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을 읽고...

2016. 4. 29. 15:03잡주머니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을 읽고... | 잡설...

이승현 2006.06.15 09:54

      

 

  보통 명말청초의 3대 사상가로 황종희(黃宗羲, 1610~1695), 고염무(顧炎武, 1613~1682), 왕부지(王夫之, 1619~1692)를 든다. 그리고 당견(唐甄, 1630~1704) 역시 저명한 사상가로 4대 사상가로 포함시켜 말하기도 한다.

 

  나는 황종희의 대표적 저서인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을 읽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다른 사상가의 대표적 저서-고염무 '일지록'(日知錄), 왕부지'독통감론'(讀通鑑論), 당견'잠서'(潛書)'-도 꼭 읽어 보고 싶다.

 

  사상의 역할은 그 사회의 문제를 어떠한 형태로든 반형하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따라서 어떠한 사상이든 사상가가 속해있는 시대와 사회의 구속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결국 명말청초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아니하고는 그 당시의 개혁사상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선 명말청초의 중국사회는 정치적으로 '천붕지해'(天崩地解)로 불릴 정도로 혼란기였다. 구체적으로 명대의 군주전제로 말미암은 정치적 폐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명대의 정치 역시 몽고시대의 가혹한 전제정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전제군주들은 순전히 한 사람 또는 한 집안의 향락을 위한 통치를 하였고 이에 대한 부담은 모두 인민에게 돌아갔다. 따랏 명말청초의 개혁사상은 필연적으로 민본주의에 기초한 반(反)전제사상을 담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사상가들이 전제정치에 대한 공격을 가하였음은 분명하나 민권사상에 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를 명말청초 사상가들의 한계라고 비판하는 것은 말 그대로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가 싶다. 사상은 역사환경의 제한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기존 사상의 수정이 아닌 전면적 부정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역사의 흐름상 민권사상은 신해혁명이란 시대를 맞이하여 도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이들 사상가들이 청말에 태어났다면 민권사상에까지 도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의 맹아현상을 출현시킨 전환기였으며, 서양의 선진문물의 전래로 일부 개명한 지식인들 사이에서의 새로운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자세를 보인 시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회경제적으로 변화하는 시기에 주자학을 비롯한 기존의 학문은 지나치게 관념적이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적 소용돌이를 수용할 수 있는 사상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당시 지식인들은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경세치용실학의 방법을 동원하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중국을 지배한 만주족(滿洲族)은 전체 한족(漢族)의 2%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중국사회는 민족적인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소수의 만주족에게 망한 다수의 한족은 자존심이 크게 손상되었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민족적인 운동과 사상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명이대방록'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몇 몇 구절을 인용해 본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옛날에는 천하의 백성이 주인이고, 군주가 일생 동안 천하를 위해 경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군주가 주인이고 천하 백성이 객이 되어서 무릇 천하의 어느 곳도 평안하지 못한 것은 군주만을 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천하)을 얻지 못했을 때에는 천하 백성들의 간(肝)과 뇌(腦)를 찌르고 멍들게 하고, 천하백성들의 자녀를 이산시켜서 자기 한사람의 재산을 넓히면서도 조금도 잔혹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명이대방록' 중 군주론 편에서-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황종희는 맹자 이후 계승된 민본의 정치 형태를 더 극명하게 표출하여 '군객민주'(君客民主)란 표현을 쓰고 있다. 선진시대 이래로 유교의 정치사상은 '절어구민'(切於求民)의 민본적 형태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민본의 의미는 군주로부터 내려지는 '은혜의 산물'의 형태에 가깝다. 따라서 때로는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는 정치논리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때 민본이라 하더라도 민은 어디까지나 대상적 존재이지 주체적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민본의 의미는 군주로부터 내려지는 '은혜의 산물'의 형태에 가깝다. 반명 황종희의 '군객민주'(君客民主)의 논의는 근대적 민주정치 형태로 조금은 접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신해혁명 이후 민권사상이 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는 민본주의적 경향을 읽어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정전제도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가르침을 받아서 알겠지만, 만일 세금을 정한다면 어떻게 한 이후에나 가능한가?'라고 묻는다.

대답은 이렇다. 백성들이 가혹한 세금으로 고통받은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누적되어 돌이킬 수 없는 해가 있고, 세금으로 부과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해가 있고, 농토에 등급이 없다는 해가 있다.>  -'명이대방록'토지제도 에서-

 

  이처럼 황종희는 정전제(井田制)의 회복을 통한 부의 균등한 배분은 올바른 정치의 기본이고, 일반 백성들에 대한 세금 경감은 부민론(富民論)의 구체적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이 대목에서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적 경향을 일어낼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금은제도를 폐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금은제도를 폐지하면 일곱가지 이점이 있다. (중략)

전과 지폐가 통용되는 것이 그 일곱 번째이다.>  -이대방록 중 회계제도 [1] 에서-

 

  수공업과 상업의 발전은 경제활성화를 가져왔고, 시장의 원리를 도입하도록 요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자금의 흐름을 막는 은본위제 대신 전과 지폐의 활용이 요구되었다. 이처럼 명말청초의 개혁사상가들은 시장의 원리라는 근대지향적 자본주의의 원리의 도입을 미약하나마 시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책('명이대방록' 황종희 / 김덕균 옮김, 한길사)의 역자는 책의 제목을 이렇게 해설하였다.

 

<'명이대방록'의 '명이'(明夷)는 '주역'의 64괘의 하나다. 이 괘는 곤(坤)상 이(離)하로 그 내용은 '밝은 태양이 땅 속에 빠져 들어간 상태'이며, 또한 '밝고 지혜로운 사람이 상처를 입고 때를 기다린다는 형국으로 암흑시대를 가리킨다.' 아래 이쾌의 초구(初九)는 '지혜롭고 양심적인 사람이지만 상층부의 음흉함이 모든 것을 좌우하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다.' 따라서 '조용히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같이 '명이'의 의미는 곧 명청교체기의 명왕조가 처한 상황을 잘 표현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생각건대, 황종희의 생애를 살펴보면 반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왠지 여기에 쓰인 '명이'의 의미는 단순한 암흑기를 의미하는 것 보다는 앞으로 광명이 도래할 암흑기를 의도하고 쓴 표현이 아닌가 싶다. '주역'의 한 괘는 단순히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변화하는 상태 중 한 시점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P.R.Yi.-  (from. YonKum 'N' SYNERGY effect / with. joojul2)



blog.daum.net/syn2rgy/3862197   SYNERGY effect





7월의 추천 도서(502) 명이대방록 - 황종희

D. 매일 독서 정보/2014.07 2014.07.15 06:00 Posted by '-')

Creative Commons License

7월의 추천 도서(502) 명이대방록 - 황종희

 

 

 

1. 책 소개

 

   명나라 말기는 내부로 잦은 농민봉기와 밖으로 강성해진 만주족의 위협으로 국가존립 자체가 위태로웠으며 경제적으로는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해 점차 근대적인 사유체계가 생겨난 시기다.

   황종희<명이대방록>은 이처럼 새로운 근대적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작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패러다임을 구상하고, 기존의 사농공상에 대한 차별의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따라서 이 책은 현실정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며 급진적인 성격을 띠어 건륭년간(1736~95)에는 금서처분을 받기도 했다.

<명이대방록>에서 '명이(明夷)'는 <주역> 64괘중 하나로 '밝은 태양이 땅속에 빠져 들어간 상태'를 의미하며 당시 명청교체기의 명왕조가 처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대방록(待訪錄)'은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며 기다린다'는 뜻으로 이 책은 그 새로운 시대의 정치, 경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황종희는 <명이대방록>에서 왕이 아닌 백성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제시하고 '내가 벼슬하는 것은 천하 인민을 위해서이지 군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군주 중심의 지배체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정전제 회복을 통한 부의 균등한 분배, 법제도,인사제도, 군사제도, 회계제도 등의 혁신을 주장하며 신시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책의 이러한 다소 혁명적인 사고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던 청말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출처 - 알라딘

 

2. 저자 소개

 

황종희

   황종희 명말청초의 대학자 황종희(黃宗羲, 1610∼95)는 절강성(浙江省) 여요현(餘姚縣) 사람으로 자는 태충(太沖), 호는 남뢰(南雷)이며, 사람들이 이주(梨洲) 선생이라고 불렀다. 황종희의 어릴 적 이름은 린(麟)으로, 그의 어머니가 태몽에서 기린을 보았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라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났다. 명말 성경(誠敬)과 신독(愼獨)을 위주로 한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유종주(劉宗周, 1578∼1645)를 스승으로 모셨다. 이것은 그의 부친이 환관 위충현(魏忠賢) 일당에게 체포되면서 남긴 유언에 따른 것이다. 한편,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어울려 학문과 사상을 토론하였다. 대표적으로 육왕학과 주자학을 조화시킨 손기봉(孫奇逢, 1584∼1675), 주자학과 불교비판에 앞장섰던 진확(陳確, 1604∼77), 과학자이자 사상가이며, 특히 황종희와는 막역했던 방이지(方以智, 1611∼71), 고증학의 개조로 자신의 <일지록>(日知錄) 비평을 부탁한 고염무(顧炎武, 1613∼82), <명사>(明史) 편찬을 총괄 지휘한 서건학(徐乾學, 1631∼94) 등을 들 수 있다. 황종희는 다사다난한 일생을 살면서도 학자로서의 풍모를 잃지 않은 채 학자 본연의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방대한 저술 속에 그대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율려신의>(律呂新義, 1652),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 1661), <명이대방록> (1663), <요강일시>(姚江逸詩, 1672), <명유학안>(明儒學案, 1676), <남뢰문안>(南雷文案, 1680), <남뢰문정>(南雷文定, 1688), <금수경>(今水經, 1692), <명문해>(明文海, 1693), <명문수독>(明文授讀, 1693) 등이 있다.

 

출처 - 인터파크

 

3. 목차

 

옮긴이의 말
고염무의 편지
명이대방록 서문
제1장 군주란 무엇인가
제2장 신하란 무엇인가
제3장 법이란 무엇인가
제4장 재상제도를 설치하자
제5장 학교제도
제6장 인재등용1 : 과거제도의 폐단
제7장 인재등용2 : 역대 인재 선발 제도
제8장 수도 정하기
제9장 변방자치
제10장 토지제도1 : 고대의 세율
제11장 토지제도2 : 정전제와 둔전제
제12장 토지제도3 : 송대와 명대의 세금제도
제13장 군사제도1 : 명대의 군사제도
제14장 군사제도2 : 무신의 필요성
제15장 군사제도3 : 문관과 무관 제도
제16장 금융제도1 : 금은제도
제17장 금융제도2 : 지폐제도
제18장 금융제도3 : 습속, 미신, 사치
제19장 서리제도
제20장 환관제도1 : 환관의 폐해
제21장 환관제도2: 군주의 욕심
전조망의 발문
옮긴이의 해설 :황종희와 '명이대방록'
참고문헌
부록

 

출처 - 알라딘

 


www.read1825.com/546   독서 국민 운동 1825 ..





12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고전읽기(동양) / 지식백과

2015.03.11. 18:06

           http://sambolove.blog.me/220297054075

번역하기 전용뷰어 보기


 


Ⅲ. 유학과 근대 세계

 

만민(萬民)을 위하여 전제군주제를 비판하다


저자
황종희(黃宗羲)


해설자
조병한(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전제군주제의 전통을 비판하다

 

   인구와 영토의 방대한 규모에서 오늘날 아시아 제일의 대국인 중국은 2천 년 이상 지속된 전통적 제국(帝國)의 유산 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그 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정교하게 다듬어진 전제(專制)군주 체제를 토대로 해서 장기적 지속을 누리고 방대한 규모의 인구와 영토를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황제(皇帝)의 전제주의 전통에 대해 가장 철저히 분석해 비판한 책으로 유명한 것이 1662년에 나온 황종희(黃宗羲)『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이다. 그 시기는 19세기 말 황제 체제가 근대화의 장애 요인으로 본격적 비판을 받아 붕괴되기 꼭 250년 전이었다.

 

『명이대방록』에서 전제군주제를 비판할 수 있었던 논거는, 천하 또는 국가를 군주나 왕조의 정권과 구분하고 인민을 위한 정치라는 유교의 민본적(民本的) 이념을 최대한 확장한 데 있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대개 천하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군주의] 한 성씨(姓氏)의 흥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민(萬民)의 근심과 즐거움에 있다. 그러므로 [폭군인] 걸(桀)ㆍ주(紂)가 망함은 잘 다스려지는 원인이 되고 진시황(秦始皇)과 몽골(蒙古)가 일어남은 어지러워지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의 역사에서 진 제국의 성립 이래 한 번도 잘 다스려진 시대가 없었다고 비판하였으며, 군주의 국가 사유화, 즉 전제 정치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전제주의 비판에 대한 역사적 의미에 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기원전 221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천하통일을 이루고 중앙집권적 군현제(郡縣制)를 전국에 시행한 진시황이 중국 최초의 황제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진(秦)ㆍ한(漢)나라로부터 근세의 명(明)ㆍ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왕조의 교체는 있었으나 제국체제는 그 때마다 부활했으며, 황제는 1911년 공화(共和)혁명으로 이듬해 중화민국이 수립될 때까지 존속했다. 특히 황제는 근대 이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관료 행정의 도움을 받아 제국 내 만민의 군주이자 가부장(家父長)이었으며 스승으로서 성인(聖人) 행세를 했다.

 

   그는 유교의 도덕을 정치 이념으로 내세워 천하ㆍ만민에 대한 무한 책임을 주장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무제한적인 권위의 전제주의 이념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였다. 이러한 황제의 도덕적 권위와 통일 제국의 힘은 바깥으로 세계 만국에 대한 황제의 종주권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세계사에서 로마 제국만이 중국에 필적할 만한 규모의 통일을 시간적으로 훨씬 오래 지속했다는 것은 중국 사회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장기적 안정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우선 괄목할 정치적 업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중국의 전제 체제가 전면적 비판을 받게 된 것은 19세기 말 근대화에 낙후하게 된 결정적 원인으로 그러한 정치 체제가 지목된 이후부터라 할 것이다. 근대 이후 눈부신 발전을 한 서유럽 국가들의 민주적 개방 사회와 경쟁적 국제 질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전이 정체된 결과 그러한 국가들의 압박을 받고 민족적 위기 의식이 싹텄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황제의 전제적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명ㆍ청 시대에 그러한 정치 체제를 비판했던 황종희는 뒤늦게 20세기 초 공화혁명 시기에 들어 민권(民權)의 선구자로서 중국의 루소라는 찬양을 받기도 했다. 그의 『명이대방록』의 전제군주 비판은 아직 18세기 서유럽 계몽주의 사조의 합리성과 자유주의 인권 사상에 비할 만한 수준의 철저함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서유럽 계몽주의보다 선행할 뿐 아니라 중국의 오랜 전제군주제적 전통과 그 유례없는 정교함을 고려하면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매우 심각하다. 사실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군주가 없는 정치 체제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러한 사상의 출현도 매우 상상하기 힘든 희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서유럽에 가까운 봉건영주제(封建領主制)를 겪었다는 일본에서도 중세의 형식적 군주로서 존속했던 고대 천황(天皇) 제도를 오늘날까지도 폐지하지 못하고 있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근대 군국주의 시기는 물론, 최근 민주화 이후에도 권위의 상징으로 추앙되어 근린 국가들에 불편한 존재로 남아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 제국 체제는 중세의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의 재통일 이후 더욱 발달하여 명ㆍ청시대에 이르러서는 제도상의 완성 단계에 들어섰다. 한편으로 상업화 등 새로운 사회 발전에 따라 체제 모순의 내면적 균열은 깊어갔으나 전제군주제의 가을은 아직 햇빛 눈부신 높푸른 하늘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금서로 묶인 『명이대방록』의 외로운 경고음은 부귀공명에 들뜬 과거 시험, 학문을 위한 학문에 매몰된 고증학의 번영, 물샐 틈 없는 정부의 문화 통제와 탄압, 이른바 문자옥(文字獄) 속에 한동안 파묻히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시대

 

   황종희는 17세기, 명말청초(明末淸初) 시기에 절강성(浙江省) 여요(餘姚)에서 태어났다. 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와 함께 청나라시대의 3대 사상가로서 만주족(滿洲族)의 중국 침입에 저항해 세충영(世忠營)이란 부대를 끌고 의병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 투쟁이 무위로 돌아간 다음에도 지식인의 지조를 지켜 청나라 조정의 초무(招撫)에 응하지 않고 재야에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당시는 중국 전제주의 체제의 모순이 심화된 명ㆍ청의 왕조 교체기로서 망국적 당쟁(黨爭)과 민중 반란, 이민족 침입 등 숱한 변란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무한의 권위를 갖고서도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황제, 그 전제 권력에 기식하는 부패한 관료와 환관(宦官)의 파쟁 및 권력 남용, 부패 정치에 저항하는 유교적 관료ㆍ지식인의 저항 운동 실패와 그에 따른 참혹한 당쟁의 재난, 유민(流民)의 대규모 반란 등이 이 시기를 특징짓는 현상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명나라는 동북 변방에 있던 만주족의 침입을 불러들였다. 유교적 지식인으로서 윤리와 경세(警世) 의식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던 의로운 사대부들은 생명을 걸어야 했고, 당시 1억 5천만에 달했을 민중은 기근과 전염병, 비적과 반군ㆍ해적ㆍ의용병ㆍ청조 침입군이 난마와 같이 뒤얽힌 전란과 약탈의 대혼란 속에서 떼죽음을 당했다.

 

   이 참혹한 시대를 황종희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시대로 표현했다. 중국에서는 새 왕조가 일어날 때마다 한동안 평화로운 시대를 구가하다가 그 뒤에는 주기적인 왕조 교체와 함께 어김없이 제국 붕괴의 대재난이 이어졌는데, 그 재난 또한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참담한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왕조 말의 주기적 참화는 너무도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중국의 역사는 통일 제국의 재건에서만 탈출구를 찾았고 이 제국의 재건을 책임질 천명(天命)을 받은 새 왕조의 도래를 기다렸다. 새 황제는 도덕적으로 대성인이며 하늘의 위임을 받은 진명천자(眞命天子)로서 천하 만민을 먹이고 인간다운 윤리 질서를 되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중과 오랑캐의 반항으로 몰락한 명나라 왕조의 정치는 어떠했는가? 황종희는 한때 이 망해 가는 왕조의 부흥을 위해 무장 투쟁에까지 참여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멸망이 기정사실화된 다음 황종희는 그에 대한책임자로서 황제 정치의 죄업을 냉정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왜 망했는가? 전제주의적 제국 체제에서 황제 한 사람의 책임은 얼마나 큰 것인가? 이것이 이 위대한 저술을 위한 궁극적 질문이었다. 그는 명나라의 역사를 통해 여러 원인을 탐색했는데, 그 연구 방법의 특징은 문헌 자료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개인이 아니라 제도 속에서 몰락의 기본적 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전제군주제도를 중심으로 한 제국 체제에 궁극적 책임을 묻고 그 해결책을 새로운 제도적 대안의 탐구에서 얻고자 했다. 그 대안은 유교 사상에서 드물게 보는 철저한 제도 개혁, 즉 변법(變法)이었다. 이러한 사상 체계의 철저함은 당시 대두하기 시작한 동아시아 실학(實學)의 사상계에서도 매우 돌출된 것이었다.


 

순환하는 우주 시간과 복고적 이상주의

 

   이와 같은 황종희의 철저한 개혁 사상은, 그가 명나라의 몰락 과정을 눈물과 피로 몸소 체험한 데 기인하고 있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 정계를 뒤흔든 동림당(東林黨) 사건으로 정의파 관료이던 부친이 환관 일파에 체포되어 재판도 없는 참혹한 고문을 받아 동료들과 함께 희생되는 참상을 겪었다. 폭넓은 재야 독서층의 사회 여론을 대변하던 동림파의 실패는 그 전통을 이은 복사(復社)운동에서도 되풀이되었다. 이 복사운동은 전국에 걸친 문인 결사로서 특권 지식층인 신사(紳士)들 뿐 아니라 하층의 서민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독서층이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생원(生員)으로서 하층 신사에 속했던 황종희도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부친의 유지를 이었다. 절강에서의 남명(南明)부흥운동에 참여하면서 그의 인생은 청나라 조정의 사면을 얻을 때까지 열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유랑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서도 재야의 한족(漢族) 지식인을 기용하려는 강희제(康熙帝)의 회유 정책에 끝내 응하지 않고 은둔 생활로 일관했으나, 제자인 역사학자 만사동(萬斯同)과 자기 아들만큼은 명사관(明史館)에 보내 명 제국의 정사(正史)인 『명사(明史)』의 편찬을 도왔다. 또한 황종희 자신도 많은 저술을 남긴 저명한 역사가였으므로 자료나 방법 면에서 『명사』 편찬의 성공에 적지 않은 기여가 있었다.

 

『명이대방록』의 역사관은 전통적 유교의 복고(復古)사관과 순환(循環)사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황종희는 명나라와 같은 개별 왕조의 정통성이나 왕조사의 흥망을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 제국부터 명말청초까지 거의 1,900년에 걸치는 전제군주제의 역사 전체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나는 한 번은 잘 다스려진 시대이고 한 번은 어지러운 시대라는 맹자(孟子)의 말을 늘 의심했다. 어째서 삼대(三代) 이후로 어지러움만 있고 잘 다스려짐은 없는 것인가? 이에 호한(胡翰)이 말한 12운(運)이란 것을 보니 주(周)의 경왕(敬王) 갑자(甲子)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한 번 어지러운 운이었다. 앞으로 20년이면 '대장(大壯)' 운으로 바꿔 들어가 비로소 한 번 다스려짐을 얻으니 삼대의 융성함이 아직은 절망이 아니다. ··· 내 비록 늙었으나 [은(殷)의] 기자(箕子)가 [주(周)] 무왕(武王)의 방문을 받는 것 같은 것은 혹시 바랄 수 있을지! 기우는 때의 이른 새벽 밝아오나 아직 훤하지 못하다 해서 어찌 끝내 말을 감춰 두기만 할 것인가?

 

저자가 대망한 삼대란 중국 역사의 초기인 하(夏)ㆍ은(殷)ㆍ주(周), 세 왕조를 말하는 것으로 성인이 군주가 되어 다스리던 이상적인 시대를 가리킨다. 주나라 경왕 갑자년은 공자가 사거(死去) 한 2년 뒤인 기원전 477년이니 삼대 이후 난세는 2천 년 이상 지속되었던 셈이다.

 

역사적 사실이 분명치도 않은 까마득히 먼 고대를 이상화한 다음 그 이후로는 줄곧 난세만 계속되었다는 저자의 사관은 송나라 이래의 도학(道學)에서 제기한 이상주의 사조와 공통성이 있다. 그러나 주자학(朱子學)이 정통론(正統論)의 입장에서 삼대 이후 잃어버린 '도의 계통', 즉 도통(道統)의 회복을 탐구하는 도덕적 이상주의를 추구했다면 황종희의 이상주의는 이 장기적 난세의 원인을 전제군주제도에서 찾는 역사가의 관점이 뚜렷하다.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호한이란 사람은 14세기 원말명초(元末明初) 시기의 학자인데, 그가 말한 12운의 이론에 의하면 이와 같은 장기적 치란(治亂)의 변동은 순환적인 우주적 시간의 필연적 운수(運數)에 따른 것이다. 황종희는 이 순환적 우주 시간표에서 곧 예정된 잘 다스려지는 시대의 도래를 2천 년 전과 같은 삼대의 회복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셈이다. 단순한 왕조 순환을 넘어 역사의 순환 사이클이 거대한 만큼 현실 비판의 지표로서 복고적 이상은 더욱 급진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삼대 시절 주(周)나라에게 망한 은왕조의 현인 기자가 『홍범(洪範)』을 새 천자인 주나라의 무왕에게 바쳤듯이, 황종희는 새 시대를 열 성인군주를 기다려 그의 경세서(經世書)인 『명이대방록』의 개혁안이 채택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적인 천하ㆍ만민을 사유화한 전제군주제

 

『명이대방록』은 체제 개혁의 이론으로서 첫 3편의 글에서는 군주와 신료(臣僚), 법이 대체 무엇인지 다시 묻고 있다. 전제군주에 대한 비판의 기본적 근거는 「군주란 무엇인가?」란 글에 나와 있는 대로 사람의 개인적 이익을 군주의 약탈로부터 보호하고 천하 공익(公益)에 대한 군주의 책임을 밝히는 데서 출발한다.

 

   생물이 나온 시초에는 사람마다 각기 스스로 자기를 위하고 각기 스스로 이익을 구했다. 공공의 이익은 일으키지 못하고 공공의 손해는 제거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자기 한 몸의 이익과 손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천하가 이익을 받고 손해를 면하도록 보통 사람보다 천 배, 만 배 근로를 하는 요(堯)ㆍ순(舜)ㆍ우(禹)와 같은 먼 고대의 성인군주가 나왔다고 한다. 바꿔 말해 군주의 자격은 본래 사람의 성정으로 볼 때 너무 고생스러워 떠맡기 싫어하는 자기희생의 자리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세의 군주들은 천하의 이익과 손해를 좌우하는 권력을 자기 손에 쥐고는 천하의 이익은 모두 자기에게 돌리고 천하의 손해는 모두 타인에게 돌아가게 하며",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스스로를 위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구하지 못하게 해서 자신의 큰 사적인 일을 천하의 큰 공적인 일로 삼았다"는 것이다. 천하 만민을 위해 일하도록 공적인 위탁을 받은 제국의 공권력 기구를 군주 일가의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개인적 사유물로 만든 책임이 전제 군주 제도에 있다는 논리이다.

 

바꿔 말해 "옛적에는 천하가 주인이고 군주가 손님이었는데", "지금은 군주가 주인이고 천하가 손님이 되어" 군주가 천하를 위해 경영하기는커녕 천하의 노동력과 자녀를 수탈해서,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자랑한 대로 자기 한 사람의 재산을 늘린다. 그러고서도 전제군주는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나는 정말 내 자손을 위해 창업을 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미 천하를 사유재산으로 본 이상 이를 경쟁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끈을 묶고 빗장을 굳게 채우지만" 끝내는 자신이나 그 자손의 피와 살이 으깨지고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처럼 공주에게 "너는 어찌하여 내 집안에서 태어났느냐"는 비통한 말을 할 지경이 된다고 한다.

 

국가와 민간을 공과 사의 범주로 구분하고 군주에게 국가의 공적 책임을 추궁하는 점에서 황종희의 군주론은 유교적이다. 그러나 국가의 공적 권위가 민간 이익의 보호에서 나온다는 이 논리는 민생을 강조하는 유교 민본주의(民本主義) 사상의 새로운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이익을 의리(義理)와 대립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공적 천하를 강조했던 중국의 유교적 통치 이념에는 전제군주의 가부장적 가산(家産) 관념이 짙게 깔려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폭로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와 만민을 사유화한 결과는 그 사유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전제정치의 강화와, 왕조 말 천하의 쟁탈전이라는 참혹한 대규모 약탈이 반복되는 비극적 왕조 순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아시아 전제정치의 역사에서 이토록 빛나는 자기성찰의 기록이 있었던가? 17세기 명말청초의 중국은 중화제국의 근본적 결함과 내재적 위기를 처음 발견했던 시기였으나 아직 그것을 해체할 만큼 성숙하지는 못했다. 이 혼란을 수습해 제국의 기능을 더 큰 규모로 회복시킨 것이 북방에서 침입한 후진 민족인 만주족이었다는 것은 역사에서 국제적 계기가 매우 중요함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공직의 협력자로서 군신의 권력 분할

 

   그렇다면 전제군주의 무한 권력을 억제할 방법은 무엇인가? 『명이대방록』에 제시된 방법으로 그중 핵심적인 것은 세 가지가 있다. 모두 중국의 이념과 제도 속에서 전통적으로 착상된 것이지만 황종희의 새로운 해석이 주목된다. 하나는 군주와 관료 사이의 권력 분할이고, 둘째는 군주라는 사람의 통치보다는 법에 의한 통치가 더 안정적이라는 것이며, 셋째는 학교라는 기관을 통한 사대부 지식층의 공공적 여론, 이를테면 개방된 공론장(公論場)을 제도화해 불가침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군신(君臣)의 관계에 대해서는 「신하란 무엇인가?」란 글에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천하는 커서 한 사람이 다스릴 수는 없고 다수인이 일해 나눠 다스린다. 그러므로 내가 벼슬에 나아감은 천하를 위한 것이고 군주를 위한 것이 아니며 만민을 위한 것이고 한 사람의 성(姓)을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군주가 바라는 속마음을 미리 아는 것은 환관ㆍ후궁(後宮)의 마음이며 군주를 따라 죽거나 망명하는 것은 사적인 측근의 일이라 한다. 그런데도 "세상의 신하된 자들은 이 뜻을 모르고 신하가 군주를 위해 설치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 군주가 천하와 인민을 신하에게 나눠 준 다음에야 다스릴 수 있다고 하면서 '천하와 인민을 군주의 전대 속 사유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처럼 군주ㆍ왕조와 국가를 구분할 줄 모르고 신하 관료들이 군주와 그 정권만을 위해 맹목적 충성을 바친다면 군주와 관료 사이의 자율적 협력이 필요한 천하ㆍ인민의 통치는 파탄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또 군주와 신하를 부자 관계에 비유하는 세속적 견해도 잘못된 것이니, "군신의 개념은 천하로 인해 생긴 것이며 나에게 천하의 책무가 없으면 군주도 나에게 길손이다. 군주에게 벼슬하러 나아가 천하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군주의 노예이며 천하를 위해 일할 때 군주에 대해 스승과 벗이 된다"고 했다. 중국은 고대에 유교적 전제 군주제가 형성될 때부터 군주가 갖는 공적 기능과 사적 기능 사이의 구분이 애매하고 그 영향으로 행정 기구인 관료제에서도 군주의 측근 기구가 재상 중심의 정규 행정을 압도하고 있었다. 급기야 절대적 전제군주제의 확립자인 명나라 태조(太祖)에 이르러서는 재상마저 폐지되고 말았다. 황종희가 재상권의 부활을 주장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 거슬러 군주와 관료의 권력 분할을 시도한 것이었다.

 


도덕적인 사람보다는 법에 의한 통치

 

   중국의 전통적 전제주의는 폭력적인 통치 도구로서 형법을 법의 핵심이라 생각하는 잘못된 법의 관념에 현실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유교에는 원래 군주의 전제를 견제하는 도덕정치의 이념이 있었으며 그러한 전통을 대표하는 것이 맹자(孟子) 학파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덕치 이념은 고대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전제주의 통치를 분식ㆍ미화하는 이중적 기능을 하게 되고 전제군주권을 둘러싼 동의와 견제라는 두 기능의 모순이야말로 동아시아 유교권 정치의 주요 특색을 이루었다.

 

덕치의 기반은 천하 인민을 위한 민본주의이므로 그것이 전제군주에 대한 견제 역할을 해야 할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덕치가 전제군주제를 지지하는 이념적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유교의 군주론에 따르면 덕치의 최고 책임자인 군주는 삼대의 이상적인 성인 군주를 이념형으로 삼고 있으며, 그 성인이란 통치 대상인 천하ㆍ인민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진 유덕자로서 천명으로부터 그 통치의 정당성을 승인받은 자이다. 그런데 도덕적 무한 책임은 그 반대 급부로 무한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그리하여 현실의 절대권력을 장악한 군주는 이 도덕적 무한 권위를 통해 만인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성인 군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유교의 도덕적 군주가 형법을 실질적 권력 도구로 삼고 있는데도 유교적 덕치 이념에 의거하여 법은 이념의 지위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러한 도구로서 중국의 전통적 법률은 군주의 전제정치를 위한 수단일 뿐, 군주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거나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정의로운 역할을 갖지 못했다. 『명이대방록』의 「법이란 무엇인가?」란 글에서는 "삼대 이전에는 법이 있었는데 삼대 이후에는 법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법은 전통적인 법가의 형법과는 다른 개념으로서, 군주의 사적인 도구로서의 법이 아니라 삼대 이전의 성인 군주와 같은 이상적 통치에서나 가능할, 인민의 삶을 위한 공적인 법이다. 저자는 후세의 법의 실태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이것이 삼대 이전의 법이니 나 한 몸을 위해 만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후세의 군주는 천하를 얻고 나면 오직 왕조의 수명이 길지 못하고 자손이 보유하지 못할까만 두려워해 미연의 걱정을 해서 법을 만들기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 법이란 것은 한 집안의 법이지 천하의 법이 아니다.

 

그래서 진 제국이 봉건제를 군현제로 바꾼 일 같은 역사상의 제도 개혁들도 군주 및 왕조의 사리를 위한 것이었지 천하를 위한 개혁은 아니었다고 한다. 천하를 위한 삼대의 법은 "법이 느슨할수록 어지러움은 더욱 일어나지 않으니 이른바 법 없는 법이라 한다." 그 반면에 후세의 법은 아래보다 위의 사적 이익을 지키려 감시하다 보니 법이 매우 엄밀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이 엄밀할수록 천하의 어지러움은 바로 그 법에서 생기니 이른바 법 아닌 법이라 한다." 즉, 진나라 이래 옛 성인 군주의 법이 탕진된 결과 삼대의 제도를 모범으로 한 급진적 개혁이 필요하며, 후세의 '법 아닌 법'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통치하는 법이 있는 다음에 통치하는 사람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치에서 법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유교적 통론을 뒤집은 것이었다.


 

학교를 통한 지식층의 공론장

 

   그 다음으로 『명이대방록』은 구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세부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재상의 부활과 같은 관제(官制)의 개혁, 학교 교육과 과거제 등 다양한 관료 채용 제도의 개혁, 수도의 이동, 분권적 변경 방위 체제, 토지 재분배, 군사제도, 국가 재정, 말단 행정 실무자인 서리(胥吏)제도, 환관제도의 개혁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마치 조선 후기에 전개된 실학의 경세 사상을 보는 것 같다. 그중 「학교」란 글은 단순히 인재 교육과 선발에 관한 것 뿐 아니라, 유력한 국정 기구의 하나로 구상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학교는 선비를 양성하는 방법이지만 옛 성인 군주는 그 뜻이 이에 그치지 않고 천하를 다스리는 도구가 모두 학교에서 나오게 한 다음에야 학교의 뜻이 비로소 갖춰진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에서 설립한 학교를 정치적 여론 기구로 제도화하려는 것이었다. 황종희에 의하면 옛적에는 "천자가 옳다 한 것이 반드시 옳지는 않고 천자가 그르다 한 것이 반드시 그른 것은 아니었다. 천자도 마침내 감히 시비를 스스로 정하려 하지 않고 시비를 학교의 공론에 맡겼다." 그런데 "삼대 이후에는 천하의 시비가 한결같이 조정에서만 나와" 모두 천자의 독단을 따르고, 심지어는 "학교란 것이 과거 시험의 경쟁으로 부귀에 마음이 물든 결과 마침내 조정의 세력과 이익으로 그 본령이 변질"되었으며, 인재가 간혹 초야에서 스스로 나와도 학교와는 전연 관련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국가 권력이 학문과 교육을 지배한 결과 나타난, 황폐한 현상에 대해 이처럼 통절한 비판이 또 있겠는가? 당시 중앙의 태학(太學)과 지방 군현의 학교에서 시행되었던 정기적 학술 강론은 민간을 대표한 학관(學官) 및 신사층이 황제ㆍ관료들과 만나 학술과 국정을 논하는 공론장이기도 했다. 학교에서의 국정 비판은 국가 권력이 침해할 수 없는 면책권을 갖는 것이어서 황제 권력에 대한 민간 지식층의 견제 역할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유교적 이상주의자의 구세 사상

 

『명이대방록』에서 제기된 나머지 여러 개혁안 중에도 역사적으로 토론할 만한 의의가 있는 실제적 내용이 많지만 여기서는 생략했다. 급진적 이상주의에는 비현실성이 따르기 쉽지만 저자의 이상주의는 그 시대의 모순이 그만큼 우심했으며,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저자의 구세적 소망이 그만큼 간절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역사적 체험에서 우러난 이 이상적 청사진의 실현을 누구에게 기대하고 있었을까? 분분한 학계의 논란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머지않아 도래할 미래의 성인 군주였을 것이다. 2천 년에 걸친 전제군주 시대에 살았던 지식인이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힘을 새로운 유형의 군주에게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황종희는 끝내 유교의 사상가로 머물렀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전제군주제의 논란이 일어난 사회적 배경은 무엇일까?
중국의 역사는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의 끊임없는 긴장 관계 속에 있었다. 전제군주인 황제는 통일ㆍ안정의 구심점으로서 역사적 역할이 있었고 사대부 내지 신사층은 군주에 봉사하는 관료를 배출하면서도 지역 사회의 지배층으로서 분권적 자율성이란 경쟁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다.

 

2. 유교의 복고적 역사관이 오히려 급진적 개혁 사상을 뒷받침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교에 있어서 고대란 관념은 시간적인 고대인 동시에 이상으로서의 고대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었다.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순환하는 현실의 역사 속에서 고대의 이상으로 돌아가려는 복고 사상은 이 어지러움의 순환을 저지하고자 투쟁하는 지식인의 사명 의식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3. 전제군주제 비판을 뒷받침한 이론으로 민본주의란 무엇인가?
천하의 공공성을 대표하는 유교의 민본주의는 사실은 군주뿐 아니라 사대부 지식인도 공유하는 가치였다. 특히 황종희는 역사적으로 점차 군주의 전제적 권력에 눌려 위축되어 온 사대부의 주체성을 재강조해 군주와 대립하는 권력의 분할을 위한 논리와 제도적 대안을 제시했다는 데 시대적 의미가 있었다.

 

4. 유교 실학의 개혁론에서 법치와 지식인의 공론장이라는 개념은 어떤 위치를 갖는 것인가?
유교의 제도개혁론은 대개 효율적 관제(官制) 개혁에 중점이 있으나 황종희는 이에 머물지 않고 정체(政體) 자체의 변경이라는 의미까지 제시했다. 유교적 도덕정치의 이념, 정치ㆍ학문ㆍ교육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유교 이념을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군주, 즉 성인이라는 사람의 통치가 갖는 한계를 비판하고 정치의 구속으로부터 학문ㆍ교육의 자율성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유교 자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상적 확장의 성격을 갖고 있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명이대방록』, 황종희 지음, 전해종(全海宗) 옮김, 삼성(三星)문화문고, 1971.
『명이대방록』, 황종희 지음, 김덕균 옮김, 한길사, 2000.






sambolove.blog.me/220297054075   다산을 찾아서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병매관기(病梅館記)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6/01/15 [16:21]
▲ 묵개 서상욱(사학자)     ⓒ한국무예신문
   진순신(陳舜臣)의 아편전쟁은 서구의 충격을 받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청나라 말기의 중국의 상황과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지식인들의 몸부림을 생생하게 묘사한 걸작이다.
 
이 작품은 아편전쟁이 벌어지기 1년 전인 1839년 4월, 몰래 북경을 떠나는 공자진(龔自珍)으로부터 시작된다. 공자진의 부친 공려정(龔麗正)은 국어보주(國語補注)를 남긴 학자였으며, 모친 단순(段馴)은 여류시인으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주를 단 유명한 문자학자 단옥재(段玉裁)의 딸이다. 대단한 혜택을 받고 태어난 셈이다.
 
진순신은 그가 황족의 애첩 고태청(顧太淸)과의 밀애 때문에 북경을 떠났다고 했지만, 아무튼 이후로 그는 다시 북경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몹시도 날카로워져 있었다. 다시는 시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그는 솟구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귀향길에 무려 350수나 되는 시를 지었다. 그것이 유명한 기해잡시이다.
 
청의 부패와 서양의 압박은 지식인의 민감한 감성을 강하게 자극했다. 유달리 민감했던 공자진의 절박함은 더욱 심했다. 진강(鎭江)을 지날 무렵, 사람들이 제사를 올리는 것을 보았다. 기원문은 푸른 종이에 적었으므로 ‘청사(靑詞)’라 했다. 공자진을 알아 본 도사가 청사를 부탁했다. 그는 명말청초 명이대방록을 지은 황종희(黃宗羲)의 심정으로 시를 지었다.
 
구주생기시풍뢰(九州生氣恃風雷), 만마제암구가애(万馬齊喑究可哀)
아권천공중두수(我勸天公重抖擻), 불구일격항인재(不拘一格降人材)

구주(중국)에 태어난 사람들은 풍신이나 뇌신을 믿고,
수많은 말들은 일제히 슬프게 울고 있구나!
하늘에 비노니 다시 한 번 떨치고 일어서게 해 주시려면,
부디 파격적인 기상을 갖춘 인재를 내려주소서!
 
   이 시는 생전의 모택동(毛澤東)이 애송했다고 한다. 공자진은 자괴감에 빠져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우렁차고 통렬한 문장으로 개혁, 민주, 인재등용 등을 요구하며 구시대 전통과의 투쟁을 선언했다.
 
중국의 근대정치사상사나 문학사는 공자진으로부터 시작된다. 아편전쟁의 영웅 임칙서(林則徐)공자진과 함께 선남시사를 결성했던 친구였다. 그러나 그는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구심점이 되지는 못했다. 공자진은 섬세하고 열정적인 감수성을 지닌 문인이었지만, 자신의 이론을 체계화해 많은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결속시키는 정치가나 사상가는 아니었다. 파격적이고 자유분방한 측면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유명한 병매관기는 항주의 영은사(靈隱寺) 서쪽 서계(西溪)에서 매화를 감상하면서 쓴 글로 당시 정치에 대한 그의 분노가 담겨있다. 그는 여러 곳의 매화를 평가하면서, 문인과 화가들이 건강한 매화보다는 병든 모습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비판했다.
 
   “사람들은 매화는 굽어야 아름다우며 곧은 것은 별로 아름답지 못하다고 한다. 또 기울어진 것을 아름답다고 하면서 바른 것은 볼만한 가치도 없다고 한다. 드문드문 피어난 것은 아름답다고 하면서 빼곡하게 피어난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한다. 매화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취향대로 만들기 위해 억지로 바른 것을 비틀고 잘라서 곁가지를 내고, 빼곡하게 피어난 것을 솎아내며, 어린 가지를 곧게 자라지 못하도록 하여 생기를 없앤다.”

그는 그래서 절강의 매화가 모두 병신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는 매화의 성장을 속박하는 끈을 풀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병매관’이라는 집을 짓고 300그루의 매화를 심었다. 병매관의 매화는 자유롭게 자랐다. 국가가 활력을 찾으려면 모든 속박이 제거돼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지만 결국은 옳았다.

[고전 속 정치이야기] 병매관기(病梅館記) 2016.01.14 | 천지일보




황종희, 김덕균 옮김,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임종수 | 조회 44 |추천 0 | 2014.09.14. 19:58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황종희黃宗羲

황종희 지음 | 김덕균 옮김 | 한길사 | 2000년 03월 20일 출간

 

 

 
명이대방록(한길그레이트북스 041) 

 

 

 

   정치의 대법(大法)을 말하기 위해 황종희가 저술한 책으로 암울한 명나라 말기의 시대적 상황이 담겼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군주와 신하의 관계 개선 및 법제도, 인사제도, 토지제도, 군사제도, 회계제도 등의 혁신을 주장하며 새로운 시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목차

001. 새 시대를 갈망하는 "명이대방록"의 사상사적 의의....(21)
002. [명이대방록]....(43)
003. 머리말....(45)
004. 군주론....(49)
005. 신하론....(58)
006. 법제론....(65)
007. 재상론....(71)
008. 학교....(79)
009. 관리선발....(93)
010. 수도건설....(119)
011. 국경수비....(126)
012. 토지제도....(133)
013. 병사제도....(159)
014. 회계제도....(180)
015. 서리....(202)
016. 환관....(211)
017. [황종희 연보]....(223)
018. 옮긴이의 말....(289)
019. 찾아보기....(295)

 

출판사 서평

 

명말청초 격변기의 사회 상황과 신사조의 형성

 

   명말청초의 사회는 정치 경제적인 격변기였다. 안으로는 이자성(李自成)과 장헌충(張獻忠)의 농민봉기로 혼란스러웠고, 밖으로는 강성해진 만주족이 명조를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조정 내부에서는 동림파(東林派) 대 비동림파의 대립이 극심하였는데, 이 당쟁은 위충현(魏忠賢)을 중심으로 한 환관들의 동림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 정치·행정의 중심인 북경을 비롯한 행정 중심지역에서는 내분과 전쟁이 끊이지 않은 반면, 강소·절강 등 강남지역에서는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한 중대형 도시가 형성되어 번창하고 있었다.

 

'명이대방록'이 후대에 미친 영향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명이대방록]이 추구하는 정치 경제적 형태는 매우 개혁적이고 혁신적이다. 전제왕권하에서 개혁과 혁신을 주장한 것은 그만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아마도 황종희는 이미 회생 불가능한 명조에 기대를 걸기보다는 새로운 왕조-물론 그가 바랐던 새로운 왕조가 만주족 정권이라고 못박을 수는 없지만-에 대한 강한 집념과 의지를 이 책을 통해 표현했던 것이다. 그 왕조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회의 제도와 형태는 매우 분명한 어조로 그리고 있다.

새로운 사회의 주체는 비록 구체적 언급이 없다 하더라도 다음 세 가지 방향에서 추론할 수 있다. 첫째는 이미 멸망한 명왕조 회복을 통해서, 둘째는 새롭게 들어선 청조를 통해서, 셋째는 제3의 세력을 통해서이다. 여기서 첫째, 둘째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황종희는 잘 알고 있었다.

 

   [명이대방록]의 저술시기로 볼 때, 그가 명조 회복의 불가능함을 알고 썼다는 것과 극렬한 반청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명조를 비롯한 역대 전제왕권이 [명이대방록]의 정치 경제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전 왕조가 여기에 해당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따라서 마지막 세번째가 아마도 황종희가 기대를 걸고 추구했던 사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황종희 자신의 구체적 언급이 없는 부분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명이대방록]이 신시대에 대한 열망과 과거 잘못된 사회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자못 강렬하다는 점에서 과연 신시대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두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황종희가 갈망했던 신시대는 [명이대방록] 내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특정 왕조가 주체가 되는 사회라기보다는 '군객민주'에 보이듯 백성이 주인이 되고, 정치의 주역으로 사대부 지식인 출신의 재상과 관리들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근대적인 민주주의 사회와는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기존의 전제왕조사회에서 논의되던 '군주민본'(君主民本)과는 분명 다른 차원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명이대방록]은 신시대·신사회를 갈망하는 청말 지식인들에게는 유용한 교과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명이대방록]은 수백년 간의 전제정치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시도하고, 민주주의 정신을 발현하였는데, 이것은 손문·양계초·담사동·장개석을 비롯한 지식인들의 정치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황종희의 공리적(公利的) 민본 정치사상은 청말민초 변화된 사회의 요청과 요구에 적합한 논리로서 당시 환영받던 이론이었던 것이다
 



cafe.daum.net/eapp/QwNr/9   동아시아 정치철학 심층 특강





차가운 지성과 뜨거운 분노로 쓴 황종희의 "명이대방록"| 기본 자료실

묵계 | 조회 81 |추천 0 | 2002.03.21. 20:42


明夷待訪錄
(차가운 지성과 뜨거운 분노로 쓴 국가개혁론)

   조국이 외세의 침략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지성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상을 등지고 기회를 엿보는 소극적인 삶을 사는가? 적극적으로 항거하면서 중흥을 도모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자학에 빠져서 지내는가?
이런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좋은 사례가 黃宗羲(황종희:1610-1695 자는 太沖 호는 梨洲 또는 南雷. 절강성 餘姚에서 출생. 顧炎武:1613-1682, 王夫之:1619-1692와 더불어 明末淸初의 3대 사상가)라는 인물의 활동이 아닐까 하여 그의 대표적인 저술 明夷待訪錄(명이대방록)을 소개한다.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행동하던 젊은 시절에서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던 말년에 이르기까지 세가지 유형의 삶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이민족인 몽고족의 원제국(元帝國)을 멸망시키고 한족의 나라를 세운 명나라는 16세기에 오면서 朝日七年戰爭(임진왜란-필자는 임진왜란을 다르게 부른다. 일반적으로 亂은 국내에서 일어난 변란을 말하며 국가간의 전쟁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이다.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자세한 견해는 다른 글에서 밝힌다)에 대한 출병과 이른바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으로 재정이 궁핍해지고 태자옹립문제로 인한 정치적 불안이 계속 되었다.
중국은 통일제국이 형성된 한(漢)나라 이후부터 거의 모든 왕조가 환관(宦官)들의 정치참여로 인한 폐해가 극심하였다. 명나라도 말기에 접어들면서 그 해악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중국의 정치투쟁은 환관과 황실의 외척들, 그리고 유학자 사이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 정치인인 유학자들에게는 아무런 전문적인 지식도 원대한 철학도 갖추지 못한 이들이 황제의 측근에서 권력을 행사하여 정치를 문란하게 만드는 것을 坐視(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에도 환관과 유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정치투쟁이 벌어졌다. 환관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정치적 結社(결사)는 1604년 顧憲成(고헌성)과 高攀龍(고반룡)이 세운 東林書院(동림서원)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그들을 "東林黨(동림당)"이라고 불렀다.
동림당의 주요 지지기반은 송대 이후 꾸준히 개발되어온 양자강 이남의 도시민과 농민들이다. 잦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확보를 위한 과도한 조세와 권력층에 의한 土地兼倂(토지겸병)은 중산층을 몰락시켰고, 부패한 환관에 의한 정치적 문란은 유능한 인물의 정치참여를 가로막아 국민의 희망을 앗아갔다. 더구나, 명나라가 이민족과의 전쟁으로 약해지자 만주족이 강력한 세력을 확장하면서 위협을 주고 있었다.
국민들은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정치의 개혁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환관들과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는 동림당에 유일한 기대를 걸게 된다.


   1615년이 되자 동림당은 환관의 정치적 음모를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기 시작한다. 1616년, 드디어 만주족이 청나라를 건국하자 위기의식은 더욱 고조되고, 동림당과 환관의 정치적 대립은 향후 10년간 마치 송대의 新法派(신법파:王安石으로 대표)와 舊法派(구법파:具楊修로 대표)의 대립을 연상할 정도로 극심해진다.
1624년, 동림당의 楊漣(양련)이 환관파의 수령 魏忠賢(위충현)을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위충현의 반격을 받아 동림당이 궤멸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御使(어사)의 자리에 있던 황종휘의 아버지 黃尊素(황존소)도 동림당에 속하여 1626년 옥사하게 된다. 격분한 황종휘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송곳을 품고 상경하였으나 원수인 위충현은 이미 실각하여 자살을 한 뒤였다. 실망한 황종휘가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불같은 그의 성품으로 보아 이 사건이 이 후의 그의 인생에 주요한 계기가 되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위충현의 사후부터 1644년 명이 멸망하기까지 동림당이 정치적 재기를 하였으나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 잡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다.


   1630년, 황종휘는 정치적 결사의 색채가 짙은 문학결사인 復社(복사:周易의 64괘 중 하나인 地雷復괘에서 따온 이름으로 23번째 山地剝괘 다음의 상황을 의미한다. 즉 窮則復이니 옛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야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經을 통하여 왕도를 밝히고 史를 통하여 王事를 분명히 하자는 운동으로 문헌의 고증활동이 주를 이루었다)에 참여하였고, 1642년 中書舍人(중서사인) 이라는 벼슬에 추천되었으나 사퇴하였고 명나라가 멸망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世忠營(세충영)"이라는 의용군을 조직하여 청나라에 대항을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명이대방록"은 황종희가 아직 명나라의 부흥을 꿈꾸고 있던 1663년에 간행된다. 지식인으로 행동인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의 바람이 잘 담겨진 명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책이름에서 "明夷"는 주역의 36번째 괘인 地火明夷괘에서 따왔다. "夷"는 이지러진다는 뜻이므로 "明夷"는 "밝음이 이지러져 아직도 충분한 빛이 발휘되지 못하는" 상황을 말한다. 先天과 後天의 변혁기로 마치 주나라 文王이 琉璃獄(유리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나 箕子(기자)가 거짓으로 미친 짓을 하여 폭군인 紂王(주왕)의 밑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어진 사람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는 암흑기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문왕이 유리옥에서 周易(주역)을 발전시켰고 기자가 洪範(홍범)을 전했던 것처럼 자신도 명이대방록을 지어 현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겠다(待訪)는 의지를 제목에 표명한 것이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시대적 폐단을 역사적 배경 속에서 찾아 해부하고 만약 현군이 나타나 바른 정치의 도를 물으면 준비된 명이대방록을 내어놓고 답변하겠다는 것이다. 일종의 황종희식 時務策(시무책)인 것이다.


   이 책은 황종희의 뛰어난 역사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통렬한 현실비판과 애국충정 그리고 기발하고 빼어난 정치적 아이디어가 살아 숨쉰다. 책의 내용은 顧炎武(고염무)가 쓴 서문과 후학인 全祖望(전조망)이 붙인 짧은 跋文(발문)을 빼면 自序(자서)를 포함하여 1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경제, 군사, 행정을 논한 부분은 중국역사의 구체적 사실적 문제점을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어서 상당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19세기말에 중국이 다시 대내외적으로 혼란에 빠졌을 때 어려운 인쇄사정 속에서도 수만부가 인쇄되어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다.


명이대방록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정치편
*原君-군주에 대하여 논한 것으로 지나친 군주의 권한을 억제
*原臣-신하에 대하여 논한 것으로 민권을 향상시킬 것.
*原法-법제론
*置相-재상제도를 설치.


2.교육편
*학교-교육의 대상을 학생들만이 아니라 閭閻(여염)의 백성들에서부 터 최고의 관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재교육에 이르기까지 확대.


3.경제편
*田制-토지제도의 개혁
*財政-재정과 세제의 개혁


4.군사편
*方鎭(방진)-변방의 방비와 인접 국가에 대한 외교
*兵制-모병, 양병, 군사적 직제, 복무규정, 군대의 사기


5.행정
*取士(취사)-상급 관리의 모집과 선발
*建都(건도)-도시의 건설
*胥吏(서리)-하급관리의 채용과 관리
* 宦(엄환)-환관의 임용과 관리


   정치, 경제, 사회, 행정, 교육 등의 여러 분야에서 기준점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이 책은 주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왜 우리에겐 황종희와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는가? 아니면 적어도 명이대방록을 한 번쯤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경진년 10월 23일 새벽 1시

 


cafe.daum.net/daerobang/8CL1/9   대로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