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14. 09:00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전백제(온조백제 + 비류백제)와 대백제의 간략사 백제 토론방
삼국사기 온조편에는 두개의 백제 건국 설화가 실려있다. 비류계열의 건국 설화는 비류가 동생 온조와 어머니를 데리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서 건국을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면 온조계열의 건국 설화는 온조와 비류가 각기 다른 곳에서 나라를 건국한 것으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다. - 미추홀은 수촌리 온조왕 백제 건국 설화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류계열의 백제 건국 설화에서 미추홀은 대방에서 패수와 대수를 건넌 곳에 있다. 이를 볼 때 비류는 대방에서 남하해서 예성강과 임진강을 건너 수촌리에 정착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미추홀의 "미추"는 물을 의미하는 일본어 "미즈"에서 나왔고 "홀"을 "마을"을 뜻한다. - 하북 위례성을 쌓은 백제, 대부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위례성 온조왕 8년(기원전 11) 봄 2월,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니 임금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병이 군량미가 떨어져 돌아가므로, 임금이 날쌘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 고목성과 석두성을 쌓는 온조
가을 8월, 석두(石頭)와 고목(高木) 2개의 성을 쌓았다. 백제는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고목성과 석두성을 쌓는다. 고목성은 지금의 연천이고 석두성은 지금의 삭녕이다. 고목성과 석두성은 고구려-부여계의 영토이다. - 온조왕 기사는 6주갑 인상하여 근초고왕 시대의 기사를 일부 가져오기도 했다. 온조왕 41년(서기 23) - 남옥저에서 귀순하는 구해파; 한산서쪽에 정착하는 남옥저의 예족
- 하북 위례성을 버리고 남하하는 백제인들 온조왕 13년(기원전 6) 봄 2월, 서울에서 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였다. 여름 5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위례성에 호랑이 다섯 마리가 들어왔고 임금의 어머니가 죽었다. 위례성이 함락된 것이다. 위례성을 함락당한 백제는 한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 한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한강 서북에 성을 쌓는 온조왕
백제는 한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한강 서북에도 성을 쌓는다. 한강 이북의 북한성과 한강 이남의 한성이 고구려-백제계가 새롭게 거처할 성이다.
봄 정월, 임금의 배다른 아우 우복(優福)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비류왕 24년(서기 327) 9월,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北漢城)에 자리잡고 반역을 일으켰다. 비류왕의 기사를 통해 우씨가 북한성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전백제(온조백제)왕은 부여성인 해씨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남부여ㆍ전백제ㆍ북부여 온조왕 백제 건국 설화 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하였다. 부여계의 왕족의 성씨는 삼국유사에는 해씨로 삼국사기에는 부여씨로 기록되어 있다. - 왕계가 바뀐 백제 고이왕 원년 고이왕(古尒王)은 개루왕(蓋婁王)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仇首王)이 재위 21년에 죽고 맏아들 사반(沙伴)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돌보지 못하므로, 초고왕(肖古王)의 친동생인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비류왕 18년(서기 321) 봄 정월, 임금의 배다른 아우 우복(優福)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고이왕은 개루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초고왕, 구수왕과는 다른 계통의 왕이란 것을 암시하고 있다. 고이왕과 비류왕까지 우씨 성을 가진 왕이며 초고왕과는 다른 왕이 아닐까 추측한다. 1. 비류백제 - 내신좌평이 된 진의 비류왕 24년(서기 327) 9월,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北漢城)에 자리잡고 반역을 일으켰다. 임금이 병사를 보내 토벌하였다.
비류왕대에 진씨에게 위기감을 느낀 우씨가 북한성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북한성의 반란은 진압되는데 이후 왕계가 진씨로 바뀌게 된다. 2. 온조백제 - 근초고왕의 등장 근초고왕 원년(서기 346)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식견이 넓었다. 계왕이 돌아가시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진서(晉書) 권9 제기 제9 간문제 함안 2년 (서기 372) "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 백제왕 여구(餘句),작위 진동장군영낙랑태수 근초고왕이 등장하면서 백제왕은 해씨가 장악한다. - 왕비족이 된 진씨 근초고왕 2년(서기 347) 봄 정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진정(眞淨)을 조정좌평으로 삼았다. 진정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였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까다롭고,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여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근초고왕 이후 백제의 왕비는 진씨가 배출하며 실질적 권력도 진씨가 장악한다. - 광개토의 등장 진사왕 8년(서기 391) 391년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광개토왕이 북부의 10개성을 함락시키고 관미성마저 함락시킨다. 이후 백제는 고구려에게 계속 패하며 위기에 몰린다. 3. 대백제 - 왕권강화를 추진하다 살해당하는 비유왕 비유왕 29년(서기 455) 비유왕 29년(서기 455) 개로왕 18년 도림이 말하였다. "...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고 ..." 위기의 상황에서 진씨의 비유왕은 왕권강화를 모색한다. 왕권 강화책은 해씨 백제의 권력과 재산을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 비유왕은 진씨의 왕권 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망한다. - 미추홀과 한성을 통합한 근개루왕 개로왕 원년 개로왕(蓋鹵王)[혹은 근개루(近蓋婁)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경사(慶司)이다.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개로왕은 근개루라고도 하는데 이는 개루왕이 마한왕이기 때문이다. 즉 개로왕은 비류백제와 온조백제를 통합하였다. - 反백제로 돌아선 북부의 민심, 망명한 한성백제 귀족들이 끌고 온 고구려군 개로왕 21년(서기 475) 해씨(온조백제)와 진씨(왜)의 통합 과정에서 한성의 귀족들이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한성의 민심은 백제에게서 떠났다. 고구려로 망명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고구려군을 이끌고 한성을 무너뜨린다. 고구려군이 쉽게 한성을 몰락시킨 것은 한성백제 귀족들이 고구려군에게 협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주왕 원년(서기 475) 겨울 10월,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문주왕 2년(서기 476) 봄 2월,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수 북쪽의 민가를 옮겼다. 한성이 고구려에게 넘어가자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다. 웅진에서 병권은 해씨가 장악한다. - 일본에서 돌아온 곤지(유라쿠), 진씨의 복귀 문주왕 3년(서기 477) 개로왕에게 좌현왕으로 임명된 곤지는 일본으로 가 유라쿠 천황으로 있다가 개로왕이 참살당하자 웅진으로 입성한다. 곤지와 함께 진씨도 백제의 정계에 복귀한 것으로 추정된다. - 진씨의 재등장에 위기감을 느끼고 독재를 행사하는 해구 문주왕 4년(서기 478) 삼근왕 원년 곤지와 문주왕이 암살당하고 해구가 독재권력을 행사한다. - 해씨와 진씨의 내전; 대두성에서 해구를 진압하는 진로 삼근왕 2년(서기 478) 봄,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燕信)과 함께 무리를 모아 대두성(大豆城)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좌평 진남(眞男)에게 명령하여 병사 2천 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덕솔 진로(眞老)에게 명령하여 정예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치게 하여 해구를 죽였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의 처자들을 잡아 웅진(熊津)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해구가 반란을 일으킨다. 진로가 임금의 명으로 해구를 토벌하고 토벌을 명한 삼근왕이 죽는다. 개로왕에 때에 권력을 빼앗긴 진씨가 권력을 되찾는 순간이다. - 권력을 장악한 진로 동성왕 4년(서기 482) 봄 정월, 진로(眞老)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겸하여 서울(공주)과 지방의 병마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동성왕 5년(서기 483) 봄, 임금이 사냥하기 위하여 한산성에 이르러 병사와 백성들을 위로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 동성왕은 백잔과 왜 두 나라를 백제라는 이름으로 병합하기 위해 노력한다. 동성왕은 한산성에서 병사와 백성의 환대를 받는다. 동성왕 21년(서기 499) 여름에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고 도적이 많이 생겼다.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고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한산 사람 2천 명이 고구려로 도망갔다. 동성왕 22년(서기 500) 봄, 궁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간언하는 신하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않고, 다시 간언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궁궐 문을 닫아버렸다. 집권 초기와는 달리 동성왕은 향락에 젖어든다. 전백제인 한산과의 관계가 소원하다. 동성왕은 한산 지원책을 묵살하고 한산 신하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아 보인다. - 살해당하는 동성왕 동성왕 23년(서기 501) 11월, 임금이 웅천의 북쪽 벌판에서 사냥을 하였고, 또 사비의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馬浦村)에서 묵었다. 처음에 임금이 백가에게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자 했으나 임금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백가는 임금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임금을 칼로 찔렀고, 12월에 이르러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한산의 민심이반이 심각해진 것 같다. 동성왕이 살해당한다. - 수곡성을 공격하는 무령왕, 고토 회복에 집중하게 된 백제 무령왕 원년(서기 501) 겨울 11월,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게 하였다. 무령왕 2년(서기 502) 겨울 11월, 병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무령왕 3년(서기 503) 가을 9월, 말갈이 마수(馬首) 목책을 불사르고 고목성(高木城)으로 공격하여 오자 임금이 병사 5천 명을 보내 그들을 물리쳤다. 동성왕이 죽고 즉위한 무령왕은 고토회복에 집중한다. 무령왕은 개로왕과 동성왕이 이룩하지 못한 전백제와 왜를 백제로 완전 통합하게 된다. - 오곡벌에서 대패하는 백제 성왕 7년(서기 529)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興安, 안장왕)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여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이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 벌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성왕은 오골벌에서 고구려에게 크게 패한다. - 고구려로 돌아선 한산의 민심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한산주(漢山州) 달을성현(達乙省縣)[한씨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놓고 안장왕을 맞던 곳이라 하여 후에 고봉(高烽)이라고 불렀다.] 오곡벌 전투에서 백제의 큰 패배는 한산의 민심에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한산은 고구려에 점령된다. -평양(=한산)을 격파한 백제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 진흥왕 12년(서기 551)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을 시켜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백제와 신라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북진하여 평양(=한산)을 격파하였고 신라는 죽령을 넘어 국원성을 빼앗게 된다. - 신라가 차지하는 한산, 신주를 설치하는 신라 진흥왕 14년(서기 553) 일본서기 흠명 13년 (553) - 신라 진흥왕이 백제의 횡악에 올라 "북한산순수비"를 건립한다 이후 황악을 신라인은 부아악이라 부른다. 진흥왕 16년(서기 555) 백제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산으로 진출했지만 신라가 신주를 설치하자 백제는 한산을 버리고 사비로 간다. 한산의 민심은 백제를 떠난 상태였던 것이다. - 낭비성에서 고구려에게 승리하는 신라 진평왕 51년(서기 629) 가을 8월, 임금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고구려인이 성에서 나와 진을 쳤는데, 군세가 매우 강성하여 우리 병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며 싸울 생각을 못했다. 유신이 말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으로 향하여 곧바로 나아갔다. 적진에 세 번 들어갔다 나왔는데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의 목을 베거나 군기를 뽑았다.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여 5천여 명을 목 베어 죽이니, 낭비성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낭비성을 침공하여 고구려에게 승리한다. |
조이 16.10.05. 10:48 http://blog.naver.com/001mnbvc/220802744676 미추가 일본어 미즈에서 나온 게 아니라, 우리나라 고대엔 물을 믈 (mil) 했는데, 이게 한쪽으로는 <물>로 변했고 한쪽에선 <밀> 로 변했는데, 일본어는 <밀> 에서 <미즈> 로 변한 것임. 현대어에서 미나리, 미역 등 <미> 가 물의 의미인데 이는 밀에서 ㄹ 이 탈락하여 미가 되었음을 알수 있는 것이다. 암튼 일본어 일부는 한반도의 일부 계통 (고구려는 아님) 의 언어를 가지고 간 것으로 보임. 결국 우리가 먼저고 일본은 나중이라는 얘기. |
cafe.daum.net/alhc/3Cdg/731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사회] 비류백제와 온조백제... [뿌리아름]해상백제
제가 한창 광개토태왕 소설을 쓰는 도중
광개토태왕이 어떻게 해서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지에 대해 찾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웹사이트에서 '광개토태왕의 전략'이라는 글을 읽었는데
그 글에서 처음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에 대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비류백제와 온조백제가 재야사학계에서 떠도는 이야기 쯤인 것으로 여기고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카페에 와서 보니 려휘님께서는 비류백제와 온조백제 이야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하시더군요.
해서 충격을 적잖이 받았습니다.
어떻게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에 대해서 기초적인 지식이라도 갖추고 싶은데
이 카페의 글들은 기초적인 내용보다 심화된 내용을 보다 많이 다루는 듯합니다.
정말 궁금하네요..
이 설이 학계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
麗輝 07.04.22. 20:26
cafe.daum.net/yeohwicenter/4ulU/104 뿌리아름역사동아리
백가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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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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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비류백제와 임나일본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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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3세기까지 올라가버렸으므로 김성호 선생 이야기가 더 통하기 어려워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일본고대의 5세기 대 격변론이 받아들여지던 때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일본고대 5세기는 그 이전시기와 구분되는 뚜렷한 변화가 4말5초의 전역과 관련하여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기는 했지만 그 당시에는 4세기 이전의 고분이 잘 확인도 안되는 상황이었고, 우리측의 김해가야 발굴 등 임나일본부설에 큰 데미지를 줄 발굴이 줄이어서 야마토 왜의 국가기원으로 김해지역을 거론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일본에서도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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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일본서기 문헌을 적극적으로 한국사 해석에 원용하는 것이 별로 드물지 않게 되었습니다만, 김성호 선생이 그 책을 쓸 당시만 해도 일본서기 기록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한국 고대사 해석에 원용한 사례가 있었는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눈에 띄는 부분은 이 책에서는 충남 이남 지역은 "한국사의 블랭크"로 설정하고 고구려, 신라, 백제 외의 제4의 왕국이 이 지역에 있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게 바로 이잔국, 즉 비류백제라는거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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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백제의 형제국가인 이잔국-비류백제는 광개토왕 남정 때 괴멸적 타격을 입고 이때 일본열도로 건너가 대규모 전방후원분의 주인공=결국 일본 황실의 기원이 된다., 는것이 줄거리죠. 솔직히 왠만한 찌질한 역사드라마 보다 훨씬 스케일이 크고 이야기도 풍부합니다. 상상력의 빈곤과 학문의 엄정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부 학계 논문들보다도 훨씬 대단하죠. 아직도 저는 김성호 선생은 개인적으로 대단하게 평가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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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성호 선생의 논지를 잘 살펴 보노라면 많은 부분에서 "비류백제"는 "임나일본부"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성호 선생의 이 책이 나올 당시 일본에도 임나일본부 거꾸로 보기가 한동안 유행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에가미 나미오나 이노우에 히데오 같은 이는 전통적인 임나일본부 설을 뒤집어 한반도 남부에 먼저 "왜를 설정"하고 이 왜가 일본열도로 진출해 후대의 천황가의 기틀을 잡았고, 이 때문에 한반도 남부에 대한 "왜의 연고"가 생겼다고 주장하죠. 이 학설 대로면 4-6세기 일본서기에 남아 있는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한반도 남부의 발굴 상황이 당시 일본열도와 다른 양상을 보이는것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왜냐. 일본천황은 원래 한반도 남단에 살던 왜. 즉, 이름만 왜이지 한국사람이니까요. 일본서기도 옳고. 해방 후 한국학계의 발굴보고도 옳고. 윈윈인셈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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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선생의 논지는 크게 보아 이런 일본의 "새로운 트랜드"에 삼국사기 기록을 이어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치체는 "왜"도, "임나일본부"도 아닌, "비류백제"라고 이름 붙이죠. 비류백제의 영역을 표시한 그림, 그리고 비류백제 관련 하나하나의 사건이 임나일본부에설 볼수 있는 영역, 사건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은 그래서 입니다. 하나의 몸통에서 나온 쌍둥이거든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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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세월이 많이 흘러 돌이켜 보면, 일본도 이제는 과거, 에가미 나미오나 이노우에 히데오의 주장은 힘을 많이 잃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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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원본 사진이 아래에 있는 것을 직접 링크한 것입니다. http://cafe310.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SWL&fldid=1Db&contentval=000zczzzzzzzzzzzzzzzzzzzzzzzzz&nenc=XF5CS6IYAK7bnesHuBViJg00&fenc=_Su4at5NiW90?docid=SWL%7C1Db%7C3803%7C20100216213321&q=%C0%D3%C1%F8%BF%D6%B6%F5&nil_profile=cafetop&nil_menu=sch_updw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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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학자들 중 "왜한 연합왕국"을 설정하고, 천황가가 가야지역, 구체적으로는 김해 금관가야 지역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한 학자들이 제법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일본이 기존의 4세기 임나일본부의 배타적 지배권을 한반도 남부에 설정하기 어려워지면서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강한 연고권을 어떻게든 설명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죠. 미치지 않은 담에야 아무 상관도 없는 땅을 내땅이라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발굴 보고 나오는 것을 보면 실제로 아무 상관도 없는 땅이 될 판이었으니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이런 몇 몇 부분에 있어서 일본서기는 심각한 수준의 "뻥"이 섞여 있고 이것이 일본서기 기록에서 옥석을 가려내기 어렵게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뻥"이 뭐냐 하는 걸 밝혀내는 것이 고고학이 되어야 하겠죠. |
www.history21.org/zb41/view.php?id=discuss2008&page=9&sn1=&divpage=1&s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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