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백순에게 답하는 편지 병자년(1756, 영조32)〔答安百順 丙子〕/ 성호전집 제26권

2016. 5. 1. 23:09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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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書)


안백순에게 답하는 편지 병자년(1756, 영조32)〔答安百順 丙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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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식도 아득하고 서신도 끊겨서 노쇠한 여생에 심사가 즐겁지 않았는데, 문득 인편(人便)에 전해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내용이 참으로 정중하여 세 번을 읽고 보니, 또한 무릎을 맞대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형편이 어렵다고 사람들마다 똑같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에, 우리들의 운명은 날이 갈수록 더 궁색해지고 있습니다. 20, 30년 이래의 사정과 비교하면 마치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듯이 빠르고 점점 악화되고 있으니, 앞으로 과연 죽음을 면하여 지난날의 일을 돌아보며 말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복상(服喪) 중에 몸을 잘 보중하고 계시다는 점이 위로가 됩니다. 나는 전염병을 피해 거처를 옮겨서 자질구레한 일로 무료하게 지냈습니다. 중간에 학질(瘧疾)의 증상으로 거의 죽을 뻔하다가 다시 소생하여 꼼지락거리고 있습니다. 예부터 내려오는 말에 늙으면 죽고 병들면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반드시 모두 준거(準據)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을 먹고 채소를 씹어도 엿처럼 달게 먹는 형편입니다만, 날이 가물고 바람이 쌀쌀하여 보리가 신명(神明)의 은택을 입지 못하니, 끝내 이 험난한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일상(日常)을 검약하게 생활하는 것에 대해 비록 언급한 글이 있지만, 그것도 고갈되는 지경까지는 아직 이르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해야 할 말이지, 이미 극한 지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또한 아무 소용이 없고 한바탕 비웃음만 초래할 뿐이라는 것을 알겠으니, 어찌한단 말입니까. 만약 근신(謹愼)하는 훌륭한 선비가 사전에 먼 앞날을 염려한다면 혹시라도 조금의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예(禮)에 “나라가 사치하면 검소한 것을 보인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세상은 사치와 참람함이 이미 극에 달하였습니다. 빈한한 서민은 눈을 밝게 뜨고 행동을 신중히 하여 서로 패가망신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백순께서 이미 채택하여 쓰기를 원하는데 어찌 보내 드리지 않고자 하겠습니까만, 아직도 날마다 첨삭(添削)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제 수중에서 빼어 보내 드리기에 합당하지 않으니, 훗날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는 일은 반드시 두서(頭緖)가 있어야 세도(世道)를 위해 다행일 것입니다. 무릇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은 갑(甲)이 하지 않으면 을(乙)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찌 옛날과 지금, 남과 자신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한스럽게도 나는 정신이 이미 없어서 함께 상의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닙니다.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에 대해 나도 어떻게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일찍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선비산(鮮卑山)이라는 산이 본래 중국의 동북쪽 변경 바깥에 있습니다. 동호(東胡)의 한 종족이 그 아래 거주하는데, 부락(部落)도 번성하여 선비(鮮卑)라고 이름을 붙인 곳이 매우 많았습니다. 지금 동쪽 변경의 여러 산은 모두가 이 산의 줄기로서, 그중에 가장 동쪽이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인해 조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구려(高句麗)의 유리왕(琉璃王)이 선비와 전투를 벌였으니,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조(聖朝)에 이르러 처음에 조선화령(和寧)으로 국호를 청하였습니다. 화령은 과연 어디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고려사(高麗史)》 〈식화지(食貨志)〉를 상고해 보니, 신우(辛禑) 9년(1383)에 태조(太祖)가 안변책(安邊策)을 올려 “동북(東北)의 일도(一道)는 땅이 좁고 척박한데, 화령은 도내(道內)에서 땅이 넓고 비옥하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공양왕(恭讓王) 10년에는 동계(東界)의 화주(和州)를 승격시켜 화령부(和寧府)로 삼았으니, 이곳은 바로 영북(嶺北)에서 왕업이 일어난 곳입니다. 공양왕 때에 태조가 공(功)으로 화령백(和寧伯)에 봉해졌습니다. 무릇 국호를 세울 때에 반드시 그 근본을 들어서 국호를 삼기에 그러한 것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명(明)나라 홍무(洪武, 1368~1398) 초에 천자(天子)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고 하면서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장주(長州), 정주(定州), 고주(高州), 화주(和州)는 본래 개원(開原)에 속하는 지역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곳은 바로 함흥(咸興) 이남의 몇 개 고을입니다. 상고해 보니, 영원현(寧遠縣)은 개원의 서남쪽에 있고, 다시 그 남쪽은 남강(南康)이고, 다시 그 남쪽은 합란부(哈蘭府)이고, 다시 그 남쪽은 쌍성(雙城)입니다. 쌍성은 바로 지금의 북로(北路)의 영흥(永興)입니다. 그 경계가 고려에 근접해 있었으니, 총관(總管) 조휘(趙暉)의 일에서 증험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다행히 박의중(朴宜中)이 잘 대처하는 바람에 중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한 번 일어나야 했던 논의인데,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북쪽으로 한 방면은 다시는 우리나라의 소유가 되지 못했을 것이니, 역사를 저술하는 사람이 뜻을 기울여야 할 바입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고려조의 합단(哈丹)과 근세 병자년(1636, 인조14)에 침입한 청(淸)나라의 대병(大兵)은 모두 철령을 통해 침입한 것이니, 저들이 어찌 육진(六鎭)을 통해 돌아서 침입했겠습니까. 지금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의 물은 북쪽으로 압록강에 흘러드는데, 높거나 깊은 험지(險地)가 없으니, 필시 빠른 지름길이 있어서 곧바로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무지 조사하여 검증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또한 이해해야 합니다.

   열수(洌水)패수(浿水)와 같이 호칭되니, 간혹 이러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저탄강(豬灘江)벽란정(碧瀾亭)이 매우 명확한 증거입니다. 중국(中國)의 책에서 비록 혼동하여 칭했다 하더라도 본토(本土)에 있는 지명은 마땅히 구별해야 하니, 필시 두 강을 병칭(竝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라고 단정한다면, 당시 사람들이 저탄강을 가리켜 이름이 없다고 여겼겠습니까. 이것은 어떻게 헤아려 보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유민(流民)을 남읍(南邑)으로 이주시킨 사실이 다루왕(多婁王) 10년에 보이는데, 고구려에 쫓겨서입니다. 다시 두루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삼한(三韓) 이전에 삼남(三南)은 변방이었으므로 기자(箕子)의 나라와는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기준(箕準)에 이르러 마한(馬韓)의 왕을 축출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니, ‘한(韓)’이라는 명칭은 호강왕(虎康王) 이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韓)나라가 진(秦)나라와 가장 가까웠으므로 한나라의 백성들이 먼저 움직였으니, 이에 대해서는 《전국책(戰國策)》이 있어 근거할 수 있습니다. 진나라를 피해 오는 사람들은 필시 서하(西河)로부터 중국을 거쳐 심양(瀋陽)과 요령(遼寧)을 둘러서 영남(嶺南)에 들어오지는 못하였을 것이니, 그들이 바다를 곧바로 건너왔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한나라의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어찌 반드시 앞사람이 스스로 이름을 붙인 것을 뒷사람이 따라서 세 나라가 함께 칭하게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나의 생각으로는, 장량(張良)의 시대에는 삼한을 창해(滄海)라고 칭하였을 것입니다. 장량의 역량은 해외에서도 충분히 일을 주관하였으므로, 때때로 갑자기 튀어나와 철퇴로 진 시황(秦始皇)을 저격하기를 마치 자신의 손아귀에서 희롱하듯이 수행하여 어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아득하여 자세히 상고할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중국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파악할 안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백성들도 고정된 사고(思考)의 근원적인 이유를 깨닫지 못하였으니,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한바탕 웃음이 나올 만합니다.
이른바 기자(箕子)의 판도(版圖)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실을 상고할 수 없습니다. 뒤에 서쪽의 영토 수천 리를 연(燕)나라에 잃었으니, 요령(遼寧)심양(瀋陽)이 바로 그 지역 안입니다. 삼국(三國)의 말기에 신라가 그 지역을 제어하지 못하고, 발해로 하여금 그 땅을 차지하여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세력이 미치다가 뒤에 거란에 멸망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우리나라가 요(遼) 지역을 잃게 된 시말(始末)입니다. 고려의 태조가 요나라의 사신을 막고서 장차 옛 영토를 회복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상고해 보니, 서희(徐煕)소손녕(蕭遜寧)에게 답하기를 “귀국의 상경(上京)은 본래 우리나라의 영토이다.”라고 하니, 소손녕이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요 땅 전체가 본래 순(舜)이 처음 설치한 12주(州) 가운데 들어 있었습니다. 상고해 보니, 유주(幽州) 의무려(醫巫閭)라는 산이 있고 물고기와 소금이 산출되니, 요해(遼海)가 아니고 어디이겠습니까. 단군(檀君)과 기자의 나라가 압록강의 안팎을 차지하여 요순(堯舜)의 교화를 함께 입었고 기자에 이르러 팔조(八條)를 더하였으니, 전해지는 삼조(三條)는 바로 한 고조(漢高祖)의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오륜(五倫)과 합하면 여덟 단락이 되는데, 그 의미는 마치 부절(符節)을 합쳐 놓은 듯이 들어맞는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생각건대, 한(漢)나라의 책략(策略)은 모두 장량이 정한 것인데, 혹시 창해(滄海)에 전해 오는 전통에서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감히 아직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단군은 요컨대 요순과 같은 시대였고, 동이(東夷)의 사람이었으니, 모두 태평한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성스럽고 신령한 분이 처음 나오면 반드시 그 소문이 가까이에 자자할 것입니다. 박달나무는 향나무입니다. 그러므로 후인들이 묘향산(妙香山)을 처음 내려온 곳으로 여겼던 것이고, 옛 역사책에는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서 아들을 낳으니, 단군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최치원(崔致遠)의 글을 상고해 보니, 발해가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였다고 하였으니, 태백산 요(遼) 땅에 있는 것입니다. 그 설은 모두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환웅(桓雄)이니 환인(桓因)이니 하는 등의 말은 허황되어, 버려도 됩니다. 그는 결국에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들어갔는데, ‘아사’라는 말은 속어(俗語)로 아홉이라는 의미이고, ‘달’이라는 것은 속어로 달입니다. 구월산(九月山)이 그것에 해당된다고 한다면 거의 옳습니다. 지금 그 산 아래에 당장경(唐莊京)삼성사(三聖祠)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전하는 말에, 단군의 세대에 기자를 피하여 여기로 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자는 어질고 성명(聖明)한 인물인데, 어찌 남의 나라를 함부로 점유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필시 저들이 이미 쇠망한 뒤에 황폐해진 옛터를 닦아서 나라를 새로이 열었던 것입니다. 혹자가 단군이 아사달산으로 들어간 때가 바로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이라고 한 것이 이치에 가깝습니다. 단군의 후손도 신(神)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기자의 봉지(封地)는 남기(南箕)의 별자리에 해당합니다. 자(子)는 오등(五等)의 작위 가운데 하나이니, 그가 주(周)나라의 작명(爵命)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홍범(洪範)〉에 이른 ‘기자’라는 것은 바로 사관(史官)의 기록이니, 아마도 이전에 이미 이렇게 봉해진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자가 아뢴 〈홍범〉은 바로 〈낙서(洛書)〉를 부연하여 만든 것입니다. 〈낙서〉의 자리는 2와 8이 그 위치를 바꾸었습니다. 곤(坤)과 간(艮)은 마주 대하여 위로 은하(銀河)에 응합니다. 은하는 본래 회전하는 것인데, 지금 중국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머리인 간에서부터 꼬리인 곤에 이르기까지일 뿐입니다. 간(艮)은 기(箕)와 미(尾)의 별자리에 해당합니다. 지금 압록강 이서(以西)의 물은 모두 간방(艮方)에서 곤방(坤方)으로 흘러 〈홍범〉의 글과 부합하여 그 일이 마치 귀신이 도운 것과 같으니, 매우 기이합니다. 그러므로 순이 유주를 처음 설치한 뒤로 백이(伯夷)가 가서 살았으며, 공자(孔子)도 바다로 떠나가고자 하였으니, 동쪽의 노(魯)나라에 뗏목을 띄운다면 지향하는 곳이 기자의 나라가 아니고 어디이겠습니까.

   옛날 성인(聖人)이 주나라 말기에 태어나 두 기둥 사이에 앉아 제사를 받는 꿈을 꾸고 나서 “나는 은나라 사람이다. 지금 천하에 그 누가 나를 종주(宗主)로 받들겠느냐.”라고 하였으니, 근본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조선 사람들이 큰 관(冠)을 쓰고 흰옷을 입는 것을 통해 아직도 은나라의 질박한 유속(遺俗)을 지키는 것을 왕왕 증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일찍이 《시경(詩經)》의 〈도인사(都人士)〉 시를 읽으면서 띠풀로 만든 갓과 말아 올린 머리털이 마치 동도(東都)의 선비와 여자를 보는 듯하였으니, 어찌 아득히 당시를 상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은 아들이 생시에 예조(禮曹)에 오래 근무하면서 사신을 접대하는 업무를 관장하였는데, 하루의 책임이라도 다하기를 생각하면서 《접왜역년고(接倭歷年攷)》라는 책을 짓고 자신의 견해를 많이 첨부하였습니다. 그 내용 중에 참으로 채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본래 여러 동지(同志)에게 부치고자 하였으나, 편지를 전하는 인편에 부칠 만한 것이 아니어서 일단 그만두었습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의론은 대체로 모두 엉성해서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 역사를 저술할 때에는 천고(千古)의 면모(面貌)을 드러내고 손질하여 더욱 정중하게 표현하되, 진부한 옛 기록을 답습해서는 안 됩니다. 병을 앓은 뒤에 손이 가는 대로 어지러이 써서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만, 조용히 살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별지(別紙)


   사군 이부(四郡二府)는 남북조(南北朝)와 비슷한 듯합니다. 마한의 통치는 한강의 북쪽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동진(東晉) 시대에 원위(元魏)를 기록한 사례에 대해서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사례가 있습니다.
신라는 스스로 수로왕(首露王)과 동성(同姓)이라고 하기도 하고, 스스로 금천씨(金天氏)의 후예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니, 금란(金卵)과 금궤(金櫃)의 일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회(朝會)했으면 조회했다고 쓰고 갔으면 갔다고 써서,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이것은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고려가 인종(仁宗)이 즉위해서는 마음을 다해 요(遼)나라를 섬겼고, 원종(元宗)과 충렬왕(忠烈王) 이후로는 또한 마음을 다해 원(元)나라를 섬겼습니다. 상고하여 바로잡아야 합니다.
 
   고구려의 을파소(乙巴素)는 천고(千古)에 빼어난 한 명의 인물이니, 마땅히 밖으로 드러내 기록해야 합니다. 혹자는 왕후(王后)로 세우는 일을 간언(諫言)하지 아니한 것을 가지고 의심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사직(辭職)을 한 뒤였고, 또 계승한 왕과 꼭 마음이 맞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遼) 땅은 고구려 때에는 그래도 통치권 내에 있었으나, 삼국의 말기에 신라가 미약해져서 말갈(靺鞨)에게 맡겨 두었더니 대씨(大氏)에게 통합되었습니다. 요나라가 흥기하여 그 땅을 빼앗으니, 고려 태조가 그 땅을 회복하려고 하여 요나라의 사신을 쫓아 버리고 국교를 단절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갑자기 별세하였습니다. 훗날 광군(光軍)을 설치한 것은 모두 이러한 뜻입니다. 소손녕(蕭遜寧)과의 문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종(仁宗) 때에 이르러서는 마음을 다해 요나라를 섬겼습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당시의 인물이니, 응당 거짓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자는 마한이 기자의 후예라는 것을 의심합니다. 고구려의 땅은 본래 기자의 나라이고, 삼국이 삼한을 계승하였으므로 대략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라는 처음에 낙동강(洛東江) 이동(以東)의 땅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서쪽은 바로 여섯 가야(伽倻)의 땅이었으며, 변한(弁韓)은 그 남쪽에 있었으니 필시 지리산(智異山) 이남의 여러 고을로서, 지금의 경상도와 전라도의 여러 고을에 걸쳐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처음에는 신라에 항복하였더라도 그 뒤에는 결국 백제에 편입되었으니, 아마 지금 전라도 동남쪽의 여러 고을이 모두 변한의 땅이 아니었겠습니까. 이것은 의심스러운 대로 기록하여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辰)’이 ‘진(秦)’이라는 것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진영(辰嬴)을 근거로 삼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진(秦)나라를 피해서 왔는데, 한(韓)나라의 사람들이 먼저 왔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곡영전(谷永傳)〉을 근거하면, 한종(韓終)과 서복(徐福)이 함께 왔었다는 사실을 또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모두 진나라가 통일한 이후에 온 사람들이었으므로 합하여 ‘진국(辰國)’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한종은 필시 한(韓)나라의 자손일 것입니다. 장량(張良)이 말한 창해군(滄海君)이라는 자가 이 사람이 아닌 줄 어찌 알겠습니까. 창해(滄海)라는 것은 동방(東方)을 통칭하는 말이지 일개 강릉부(江陵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운(孤雲)의 글에 “한 지방이 무사하고, 창해가 편안하다.”라고 한 것을 통해 또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백제 땅에는 원래부터 백제국(伯濟國)이 있었으니, 십(十)이 변하여 백(百)이 되었다는 말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변(弁) 자의 의미는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변한(弁韓)을 반드시 변진(弁辰)이라고 부르니, 변(弁) 역시 진(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와 백제가 지리산을 경계로 삼은 것은 후대(後代)의 영토를 말하는 것이니, 만약 초기의 영토를 논한다면 신라의 서쪽은 여섯 가야(伽倻)이고, 그 서남쪽은 변한입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 영토와 명칭이 바뀐 뒤의 상황에서 매번 외국에서 전해 들은 것을 가지고 억측하여 판단한다면, 애로가 있을 듯합니다. 그것에 대한 설은 장황하여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본래의 글을 찾아볼 수가 없는 데다, 항상 중국의 역사를 가지고 근거를 삼고서 끼워 넣어 어지럽게 만들어 더욱 읽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시골 사람이 스스로는 믿지 않으면서 서울 사람은 진실하다고 믿는 것과도 같은 경우이니, 왕왕 한바탕 웃을 뿐입니다. 마땅히 변별하여 보아야 합니다. 낙랑(樂浪)과 임둔(臨屯)은 압록강의 남쪽에 있었고, 현도(玄菟)와 진번(眞蕃)은 북쪽에 있었습니다. 우거(右渠)는 주변 소읍(小邑)을 병합하였으니, 압록강 안팎에 걸쳐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사군(四郡)이 모두 그 옛 이름을 따랐다는 것은 옳습니다. 사군이 변하여 이부(二府)가 되었으니, 임둔은 낙랑에 병합되었고 진번은 현도에 병합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평안도 내지(內地)가 위씨(衛氏)에게 점거되자, 낙랑이 지금의 강원도 땅으로 물러났으니, 낙랑이라는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본래 낙랑은 평양(平壤)을 가리키고, 임둔은 관동(關東)을 가리킵니다. 이것에 대해 다시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遼)에 낙랑이 있는 것은 진국(辰國)에 진주(辰州)가 있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아마도 요령(遙領)과 같은 사례일 것입니다.
당나라 총장(總章) 2년(669)에 압록강 이북에 이미 항복한 성이 11개였으니, 국내성(國內城)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몽(朱蒙)이 처음에 졸본(卒本)에 도읍하였는데, 교시(郊豕)가 도망한 사건을 계기로 국내성을 얻게 되었으니, 압록강 동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몽은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고, 부여(扶餘)는 바로 옛 도성입니다. 그가 난을 피해 도망할 때에 어찌 꼭 아버지의 나라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하였겠습니까.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주몽이 그 처부(妻父)를 계승하였다고 하였으나, 그 설은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 졸본을 성천(成川)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지금의 폐사군(廢四郡)과 압록강 연안(沿岸)의 안팎이 개마국(蓋馬國)이었을 것입니다.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에 “서북쪽으로는 개마산(蓋馬山)을 끼고 있다.”라고 하였고, 수(隋)나라 군사의 한 무리가 개마(蓋馬) 방면으로 나와 압록강의 서쪽에서 모였다고 하였으며, 《한서(漢書)》에는 개마현(蓋馬縣)에 마자수(馬訾水)가 있다고 하였으니, 압록강을 가리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의 왕이 졸빈(卒賓)과 부여국(扶餘國)을 통합하였으니, 이는 모두 요(遼) 땅에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모두 참조하여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평나(平那)진번(眞蕃)인 듯합니다.
역사에서 패수(浿水)대수(帶水)의 사이라고 한 것은 저탄(豬灘) 한수(漢水)의 사이를 일컬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일찍이 논한 것이 있는데, 검토하지 못한 것입니다. 후대에 그 백성들이 유망(流亡)하여 남쪽에 이르자, 남원(南原) 등의 지역에 거주하도록 하니, 또한 그곳을 대방(帶方)이라고 칭하였습니다.
맹자(孟子)가 “주나라 이래로 700여 년이 되었다.〔由周以來七百有餘歲〕”라고 하였는데, 실제는 809년입니다. 《집주(集註)》에는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사이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문왕으로부터 계산한다면 여기에 다시 약간의 연수(年數)를 더해야 합니다. 이것조차도 이러한데 중국에서 외국의 연대를 계산한 것을 어찌 일일이 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우리나라의 역사책을 따라야 합니다.

   황룡국(黃龍國)악비(岳飛)가 일컬은 황룡부(黃龍府)가 이것입니다. 지금 요서(遼西)에 아직도 황룡성(黃龍城)이 있습니다.
국내성(國內城)이 분명히 압록강의 서쪽 바닷가 근처에 있었으니, 비류수(沸流水)는 필시 그 근처에 있었을 것입니다.
안시(安市)는 바로 지금의 봉황성(鳳凰城)입니다. 우리나라의 방언(方言)에 봉(鳳)아씨조(阿氏鳥)라고 하고, 미루(彌樓), 호랑이좌울음(左鬱陰)이라고 하는데,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부릅니다. 안시는 바로 봉황성입니다.
패수(浿水)는 분명히 저탄(豬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평양(平壤)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남쪽으로 굽어보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압록(鴨綠)이라는 것은 《삼국지(三國志)》추수(溴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중국의 역사책에 간혹 잘못 기록된 곳이 있으니, 글자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세 개의 강이 한 가지 이름일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성경통지(盛京通志)》에도 추(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듣자니,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의 물은 모두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과 합쳐져 서남쪽으로 폐사군(廢四郡)을 거쳐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는 구름을 끊을 정도의 큰 고개가 많으니, 지금의 설한령(薛罕嶺)후치(厚峙)와 같은 고개가 개마(蓋馬)의 지경에 있는 듯하며, 압록강 북쪽의 여러 산 역시 매우 험준한데, 모두 그 경내입니다.

   발해는 부여로써 거란을 방비하였으니, 《통전(通典)》의 설이 옳습니다. 종족이 본래 같으므로 동쪽으로 옮겨서도 동부여라고 칭하였던 것입니다. 온조도 그 후예였으므로 남쪽으로 달아나서도 또한 그렇게 칭하였으니, 지금의 부여현이 그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그대로 성으로도 삼았으니, 부여륭(扶餘隆), 부여풍(扶餘豐)과 같은 이름이 그것입니다.
옥저(沃沮)에는 북옥저(北沃沮), 동옥저(東沃沮), 남옥저(南沃沮)의 세 부류가 있습니다. 두만강 서쪽에서부터 철령(鐵嶺)까지 그 사이에 살았던 자들이 동옥저입니다. 역사에서 개마산(蓋馬山)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개마산이라는 것은 설한령과 철령 등의 여러 산인 것 같습니다. 그 영토는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는 짧은데, 천 리 정도입니다. 남옥저라는 것은 가장 남쪽에 있었으니, 지금의 영동(嶺東) 아홉 고을입니다. 북옥저라는 것은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등의 지역인 것 같습니다. 백두산의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나왔다가 다시 꺾인 뒤에 남쪽으로 뻗어 나가서 평안도와 함경도의 경계가 되는데, 이것으로써 북옥저와 동옥저와 남옥저의 세 부류를 나눕니다. 그리고 동옥저는 북쪽으로 읍루(邑婁)와 접했다고 하였으니, 읍루는 삼수와 갑산의 북쪽에 있는 것인 듯합니다. 《일통지(一統志)》에 “개원성(開元城)삼만위(三萬衛)의 서문(西門) 밖에 있다. 《원지(元志)》에 이르기를 ‘개원성의 서남쪽이 영원현(寧遠縣)이고, 다시 그 서남쪽이 남경(南京)이고, 다시 그 남쪽이 합란부(哈蘭府)이고, 다시 그 남쪽이 쌍성(雙城)이다.’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쌍성은 지금의 영흥부(永興府)이고, 삼만위는 옛날의 읍루 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동옥저가 철령의 밖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을 만합니다.

   《한서(漢書)》에 이계(尼溪)의 재상(宰相)과 조선(朝鮮)의 재상이 대칭(對稱)되어 있는데, 동국(東國)에 어찌 이러한 이름의 나라가 일찍이 있었겠습니까. 필시 예(濊)의 재상입니다. 본래 영동(嶺東)에 있는 나라였으나, 영토를 넓히는 시기에 이르러 큰 나라를 포괄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에 대해 일찍이 이해는 하였으나, 단지 우리나라의 역사만을 근거하였을 뿐입니다. 이제는 늙어서 태반을 잊어버려 그 대략만을 말씀드립니다. 지금 이 책을 읽어 보니, 폭넓게 인용하고 채집하였으면서도 모두 증거가 있습니다. 나의 안목은 이러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므로 흠모하고 완미(玩味)하기를 마지않습니다. 다만 정신이 쇠락하여 위아래로 두루 참고하지 못하니, 어떻게 차이를 판별할 수 있겠습니까. 백순께서는 세심하게 살펴 취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읽지 않고 황폐한 상태로 방치하였으니, 예로부터 뜻을 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책이 만약 완성된다면 천고(千古)에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먼 옛날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 때 군현(郡縣)의 경계조차도 간혹 밝히기 어려우니, 개탄스럽습니다.

   김주(金澍)의 일은 일찍이 윤근수(尹根壽)《월정집(月汀集)》에 전(傳)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김시양(金時讓)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서 그것이 실상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변별하였으니, 그 말이 또한 옳습니다. 당나라 천보(天寶, 742~756) 연간에 신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촉(蜀) 땅에서 황제를 조회하자 현종(玄宗)이 십운시(十韻詩)를 하사하여 칭찬하였는데, 역사를 저술하는 사람이 이 일을 거론하였습니다. 그리고 양(梁)나라 태청(太淸, 547~549) 연간에는 백제의 사신이 단문(端門) 밖에서 목 놓아 운 일이 있습니다. 두 사신의 이름이 모두 드러나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였는데, 참으로 그러합니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8년(882)은 당나라 희종(僖宗) 중화(中和) 2년에 해당합니다. 당시에 중국에 조회하러 간 사신 김직량(金直諒)이 황제가 촉 땅으로 행행(行幸)한 것을 알고서 고변(高騈)에게 호송(護送)을 부탁하여 서천(西川)까지 간 일이 있습니다. 이 일은 최고운〈태사 시중에게 올린 장문〔上太師侍中狀〕〉에 갖추어 실려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것을 누락하여 특서(特書)하지 못하였을까요? 가소롭습니다.
권양촌(權陽村)은 단군 천년이 대대로 전하여 온 햇수라는 것을 정론(定論)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천년 뒤의 마지막 후손이 또한 산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역사에서는 평양(平壤)에 도읍했다가 나중에 백악(白岳)으로 천도(遷都)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사람은 구월산(九月山)을 백악으로 여깁니다. 문화현(文化縣)에 당장평(唐莊坪)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상고할 바가 없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신이 태백산(太白山)에 내려왔다고 이미 말하였으니, 최고운의 글에 근거할 때 요(遼) 땅에 있다가 나중에 평양으로 천도한 것인 듯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묘향산(妙香山)을 처음 내려온 곳이라고 이미 생각하였으므로 구월산이 바로 백악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구월산이 어찌 일찍이 백악이라고 불린 적이 있었겠습니까.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김위제(金謂磾)도선(道詵)신지비기(神誌秘記)를 인용하여 서경(西京)을 백아강(白牙岡)이라고 하였는데, 서경이라는 것은 평양입니다. 백강(白岡)이 백악이 아니겠습니까. 혹은 단군은 백악으로부터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고, 후손이 서로 계승하여 천년에 이른 것입니까? 이미 단(檀)이라고 그 나라를 불렀다면, 그 자손도 단군입니다. 이 역시 나의 억측일 뿐입니다. 대개 아득한 옛날의 일은 태반이 요 땅에서 있었던 일인데, 지금 풍속은 매번 압록강 동쪽의 일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제멋대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니,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다 오히려 더 잘못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주D-001]나라가 …… 보인다 :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나라에 도가 없으면 군자는 완비된 예를 행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나라가 사치하면 검소한 것을 보이고, 나라가 검소하면 예를 갖추어 행하는 것을 보인다.〔國無道 君子恥盈禮焉 國奢則示之以儉 國儉則示之以禮〕”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나온다.
[주D-002]공양왕(恭讓王) …… 삼았으니 : 공양왕이 재위한 기간은 3년에 불과하였으며, 화주(和州)를 승격시켜 화령부(和寧府)로 삼은 것은 공민왕(恭愍王) 18년(1369)의 일이다. 따라서 ‘공양왕 10년’이라는 말은 잘못이다. 《高麗史 卷58 地理 東界和州》
[주D-003]영북(嶺北)에서 …… 곳입니다 :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태어난 함경도 영흥(永興)을 가리킨다. 영흥의 옛 이름이 화령(和寧)이다.
[주D-004]총관(總管) …… 있습니다 : 조휘(趙暉)는 고려 고종(高宗) 때의 인물로, 1258년(고종45)에 원(元)나라 군대가 동북 지방에 침입하자 반란을 일으켜 화주(和州) 이북의 땅을 가지고 원나라에 귀순하였다. 이에 원나라는 화주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그를 총관에 임명하였다. 《東史綱目 第11上》
[주D-005]당시에 …… 있었습니다 : 박의중(朴宜中)은 여말 선초의 문신으로, 1388년(우왕14)에 명나라 태조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고 조서를 내리자, 사신으로 파견되어 철령이 본래 고려의 땅이었다는 것을 주장하여 명 태조의 계획을 철회시켰다. 《東史綱目 第16 廢王禑下》
[주D-006]합단(哈丹) : 1290년(충렬왕16)에 원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내안(乃顔)의 잔당 두목이다. 1291년 관군에게 패하자 고려의 관동(關東) 지방으로 난입하여 화주(和州)와 등주(登州) 이서의 여러 고을 인민들을 살육하고 겁탈하고 노략질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만호(萬戶) 나유(羅裕) 등을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철령관(鐵嶺關)을 방호(防護)하게 하였는데, 적이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철령관을 포기하고 도주함으로써 적도가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듯 국토를 유린하게 하였다. 《高麗史 卷30 世家》
[주D-007]벽란정(碧瀾亭) : 벽란도(碧瀾渡) 즉 지금의 예성강(禮成江) 하류에 있던 정자이다. 여기서 40리를 가면 개성(開城)에 당도한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 開城府上》
[주D-008]장량(張良)의 …… 없었습니다 : 장량이 한(韓)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쪽으로 가서 창해군(滄海君)에게 역사(力士)를 얻어 박랑사(博浪沙)에서 진 시황을 철퇴로 저격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009]서희(徐煕)가 …… 못하였습니다 : 고려 성종(成宗) 12년(993)에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이 봉산군(蓬山郡)을 침입하여 차지하자, 성종이 서희(942~998)를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소손녕이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 땅을 침식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宋)나라를 섬기니, 우리가 이 때문에 와서 토죄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朝聘)을 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니, 서희가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의 지경(地境)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이르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나라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스럽게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신(臣)의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느냐.”라고 대답하였다. 《高麗史 卷94 徐煕列傳》
[주D-010]유주(幽州)는 …… 산출되니 : 《주례(周禮)》 〈하관사마(夏官司馬)〉직방씨조(職方氏條)에 “동북쪽을 유주라고 하는데, 그곳의 진산(鎭山)은 의무려(醫巫閭)이고, 대택(大澤)은 해양(貕養)이고, 하천은 하수(河水)와 제수(泲水)이고, 수침(水浸)은 치수(淄水)와 시수(時水)이고, 산물(産物)은 물고기와 소금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1]팔조(八條) : ‘여덟 가지 가르침〔八條之敎〕’의 준말로, 기자(箕子)가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정한 법금(法禁)이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세 가지로, 살인을 한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여 갚아 주고,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게 하며, 도둑질을 한 자는 적몰(籍沒)하여 피해자의 노비로 삼는다는 것이다.
[주D-012]약법삼장(約法三章) :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진(秦)나라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한 뒤에 진나라의 가혹하고 번다한 법률을 폐지하고 세 가지 법만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약법삼장’이다. 그 내용은 살인자는 죽이고 상해자와 도적은 처벌한다는 것이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주D-013]오륜(五倫) : 윤리의 다섯 가지 규범인 오상(五常) 즉 군신유의(君臣有義),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가리킨다.
[주D-014]최치원(崔致遠)의 …… 하였으니 : 최치원이 지은 〈태사 시중에게 올린 장문〔上太師侍中狀〕〉에 “고구려의 잔당이 규합하여 북쪽으로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의지하면서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孤雲集 卷1 上太師侍中狀, 韓國文集叢刊 1輯》
[주D-015]당장경(唐莊京) :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에 속해 있으며, 단군의 도읍지 중의 하나이다. 당장평(唐莊坪), 장장평(莊莊坪)이라고도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2 黃海道 文化》
[주D-016]삼성사(三聖祠) : 황해도 구월산 아래에 있는, 환인(桓因)ㆍ환웅(桓雄)ㆍ단군의 삼신(三神)을 모신 사당이다.
[주D-017]남기(南箕) : 남쪽에 있는 기성(箕星)으로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인데 키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D-018]기자가 …… 것입니다 : 《서경집전(書經集傳)》 〈홍범(洪範)〉의 주석에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이기고 기자를 찾아가 천도(天道)를 묻자, 기자가 〈홍범〉을 아뢰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낙서〉는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그려져 있었다는 45개의 점으로 된 그림이다. 〈홍범〉 즉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근원이 되었다.
[주D-019]낙서의 …… 바꾸었습니다 : 음양(陰陽)의 수는 자(子)와 오(午)에서 시작한다. 양수(陽數)는 자(子)에서 시작하여 바로 세어 가기 때문에 일(一)이 감(坎)에, 이(二)가 간(艮)에, 삼(三)이 진(震)에, 사(四)가 손(巽)에 위치하고, 음수(陰數)는 오(午)에서 시작하여 역으로 세어 가기 때문에 구(九)가 이(離)에, 팔(八)이 곤(坤)에, 칠(七)이 태(兌)에, 육(六)이 건(乾)에 위치한다. 지금 〈낙서〉의 수는 이가 곤에, 팔이 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위치가 바뀌었다고 한 것이다.
[주D-020]공자(孔子)도 …… 하였으니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나 나갈까 보다.〔道不行 乘桴浮于海〕”라고 탄식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21]성인(聖人)이 …… 하였으니 :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빈소(殯所)를 차렸는데, 공자가 어느 날 밤 두 기둥 사이에 앉아 제사를 받는 꿈을 꾸고 나서 “내가 어젯밤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밝은 임금이 나오지 않으니, 세상에서 누가 나를 종주(宗主)로 받들겠는가. 그러니 나는 아마도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7일 동안 병들어 누웠다가 운명하였다. 《禮記 檀弓上》
[주D-022]시경(詩經)의 …… 듯하였으니 : 〈도인사(都人士)〉는 주나라 사람들이 윗사람의 의복이 일정하지 못한 것을 풍자한 시이다. 그 내용 가운데 “저 왕도의 인사여, 띠풀로 만든 갓에 치포관이로다.〔彼都人士 臺笠緇撮〕”라는 구절과 “저 군자의 여자여, 말아 올린 머리털이 벌 꼬리와 같도다.〔彼君子女 卷髮如蠆〕”라는 구절이 있다. 동도(東都)는 주 평왕(周平王)이 동쪽으로 옮긴 도읍인 낙읍(洛邑)을 가리킨다.
[주D-023]죽은 아들 : 성호의 아들 이맹휴(李孟休, 1713~1751)를 가리킨다. 자는 순수(醇叟), 호는 두산(斗山)이다. 1735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1742년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서 장원을 차지하였으며, 예조 정랑, 만경 현령(萬頃縣令)을 지냈다. 1748년부터 병을 앓다가 1751년 5월 7일에 사망하였다. 예학(禮學)에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저술로 《춘관지(春官志)》, 《접왜역년고(接倭歷年攷)》, 《거관일록(居官日錄)》 등을 남겼는데, 현재 《춘관지》만 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順菴集 卷27 李萬頃醇叟遺事, 韓國文集叢刊 230輯》
[주D-024]사군 이부(四郡二府) : 고조선이 망하자, 한 무제(漢武帝)가 그 땅에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도(玄菟), 진번(眞蕃) 사군을 설치하였고, 한 소제(漢昭帝)가 다시 임둔과 진번을 혁파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시켜 이부로 만들었는데, 주몽(朱蒙)이 일어나서 그 땅을 차지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東史綱目 附錄 衛氏疆域考, 三韓考, 四郡考》 《後漢書 卷85 東夷列傳》
[주D-025]동진(東晉) : 316년에 서진(西晉) 왕실의 후예인 낭야왕(琅琊王) 사마예(司馬睿), 즉 원제(元帝)가 중국의 남방에 세운 나라이다. 북방의 16국과 공존하다가, 420년에 유유(劉裕)가 동진을 멸망시키고 유송(劉宋)을 세웠다.
[주D-026]원위(元魏) : 남북조(南北朝) 시대 북위(北魏, 386~557)의 다른 이름이다. 효문제(孝文帝)가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뒤에 성(姓)을 탁발씨(拓跋氏)에서 원씨(元氏)로 바꾸었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주D-027]금천씨(金天氏) : 상고 시대 전설상의 황제인 소호 금천씨(少昊金天氏)를 가리킨다. 황제(黃帝)의 아들로 이름은 현효(玄囂) 또는 지(摯)라고 하며, 어머니는 누조(嫘祖)이다. 태호 포희씨(太昊庖犧氏)의 법을 닦았으므로 소호(少昊)라 칭하는데, 소호(少皞)라고도 한다.
[주D-028]금란(金卵)과 금궤(金櫃)의 일 : 금란의 일은 하늘에서 떨어진 황금색의 알에서 나왔다는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김수로(金首露)의 탄생 설화를 가리키고, 금궤의 일은 계림(鷄林)에서 발견된 황금색 궤짝에서 나왔다는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탄생 설화를 가리킨다.
[주D-029]을파소(乙巴素) :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13년(191)에 사부(四部)에 명하여 어진 인재로서 아래에 있는 사람을 추천하도록 하니, 모두 동부(東部)에 사는 안류(晏留)를 추천했는데, 안류는 다시 을파소를 추천하였다. 왕이 을파소를 정중하게 맞이하여 우태(于台)의 직책에 임명하였으나, 을파소는 그 직책으로는 자신의 역량을 펼치기 어렵다는 취지로 사양하며 물러가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을파소를 국상(國相)에 임명하니,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얼마 뒤에 안류는 을파소를 추천한 공로로 대사자(大使者)에 임명되었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주D-030]혹자는 …… 의심합니다 : 고국천왕이 죽자 왕비 우씨(于氏)가 밤중에 몰래 고국천왕의 작은동생 연우(延優)의 집에 가서 연우가 왕위에 오르도록 서로 공모(共謀)하였다. 연우는 왕의 유명(遺命)이라 거짓말하여 왕위에 오르고 우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고국천왕의 큰동생인 발기(發岐)는 연우가 우씨와 모의하여 자기에게 돌아와야 할 왕위를 빼앗은 것에 분노하여 한(漢)나라의 공손도(公孫度)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연우가 파견한 다른 동생인 계수(罽須)에게 패해 결국 자살하였다. 연우가 바로 고구려 제10대 왕인 산상왕(山上王)이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혹자는 을파소 같은 어진 재상이 왜 연우가 우씨와 공모하여 형의 왕위를 빼앗은 뒤에 우씨를 왕비로 맞이한 일을 간언하여 막지 못하였는지 의심한 것이다.
[주D-031]대씨(大氏) :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발해(渤海)를 가리킨다.
[주D-032]진영(辰嬴) : 진 양공(晉襄公)이 졸하자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로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가계(賈季)는 “공자 악(樂)을 세우는 것만 못하다. 진영이 두 임금에게 사랑받았으니, 그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면 백성들이 반드시 안정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6年》 진영은 진 목공(秦穆公)의 딸로서, 진(晉)나라 태자 어(圉)가 진(秦)나라에 인질로 있을 때 그에게 시집갔다. 태자 어는 중이(重耳) 즉 진 문공(晉文公)의 형인 진 혜공(晉惠公)의 아들로서 진(秦)에서 도망쳐 나와 진 회공(晉懷公)으로 즉위했다가 재위 5개월 만에 중이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가계가 말한 두 임금은 바로 진(晉)나라의 회공과 문공을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喜公23, 24年》
[주D-033]곡영전(谷永傳)을 …… 있습니다 : 곡영이 한종(韓終)과 서복(徐福)에 대해 언급한 사실은 《한서(漢書)》 〈교사지(郊祀志)〉에 나오는 말로, 〈곡영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전거(典據)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한 성제(漢成帝)가 귀신과 방술(方術)을 지나치게 신봉하자, 곡영이 신괴(神怪)한 일에 미혹되지 말 것을 간언하면서 “진 시황(秦始皇)이 서복, 한종 등을 시켜 많은 어린 남녀를 싣고 바다에 들어가 신선(神仙)을 구하게 하였는데, 그길로 도망하여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곡영은 자가 자운(子雲)이며, 서한(西漢) 장안(長安) 사람이다. 대사농(大司農)에 올랐으며, 직간(直諫)을 잘하였다.
[주D-034]한 지방이 …… 편안하다 : 최치원이 지은 〈태사 시중에게 올린 장문〔上太師侍中狀〕〉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 동안 한 지방이 무사하고 창해(滄海)가 편안한 것은 바로 우리 무열대왕(武烈大王)의 공입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孤雲集 卷1 上太師侍中狀, 韓國文集叢刊 1輯》
[주D-035]십(十)이 …… 듯합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온조(溫祚)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여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나중에 그 땅에 올 때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6]우거(右渠) : 위만(衛滿)의 손자로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다. 한 무제(漢武帝)에 의해 기원전 108년에 망하였다.
[주D-037]요령(遙領) : 직접 임지(任地)에 가지 않고 멀리서 다른 지방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주D-038]교시(郊豕)가 …… 되었으니 : 교시는 교제(郊祭)에 희생으로 쓰는 돼지이다. 고구려 유리왕(琉璃王) 21년에 교시가 달아나자, 유리왕이 장생(掌牲)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설지는 국내(國內)의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서 돼지를 붙잡고는 돌아와 왕에게 국내가 자연이 험준하고 토양이 비옥하며 산물(産物)이 많아 도읍을 옮기기에 좋은 곳이라고 보고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다음 해 10월에 도읍을 졸본(卒本)에서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주D-039]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 하였으나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주몽(朱蒙)이 북부여(北夫餘)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의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고는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졸본부여의 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주D-040]폐사군(廢四郡) : 조선 세종 때 최윤덕(崔潤德) 등을 보내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고 압록강 상류에 여연(閭延),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의 4군(郡)을 설치했는데, 유지가 어렵다는 이유로 1455년(단종3)에 우예, 무창, 여연의 3개 군이 폐지되고 1459년(세조5)에 자성군마저 폐지되어 이후 폐사군으로 불렸다.
[주D-041]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 : 임언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다. 1107년(예종2) 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할 때에 도지병마영할사(都知兵馬鈴轄使)의 직책을 띠고 출정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그곳에 9성(城)을 설치하였는데, 그 일을 〈구성기〉라는 글을 지어 기록하였다. 이 글은 현재 일부 내용이 다른 기록을 통해 전할 뿐, 전문(全文)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주D-042]수(隋)나라 …… 하였으며 : 《조선사략(朝鮮史略)》 〈신라기(新羅紀)〉에 “대장군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 등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군사를 아홉 방면으로 나누어 나가서 압록강의 서쪽에서 모이게 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3]한서(漢書)에는 …… 하였으니 : 《한서》 〈지리지(地理志)〉 현도군조(玄菟郡條)에서 소속 현(縣)으로 서개마현(西蓋馬縣)을 들었는데, 그 원주(原註)에 “마자수(馬訾水)가 서북쪽으로 염난수(鹽難水)에 흘러들고 서남쪽으로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는 기록이 있다.
[주D-044]맹자(孟子)가 …… 하였는데 : 맹자가 제(齊)나라를 떠날 때에 제자 충우(充虞)가 맹자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묻자, 맹자가 “500년에 반드시 왕자(王者)가 나오니,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유명한 자가 있다. 주(周)나라 이래로 700여 년이 되었으니, 연수(年數)를 가지고 보면 지났고, 시기로 살펴보면 지금이 가능한 시기이다. 하늘이 아직 천하를 평치(平治)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니, 만일 천하를 평치하고자 한다면 지금 세상에 나 말고 누가 있겠는가. 내 어찌하여 기뻐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下》
[주D-045]집주(集註)에는 …… 하였습니다 : “주나라 이래로 700여 년이 되었다.”라는 구절에 대해 주희(朱熹)는 《맹자집주(孟子集註)》에서 “주나라는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사이를 말한 것이다.”라고 주해하였다.
[주D-046]악비(岳飛)가 …… 이것입니다 : 송나라 때 충신 악비(岳飛, 1103~1142)가 금(金)나라의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투항하자 부하들에게 “곧장 황룡부(黃龍府)로 쳐들어가서 그대들과 함께 실컷 취하도록 마시고 싶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宋史 卷365 岳飛列傳》
[주D-047]성경통지(盛京通志) : 청나라 때 동병충(董秉忠) 등이 감수한 책으로 경성(京城), 단묘(壇廟), 산릉(山陵), 궁전(宮殿) 등 32권으로 되어 있는 것을 건륭(建隆) 44년 즉 1779년에 칙명을 받들어 보충 수찬(修撰)하였다.
[주D-048]부여륭(扶餘隆) :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셋째 아들이다. 의자왕 4년(644)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백제가 망하면서 당나라로 압송되어 갔다. 665년에 당 고종(唐高宗)의 명으로 웅진 도독(熊津都督)이 되었다가 얼마 뒤 당나라로 돌아가 낙양(洛陽)에서 죽었다.
[주D-049]부여풍(扶餘豐) : 백제 의자왕의 아들이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망하고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661년에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주류성(周留城)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고는 당시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옹립하여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다. 부여풍은 그 뒤 복신을 살해하고 병권을 잡았으나 연합군에 의해 패하여 고구려로 도망하였다가, 고구려가 망할 때 당나라 군사에게 잡혀가 당나라의 오령(五嶺) 남쪽으로 귀양 갔다.
[주D-050]일통지(一統志)에 …… 있습니다 : 《명일통지(明一統志)》 권25 요동도지휘사사조(遼東道指揮使司條)의 개원성(開元城)에 대한 주석에 나오는 기록이다. “개원성(開元城)은 삼만위(三萬衛)의 서문(西門) 밖에 있다.”라고 번역되는 부분은 대본에 ‘三萬衛在開元城西門外’라고 되어 있는데, 《명일통지》에는 ‘開元城在三萬衛西門外’라고 되어 있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번역문에 ‘남경(南京)’이라고 된 부분도 대본에는 ‘南康’으로 되어 있는 것을 《명일통지》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한 것이다. 《원지(元志)》는 《원일통지(元一統志)》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후대에 일실(逸失)되어 전하지 않아 상고할 수 없다.
[주D-051]한서(漢書)에 …… 있는데 : 고조선 말에 한(漢)나라의 군대가 조선을 치자, 조선의 재상 노인(路人)ㆍ한도(韓陶)와 이계(尼溪)의 재상 참(參), 장군 왕겹(王唊)이 서로 투항할 것을 모의하였다는 기록이 《한서》 〈서남이양월조선전(西南夷兩粤朝鮮傳)〉에 나온다.
[주D-052]큰 …… 있습니다 : 대본에는 ‘寧有包大之理’라고 되어 있는데, 문맥이 통하지 않아 초간본인 퇴로본(退老本)에 ‘容有包大之理’라고 되어 있는 것을 참고하여 번역하였다.
[주D-053]이 책 :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초고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안정복(安鼎福)의 연보에, 《동사강목》의 저술 시기에 대해 “병자년에 처음 초(草)를 잡기 시작하여 4년이 걸려 책이 완성되었다.”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이 편지가 쓰인 1756년에 안정복이 성호에게 초고를 보내 자문을 구하였던 것이다. 《順菴集 年譜, 韓國文集叢刊 230輯》
[주D-054]김주(金澍)의 …… 변별하였으니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윤근수(尹根壽, 1537~1616)가 지은 〈농암선생전(籠巖先生傳)〉은 김주라는 인물에 대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주가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중국에 하절사(賀節使)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서 조선이 건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에게 편지를 쓰기를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烈女)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 내가 강을 건너가더라도 몸을 둘 곳이 없다.”라고 하고, 또 조복(朝服)과 신을 보내며 “이것으로 신물(信物)을 삼고, 부인이 하세(下世)한 뒤에 이것을 합장(合葬)하여 우리 부부의 묘를 만들라. 그리고 내가 강가에 이르렀다가 도로 중국으로 돌아간 날로 나의 기일(忌日)을 삼으라. 장사를 지낸 뒤에는 지문(誌文)과 묘갈(墓碣)을 쓰지 말라.”라고 하고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형초(荊楚) 지방에 살았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은 자신의 저서인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서 이 일화에 대해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月汀集 卷4 籠巖先生傳, 韓國文集叢刊 47輯》 《大東野乘 荷潭破寂錄》
[주D-055]당나라 …… 칭찬하였는데 : 신라 경덕왕(景德王) 15년(756) 봄 2월에 경덕왕이 당 현종(唐玄宗)이 촉(蜀) 땅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냈다. 사신이 성도(成都)에 이르러서 공물(貢物)을 바쳤더니, 현종이 가상하게 여겨 직접 십운시(十韻詩)를 지어 경덕왕에게 보냈다. 십운시는 다음과 같다. “사방의 땅이 나누어져 있지만, 삼라만상이 그 속에 있네. 구슬과 피륙들은 온 천하에 깔려 있고, 산 넘고 물 건너 중국으로 찾아드네. 아득히 먼 동방을 생각하니, 세월이 가도 부지런히 조공을 오는구나. 아득히 땅이 다해 끝나는 곳에, 푸르게 이어진 바다의 모퉁일레. 명예와 의리의 나라라고 하니, 산과 물이야 무엇이 다르겠나. 우리 사신은 돌아가 중국의 풍교를 전하고, 그들이 이에 오면 옛 법을 배워 가네. 의관 문물이 예의를 받들 줄 알고, 충실하고 믿음 지켜 유학을 높였구나. 참으로 하늘이 이를 살피나니, 어질구나 그 덕이 어찌 외로우랴. 깃발 세우고 우리처럼 백성을 다스리니, 보내 준 후한 선물 정성이 넘치도다. 푸르고 푸른 뜻을 더욱 중히 하여, 바람 서리 치더라도 항구히 변치 마오.〔四維分景緯 萬象含中樞 玉帛遍天下 梯航歸上都 緬懷阻靑陸 歲月勤黃圖 漫漫窮地際 蒼蒼連海隅 興言名義國 豈謂山河殊 使去傳風敎 人來習典謨 衣冠知奉禮 忠信識尊儒 誠矣天其鑑 賢哉德不孤 擁旄同作牧 厚貺比生蒭 益重靑靑志 風霜恒不渝〕” 《三國史記 新羅本紀》
[주D-056]양(梁)나라 …… 있습니다 : 백제 성왕 27년(549)에 성왕이 양나라 도성에 반란이 일어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성과 대궐이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대궐 단문(端門) 밖에서 목 놓아 울었는데, 행인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주D-057]최고운의 …… 있는데 : 〈태사 시중에게 올린 장문〔上太師侍中狀〕〉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화(中和) 2년에 입조사(入朝使) 김직량(金直諒)이 반신(叛臣)의 작란(作亂) 때문에 도로가 통하지 않자 마침내 초주(楚州)에 상륙하여 이리저리 헤매다가 양주(楊州)에 와서야 성가(聖駕)가 촉(蜀)으로 행차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고 태위(高太尉)가 도두(都頭) 장검(張儉)을 차출하여 그를 감호하여 서천(西川)에 이르게 한 일이 있습니다.” 《孤雲集 卷1 上太師侍中狀, 韓國文集叢刊 1輯》
[주D-058]권양촌(權陽村)은 …… 삼았습니다 : 양촌 권근(權近)이 명나라에 조회하러 갔을 때 명 태조(明太祖)가 시를 짓게 하자 “대대로 전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지나온 햇수는 천년을 넘었네.〔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라고 하였는데, 천년이라는 것은 단군의 후손 대대로 왕위를 전해 온 기간이지 단군의 재위 기간이나 수명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東國史略 卷1 檀君朝鮮》 《東史綱目 第1上》
[주D-059]천년 …… 것 : 단군이 말년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는 역사의 기록을 두고 말한 것인데, 성호는 ‘단군’이 단군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60]당장평(唐莊坪) :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에 속해 있으며, 단군의 도읍지 중의 하나이다. 당장평(唐莊坪), 장장평(莊莊坪)이라고도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2 黃海道 文化》
[주D-061]김위제(金謂磾)가 …… 하였는데 : 고려 숙종 원년(1096)에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의 벼슬에 있던 김위제라는 사람이 신라 말의 승려 도선(道詵)의 비술(秘術)을 배워 남경(南京)으로 천도(遷都)할 것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그 글에 “서경(西京)을 백아강(白牙岡)이라고 하여 저울 머리에 비유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高麗史 卷122 金謂磾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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