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백제(온조백제 + 비류백제)와 대백제의 간략사

2016. 10. 14. 09:00우리 역사 바로알기



   전백제(온조백제 + 비류백제)와 대백제의 간략사| 백제 토론방

조이 | 조회 99 |추천 0 | 2016.10.05. 09:42


삼국사기 온조편에는 두개의 백제 건국 설화가 실려있다.

비류계열의 건국 설화는 비류가 동생 온조와 어머니를 데리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서 건국을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면 온조계열의 건국 설화는 온조와 비류가 각기 다른 곳에서 나라를 건국한 것으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다.



- 미추홀은 수촌리


온조왕 백제 건국 설화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류계열의 백제 건국 설화에서 미추홀은 대방에서 패수와 대수를 건넌 곳에 있다.

이를 볼 때 비류는 대방에서 남하해서 예성강과 임진강을 건너 수촌리에 정착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미추홀의 "미추"는 물을 의미하는 일본어 "미즈"에서 나왔고 "홀"을 "마을"을 뜻한다.



- 하북 위례성을 쌓은 백제, 대부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위례성


온조왕 8년(기원전 11)

봄 2월,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니 임금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병이 군량미가 떨어져 돌아가므로, 임금이 날쌘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 고목성과 석두성을 쌓는 온조


온조왕 22년(서기 4)

가을 8월, 석두(石頭)와 고목(高木) 2개의 성을 쌓았다.
9월, 임금이 기병 1천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적병을 만났다. 한 번 싸움으로 그들을 격파하고 포로를 사로잡아 장수와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백제는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고목성과 석두성을 쌓는다.

고목성은 지금의 연천이고 석두성은 지금의 삭녕이다.

고목성과 석두성은 고구려-부여계의 영토이다.



- 온조왕 기사는 6주갑 인상하여 근초고왕 시대의 기사를 일부 가져오기도 했다.


온조왕 41년(서기 23) 
봄 정월, 우보 을음이 죽었다.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다. 지식이 많고 나이는 70세가 넘었는데도 기력이 변함이 없으므로 등용하였다.



- 남옥저에서 귀순하는 구해파; 한산서쪽에 정착하는 남옥저의 예족


온조왕 43년(서기 25) 
겨울 10월,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족이 부양(斧壤)에 이르러 귀순을 청하니 임금이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서 편히 살게 하였다.



- 하북 위례성을 버리고 남하하는 백제인들


온조왕 13년(기원전 6)

봄 2월, 서울에서 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였다.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61세로 돌아가셨다.

여름 5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시하여 한강의 남쪽을 살펴보았는데 토지가 매우 비옥하였다. 그곳에 도읍을 옮겨 오랫동안 편안할 계획을 세울 것이다.”


위례성에 호랑이 다섯 마리가 들어왔고 임금의 어머니가 죽었다.

위례성이 함락된 것이다.

위례성을 함락당한 백제는 한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 한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한강 서북에 성을 쌓는 온조왕


온조왕 14년(기원전 5)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2월, 임금이 부락을 순시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가을 7월, 한강(漢江)의 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는 한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한강 서북에도 성을 쌓는다.

한강 이북의 북한성과 한강 이남의 한성이 고구려-백제계가 새롭게 거처할 성이다.



- 한수 서북의 성으로 추정되는 북한성, 북한성은 우씨의 근거지로 추정


비류왕 18년(서기 321)

봄 정월, 임금의 배다른 아우 우복(優福)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비류왕 24년(서기 327)

9월,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北漢城)에 자리잡고 반역을 일으켰다.


비류왕의 기사를 통해 우씨가 북한성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전백제(온조백제)왕은 부여성인 해씨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남부여ㆍ전백제ㆍ북부여
백제의 계통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해(解)를 성씨로 삼았다.


온조왕 백제 건국 설화

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하였다.


부여계의 왕족의 성씨는 삼국유사에는 해씨로 삼국사기에는 부여씨로 기록되어 있다.



- 왕계가 바뀐 백제


고이왕 원년

고이왕(古尒王)은 개루왕(蓋婁王)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仇首王)이 재위 21년에 죽고 맏아들 사반(沙伴)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돌보지 못하므로, 초고왕(肖古王)의 친동생인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비류왕 18년(서기 321)

봄 정월, 임금의 배다른 아우 우복(優福)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고이왕은 개루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초고왕, 구수왕과는 다른 계통의 왕이란 것을 암시하고 있다.

고이왕과 비류왕까지 우씨 성을 가진 왕이며 초고왕과는 다른 왕이 아닐까 추측한다.


1. 비류백제


- 내신좌평이 된 진의


비류왕 24년(서기 327)

9월,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北漢城)에 자리잡고 반역을 일으켰다. 임금이 병사를 보내 토벌하였다.


비류왕 30년(서기 333) 
가을 7월, 궁궐을 수리하였다. 진의(眞義)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비류왕대에 진씨에게 위기감을 느낀 우씨가 북한성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북한성의 반란은 진압되는데 이후 왕계가 진씨로 바뀌게 된다.




2. 온조백제


- 근초고왕의 등장


근초고왕 원년(서기 346)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식견이 넓었다. 계왕이 돌아가시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진서(晉書) 권9 제기 제9 간문제 함안 2년 (서기 372)

"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 백제왕 여구(餘句),작위 진동장군영낙랑태수


근초고왕이 등장하면서 백제왕은 해씨가 장악한다.



- 왕비족이 된 진씨


근초고왕 2년(서기 347)

봄 정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진정(眞淨)을 조정좌평으로 삼았다. 진정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였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까다롭고,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여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근초고왕 이후 백제의 왕비는 진씨가 배출하며 실질적 권력도 진씨가 장악한다.



- 광개토의 등장


진사왕 8년(서기 391)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談德, 광개토왕)이 4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담덕이 병사를 부리는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않았기에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이 함락된 것이다.

391년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광개토왕이 북부의 10개성을 함락시키고 관미성마저 함락시킨다.

이후 백제는 고구려에게 계속 패하며 위기에 몰린다.



3. 대백제 


- 왕권강화를 추진하다 살해당하는 비유왕


비유왕 29년(서기 455) 
봄 3월, 임금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비유왕 29년(서기 455)
가을 9월,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깐 동안 짙은 구름과 안개가 몰려 어두워지자 날아갔다.
임금이 돌아가셨다.


개로왕 18년

도림이 말하였다. "...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고 ..."


위기의 상황에서 진씨의 비유왕은 왕권강화를 모색한다.

왕권 강화책은 해씨 백제의 권력과 재산을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

비유왕은 진씨의 왕권 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망한다.



- 미추홀과 한성을 통합한 근개루왕


개로왕 원년

개로왕(蓋鹵王)[혹은 근개루(近蓋婁)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경사(慶司)이다.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개로왕은 근개루라고도 하는데 이는 개루왕이 마한왕이기 때문이다.

즉 개로왕은 비류백제와 온조백제를 통합하였다.


- 反백제로 돌아선 북부의 민심, 망명한 한성백제 귀족들이 끌고 온 고구려군


개로왕 21년(서기 475)
이때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재증, 고이는 모두 두 자 성이다.]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병사를 옮겨 남쪽 성을 공격하니 성 안이 위기와 공포에 빠졌다. 
임금은 탈출해 달아났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임금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더니, 임금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죄를 헤아린 다음 묶어서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들이다.


해씨(온조백제)와 진씨(왜)의 통합 과정에서 한성의 귀족들이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한성의 민심은 백제에게서 떠났다.

고구려로 망명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고구려군을 이끌고 한성을 무너뜨린다.

고구려군이 쉽게 한성을 몰락시킨 것은 한성백제 귀족들이 고구려군에게 협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 웅진으로 남하한 백제, 병권을 장악한 해씨


문주왕 원년(서기 475)

겨울 10월,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문주왕 2년(서기 476)

봄 2월,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수 북쪽의 민가를 옮겼다.
가을 8월, 해구(解仇)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한성이 고구려에게 넘어가자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다.

웅진에서 병권은 해씨가 장악한다.



- 일본에서 돌아온 곤지(유라쿠), 진씨의 복귀


문주왕 3년(서기 477) 
여름 4월, 임금의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으로 삼았고, 맏아들 삼근(三斤)을 태자로 삼았다.
5월, 웅진에 흑룡이 나타났다.
가을 7월,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개로왕에게 좌현왕으로 임명된 곤지는 일본으로 가 유라쿠 천황으로 있다가 개로왕이 참살당하자 웅진으로 입성한다.

곤지와 함께 진씨도 백제의 정계에 복귀한 것으로 추정된다.



- 진씨의 재등장에 위기감을 느끼고 독재를 행사하는 해구


문주왕 4년(서기 478) 
가을 8월, 병관좌평 해구가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고 법질서를 문란하게 하며 임금을 업신여겼으나 임금이 이를 억제하지 못하였다.
9월, 임금이 사냥을 나가 외부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도적으로 하여금 임금을 해치게 하여 마침내 임금이 돌아가셨다.


삼근왕 원년
삼근왕(三斤王)[혹은 임걸(壬乞)이라고도 한다.]은 문주왕(文周王)의 맏아들이다. 왕이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나이가 13세여서 병사 임무와 정치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좌평 해구에게 맡겼다.


곤지와 문주왕이 암살당하고 해구가 독재권력을 행사한다.



- 해씨와 진씨의 내전; 대두성에서 해구를 진압하는 진로


삼근왕 2년(서기 478)

봄,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燕信)과 함께 무리를 모아 대두성(大豆城)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좌평 진남(眞男)에게 명령하여 병사 2천 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덕솔 진로(眞老)에게 명령하여 정예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치게 하여 해구를 죽였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의 처자들을 잡아 웅진(熊津)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해구가 반란을 일으킨다.

진로가 임금의 명으로 해구를 토벌하고 토벌을 명한 삼근왕이 죽는다.

개로왕에 때에 권력을 빼앗긴 진씨가 권력을 되찾는 순간이다.



- 권력을 장악한 진로


동성왕 4년(서기 482)

봄 정월, 진로(眞老)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겸하여 서울(공주)과 지방의 병마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가을 9월,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여 부수고 3백여 호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동성왕 5년(서기 483)

봄, 임금이 사냥하기 위하여 한산성에 이르러 병사와 백성들을 위로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


동성왕은 백잔과 왜 두 나라를 백제라는 이름으로 병합하기 위해 노력한다.

동성왕은 한산성에서 병사와 백성의 환대를 받는다.


- 가뭄이 든 한산에 식량지원을 거부하는 동성왕, 백제로 부터 멀어진 한산의 민심


동성왕 21년(서기 499)

여름에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고 도적이 많이 생겼다.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고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한산 사람 2천 명이 고구려로 도망갔다.


동성왕 22년(서기 500)

봄, 궁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간언하는 신하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않고, 다시 간언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궁궐 문을 닫아버렸다.


집권 초기와는 달리 동성왕은 향락에 젖어든다. 전백제인 한산과의 관계가 소원하다.

동성왕은 한산 지원책을 묵살하고 한산 신하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아 보인다.



- 살해당하는 동성왕


동성왕 23년(서기 501)

11월, 임금이 웅천의 북쪽 벌판에서 사냥을 하였고, 또 사비의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馬浦村)에서 묵었다. 처음에 임금이 백가에게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자 했으나 임금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백가는 임금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임금을 칼로 찔렀고, 12월에 이르러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한산의 민심이반이 심각해진 것 같다.

동성왕이 살해당한다.



- 수곡성을 공격하는 무령왕, 고토 회복에 집중하게 된 백제


무령왕 원년(서기 501)

겨울 11월,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게 하였다.


무령왕 2년(서기 502)

겨울 11월, 병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무령왕 3년(서기 503)

가을 9월, 말갈이 마수(馬首) 목책을 불사르고 고목성(高木城)으로 공격하여 오자 임금이 병사 5천 명을 보내 그들을 물리쳤다.


동성왕이 죽고 즉위한 무령왕은 고토회복에 집중한다.

무령왕은 개로왕과 동성왕이 이룩하지 못한 전백제와 왜를 백제로 완전 통합하게 된다.



- 오곡벌에서 대패하는 백제


성왕 7년(서기 529)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興安, 안장왕)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여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이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 벌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성왕은 오골벌에서 고구려에게 크게 패한다.



- 고구려로 돌아선 한산의 민심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한산주(漢山州)

달을성현(達乙省縣)[한씨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놓고 안장왕을 맞던 곳이라 하여 후에 고봉(高烽)이라고 불렀다.] 
왕봉현(王逢縣)[개백(皆伯)이라고도 한다.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安臧王)을 맞던 곳이라 하여 왕봉으로 불렀다.]


오곡벌 전투에서 백제의 큰 패배는 한산의 민심에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한산은 고구려에 점령된다.



-평양(=한산)을 격파한 백제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

진흥왕 12년(서기 551)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을 시켜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백제와 신라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북진하여 평양(=한산)을 격파하였고 신라는 죽령을 넘어 국원성을 빼앗게 된다.



- 신라가 차지하는 한산, 신주를 설치하는 신라


진흥왕 14년(서기 553)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일본서기 흠명 13년 (553)
이 해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新羅의 牛頭方(우두방)·尼彌方(니미방)이다.



- 신라 진흥왕이 백제의 횡악에 올라 "북한산순수비"를 건립한다 이후 황악을 신라인은 부아악이라 부른다.


진흥왕 16년(서기 555)
겨울 10월, 임금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하여 영토의 국경을 정하였다.
11월, 임금이 북한산에서 돌아왔다.


백제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산으로 진출했지만 신라가 신주를 설치하자 백제는 한산을 버리고 사비로 간다.

한산의 민심은 백제를 떠난 상태였던 것이다.



- 낭비성에서 고구려에게 승리하는 신라


진평왕 51년(서기 629)

가을 8월, 임금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고구려인이 성에서 나와 진을 쳤는데, 군세가 매우 강성하여 우리 병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며 싸울 생각을 못했다.

유신이 말하였다.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가죽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고 들었다, 내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노라!”

그리고는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으로 향하여 곧바로 나아갔다. 적진에 세 번 들어갔다 나왔는데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의 목을 베거나 군기를 뽑았다.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여 5천여 명을 목 베어 죽이니, 낭비성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낭비성을 침공하여 고구려에게 승리한다.



  조이 16.10.05. 10:48
http://blog.naver.com/001mnbvc/220802744676
 
 
조이 16.10.05. 10:54
http://goodinj.tistory.com/937
 
 
미추가 일본어 미즈에서 나온 게 아니라, 우리나라 고대엔 물을 믈 (mil) 했는데, 이게 한쪽으로는 <물>로 변했고 한쪽에선 <밀> 로 변했는데, 일본어는 <밀> 에서 <미즈> 로 변한 것임. 현대어에서 미나리, 미역 등 <미> 가 물의 의미인데 이는 밀에서 ㄹ 이 탈락하여 미가 되었음을 알수 있는 것이다. 암튼 일본어 일부는 한반도의 일부 계통 (고구려는 아님) 의 언어를 가지고 간 것으로 보임. 결국 우리가 먼저고 일본은 나중이라는 얘기.
 


      cafe.daum.net/alhc/3Cdg/731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사회] 비류백제와 온조백제...| [뿌리아름]해상백제

조수아 | 조회 113 |추천 0 | 2007.04.22. 20:23

  

제가 한창 광개토태왕 소설을 쓰는 도중

 

광개토태왕이 어떻게 해서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지에 대해 찾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웹사이트에서 '광개토태왕의 전략'이라는 글을 읽었는데

 

그 글에서 처음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에 대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비류백제와 온조백제가 재야사학계에서 떠도는 이야기 쯤인 것으로 여기고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카페에 와서 보니 려휘님께서는 비류백제와 온조백제 이야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하시더군요.

 

해서 충격을 적잖이 받았습니다.

 

어떻게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에 대해서 기초적인 지식이라도 갖추고 싶은데

 

이 카페의 글들은 기초적인 내용보다 심화된 내용을 보다 많이 다루는 듯합니다.

 

정말 궁금하네요..

 

이 설이 학계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麗輝 07.04.22. 20:26

글쎄요, 학계에서 어떤가라...솔직히 말하면 비주류라고 할 수 있겠죠. 물론 김성호 선생님이 제창한 이후로 사람들이 많이 인식하고는 있는 편입니다. 최소한 비류계와 온조계, 이 2개의 왕통이 백제 중기까지도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었다는 것까지는 학계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백제라고 하는 같은 나라에서 말이죠. 하지만 저는 분명히 양자가 다른 국가를 세웠고 다른 방식으로, 각자 다른 역사를 가지며 국가를 꾸려왔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고고학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영산강유역을 저는 비류백제 후기사로 분류하고 있는데 암튼 이 부분은 더 두고봐야 할 듯 싶습니다.
 
 
麗輝 07.04.22. 20:28
김성호 선생님이 비류백제를 주장했을 때 고고자료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지명비정과『삼국사기』를 비롯한 기존 문헌의 재해석 정도가 근거로 작용했지요. 김상이라는 분의 연구성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발견되는 각종 고고자료를 살펴보면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서남부에는 분명 온조가 세운 한성백제와 다른 존재가 있었다는 것이 고고학계의 공식입장입니다. 그래서 삼국시대를 고구려, 백제, 신라 이외에 가야와 영산강세력 이렇게 5개 정치체가 공존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고요. 그리고 역사학계에서는 아직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암튼 두고두고 공부를 해봐야 할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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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



글 쓴 이  
   뽀로로 (2011-03-08 08:15:37, Hit : 3725, Vote : 402)
제     목  
   비류백제와 임나일본부

   비류백제라는 주장이 처음 나온 것이 제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조선일보에 김성호선생의 이야기가 연재되었었죠.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저는 임나일본부, 일본서기 등에 대한 이야기를 김성호 선생의 책을 통해서 처음 봤었습니다. 비록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최근에는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어버렸지만, 임나일본부, 광개토왕비, 일본서기, 삼국사기 등 가능한 모든 문헌사료를 총동원하여 이를 대통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저는 이 책은 왠만한 학계의 저술보다 훨씬 대단한 역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류백제에 대한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김성호 선생이 백제를 두개로 나누어 분해를 했다는 점입니다. 삼국사기에서 비류와 온조, 두 형제의 이야기가 있다는 점에서 비류의 나라는 바로 없어지지 않았다. 두개의 백제는 공존했다고 상상의 (?) 나래를 펴죠. 그리고 이를 광개토왕 남정과 이어 붙이고, 5세기 일본 고분기의 대변혁과 연결시켜 일본의 국가기원까지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실로 대단한 스토리텔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그 당시에는 학계에서도 삼국 분국설 같은 이야기나 나오는 수준이었는데 논리의 전개의 비약 같은 점을 제외하고 나면 반지의 제왕같은 판다지물 대작수준이었다고나 할까., 그 당시 이 책을 사서 읽던 제게 큰 충격을 주었었죠., 개인적으로는 제게 역사학이라는 것의 재미를 처음 강하게 느끼게 해준 것은 이병도 선생도, 그 누구도 아니고 김성호 선생이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뽀로로 (2011-03-08 08:18:08)  
최근에는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3세기까지 올라가버렸으므로 김성호 선생 이야기가 더 통하기 어려워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일본고대의 5세기 대 격변론이 받아들여지던 때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일본고대 5세기는 그 이전시기와 구분되는 뚜렷한 변화가 4말5초의 전역과 관련하여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기는 했지만 그 당시에는 4세기 이전의 고분이 잘 확인도 안되는 상황이었고, 우리측의 김해가야 발굴 등 임나일본부설에 큰 데미지를 줄 발굴이 줄이어서 야마토 왜의 국가기원으로 김해지역을 거론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일본에서도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뽀로로 (2011-03-08 08:20:16)  
   지금은 일본서기 문헌을 적극적으로 한국사 해석에 원용하는 것이 별로 드물지 않게 되었습니다만, 김성호 선생이 그 책을 쓸 당시만 해도 일본서기 기록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한국 고대사 해석에 원용한 사례가 있었는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눈에 띄는 부분은 이 책에서는 충남 이남 지역은 "한국사의 블랭크"로 설정하고 고구려, 신라, 백제 외의 제4의 왕국이 이 지역에 있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게 바로 이잔국, 즉 비류백제라는거죠.


뽀로로 (2011-03-08 08:22:19)  
  온조백제의 형제국가인 이잔국-비류백제는 광개토왕 남정 때 괴멸적 타격을 입고 이때 일본열도로 건너가 대규모 전방후원분의 주인공=결국 일본 황실의 기원이 된다., 는것이 줄거리죠. 솔직히 왠만한 찌질한 역사드라마 보다 훨씬 스케일이 크고 이야기도 풍부합니다.

상상력의 빈곤과 학문의 엄정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부 학계 논문들보다도 훨씬 대단하죠. 아직도 저는 김성호 선생은 개인적으로 대단하게 평가합니다.
뽀로로 (2011-03-08 08:25:02)  
  하지만 김성호 선생의 논지를 잘 살펴 보노라면 많은 부분에서 "비류백제"는 "임나일본부"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성호 선생의 이 책이 나올 당시 일본에도 임나일본부 거꾸로 보기가 한동안 유행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에가미 나미오나 이노우에 히데오 같은 이는 전통적인 임나일본부 설을 뒤집어 한반도 남부에 먼저 "왜를 설정"하고 이 왜가 일본열도로 진출해 후대의 천황가의 기틀을 잡았고, 이 때문에 한반도 남부에 대한 "왜의 연고"가 생겼다고 주장하죠. 이 학설 대로면 4-6세기 일본서기에 남아 있는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한반도 남부의 발굴 상황이 당시 일본열도와 다른 양상을 보이는것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왜냐. 일본천황은 원래 한반도 남단에 살던 왜. 즉, 이름만 왜이지 한국사람이니까요. 일본서기도 옳고. 해방 후 한국학계의 발굴보고도 옳고. 윈윈인셈입니다.
뽀로로 (2011-03-08 08:26:33)  
   김성호 선생의 논지는 크게 보아 이런 일본의 "새로운 트랜드"에 삼국사기 기록을 이어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치체는 "왜"도, "임나일본부"도 아닌, "비류백제"라고 이름 붙이죠. 비류백제의 영역을 표시한 그림, 그리고 비류백제 관련 하나하나의 사건이 임나일본부에설 볼수 있는 영역, 사건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은 그래서 입니다.

하나의 몸통에서 나온 쌍둥이거든요.
뽀로로 (2011-03-08 08:31:04)  

  지금 다시 세월이 많이 흘러 돌이켜 보면, 일본도 이제는 과거, 에가미 나미오나 이노우에 히데오의 주장은 힘을 많이 잃었습니다.

최근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이 이색적 관심을 불러 일어키기도 했습니다만, 아마 지금 흘러가는 양국 학계의 큰 흐름은 별로 많이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처럼 흘러간다면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5세기 중엽 이후, 백제와 왜 사이 거래의 결과물로 해석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합니다. 영산강 유역, 혹은 다른 지역에서 이보다 앞선 전방후원분의 발견이 줄을 짓지 않는다면 말이죠.

양측의 욕망에 의해 한반도 남부와 왜를 서로의 우위에 의해 연결시켜 보려는 시도도 최근에는 많이 희석됐죠. 보시다시피 최근에는 일본고대사에 대한 한국문화의 우위를 다루는 티비나 신문기사도 많이 사라졌고, 일본도 고대 천황가의 기원을 한국에서 찾거나 임나일본부가 한국 남부를 다스렸다는 소리 자체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4-6세기 한반도 남부의 상황은 미궁에 묻히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할 뿐이죠. 점점 객관적인 자료의 보강에 따라 실제 있었던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죠. 하지만 김성호 선생 글을 읽을때처럼 즐겁지는 않을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수준에 있어 김성호 선생 글은 당대 최고였다는 생각입니다.

뽀로로 (2011-03-08 08:32:17)  
위 그림은 원본 사진이 아래에 있는 것을 직접 링크한 것입니다.

http://cafe310.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SWL&fldid=1Db&contentval=000zczzzzzzzzzzzzzzzzzzzzzzzzz&nenc=XF5CS6IYAK7bnesHuBViJg00&fenc=_Su4at5NiW90?docid=SWL%7C1Db%7C3803%7C20100216213321&q=%C0%D3%C1%F8%BF%D6%B6%F5&nil_profile=cafetop&nil_menu=sch_updw
뽀로로 (2011-03-08 08:44:00)  
   일본학자들 중 "왜한 연합왕국"을 설정하고, 천황가가 가야지역, 구체적으로는 김해 금관가야 지역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한 학자들이 제법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일본이 기존의 4세기 임나일본부의 배타적 지배권을 한반도 남부에 설정하기 어려워지면서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강한 연고권을 어떻게든 설명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죠.

미치지 않은 담에야 아무 상관도 없는 땅을 내땅이라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발굴 보고 나오는 것을 보면 실제로 아무 상관도 없는 땅이 될 판이었으니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이런 몇 몇 부분에 있어서 일본서기는 심각한 수준의 "뻥"이 섞여 있고 이것이 일본서기 기록에서 옥석을 가려내기 어렵게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뻥"이 뭐냐 하는 걸 밝혀내는 것이 고고학이 되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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