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정세 6편 –고려 여진족이 그렇게 만만하니?|

2016. 5. 24. 09:09우리 역사 바로알기



       동북아 정세 6편 –고려 여진족이 그렇게 만만하니?|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동명 | | 조회 111 |추천 0 | 2016.05.22. 13:08 http://cafe.daum.net/alhc/ALGC/3847      



 

<동북아 정세 6고려 여진족이 그렇게 만만하니?>

 

   금나라의 시조 함보는 고려인이라는 것과 신라인이라는 두 가지 기록이 존재한다. 금사는 고려인이라 했고, 송막기문은 신라인이라 했다. 금사는 원나라의 승상 탈탈이 기록한 것이고, 송막기문은 송나라의 사신이 직접 금나라를 방문하고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송막기문에서 기록한 신라인이라는 것이 더 유효하지 않나 싶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금사에서 고려인이라는 기록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함보(감복)의 출생지는 신라였으며, 여진의 땅으로 들어온 시기가 고려 초기이므로 금사나 송막기문이나 모두 틀린 것이 아니다.

   함보(감복)가 왜 척박한 여진족 땅으로 들어갔는지 이유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고려사에 혹자는, 평주(황해북도 평산군)의 승려 금준이 여진에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에서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금나라의 선조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함보(감복)가 금준과 동일한 인물이라고 보면 고려 평주에서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지금의 연길 지역으로 추정되는 생여진의 남쪽 아지고촌에 정착했다고 보여진다. 고려사에 아지고촌은 윤관이 9성을 축조할 때, 함주 바로 건너편의 지역이라고 추정되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연길로 본 것이다. 어째든 함보(감복)는 옛 백산말갈 지역에 외지인으로 들어와 정착한 것이다.

 

   함보(감복) 세력이 백산말갈 지역을 떠나 지금의 영고탑 지역인 안출호수로 가게 된 것은 3대째인 수가 시기였다. 대략 서기 985년 이후이다. 이 시기는 거란이 압록강 지역의 여진족과 정안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할 때이다. 함보(감복) 세력이 정착한 안출호수는 옛 부여족의 후예들인 속말말갈 지역이다. 함보(감복) 세력의 4대째인 석로 시기에 이르러 완안부는 요나라로부터 척은의 관직을 하사 받았으며, 지역 맹주로 급부상 하였다.


   5대째인 오고내 시기 요나라로부터 여진절도사(태사)의 관직을 하사 받았다. 오고내는 서기 1021년 출생이다. 오고내 시기부터 기록이 자세하다. 오고내의 아버지 석로가 요나라로부터 척은의 관직을 하사받고 완안부를 이끌던 시기에, 동북아는 요나라의 세상이 되었다. 송나라는 서기 1004년에 요나라와 전연의 맹이라는 평화조약을 맺고, 조공을 받치는 신세가 되었다. 고려는 서기 993년에 요나라의 공격을 받고 화친한 후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서기 1009년 강조가 반란을 일으켜 고려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왕위에 올렸다. 그 이듬해 숙여진 95명이 조정에 입조하기 위하여 화주에 도착했는데, 화주방어사 유종이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이 사건으로 숙여진이 앙심을 품고 요나라에 강조의 반란을 고했다. 요나라는 강조의 입조를 요구했으나, 강조는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였다. 이로인해 요나라의 2차 공격이 있었다. 개경이 불타고 고려 현종은 전라도 지역까지 도망갔으나, 하공진의 언변으로 요나라군이 철수한다. 서기 1012년 요나라는 고려 현종의 입조를 요구했으나, 병을 이유로 거부한다. 이에 요나라는 흥화진 등 여섯성을 반환하라고 요구한다.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고, 요나라는 무력으로 여섯성을 빼앗고자 하였다. 서기 1016년 요나라의 계속된 침략으로 인해 고려는 송나라의 연호를 시행하였다.

  

 

   요나라가 여섯성의 반환을 요구한 것은 숙여진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나라 동경부 입장에서 고려보다는 여진족을 회유하는 것이 이롭기 때문이었다. 고려 또한 여섯성을 요나라에 반환한다면 그동안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여진족들의 일탈이 우려 되기 때문이라도 요나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이 문제로 인해 서기 1018년 소손녕이 10만 군사로 고려를 침공하였다. 허나 고려군은 요나라의 침공을 예상했기 때문에, 대 승리를 거두었다. 그 중심에 강감찬이 있었다. 고려는 이번 전쟁의 승리로 요나라와의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협력관계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동북방의 여진족에게 영향력을 확대 할 수 있는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여기서 잠깐 여진족에 대해 중국기록에서는 요나라에 복속되지 않은 여진족을 생여진으로 요나라에 복속된 여진족을 숙여진으로 구분한다. 고려의 기록에는 생여진을 동여진으로 숙여진을 서여진으로 지칭하였다. 생여진을 세분화하면 북쪽 지역은 옛 속말말갈 지역이었고, 남쪽 지역은 백산말갈 지역이다. 북생여진은 요나라와 더 관계가 깊었고, 남생여진은 고려와 관계가 좋았다. 지리적 조건이 이와같은 상황을 만든 것이다. 서기 1026년 요나라는 아직까지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남생여진으로 갈수 있는 길을 빌려달라고 고려에 요청했으나, 고려는 거절한다. 서기 1029년 요나라의 동경장군인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키고, 흥요국을 건국한다. 이때 남생여진은 흥요국과 함께 요나라에 맞섰으나, 그 이듬해 흥요국은 멸망하였다. 이로부터 동북아의 정치적 상황은 요나라와 북생여진 고려와 남생여진으로 고착화 되었다. 그러나 북생여진의 오고내가 장성한 시기부터 완안부를 중심으로 생여진의 통합과 나아가서 요나라를 몰아내고자 하는 자주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완안부 수장 오고내는 북생여진의 통합 작업을 마무리 하던 서기 1072년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인 핵리발이 여진절도사 자리를 세습하였지만, 이를 용인하지 않은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을 완전히 제압하고 북생여진을 통합한 시기는 서기 1091년이었다. 그러나 핵리발은 그 이듬해 병사 하였다. 핵리발에게는 맏아들 오아속과 둘째 아들인 아골타가 있었으나, 핵리발의 동생인 영가가 완안부의 수장이 된다. 오아속은 부드럽고 착하니, 거란과의 일이 힘들 것이나, 아골타는 능히 할수 있을 것이다.”라는 핵리발의 유언에 따라 완안부의 수장은 영가가 이어 받았으나, 실질적인 수장은 아골타이었다.

   완안부의 수장 영가는 본격적으로 남생여진으로 진출한다. 고려사에 짐이 왕위에 오른 이후 북쪽으로 요나라와 교린하고 남쪽으로 송나라를 섬겨왔는데 또 여진이 동쪽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서기 1101년 숙종 6년이다. 이때 이미 남생여진은 완안부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 갔다고 보여진다. 고려와 통합된 생여진족의 첫 만남은 영가 시기인 서기 1102년이었다. 이 당시 요나라 황실의 외척인 소해리가 반란을 일으켜, 생여진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요나라는 영가에게 소해리를 함께 토벌하고자 하였다. 영가가 고려에 사신을 보낸 것은 소해리 토벌에 대한 설명과 향후 요나라를 몰아내기에 앞서 고려와의 화친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고려사에 우리 조상도 큰 나라인 고려 출신이니 자손 대대까지 귀부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다.”라는 기록으로도 영가의 생각을 알수가 있겠다.

  

 

   고려는 그동안 남생여진에 대한 연고권이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미 완안부의 영향력하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듣고 그 때부터 영가와 사자를 교환하기 시작하였다. 완안부의 기본 생각은 요나라를 몰아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고려의 생각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서기 100310월 영가가 죽고, 핵리발의 맏아들 오아속이 태사의 자리를 세습하였다. 완안부 태사인 오아속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서기 1004년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오아속이 남생여진 부내로와 사이가 벌어지자 공형지조를 시켜 군대를 동원해 공격했는데, 기병이 정주(함경남도 정평) 관문 밖까지 와서 진을 쳤다. 고려가 이를 오해하여 임간 등을 파견하였다. 임간이 전공에 눈이 멀어 정주성 밖에서 완안부의 군사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하였다. 고려는 윤관을 도통으로 삼아 파견하였다. 윤관이 완안부의 군사와 싸웠으나, 패전하였기에 결국 자세를 낮추어 강화를 맺고 돌아왔다. 제가 패한 까닭은 적은 기병인데 우리는 보병이라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윤관이 말하였다. 여진족들은 천박한 지역에서 나름대로 군사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고려는 요나라와의 승리 이후 자만심에 사로잡혀 전략적 군대를 창출하지 못하였다. 윤관과 숙종은 별무반이라는 전략부대를 만들었다. 말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신기군에 편입시키고, 말이 없는 사람들은 신보군, 도탕군, 경궁군, 정노군, 발화군 등에 소속시켰다. 고려가 이처럼 군사력을 증강 시킨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여진족에 대한 공격이었다. 고려가 자신을 공격했던 오랑캐 요나라는 우대하면서 고구려에서 발해까지 그 땅을 지켜온 여진족을 공격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증강시키니, 참으로 우스운 짓거리이다.

 

   서기 1007년 고려는 완안부 공격에 나선다. 고려군은 윤관이 53천명을, 중군은 367백명을, 좌군은 339백명을, 우군은 438백명을, 별도로 수군을 26백명을 거느리고 출병하였는데, 도합 17만명이었다. 이 정도의 군세라면 여진족 지역 전부를 함락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고려군은 지금의 길주에서 멈춰선다. 애초 고려군의 전략은 지금의 길주 위에 위치한 병목이라는 곳을 장악하는 것이었고, 완안부와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병목이란 이위(伊位) 경계에 산들이 이어져, 동해안에서 우뚝 솟아 우리나라 북쪽 변방에 이르러, 매우 험준하고 가려져 있어 사람과 말이 지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길 하나가 있는데, 이를 말한다.

   17만명의 군세를 가진 고려군 전술을 보자. 먼저 정주에서 지금의 함경북도 여진족 추장들을 화친하자며 속이고 불러들인다. 이들에게 술을 먹이고 모조리 죽인다. 이 얼마나 추잡한 전술이던가? 고려군이 죽인 여진족들은 완안부의 직계 추장들이 아니다. 추장은 잃은 여진족들은 사분오열 되었고, 고려 대군은 지금의 함흥에서 단천까지 단숨에 진군하였다. 고려군의 북진 소식을 접한 완안부는 어떠한 생각을 가졌을까? 완안부는 일찍이 고려와 화친하며 요나라를 몰아내고자 하였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 대군의 북진은 생각지도 못했다. 완안부로서 고려군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모두 자멸할 수 밖에 없음을 인식하였지만, 그렇다고 남생여진 각 부족들의 터전을 고려에 넘겨 줄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에 완안부는 군대를 두만강 지역으로 진군시켜 고려군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였다.

 

   고려군은 동음성과 석성 전투를 승리하고 길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에 윤관은 동쪽으로는 화곶령, 북쪽으로는 궁한이령, 서쪽으로는 몽라골령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정하였다. 이 정도로 고려군이 전쟁을 마무리 했다면 완안부 군대와 전투를 벌이지도 않았고, 후에 그 지역을 돌려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군이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서기 1008년 고려군은 병목을 통해 북진하고자 한다. 그러나 완안부의 군대가 이미 그곳에 매복하였다. 윤관 부대는 거의 전멸하였고, 길주로 후퇴한다. 완안부의 군사 수만명이 길주 전 지역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고려 장수중 척준경이 후방에 있던 부대들을 통합하여 다시 길주 일대를 재 탈환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완안부 군대의 움직임이었다. 고려군의 주력부대를 전멸 시키고 수만명의 군대로 길주를 거의 함락 직전까지 몰아 놓고도 갑자기 북쪽으로 철수했을까? 그것은 완안부의 추장 오아속이 전열 재정비 차원에서 일시 후퇴한 것이다. 그 이듬해 오연총이 길주에서 대패하였다. 이에 윤관이 군사를 이끌고 길주로 향하였다. 고려와 완안부의 제 2차전이 벌어질 상황이 되었는데, 두 나라 모두 더 이상 전쟁을 지속 하기에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결국 완안부의 오아속이 먼저 화친을 요청한다. 고려 입장에서도 완안부의 요청을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이에 고려는 동북면 9성을 완안부에 돌려주고, 그 성을 없애버렸다. 완안부는 이번 전쟁으로 통합된 여진족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 했다는 긍정적 의미가 있었지만, 반면에 고려는 17만명을 동원하고도 화친함으로써 고려 왕실의 무능함을 다시한번 대내외에 드러낸 것이다. 이로써 남과 북이 함께 가야할 마지막 기회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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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라신노스케 16.05.22. 14:39
금나라 시조가 고려인이라는 주장은 금나라가 선전한 것을 송막기문이 그대로 적고 금사에도 그냥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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