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통일의 역사 주축, “多勿(Ergune)都”
치악산 (ypl****)
근래에 당시의 기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한시대의 선구자로 이러저러한 혁명을 이끌었다고 떠받들어져온 쑨원,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실은 죄다 한국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 관철을 흉중에 품어 왔음을 알게 돼, 우리는 속이 몹시 개운치 않았지요. 그러던 차에 이경일 편저 『다시 보는 저우언라이』(우석출판사 2004)에서, 뒤늦기는 하지만 이미 새로운 기별을 전하고 있음을 확인케 됐습니다.
1963년 6월 28일 북한과학원 대표단이 저우언라이(周恩來) 국무총리를 방문했을 적에 그이는, "고조선이 단군조선이 아니고 주(周)나라가 파견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며 조선족이 기자의 후손이라고 치부하려 한 것은 일련의 대한족(大漢族)주의식 쇼비니즘"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소식이지요.
1910년에 열 예닐곱 살이던 난카이(南開) 학교학생들인 여학생 덩잉차오가 저우언라이 남학생과 함께 학생연극 “안중근”을 연출하면서 부부인연을 맺게 됐다는 사연이 하얼빈 기차역 안중근의사기념관 개관 소식과 함께 이땅에 전파되면서, 그이가 이처럼 평소에 조선에 각별히 주목해온 데다가 아주 세련된 합리성이 체질화했을 수 있는 프랑스 유학생 출신이었음을 새삼 깨달아보게 됐지요.
그런데 그런 그이도 노발대발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일대 사건이 조·중 합동발굴단의 몽골기원지 (현)에르구네市를 내포하는 대흥안령 북부 호·눈(呼嫩)평원 관계유적 발굴과정에서 발생하고 만 겁니다. 1960년경 발굴을 마치고 발굴결과를 발표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깨고 북한 고고학자가 그만 성급하게 대충 “기원전 5세기경 貊 槁離 우리 조상 역사유적...운운”하고 즉석에서 발설을 해버린 모양입니다.
그 후 지금까지 북한학자들의 경내 진입을 금지할 만큼, 이는 동북아시아 “상고대유목제국사” 복원에서 당시의 그이들에게 너무나도 치명적인 급소가 되는 핵심 유적이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나이든 현지의 어른들은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게 당시를 추억해 그때 그일 들을 얘기해주곤 했지요.
2000년 전후에 남한연구자인 나는, 당시에 하서현 국립강원대 총장님의 일방적이고도 아주 적극적인 발의로 국립내몽골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은 강원대 사학과 교수로, 학술교류 차원에서 그 대학 객원교수로 유적현지에 파견돼 400일 현지캠프를 차렸습니다. 서툴지만 몽골어와 중국어를 쓰면서 현지 동료학자들의 도움을 받았지요. 물론 이곳이 몽골 기원지라서 몽골의 시원사를 천착해볼 양으로,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후진 대흥안령 북부 에르구네市 언저리를 찾아 들었습니다.
전공분야인 몽골사 연구도 힘에 겨워 쩔쩔 매던 판이라 전공분야가 전혀 아닌 한국 상고사 연구과제는 일부러라도 피하는 처지였지요. 당연히 그런 과제가 이 일대에 엄존하리라는 망상 같은 史實을 감히 염두에 두어본 적도 전혀 없었습니다.
뒤에 게렐 바드라크 교수(몽골국사 전공)가 한국 상고사에 관심을 가지고 1950년대 후반 북한 유학생 출신인 베. 수미야바아타르 교수의 논저 『몽골과 한국겨레의 기원-언어관계 문제』[몽골과학아카데미 어문학연구소 울란바아타르 1975]를 읽으며 몽골 기원지 Ergune 는 “되돌아온다”는 뜻인데 이게『삼국사기』「고구려본기」동명성왕 2년 6월조에서 고구려어로 구토(舊土) 회복의 뜻을 갖는다는 高朱蒙-東明(Tumen) 기사의 “多勿”(되물림)과 뜻이 너무나도 똑같지 않으냐?”고 말을 건네 왔습니다.
더구나 저자가 지적하는 Gooli Khan 석인상이 현지에서 고구려칸 석인상으로 불리고 고올리국 서남단 몽골스텝에 좌정해 있지 않느냐는 거였습니다. 애초엔 너무 황당해 보였지만 유적현지가 낯익어 지면서 뭔가가 읽혀지는 듯 했지요,
예가 순록목초지 “선”(순록 주식인 蘚이 나는 鮮)과 양목초지 스텝의 경계지대이고, 기원전 5세기경에 스키타이 철기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베. 수미야바아타르 교수가 추정하는 대로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면서 순록치기가 말을 타고 양치기가 되어 스텝에 진출한 그 Gooli(고구려) 유목제국 창업지 흘승골(紇升骨: 忽本)-할힌골(Qalqyn Gol)일 수 있다는 영감이 떠올랐지요.
그리고 당시의 최첨단 유목무술인 騎馬射術을 터득해 선진적인 최강의 유목무력을 확보해낸 이들이, 옛 순록치기의 땅 동북 쪽으로 말을 달려 구토를 수복해내는 역사적인 일대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결정적으로는 예가 비파형청동단검 출토 서북 한계지대라서 몽골뿐만 아니라 같은 순록치기 태반 겨레 선(鮮: Soyon=鮮卑)족인 부여·숙신·고구려·백제·가야·신라 등의 조선겨레 상고대 유목태반제국의 첫기틀이 짜이는 장엄한 거대 자궁일수 있다고 보기 시작한 겁니다.
당연히 정보화시대의 “舊土”란, 순록유목민 朝族 중심의 순록방목민 鮮族 통합을 이룬 유구하고 방대한 코리안 디아스포라누리라는 순록유목제국 Chaatang朝鮮의 가이없이 탁 트인 유라시아~아메리카 옛땅을 의미하겠지요. 정복이 아니라 홍익중생의 생태계로 지구를 되살려 내는 구세의 생기부활차원 유목적 소통이어야겠지만, 마침 선족(鮮族=鮮卑族)의 조상제사터 가셴둥(嘎仙洞)도 이곳 대선비(大Sayan, 노어발음)산에 자리 잡고 있답니다. (주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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嘎仙洞遗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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噶仙洞为中国北魏拓跋鲜卑先祖所居石室。在内蒙古自治区鄂伦春自治旗阿里河镇西北10公里、嫩江支流甘河的北岸。1980年在洞内发现北魏太平真君四年 (443)祝文刻辞。1988年中华人民共和国国务院公布为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位于鄂伦春自治旗阿里河镇北约10公里、大兴安岭北段顶峰东端。其地峰峦层叠,树木参天,松桦蔽日。洞在峭壁之上,高出平地约5米,洞口西南向,南北长90多米,东西宽27米许,高20余米,相传为仙人洞府。洞内西壁距洞口15米处,有北魏太平真君四年(443年)摩崖铭刻。[1] 位于鄂伦春自治旗阿里河镇北约10公里、大兴安岭北段顶峰东端。其地峰峦层叠,树木参天,松桦蔽日。洞在峭壁之上,高出平地约5米,洞口西南向,南北长90多米,东西宽27米许,高20余米,相传为仙人洞府。洞内西壁距洞口15米处,有北魏太平真君四年(443年)摩崖铭刻。 据《魏书》载,乌洛侯国世祖太平真君四年来朝,“称其国西北有国家先帝旧墟,石室南北九十步,东西四十步,高七十尺”。北魏太武帝拓跋焘派中书侍郎李敞去祭祀,并“刊祝文于室之壁而还”嘎仙洞遗址 。现存铭刻的文字共201字,与史籍记载的祝文基本相符,证实为北魏王朝承认的拓跋鲜卑发祥地。洞内堆积有较丰富的文化层,对于研究拓跋鲜卑的早期历史,具有重要科学价值。为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2007年6月,崔越领在嘎仙洞洞深部90米的洞顶,发现盝顶龛,为佛教大石窟寺早期的设计形式。接着考察发现,在洞内90米处左转开始为人工开凿,规模巨大,长50米,宽8至13米,高约8至12米,侧壁由主洞相对光滑、移行自然,左转为呈层次状,棱角分明斑驳状态,洞尽头半腰处,左右开凿各开凿一深一米多对抱式小洞。主洞方位呈东北、西南向,左转后为坐北向南的子午线方位。根据巨大的工程量,设计形式,工程未竟特点,以及文化特征,历史事件等情况,证明是北魏皇家于公元443年拜祖时所为。2009年9月25日经石窟研究学者温玉成实地考察,确定了崔越领的发现与研究。[2] 嘎仙洞遗址洞穴性状
嘎仙洞为一天然山洞,洞口在高出平地约25米的峭壁上。方向南偏西30°。主洞长92米,宽27~28米,面积约2000平方米,最高处达20多米。西北有一向上的斜洞,坡度约20°,斜洞长22米,宽 9米,高6~7米。主洞中部放置一块约 3米见方的天然石板,下用大石块支撑。洞壁平整,青苔滋生,地下堆积较厚。 嘎仙洞遗址祝文
主洞西侧距洞口约 15米处的石壁上刊刻 “祝文”,共 19行,201字,字体大小不一,书体介于楷隶之间,书法古拙,笔势苍劲。内容为北魏第三代皇帝拓跋焘于太平真君四年 (443)派遣中书侍郎李敞来此发祥之地致祭时所刻祝辞,与《魏书》记载基本相符。石室的刻辞是有确切纪年并见于文献记载的重要古代少数民族遗迹。在距地表0.8米深的黑色粘沙土层中,出土很多手制夹砂灰褐陶片,还有石嘎仙洞遗址 镞、骨镞等,与完工、扎赉诺尔等地鲜卑遗存中出土物特征相似。在地表以下 1.3米的黄色粘沙土层中,出土有打制的石器,表明这里可能存在着更早的文化遗存。 为保护石室,文物部门在刻有祝辞的石壁前安装了栅栏和铁门,洞口处修建了排水沟和防护栏杆。
2013年07月,再次发现了清晰的、疑似北魏早期的石刻文字。[3] 嘎仙洞遗址嘎仙洞祝文
祝文全文如下:
“维太平真君四年,癸未岁,七月廿五日,天子臣焘,使谒者仆射库六官、中书侍郎李敞、傅雀,用骏足、一元大武,柔毛之牲,敢昭告于皇天之神:启辟之初,佑我皇祖,于彼土田。历载亿年,聿来南迁。应受多福,光宅中原。惟祖惟父,拓定四边。庆流后胤,延及冲人,阐扬玄风,增构崇堂。克翦凶刃,威暨四荒。幽人忘遐,稽首来王。始闻旧墟,爰在彼方。悠悠之怀,希仰余光。王业之兴,起自皇祖。绵绵瓜爪,时惟多祜。归以谢施,推以配天,子子孙孙,福禄永延。荐于:皇皇帝天、皇皇后土。
以皇祖先可寒配,皇妣先可敦配。
尚飨!
东作帅使念凿。"
嘎仙洞祝文 这篇祝文是以北魏皇帝的口吻来对他的祖先歌功颂德的,并祈求祖先保佑。
日前,自治区考古及地质专家组一行三人抵达鄂伦春旗,对嘎仙洞遗址现状进行勘察。专家组针对目前存在的问题对嘎仙洞遗址进行了详尽的勘察,进行数据测量、样本采取,石质检测,并通过科学仪器对洞内几处危岩进行了体积及重量上的计算。通过现场勘察,看到嘎仙洞遗址1980年发现石刻祝文后,于1988年被国务院确定为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然而却从未得到科学有效的保护,一嘎仙洞遗址 直处于自然保护状态中,由于历经久远而自然风化,致使石刻祝文字迹风化日甚于日,危岩险石比比皆是,洞内积土乱石杂布。专家组初步形成保护意见:对石刻祝文实施有效的保护,拆除原有铁门及栅栏;清理洞内积土及自然脱落的杂石;修建排水工程,避免由于潮湿而对洞体的再度侵蚀;加固部分危岩,避免伤及游人。专家组将针对勘察的情况已形成切实可行的实施保护方案,并将逐步实施。嘎仙洞遗址保护工程的实施是一项功在当代,利在千秋的宏伟业绩,对于研究发掘鲜卑文化,促进自治旗旅游事业的发展,扩大鄂伦春对外的知名度有着不可估量的促动作用 。 嘎仙洞遗址综述
拓跋鲜卑是鲜卑的一支,应包括建立代、魏的拓跋部,建立南凉的河西鲜卑秃发部等,而习惯上往往仅指北部鲜卑。
拓跋氏初是鲜卑地处最东北的一支,亦称别部鲜卑。原居于额尔古纳河和大兴安岭北段,“统幽都之北,广漠之野,畜牧迁徙,射猎为业”。
嘎仙洞遗址发源地
1980年在鄂伦春自治旗阿里河镇西北10公里大兴安岭北段顶巅东侧的嘎仙洞中,发现了北魏太平真君四年,拓跋焘派李敞祭祖先时刊刻于石壁之上的祝文,全文19行,201字,内容与《魏书·礼志》一所载大致相同。但在石刻祝文中则保留了“维太平真君四年癸未岁七月二十日天子臣焘使谒者仆射库六官、中书侍郎李敞、傅”、“如闻旧墟爰在彼方”、“皇祖先可寒配”、“皇妣先可敦配”等文句。证实了可汗、可敦出于鲜卑,柔然称可汗、可贺敦源于拓跋部,其后突厥、回纥、蒙古等的称呼略同。嘎仙洞遗址 嘎仙洞石室祝文的发现,进一步证明了拓跋鲜卑的发祥地“大鲜卑山”就是在今阿里河附近的大兴安岭北段。据《魏书·序纪》载,鲜卑之先“积六十七世”,至拓跋氏远祖成帝毛时(约在公元前2世纪后期至1世纪前期左右,相当西汉武帝在位期间),为“远近所推,统国三十六,大姓九十九”。所谓“国”,当指氏族集团或部落;“大姓”,即指沃族或比氏族较小的家支。毛似是部落联盟的酋长,所称“皇帝”,为拓跋珪时追尊。毛下传五世而至宣帝拓跋推寅(约公元1世纪前期),正值东汉初年,北匈奴西迁,南匈奴保塞,拓跋鲜卑乘隙第一次南迁,至“大泽”,即今呼伦池(达赉湖)。由于地“方千余里,厥土昏冥沮洳(指沼泽地带),谋更南徙,未行而崩”。今发现的呼伦贝尔盟陈巴尔虎旗完工和新巴尔虎右旗扎赉诺尔发现的古墓群,大约就是拓跋鲜卑南迁过程中的文化遗迹,表明拓跋鲜卑确在呼伦贝尔大草原居住过。当时拓跋鲜卑还过着“畜牧迁徙,射猎为业”的游牧生活,处于原始社会末期的部落联盟阶段。 推寅后又经六世,至献皇帝邻时,一方面“七分国人,使诸兄弟各摄领之,乃分其氏”,即纥骨氏、普氏、拔拔氏、达奚氏、伊娄氏、丘敦氏、俟亥氏,连同拓跋氏形成“鲜卑八国”,后邻又命叔父之胤为乙旃氏,疏属为车焜氏,形成帝室十姓;另一方面因呼伦池附近荒遐,不足以建都邑,再加上随着拓跋氏社会的发展,部落首领为掠夺财富,扩张势力,就必然向南扩展,遂准备第二次南移。由于年老体衰,乃以位授子圣武帝诘汾。诸汾遵命率众南迁,几经险阻,才到达匈奴故地,即今河套北部固阳阴山一带。这里水草丰美,树木繁茂,是牧猎的好场所,并接近了中原文化。由于两次迁徙策略“多出宣、献二帝,故人并号曰‘推寅’,盖俗云‘钻研’之义”。第二推寅邻命其子诘汾统领部众南迁时,约在公元160至170年之后,即东汉桓、灵二帝之际,当时正是檀石槐部落联盟强盛时期。有学者认为率领族人第二次迁徙的推寅,即是东汉檀石槐统辖的西部大人中的日律推演或律推演,而有的学者则持否定态度,认为无论是时间、地点或事迹都不能将二者混为一谈。
嘎仙洞遗址迁徙
拓跋鲜卑进入匈奴故地后,与留居故地的匈奴融合。拓跋力微时,在75个异姓部落中,属于匈奴的就有贺赖氏、须卜氏、丘林氏、破六韩氏、宿六斤氏等。匈奴部落加入拓跋鲜卑联盟后,与之杂居共处,相互通婚,逐渐被鲜卑化。据研究,“拓跋”的含义,乃是北人谓鲜卑父、胡(匈奴)母所生后代之意。《魏书·序纪》谈到力微是其父诘汾与匈奴故地之天女结合所生。实际上是给鲜卑与匈奴通婚抹上一层神秘的色彩。此后,有不少晋人和乌桓等部众也成为其“新民”。 始祖神元皇帝力微时(220—277年),拓跋鲜卑开始了第三次迁徙。拓跋诘汾长拓跋鲜卑的起源地—噶仙洞 子秃发匹孤率众从塞北迁居河西。“秃发”或即“拓跋”之异译。由于拓跋部众还梳着辫子,故当时人又称之为“索头”鲜卑或“索虏”,以区别于剃去部分头发的其它鲜卑部。拓跋本支,从力微时起就游牧于上谷(治今河北省怀来县)以西,云中(今内蒙古自治区托克托县东北)一带。由于受西部鲜卑大人蒲头的袭击,部众离散,力微投依于五原郡(治今内蒙古包头市西北)没鹿回部大人窦宾(纥豆陵宾)之下。与宾共攻西部,宾兵败失马,力微以已所乘骏马与之。宾感相助之恩,准其北居长川(今内蒙古兴和具一带)。经10余年经营,诸旧部民渐往归附。248年(曹魏正始九年),杀窦宾子,并其众,诸部大人悉款服,势力增强,控弦之士达20余万。258年(甘露三年),力微在位第三十九年,从河套北部迁于汉定襄郡之盛乐(今内蒙古和林格尔县西北)。是年四月,举行祭天大典,诸部君主皆往助祭,唯白部大人观望不至,召而戮之,使远近震慑,相继归附。在由部落贵族和扈从武士操纵的部落大会上,拓跋部正式取得了部落联盟的领导权,力微也巩固了世袭的大酋长的地位。 同时,拓跋鲜卑在向西南发展过程中,对中原曹魏、西晋政权采取和好政策,亦是使拓跋鲜卑得以强盛的因素之一。力微与曹魏“聘问交市,往来不绝”。曹魏赠给拓跋氏金币缯絮,岁以万计。 261年(魏景元二年),力微还遣其子沙漠汗(文帝)至魏都洛阳“且观风土”,实为质子。接受汉人文化,穿着汉服,掌握弹丸等武艺。魏晋禅代,沙漠汗仍留质于晋,每次北归,晋均具礼护送。[1] 传说很早以前,这里是一片原始森林,夏季,苍松翠桦浓荫蔽日,遍地野花盛开,灿烂似锦;冬季,皑皑白雪盖山林,一片银色世界,林海雪原中自由奔驰着各种动物,以狩猎为生的鄂伦春人,世世代代在这里过着和平、幸福的生活。 没想到,有一天忽然出现了一个躯体庞大、面目狰狞的吃人恶魔。它住在山巅崖的一个山洞里,窥探着人们的行动,只要发现猎人进入森林,它就伸出魔掌将人残害,鄂伦春人受害者不计其数。勇敢的鄂伦春人为了消灭这个恶魔,多次组织青年猎手上山去和它格斗,但都由于它的妖术厉害而失败了。鄂伦春人并未因此丧失斗争的勇气和信心,就这样一直斗争了许多年,鄂伦春人始终不渝的斗争精神终于感动了上天的嘎仙。 嘎仙与恶魔比试,先让恶魔将洞口的一块石头搬走,结果恶魔输了,他们又比试箭法,嘎仙将石头的正中心射穿了一个车轮般大的一个圆孔。恶魔看到嘎仙的本领比自己强大,就逃之夭夭了。 人们怕恶魔再次返回森林,就在它住过的洞口塑了一尊手持弓箭的嘎仙石像。果然,恶魔三次过海眺望,看见嘎仙屹立的雄姿就不敢回来了。从此,鄂伦春人自由地在大兴安岭的丛山密林中打猎、生活。 为了纪念为民除害的嘎仙,人们把恶魔住过的山洞改名为嘎仙洞,把大石头上有窟窿的那座山取名为窟窿山。[1]
嘎仙洞遗址_百度百科
嘎仙洞遗址发源地 1980年在鄂伦春自治旗阿里河镇西北10公里大兴安岭北段顶巅东侧的嘎仙洞中,发现了北魏太平真君四年,拓跋焘派李敞祭祖先时刊刻于石壁之上的祝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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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兴安岭的嘎仙洞石室是古代哪个民族的发源地?
游牧民族的发源地
大兴安岭西部是蒙古高平原,自古以来就是最好的草原。这个地区是游牧 民族的历史摇篮。中国历史上的大多数游牧民族:鲜卑人、契丹人、女真人、蒙古人都是在这个摇篮里长大的,又都在这里度过了他们历史上的青春时代。这是著名历史学家翦伯赞先生1961年夏访问了呼伦贝尔盟之后所作的一个科学结论。
据《史记》和14世纪拉施特《史集》记载:公元8世纪初,“蒙兀室韦”寻找新的草场开始西迁。到11世纪,以斡难河中上游和肯特山地区(今蒙古国境内)为中心,分为尼鲁温蒙古和迭儿列斤蒙古两大部。
到12世纪末13世纪初,成吉思汗在统一蒙古的过程中历经数十次大的战争,其中经1201年和1202年两次大战,击败扎木合与塔塔尔部落后,占领呼伦贝尔地区,并成为他养精蓄锐和日后建立横跨欧亚大帝国的基地。
嘎仙洞遗址:鲜卑嘎仙洞遗址移出岩石与佛教“石窟寺”有关
2015-09-24 14:32:24 来源:凤凰财经 上传用户:elfni2012 | 我要上传 摘要 目前进行的嘎仙洞遗址挖掘工程,结合开凿石窟起始时期的方式,其洞口基台堆积的岩石应是开凿佛教石窟寺时移出的。
23日,中国鲜卑文化学者、岩画学会理事崔越领接受记者采访时证实说,日前在内蒙古鄂伦春旗进行的嘎仙洞遗址挖掘工程,结合开凿石窟起始时期的方式,其洞口基台堆积的岩石应是开凿佛教石窟寺时移出的。
崔越领说,9月19日日其在位于内蒙古鄂伦春旗的国家重点文物保护单位鲜卑人旧墟石室嘎仙洞遗址挖掘现场,在洞前挖掘现场,看到挖掘机挖掘地下三十公分以下出土的是大量石板。
“根据以往的挖掘情况,面积约两万余平方米,不是常规地质条件下的沙卵石,而且是边缘钝状,表面大多黝黑,与嘎仙洞岩石质地相同,结合开凿石窟起始时期的方式,分析是开凿嘎仙洞石窟寺时,移出的岩石,大面积铺就在洞前,在河流湿地上形成高地。洞口基台堆积的岩石也应该是开凿石窟寺时移出的。”崔越领说。
据称,2007年6月,崔越领在嘎仙洞洞深部90米的洞顶,发现盝顶龛,为佛教大石窟早期的设计形式。接着考察发现,在洞内70米左转开始为人工开凿。规模巨大,长50米,宽8至13米,高约8至12米,侧壁由主洞相对光滑、移行自然,左转为呈层次状,棱角分明,洞尽头半腰处,左右开凿各开凿一深一米多对抱式小洞。主洞方位呈东北、西南向,左转后为坐北向南的子午线方位。根据巨大的工程量,设计形式,工程未竟特点,以及文化特征,历史事件等情况,证明是北魏皇家于公元443年拜祖时所为。2009年9月25日经石窟研究学者温玉成实地考察,确定了崔越领的发现与研究。
但是,如此大规模的工程,开凿出巨大量的岩石却没有迹象。对于佐证失去了线索。
现在,洞前挖掘出的大面积板状与嘎仙洞质地相同的岩石,证明了崔越领论证嘎仙洞石窟寺遗址的正确性。
鲜卑人开凿的敦煌、云冈、龙门石窟,是世界文化遗产,为全人类留下了无比辉煌的文化享受。都是世界上规模巨大的工程。鲜卑人故乡嘎仙洞旧墟石室,以及工程未竟的石窟寺遗址,为分析鲜卑人石窟情节提供了动因上的原始心理。
新闻解读 噶仙洞为中国北魏拓跋鲜卑先祖所居石室。在内蒙古自治区鄂伦春自治旗阿里河镇西北10公里、嫩江支流甘河的北岸。1980年在洞内发现北魏太平真君四年 (443)祝文刻辞。1988年中华人民共和国国务院公布为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位于鄂伦春自治旗阿里河镇北约10公里、大兴安岭北段顶峰东端。其地峰峦[详细]
石窟寺(grotto temples)是指就着山势,从山崖壁面向内部纵深开凿的古代庙宇建筑,里面有宗教造像或宗教故事的壁画。[详细]
鲜卑族(Xiān bēi zú):中国古代少数民族之一。是继匈奴之后在蒙古高原崛起的古代游牧民族。属阿尔泰语系蒙古语族。兴起于大兴安岭。为魏晋南北朝对中国影响最大的游牧民族,起源于东胡族,分布在中国北方。秦汉之际,东胡被匈奴冒顿单于打败,分为两部。分别退保乌桓山和鲜卑山,均以山名作为族名,[详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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