 <邵氏見聞錄> 【德坊】<덕방> 邵雍이 임종한 天津 南道의 한 구역. 坊은 고대 중국의 도성 행정구획에서 기원한 수도 행정구획의 하나. ▴고대 중국의 수도는 4각형의 도성 안에 궁성을 기점으로 남북과 동서로 대로를 내어 도시를 십자로 구획했다. 여기에 다시 많은 소로를 뚫어 도시를 바둑판처럼 구획했는데, 이렇게 형성된 4각형 구역 하나하나를 방이라고 했다. 진나라에서는 이를 '리'라고 했으나 진나라부터 당나라 사이에 방으로 바뀌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당나라의 장안성, 발해의 상경 용천부, 일본의 헤이조쿄[平城京]가 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수도도 이런 형태였을 것으로 보이나 '리'를 혼용한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