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나라 유학자/소옹[邵雍] 列傳第186 道學

2016. 4. 19. 18:24잡주머니



       중국 송나라 유학자/소옹[邵雍] 列傳第186 道學一| 중국 철학, 사상

낙민 | 조회 17 |추천 0 | 2016.04.05. 07:51



소옹[邵雍] 列傳第186 道學一

출생 - 사망 1011 ~ 1077


   송나라 범양(范陽) 사람. 나중에 하남(河南)으로 옮겼다. 자는 요부(堯夫)고, 호는 안락선생(安樂先生) 또는 이천옹(伊川翁)이며, 시호가 강절(康節)이라 소강절(邵康節)로 주로 불린다. 젊어서부터 뜻을 품어 소문산(蘇門山) 백원(百源)에서 독서했다. 북해(北海) 이지재(李之才)가 공성령(共城令)으로 있을 때 하도낙서(河圖洛書)와 천문, 역수(易數)를 배웠다. 스스로 깨우쳐 자득한 것이 많았고,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자급했다. 인종(仁宗) 가우(嘉祐)와 신종(神宗) 희녕(熙寧) 중에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 등에 임명받았지만 사양하고, 일생을 낙양(洛陽)에 숨어살았다.

 

부필(富弼)과 여공저(呂公著), 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舊法黨)과 사귀면서 시정의 학자로 평생을 마쳤다. 선천학(先天學)을 창시하고 만물은 모두 태극(太極)에서 말미암아 변화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62편을 지어 천지간 모든 현상의 전개를 수리로 해석하고 그 장래를 예시했으며, 또 『관물내외편(觀物內外編)』 2편에서 허심(虛心)과 내성(內省)의 도덕수양법을 설명했다. 시집으로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20권이 있고, 『어초문답(漁樵問答)』 1권 등이 있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밖의 저서에 『박물편(觀物篇)』과 『선천도(先天圖)』가 있다.

 

도가(道家)에서 '도서선천상수학'(圖書先天象數學)을 배우고, '상수'(象數)를 원리로 하는 관념론적 철학을 수립하였다. '역'(易)의 '태극(太極)-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의 도식을 만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우주생성의 과정이라 보고, 팔괘(八卦)가 교차하여 만물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이 확신으로부터 천하 일체의 현상을 천지(天地)의 8상(八象)으로 귀착시켰다. 이것이 그의 '상학'(象學)이다.

 

8상은 '일월성신'(日月星辰), '화수토석'(火水土石)이라 하며, 전체를 이것으로 환원하고, 전체에 이것을 배당하는 가운데에서 추상개념화하는데, 이 작업은 황당무계한 관념적 유희로 전락하였다. 다음으로 '수학'(數學)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원, 회, 운, 세'(元, 會, 運, 世)의 설인데 한 세대=30년을 단위로 하여 일원(一元=129600년)마다 천지가 경신(更新)한다고 하고, 이것을 우주 시간의 최초의 순환 단위로 생각하였다.

 

천지의 개벽에서 인류의 탄생, 그리고 당시(북송)까지를 이 순환의 가운데에 위치 지웠지만, 이 작업도 현실을 수리(數理)에 맞추는 황당무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설은 규모가 웅대하기 때문에, 후세에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또 '아(我)를 통해 물(物)을 본다'는 것을 부정하고 '물(物)을 통해 물(物)을 본다'는 것을 주장한 '반관'(反觀)의 사상은 그의 경우에는 관념적이었지만 후세의 실학자들에 의해 과학적 인식 방법으로 발전되었다.

 

邵雍字堯夫。其先范陽人,父古徙衡漳,又徙共城。雍年三十,游河南,葬其親伊水上,遂為河南人。

 

  雍少時,自雄其才,慷慨欲樹功名。於書無所不讀,始為學,即堅苦刻厲,寒不爐,暑不扇,夜不就席者數年。已而歎曰:「昔人尚友于古,而吾獨未及四方。」於是逾河、汾,涉淮、漢,周流齊、魯、宋、鄭之墟,久之,幡然來歸,曰:「道在是矣。」遂不復出。

 

  北海李之才攝共城令,聞雍好學,嘗造其廬,謂曰:「子亦聞物理性命之學乎?」雍對曰:「幸受教。」乃事之才,受《河圖》、《洛書》、《宓義》八卦六十四卦圖像。之才之傳,遠有端緒,而雍探賾索隱,妙悟神契,洞徹蘊奧,汪洋浩博,多其所自得者。及其學益老,德益邵,玩心高明,以觀夫天地之運化,陰陽之消長,遠而古今世變,微而走飛草木之性情,深造曲暢,庶幾所謂不惑,而非依仿象類、億則屢中者。遂衍宓羲先天之旨,著書十余萬言行於世,然世之知其道者鮮矣。

 

  初至洛,蓬蓽環堵,不芘風雨,躬樵爨以事父母,雖平居屢空,而怡然有所甚樂,人莫能窺也。及執親喪,哀毀盡禮。富弼、司馬光、呂公著諸賢退居洛中,雅敬雍,恒相從遊,為市園宅。雍歲時耕稼,僅給衣食。名其居曰「安樂窩」,因自號安樂先生。旦則焚香燕坐,晡時酌酒三四甌,微醺即止,常不及醉也,興至輒哦詩自詠。春秋時出遊城中,風雨常不出,出則乘小車,一人挽之,惟意所適。士大夫家識其車音,爭相迎候,童孺廝隸皆歡相謂曰:「吾家先生至也。」不復稱其姓字。或留信宿乃去。好事者別作屋如雍所居,以候其至,名曰「行窩」。

 

  司馬光兄事雍,而二人純德尤鄉里所慕向,父子昆弟每相飭曰:「毋為不善,恐司馬端明、邵先生知。」士之道洛者,有不之公府,必之雍。雍德氣粹然,望之知其賢,然不事表襮,不設防畛,群居燕笑終日,不為甚異。與人言,樂道其善而隱其惡。有就問學則答之,未嘗強以語人。人無貴賤少長,一接以誠,故賢者悅其德,不賢者服其化。一時洛中人才特盛,而忠厚之風聞天下。

 

  熙寧行新法,吏牽迫不可為,或投劾去。雍門生故友居州縣者,皆貽書訪雍,雍曰:「此賢者所當盡力之時,新法固嚴,能寬一分,則民受一分賜矣。投劾何益耶?」

 

  嘉祐詔求遺逸,留守王拱辰以雍應詔,授將作監主簿,複舉逸士,補潁州團練推官,皆固辭乃受命,竟稱疾不之官。熙寧十年,卒,年六十七,贈秘書省著作郎。元祐中賜諡康節。

 

  雍高明英邁,迥出千古,而坦夷渾厚,不見圭角,是以清而不激,和而不流,人與交久,益尊信之。河南程顥初侍其父識雍,論議終日,退而歎曰:「堯夫,內聖外王之學也。」

 

  雍知慮絕人,遇事能前知。程頤嘗曰:「其心虛明,自能知之。」當時學者因雍超詣之識,務高雍所為,至謂雍有玩世之意;又因雍之前知,謂雍於凡物聲氣之所感觸,輒以其動而推其變焉。於是摭世事之已然者,皆以雍言先之,雍蓋未必然也。

 

  雍疾病,司馬光、張載、程顥、程頤晨夕候之,將終,共議喪葬事外庭,雍皆能聞眾人所言,召子伯溫謂曰:「諸君欲葬我近城地,當從先塋爾。」既葬,顥為銘墓,稱雍之道純一不雜,就其所至,可謂安且成矣。所著書曰《皇極經世》、《觀物內外篇》、《漁樵問對》,詩曰《伊川擊壤集》。

 

  子伯溫,別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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