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大陸]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장성[長城]만리장성[萬里長城]

2016. 5. 1. 18:20우리 역사 바로알기



       대륙[大陸]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만리장성[萬里長城]| 조선사 일반 이야기 게시판

환국고려 | 조회 428 |추천 1 | 2015.12.13. 15:49



                     대륙[大陸]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장성[長城]만리장성[萬里長城]



   오늘날, 역사서[歷史書]를 통하여 역사[歷史]를 배우지 않고, 공교육[公敎育]을 통하여 학교[學校]에서 역사[歷史]를 배운 사람들은,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과는 전혀 다른 역사[歷史]를,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렇게 알고 있다.

그 누가 국가[國家]와 국민[國民]들을 속이고, 국민[國民]과 후세[後世]들을 우롱[愚弄]하며, 기만[欺瞞]하고 있는 것일까 ?



지금의 중국[中國]도 역사[歷史]의 왜곡[歪曲]에는 일가견[一家見]이 있으니, 중국[中國] 최고의 명문대학[名文大學]이라고 하는 북경대학[北京大學]의 역사[歷史]에 대한 설명을 보면, 진시황[秦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지금 중국[中國]의 서안[西安] 북[北]쪽에 있는 장성[長城]으로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歷史]에 대한 설명이 맞는 것일까 ?

이러한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한 북경대학[北京大學]의 설명은, 소위 고지도[古地圖]라고 하는 것과 맥락[脈絡]을 같이하고 있다.



사마천[司馬遷]이 살았던 시대[時代]는, 진시황[秦始皇]의 진[秦]나라와 그 상거[相距]가 멀지않다. 그렇다면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말하는 시황[始皇]이 쌓은 장성[長城] 지역과, 오늘날 북경대학[北京大學]이 주장하는 장성[長城]에 대한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은 무엇일까 ?

이 둘 중의 하나는 분명[分明]히 거짓의 역사[歷史]를 말하고 있다. 누가 시황[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 위치[位置]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



역사[歷史]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고 있는 곳은 바로 북경대학[北京大學]이다. 이 북경대학[北京大學]도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있으며, 거짓의 역사[歷史]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歷史]에 대한 왜곡[歪曲]과 거짓은, 중국[中國]의 현지[現地]에서 그대로 그 허상[虛像]이 들어나고 있다.



연도[燕都]가 있는 지역은,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시황[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동[東]쪽으로 요동[遼東]까지 이르렀다고 역사[歷史]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연도[燕都] 즉 연경[燕京]이 있던 지역은, 지금의 천산[天山] 북로[北路]와 알타이산맥의 서남[西南] 지역이다.



이 지역[地域]에 살고 있는 현지[現地]의 역사[歷史]에 대한 설명을 보면, 원[元]의 대도[大都], 금[金]의 중경[中京], 명[明]의 연경[燕京]과 명[明]나라가 설치한 삼위[三衛], 타안[朵顏], 복여[福余], 태령[泰寧], 청[淸]의 연경[燕京]인 북경[北京], 거용관[居庸關]과 산해관[山海關]지역에 있었던 고북구[古北口]등이 모두 이 지역[地域]에 있었다. 고, 기술[記述]하고 있다.



명[明]나라의 삼위[三衛]인 복여[福餘]와 태령[泰寧]에 대하여,............ 다산[茶山]선생은, 지리책[地理策]에서,.............. 돈황[燉煌]과 장액[張掖]은 참으로 흉노[匈奴]의 오른팔에 해당하고, 복여[福餘]와 태령[泰寧]은 충분히 몽고[蒙古]를 방어할 수 있는 요새지[要塞地]인데, 그 지방을 영토[領土] 안으로 떼어들이거나 방어선을 철수함에 따라, 흉노[匈奴]와 몽고[蒙古]가 쇠약[衰弱]해지기도 하고, 번성[蕃盛]해지기도 했던 것은 정말 자연[自然]의 형세[形勢]입니다.燉煌張掖。實爲匈奴之右臂。福餘泰寧。足塞蒙古之咽喉。則其折其撤而或衰或熾者。固其勢也,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연경[燕京]에 대하여, 정조대왕[正祖大王]은,............ 연경[燕京]은 호[胡]와 인접[隣接]해 있어서 언제나 오랑캐가 침범[侵犯]하는 염려[念慮]가 많았다. 지리[地利]의 조건들이 이러한데도, 천하[天下]를 제압[制壓]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 燕都近胡。每多憑陵之慮。地利如此。猶得以控制天下者何歟, 이렇게 말했다.

연경[燕京]은, 호[胡] 즉 흉노[匈奴]와 인접[隣接]해 있었다는 말이다.



기언[記言]증이시랑봉사여연서[贈李侍郞奉使如燕序]에서, 호[胡]라고 불리는 흉노[匈奴]의 종족[種族]과 유래[由來]에 대하여,............. 막남[漠南]의 여러 나라는 옛날 북융[北戎]의 유민[遺民]으로 주[周]나라 때에는 험윤[獫狁], 훈육[葷粥], 견융[犬戎]으로 불렸고, 진[秦], 한[漢] 때에는 흉노[匈奴]라고 불렸는데, 활쏘기에 능해서 사냥을 하여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공벌[攻伐]을 능사로 삼는다. 漠南諸國。古北戎遺種。周時。爲獫狁,葷粥,犬戎。至秦,漢時。爲凶奴。善彎弓射獵。食肉衣皮。以攻伐爲能



그 땅은 몹시 추운 곳이 많기 때문에 오곡[五穀]이 자라지 않아 밭 갈아 농사짓는 일이 없고 물과 풀을 따라서 옮겨 다니니 천성[天性]이 그러하다. 그 종족[種族]에 적적[赤翟], 백적[白翟], 동호[東胡], 산융[山戎], 구연[胊衍]이 있고, 그 밖에 돌궐[突厥]이 계곡에 흩어져 있는데 견적[堅敵]이라고 부른다.

其地多苦寒。五穀不生。無耕田農作之業。逐水草遷徙。天性然也。有赤翟。有白翟。有東胡,山戎,胊衍。其外突厥。分散谿谷。號爲堅敵



진시황제[秦始皇帝]가 몽염[蒙恬]을 보내 44현[縣]에 성[城]을 쌓았는데, 구원[九原]과 운양[雲陽]에서부터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만여리[萬餘里]를 쌓아서 호[胡]를 막았다. 秦始皇帝遣蒙恬。築四十四縣。自九原,雲陽。至遼東萬餘里以防胡



명[明]나라가 일어나 호[胡]인 원[元]을 무찔러 축출하고 나서, 위엄[威嚴]으로 천하[天下]를 복종시킬 생각으로 황제[皇帝]가 직접 북[北]쪽 변새[邊塞]에 거주하면서 호[胡]를 제압하려 하였지만, 겨우 6세[六世] 경황제[景皇帝] 때에, 영종[英宗]이 호[胡]에게 사로잡히고, 10세[十世]가 못 되어 호[胡]가 다시 쳐들어와 천하[天下]를 망[亡]하게 하였으니, 그런 뒤에야 성인[聖人]의 제도[制度]가 다하였음을 알게 되었다.有明之興。旣擊逐胡元。思以威服天下。躬居塞北以臨胡。才六世景皇帝。陷於胡。不出十世。胡復入亡天下。然後乃知聖人之制盡矣,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연경[燕京]과 요동[遼東], 그리고 고조선[古朝鮮]에 대하여는, 증이시랑봉사여연서[贈李侍郞奉使如燕序]에서,.......... 요동[遼東] 밖은 숙신[肅愼]과 조선[朝鮮]인데, 뒤에 구려[句麗]와 말갈[靺鞨]이 되었다. 주관[周官] 주례[周禮], 직방[職方]에 동북[東北]은 유주[幽州] 땅이니, 그 진산[鎭山]은 의무려[醫巫閭]이다. 하였는데, 현도[玄菟]는 의무려산[醫巫閭山] 아래에 있다. 遼東以外肅愼,朝鮮。後爲句麗,靺鞨。周官職方。東北爲幽州之地。其山鎭曰醫巫閭。玄菟在醫巫閭下



조선[朝鮮]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가 다스리던 곳인데, 지금 평양[平壤]에 기자견[箕子畎]이 있다. 마침내 산해관[山海關]을 들어가 150리[百五十里] 지점에 고죽국[孤竹國] 터가 있는데,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묘[廟]가 있다. 그곳으로부터 580리[五百八十里] 지점이 연경[燕京]인데, 제왕[帝王]이 거주한 곳이다. 朝鮮檀君,箕子之治。今平壤有箕子畎。遂入關百五十里。孤竹墟。有伯夷,叔齊廟。五百八十里。燕京。帝王之居,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현지[現地]의 역사[歷史]에 대한 기술[記述]과,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과 더불어, 현지[現地]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산천[山川], 지리[地理], 자연환경[自然環境]등을 고증[考證]해 보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말하는 시황[始皇]의 장성[長城]이 있는 지역은, 서안[西安]에서 서북[西北]으로 만여리[萬餘里] 떨어져 있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남북[南北] 지역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史實]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오늘날 중국[中國]의 역사[歷史]는, 거짓과 진실[眞實]이 교차하는 시아비아[是我非我]의 역사[歷史]일 뿐이다.

중앙정부[中央政府]는 새로운 거짓의 역사[歷史]를 만들어가고 있고, 지방정부[地方政府]는,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을 찾아가고 있으니, 중국[中國]의 역사[歷史]라는 것은, 회비[悔非]가 교차 할 수밖에 없다.



현재[現在], 사서[史書]가 말하고 있는 중국[中國] 지역의 지명[地名]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바뀌어져 있다.

이 지명[地名]이 바뀌어진 시기[時期]는, 민국[民國]의 시대[時代]였다.

그리고 본래 연경[燕京]이 자리 잡고 있던 지역[地域]의 옛 지명[地名]들은, 모두 몽고어[蒙古語]로, 지명[地名]을 바꾸어 표시[標示]하고 있다.



왜 그들은 이곳의 지명[地名]들을 모두 몽고어[蒙古語]로 바꾸어 부르고 기록[記錄]을 하고 있을까 ?

그것은 이 지역이 몽고[蒙古]와 여진[女眞]이 활동한 중심[中心] 지역이기도 하지만, 옛 역사[歷史]를 은폐[隱蔽]하고 감추기 위하여, 지명[地名]을 옮기다보니, 그러한 술책[術策]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역사[歷史]가 감추어지고, 수[數] 천년[千年]의 역사[歷史]가 지워 지는 것이 아니다.



그 후손[後孫]들이 그 지역 선대[先代]의 역사[歷史]를 모두 밝히고 있으니, 역사[歷史]의 왜곡[歪曲]과 거짓은, 지금[只今] 이 시대[時代]에, 그 허상[虛像]이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여기서 이들의 역사[歷史]에 대한 기록[記錄]들을 살펴보면, 대륙[大陸]의 조선[朝鮮]이 반도[半島]로 이식[移植]되는, 일면[一面]의 역사[歷史]에 대한 사실[史實]이 들어나고 있다.



이미 들어나고 있는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사실[史實]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면, 조선[朝鮮]이 망[亡]할 때, 양이[洋夷]와 일제[日帝]가 밀고 들어 왔으며, 그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대륙조선[大陸朝鮮]의 빈 땅에,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일어났고, 청[淸]의 마지막 남은 세력도 조선[朝鮮]으로 들어왔다.



이때, 조선사[朝鮮史]는, 양이[洋夷]와 일제[日帝]에 야합[野合]한 민국[民國]의 부역자[附逆者]들과 청[淸]의 잔당[殘黨]들에 의하여,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역사[歷史]의 참화[慘禍]를 입고, 대륙[大陸]이 반도[半島]로 뒤바뀌는 오늘날의 처참[悽慘]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지금의 북경[北京]이 연경[燕京]으로 둔갑[遁甲]한 것도, 바로 이 시기[時期]였으며, 이때를 전후[前後]하여 자금성[紫禁城]의 개조[改造]작업도 대대적으로 진행 되었다.

이러한 것은, 현재[現在], 남아 있는 당시[當時]의 역사[歷史] 기록들이 분명[分明]하게 증명[證明]하고 있다.



특히 일제[日帝]의 사악[邪惡]하고 악랄[惡辣]한 조선사[朝鮮史]에 대한 말살[抹殺]의 음모[陰謀]는, 조선사[朝鮮史]의 반도[半島] 이식[移植]과 더불어, 대륙[大陸]의 조선사[朝鮮史]를 반도[半島]에 꿰맞추기 위하여,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를 어지럽히고, 일제[日帝]에 부역[附逆]하는 식민[植民]의 사학자[史學者]들을 많이 양성[養成]하고 배출해 놓았다.

이들이 바로 광복[光復] 이후로 일제[日帝]의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충실히 따라가는 국사학계[國史學界]의 강단사학자[講壇史學者]들이다.



이들은, 역사학자[歷史學者]라고 하지만, 역사[歷史]의 사실[史實]과 진실[眞實]은, 아예 안중[眼中]에도 없으며,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도 소용이 없고, 과거 일제[日帝]에게 배운 알량한 지식[知識]만이 충족[充足]해 있을 뿐,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에 대한 고금[古今]의 역사[歷史]와, 미래[未來]를 염려하는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천년대계[千年大計]에는, 관심[關心]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할 수 있겠는가 ?



광복[光復] 이후로, 그들은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에 대하여, 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충실히 이행 해 왔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그들의 이러한 행태와, 역사학계[歷史學界]의 권력[權力]을 잡고, 국사[國史]라는 미명[美名]아래, 국민[國民]과 자라나는 세대[世代]인 어린 학생[學生]들에게, 거짓과 왜곡[歪曲]의 역사[歷史]를, 국사[國史]라고 하면서, 당당[堂堂]히 가르치는 것을 보면, 그 들이 어떠한 부류[部類]의 학자[學者]들 이라는 것은, 그 들 스스로 자신[自身]들의 모습을, 만천하[滿天下]에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韓國] 역사학계[歷史學界]의 실정[實情]이 이러한데, 일본[日本]과 중국[中國]이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한다고 해서, 무엇으로 그 자[者]들을 반박[反駁] 할 수 있겠는가 ?

한국[韓國]의 역사학계[歷史學界]는,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이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것을 보면서도 반박[反駁]은 고사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역사[歷史]의 왜곡[歪曲]을 계속하고 있는 당사자[當事者]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한다고 어찌 반박[反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



이러한 것들은 한국[韓國]의 사학계[史學界]가, 스스로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하며 무너트리고, 그들 스스로 자초[自招]하고 있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의 부끄러운 현실[現實]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처참[悽慘]하게 무너트린 그 자[者]들이, 한국[韓國]의 역사학계[歷史學界]를 바라보며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오호통재[嗚呼痛哉]라. 탄식[歎息]하고 탄식[歎息]하며 통탄[痛歎]을 금[禁]할 길이 없도다.

진실[眞實]로 선대[先代]와 후세[後世]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



사기권육[史記卷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제육[第六]

分天下以為三十六郡,郡置守﹑尉﹑監。更名民曰「黔首」。大酺 [중략]

천하[天下]를 나누어 36개의 군[郡]을 두었다. 군[郡]마다 군수[郡守)ㆍ군위[郡尉] 군감[郡監]을 두었다.

그리고 백성[百姓]을 검수[黔首]라 바꿔 부르고, 큰 연회를 베풀었다. [중략]



收天下兵,聚之咸陽,銷以為鐘鐻,金人十二,重各千石,置廷宮中 [중략]

천하[天下]의 병기를 몰수하여 함양[咸陽]에 모아놓고 녹여서, 무게 천석[千石]의 종[鐘]과 악기, 12개의 금인[金人]을 만들어, 모두 조정[朝廷]의 궁중[宮中]에 안치 했다. [중략]



一法 度衡石丈尺。車同軌。書同文字 [중략]

그리고 법[法]과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였으며, 마차[馬車]의 폭과, 문자[文字], 서체[書體]를 통일 했다. [중략]



地東至海暨朝鮮,西至臨洮羌中,南至北向戶,北據河為塞,並陰山至遼東 [중략]

진[]나라 영토는 동[東]쪽으로 바다와 조선[朝鮮]에 이르고, 서[西]쪽으로는 임조[臨洮], 강중[羌中], 남[南]쪽으로는 북호[北戶]까지 미쳤다. 그리고 북[北]쪽으로 하[河]를 따라 새[塞]를 구축하여, 음산[陰山]과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중략]



皇帝之德,存定四極。誅亂除害,興利致福。節事以時,諸產繁殖。黔首安寧,不用兵革。六親相保,終無寇賊。驩欣奉教,盡知法式 [중략]

황제[皇帝]의 덕[德]으로 사방이 안정 되었으며, 난[亂]을 토벌하고 해악[害惡]을 제거하여, 복[福]과 이익[利益]이 더욱 크게 일어나게 하였다. 모든 일에 때를 맞추니 생산은 크게 늘어나고, 백성[百姓]들이 편안하니 병혁[兵革]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육친[六親]이 서로 보호하고 돌보니, 구적[寇賊]이 없어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교화[敎化]를 받들며 법식[法式]을 알게 되었다. [중략]



六合之內,皇帝之土。西涉流沙,□南盡北戶。東有東海,北過大夏。□人□所至,無不臣者。功蓋五帝,澤及牛馬。莫不受德,各安其宇 [중략]

육합[六合]의 안이 모두 황제[皇帝]의 영토[領土]이니, 서[西]쪽으로는 유사[流沙]를 건너고, 남[南]쪽으로는 북호[北戶]에 이르며, 동[東]쪽으로는 동해[東海]에 닿고, 북[北]쪽으로는 대하[大夏]를 지나간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신하[臣下]가 아닌 지역이 없었다. 그 공[功]은 오제[五帝]를 뛰어넘고, 은택[恩澤]은 소와 말에까지 미쳤으며, 그 덕[德]을 입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모두 각각 편안함을 누렸다. [중략]



굳이 사서[史書]을 들어 논증[論證]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역사[歷史]는 무너질 대로 무너지고, 피폐[疲弊]해져 있다. 일만년[一萬年]을 이어 내려온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는, 100년[百年]도 안 되는 찰나[刹那]의 시간 속에서, 일만년[一萬年]의 뿌리조차, 희미[稀微]한 한줄기의 광명[光明]만을 간직하고, 아득히 저 멀고 먼 암흑[暗黑]속에서, 가느다란 서광[瑞光]만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중국[中國]의 대명사[代名詞]처럼 불리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시황[始皇]과 명[明]나라의 장성[長城]으로 둔갑[遁甲]하여, 조선사[朝鮮史]를 오욕[汚辱]과 치욕[恥辱]의 나락으로 밀어 떨어트리고 있다.

이 장성[長城]이, 어찌 시황[始皇]과 명[明]나라의 장성[長城]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말하고 있듯이, 진시황[秦始皇]의 진[秦]나라는,........... 서[西]쪽으로 유사[流沙]를 건너고, 남[南]으로 북호[北戶]에 이르며, 동[東]으로는 동해[東海]에 닿고, 북[北]쪽으로 대하[大夏]를 지나간다. 西涉流沙,□南盡北戶。東有東海,北過大夏 고, 말하고 있는데 시황[始皇]의 진[秦]나라는 이러한 지역[地域]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왜곡[歪曲]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지금의 역사[歷史]에 대한 해설[解說]에서도, 대하[大夏]는, 카스피해와 아랄해의 유역[流域]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진시황[秦始皇]의 천하통일[天下統一]이라는 것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작은 소국[小國]들을 통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史實]을 분명[分明]히 직시[直視]해야 한다.



거창[巨創]하게 말해서, 말이 천하통일[天下統一]이지, 지금의 중국[中國] 대륙[大陸]의 태반[太半]을 차지하고 있던 삼한[三韓]의 지역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삼한[三韓]중의 하나였던 신라[新羅]가, 시황[始皇]의 진[秦]나라 전쟁을 피해서 동[東]쪽으로 피난해온 유민[流民]들이 세운 국가[國家]라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은, 진시황[秦始皇]의 진[秦]나라가 어느 지역에 있던 나라였는지를 단적[端的]으로 증명[證明]하고 있다.



시황[始皇]이 장성[長城]을 쌓은 것은, 흉노[匈奴]를 막기 위해서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의 경사문[經史門], 장성[長城]편에서도,......... 흉노전[匈奴傳]을 인용[引用]하여,.......... 진[秦]나라의 소왕[昭王]이 장성[長城]을 쌓아서 오랑캐를 막았고,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도 역시 장성[長城]을 쌓아서 대[代], 병[並], 음산[陰山]의 아래로부터 고궐[高闕]에 이르기까지 새[塞]를 만들었다. 秦昭王築長城以拒胡而趙武靈王亦築長城自代並隂山下至髙闕為塞



연[燕]나라도 역시 장성[長城]을 쌓아서 조양[造陽]으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 대개 7국[七國] 가운데서 3국[三國]이 오랑캐의 땅과 이웃하였으므로 다 장성을 쌓아서 변새[邊塞]로 만들었은즉, 시황[始皇]은 마침내 그것을 연하여 증수[增修]한 것이었다. 盖七國之中三國邉扵胡而皆築長城為塞則始皇乃因以增修之也, 라고, 설명하고 있다.



진[秦], 조[趙], 연[燕]나라의 3국[三國]은, 흉노[匈奴]와 국경[國境]을 마주하고 있었다.

진[秦]나라를 이어 일어난 한[漢]나라도, 흉노[匈奴]와의 전쟁으로, 낮과 밤을 새웠다. 고구려[高句麗]는, 흉노[匈奴]의 지역을 대부분 점령[占領]한 적이 있었다.

이 흉노[匈奴]는, 중앙아시아[中央亞細亞]가 그들이 활동한 중심[中心] 지역이며, 훗날, 몽고[蒙古]와 청[淸]나라의 일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장성[長城]편에서,............ 진 시황[秦始皇]이 장성[長城]을 쌓으면서 졸도[卒徒] 30만을 징발하여 지형에 따라 험한 데를 이용하여 새[塞]를 만들었는데, 만여리[萬餘里]를 뻗쳤다. 始皇築長城發卒三十萬因地形用險制塞延袤萬餘里, 이렇게 말하고 있으며,



성호사설[星湖僿說]의 회남왕전[淮南王傳]편에서는,........... 사기[史記]의 회남왕전[淮南王傳]에, 몽염[蒙恬]이 장성[長城]을 쌓는데 동서[東西]로 수 천리였다. 하였으니, 만리[萬里]를 뻗쳤다는 것과는 같지 않다. 史記淮南王傳云蒙恬築長城東西數千里與延袤萬里者不同, 라고 하며, 시황[始皇]의 장성[長城]이 만리[萬里]라고 하는 설에 대하여, 회남왕전[淮南王傳]을 인용[引用]하여 의문[疑問]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또, 회남자[淮南子]을 인용[引用]하여,.............. 회남자[淮南子]에 이르기를, 군사 50만 명을 징발하여 몽공[蒙公], 양옹[楊翁]을 시켜서 성[城]을 쌓아 수리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유[劉]씨의 세대는 또한 진[秦]나라의 세대와 가까운지라 반드시 상고한 바 있었을 줄 믿는다. 淮南子云發卒五十萬萬使蒙公楊翁將築修城劉亦近秦必有所考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과연 시황[始皇]이, 천하[天下]를 통일하고 만리[萬里]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았다고 하는 것은 맞는 것인가 ?

성호[星湖]선생은, 시황[始皇]의 장성[長城]을 쌓는 공역[公役]에 대하여, 대개 30명이 1리를 쌓았다 하였으니, 그 지형[地形]을 따랐다고 일렀지만, 30명의 힘이 능히 이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盖三十人築一里縦曰因其地形三十人之力其能至扵是耶, 라고, 시황[始皇]의 군사 30만[三十萬]이 만리[萬里]에 걸쳐 장성[長城]을 쌓았다는 것에 대하여, 회의적[懷疑的]인 생각을 술회[述懷]하고 있다.



시황[始皇]의 장군이었던 몽염[蒙恬]]이 군사 30만[三十萬]을 거느리고,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만여리[萬餘里[에 이르렀다.

그리고 북[北]쪽으로 하[河]를 따라 새[塞]를 구축하여, 음산[陰山]과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몽염[蒙恬]이 장성[長城]을 쌓는데 동서[東西]로 수[數] 천리[千里]였다.

군사 50만 명을 징발하여 몽공[蒙公], 양옹[楊翁]을 시켜서 성[城]을 쌓아 수리하게 하였다.

이러한 것이 진시황[秦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하여 전[傳]해지는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들이다.



시황[始皇]이 장성[長城]을 쌓은 시기는, 기원전 200년을 전후[前後]한 시기[時期]였다.

연도기행[燕途紀行]에서는, 시황[始皇]의 장성[長城]은, 그 터만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다른 연행록[燕行錄]에서는, 시황[始皇]의 장성[長城]은, 이미 모두 허물어져 수풀만이 우거져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 장성[長城]은, 흔적[痕迹]조차도 없어질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시황[始皇]의 장성[長城]은, 천산[天山]의 지맥[地脈]을 끊고 지나갔다고 하는데, 천산[天山]은, 중앙아시아[中央亞細亞]의 중심[中心]에서, 아시아의 동서[東西]를 나누는 산[山]이다.

지금의 중국[中國] 대륙[大陸]에 있는 장성[長城]이, 시황[始皇]의 장성[長城]을 이어서, 지금의 산해관[山海關]까지 명[明]나라가 증축[增築] 했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조선[朝鮮]의 세종대왕[世宗大王]에게 올린 청함평양도설관소[請咸,平兩道設關疏]에서,............ 지금 중조[中朝]에서도 산해위[山海衛]로부터 요동[遼東]에 이르는 수[數] 천리[千里]의 땅 북[北]쪽으로 참호를 파고 보[堡]를 쌓으며 나무를 심어서 북[北]쪽 오랑캐가 감히 엿볼 마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今中朝亦自山海衛。至遼東數千里之北。鑿塹築堡樹木。北胡不敢有窺覦之心



중조[中朝]의 장성[長城]이 비록 만리[萬里]라고 이르기는 하지만, 산해위[山海衛]의 관[關]을 보면,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곳에만 쌓는 데에 그쳤으니, 반드시 평탄하고 험난한 것을 따지지 아니하고 모두 다 쌓았던 것은 아닙니다. 中朝長城。雖云萬里。以山海衛關觀之。止於人行可通處築之。未必不論夷險而皆築也, 이렇게 설관소[設關疏]를 올리고 있다.



연경[燕京]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산해관성[山海關城]은, 장성[長城]과 연결된 장성[長城]이 아니었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오백년[五百年]의 역사[歷史]에, 찬란[燦爛]한 족적[足跡]을 남긴 분이다. 육진[六鎭]을 개척했으며, 한글을 창제[創製]했고, 함길도[咸吉道]와 평안도[平安道]의 방비를 위하여, 많은 성[城]과 장성[長城]을 축조[築造] 하였다.



당시[當時] 명[明]나라의 요동[遼東]과 산해관[山海關]을 손바닥 보듯이 상세히 알고 있던 조선[朝鮮]의 대신[大臣]이, 세종대왕[世宗大王]같은, 성군[聖君]앞에서, 설관소[設關疏]를 올리면서, 사실[事實]이 아닌 내용을 과장하여 진언[進言] 하였을까 ?



연경[燕京]을 방어[防禦]하기 위하여 명[明]나라는, 산해관[山海關]의 장성[長城]을 쌓았다. 그렇다면 이 연경[燕京]과 산해관[山海關]은, 어떠한 지역[地域]에 위치[位置]하고 있었을까 ? 여기서 조선[朝鮮] 사람이 아닌 청[淸]나라 초기의 문인[文人] 이었던 오조건[吳兆騫]의 시[詩]를 보기로 한다.



추가집[秋笳集]

송합좌령지조선[送哈佐領之朝鮮]

오조건[吳兆騫]

모자에는 초피 달고 붉은빛 겹옷 에 帽側溫貂繡袷紅

수놓은 모직 띠에 붉은 각궁 차고 蹙金氈帶兩騂弓

해 뜰 녘에 수레와 말 강 건너서 출발하니 平明車騎凌江發

[원문 빠짐] 깃발은 사막[沙漠]을 건너 가는구나 □□旌旗度漠空


토령은 변경 밖서 하늘을 나누었고 菟嶺天分邊草外

웅진은 바다 동쪽에서 땅을 격하였도다. 熊津地隔海潮東

담소 속에 먼 변방 조용해질 것이거니 知君談笑遐荒靜

그 어찌 백 번 싸운 순체의 공 과시하랴. 百戰寧誇荀彘功



이 시[詩]는, 청[淸]나라에서 조선[朝鮮]으로 가는 사신[使臣]에 대하여, 그 정경[情景]을 읊은 것이다.

청[淸]나라의 오조건[吳兆騫]은, 이렇게 그 연경[燕京]과, 조선[朝鮮] 경계[境界]지역[地域]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을, 시[詩]를 통하여 노래하고 있다.

연경[燕京]에서 조선[朝鮮]으로 가는 길에는 사막[沙漠]이 가로질러 자리 잡고 있었다. 연경[燕京]과 조선[朝鮮]의 사신[使臣]들은, 이 사막[沙漠]을 건너서 수[數] 백년[百年]을 서로 오고 갔다.

여기서 삼탄집[三灘集]의 시[詩] 한편을 더 보기로 한다.



삼탄집[三灘集]

차운기병부제김참의부경환출관도[次韻祁兵部題金參議赴京還出關圖]

균천 모습 꿈속서도 분명하게 기억하니 鈞天尙記夢分明

열두 개의 경루에다 백옥경이 있었다네 十二瓊樓白玉京

쌍대궐은 우뚝 솟아 구름 속에 닿아 있고 雙闕岧嶢雲影合

천 관원들 엄숙하여 패옥 소리 가벼웠네 千官肅穆佩聲輕 [중략]


우뚝 높아 구름 비낀 분첩 모습 분명하니 矗矗雲橫粉堞明

금성탕지 만고토록 신경[神京] 주위 감싸 있네 金湯萬古擁神京

땅은 사막[沙漠]에 다하여 남북[南北]을 나뉘었고 地窮沙漠分南北

형세는 또 중원 눌러 경중 되게 하였구나. 勢壓中原作重輕 [중략]



연경[燕京]은, 사막[沙漠]이 잇닿아 있는 지역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지금의 북경[北京] 지역은, 누가 어떠한 궤변[詭辯]을 늘어놓고 천지개벽[天地開闢]을 한다 해도, 이곳은 사막[沙漠]이 될 수 없는 지역[地域]이다.

황제[黃帝]의 도읍지[都邑地]였다는 탁록[涿鹿]은, 연경[燕京]의 지역[地域]이었다. 주[周]의 연[燕], 원[元], 명[明],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지역은 변함없이 장구[長久]한 세월동안, 그 자리에서, 옮겨진 적이 없었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장령흑룡[長嶺黒龍]편에서, 성호[星湖] 선생은, 그림을 보듯이, 중국[中國] 연경[燕京] 지역의 지리[地理]와 자연환경[自然環境]에 대하여, 논증[論證]하고 있다.......... 중국[中國]은 장성[長城] 밖에 있는 땅이 구주[九州]보다 크며, 기후[氣候]와 풍토[風土]가 전혀 다르고, 지리적[地理的] 사정도 같지 아니하다. 中國自長城以外大扵九州風氣絶殊險夷不同



중국[中國]에서는 한 번도 끝까지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저들은 기회를 이용하여 침략[侵略]해 들어올 때마다, 거침없이 밀고 들어온다. 華人未有窮入之理而彼之乗隙寇掠若建瓴然諺,......... 그러나 이오[夷吾]의 북[北]쪽과 낭고[狼姑]의 밖에까지도 나가서 칼을 휘두르며 공[功]을 세우는 일이 있었지만, 동북[東北] 지역은 산악[山嶽]이 중첩[重疊]되어 있어, 개벽[開闢]한 이래로 외부의 군대가 들어가 보지 못했다. 夷吾之北狼姑之外亦或可以鳴劒封功惟東北一隅重岡疊嶺地闢以後外兵不入



원 세조[元世祖]가 국경[國境]을 가장 멀리 개척하여 서[西]쪽으로 4년 동안 원정한 결과 인도[印度] 지역까지 들어갔었으나, 동진[東眞] 지방에 대해서는 공갈만 하였고, 감히 해[害]를 입히지 못하였다. 元世祖拓境最逺西征四年至扵印度東真一部哃喝而不敢加害,.......... 장건[張騫]과 정화[鄭和]는 서역[西域]지방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장령[長嶺]과 흑룡[黑龍] 사이에는 아무도 그 지역을 엿본 사람이 없었으니, 그 실정[實情]을 알 만하다. 張騫鄭和迹遍西域惟長嶺黒龍之間人莫有窺闖其際其形勢可見



중세[中世] 이전에는 주민도 적고 산물도 궁핍하여 발전할 능력을 갖지 못하였으나 유주[幽州], 병주[幷州], 영주[營州]의 3개 구역이 차츰 도회지[都會地]로 발전되어 옛날 12개 주[州]의 형태를 도로 찾았다. 中世以上人稀財乏不能自振及幽并營三區稍漸為都㑹復十二州之故而



그 땅이 연도[燕都]에서 수[數] 천리[千里]에 불과하니, 옛날 삭주[朔州]에 비하면 더욱 가깝다. 其地距燕都不過數千里之內比昔之朔北益近也, [중략]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장령흑룡[長嶺黒龍]편을 보면, 하[夏], 은[殷], 주[周], 진[秦], 한[漢], 당[唐], 송[宋], 금[金], 요[遼], 원[元], 명[明], 청[淸]나라 등, 중국[中國]이라 불리는 역대[歷代] 나라들의 지역[地域]들이, 어느 곳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疑問]을 풀어주고 있다.



중국[中國]의 동북[東北] 지역은 산악[山嶽]이 중첩[重疊]되어 있어 개벽[開闢]한 이래로 외부의 군대[軍隊]가 들어가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지형[地形]과 지세[地勢], 자연환경[自然環境]을 지니고 있는 지역은, 반도[半島]의 북[北]쪽에는 없다.

왜곡[歪曲]된 지금의 역사[歷史]로 본다면, 중국[中國]의 동북[東北] 지역은,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있는 동북[東北] 삼성[三省] 지역이 된다.



이곳이 산악[山嶽]이 중첩[重疊]되어 있어서, 개벽[開闢]한 이래로 외부의 군대[軍隊]가 들어 갈 수 없는 지역이 될 수 있을까 ?

이러한 지세[地勢]와 자연환경[自然環境]을 가지고 있는 동북[東北] 지역은, 아시아의 동북[東北] 지역을 모두 포함하여 말한다고 해도, 단 한 곳 밖에 없다.

오늘날 알타이산맥의 동북[東北] 지역과, 바이칼호에 이르는 북부[北部] 지역이 있을 뿐이다.



이 중첩[重疊]한 산악[山嶽] 지역[地域]에 자리를 잡고, 자칭[自稱] 동진황제[東眞皇帝]로 불렸던 동여진[東女眞]은,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와 국경[國境]을 마주하고 있어서, 조선[朝鮮]과의 분란[紛亂]이 빈번[頻繁]하게 일어났으며,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는, 원 세조[元世祖]가 국경을 가장 멀리 개척하여 서[西]쪽으로 4년 동안 원정한 결과 인도[印度] 지역까지 들어갔었으나, 동진[東眞] 지방에 대해서는 공갈만 하였고, 감히 해[害]를 입히지 못하였다. 고, 동진[東眞]의 지역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조선[朝鮮]의 북관[北關]인 함경도[咸鏡道]와, 여진[女眞]은, 이 지역에서 지경[地境]을 마주하고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에서, 야인[野人]들을 백두산[白頭山] 밖으로 쫓아냈다는 곳도, 바로 이 지역[地域]이며, 고려[高麗]의 윤관[尹瓘]장군이 동북면[東北面]를 정벌[征伐]하여,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9성[九城]을 쌓은 곳도 바로 이 지역[地域]의 일대였다.



지금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역사[歷史]중에,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은 얼마나 될 것인가 ?

특히, 조선사[朝鮮史]와 관련된 역사[歷史]에서는, 태반[太半]의 거짓 역사[歷史]를 배워 왔다.

오래전의 일이다. 고대[古代]의 역사[歷史] 사료[史料]들을 찾아가는 도중에, 인도[印度]에 관한 설명과, 인도[印度]의 지역을 표시[標示]한 역사지도[歷史地圖]를 본 적이 있다.



이 지도[地圖]에는, 인도[印度]가 오늘날 카스피해를 아우르는 지역에, 표시[標示]되어 있었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원 세조[元世祖]가 국경을 가장 멀리 개척하여 서[西]쪽으로 4년 동안 원정한 결과 인도[印度] 지역까지 들어갔었다는, 이 설명은, 그 인도[印度]를 표시[標示]하고 있는 역사지도[歷史地圖]와, 맥락[脈絡]을 같이하고 있다.



장건[張騫]과 정화[鄭和]는 서역[西域]지방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장령[長嶺]과 흑룡[黑龍] 사이에는 아무도 그 지역을 엿본 사람이 없었으니,......... 중세[中世] 이전에는 주민도 적고 산물도 궁핍하여 발전할 능력을 갖지 못하였으나 유주[幽州], 병주[幷州], 영주[營州]의 3개 구역이 차츰 도회지[都會地]로 발전되어 옛날 12개 주[州]의 형태를 도로 찾았다............ 이러한 성호[星湖]선생의 설명은, 간략[簡略] 하면서도, 의미심장[意味深長]한 역사[歷史]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날, 신강성[新疆省] 서북[西北] 지역인 탑성[塔城]과 발하슈호의 인근[隣近] 지역의 역사[歷史]를 설명하는 내용 중에, 흑룡강[黑龍江]은, 이 지역[地域]의 북[北]쪽에 있다고 분명[分明]히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역사[歷史]의 설명과, 그 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의 내용과 일치[一致]하고 있다.



유주[幽州] 병주[幷州], 영주[營州]의 지역은, 연경[燕京]이 있는 지역이며, 산해관[山海關]이 있는 지역이며, 요동[遼東]과 요서[遼西]가 있는 지역이며, 시황[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있는 지역[地域]이다.

원[元]과 명[明]과 청[淸]나라는 모두, 장령[長嶺]과 흑룡[黑龍]의 서남[西南] 지역에 있었다.



지금 중국[中國]의 남경[南京]이 명[明]나라의 남경[南京]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림도 없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지금의 남경[南京]인 이곳이, 명[明]나라의 남경[南京]이니, 지금의 북경[北京]이 연경[燕京]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북경[北京]을 감싸않고 동서[東西]를 가로 지르는 장성[長城]은, 시황[始皇]의 장성[長城]인 만리장성[萬里長城]이며, 이 장성[長城]을 이어서 지금의 산해관[山海關]까지는, 명[明]나라가 증축[增築] 했다.



이 장성[長城]은 진시황[秦始皇]이 쌓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이며, 명[明]나라가 이어서 쌓은 장성[長城]이며, 이것이 중국[中國] 대륙[大陸]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이러한 것이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한 중국[中國]의 역사[歷史]라는 것인데, 한마디로 웃기는 말이다.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고 했던가 ?



지금의 남경[南京]이 명[明]나라의 남경[南京]이 아니면, 지금의 북경[北京]도 연경[燕京]이 아니며, 그렇다면 지금 중국[中國]의 만리장성[萬里長城]도 시황[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아니다.

1700년대[千七百年代] 말기[末期]에, 명[明]나라의 남경성[南京城]과, 그 주위의 산천[山川]과 성곽[城郭]을 정밀[精密]하게 그린 그림이 있다.

이 그림 한 장으로도, 지금의 남경[南京]이 명[明]나라의 남경[南京]이라고 하는 거짓이 백일[白日]하에 들어나고 있다.



그 그림을 보면, 남경성[南京城]은, 성곽[城郭] 자체가 다르며, 남경성[南京城] 주위의 산천[山川]과 지형[地形] 지세[地勢]는, 아예 이국적[異國的]이다.

역사[歷史]를 속이고, 국민[國民]을 속이고, 천하[天下]를 속인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천하[天下]가 속고, 국민[國民]이 속고, 역사[歷史]를 속일 수 있을 것인가 ?



그 땅이 연도[燕都]에서 수[數] 천리[千里]에 불과하니,.......... 황제[黃帝]로부터, 유구[悠久]한 역사[歷史]를 이어 내려온 연도[燕都],......... 시황[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의무려산[醫巫閭山]을 감싸않고 도는 연도[燕都].......... 요동[遼東]의 끝자락 거용관[居庸關]에서 중단된 시황[始皇]의 장성[長城],......... 이 진시황[秦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中央亞細亞] 서북[西北] 지역을 휩쓸고 다니던, 흉노[匈奴]를 막기 위하여, 축조[築造]된 장성[長城]일 뿐 이었다.



중국[中國]이라 불리는 나라들도 역시 그 지역[地域]에서, 짧게는 수[數] 십년[十年], 길어야 수[數] 백년[百年]만에,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겪으며, 명멸[明滅]해 갔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의하여 끝없는 나락[奈落]의 길로 떨어지고 있는 한국[韓國]의 역사[歷史] 교육[敎育]은,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발해[渤海]를 제외[除外]하고,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장성[長城]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만리장성[萬里長城]과, 천리장성[千里長城]에 대한 설명과, 한국[韓國]의 반도사관[半島史觀]이 공교육[公敎育]을 통하여 가르치는 국사[國史]의 내용은, 서로 정반대[正反對]의 극[極]과 극[極]을 달리고 있다.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을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여, 추정[推定]과 비정[比定], 가설[假說]로, 그것이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인 것처럼, 위장[僞裝]하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오도[誤導]하고, 거짓의 역사[歷史]를 가르치는 한국[韓國]의 사학계[史學界]는, 역사[歷史]라는 문자[文字]를 사용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될 뿐이다.



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세뇌[洗腦] 된 이들은, 고려[高麗]의 천리장성[千里長城]을, 반도[半島]의 평안도[平安道]에서, 반도[半島] 함경도[咸鏡道]의 동서[東西]를 가로 지르는 것으로 그리고, 이것이 마치 고려[高麗]의 천리장성[千里長城]인 것처럼 가르쳐 왔다.



그러나 역사[歷史]에서는, 대륙[大陸]을 말하고 있으며, 고려[高麗]를 이어서 조선[朝鮮]도,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에, 서북변경[西北邊境]을 방어[防禦]하기 위하여, 수 [數] 백년[百年]에 걸쳐, 수많은 장성[長城]을 축조[築造] 했다.



우리의 선조[先祖]들이 남긴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보면, 반도사관[半島史觀]인 식민[植民] 잔재[殘在]의 사관[史觀]이 주장[主張]하는 내용들이, 얼마나 선대[先代]를 모욕[侮辱]하고, 국민[國民]들과 우리의 후세[後世]들인 어린 학생[學生]들을 기만[欺瞞]하고 있는지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인재집[寅齋集]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신개[申槪]

청함평양도설관소[請咸平兩道設關疏]

臣竊惟咸吉,平安南道赴防之弊。固爲大矣。而入保之弊尤爲大。赴防之弊。止於行役之勞。餱糧之備。馬匹之斃而已。入保之弊。尤大者有五

신[臣]이 그윽이 생각건대, 함길[咸吉] 평안[平安] 남도[南道]에, 부방[赴防]하는 폐단[弊端]이 진실로 크지만, 입보[入保]하는 폐단[弊端]은 더욱 큽니다. 부방[赴防]하는 폐단[弊端]은 단지 행역[行役]의 수고로움이나 양식의 준비, 마필의 폐사[斃死]에 그칠 뿐입니다. 그러나 입보[入保]하는 폐단[弊端]은 더욱 큰 것이 다섯 가지나 됩니다. [중략]



惟咸吉道。土沃而廣。且有魚鹽之利。故綏撫安接。至于年久。則猶有安存之理。平安北鄙之民。昔日安業者。專以江北之田。膏腴而無稅。故甘心樂業。永世土著。今則不得耕以爲生。念之及此。可爲痛哭

오직 함길도[咸吉道]만은 땅이 비옥하고 넓으며 또한 어염[魚鹽]의 이익이 있기 때문에, 어루만지고 달래어서 여러 해 마음 편히 먹고살게 한다면 안존[安存]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평안도[平安道] 북[北]쪽 변경[邊境]의 백성들이 과거에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生業]에 종사했던 것은 오로지 강북[江北]의 땅이 비옥하면서도 세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쁜 마음으로 생업[生業]을 즐기면서 오랜 세월 대대로 이 땅에 살아왔던 것인데, 오늘날 그것을 경작[耕作]하여 살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 이를 생각하면 통곡[痛哭]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략]



謹按高麗史。德宗命平章柳韶。創置北境關防。起自西海濱古國內城界鴨綠江入海處。東跨威遠,興化,靜州,寧海,寧朔,雲州,安水,靑塞,平虜,寧遠,定戎,朔州等十三城。東傅于海。延袤數千里。以石爲城。高二十五尺。廣如之。首尾凡三朔程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건대, 덕종[德宗]은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命]하여 처음으로 북[北]쪽 변경에 관방[關防]을 설치하게 하였습니다. 서해[西海] 바닷가 옛 국내성[國內城] 부근에, 압록강[鴨綠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동[東]쪽으로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삭[寧朔],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靑塞], 평로[平虜], 영원[寧遠], 정융[定戎], 삭주[朔州] 등 13성[十三城]을 넘어 동[東]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수[數] 천리[千里]에 걸쳐 돌로 성[城]을 쌓았으니, 높이가 25척[二十五尺]이요, 너비도 그와 같았으니, 시작 지점부터 끝나는 곳까지[首尾], 가려면, 무려 석달[三朔]이 걸리는 여정[旅程]이었다고 합니다.



自是東西蕃賊。不敢窺邊。至文宗時。爭來款塞。願置州縣。屬籍編戶者。殆近萬人

이로부터 동서[東西]의 오랑캐 도적들이 감히 변경[邊境]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서는 다투어 귀순[歸順]해 와서 변방[邊方]의 관문[關門]을 두드렸으며, 주현[州縣]을 설치하자 호적[戶籍]에 편입시켜 주기를 원하는 자가 거의 만인[萬人]에 가까웠습니다. [중략]



今中朝亦自山海衛。至遼東數千里之北。鑿塹築堡樹木。北胡不敢有窺覦之心。而無入保騷擾。閭閻撲地。牛羊布野

지금 중조[中朝]에서도 산해위[山海衛]로부터 요동[遼東]에 이르는 수[數] 천리[千里] 땅의 북[北]쪽으로 참호를 파고 보[堡]를 쌓으며 나무를 심어서 북[北]쪽 오랑캐가 감히 엿볼 마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입보[入保]하는 소요가 없어지자 도처가 여염집이고 소와 양이 들판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高麗三月程城基。與中朝數千里坑塹。未必無迂直也。惟審定基地者。須要有智略見識者。乃可見也

고려[高麗]의 3개월[三個月] 노정[路程]의 성[城]터와 중조[中朝]의 수[數]천리[千里]에 걸친 갱참[坑塹]도 반드시 구부러지고 곧은 곳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기지[基地]를 살펴 정하는 것은 모름지기 지략[智略]과 견식이 있는 자[者]만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今更反復思惟。欲省兩道巨弊。未見有佗奇策。其言否者。未知以姑息之計耶。未達弊之輕重耶

그러나 이제 다시 거듭거듭 생각해 보아도, 양도[兩道]의 커다란 폐단[弊端]을 덜고자 한다면 다른 기이[奇異]한 방책[方策]이 있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옳지 않다고 말하는 자들은 고식지계[姑息之計]인 줄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폐단[弊端]의 경중[輕重]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까? [중략]



中朝長城。雖云萬里。以山海衛關觀之。止於人行可通處築之。未必不論夷險而皆築也

중조[中朝]의 장성[長城]이 비록 만리[萬里]라고 이르기는 하지만, 산해위[山海衛]의 관[關]을 보면, 사람이 통행[通行]할 수 있는 곳에만 쌓는 데에 그쳤으니, 반드시 평탄[平坦]하고 험난[險難]한 것을 따지지 아니하고 모두 다 쌓았던 것은 아닙니다. [중략]



今自義州至于慶源。其間夷險形勢。雖難遙度然江岸壁立與夫峻嶺絶壑。不可攀緣。不可踰越處皆是。而易通坦道。不能百分之一也。若得設關。則不止於禦外寇之侵。而或內有疑貳欲叛者。亦不得肆行。其利豈不遠且大哉

이제 의주[義州]로부터 경원[慶源]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평탄[平坦]하고 험준[險峻]한 형세[形勢]는 비록 멀리서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강안[江岸]에 서 있는 절벽[絶壁]과 험준[險峻]한 산[山], 깎아지른 골짜기는 오를 수도 없고 건널 수도 없는 곳이 모두 다 그러하니, 쉽게 통할 수 있는 평탄[平坦]한 길은 백[百]에 하나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관[關]을 설치하게 된다면 외구[外寇]의 침략[侵略]을 막을 뿐만 아니라, 혹 안으로도 의심[疑心]하고 배반[背反]할 마음을 품고서 모반[謀反]하고자 하는 자[者]들 또한 제멋대로 행하지 못할 것이니, 그 이로움이 어찌 원대[遠大]하지 않겠습니까 ? [중략]



以此觀之。雖多用民力。以築長城。未爲不可。關防旣固。則江邊諸城之築。不須汲汲也。臣之所聞於人者。多有異同。愚陋之見。不敢不達。故敢獻狂瞽之說。伏惟上裁

이로써 본다면, 비록 민력[民力]을 많이 써서 장성[長城]을 쌓는다 하더라도 불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관방[關防]이 견고[堅固]하게 되면, 강[江]가에 여러 성[城]을 쌓는 일도 다급[多急]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신[臣]이 사람들에게 들은 바에는 같고 다른 것이 많았으나, 어리석고 못난 소견[所見]을 상달[上達]하지 않을 수 없어 감히 광고[狂瞽]의 말씀을 아뢰니, 성상[聖上]께서는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해동역사[海東繹史]

조선부[朝鮮賦]

동월[董越]

명[明]나라 홍치[弘治] 원년에 동월[董越]이 조선[朝鮮]에 사신[使臣]으로 나왔을 적에 지은 것이다. 본디 자주[自注]가 있었으나 그 자주[自注]는 모두 다른 지[志]에 실려 있으므로 지금은 생략[省略]하고 기록하지 않았다.



대체로 성곽[城郭]들은 凡爲城郭

모두 높은 산[山]을 베고 있구나 皆枕高山

능선[稜線]을 타고 언덕과 기슭으로 나와 間出岡麓

구불구불 둘러 만환[彎環]인 것도 보인다. 亦視彎環

큰 치첩[雉堞]들은 날아갈 듯 높이 솟아 있고 大者則聳飛飛之雉堞

작은 것도 우뚝하여 표관[豹關]이 웅장[雄壯]하다. 小者亦雄屹屹之豹關 [중략]



해동역사[海東繹史]

장영[張寧]

태평관[太平館]의 누각[樓閣]에 올라 60[六十]운[韻]

본[本] 시[詩]의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천순[天順] 4년 봄에 내가 황제[皇帝]의 명[命]을 받아 조선[朝鮮]에 사신[使臣]으로 갔는데, 높은 데 올라서 멀리 바라볼 즈음에 멀리 제도[帝都]를 생각하는 마음이 일었다.



조선[朝鮮]을 두루 둘러보니, 천시[天時]와 인사[人事], 경물[景物]과 산천[山川]이 드러나고 숨은 것은 비록 달랐으나, 마음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면서 그 사이에서 머무노라니, 비통하고 처연한 심정이 일었다. 이는 대개 옛일을 조상[弔喪]하고 풍속[風俗]을 묻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나 역시 이미 그렇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흥폐[興廢]에 대해 시[詩]를 짓는 것을 참으로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에 화려한 수식[修飾]을 버리고 사실[事實]대로 서술[敍述]하였는데, 문헌[文獻]의 나라인 조선[朝鮮]에서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가 의당 있을 것이다. 이에 우선 이를 써서 세월이나 기억할 뿐이다. 하였다.

[중략]



요양[遼陽]에서 동쪽으로 삼천리[三千里]를 내려오니 遼陽東下三千里

화악[華嶽]이 서[西]쪽으로 백이산하[百二山河] 이루었네 華嶽西連百二重

황금[黃金] 궁궐 옥문[玉門]에는 엄한수위 호표[虎豹]같고 金闕玉關嚴虎豹

백모[白旄] 황월[黃鉞]들고 용사들이 서 있구나. 白旄黃鉞定羆熊


국경[國境] 남[南]쪽 먼 길에는 봉화 연기 안 오르고 漠南遠道烽煙絶

북[北]쪽 제진[諸鎭] 여러 보장[保障] 웅장[雄壯]하기도 하다. 薊北諸屯保障雄

온 누리의 모든 제도 주[周]나라 법도이고 寰宇總膺周典則

강역은 한[漢]나라 봉역[封域]이구나. 輿圖盡屬漢提封


구성 소악[韶樂] 연주하자 봉황[鳳凰]이 모여들고 九成韶樂儀羣鳳

오색 상서[祥瑞] 구름 날자 육룡[六龍]이 내달린다 五色祥雲駕六龍

상원[上苑]에는 봄빛이 바다처럼 드넓은데 上苑韶華寬似海

귀족[貴族]들의 비단옷은 찬란하기 무지개 같구나 貴遊羅綺爛如虹 [중략]


일만[一萬] 나라 수레와 배 예물 폐백 실어 오고 萬國梯航馳玉帛

일천[一千] 집 집집마다 풍악 소리 들려오네 千家門第動謌鍾

교화[敎化]는 구복의 담 밖까지 행해졌고 化行九服垣墉外

사람들은 삼왕[三王]의 예악[禮樂] 속에 살고 있도다. 人在三王禮樂中 [중략]



포은집[圃隱集]

김해산성기[金海山城記]

昔先王南廵。次于尙。余時召入爲翰林。始識朴侯葳於旅舍。相從而悅之。自是比肩事先王十有餘年。固已服其才焉。及今上卽位之明年。余以罪謫居南方 [중략]

옛날 선왕[先王]께서 남[南]쪽 지방을 순행[巡行]하시면서 상주[尙州]에 머무르셨다. 그때 나는 부름을 받아 한림[翰林]으로 있었는데, 박후 위[朴侯葳]를 여사[旅舍]에서 처음 알게 되어 상종하다가 좋아하였다. 이로부터 10여 년 동안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왕[先王]을 섬기며 그의 재능에 탄복하였다.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신 다음해에, 내가 죄를 입어 남방[南方]으로 유배되어 적거[謫居]하고 있었다. [중략]



其冬。倭陷金海。人皆言曰。金海倭衝也。今已陷且殘之。後雖有智者。殆難以爲治。俄而聞朴侯出爲守。顧謂人曰。余知朴侯。其必有以處此矣 [중략]

그해 겨울에 왜적[倭賊]이 김해[金海]를 함락시켰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해[金海]는 왜[倭]와 요충[要衝]지대이다. 지금은 이미 함락된 데다가 전쟁 뒤끝이니, 비록 지혜가 있는 자라 하더라도 아마 다스리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얼마 뒤에 박후[朴侯]가 수령이 되어 나갔다는 것을 듣고 사람들을 돌아보며, 나는 박후[朴侯]가 반드시 이곳을 처리할 수 있을 것임을 안다. 하였다. [중략]



水環其境者直死地也。苟非施險。無以爲也。於是出令。修古山城。擴而大之。累石爲固。因山爲高。功旣訖。自下望之。壁立千仞。雖使一夫當門。萬夫莫能開也 [중략]

이 고을은 물이 그 경계[境界]를 두르고 있으니 참으로 사지[死地]이다. 그러니 만약 험한 곳에 변고를 대비하는 설비를 하지 않아서는 될 수 없다.’ 하였다. 이리하여 영[令]을 내려 옛 산성[山城]을 수축[修築]하여 넓고 크게 하였다. 돌을 포개어 견고[堅固]하게 하고 산세[山勢]를 따라서 높게 하였다. 공역[工役]을 마친 뒤에 밑에서 바라보니, 성벽[城壁]이 천[千]길이나 깎아질러 서서, 비록 한 사람에게 문[門]을 지키게 해도 만[萬] 명이 성문[城門]을 열 수 없을 만하였다. [중략]



府人通憲大夫裴公元龍走書來請曰。山城之修。萬世利也。知吾侯者莫如子。敢以爲請。余惟設險守國之道 [중략]

부(府) 사람 통헌대부[通憲大夫] 배원룡[裵元龍] 공[公]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와서 청[請]하기를, 산성[山城]을 수축[修築]한 것은 만세[萬世]의 이로움이다. 우리 박후[[朴侯]를 아는 사람으로서 자네 만한 이가 없으므로 감히 기문[記文]을 청[請]한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험한 곳에 변고[變故]를 대비하는 설비[設備]를 하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도[道]이다. [중략]



自古帝王。未有不資是以爲治者。孟子所謂天時不如地利。地利不如人和。盖言輕重小大之差耳。非爲取其一而廢其二也 [중략]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이런 설비[設備]를 이용하여 다스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地利]는 인화[人和]만 못하다. 하였으니, 대개 경중[輕重]과 대소[大小]의 차이를 말한 것이지, 그 중에 하나만이 필요하고 둘은 없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중략]



嗚呼。祖宗之法亦密矣。余嘗佐幕朔方。按行東北。塞上有古山城橫截山川。首尾千里。其間要害之地。邏戍營屯之所。動至千百。當時經營禦倭之跡。盖可見也 [중략]

아, 오호[嗚呼]라. 조종[祖宗]께서 창시하신 방법이 또한 주밀[周密]하였다. 내가 일찍이 좌막[佐幕]으로서 삭방[朔方]으로부터 동북[東北]지역 변방[邊方]을 살피러 다닌 적이 있었다. 옛 산성[山城]이 산천[山川]을 가로질러 수미[首尾]가 천리[千里]는 되는데, 그 사이에 요해[要害] 지역과, 순찰[巡察]하고 지키기 위해 주둔[駐屯]한 곳이, 천[千]이요 백[百]이었으니, 당시[當時]에 왜적[倭賊]을 방어하기 위해 계획한 자취를 대개 볼 수 있었다. [중략]



往與契丹,金,元接境爲敵。抗衡幾年。能不失舊物以至于今者。豈偶然而致之哉 [중략]

지난날 거란[契丹], 금[金], 원[元]나라와 국경[國境]이 맞닿아 있으면서, 이들과 대적[對敵]]하고 몇 해나 항전[抗戰]하면서 옛것을 잃지 않고 지금에 이르는 것이 어찌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 [중략]



今國家用兵二十餘年。城砦池隍。所在頹廢。無異大平無虞之世。夫今之謀臣智將。筭無遺策。豈獨不知城池所以待盜賊也。顧棄而不爲。其志將以長槍勁弩。與敵從事於平原廣野。芟夷之盡滅之。以快於心。以彼設險守國爲拙策也 [중략]

지금 국가[國家]에서 군사[軍士]를 움직인 지 20여 년인데, 성[城]과 진[陣], 해자[垓字]는 곳곳이 헐어지고 무너져 있으나, 태평[太平]하여 근심이 없는 시대와 다름이 없다. 지금 계책[計策]을 지닌 신하[臣下]와 지혜로운 장수가 계획에 실수한 것이 없는데, 어찌 성[城]과 해자[[垓字]가 도적[盜賊]을 방어[防禦]하는 것인지를 모른단 말인가 ? 도리어 버려두고 하지 않으니, 그들의 뜻은 장차 긴 창과 억센 활을 가지고 적[賊]과 전쟁[戰爭]을 벌여, 평원[平原]과 광야[廣野]에서 모조리 전멸[全滅]시키고, 무찔러 마음을 유쾌[愉快]하게 하며, 저 험한 곳에 적[敵]을 방어[防禦]하는 설비[設備]를 하여 나라를 지키는 일은, 졸렬한 계책이라고 여긴단 말인가 ? [중략]



倭冦之爲冦小矣。國家之財力殫竭矣。於是每兵出而每北。向之長槍勁弩快心之策。反爲敵所笑。嗚呼惜也。以契丹,金,元之敵而不畏。何其壯也。今何爲而反困於是耶 [중략]

왜구[倭冦]가 도둑질하는 것은 비록 적으나 국가[國家]의 재력[財力]은 고갈된다. 이에 매번 군사가 나가도 매번 달아나니, 전날의 긴 창과 억센 활을 가지고 마음을 유쾌[愉快]하게 하려던 계획이 도리어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아, 오호[嗚呼]라. 애석[哀惜]하도다. 거란[契丹], 금[金]나라, 원[元]나라 같은 적[敵]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어찌 그리도 장하였던가 ? 그런데 지금은 무엇 때문에 도리어 이 좀도둑에게 곤란을 당하는가 ? [중략]



朴侯之擧。盖憤於此也。將使金海之民。平居無事。則下山而田。入海而漁。及見烽燧。收妻孥而入城。則可以高枕而臥矣。孰謂設險自固爲拙策也。余將訪古伽倻之墟。當擧酒於新城之以賀朴侯政績之有成也 [중략]

박후[朴侯]의 거조는 대개 이것을 분하게 여긴 것이리라. 김해[金海] 백성은 평소에 사변이 없으면 산성[山城]에서 내려와 밭을 갈고 바다에 들어가 고기 잡다가, 봉수[烽燧]를 보게 되면 처자를 거느리고 성[城]에 들어갈 것이니, 베게를 높게 베고 누워도 좋을 것이다. 험한 곳에 방비[防備]를 설치하여 스스로 단단하게 하는 것을 누가 졸렬한 계획이라 하는가 ? 내 장차 옛 가야[伽倻]의 고허[古墟]를 찾으려 하니, 마땅히 새로운 성[城] 위에서 술잔을 들며 박후[朴侯]가 정치[政治]에 치적[治績]을 이룬 것을 축하[祝賀]하리라. [중략]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육년[六年] 6월[六月] 26일[二十六日]

무신[戊申]

領議政韓致亨等啓: “臣等聞, 臺諫以築城爲未便。 臣等亦知大役之不可輕擧, 勢不得不爾

영의정[領議政] 한치형(韓致亨) 등이 아뢰기를, 신[臣] 등이 듣자오니 대간[臺諫]이 장성[長城] 쌓는 일이 불편하다고 했다고 하는데, 신[臣] 등 역시 큰 역사를 경솔히 시작할 수 없는 것은 아오나 형세[形勢]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平安之民爲賊所侵, 不得寧居。 其軍額比於癸丑年, 減一萬餘。 然尙賴癸丑年築城之功, 不至大耗。 若不築此城, 則平安之民將無以自存

평안도[平安道]의 백성이 적의 침략으로 편안히 살 수가 없어 그 군인의 수효가 계축년[癸丑年]에 비하여 1만여 명이 줄었지만, 오히려 계축년[癸丑年]에 장성을 쌓은 공력(功力)에 힘입어 크게 소모하는 데는 이르지 않았는데, 만약 이 장성[長城]을 쌓지 않았더라면 평안도[平安道]의 백성이 장차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大抵成大事者, 不計小害。 今令五道, 分地而受, 非甚凶歉, 則簽軍往築, 期以五六年, 則一勞永安矣。

대체로 큰 일을 성취시키는 사람은 작은 손해를 계산하지 않는 법인데 지금 오도[五道]로 하여금 지역을 나누어 역사를 맡도록 하고 그다지 심한 흉년[凶年]이 아니면 군사를 뽑아 보내어 성[城]을 쌓되 5·6년을 기한으로 한다면 한 번 수고함으로써 영구히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前朝靖宗朝柳韶自仁山至鐵嶺築長城, 延袤萬里, 其功不細。 今使弘文館, 進 柳韶傳 賜覽則可知

고려[高麗] 정종[靖宗] 때에 유소[柳韶]가 인산[仁山]에서 철령[鐵嶺]까지 장성[長城]을 쌓아, 만리[萬里]나 길게 뻗쳤으니 그 공[功]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유소전[柳韶傳]를 올리도록 하여 하람하옵시면 알 수 있습니다.



傳曰: “予亦知其如此。 但以臺諫所言, 故問于卿等耳。”

전교[傳敎]하기를, 나도 또한 그것이 이와 같은 줄은 알고 있지만, 다만 대간[臺諫]이 말한 것이어서 짐짓 경[卿] 등에게 물은 것이다. 하였다. [중략]



역사교육[歷史敎育]은,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을 근본[根本]으로 하여 교과서[敎科書]를 만들고, 학생[學生]들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當然]한 것이다.

역사서[歷史書]를 도외시[度外視]하고, 왜[倭]놈들이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한 사서[史書]의 원문[原文]을 인용[引用]하여, 이것이 우리의 역사[歷史]라고 주장[主張]한다면, 그러한 것을 어떻게 역사[歷史]라고 할 수 있을까 ?



이러한 행위[行爲]는, 이미 역사학자[歷史學者]로서의 본분[本分]을 포기한 것이며,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국민[國民]임을 망각[妄覺]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을 배신[背信]한 것이며, 수[數] 천년[千年]을 이어 내려온 우리의 선조[先祖]와 선대[先代]를 저버린 것이다.

이러한 자[者]들에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



역사서[歷史書]에서 기록[記錄]하고 있듯이, 고려[高麗]는, 천리장성[千里長城]뿐만 아니라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았다.



서해[西海] 바닷가 옛 국내성[國內城] 부근에, 압록강[鴨綠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동[東]쪽으로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삭[寧朔],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靑塞], 평로[平虜], 영원[寧遠], 정융[定戎], 삭주[朔州] 등 13성[十三城]을 넘어 동[東]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수[數] 천리[千里]에 걸쳐 돌로 성[城]을 쌓았으니, 높이가 25척[二十五尺]이요, 너비도 그와 같았다. 起自西海濱古國內城界鴨綠江入海處。東跨威遠,興化,靜州,寧海,寧朔,雲州,安水,靑塞,平虜,寧遠,定戎,朔州等十三城。東傅于海。延袤數千里。以石爲城。高二十五尺。廣如之



시작 지점부터 끝나는 곳까지[首尾], 가려면, 무려 석달[三朔]이 걸리는 여정[旅程]이었다고 합니다. 首尾凡三朔程



고려[高麗] 정종[靖宗] 때에 유소[柳韶]가 인산[仁山]에서 철령[鐵嶺]까지 장성[長城]을 쌓아, 만리[萬里]나 길게 뻗쳤으니 그 공[功]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유소전[柳韶傳]를 올리도록 하여 하람하옵시면 알 수 있습니다. 前朝靖宗朝柳韶自仁山至鐵嶺築長城, 延袤萬里, 其功不細。 今使弘文館, 進 柳韶傳 賜覽則可知



삼삭[朔程]은, 3개월[三個月]이 걸리는 길이의 여정[旅程]을 말하는 것이다. 천리장성[千里長城]은, 삼삭[朔程]의 일정이 될 수 없다.

또한, 서해[西海] 바닷가 옛 국내성[國內城] 부근에서, 장성[長城]이 시작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이 주장하는 대로, 고구려[高句麗]의 국내성[國內城]이 지금의 집안[集安]이라고 한다면, 그 곳을 서해[西海] 바닷가라고 할 수 있을까 ?



왕조실록[王朝實錄]의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말하면서, 인산[仁山]에서 철령[鐵嶺]까지라고 기록[記錄]하고 있어서, 모순[矛盾]된 의문[疑問]을 자아내고 있다.

인산[仁山]에서 철령[鐵嶺]까지라고 한다면, 이것은 천리장성[千里長城]을 말하는 것인데, 당시[當時]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던 분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말하면서, 인산[仁山]에서 철령[鐵嶺]이 만리[萬里]라고 했을 리가 없다.



이러한 기록[記錄]은, 원문[原文]이라고 하지만,......... 청함평양도설관소[請咸平兩道設關疏]에서, 고려[高麗]의 3개월[三個月] 노정[路程]의 성[城]터와 중조[中朝]의 수[數]천리[千里]에 걸친 갱참[坑塹]도 반드시 구부러지고 곧은 곳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高麗三月程城基。與中朝數千里坑塹。未必無迂直也。



오직 기지[基地]를 살펴 정하는 것은 모름지기 지략[智略]과 견식이 있는 자[者]만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惟審定基地者。須要有智略見識者。乃可見也, 라고, 말하고 있으니,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천리장성[千里長城]으로 인식[認識]하고 그렇게 보이도록, 왕조실록[王朝實錄]의 원문[原文]에 대한 왜곡[歪曲]이 있었을 것이다.

왕조실록[王朝實錄] 뿐만 아니라, 조선사[朝鮮史]의 전반[前半]에 걸쳐 이러한 모순[矛盾]된 기록[記錄]들은 수 없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원문[原文]을 조작[造作]하여, 조선사[朝鮮史]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계략[計略]과 음모[陰謀]의 일환이다.

이 진언[進言]을 올리고 있는 분은, 당시[當時]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던 분이다.

이 두 분을 보면, 연산군[燕山君]때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내신 분과, 또 한분은 세종[世宗]때에, 우의정[右議政]을 지내신 분이다.



조선[朝鮮]의 대학자[大學者]요, 조선[朝鮮]의 대유[大儒]이며, 대신[大臣]이었던 이러한 분들이, 조선[朝鮮]의 황제[皇帝] 앞에서, 진언[進言]을 올리고, 상소[上疏]를 올리면서, 사실[史實]을 말하지 않고, 사실[史實]을 부풀리고 과장[誇張]해서 말을 했을까 ?

만약 당시[當時]에 천리[千里]를 만리[萬里]로 과장[誇張] 했다면, 이러한 행위[行爲]는, 임금을 능멸[凌蔑]한 대역죄[大逆罪]로 처벌을 받고도 남을 일이다.



연산군[燕山君] 일기[日記]의, 고려[高麗]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한, 인산[仁山]과 철령[鐵嶺]의, 이 기록[記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역사서[歷史書]에 대한 왜곡[歪曲]의 기록[記錄]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기록[記錄]이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이며,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인지, 연도기행[燕途紀行]을 살펴보기로 한다.



영[嶺]의 남쪽과 북쪽에 모두 장성[長城]의 옛터가 있는데 북[北]쪽으로는 육진[六鎭]에 닿았고, 남[南]쪽으로는 미관[彌串]에 연하여 수[數] 천리[千里]를 뻗쳤다고 한다. 嶺南北俱有長城古基。北抵六鎭。南連彌串。延袤數千里云



오목평[吾目坪] 판교[板橋]를 지나서 남산[南山]과 송현[松峴]을 넘으니, 북경 부마차원[北京夫馬差員] 희천 군수[煕川郡守] 이유방[李綏邦]이 와서 문안했다. 신시[申時]에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남문[南門]으로 해서 들어가 용만관[龍灣館]에 유숙했다. 이 관[館]은 우리나라 땅의 끝이라, 나라를 떠나는 정회[情懷]가 더욱 처연[悽然]했다. 過吾目坪板橋。踰南山曁松峴。北京夫馬差員煕川郡守李綏邦來候。申到義州。由南門入。館於龍灣館。館是吾東地盡頭。去國情懷。益自悽然



연도기행[燕途紀行]에서 말하는 미관[彌串]은, 평안도[平安道]에 있는 관[串]으로서, 중국[中國]과 강[江]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건너다보는 지역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미관[彌串]으로부터, 북[北]쪽으로 육진[六鎭]과, 남[南]쪽으로는, 미관[彌串]과 연결된 수[數] 천리[千里]에 이르는 장성[長城]이 있었다.

미관[彌串]이 있는 지역이 어떠한 곳에 있었는가에 대한 기록[記錄]을 보자.



명종실록[明宗實錄],........... 영의정[領議政] 심연원[沈連源], 우의정[右議政] 윤개[尹漑], 병조판서[兵曹判書] 윤원형[尹元衡], 지충추부사[知中樞府事] 장언량[張彦良], 공조판서[工曹判書] 홍섬[洪暹],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준경[李浚慶], 병조참판[兵曹參判] 정응두[丁應斗], 병조참의[兵曹參議] 김홍윤[金弘胤]등이 미관[彌串]에 성[城] 쌓는 일을 의논드렸다. 領議政沈連源、右議政尹漑、兵曹判書尹元衡、知中樞府事張彦良、工曹判書洪暹、吏曹判書李浚慶、兵曹參判丁應斗、兵曹參議金弘胤、議彌串築城事曰



미관[彌串]은 곧 권관[權管]이 있는 곳이지만 상국[上國]의 지경[地境]과, 단지 강[江] 하나로 막혀 있어 당인[唐人]인들이 건너다 보게 되는 지역이므로 마땅히 성[城]을 쌓아 다소나마 체모[體貌]와 기세[氣勢]를 갖추어야 합니다. 다만 그곳은 거주하는 백성이 드물고 입번[入番]하는 군사[軍士]도 적으므로 비록 작은 성[城]을 쌓더라도 권관[權管]이 자체의 힘으로 쌓을 수는 없고 반드시 온 도[道]의 힘을 빌어야 할 것입니다. 彌串, 乃權管所居, 而與上國地界, 只隔一江, 爲唐人瞻視之地, 則宜有城子, 稍存體勢。 但彼處居民鮮少, 入番軍士亦寡, 雖小城權管, 不能以其力設築, 必假一道之力,



평안도[平安道]의 미관[彌串]은, 이러한 지역에 있었으며, 이곳으로부터 육진[六鎭]과 미관[彌串]의 남[南]쪽으로, 수[數] 천리[千里]에 이르는 장성[長城]이 축조[築造]되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일제[日帝]에 의하여, 중요[重要]한 원문[原文]이 많이 누락[漏落]되었고, 또한 원문[原文]을 가장하여, 많은 기록[記錄]들이,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었으며, 개찬[改竄], 개작[改作], 가필[加筆]되었다는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아는 사실[事實]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고려[高麗]의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설명 하면서, 세속[世俗]에서는 이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이른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이 참으로 웃기는 애기다.

왜, 다른 여러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한결같이 다른 말을 하고 있는데, 오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만 이러한 말을 하고 있을까 ?



이러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記錄]은, 다른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다른 수많은 역사사료[歷史史料]들에 의하여, 만천하[滿天下]에 그 왜곡[歪曲]의 진상[眞相]이 확연[確然]히 들어나고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이러한 왜곡[歪曲]의 거짓 기록[記錄]을 들추어내어, 그 것이 역사[歷史]의 전부이며, 사실[史實]인양 위장[僞裝]하고,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있지도 않은 고려[高麗]의 천리장성[千里長城]을 그리고 있다.



13성[十三城]을 넘어 동[東]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만리[萬里]나 길게 뻗쳤으니 그 공[功]이 적지 않습니다.............. 고려[高麗]의 장성[長城]은, 조선[朝鮮]의 동해[東海]까지 이르렀다고 분명[分明]히 말하고 있다.

서해[西海] 바닷가 압록강[鴨綠江] 부근에서, 동해[東海]까지,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은, 동서[東西]로 만리[萬里]에 이르는 강역[疆域]을 가진 대륙[大陸]의 대국[大國] 이었다.

청[淸]나라의 누르하치가, 조선[朝鮮]을 대국[大國]이라고 부른 이유가 분명[分明]히 있는 것이다.



고려[高麗]는,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삭[寧朔],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靑塞], 평로[平虜], 영원[寧遠], 정융[定戎], 삭주[朔州]등, 13성[十三城]의 천리장성[千里長城]을 넘어서, 동[東]쪽으로 동해[東海]까지, 만리[萬里]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았다.



조선[朝鮮]의 황궁[皇宮]에는, 고려[高麗]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은,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의 유소전[柳韶傳]이 비장[秘藏]되어 있었다.

이러한 세계[世界]의 대역사[大役事]를 이룩한 고려[高麗]의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은, 너무도 간략[簡略]하고, 너무나 미미[微微]하다.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황궁[皇宮]에 비장[秘藏]되어 있던 유소전[柳韶傳]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주장[主張]하는 역사학자[歷史學者]들은, 이러한 장성[長城]의 역사[歷史]대한 기록[記錄]들은 쑥 빼버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記錄]만을 인용[引用]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고조선[古朝鮮]의 단군[檀君]에 대한 역사[歷史]에 대해서도 예외[例外]가 아니다.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에, 수[數] 천년[千年]동안 기록[記錄]되어 내려온 고조선[古朝鮮]의 단군[檀君]을 부정[否定]하는 그 저의[底意]는 무엇인가 ?



조선[朝鮮]의 정조대왕[正祖大王]은,........... 조선[朝鮮]이란 국호[國號]는 멀리 단군시대[檀君時代]부터 사용되었고, 숙신[肅愼]이란 국명[國名]은, 주[周] 나라 역사[歷史]에 실려 있으며, 朝鮮之號。遠自檀君。肅愼之名。載在周乘,........... 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조선[古朝鮮]과 단군[檀君]을 부정[否定]하는 자[者]들은, 정조대왕[正祖大王]을 능멸[凌蔑]하고, 정조대왕[正祖大王]을 바보로 취급하는 자[者]들이며, 역사[歷史]의 본원[本源]인 시조[始祖]와 나라의 뿌리를 부정[否定]하는 자[者]들이 아닌가 ?



역사[歷史]는 무엇이고, 국사[國史]는 무엇인가 ? 역사서[歷史書]를 통하여 배우고, 자신[自身]을 갈고 닦는 것이 국사[國史]요. 역사[歷史]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고인[古人]들이, 학문[學文]을 하며, 배우고 익히는 자[者]의 근본[根本]으로 삼았던 대학[大學] 강령[綱領]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덕목[德目]이다.



변경[邊境] 지역에 장성[長城]을 쌓고, 성곽[城郭]을 축조[築造]하며, 천리장성[千里長城]과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은 이러한 대역사[大役事]의 기록[記錄]들은, 선조[先祖]들의 위업[偉業]이며, 당연[當然]히 국사[國史]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다.



큰 치첩[雉堞]들은 날아갈 듯 높이 솟아 있고 大者則聳飛飛之雉堞,.......... 작은 것도 우뚝하여 표관[豹關]이 웅장[雄壯]하다. 小者亦雄屹屹之豹關,......... 요양[遼陽]에서 동쪽으로 삼천리[三千里]를 내려오니 遼陽東下三千里,.......... 화악[華嶽]이 서[西]쪽으로 백이산하[百二山河] 이루었네 華嶽西連百二重,......... 국경[國境] 남[南]쪽 먼 길에는 봉화 연기 안 오르고 漠南遠道烽煙絶,........... 북[北]쪽 제진[諸鎭] 여러 보장[保障] 웅장[雄壯]하기도 하다. 薊北諸屯保障雄



황금[黃金] 궁궐 옥문[玉門]에는 엄한수위 호표[虎豹]같고 金闕玉關嚴虎豹,.......... 백모[白旄] 황월[黃鉞]들고 용사들이 서 있구나. 白旄黃鉞定羆熊,............ 구성 소악[韶樂] 연주하자 봉황[鳳凰]이 모여들고 九成韶樂儀羣鳳,.......... 오색 상서[祥瑞] 구름 날자 육룡[六龍]이 내달린다 五色祥雲駕六龍,........... 일만[一萬]나라 수레와 배, 옥[玉]과 비단[緋緞]실어오고 萬國梯航馳玉帛,........... 일천[一千]호의 집집마다 풍악[風樂] 소리 들려오네 千家門第動謌鍾



명[明]나라 사신[使臣]이 조선[朝鮮]에 오면서 보고 느낀 조선[朝鮮]의 모습은, 반도사관[半島史觀]에 세뇌[洗腦]되고 찌들은 조선[朝鮮]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명[明]나라 사신[使臣]들이 있지도 않은 조선[朝鮮]의 모습과 사실[事實]을, 꾸며서 말하고 있겠는가 ?



고려[高麗]를 이어 조선[朝鮮]도, 변방[邊方]의 방비[防備]를 위하여 수[數]많은 장성[長城]과 성곽[城郭]들을 요충지[要衝地]에 쌓았다.

반도[半島]의 작은 땅 어디에 천리[千里]에 이르는 장성[長城]이 여기저기에 있으며, 만리[萬里]에 이르는 장성[長城]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



역대[歷代]의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은, 오늘날 바다라고 부르는 동해[東海]가 없는 나라였다. 연행록[燕行錄]의 동해[東海]에 대한 기록[記錄]들은 맞는 말이다.

요동[遼東]을 지나 발해[渤海]에 이르러, 저들은 이를 동해[東海]라 부르고, 우리는 서해[西海]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중국[中國]은, 바다 같은 바다 즉 동해[東海]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비록 바다 같은 큰 호수[湖水]와 대택[大澤]은 있으나, 조선[朝鮮]의 동해[東海]같은 바다는 없었다는 말이다.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이 만리[萬里]의 대국[大國]이라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은, 과장[誇張]해서 한 말도 아니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사방[四方] 둘레를 말한 것도 아니다.

동서[東西]로, 만리[萬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영역[領域]과 강역[疆域]의 사실[史實]은, 역사서[歷史書]가 이를 고증[考證]하고 분명[分明]히 증명[證明]하고 있다.



동서[東西]로, 만리[萬里]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은 고려[高麗]는, 수많은 성곽[城郭]들도 축조[築造]했다.

삼국[三國]으로부터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쌓은 성곽[城郭]과 장성[長城]은, 그 수[數]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이런 설비[設備]를 이용하여 다스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地利]는 인화[人和]만 못하다. 하였으니, 대개 경중[輕重]과 대소[大小]의 차이를 말한 것이지, 그 중에 하나만이 필요하고 둘은 없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自古帝王。未有不資是以爲治者。孟子所謂天時不如地利。地利不如人和。盖言輕重小大之差耳。非爲取其一而廢其二也



아, 오호[嗚呼]라. 조종[祖宗]께서 창시하신 방법이 또한 주밀[周密]하였다. 내가 일찍이 좌막[佐幕]으로서 삭방[朔方]으로부터 동북[東北]지역 변방[邊方]을 살피러 다닌 적이 있었다. 옛 산성[山城]이 산천[山川]을 가로질러 수미[首尾]가 천리[千里]는 되는데, 그 사이에 요해[要害] 지역과, 순찰[巡察]하고 지키기 위해 주둔[駐屯]한 곳이, 천[千]이요 백[百]이었으니, 당시[當時]에 왜적[倭賊]을 방어하기 위해 계획한 자취를 대개 볼 수 있었다. 嗚呼。祖宗之法亦密矣。余嘗佐幕朔方。按行東北。塞上有古山城橫截山川。首尾千里。其間要害之地。邏戍營屯之所。動至千百。當時經營禦倭之跡。盖可見也



지난날 거란[契丹], 금[金], 원[元]나라와 국경[國境]이 맞닿아 있으면서, 이들과 대적[對敵]]하고 몇 해나 항전[抗戰]하면서 옛것을 잃지 않고 지금에 이르는 것이 어찌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 往與契丹,金,元接境爲敵。抗衡幾年。能不失舊物以至于今者。豈偶然而致之哉



왜구[倭冦]가 도둑질하는 것은 비록 적으나, 국가[國家]의 재력[財力]은 고갈된다. 이에 매번 군사가 나가도 매번 달아나니, 전날의 긴 창과 억센 활을 가지고 마음을 유쾌[愉快]하게 하려던 계획이 도리어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아, 오호[嗚呼]라. 애석[哀惜]하도다. 거란[契丹], 금[金], 원[元]나라 같은 적[敵]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어찌 그리도 장하였던가 ? 그런데 지금은 무엇 때문에 도리어 이 좀도둑에게 곤란을 당하는가 ? 倭冦之爲冦小矣。國家之財力殫竭矣。於是每兵出而每北。向之長槍勁弩快心之策。反爲敵所笑。嗚呼惜也。以契丹,金,元之敵而不畏。何其壯也。今何爲而反困於是耶



포은[圃隱]선생은, 고려[高麗]의 장성[長城]에 대하여, 이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남겼다.

옛 산성[山城]이 산천[山川]을 가로질러 수미[首尾]가 천리[千里]는 되는데, 그 사이에 요해[要害] 지역과, 순찰[巡察]하고 지키기 위해 주둔[駐屯]한 곳이, 천[千]이요 백[百]이었으니,.......... 고려[高麗]의 동북[東北]지역에는, 산천[山川]을 가로질러 횡[橫]으로 천리[千里]에 이르는 산성[山城]이 있었다.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은, 대륙[大陸]의 동[東과 서[西]로 만리[萬里]에 이르는 강역[疆域]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북[西北]변경[邊境] 지역으로는 여진[女眞], 원[元], 명[明]과 청[淸]나라를 접경[接境]하고, 천산[天山]을 누르고 있었다.



지금의 중국[中國] 대륙[大陸]에 있는 장성[長城]들과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삼국[三國]으로부터,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이 쌓고, 증축[增築]한 장성[長城]들이다.

지금의 반도[半島]로부터, 서[西]쪽으로 천산[天山, 서북[西北]으로 알타이산맥의 벨루하산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조선[古朝鮮], 삼한[三韓], 예맥[濊貊],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발해[渤海], 고려[高麗], 조선[朝鮮]의 강역[疆域] 이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歷史]에서 말하는 해동[海東]이요. 동국[東國]이며, 동방[東方]이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하늘의 아름다운 명[命]을 받아 대동[大同] 전체를 소유[所有]하고, 8도[道]의 주[州]와 군[郡]이 별처럼 벌여 있고. 사방[四方]으로는 방어[防禦]하는 진[鎭]과 보[堡]가 바둑알처럼 널려 있다, 惟我國家。受天休命。全有大東。分八道而州郡星羅。環四圉而鎭堡碁錯, 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릇 역사학자[歷史學者]라고 한다면, 침략자[侵略者]들에 의하여 훼손[毁損]되고 왜곡[歪曲]된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을 찾아내어, 이를 정정[訂正]하고 바로 잡으며, 역사[歷史]를 복원[復原]하여 바로 세우고, 선대[先代]의 위업[偉業]을 다시 이어,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만년대계[萬年大計]앞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後孫]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자기 나라를 침략[侵略]하고 짓밟으며, 치욕[恥辱]의 식민[植民]으로 만들고, 영원[永遠]히 속국[屬國]의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며, 거짓과 오욕[汚辱]의 역사[歷史]를 만든 침략자[侵略者]들의 주구[走狗] 노릇을 해서야 되겠는가 ?



과거 왜인[倭人]들은, 조선[朝鮮]의 임금을 황제[皇帝]라고 불렀다. 역사서[歷史書]에 엄연히 그렇게 기록[記錄]되어 있지 않은가 ?

청[淸]나라 사람들은, 조선[朝鮮]을 대국[大國]이라고 하였다.



대왕[大王]은, 태왕[太王]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주[州]와 목[牧], 도[道]를 다스리는 직책[職責]은 제후[諸侯]와 같은 신분[身分]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관사[官舍]와 청사[廳舍], 성곽[城郭]은, 그 웅장[雄壯]하고 호화[豪華]로운 것이, 임금의 궁궐[宮闕]을 능가 했다.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은, 육룡[六龍] 즉 천자[天子]의 나라였으며, 황제[皇帝]의 나라였다.

이러한 모습은, 모두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이다.



고구려[高句麗]가 서토[西土] 즉 서방[西方]을 상실[喪失]한 이후[以後]에도, 고려[高麗]는, 통일환영[統一寰瀛]을 이루었고, 조선[朝鮮]은 동방[東方] 전체[全體]를 소유[所有]했다.



천산[天山]의 동[東]쪽으로, 동해[東海]에 이르는 만리[萬里]의 장성[長城]을 쌓고, 벨루하산의 서북[西北] 변경[邊境] 지역에는, 수[數] 천리[千里]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았다.


사서[史書]의 기록[記錄]과, 산천[山川]과 지리[地理],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현지[現地]의 역사[歷史]가,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고려[高麗] 조선[朝鮮]에 이르는 역사[歷史]를 이렇게 고증[考證]하며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역사[歷史]이며, 일만년[一萬年] 조선사[朝鮮史]의 실체[實體]와 역사[歷史]의 맥[脈]이다.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댓글 14

추천하기 1
대륙[大陸]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만리장성[萬里長城]
스크랩0 카페 블로그 메일
인쇄 | 신고

 
문 무 15.12.14. 17:57
조선사!
이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이제 식민사학자들은 용퇴, 일보전진해야 할 때입니다. 언제까지 열도의 제국주의 아이들이 만들어준 올가미에 허우적거리며 살 것인가? 이 자들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만, 결코 이 자들의 뜻대로는 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더 높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친일부역자들! 매국사학자들! 이런 자들을 골라 내야하는 것이 바로 국민들입니다. 친일부역자들에게, 매국사학자들에게 지배를 받으며, 당하면서 살아갈 건가? 해답은 국민들 몫입니다. 친일부역자들과 매국사학자들은 상호 협력합니다. 이 자들을 뿌리뽑지 못한다면, 반도의 미래는 없다고 봅니다.
 
 
문 무 15.12.14. 17:59
조선사의 진실 찾기는 바로 부국강병의 첫 단추라고 봅니다. 비록 그 영토는 회복될 수 없다하더라도, 선조들의 위대한 영광과 민족의 자존심은 꼭 되찾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좋은 내용의 글 아주 잘 보았습니다.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빕니다.
 
환국고려 15.12.15. 09:46
맞는 말씀 입니다. 과거 일제의 행위와 친일 매국 사학자들의 행태는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배웠다 하더라도, 광복이 되면서, 정직한 조선사 역사의 후예로 돌아와, 일제가 무너트린 역사를 바로잡고,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헌신했다면 그 누가, 흠이 있더라도 비판을 하겠습니까 ?
지금 그들에게는 희망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기대 할 것이 없지요.
우리의 역사를 이어서, 대한민국이 천하의 강국이 되려면, 국민의 정신과 기상을 싹부터 자르는 매국사학은, 반드시 퇴출 되어야 합니다.
 
환국고려 15.12.15. 09:49
환국고려 바쁘신 중에도, 항상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문무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문무 선생님의 댁내에, 두루 평안과 건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맑은영혼 15.12.14. 20:24
‘연경[燕京]이 있던 지역은, 지금의 천산[天山] 북로[北路]와 알타이산맥의 서남[西南] 지역이다.’
라 하시는데 얼마전의 글에서 의주는 포이진이고, 요동은 자이산호와 발하시호 사이쯤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위의 글에 연경이 천산북로와 알타이산맥 사이라 하시니 구체적인 위치와 연행사들의 이동경로는 어떻게 되죠....?
 
환국고려 15.12.15. 09:53
의주와 요동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평양과 요동과 연경에 대하여, 그리고 연행사들의 경로라든가 열하에 대하여, 시간이 닿는 대로 글로서 대신 할 예정 입니다.
 
 
맑은영혼 15.12.14. 20:31

증이시랑봉사여연서(贈李侍郞奉使如燕序)에서.... 연행로정이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글의 순서상 요동과 의무려산(그 아래가 현토)이 나오고 그다음에 평양이 나오고 그다음이 산해관과 고죽국 등이 나오는데 이 순서가 맞다면 제가 추정한 것 즉 ‘산해관이 있어야할 곳은 평양과 가까이에 있다.... ’ 란 것이 맞아 보입니다. 여기서의 평양은 북평양 즉 열하일기에 나오는 그 평양일 것입니다.
유주와 의무려 현도 산해관 고죽국 그리고 연경을 이야기하는 중간에 ‘평양’이야기가 한 줄 들어가 있으니 반도사관으로 보면 뜬금없어 보입니다.
 
 
맑은영혼 15.12.14. 20:35
이는 압록에서 북경 사이어디인가에 평양이 있다는 이야기이며 제 추정상 그 곳은 산해관이 있는곳일 것입니다.
열하일기 이외에도 ‘학봉속집 제1권 <조천기행(朝天紀行)>’에
~~~전략~~~
사령 고개 지나서 반산에 도달하니 / 行經沙嶺抵盤山
백 리 걸친 진흙창이 수레를 뒤집누나 / 百里泥淖飜輜輧
평양에서 흙 졌던 게 어제만 같은데 / 平陽負土如昨日
옛 다리는 상기도 당황 정벌 기억하네 / 故橋尙記唐皇征
모래 바람 날마다 사람 얼굴 때리고 / 風沙日日擊人面 ~~~~후략~~~~
 
 
맑은영혼 15.12.14. 20:37
이라 하여, 당황(唐皇) 즉 당태종이 퇴각하다 진창에 빠저 흙을 저 날라 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부합하며, 학봉속집에 분명히 평양(平陽) 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자(漢字)는 다르지만 분명 당황(唐皇 ; 당태종)은 평양에서 흙을 저 날랐고 열하일기나 윗글 ‘증이시랑~~~’에서도 평양이 요동과 북경 사이에 나오니 요동평양설은 확실한 것 아닌지요....?
 
환국고려 15.12.15. 10:07
의주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평양도 요동과 잇닿아 있었습니다. 다만 위에서 말씀 하셨듯이, 고구려의 본래 평양 말고도, 글자를 달리하는 평양이 또 있었습니다. 전에 본인도, 이러한 역사의 기록 때문에, 많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고구려의 역사는, 역사의 기록이 너무 많이 소실되어 난감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한성[漢城]과 평양에 대한 윤곽은 거의 들어나고 있습니다. 댓글로 말씀 드리기에는 좀 어렵습니다.
 
환국고려 15.12.15. 10:10
환국고려 맑은 영혼님께 감사를 드리며, 맑은영혼님의 댁내에, 두루 평안과 만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맑은영혼 15.12.14. 20:44
‘진시황[秦始皇]의 천하통일[天下統一]이라는 것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작은 소국[小國]들을 통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史實]을 분명[分明]히 직시[直視]해야 한다......’
정확한 것 같습니다. 소위 중국이라는 여러 나라들은, 있다 하더라도 작은 소국(小國)이며 그 크기는 지금 우리나라의 일개 도(道)정도의 크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부풀려 지금의 중국영토에 지명들을 흩뿌려놓아 본래부터 대국인양 하는 것이죠....
아마 이것 자체도 왜곡자의 작품일 것입니다.
 
 
맑은영혼 15.12.14. 20:51
청의 오조견의 시나 조선의 수 많은 문인들이 남긴 많은 글을 보더라도 요동땅은 사막(정확히는 사적(沙磧)지대) 지대임은 분명하나 좀더 디테일한 분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알고있는 그런 사막은 아닙니다. 아주 고운입자(분진)들이 오랜세월 쌓여서 된 ....그래서 여름에 진흙 수렁이 되고 겨울철 건조하면 바람에 날리는 그런 곳이죠....
‘평양(平壤)’이란 말이 적절한 곳입니다.
평양....여기서 양(壤)은 흙을 나타내나 ‘土’와 다른 점은 壤은 아주 부드러운흙, 티끌....이런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흙이 바람이 불면 치진(緇塵)이 되죠....
 
 
맑은영혼 15.12.14. 21:03
바람이 불면 길 가는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북경이 가장 심한데, 이곳은 석탄(石炭) 앙금으로 된 지방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옛날 문자의 ‘치진(緇塵 세상 풍진 속에 분주하여 의복이 더럽혀짐)’이란 것이 곧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연원직지 유관별록>
대만에 가면 '치진(旗津)풍경구'가 있는데 이곳 바닷가의 모래가 검은 모래 입니다. 치진(緇塵)과 발음이 비슷한데 緇가 검다는 뜻이니 본래 緇津이 아니었을까요....
한자(漢字) 바꿔치기가 왜곡자들의 단골메뉴이니한번 생각해봤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