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절의 <行狀略>(136면-139면) 外

2016. 4. 19. 15:01잡주머니



       소강절의 <行狀略>(136면-139면) *내주 예정분입니다| 자유게시판

德操堂 | 조회 22 |추천 0 | 2015.12.05. 15:45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으니 한 번 끊어보시앞.

 

                   <行狀略> / 張崏

 

   先生治易書詩春秋之學窮意言象數之藴明皇帝王霸之道著書十餘萬言研精極思三十年 觀天地之消長推日月之盈縮 考隂陽之度數 察剛柔之形體 故經之以元紀之以會參之以運終之以世又又斷自唐虞迄于五代本諸天道質以人事興廢治亂靡所不載其辭約其義廣其書著其旨隠嗚呼美矣至矣天下之能事畢矣先生少事北海李之才挺之挺之聞道於汶陽穆脩伯長伯長以上雖有其傳未之詳也先生既受其學則又游於河汾之曲以至淮海之濱涉於濟汶達于梁宋茍有達者必訪以道無常師焉廼退居共城廬于百原之上大覃思於易經夜不設寢日不再食三年而學以大成大名王豫天悅博達之士尤長于易聞先生之篤志愛而欲教之既與之語三日得所未聞始大驚服卒捨其學而學焉北面而尊師之衛人乃知先生之為有道也年三十餘來遊于洛以為洛邑天下之中可以觀四方之士乃定居焉先生清而不激和而不流遇人無貴賤賢不肖一接以誠長者事之少者友之善者與之不善者矜之故洛人久而益尊信之四方之學者與士大夫之過洛者莫不慕其風而造其廬先生之教人必隨其才分之髙下不驟語而強益之或聞其言若不適其意先生亦不屑也故來者多而從者少見之者衆而知之者尚寡及接之久察其所處無不中于理叩其所有愈久而愈新則皆心悅而誠服先生未嘗有求于人或饋之以禮者亦不茍辭洛人為買宅丞相富公為買園以居之仁宗嘉祐中詔舉遺逸留守王公拱辰以先生應詔授將作監主簿今上熙寧之初復求逸士御史中丞呂公誨龍圖閣直學士祖公無擇與今丞相吳公充又以先生為言補潁川團練推官皆三辭不獲而後従命然卒稱疾不之官先生年六十始為隠者之服曰病且老矣不復能従事矣隆寒盛暑閉門不出曰非退者之宜也其于書無所不讀諸子百家之學皆究其本原而釋老技術之說一無所惑其志晚尤喜為詩平易而造于理有擊壤集二十巻自為之序熙寧十年春得疾踰百日氣益耗而神益明矣七月癸丑啓手足于天津之南道徳坊之第初先生葬其父于伊闗神隂原今従其兆父以明經教授鄉里及先生之長退老于家先生雖貧養之終身致其樂弟睦事先生甚謹飲食起居必身臨之惟恐不得其志葢如先生之事其父母也不幸早亡


【元會運世】<원회운세> 一世는 30년 / 一運은 12世 [30 X 12= 360년] / 一會는 30운 [360 X 30 = 10800년 / 一元 = 10800 X 12 = 129600년] *즉 129600년 만에 한 세상이 끝나고 다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고 한다.

【帝極】<제극>【皇極】<황극>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중정(中正)의 도(道). 제왕(帝王)이 국가(國家)를 다스리는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道). 또, 사방의 만민(萬民)의 범칙(範則)으로 하기 위하여 제왕이 정한 대도(大道). 극(極)은 지극(至極).  / 하늘. 상천(上天).  / 황위(皇位). 임금의 자리. 【皇極殿】<황극전> 중국 황제의 전각.


【皇極經世書】<황극경세서> 소강절의 주 저작은 <황극경세서><이천격양집>이다. 전자는 철학서이고 후자는 시집이다. 황극(皇極)은 삼황이라는 한자문화권의 본래 모습을 형성했던 문화적 영웅들의 가르침, 그러므로 가장 존귀하고 궁극적인 표준이라는 의미이고 경세(經世)는 천하를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이 책은 내편과 외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내편은 소강절이 직접 지은 것이고 후편은 문인들이 기록한 어록들이다. 그런데 아쉽게 이 책의 일치된 판본이 없다. 남겨진 내용들이 조금씩 다르거나 어느 곳은 많고 적은 차이가 있다.


   주된 내용은 주역을 토대로 하고 있는데, 주역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역이 성립하는 이유를 해명하고 있다. 주역의 핵심은 64괘인데 이괘가 생겨나는 이유를 가일배법(加一倍法)이라고 하는, 즉, 밑이 2이고 공비가 2인 수열을 토대로 주역이 생겨났다고 한다. 가일배법이 인위적이 아니고 자연적인 과정이며 마음의 법칙이라고 부르면서, 마음과 사물이 도라고 하는 질서를 따르고 있음을 주장한다.

 지금의 주역을 보면 하도와 낙서를 먼저 제시하고, 다음으로 복희팔괘문왕팔괘를 싣고 있는데, 이 두 가지 팔괘의 배열은 먼 옛날부터 전해진 것이 아니고 소강절이 주역을 해석하고 있는 틀이다. 실제 우리가 생각하는 주역에 대한 선입견은 모두 이 사람이 제시한 것이다. 소강절 이전과 이후를 중심으로 주역의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 선천역과 후천역이 출발된 것도 소강절부터이다.


   소강절은 수학에 대해서 밝았는데, 한자문화권의 수학은 서양의 수학과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소강절의 수학은 수의 추상성보다는 수의 상징성에 주목을 해서, 수의 변화패턴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래서 그 수를 가지고 우주의 변화를 설명한다. 잘 알려진 것은 원회운세(元會運世)라는 수의 패턴인데, 1원은 129600년으로 환산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신종교에서 가지고 있는 우주론의 이치론이기도 하다. 

소강절은 이 수를 이용해서 미래의 변화의 패턴을 추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앞날을 잘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앞날을 알았는지 알 수 있는 문헌적 자료가 거의 없다. 매화역수니 하는 것은 소강절이 지은 것이라기보다는 소강절의 명성과 그가 제정한 수학을 응용해 원대나 명대에 그의 이름을 빌어 지어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으며, 소강절이 미래를 그런 식으로 알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소강절은 임종시에 세상에서 말하는 운명은 모르지만, 천명은 공부를 해서 알고 있다고 했다. 미래를 알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대부분 사적인 이기심에 근본하기 때문에, 술수에 빠지기 쉽다는 경고이다. 술수로 운명을 알면 그것 때문에 인생이 꼬이고 마는 것이다.


   소강절은 우리나라의 훈민정음의 언어철학적 기초에 큰 영향을 주었다. 소강절은 아버지 소고의 학문을 이어받아, 당시 성운학(지금말로 언어학, 음운학)에 밝았다. 실제 이 소(邵)씨 부자로부터 중국의 음운학이 본궤도에 올랐다고 말할 수도 있다. 

소강절은 매우 독창적인 인물이었다. 철학적인 면에서 그의 시집은 중국문학의 소위 철학시(哲學詩) 시조가 되었으며,  언어학 등등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학풍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런데 소강절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갈라진다. 유가의 입장에서 그는 도가적 성향이 농후한 인물로 평가되고, 도가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도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술수학의 분야에서 그는 최고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신유학 즉, 주자성리학을 통해서 소강절을 이해했지만, 화담 서경덕은 소강절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소강절의 철학사상을 직접 연구한 것들이 눈에 띠인다. 주로 우주론 분야이고, 근대 우주론이 수입될 때 경합할 수 있는 이론 구실을 볼 수가 있다.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총 12권은 매우 난해한 책이다. 특히 내편보다는 외편이 더욱 그렇다. 소강절이 제시한 선천역학은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현대과학과 더불어 융통의 길이 열리기를 바란다.


【邵雍】<소옹> [1011-1077] 자는 요부(堯夫), 시(諡)는 강절(康節). 범양(范陽) 출신이다. 소옹의 집은 대대로 은덕(隱德)을 본지로 삼아 벼슬하지 않았다. 그도 몇 번인가는 소명을 받았지만 끝내 관도(官途)에 나아가지 않았다. *天津은 소옹이 공부하며 살던 고장.


<사상>

   학계를 보면 진단(陳搏) ― 충방 ― 목수(穆脩) ― 이지재(李之才) ― 邵雍으로 되어 있다. 학조(學祖)인 진단이 송초의 도가였기 때문에 그의 학문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관물편(觀物篇)〉을 위시하여 그 저서를 세밀히 보면 도가적 논리보다도 오히려 《역(易)》의 논리에 기초를 둔 특색있는 선천심학(先天心學)이라고 하겠다. 그에 의하면 현상계(現象界)의 구조는 결국 음양(陰陽)의 대대(對待)요, 그와 같이 되어 있는 궁극의 자기 원인은 1기(一氣)이며, 천지의 ‘중(中)’이며 1동1정(一動一靜)의 ‘간(間)’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간이나 중은 바로 사람의 마음의 작용 그것이기 때문에 천지인(天地人) 3자가 이 세계구조의 전체를 나타내는 상응체계(相應體系)이다. 현상에 상즉(相卽)하는 현상 그 자체의 자기 원인이나 나(我)속에 있다. 나의 마음의 작용 그 자체는 즉 세계 구조의 궁극적인 유일 자(者)인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작용이라는 것이다.

 

<저서>

〈관물편〉, 〈어초문답(漁樵問答)〉,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선천도(先天圖)〉, 〈황극경세(皇極經世)〉 등이 있다.

【五代十國】<오대십국>  唐이 망하고 宋이 일어나기 전, 907년에서 960년에 걸친 약 반세기 동안 黃河 유역의 中原 지방에는 後粱. 後唐. 後晉. 後漢. 後周五代가 교체했다. / 中原 이외의 지역에는 吳. 南唐. 吳越. 閩. 楚. 荊南. 前蜀. 後蜀. 南漢. 北漢(東漢)이 902년에서 979년[北漢이 망]에 걸친 약 70여 년간 열 개의 나라가 割據 竝存하고 있었다. 이를 十國이라고 한다.

【李之才】<이지재> 북송의 道家 쪽의 철학자. 자가 挺之. 穆修를 사사, 圖書 象數의 변화에 통달하였다.

【穆脩】【穆修】<목수> 북송 사람. 李之才의 스승. 자가 伯長. 고문에 밝았다

【必訪以道】<필방이도> 언제나 도의 문제를 가지고 찾아가다.

【百原】<백원> 다른 본에는 百源, 혹은 百泉으로도 나온다. *邵雍은 삼십 세 전에는 共城에서 살았으며, 蘇門百源[蘇門山百源之上]에서 독서했다고 하였다.

【大覃思】<대담사> ....에 대하여 크게 고심하다. *自是大覃思於周易 이로부터 주역만 자나깨나 생각하니.

【大名王豫天悅】<대명왕예천열> 大名의 王豫 天悅.

【王豫】<왕예> 邵雍의 제자. 자가 悅之. 또는 天悅. 大名 사람. 瑰偉博達의 士로 특히 易에 정통하였다. 그가 소옹의 篤志를 소문 듣고 그를 가르치려고 찾아가 대화를 하였는데, 300일 만에 그가 도리어 소옹의 생각에 습복되었다. <宋元學案>

【長者事之】<장자사지> [이하 같은 구조의 문장]. 이 글의 주체는 소옹이다. “소옹은 어른들을 섬기고, 어린이들을 우애롭게 대하고, 착한 자와는 함께하고, 착하지 못한 자에 대해서는 긍휼히 여기었으므로.....” ◉長者事之에서 之는 長者를 의미하는 대명사. 事長者의 구문을 音數 조절 등의 문제로 목적어인 長者가 앞으로 나오고 대신 목적어 자리엔 之가 들어간 형태. 목적어를 따로 빼어 之 뒤에 오게 하는 경우도 있다. 예) 樹之以桑.

【不苟辭】<불구사> 구차스럽게 거절하지도 않았다. *辭 : 말하다. / 헤어지다. / 거절하다.

【爲買宅】<위매택> [그를] 위하여 집을 사주다. *爲 : ...을 하다. / 위하다. / 때문에

【詔擧】<조거> 천자가 조서를 내려 천거하다. *이에 응하는 것이 應擧이다. 言補

【爲言補】<위언보> 그를 위해 ....에 보임되도록 건의하다.

【三辭不獲】<삼사불획> 세 번을 거절했으나 [당신 뜻대로 하자라는 답을] 얻지 못하다.

【擊壤集】<격양집> 邵雍의 시집인 <伊川擊壤集>의 준말.

【啓手足】<계수족> 曾子가 죽음에 임하여 자식들에게 “啓予手 啓予足...”하였다. → 啓手足은 임종, 또는 죽음의 의미.

【天津】<천진> 지명. 소옹이 살며 공부하던 곳. / 은하수. *天津은 당나라의 명필 顔眞卿이 잡혀 죽었던 곳이기도 하고, 근세의 天津條約의 곳이기도 한 유명한 도시. 그리고 소옹이 살던 곳이기도 하고 邵雍의 “聞杜鵑聲”의 곳이기도 하다. *北上天.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다음 가는 중국 제3의 도시이다. 중앙 톈진(직할시의 도심)은 중앙 베이징의 남동쪽으로 약 96㎞, 황해의 보하이 만[渤海灣]으로부터 약 56㎞ 내륙에 자리 잡고 있다.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마찬가지로 국무원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다.

▴톈진은 원나라(1279~1368) 때부터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상하이 다음 가는 중국 제2의 공업 중심지이며, 화북 지방의 첫째 가는 항구이다. 톈진은 19세기 유럽인 무역상 집단의 출현 훨씬 이전부터 대도시중심지로 유명했다. 바다와 인접해 있고, 베이징의 상업적 관문으로서의 역할은 민족적으로 다양하고 상업적으로 혁신적인 주민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聞杜鵑聲】<문두견성>  가장 먼저 王安石을 비난한 인물은 邵雍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英宗 治平 年間에 이미 洛陽의 天津橋를 산보하다가 杜鵑이 울음 소리를 듣고 王安石의 등장을 예견하였다고 한다 [康節先公 - 治平間 與客散步天津橋上 聞杜鵑聲 慘然不樂 客問其故 則曰 ‘洛陽舊無杜鵑 今始至 有所主‘ 客曰 ‘何也‘ 康節先公曰 ‘不三五年 上用南士爲相 多引南人 專務變更 天下自此多事矣‘ - 至熙寧初 其言乃驗 異哉] 邵伯溫(邵雍의 子)의 <邵氏見聞錄>

【德坊】<덕방> 邵雍이 임종한 天津 南道의 한 구역. 坊은 고대 중국의 도성 행정구획에서 기원한 수도 행정구획의 하나. ▴고대 중국의 수도는 4각형의 도성 안에 궁성을 기점으로 남북과 동서로 대로를 내어 도시를 십자로 구획했다. 여기에 다시 많은 소로를 뚫어 도시를 바둑판처럼 구획했는데, 이렇게 형성된 4각형 구역 하나하나를 방이라고 했다. 진나라에서는 이를 '리'라고 했으나 진나라부터 당나라 사이에 방으로 바뀌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당나라의 장안성, 발해의 상경 용천부, 일본의 헤이조쿄[平城京]가 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수도도 이런 형태였을 것으로 보이나 '리'를 혼용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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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소강절       

소개글

소강절에 대해서 쓴 레포트 입니다.

목차

1. 소옹이라는 사람은..
2. 역법(우주론)
3. 관물
4. 음양, 체성
5. 인생관

본문내용

■ 소옹(邵雍, 1011~1077)

   호 안락선생(安樂先生) 자가 요부(堯夫)이고 시호가 강절(康節), 소강절(邵 康節)이라 불릴 때도 많다. 허난[河南]에서 살았으며, 주염계(周濂溪)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이지재(李之才)로부터 도서·천문(天文)·역수(易數)를 배워 인종(仁宗)의 가우연간(嘉祐年間:1056∼1063)에는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로 추대받았으나 사양하고, 일생을 뤄양[洛陽]에 숨어 살았다.


   사마 광(司馬光) 등의 구법당(舊法黨)과 친교하면서 시정(市井)의 학자로서 평생을 마쳤다. 남송(南宋)의 주자(朱子)는 주염계,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과 함께 강절을 도학(道學)의 중심인물로 간주하였으며, 강절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었다. 즉, 역(易)이 음과 양의 2원(二元)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음에 대하여, 그는 음(陰)·양(陽)·강(剛)·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하고, 4의 배수(倍數)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이 철학은 독일의 G.W.F.라이프니츠의 이치논리(二値論理)에 힌트를 주었다고 전한다. 그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62편을 저작하여 천지간 모든 현상의 전개를 수리로서 해석하고 그 장래를 예시하였으며, 또 《관물내외편(觀物內外編)》 2편에서 허심(虛心), 내성(內省)의 도덕수양법을 설명하였다. 또한 자유로운 시체(詩體)의 시집(詩集)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20권)의 작품이 있고, 《어초문답(漁樵問答)》(1권) 등이 있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성품이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며, 매우 가난하게 생활하였다 하나 본인은 초탈하여 편안하게 즐겼다하니 당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잘해 누구나 좋아했었다고 한다.



report.kyobobook.co.kr/view/420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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漁樵問答圖 硏究
Study on the Painting on "Fisherman and Woodcutter in Conversation"

owned by Gansong Art Museum

漁樵問答圖 硏究

  
   본 논문은 조선중기 인물화를 대표하는 간송미술관소장 <어초문답도>를 畵題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인물화의 양식적 맥락에서 고찰한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문학작품 속에서 어부와 함께 초부를 등장시켜 자연에서의 은일 염원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부와 초부는 물외한객으로서 세속을 멀리하고 산수자연에 유유자적하며 한거하는 은일자의 표상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宋代에 이르면 철학자와 문인들은 고상한 대화의 주체를 이전부터 隱者의 상징으로 알려진 漁夫와 樵夫라는 인물에 대입시킨다. 邵康節의 「漁樵對問」와 蘇軾의「漁樵閒話」 에서 어부와 초부는 철학적 이론을 토론하거나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같은 고담을 나누는 賢者로 등장 한다.

   어초문답류의 저술이 저작되면서 같은 송대로부터 어초문답도가 제작되었다. 중국의 경우 초기에는 텍스트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작가의 주관이 개입되어 여러 유형의 어초문답도가 등장하였다. 시대적 특징으로 말하자면 어초문답의 畵因이 되는 「漁樵對問」이 저술되었던 시기에 가까운 南宋, 元, 明初의 경우는 텍스트를 충실하게 반영하려고 노력한 船上坐磐石式이 많이 그려졌다. 明代에 들어서면서 吳偉派 화가들에 의해서 兩人同行式 유형의 작품이 등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작품은 汪肇의 <어초문답도> 였다. 兩人同行式은 배경은 거의 생략되고 화면 가득하게 인물을 클로즈업하고 두 인물이 걸어가면서 서로 돌아보고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 兩人同行式이 조선시대 초·중기 회화에 유입되어서 조선중기 여러 어초문답도 작품에 전형이 되었다. 淸代에는 이 두 가지 유형에서 보다 확대되어 江畔對坐式, 耕讀式이 새롭게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부터 詩 속에 漁樵가 등장하는데 어부와 초부는 탈세속의 인간으로 평화를 찾아 은둔한 평범한 인간을 지칭하였다. 조선초기에 이르러 송대 철학서 소강절의 저서가 유입되었고, 자연스럽게 그 장면을 그린 어초문답도가 조선 선비들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유사한 형식의 어초문답류의 글들이 조선시대 저작되어, 어초문답 전통의 형성과 유행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조선초기에 수용된 어초문답을 繪畵化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화가들은 중국 明代 吳偉派 화가들의 어초문답도인 兩人同行式 유형을 채택하였다. 대표작으로 간송미술관소장 李明郁 〈어초문답도>, 傳 洪得龜 <어초문답도>,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작가미상의 <어초문답도>등이 있다.

   조선중기 어초문답도의 양식적 특징은 매우 복합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간송미술관소장 <어초문답도>를 중심으로 보다 구체적인 인물화 분석을 시도한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첫째, 구도에 있어서는, 이 작품은 화면의 핵심지점에 인물의 얼굴을 포치한 빈틈없이 짜여진 구도를 보이고 있었다. 서로 약간 비껴선 자세에서 몸의 방향을 달리하여 적당한 거리에서 마주보는 인물의 배치는 기본적으로 인물화의 古式 구성법을 따른 것이다. 이렇게 배경은 간략하게 처리하고 인물의 얼굴을 화면의 정중앙에 두는 짜임새 있는 화면처리는 江夏派 화가들의 고사인물화와 도석인물화에서 보인다.

둘째, 인물의 형체묘사와 얼굴표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어부의 경우 明代 도적 인물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팔과 다리에서 보이는 세련된 화법의 일면을 보이고 있어서 이 작품의 작가가 인체의 해부학적 표현에 대한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明代 도석인물화의 형체묘사를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얼굴 표정의 표현에 있어서 어부와 초부의 하얀 이가 드러난 입에 드리워진 미소는 산수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는 은일자의 삶에 대한 자족이 담겨있다.

셋째, 服裝과 衣紋描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중국 南宋과 元代의 어초문답도의 경우 어부와 초부 모두 문인의 복식이었으나 明代의 어초문답도에서는 보통의 고기잡이와 나무꾼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어초문답도 또한 이러한 복장을 채택하였다. 묘법에 있어서 이 작품은 다양한 묘법의 사용을 보이고 있었다. 세부적으로 살펴본 결과 조선중기 화가 이경윤과 김명국의 인물 묘법의 연장선상에서 元·明代 도석화인물화 묘법에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었지만 각 묘법이 약간의 변형과 재해석의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넷째, 인물화의 채색법에 있어서는, 특히 정밀한 얼굴묘사를 통해 볼 때 어초문답도의 인물들이 초상화를 방불케 할 정도의 수준작임을 알 수 있었다. 초상화를 방불케 하는 실제인물 같이 개성이 강하고 생생한 얼굴묘사와 이지적인 얼굴은 그들이 직업적 '漁父와 樵父'가 아닌 隱逸者로서의 '漁夫와 樵夫'임을 말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朝鮮中期의 인물화로서는 상당히 이질적인 화풍을 보여주는 <어초문답도〉는 작가와 더불어 국적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학계에 알려져 있지 않던 圖印이 해석되어 작가에 대한 의문에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또한 『列聖御製』에 보이는 이명욱 작품에 대한 제화시를 통해 볼 때 그가 이 작품의 우수성에 걸맞을 정도의 기량을 가진 화가임을 알 수 있었다.

   어초문답도는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인물화 화제이며 조선시대 사부대의 隱逸 염원과 동시에 철학적 담의를 내포하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중 간송미술관소장 이명욱의 〈어초문답도〉 는 문헌자료와의 연관성을 가지고 깊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생동감 있는 옷주름, 인체묘사와 더불어 탁월한 안면묘사 등으로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인물화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은 이후 여러 어초문답도류의 작품에 범본이 되었으며, 조선후기 인물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관련자료







중국 전적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대한 변증설 오주연문장전산고 / 고전문집  



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링크 #1    http://sambolove.blog.me/150123407733
제 목   

중국 전적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대한 변증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4 - 경사잡류 2 기타 전적(其他典籍) - 중국 전적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대한 변증설  오주연문장전산고 / 고전문집  

2011.11.07. 06:25

   《황극경세서》는 내편(內篇)ㆍ외편(外篇)을 합하여 9권인데 송(宋) 나라 범양(范陽) 사람 소강절 선생(邵康節先生) 옹(雍)이 저술한 것이다.
자(字)는 요부(堯夫)이며 호는 안락와(安樂窩)인데 아버지는 고(古)이고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송 나라 장뇌(張耒)의 《명도잡지(明道雜志)》에 “혹은 말하기를 ‘소옹의 아버지가 학사(學士) 강인기(江鄰幾)의 집 종을 얻어 옹을 낳았다. 종은 강씨 집에 있던 책 몇 편을 가지고 소씨에게 시집왔는데 옹은 이것을 읽고는 마침내 이에 대한 학문을 알았다.’ 하는데 사실인지 알 수 없다.” 하였다. 어머니가 분만에 임박해서 낭인(郎人)이 옥(玉) 수저로 국 한 그릇을 먹게 하면서 “마땅히 아름다운 아이를 낳을 것이다.” 하였는데, 신해일(辛亥日)에 낳았다.

삼가 상고하건대, 소자(邵子)는 송 나라 영종(英宗)ㆍ신종(神宗) 때 사람으로 뒤에 하남부(河南府) 숭현(嵩縣)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공이 젊었을 때 재주가 뛰어나 웅지(雄志)를 품고 세상에 큰 공업(功業)을 세우려 하였다. 북해(北海) 이지재(李之才)에게 《주역(周易)》을 배워 신묘(神妙)하게 알았으며 황하(黃河)와 분수(汾水)를 건너고 회수(淮水)와 한수(漢水)를 지나 제(齊)ㆍ노(魯)ㆍ송(宋)ㆍ정(鄭)의 옛터에 주류(周流)하였다. 얼마 후 백원(百源)의 위에 집을 지었으며 낙양(洛陽)에 이르러 터를 잡고 살았는데, 집이 가난하여 쑥대로 지붕을 하고 나뭇가지로 엮어서 만든 문이라 바람과 비를 피하지 못하였다.

부필(富弼)ㆍ사마광(司馬光)ㆍ문언박(文彦博) 등 제현(諸賢)들이 친하게 사귀고 존경하였으며 그를 위하여 원택(園宅)을 사주고 거실을 안락와(安樂窩)라 이름하였다. 향(香)을 피우고 편안히 앉아 있으며, 흥(興)이 나면 곧 시를 지어 스스로 읊조렸다. 때로는 조그마한 수레를 타고 마음 내키는대로 가면, 사대부(士大夫)들 집에서는 서로 다투어 맞이하였는데, 며칠씩 묵고 가기도 하였다. 가우(嘉祐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 때에 낙양 유수(洛陽留守) 왕공신(王拱辰)이 추천하여 장작주부(將作主簿)에 임명되었으며, 희령(熙寧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초기에 중승(中丞) 여회(呂誨)가 추천하여 영주 단련추관(穎州團練推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을 칭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천성(天性)이 고매(高邁)하고 덕기(德器)가 순수하였다. 복희 선천(伏羲先天)의 뜻을 넓혀 일을 당하매 능히 미리 알았고 성실로 물건을 대하였으며 사람을 대하여 말할 적에는 반드시 인의(仁義)로 하여 평화롭고 온후(溫厚)하여 규각(圭角)을 나타내지 않았다. 청백하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화하면서도 흘려버리지 않으나 정자(程子) 이(頤)는 매양 크게 찬탄하면서 말하기를 “요부(堯夫)는 안은 성학(聖學), 밖은 왕도(王道)인 학문이다.” 하였다.

정사년에 죽으니 나이 67세였다.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원년에 강절(康節)이라 시호를 내렸으며 함순(淳) 3년에 공자(孔子)의 사당에 종사(從祀)하고 신안백(新安伯)을 봉하였다. 명(明) 나라 가정(嘉靖 세종(世宗)의 연호) 9년에 선유 소자(先儒邵子)로 개칭하였는데 청(淸) 나라에서는 그대로 따랐으며 옹정(雍正 청 세종(淸世宗)의 연호) 2년에 자손들에게 오경박사(五經博士)의 벼슬을 세습(世襲)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숙종(肅宗) 갑오년(1714)에 십철(十哲)에 올렸다.

주자(朱子)의 화상찬(畫像贊)에 “하늘이 특별히 뛰어난 인재를 낳아 영매(英邁)한 것이 세상을 덮었네. 바람을 타고 천둥을 채찍질하면서 끝없이 너른 곳 두루 구경하였네. 손으로는 월굴(月窟)을 더듬고 발로는 천근(天根)을 밟았네. 한가히 세월을 보내며 흠뻑 취하여 세상을 살았네.” 하였다. 저서로는 《황극경세서》ㆍ《관물(觀物)》내(內)ㆍ외(外)편과 《어초문답(漁樵問答)》ㆍ《격양집(擊壤集)》ㆍ《소자전서 (邵子全書)》가 있다.

진 계유(陳繼儒)의 《암서유사(巖棲幽事)》에 “경력(慶曆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 때에 강절이 낙양을 지나다가 산천과 풍속이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여 비로소 이곳에 집을 짓고 살려는 뜻을 두었는데 가우(嘉祐) 7년 왕선휘(王宣徽 왕공신(王拱辰)을 가리킨다.)가 낙양 윤(洛陽尹)에 임명되자 천관사(天官寺) 서쪽, 천진교(天津橋) 남쪽에 있는 오대(五代) 때 절도사(節度使)였던 안심기(安審琦)의 집 옛터에다가 곽숭(郭崇)의 헌 집 재목으로 30간 집을 짓고는 강절을 청하여 이사하여 살게 하였다. 한국공(韓國公) 부필(富弼)은 자기의 문객인 맹약(孟約)을 명하여 집 앞에 있는 동산 하나를 사게 하였는데 여기에는 또 훌륭한 수석과 대나무ㆍ꽃나무가 골고루 갖춰져 있었다.” 하였다.

저자의 성명이 전하지 않는 《비사적록(比事摘錄)》에 “송 나라 소강절이 살았던 천진(天津)은 본래 관청 땅으로서 희령(熙寧) 초년에 법으로 마땅히 불하(拂下)하게 되었는데, 3개월이나 방(榜)을 붙였으나 사람들은 차마 사지 못하였다. 사마 온공(司馬溫公) 등 여러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돈을 모아 이것을 매입(買入)하였다.” 하였다.

선생의 아들 백온(伯溫)은《황극경세》에 대한 주해와《관물(觀物)》의 주해를 지었으며 소백온은 송 나라 낙양 사람으로 벼슬은 전운부사(轉運副使)였으며 저서로는《하남집(河南集)》ㆍ《문견록(聞見錄)》등이 있다. 원 나라 야 초재(耶律楚材)는《황극경세해(皇極經世解)》를 지었으며 초재의 호는 옥천노인(玉泉老人)으로 원 나라 연경 사람이며 벼슬은 승상(丞相)이었는데, 뒤에 광녕왕(廣寧王)을 추봉(追封)하였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로는《담연문집(湛然文集)》과 책력에 대한 학설로 《을미원력(乙未元曆)》ㆍ《회골력(回鶻曆)》등이 세상에 전하여진다. 정선부(鄭善夫)는《경세요담(經世要談)》을 지었으며,원 나라 조세연(趙世延)은 《경세대전(經世大典)》을 지었다.

세연은 원 나라 운중(雲中) 사람으로 벼슬은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였으며 노국공(魯國公)에 봉하여졌다. 이 책 밑에 “미리 이 책을 찬한다.” 하였으니《황극경세》의 유(類)가 아닌 듯하다. 우선 이대로 적어서 원서(原書)의 존판(存板)을 볼 때까지 기다린다.

청 나라 사고전서(四庫全書)에는《황극경세서》를 술수(術數)의 책에 배열하였는데, 이것은 온당하지 않은 듯하다. 명 나라 형천(荊川) 당순지(唐順之)의《패편(稗篇)》에는 이 책을 제가(諸家)에 넣었으며 다시 임둔(壬遁)의 밑에 두었는데 장황(章潢)의《도서편(圖書編)》에는 사마온공(司馬溫公)의《잠허(潛虛)》밑에 배열하였으니 형천이 배열한 것은 아주 틀렸으며 장황의 배열한 것이 마땅하다.

우리나라에는 서화담(徐花潭) 경덕(敬德)이《경세수(經世數)》1편(篇)을 지었으며, 서화담의 자(字)는 가구(可久)이고 호는 화담이며 당성인(唐城人)이다. 소강절의 역학(易學)을 깊이 연구하여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인종(仁宗) 때에 추천되어 관직을 제수하였으며 명종(明宗) 병오년(1546)에 죽으니 나이 58세였다. 선조(宣祖) 때에 벼슬을 증직(贈職)하였다. 신익성(申翊聖)이 명을 받들어《황극경세(皇極經世)》와《동사보편(東史補編)》9권을 지었으며 신익성의 자는 군석(君奭)이고 호는 동준(東准)이며 평산인(平山人)이다.

선조(宣祖) 때에 부마(駙馬)로 동양위(東陽尉)였으며 아버지는 상촌(象村) 흠이다. 홍계희(洪啓禧)가《경세지장(經世指掌)》2권을 지었으며 서 담포(徐澹圃) 명응(命膺)가《황극일원도(皇極一元圖)》2권을 지었다. 나는 참람한 것을 헤아리지 않고 경세기 수원본(原本)ㆍ경세기수내외편 (經世紀數內外篇)ㆍ경세찬도지요주해(經世纂圖指要注解)ㆍ경세일원소장수도해(經世一元消長數圖解)ㆍ경세일원시종수해(經世一元始終數解)ㆍ경세지운약설(經世地運約說)ㆍ경세지행수원(經世地行數原) 등 편(編)을 찬하였다. 나의 저술도 이 사이에 끼우니 참람함을 견딜 수 없다.

송 나라 완구(宛丘) 장뇌(張耒)의《명도잡지(明道雜志)》에 대략《황극경세서》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명도잡지》에 “소 요부옹(邵堯夫雍)은 낙양 사람이다. 내가 사관(史館)에 있을 적에 일찍이 그의 저서를 보았는데,《황극경세론(皇極經世論)》이라 이름하는 것이 수십 권이었다. 읽어보았지만 심히 깨달을 수 없었으며 율력(律曆)과 평(平)ㆍ상(上)ㆍ거(去)ㆍ입(入)의 사성(四聲)에 배합한 것이 있었는데 상고할 수 없었다. 또《주역》의 괘도(卦圖)가 있으나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송 나라 초기에 나온 책이기 때문이다.

사안산(査顔散)은 말하기를 “《황극경세》는 선천방원도(先天方圓圖)에 근본하였다.” 하였다.
그 말에 “강절의 선천 역(先天易)은 상(象)만을 숭상하고 말을 숭상하지 않았다. 관물편(觀物篇)에 소위 율려도(律呂圖)ㆍ성음도(聲音圖)ㆍ팔괘교이위십이신도(八卦交而爲十二辰圖)ㆍ십이신교이위십륙위도(十二辰交而爲十六位圖)ㆍ태극도(太極圖)ㆍ기제음양도(旣濟陰陽圖)ㆍ괘일도(卦一圖)ㆍ이천육백년도(二千六百年圖)가 있는데, 모든 그림에 대한 전주(傳注)에 모두 한 자도 이렇게 된 소이연(所以然)을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무언(無言)의 가르침을 남기려 한 것으로, 마치 복희(伏羲)의 육십사괘(六十四卦)에 애당초 언어(言語)나 문자(文字)가 없었던 것과 같다.

대저 원도(圓圖)는 운행(運行)하는 일을 주장하고 방도(方圖)는 생물(生物)하는 일을 주장하니 운행하는 것은 기(氣)이며 생물하는 것은 질(質)이다. 기는 질이 아니면 붙어 있을 곳이 없고 질은 기가 아니면 어떻게 생물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황극경세》는 천지를 다스리는 것으로서 용(用)이 될 만하다.” 하였다.

장황(章潢)의《도서편(圖書編)》에 “소자(邵子)의《황극경세》연역도설(衍易圖說)에 태양(太陽)ㆍ태음(太陰)ㆍ소양(少陽)ㆍ소음(少陰)은 하늘의 사상(四象)으로 동(動)에 속하고, 소강(少剛)ㆍ소유(少柔)ㆍ태강(太剛)ㆍ태유(太柔)는 땅의 사상으로 정(靜)에 속한다. 그 다음에 일(日)ㆍ월(月)ㆍ성신(星辰)과 수(水)ㆍ화(火)ㆍ토(土)ㆍ석(石)의 유(類)도 모두 이를 인하여 넷으로 나누어 배정하였다. 대개 하늘의 사상은 기(氣)가 되는데 용(用)은 한(寒)ㆍ서(署)ㆍ주(晝)ㆍ야(夜)가 되며, 땅의 사상은 질(質)이 되는데 용은 우(雨)ㆍ풍(風)ㆍ노(露)ㆍ뇌(雷)가 된다.

기(氣)는 동하기 때문에 능히 변하고 질(質)은 정하기 때문에 능히 화(化)한다. 한ㆍ서ㆍ주ㆍ야가 변하면 성(性)ㆍ정(情)ㆍ형(形)ㆍ체(體)가 되며, 우ㆍ풍ㆍ노ㆍ뇌가 화하면 비(飛)ㆍ주(走)ㆍ초(草)ㆍ목(木)이 되니 이는 다 하늘과 땅이 만들어 낸 물건이다. 하늘의 변함으로 말미암아 감(感)하는 것은 이(耳)ㆍ목(目)ㆍ구(口)ㆍ비(鼻)가 되고 땅의 화함으로 말미암아 응(應)하는 것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가 되니, 이는 생물하는 용이다.

기로써 말하면 원(元)ㆍ회(會)ㆍ운(運)ㆍ세(世)는 하늘에 속하고 세(歲)ㆍ월(月)ㆍ일(日)ㆍ신(辰)은 땅에 속하며, 치화(治化)로써 말하면 삼황(三皇)ㆍ오제(五帝)ㆍ삼왕(三王)ㆍ오패(五伯)는 하늘에 속하고《주역(周易)》ㆍ《서경(書經)》ㆍ《시경(詩經)》ㆍ《춘추(春秋)》는 땅에 속한다. 이것이 모두 하늘과 땅의 사상을 인하여 나누어져서 서로서로 교역(交易)하매, 천하의 변화하는 것을 모두 미루어 알 수 있다.” 하였다.

《황극경세》전수도설(全數圖說)에 소백온(邵伯溫)은 말하기를 “천지 시종(始終)의 수가 원(元)이 되니 1원의 수는 12만 9천 6백 년이며, 한 달[月]이 회(會)가 되니 1회의 수는 12이며, 성(星)이 운(運)이 되니 1운의 수는 3백 60이며, 신(辰)이 세(世)가 되니 1세의 수는 4천 3백이다.

이는 1원이 12회 3백 60운 4천 3백 20세를 거느린 셈이 되는데, 1세는 30년이나 12만 9천 6백 년이 1원의 총수가 된다. 원(元)의 원(元)에서부터 신(辰)의 원(元)에 이르며 원(元)의 신(辰)에서부터 신(辰)의 신(辰)에 이른 다음에야 수가 끝난다. 끝나면 변하고 변하면 다시 생기니 대개 생생(生生)하여 끝이 없다.” 하였다.

《황극경세》성음율려도(聲音律呂圖) 총론에 말하기를 “소자(邵子)의 성음학(聲音學)은 가전(家傳)으로 이천 장인(伊川丈人)에게서 배운 것이며 이정지(李挺之)에게서 모두를 배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음의 수는 선천(先天)에서 나온 것으로 두 가지 길이 없다. 성음의 수는 곧 사상(四象)에 있는 색(色)ㆍ성(聲)ㆍ기(氣)ㆍ미(味)의 하나이다. 색ㆍ성ㆍ기ㆍ미는 모두 상(象)이 있어 알 수는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고 오직 성음으로 표기(表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 법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만물의 용(用)을 다할 수 있으므로 만물의 수라고 부른다. 성(聲)의 평ㆍ상ㆍ거ㆍ입은 하늘에 속하며, 음(音)의 개(開)ㆍ발(發)ㆍ수(收)ㆍ폐(閉)는 땅에 속한다. 성은 지금의 협운(叶韻)과 같으므로 성은 있어도 글자가 없는 것이 있으니, 바람과 천둥, 비와 우박의 소리와 같은 것으로 절자(切字 글자에 대한 반절(反切)을 가리킨다)할 수는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며, 음은 지금의 절자와 같으므로 음은 있어도 글자가 없는 것이 있으니, 새나 짐승, 곤충과 뱀의 소리와 같은 것으로서 협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였다.

유맹선(兪孟宣)의 《경세요지(經世要旨)》에 “소위 경(經)이란 것은 경위(經緯)니 경륜(經綸)이니 하는 뜻과 같다. 하늘의 수를 살펴 원(元)으로써 회(會)를 헤아리는 것은 마치 12회로 경(經)을 삼고 3백 60운 이하로 위(緯)를 삼는 것과 같으며, 땅의 수를 살펴 회로써 운(運)을 헤아리는 것은 마치 2백 50운으로 경을 삼고 2천 9백 84세 이하로 위를 삼는 것과 같으며, 인간의 수를 살펴 운으로써 세(世)를 헤아리는 것은 마치 1백 20세로 경을 삼고 3백 60년으로 위를 삼는 것과 같다.

《황극경세》에 64괘(卦)를 4로 곱하면 2백 56괘에 1천 2백 36효(爻)가 되는데, 이것을 24절기(節氣)에 3백 60일(日)로 나누어 맡게 한다. 매양 한 해의 처음에 4효를 나누어 윤달[閏]을 맡으니 이것을 장윤(藏閏)이라 부르며, 24절기에는 각각 96효를 맡고, 그 나머지는 4효씩 1일을 맡는다. 이것을 오행(五行)의 생왕(生旺)과 휴수(休囚)로 길흉을 정하는데 한 해를 이에 의거해서 헤아린다. 크게는 원ㆍ회ㆍ운ㆍ세와 작게는 세ㆍ월ㆍ일ㆍ시를 한결같이 이 법으로 미루어 헤아리는데, 이것을 가일배법(加一倍法)이라 부른다.

정자(程子)가 말한 ‘하루의 운행은 곧 천년의 운행’이란 것으로서 그 이치가 이와 같음에 불과하다. 2백 56괘를 늑(扐)이라 부르는데 한 괘를 시작하여 돌리는 법은 축씨(祝氏 축필(祝泌)을 가리킨다)의《황극경세서금(皇極經世書鈐》에 있으며, 청 나라 심대성(沈大成)도 이 뜻을 발명하였다.

《황극경세》의 원ㆍ회ㆍ운ㆍ세와 세ㆍ월ㆍ일ㆍ시는 곧《주역》의 건(乾)ㆍ태(兌)ㆍ이(離)ㆍ진(震)ㆍ손(巽)ㆍ감(坎)ㆍ간(艮)ㆍ곤(坤)이다. 1원의 소장(消長)하는 수를 헤아리는 것은 십이벽괘(十二辟卦)로써 하는데 자월(子月)의 복(復)에서부터 해월(亥月)의 곤(坤)에 이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며, 천지 시종(始終)의 수를 헤아리는 것은 육십사괘로써 하는데 원(元)의 원(元), 일(日)의 일(日), 건(乾)의 건(乾)에서부터 신(辰)의 신(辰), 수(水)의 수(水), 곤(坤)의 곤(坤)에 이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원으로써 회를 헤아리는 것은 1세는 12월이니 지지(地支)가 한 바퀴 돌며 1월은 30일 이니 천간(天干)이 세 바퀴를 돈다. 괘로써 12회를 헤아리는 것은, 복괘(復卦)는 동지(冬至)를 맡아 자월(子月)의 머리에 거하며 서합괘(噬嗑卦)는 대한(大寒)을 맡아 축월(丑月)의 머리에 거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복괘 밑에 곤(坤)ㆍ임(臨)ㆍ명이(明夷)ㆍ진(震)ㆍ둔(屯)ㆍ이(頤)의 9괘를 횡(橫)으로 배열한 것은 곧 1효에서 6효까지의 괘변(卦變)인데 5괘가 각각 6효씩이므로 5×6=30이어서 꼭 한 달에 맞는다.

이것을 횡으로 보면 갑(甲)은 1이고 을(乙)은 13으로서, 계(癸)에 이르면 3백 49가 되며 종으로 보면 갑은 12이고 을은 24로서, 계에 이르면 3백 60이 되니 곧 1일이면 12시, 2일이면 24시로 30일이 되면 3백 60시가 된다. 이것이 정자가 말한 가일배법(加一倍法)이란 것으로서 1회가 그러하면 12회가 모두 그러하니, 미루어 극에 이르면 만(萬)ㆍ억(億)ㆍ조(兆)ㆍ경(京)ㆍ해(垓)ㆍ자(秭)에 이르러도 또한 그러하다. 대개 1에서 2가 되고 2에서 4가 되며 4에서 8이 되고 8에서 64가 되어 마침내 끝이 없는 데에 이른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양은 1이며 음은 2이다. 그러므로 양이 음을 낳을 적에는 2를 6으로 곱하여 12가 되며, 음이 양을 낳을 적에는 3을 10으로 곱하여 30이 된다. 천지 시종의 수는 12와 30으로 반복하여 승(乘)해서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소자가 비로소 세ㆍ월ㆍ일ㆍ시로 원ㆍ회ㆍ운ㆍ세를 징험하여 만들어냈다. 12와 30을 서로 곱하는 것은 관자명(關子明 자명은 관낭(關朗)의 자(字))과 중[僧] 일행(一行)을 인하여 제(除)하고 합한 것이다. 등기(鄧綺)는 말하기를 “방(方)ㆍ원(圓)의 수를 쌓아 곤(坤)까지 10으로 곱하면 또한 1원의 수가 되며, 기(期)를 통틀어 이것을 곱하여도 또한 1원의 수가 되니, 이는 숫자가 천연적으로 부합되는 것이다.” 하였다.

1원의 연수는 12만 9천 6백 년이고 1원의 월수는 1백 5십 5만 5천 2백 월이며, 1원의 일수는 4천 6백 6십 5만 6천 일이고 1원의 시수는 5억 5천 9백 8십 7만 2천 시이며, 1원의 각수(刻數)는 4십 6억 6천 2백 6십만 각이고, 1원의 분수(分數)는 4백 3십 8억 5천 6백 6십 4만 분이며, 1원의 윤수(閏數)는 5만 1천 8백 40윤이다.

가령 자회(子會)가 3천 년을 경과하매 하늘의 형체가 약간 생겼으며, 5천 4백 년을 경과하매 하늘이 비로소 개벽하였고 7천 년을 경과하매 하늘이 크게 개벽하였으며, 1만 8백 년을 경과하매 하늘이 완성되었는데, 서ㆍ북으로 기울었다. 축회(丑會)가 2천 년을 경과하매 물[水]이 생기고 불[火]이 생겼으며, 3천 년을 경과하매 땅의 형체가 약간 갖추어지고 나무[木]가 생겼으며, 쇠[金]가 생기고 흙[土]이 생겼으며 5천 4백 년을 경과하매 땅이 비로소 개벽하였고 1만 8백 년을 경과하매 땅이 모두 골라졌으며, 물이 흐르고 불이 타오르며, 흙과 돌이 굳어지고 해와 달의 운행이 정상으로 되어 땅이 완성되었는데, 동ㆍ남은 충만(充滿)하지 못하였다.

인회(寅會)가 5천 4백 년을 경과하매 사람이 비로소 생겼는데, 7천 년을 경과하여도 천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아, 사람의 형체가 혹은 뱀의 몸에 비늘이 달리기도 하고, 혹은 소의 머리에 뿔이 있기도 하며, 혹은 새의 발에 제갑(蹄甲)이 있기도 하였다. 나뭇잎과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고 짐승의 고기를 생식(生食)하여 크게 오륜(五倫)이 없었다.

묘회(卯會)에 인문(人文)이 점차 발달하여 예의가 있게 되었으며, 사회(巳會)에 - 원문 빠짐 - 사회의 말엽에 이르러 복희씨(伏羲氏)가 태어났으며, 오회(午會)에 하우씨(夏禹氏)가 즉위하였다. 즉위한 지 8년은 오회의 시초인 1년째로서 개벽한 뒤로부터 1원의 반쯤인 6만 4천 8백 1년이었다.

하우씨가 즉위한 지 8년인 갑자년(甲子年)으로부터 금상(今上 현재의 임금 즉 헌종(憲宗)) 13년 정미(丁未), 즉 청 나라 도광(道光) 27년까지는 합계가 4천 57년이며 하늘이 개벽한 갑자년으로부터 현재의 정미년까지 통계해보면 6만 8천 8백 64년이 지났다. 오회에 들어와서 이미 4천 64년이 경과하였으니, 다시 1천 3백 40년이 경과한다면 오회의 절반이 된다. 미회(未會)의 3~4천 년을 경과하고 나면 이때에는 나이가 50이 넘은 사람이 혈기(血氣)가 이미 쇠한 것과 같으니 천지도 또한 늙는다.

신회(申會)에는 수사(數辭)로 따지면 회(悔)와 휴수(休囚)에 해당하며 유회(酉會)의 6천 년을 경과한 뒤에는 유도(儒道)가 쇠하고 신선이 모두 없어져 남지 않으니,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소위 우물에서 연기가 나오고 나무에서 불이 난다는 시기이다. 술회(戌會)의 3천 년을 경과한 뒤에는 해와 달이 운행하지 않고 성신(星辰)이 하늘에 분포하지 않으며, 5천 년이 경과한 뒤에는 하늘이 크게 캄캄해지고 6천 년 뒤에는 하늘이 파괴되고 해와 달과 별들이 일정하지 않으며, 1만 년 뒤에는 하늘이 완전히 파괴된다.

해회(亥會)의 5천 년을 경과한 뒤에는 물이 흐르지 않고 불이 타오르지 않으며, 흙이 응결(凝結)하지 않고 돌이 단단하지 않으며, 6천 년 뒤에는 땅이 꺼지고 1만 8백 년이 되면 천지 만물이 모두 없어졌다가, 또 다시 하늘이 생기고 땅이 생기고 사람이 생겨 순환하여 끝이 없다.

왕경문 질(王景文質)은 말하기를 “혼륜(混淪) 이전에 대해서는 불가의《장함경(長含經)》에 간략히 나왔으며 개벽 이후에 대해서는 소자의《황극경세》에 자세히 나왔다.” 하였다.
소자는 무엇으로써 천지의 시종을 알았는가 하면, 하늘을 관찰하며 인회(寅會)의 기수(箕宿) 1도(度)에서부터 오회(午會)의 성수(星宿) 1도까지는 모두 4만 5천여 년이므로 이로써 전후의 허다한 수를 미루어 안 것이니,《황극경세》의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에 자세히 보인다.

소백온(邵伯溫)은 말하기를 “일(日)이 원(元)이 되니 원의 수는 1이고 월(月)이 회(會)가 되니 회의 수는 12이며, 성(星)이 운(運)이 되니, 운의 수는 3백 60이고 신(辰)이 세(世)가 되니 세의 수는 4천 3백 20이다. 1원은 12회, 3백 60운, 4천 1백 20세를 거느리고 있다. 1세는 30년이니 12만 9천 6백 년은 1원의 수가 된다. 1원이 대화(大化)에 있어서는 1년과 같다. 원(元)의 원(元)에서부터 신(辰)의 원(元)에 이르고 원(元)의 신(辰)에서부터 신(辰)의 신(辰)에 이른 다음에는 수가 끝난다.

끝나면 변하고 변하면 생기니, 대개 생생(生生)하여 끝이 없다. 일(日)은 갑(甲)에서 계(癸)에 이르니 일의 수는 1로서 한 해에 한번 돌며, 월(月)은 자(子)에서 해(亥)에 이르니 월의 수는 12로서 한 해에 한번 돈다. 성(星)의 수는 3백 60으로서 천체를 따라 운행하여 하루에 한번 도니 1년이면 3백 60번이다. 하루는 12신(辰)이니 1년의 신을 모두 계산해보면 4천 3백 20신이 된다.

자(子)에서 사(巳)까지가 식(息)이 되고 오(午)에서 해(亥)까지가 소(消)가 된다.
식이 되면 양이 나오고 음이 물러가며, 소가 되면 음이 나오고 양이 물러간다. 월의 인(寅), 성의 기(己)에서 물건이 생기니 이때의 신은 76이며 월의 술(戌), 성의 무(戊)에서 물건이 폐쇄되니 이때의 신은 3백 15이다. 월이 사(巳)의 종말에 이르면 신의 2천 1백 60에 해당하여 양극(陽極)이 되는데, 음양의 여공(餘空)이 각각 6이며, 해(亥)의 종말에 이르면 신의 4천 3백 20에 해당하여 음극(陰極)이 되는데, 음양의 여공이 각각 6으로서 모두 24이니《주역》의 64패, 3백 84효의 수에 맞는다. 사정괘(四正卦)를 제하는데 사정괘가 여섯이니 4를 6으로 곱하면 24가 되며 3백 84에서 24를 빼면 3백 60이 남게 된다. 당요(唐堯)는 월의 사(巳), 성의 계(癸) 1백 80, 신의 2천 1백 57에 임금이 되었으니 미루어 올라가 계산해 보면 요(堯)는 천지의 중간 수를 얻은 것이다.” 하였다.

서산 채씨(西山蔡氏)는 말하기를 “앞의 6회(會)는 식(息)이 되고 뒤의 6회는 소(逍)가 되니 곧 한 해의 자(子)에서부터 사(巳)까지는 식이 되고 오(午)에서부터 해(亥)까지는 소가 된다. 성(星)의 76에서 만물이 생기는 것은 마치 한 해의 경칩(驚蟄)과 같으며, 성의 3백 15에서 만물이 폐쇄되는 것은 마치 한 해의 입동(立冬)과 같다. 1원에는 12만 9천 6백 년이 있고 1회에는 12만 9천 6백 월이 있으며, 1운에는 12만 9천 6백 일이 있고, 1세에는 12만 9천 6백 신이 있으니 이는 모두 자연의 수로서 억지로 끌어다 맞춘 것은 아니다.” 하였다.

소자의 논리로 소자의 논리를 징험해 보면 만물이 생기고 만물이 폐쇄되는 이치가 손바닥을 보듯 쉽게 알 수 있다.

소자는 말하기를 “천지의 교수(交數)는 10분의 3이다. 대개 천지의 수가 10인데 양은 5를 얻었고 음도 5를 얻었다. 그러므로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에는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으며, 동지(冬至)에는 밤이 6할을 차지하고 낮이 4할을 차지하니, 이는 음이 양을 침탈한 것이며, 하지(夏至)에는 낮이 6할을 차지하고 밤이 4할을 차지하니 이는 양이 음을 침탈한 것이다.

그러나 하지의 낮은 오히려 6할에만 그치지 않으니 새벽이나 황혼의 물건을 분별할 수 있는 때까지 합친다면 낮은 거의 10분의 7이나 된다. 한 해로 말하면 정월에 벌레가 나오고 9월에 벌레가 들어가니 물(物)이 생기지 않는 것은 겨울 3개월이며, 1원으로 말하면 인회(寅會)에서 만물이 생기고 술회(戌會)에서 만물이 폐쇄되니, 물이 생기지 않는 것은 해(亥)ㆍ자(子)ㆍ축(丑) 3회뿐이다. 이와 같은 것은 모두 그러하여 물이 생기는 것이 7할, 물이 생기지 않는 것이 3할이니 7은 용수(用數)이며 3은 교수(交數)이다. 그러므로 천지의 교수가 10분의 3이라 한 것이다.

대개 천지는 물(物)을 생(生)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조화(造化)는 양을 높이는 것으로 의(義)를 삼는다. 그러므로 양수(陽數)가 많고 음수(陰數)가 적으며, 용수가 7이고 교수가 3이다.” 하였으니 이는 선생의 저서로 선생의 저서를 징험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감히 《황극경세》를 천지간에 사물을 경법(經法)하는 큰 분한(分限)으로 생각한다. 한편은 역상(易象)의 학문이 될 수 있고 한편은 사책(史策)의 학문이 될 수 있으며, 한편은 음운(音韻)의 학문이 될 수 있다. 12벽괘(辟卦)로써 경(經)하고 위(緯)하면 어느 물건이든 이뤄지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그 분한과 절도(節度)가 어찌 삼재(三才)의 정밀한 뜻이 아니겠는가.

귀산 양씨(龜山楊氏 양시(楊時)를 가리킨다)는 말하기를 “《황극경세》는 모두 공자(孔子)가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고금의 치란(治亂)과 성패의 사변(事變)을 논한 것은 부절(符節)을 합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감히 생략해 버릴 수 없는데, 그 문을 얻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하였고 상채 사씨(上蔡謝氏 사양좌(謝良佐)를 가리킨다)는 말하기를 “요부(堯夫)의 역수(曆數)에 대한 학문은 매우 정밀하다. 예로부터 역법(曆法)에 능한 자들도 오래되면 반드시 차이가 생겼는데 오직 요부는 그렇지 않으니, 한두 가지 가까운 일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당장 징험할 수 있다.” 하였으며,

장민(張岷)은 말하기를 “강절 선생이 정밀하게 연구하고 극진히 생각한 지 30년에, 천지(天地)의 소장(消長)을 관찰하고 일월(日月)의 영축(盈縮)을 추측했으며, 음양의 도수(度數)를 상고하였다. 저서에서 언급한 것이 너르고 뜻이 깊으니 아, 아름답고 지극하다. 천하의 훌륭한 일이 이 이상 없다.” 하였고 학산 위씨(鶴山魏氏 위요옹(魏了翁)을 가리킨다)는 말하기를 “소자의 평생 저서 중에 심술(心術)의 정미(精微)한 것은《황극경세》로서, 조금도 막히거나 의심스러운 곳이 없다. 아, 소위 풍류스러운 호걸이라는 것이다. 진한(秦漢) 이후의 학자들은 이런 기상이 없다는 것을, 독자들은 절로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상 여러 현인들이 논한 것은 진실로 본지를 얻은 것이다. 후대의 비뚤어진 학자들은 혹 비웃고 헐뜯는 자들이 있는데, 이는 잠자리가 기둥을 흔드는 것과 같을 뿐이며, 자구(字句)의 사이에 이르러서는 선생이 표절하고 인습하여 사용한 것처럼 인식하는 자들이 있으니 더더욱 가소롭다.

명나라 양신(楊愼)의《단연총록(丹鉛總錄)》에 이르기를 “유흠(劉歆)이 ‘삼황(三皇)은 봄을 형상하였고 오제(五帝)는 여름을 형상하였으며, 삼왕(三王)은 가을을 형상하였고 오패(五伯)는 겨울을 형상하였다.’ 하였는데 소자의《황극경세》에 이것을 전부 사용하였으며,《효경위(孝經緯)》에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춘추(春秋)》는 상성(商星)에 속하고《효경(孝經)》은 삼성(參星)에 속한다.’ 하였는데,《황극경세》의《주역(周易)》ㆍ《서경(書經)》ㆍ《시경(詩經)》ㆍ《춘추(春秋)》를 말한 것은 또한 이것을 조술(祖述)한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왕망(王莽)의 조서(詔書)에 ‘삼황 …… ’ 하였다.” 하였으며, 또 “유흠이 이런 말을 하였다.” 하였으니, 어쩌면 유흠이 말한 것을 왕망이 자기의 말로 만들어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그 뜻은 선생의 《황극경세》에서 논한 것을, 유흠과 왕망의 말을 표절한 것이라 하여 흠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이 책이 옛날부터 한번도 번각(翻刻)된 적이 없어, 장서가(藏書家)들도 또한 보기 드무니, 이는 대개 당장 사용에 절실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근본 뜻을 안다면 권고하지 않아도 집집마다 이 책을 소유하고 장서할 것인데 세상에 아는 자가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삼가 보고 들은 것을 취하여 한 변증설을 만들어 평소의 경앙(景仰)하는 마음을 표하려 한다.

[주D-001]복희 선천(伏羲先天) : 상고 시대 복희씨가 만들었다는 선천팔괘(先天八卦)를 말하는데 후대 문왕(文王)이 만들었다는 후천팔괘(後天八卦)를 상대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D-002]십철(十哲)에 올렸다 : 십철은 열 명의 훌륭한 사람이란 뜻으로 원래 《논어(論語)》 선진편(先進篇)에 공자(孔子)가 지적한 훌륭한 제자 열 사람 즉, 덕행(德行)엔 안연(顔淵)ㆍ민자건(閔子騫)ㆍ염백우(冉伯牛)ㆍ중궁(仲弓), 언어(言語)엔 재아(宰我)ㆍ자공(子貢), 정사(政事)엔 염유(冉有)ㆍ계로(季路), 문학(文學)엔 자유(子游)ㆍ자하(子夏)였는데, 뒤에 이들을 문묘에 배향하면서 안연을 오성(五聖)으로 올리고 대신 자장(子張)을 넣었으며 여기에 다시 송조(宋朝)의 육현(六賢)인 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ㆍ정이(程頤)ㆍ소옹(邵雍)ㆍ장재(張載)ㆍ주희(朱熹)를 십철의 열(列)에 올렸으므로 한 말이다.

[주D-003]손으로는 …… 밟았네 : 양(陽) 1획이 시생(始生)한 지뢰 복괘(地雷復卦) 와 음(陰) 1획이 시생한 천풍 구괘(天風姤卦) 를 가리킨 것으로 음양의 이치를 터득함을 말한다. 이는 원래 소강절(邵康節)의 시에 “월궁을 더듬어야 비로소 물리(物理)를 알 수 있고 천근을 밟아보지 못하면 어찌 인리(人理)를 알겠는가. 건(乾)이 손(巽)을 만났을 때에 월굴을 볼 수 있고 지(地)가 뇌(雷)를 만난 곳에 천근을 볼 수 있다.” 하였으므로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주D-004]임둔(壬遁) : 점술(占術)의 하나인 육임(六壬)과 은신술(隱身術)의 둔갑별(遁甲法)을 말한다.
[주D-005]선천방원도(先天方圓圖) : 천원 지방(天圓地方)의 고대 사상에 근거를 두어 64괘를 원형으로 배열하여 천체를 형상하고 다시 그 안에 64괘를 방형(方形)으로 배열한 그림을 말한다.
[주D-006]삼황(三皇) …… 오패(五伯) : 삼황은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皇帝), 오제(五帝)는 소호(少昊)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제요(帝堯)ㆍ제순(帝舜), 삼왕(三王)은 하(夏)의 우(禹), 은(殷)의 성탕(成湯), 주(周)의 문왕(文王)ㆍ무왕(武王), 오패는 제 환공(齊桓公)ㆍ진 문공(晉文公)ㆍ송 양공(宋襄公)ㆍ진 목공(秦穆公)ㆍ초 장왕(楚莊王).
[주D-007]생왕(生旺)과 휴수(休囚) : 오행가(五行家)의 말로 때를 얻은 것을 생왕이라 하고 때를 잃은 것을 휴수라 한다.
[주D-008]가일배법(加一倍法) :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역(易)에 태극(太極)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는다.” 하였는데, 양의란 음양을 가리킨 것이며 사상이란 태양(太陽)ㆍ소음(少陰)ㆍ소양(少陽)ㆍ태음(太陰)을 말한 것으로 소강절은 이것을 근본하여 “하나가 나뉘어 둘이 되고 둘이 나뉘어 넷이 되며, 넷이 나뉘어 8이 되고 8이 나뉘어 16이 되며, 16이 나뉘어 32가 되고 32가 나뉘어 64괘가 되었다.” 하였으며, 명도(明道) 정호(程顥)는 이것을 가일배법이라 하였다. 《周易大全 總論》
[주D-009]십이벽괘(十二辟卦) : 원래 음력 12개월에 12개의 괘를 붙인 것인데, 벽(辟)은 곧 임금이란 뜻으로 자월(子月)인 11월은 양(陽) 1획인 복괘(復卦), 축월(丑月)인 12월은 양 2획인 임괘(臨卦), 인월(寅月)인 정월은 양 3획인 태괘(泰卦), 묘월(卯月)인 2월은 양 4획인 대장괘(大壯卦), 진월(辰月)인 3월은 양 5획인 쾌괘(夬卦), 사월(巳月)인 4월은 양 6획인 건괘(乾卦), 오월(午月)인 5월은 음(陰) 1획인 구괘(姤卦), 미월(未月)인 6월은 음 2획인 둔괘(遯卦), 신월(申月)인 7월은 음 3획인 비괘(否卦), 유월(酉月)인 8월은 음 4획인 관괘(觀卦), 술월(戌月)인 9월은 음 5획인 박괘(剝卦), 해월(亥月)인 10월은 음 6획인 곤괘(坤卦)이므로 이것을 다시 12회에 적용하여 계산한 것을 말한다.
[주D-010]기(期)를 …… 되니 : 기는 1년 3백 60일을 말하는데 이것을 다시 3백 60으로 곱하면 1원수인 12만 9천 6백 년이 되므로 한 말이다.
[주D-011]각수(刻數) : 여기에서 말한 각이란 현재의 15분이 아니라 1주야를 1백 각으로 나누어 된 숫자이다.
[주D-012]사정괘(四正卦) : 한(漢) 나라 맹희(孟喜)의 괘기도(卦氣圖)에 나온 것으로 감(坎)ㆍ이(离)ㆍ진(震)ㆍ태(兌)를 말하는데 이것은 방위상 동서남북의 정방향에 해당하므로 사정이라 한것이다.
[주D-013]삼재(三才) : 천(天)ㆍ지(地)ㆍ인(人)을 말한 것으로 팔괘의 3획괘에 위 1효(爻)는 천, 가운데 1효는 지, 아래 1효는 인에 해당한다. 《주역(周易)》 설괘전(說卦傳)에 “하늘의 도는 음과 양이고 땅의 도는 유(柔)와 강(剛)이며 사람의 도는 인(仁)과 의(義)이니, 삼재를 합하여 둘로 곱한다. 그러므로 역(易)은 6획으로 괘가 이뤄진다.” 하였다.




 [출처] 경사편 4 - 경사잡류 2 기타 전적(其他典籍) - 중국 전적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대한 변증설|작성자 새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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