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회(동양대 교수),한국인의 뿌리를 찾아서(초략) :1. 고조선의 계승 문제 : 요나라의 정체성

2016. 5. 5. 15:39우리 역사 바로알기



       김운회(동양대 교수),한국인의 뿌리를 찾아서(초략) :1. 고조선의 계승 문제 : 요나라의 정체성  

           고조선연구 / 문사철 연구

                                           

2016.04.11. 10:34

           http://blog.naver.com/nongeun241/220680108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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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상고사 대토론회 발표문

   

   

한국인의 뿌리를 찾아서

- 한국 고대사 천년의 패러다임을 넘어-

   

   

   

김운회(동양대 교수)

   

   

일시 : 2014513() 1318 장소 : 동북아 역사재단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인광빌딩 구관


 


1. 고조선의 계승 문제 : 요나라의 정체성

   

(1) 고조선과 요나라

   

   한국에서 오랑캐의 왕으로 확실히 각인되어있는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 872?~926)는 요나라의 1대 황제인데 그의 나라가 한민족과 뿌리를 공유한다는 정사의 기록이 많다.

   

거슬러 올라가, 진서(晉書)에는 모용황(慕容皝)모용외가 요동공(遼東公)이 되자 세자(世子)로 세웠다. 건무(建武) 초에 관군장군(冠軍將軍)좌현왕(左賢王), 망평후(望平侯)가 되어 군대를 인솔하여 정벌을 하였던 바, 그 공이 크게 쌓여 대령(太寧) 말기에는 평북장군(平北將軍)이 되고 조선공(朝鮮公)에 봉해졌다. 모용외가 죽자 모용황이 이를 계승하였다.” 즉 선비 계열인 모용외와 모용황이 조선공(조선왕)에 봉해졌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연(北燕)의 모용운(慕容雲)에 관하여서도 진서모용운의 자()는 자우(子雨)이며 모용보(慕容寶)의 양자이다. 조부는 고화(高和)인데 구려에서 갈린 족속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사(遼史)에도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고 하고 같은 책지리지에서는 “(거란 수도인 중경의 동부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고 한다. 요사』「지리지의 기록에 나타나는 동경요양부도 현재의 평양이 아니다. 8조범금은 고조선 법제로 8조법(八條法)이라고도 한다. 동경요양부는 현재의 랴오양(遼陽)시로 비정된다. 선비족(동호의 후예)이 조선왕이고, 요나라가 고조선 법제를 갖고 있었다는 분명한 기록이기도 하다.

   

(2) 민족신화의 원형, 단석괴 신화

진수의 삼국지(三國志)흉노(匈奴)의 한 제후가 3년 전장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제후는 아이를 죽이려 했다. 아내는 낮에 길을 가다 천둥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니 번개가 입에 들어와 삼켜 임신했으니 이 아이는 필시 기이하여 크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제후가 안 믿자 아내는 친정집에 아이를 보내 기르게 했다. 아이는 자라며 기골이 크고 용맹할 뿐 아니라 지략(智略)이 뛰어나 부락이 그를 경외하고 복종해 마침내 부족장으로 추대됐다.”고 한다.

   

이 분은 한국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호의 후예인 선비족(鮮卑族)의 영웅 단석괴(檀石槐)이다. 단석괴는 2세기 중엽 동북 초원의 부족을 통합해 현재의 허베이(河北)에서 둔황(敦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다. 그가 죽고 제국은 약화돼 225년 모용부(慕容部),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 등으로 분리됐다. 조선공(조선왕) 모용외는 모용부에 속한다. 단석괴의 후손인 모용외가 조선의 왕이므로 단석괴는 조선의 시조급 인물이란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 단석괴의 신화는 부여의 건국자 동명과 고구려의 건국자 고주몽의 설화와 아주 흡사하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부여의 신화에 윤색을 가해 탄생되는데, 삼국사기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인데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하백의 따님은 부여 왕에 의해 방안에 갇혔는데 햇빛이 그의 몸을 비추어 이를 피하였지만 그 빛은 계속 그녀를 따라다녔다. 곧 그녀에게 태기가 있어 알을 하나 낳았는데 부여왕은 이 알을 버려 개에게 주었는데 먹지 않았고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거리에 내다 버렸으나 마소가 피해 다녔고 들에 버리자 새들이 보호해 주었다. 마침내 왕은 알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이 알을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이가 자라서 자()를 주몽이라고 하였는데 그곳 풍속에 주몽이란 활의 명인이라는 뜻이었다.”라고 한다.

   

동호의 후예이자 실존 인물인 선비족 영웅 단석괴의 탄생 설화가 동명이나 고주몽의 출생 설화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은 부여나 고구려가 동호·선비의 일파이거나, 단석괴의 출생 신화를 시조 신화로 차용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동일 조상이라는 의식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시기를 더 거슬러 올라 BC 3세기경 사마천의 사기』「흉노열전(匈奴列傳)에는 ()나라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를 1000리 밖으로 격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사실상 고조선에 대한 침공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동호 = 고조선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한나라 때 정책 서적인 염철론(鹽鐵論)에서는 이 사건이 연()이 동호를 습격하여 바깥으로 1000리를 물러나게 했으며, 요동을 지나 동쪽으로 조선을 공략하였다고 되어있다. 이 기록은 마치 동호의 바로 옆에 고조선이 있어 동호를 무찌르고 다시 고조선을 공격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같은 사건이 이 시기 대표적인 정사인 삼국지에서는 위략(魏略)을 인용해 고조선과 연나라의 갈등이 극심하여 결국 연나라의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으며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고조선과의 경계를 삼았다. 이로써 고조선이 매우 약화됐다.”고 한다. 즉 진개가 공격한 것은 동호이자 바로 고조선이라는 말이다.(동호 = 고조선)

   

(3)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에 나타난 조선

   

한국과 중국에 널리 알려진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공후인)도 조선에 대한 비밀을 찾아가는 단서가 된다. 공무도하가는 후한(後漢) 때 채옹(蔡邕, 132~192)금조(琴操)에 처음 채록되어 전해지며, 삼국시대 진() 나라 최표(崔豹)고금주(古今注)에는 관련 설화도 함께 전해진다. () 나라 때에 곽무청(郭茂淸)이 역대의 악부를 정리한 악부시집(樂府詩集)에도 수록되어 있다. 한치윤은 해동역사악지(樂志)’고금주(古今注)의 설화를 소개하면서 공후인(箜篌引)은 조선(朝鮮)의 진졸(津卒)인 곽리자고(藿里子高)의 처 여옥(麗玉)이 지은 것이다.”라고 한다. 문제는 이 조선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은 한반도를 가리키는 지명이 명백히 아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조선이 하북의 직예성(直隸省)'조선현'을 가리키고 있어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이 작품을 중국 노래로 보고 있다. 공무도하가는 중국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며 이백(李白)의 시 가운데도 공무도하가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고대의 전적에서 조선이라는 명칭은 오직 한국인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단어이며 중국의 한족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므로 오히려 조선이 중국 북부에 있었다는 살아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조선(朝鮮)을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으로 보고, 예문지(藝文志)에서는 기자조선(箕子朝鮮) 시대의 작품이라고 해석하였다. 즉 고조선 시대에 민간에서 불리던 노래가 한사군(漢四郡)의 성립 이후 중국으로 유입되어 한자로 채록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공무도하가의 창작 시기가 고조선이거나 기자조선이거나 모두 한반도와는 거리가 상당히 먼 중국의 베이징 인근 지역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최신호(1971)는 중국 허베이성[河北省]에 조선현(朝鮮縣)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처럼 이 작품의 배경인 조선(朝鮮)이 고조선(한반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이 노래는 채록자·채록양식·창작지역 등이 중국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작품이라는 견해가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창작 지역인 중국의 직예성 조선현(直隸省 朝鮮縣)이 고조선 이래로 한인(韓人)들이 잔류하면서 독자적인 문화양식을 유지하던 곳이어서, 공무도하가의 원작자가 반드시 중국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즉 지역적인 특성을 고려할 때 원작자는 충분히 우리나라 사람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러한 점에서 공무도하가를 우리의 고대가요로 보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의 공통된 견해는 공무도하가에 나타난 조선이 한반도가 아니라 현재의 베이징(北京) 인근이라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고대의 전적에서 조선이라는 명칭은 조선인들과 무관하게 나타난 사례는 없기 때문에 오히려 조선이 중국 북부에 있었다는 살아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에 나타난 조선의 위치에 대해 살펴보자.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記要)에 따르면, 신창(新昌)에서 북쪽으로 40리에 조선성이 있었다는 것과 연화초(延和初)에는 조선민을 비여(肥如)로 옮겨서 조선현이라고 하고 이를 북평군(北平郡)의 행정구역 속에 포함하였으며, 고제(高齊)때는 군을 신창으로 옮겨 조선현을 신창의 행정 구역 속에 편입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연화(延和)는 후위의 태무제(太武帝: 423452)의 연호이고 고제(高齊)는 북제(北齊: 534577)의 연호이니 6세기 이후까지도 고조선의 구지(舊地)인 직예성내에 조선인의 집단인 조선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6세기 이후까지도 끈질기게 중국 땅에 조선현이라는 명칭이 존속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최신호(1971)에 따르면, 비여(肥如)는 열하성(熱河省) 위장현(圍場縣)의 칠노도령(七老圖嶺)에서 만리장성의 내외를 감아 돌아 동으로는 산해관(山海關)의 북쪽 송령(松嶺)에 접한 곳이라고 한다.

   

한나라 때 대학자 응소(應劭)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비여(肥如)는 춘추시대에 진나라에서 쫓겨온 비()의 자손을 연나라가 봉토(封土)한 곳으로 나타나 있고, 처음부터 연나라와 조선은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상당한 갈등을 가진 나라로 나타난다. 이 부분 또한 동호 = 조선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먼저 전국책(戰國策)의 기록(蘇秦將從 北說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云)에서 보면 조선과 연나라는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기화식열전(貨殖列傳)의 기록(夫燕亦勃碣之間一都也 南通齊趙 東北邊胡 上谷至遼東 北隣烏桓夫餘 東綰穢貊朝鮮眞番之利)위략(魏略)의 기록(昔箕子之後朝鮮候 見周衰 燕自尊爲王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與兵逆擊燕 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乃止 使禮西說燕 以止之不攻)을 보면 조선은 연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상당한 갈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위략(魏略)연나라의 후예들이 점차 교학해져서 조선을 공략함으로써 2천여리의 땅을 탈취하면서 조선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 朝鮮遂弱)”

   

따라서 조선이 고래로 한반도에 국한되어 존재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베이징 인근에 위치하였고 이 지역에서 전연, 북위 등과 같이 끊임없이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해 온 사실을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통해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4) 고구려 신화와 선비 및 알타이와의 관련성 검토

   

노태돈은 삼국사기의 건국신화는 4세기 소수림왕(371384) 때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부여계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확립되었다. 이때 고구려 초기왕계도 함께 정립됐을 것이다. 소수림왕은 고구려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과 귀족들을 결속시켜, 왕실을 중심으로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시조에 대한 신성화 작업을 강행했을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는 같은 계열인 부여계를 정치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부여계의 신화를 흡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신화는 부여 신화의 복사판이다. 이 신화들에는 햇빛에 의한 회임(懷妊)’금와왕(金蛙王)’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코드가 숨겨져 있다.

   

첫째, ‘햇빛에 의한 회임과 관련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실존 인물은 기록상 동호의 영웅 단석괴(檀石槐)가 유일하다. 단석괴는 선비족(동호의 후예)의 영웅으로 현재의 허베이(河北)에서 둔황(敦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다. 고구려는 장렬히 산화한 고구려후 추()의 일생을 존숭하여 동호의 영웅인 단석괴의 출생신화에 부여계의 신화를 흡수, 북방 패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신화를 강화한 것이다.

   

둘째, 고구려와 부여의 원뿌리가 되는 나라의 왕을 금와왕(金蛙王)이라고 한 부분이다. 금와왕(금개구리왕)은 알타이인의 시조다. 알타이에 퍼져 있는 알타이인의 아버지, 탄자강 설화에 따르면, “옛날 알타이에 탄자강(개구리왕이란 뜻)이란 노인이 살았는데 하루는 붉은 개구리와 싸우던 흰 개구리를 구했다. 이 일로 그는 소원을 들어주는 댕기를 선물로 받아 부자가 되고 꾸르부스탄(하늘의 신)의 막내딸을 아내로 맞는다.”라고 한다. 따라서 부여와 고구려의 기원이 바로 알타이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알타이 지역의 민담과 설화는 1940년대 러시아 민속학자 가르프와 쿠치약 등에 의해 집중적으로 채록되었는데, 알타이 지역은 콩쥐팥쥐,우렁각시,나무꾼과 선녀,혹부리 영감,심청전등의 원산지다. 이 가운데 나무꾼과 선녀는 만주족의 건국신화다. 물론 부여·고구려의 신화가 거꾸로 알타이로 넘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향후 연구 과제다.

   

위략(魏略)옛날 북방에 고리(槀離)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시녀가 말하기를 닭 알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동명(東明)인데 활을 잘 쏘았기 때문이다 이후 동명은 수도를 건설하고 부여를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다. 부여는 바로 고리국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이어 삼국지(三國志)고구려는 북으로는 부여에 접하고 있다 동이들이 과거에 하던 말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라든가 다른 대부분의 일들이 부여와 같다고 한다.”라고 했다. 부여세력 일부가 고구려 건설에 합류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부여계 고구려라는 역사의 흐름이 생겨난 것이다.

   

위략에 나타나는 고리(槀離)는 이후 고리(高離 :三國志), 고리국(藁離國), 탁리(槖離 :論衡), 삭리(索離) 콜리(忽里 : Khori), 고려(高麗), 구려(句麗), 고구려(高句麗) 등으로 나타난다. 이 용어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 까오리류어(高麗類語)라고 한다. 사기당서(唐書: 940)』 『당운(唐韻: 751)또는 명나라 때의 정자통(正字通: 1671)에서 ()’라는 글자의 발음은 ‘[(li)]’로 난다. 따라서 대체로 위의 발음은 까오리에 가깝다.

   

(5) 고조선 그리고 동호(東胡)와 동이(東夷)

   

사기에는 동호는 오환(烏桓)의 선조이며 후에 선비(鮮卑)가 되었다. 흉노의 동쪽에 있어 동호라고 하였다.”고 했다. 동호란 흉노 동쪽 지역(요서 및 만주)의 부족을 통칭하는 단어. 송호정(교원대)은 동호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BC 5~3세기에 요령성(遼寧省) 서쪽 지역의 각 소수민족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분석한다. 동호와 한민족을 일컫는 동이(東夷)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동호의 대표적인 국가인 요() 나라는 전체 동이족의 맹주로서 동이 풍속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고려사(高麗史)에 고려가 요나라에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자 요나라 황제는 동이(東夷)의 풍속을 따라 거듭 고시(楛矢)를 바치던 의식을 베풀겠다하니 그 같이 정성을 기울임을 생각해 보니 진실로 애대(愛戴)하는 바가 되었도다. (조공을) 윤허함은 물론 가탄할 바 실로 많도다.”라고 하였다. 고려가 과거 동이의 의식을 재현하겠다고 하니, 요나라 황제가 이에 대해 감격한 것이다. 요나라 역시 동이족(東夷族)이며 고려와 한 민족임을 의식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진서(晉書)요사(遼史)당서(唐書) 등의 기록들은 고조선이 동호이며, 후일 요()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고조선과 삼국의 구체적인 연관성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나타나지 않는 데 반해 요사만 요()와 고조선의 연관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대부분 사가들이 동호(東胡)와 동이(東夷)는 다른 별개의 민족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동호와 동이는 사실상 차이를 두기 어려운 말로 보통명사라고 보면 된다.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동호라는 말은 연원이 짧은 말로 동북방의 오랑캐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에 동호나 동이 다르지 않는 말로 추정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예맥을 대신하는 말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동호라는 말은 일주서(逸周書)』『산해경(山海經)등의 책에 보이기는 하나 사서에는 사기(史記)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말로 연나라 장수인 진개(秦開)가 동호(東胡)를 기습하여 공격하니 동호는 1천여 리의 땅이 빼앗기고 말았다.”라는 기사이다. 이 기록이 삼국지에서는 조선이라는 말로 대체되어있다.

   

사기동호는 오환(烏桓)의 선조이며 후에 선비(鮮卑)가 되었다. (동호는) 흉노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호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즉 흉노 동쪽의 광대한 부족을 통칭하여 동호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동호는 고조선의 구성 민족인 예맥과도 차이가 없어진다. 다른 사서에서도 동호는 BC 5세기부터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춘추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문헌들에는 동호라는 이름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동호 이전에는 예맥 또는 맥족이 그를 대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수 사학계를 대변하여 송호정은 동호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BC 5~3세기에 요령성(遼寧省) 서쪽 지역의 각 소수민족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애매하고 요령성을 기준으로 동쪽은 고조선, 서쪽은 동호라는 식이 되어서 타당하지 않다. 순자등의 기록에는 전국시대에 흉노를 호() 그 동쪽에 있는 민족을 맥()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동호와 예맥 즉 동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은 이미 이지린(李址麟) 선생이 분석한 바 있다. 이지린 선생은 동호(東胡)란 동이(東夷)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으며 일종의 동쪽 오랑캐라고 하는 의미에 불과한 말을 지나치게 민족명으로 세분하여 부르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 역사 연구의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둘째, 예맥의 대표적인 나라인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중심지가 사서에 나타나는 동호의 중심 지역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또 그것은 중국의 정사들에 무수히 기록되어있다. 예를 들면, 앞서 본대로 동호의 후예로 알려진 요나라의 중심지역이 과거 조선의 영역이었다거나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거나 동호의 모용황이 조선공(조선왕)에 봉해졌다는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세째, 고조선의 주요 유물이나 유적과 한반도의 대표적인 주거시설인 온돌의 기원이 동호 지역일 뿐만 아니라 청동유물의 분포가 예맥과 동호 지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안호상 선생은 예맥숙신동호를 하나의 범주로 보았다. 중국인 학자 뤼이푸는 삼국지후한서를 분석한 후 중국 대륙의 동부에 거주했던 모든 민족은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네째, 동호(東胡)에서 사용되는 호()라는 말이 예맥을 지칭하는 고구려나 고조선을 나타내는 말로도 혼용하여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한서(漢書)현도군은 한나라 무제 원봉 4년 만들어져서 개창되어 유주(幽州)에 속하였다. 호수는 456호이고 인구는 221845명이었다. 고구려, 상은태, 서개마 등의 세 개의 현으로 구성되어있다.”라는 기록에 대한 응소(應劭)의 주석에, “유주(幽州)를 과거의 진번군으로 조선 오랑캐[조선호(朝鮮胡)]들의 나라이고 고구려(高句驪)현은 구려 오랑캐[구려호(句驪)].”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호()라는 말이 한국인들의 범칭으로 쓰인 예는 매우 많다.

   

다섯째, 중원에 위협을 주는 존재로 예맥은 오환(烏桓)선비(鮮卑)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있다. 예맥이라는 말이 한서(漢書)에서는 거의 사라지면서 오환과 선비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

   

() 또는 예맥(濊貊)이라는 말은 진()나라 이전의 문헌에서는 동북방의 이민족을 부르는 보편적인 명칭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명칭이 한나라를 지나면서 거의 사라지고 동호(東胡)나 동이(東夷)라는 말로 대치되고 있다. 즉 이전에 동북방의 오랑캐로 불리어지던 예맥이 위진남북조 시대에서는 소멸되면서 오환선비 등과 구체적인 나라 이름 들 예컨대 고구려부여동예 등으로 바뀌어 간다는 것이다.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은 중국의 고대 전적에서 야만족의 대표적인 종족으로 묘사되어왔다. 예를 들면 시경(詩經)“(저 멀리) 추족과 맥족(貊族)이 사는 곳까지 북쪽 나라 모두 다스리기 위해 왕께서 소공을 제후로 봉하셨네.”라든가 회수의 오랑캐와 맥족(貊族)과 같은 야만족이라고 하여 맥은 중국인의 시각에서 중국의 북방 또는 동방에 사는 오랑캐로 추정된다. 그래서 이를 종합하여 상서(尙書)북방을 일컬어 맥()이라고 한다.라고 결론지었다.

   

그 동안 후한서(後漢書)가 동호를 오환선비의 선조라고 규정한 뒤로는 대부분이 이것을 마치 움직일 수 없는 정설로 인정되다 보니 동호가 한국인의 범주에서 아예 배제된 것이다.

후한서에서는 오환이란 본래 동호이다. 한나라 초기에 모돈(冒頓) 선우가 이 나라를 멸망시키자 그 남은 사람들이 몸을 보존하여 오환산(오롼산)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이들을 오환(烏桓)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풍속에 활을 잘 쏘고 사냥을 업으로 삼았고 물을 따라서 목축을 하고 특별히 정해서 머무르지 않았다.

   

즉 오환이 이전부터 있었던 명칭이 아니고 흉노의 모돈(冒頓) 선우가 이 부족을 병합하자 그 남은 사람들이 오환산(오롼산)으로 도망을 갔는데 이 때부터 이들의 명칭이 오환족으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후한서에서는 이들을 동호의 선조라고 하고 있으니 납득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서 동북방의 민족들 가운데 오환산 쪽으로 피신하여 산 사람들을 오환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흉노의 모돈 선우의 정벌 시기부터 그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기적으로는 BC 3세기2세기부터 예맥들 가운데 일부에 붙인 이름으로 봐야할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에 연나라 북쪽에 연나라와 대치한 나라는 고조선이고 그 보다 북쪽으로 멀리 부여가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사기의 기록은 고조선의 위치에 조선(고조선), 오환, 예맥이 있었다고 하였고 또 고조선은 예맥의 국가인데 고조선과 예맥을 분리하여 서술하여 앞뒤가 맞지 않다(물론 예맥조선을 예맥과 조선으로 해석하지 않고 예맥의 나라인 조선으로 해석하면 모순은 없다). 이것은 순자(荀子)()나라 북쪽으로는 호()와 맥()이 접하고 있다.”고 하는 기록과 사기의 진()의 승상 이사(李斯)의 글에 저는 북으로는 호맥(胡貊)을 쫓고 남으로는 백월(百越)을 평정하여 진나라를 강대하게 만들었습니다.”라는 기록 등에도 모순된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을 오환이라고 하는 식이다.

   

이지린 선생은 동호가 오환의 선조라는 것은 부당하며 오히려 오환도 예맥의 일부라고 봐야한다고 하였다. 사기에서는 흉노가 동호를 멸하였고 그 후 연나라 북쪽에 오환이 있다고 했는데, 만약 동호의 오환이 멸망했다고 하면 어떻게 연나라 북쪽에 오환이 있을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따라서 동호가 오히려 오환도 예맥의 일부라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전국책(戰國策)에는 조나라가 제나라와는 중산(中山)을 함께 하고 상산으로부터 대() 지방에 이르고 있고 상당(上黨)으로 하여 동으로 연나라와 동호의 경계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루번, 진나라, 한나라의 변방에 있다.”고 하고 이 부분에 대한 주석으로 동호는 오환의 선조인데 후에 선비가 되었다. 흉노의 동쪽에 있어서 동호라고 불렀다. 괄지지에서 말하기를 동호는 한나라 초기에 모돈 선우가 이를 멸하였고, 그 남은 사람들이 오환산으로 들어가 오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라고 하고 있다. 이 기록은 연나라와 동호가 남북으로 서로 인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흉노의 동쪽이라고 하는 표현은 특정한 민족으로서의 동호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동북지역의 포괄적인 오랑캐 즉 동이(東夷)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전국책()나라 동으로 연나라와 동호의 경계가 있다.”는 기록뿐만 아니라 사기연나라의 북쪽에는 동호(東胡)와 산융(山戎)이 있어 흩어져서 계곡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고, 또 연나라 문후(燕文侯)의 말을 인용하여 연나라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으며, 북으로는 임호, 루반이 있다.”고 한다. 산해경에는 맥국은 한수(漢水)의 동북에 있으며 그 땅은 연나라와 가깝다.”라고 하여 연나라와 대치한 나라가 맥국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대체로 다른 기록들과 일치하는데 이 기록은 동호 = 조선임을 보여주고 있다. 동호가 아예 나타나지 않고 동호의 지역에 조선이 대신한다거나 동호 대신에 맥국, 조선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동호와 동이, 예맥과 동호(오환선비) 등은 서로 다른 말이라기보다는 시기적으로 달리 나타난 용어에 불과하고 예맥이라는 말이 사라지면서 오환선비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 동호와 고조선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국가는 연나라인데 고조선과 동호는 연나라의 북쪽에 있었고 그 위치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나아가 관련 기록들이 동호와 고조선(또는 예맥)을 서로 혼용하고 있어 동호 = 고조선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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