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17. 03:45ㆍ美學 이야기
고개지(顧愷之)의 작품세계
고개지(顧愷之, 344년 ~ 406년 경)는 중국 동진(東晋)의 화가이다. 자는 장강(長康) 호는 호두(虎頭)이며, 장쑤 성 (江蘇省)에서 출생하였다. 생몰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의희연간(義熙年間 405~418) 초기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된 얼마 후 62세로 죽은 듯하다.
중국 미술의 기틀을 닦아 놓은 위대한 화가로 인물, 동물, 풍경화 등 각 방면에 재주가 있었으며, 특히 인물화에 뛰어났다. 중국회화사상 인물화의 최고봉이로 일컬어진다. 중국에서 유명한 불교 성자인 비말라키르티의 초상을 최초로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편 <논화(論畵)>.<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 등 화론(畵論)이 전한다.
송(宋)나라 육담미(陸探微), 양(梁)나라의 장승요(張僧繇)와 함께 육조(六朝)의 3대가라 일컬어지며 당(唐)나라 장현원(張玄遠)이 지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 등에서도 세 사람이 함께 거론된다.
교묘한 필치와 예리한 관찰로 형체의 특징을 놀랄 만큼 정확하게 묘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재절, 화절, 치절의 3절이란 말로 그를 평가하였다.
전해지는 작품으로는 <(낙신부도권(洛神賦圖券)>과 <여사잠도권(女史箴圖)>, <열녀인지도권<열녀인지도권(烈女仁智圖券)>등이 있다. <낙신부도권은 위(魏)나라의시인 조자건(曺子健)이 쓴도교시를 도식화한 것이다 그가 쓴 화론(畵論)<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 역시 도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그 당시에 그려졌던 그림을 묘사한 글일 수도 있다. 낙신보두건은 베이징 고궁박물관, 선양 랴오닝성 박물관에 모본이 있고 워싱톤 프리어갤러리와 타이베이 고둥 박물관에 모본 일부 소장하고 있다.
<여사잠도권>은 전칭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명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분명히 당(唐 618~906) 전기의 품격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낱장으로 분리되어 있는 일련의 장면들 상단부에 교훈적인 유교시를 적어 넣어서 궁중여인들이 지켜야 할 올바른 행실들에 대해 훈계한 그림이다. 잔사선(蠶絲線)을 사용해서 치밀하게 그렸으며 뛰어난 화면구성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훈계적인 내용을 효과적으로 묘사했다. <여사잠도권(女史箴圖券)>은 옛날부터 고개지의 진적(眞蹟)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당나라 때의 모작(模作)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현존하는 작품 《여사잠도권》은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중국 그림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유명하다.
문학작품을 그림으로 옮긴 故事畵
위진남북조 시대는 조조, 유비, 손권이 등장하는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위, 촉, 오의 삼국시대부터 사마 씨의 진(晉) 나라, 이후 남북으로 나뉜 분열된 시기를 말한다. 북쪽은 북방의 소수민족이 건립한 16개 국가, 즉 오호십육국이, 남쪽은 한족이 세운 송, 제, 양, 진의 네 나라가 흥망을 거듭했다. 370여년간 이어진 혼란기로 '육조시대'라고도 한다.
◆중국 최고(最古)의 화가, 고개지
위진남북조 시대는 혼란한 시기였으나 미술은 매우 발전했다. 이전까지 미술은 건축물을 장식하고 왕조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에 부합하는 조각과 벽화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위진남북조 시대에 들어서면서 미술은 순수한 예술창작 분야로 독립했다. 회화의 주제와 소재가 다양해지고, 초상화와 당시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그림들이 주로 제작됐다. 이때 가로로 긴 두루마리 형식을 위주로 하는 전통이 생겨났는데 이는 주로 인물화에 나타났다.
인물화로 유명한 동진시대의 고개지(顧愷之, 346~408년경)는 중국 미술사에서 이름과 화풍이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화가다. 현재 전하는 고개지의 작품은 3점으로 '여사잠도(女史箴圖)' '낙신부도(洛神賦圖)' '열녀전도(烈女傳圖)'가 있다.
고개지 인물화의 화법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인물 형상에서는 '수골청상(秀骨淸像)', 즉 가름한 얼굴의 수려한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또 유연하면서도 탄력 있는 필선으로 인물의 윤곽선이나 옷 주름선 등을 묘사한 그의 필법은 마치 봄날의 누에고치에서 끊이지 않고 가늘고 길게 실이 계속해서 나온다고 하는 '춘잠토사(春蠶吐絲)', 마치 물속에서 막 나온 듯 옷이 몸에 착 달라붙은 것처럼 보인다는 뜻의 '조의출수(曹衣出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문학작품을 회화로 바꾸다
고개지의 대표작인 여사잠도는 서진(西晉) 혜제의 비인 가씨의 비행을 풍자하고, 그 일족의 지나친 세도를 염려하며 장화(張華)가 지은 '여사잠(女史箴)'이란 문학작품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여사잠'은 궁정 여관(女官)의 직책을 경계한 것으로 가씨의 후족을 풍자한 권계적인 내용이다. 여인이 지녀야 할 덕목 또한 함께 서술했다. 고개지가 이를 그림으로 옮겼는데 원래는 12장면을 담고 있었으나 앞의 3장면은 없어지고 지금은 9장면만 남아 있다. 화면 9단, 내용을 적은 글 8판이 현재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여사잠도는 먼저 글이 있고 그 장면에 해당하는 그림이 이어 등장하는, 글과 그림이 번갈아 반복되는 전형적인 고사화(故事畵)의 형식이다. 이러한 이야기 서술방식은 감상자가 글과 그림을 동시에 감상하며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여사잠도'는 문학과 회화의 결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러한 결합은 이미 한(漢)나라 때부터 나타난다. 중국은 이렇게 일찍부터 이런 동양회화의 특징인 고사화 형식이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여사잠도(女史箴圖)
중국 동진東晋의 화가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가 그렸다는 인물화*. 서진西晋의 장화張華(즈앙 화, 232~300)가 지은 《여사잠》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사잠》은 혜제惠帝의 황후 가씨(賈氏)일족의 지나친 세도와 방종을 걱정한 장화가 여사(후궁에서 황후의 범절을 맡는 여자. 양가 집안의 부녀로서 글과 교양을 갖추었던 여인이 뽑혔다)의 직책을 훈계하고, 황후 일족을 풍자할 의도로 지었다고 한다.
< 여사잠도>는 황실 규방 여인들의 품행 문제를 다룬 일종의 권계화(勸戒畵)이다. 이 그림에서 고개지가 사용했던 선(線)의 기법을 춘잠토사식(春蠶吐絲式) 또는 유사묘법(遊絲描法)이라 한다. 이는 필선이 명주실처럼 가늘고 섬세하면서도 생동감이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농담(濃淡)의 색채를 희미한 점철로 처리하는 등 특이한 도칠(塗漆)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그러나 경쾌하고도 귀한 육조풍(六朝風)의 묘선(描線), 미묘하게 외(湛:굽이쳐 들어간 곳)를 한 부색(賦色), 긴밀한 배치 등으로 감상화로서도 뛰어나 ‘고고단려(高古端麗)’라고도 하였다. 또 이 그림의 특징은 원근을 상하 관계로 표시한 한대의 하상석에서 탈피하여 원소근대(遠小近大)의 원근법으로 그린 점인데 당시 회화의 성격 및 기법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원래는 12단이었으나 현재 화면 9 단, 내용을 적은 글 8 판으로 전반 약 3 분의 1은 없다. 서화별인설(書畵別人說), 송나라 때의 모사설(模寫說) 등이 있으나 오늘날에는 당나라 때의 모사설이 유력하다. 화면전체에 보필(補筆)과 보견(補絹)이 많으나, 육조회화의 높은 수준과 양식, 당시의 풍속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하다. 각 시대에 걸쳐 감장인(鑑藏印)이 남아 있으며, 그 중에서도 휘종(徽宗)과 건륭제(乾隆帝)의 감정인이 주목된다.
고개지의 <여사잠도>(런던 대영박물관)가 가장 유명하고, 그 밖에 이보다 후대에 제작된 모사본(북경 고궁박물원)이 있다. 모두가 육조(六朝)시대의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여사잠도(女史箴圖), 동진시대, 비단에 채색, 24.8×348.2㎝, 당 모사본,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여사잠도는 1900년 영국이 침입한 위화단 사건으로 궁궐이 불탔을 때 3폭이 없어지고 9점은 영국이 가져가서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족자 scroll painting 으로서 폭 25 centimeter 와 길이4meter 로 옆으로 길다. 서진의 장화(232~300)가 지은 여사잠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사잠은 황후 가씨의 방종을 걱정한 장화가 여사 (후궁에서 황후의 범절을 맡는 여자. 양가 집안의 부녀로서 글과 교양을 갖추었던 여인이 뽑혔다)의 직책을 훈계하고, 황후 일족을 풍자할 의도로 지었다고 한다. 고개지가 그린 <여사잠도>는 황실 규방 여인들의 품행 문제를 다룬 일종의 권계화이다.
가씨는 시어머니를 죽이고 미소년을 데리고 놀다가 죽이는 사악한 여자로 왕을 포함한 온 궁궐이 다 무서워했다. 가씨는 후손이 없어서 사마씨 중에서 하나를 점찍어 황태자로 삼으나 그는 살기 위해서 바보 노릇을 하지만 가씨에게 들켜서 죽임을 당한다. 가씨 왕후의 폭정으로 서진은 흉노족에게 망하고 남은 자손들이 남쪽으로 도망을 가서 동진을 세운다. 동진시대 고개지는 나라를 망하게 한 가씨왕후의 어마어마한 사건 이야기를 들었고 동진 사람 치고 이 얘기를 모르는 사람 없다. 고개지의 그림 옆에는 여사잠 소설을 모델로 하여서 그림책처럼 글이 있다. 가씨 왕후의 행실처럼 하면 안된다는 유교적 교훈이며 그림만 보면 이해가 안되고 글을 봐야 한다.
고개지가 유명해진 이유는 인물화를 그릴 때 얼굴이 표정이 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얼굴의 기운생동이 엄청나며 그림에서 고개지가 사용했던 선(線)의 기법을 춘잠토사식(春蠶吐絲式) 또는 유사묘법(遊絲描法)이라 한다. 이는 필선이 명주실처럼 가늘고 섬세하면서도 생동감이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농담(濃淡)의 색채를 희미한 점철로 처리하는 등 특이한 도칠(塗漆)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고개지는 인물을 그리면서 몇 년이고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정신을 비추어 내는 곳이 바로 눈동자이다." 라고 했다. 그림은 사실 모방이 아니므로 영혼을 나타내는 눈이 중요하다. 점 하나에 따라 화, 질투, 행복을 표현한다.
여사잠도(女史箴圖)왼쪽 부분, 동진시대, 비단에 채색, 24.8×348.2㎝, 당 모사본, 런던 대영박물관
■왼쪽 1번 2번 그림 - 여사가 책을 들고 새로 들어온 측실에게 훈계를 하고 있다. 그림 속의 수 많은 낙관은 왕이 바뀔 때 마다 왕족이 자신의 소유임을 주장하고 진품임을 보증하는 것 이다.
■왼쪽 3번 그림 - 조용하고 순종하는 맘으로 너의 할 바를 수행하면 영광이 찾아온다. 너의 행동을 항상 뒤돌아 보라.
■왼쪽 4번 그림 - 왕이 손으로 만류하면서 ‘물러서거라’ 하는데 여자가 쫓아간다. ‘왕이 측실을 들이면 애정을 갈구하지 말라. 조신하게 있어라’ 여사잠의 훈계 중 질투에 관한 것 이다. 그렇지 못해서 나라 말아먹은 역사 속의 가씨의 사건과 맛 물려있다.
여사잠도(女史箴圖), 동진시대, 비단에 채색, 24.8×348.2㎝, 당 모사본,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왼쪽 5번 그림 - 왕과 3명의 첩들과 애들, 끝부분이다. 모든 훈계를 잘 이행하면 가정에 행복이 온다.
■왼쪽 6번 그림 - 부인이 침대에서 나가는 왕을 보고 있다. 한 침대 같이 써도 말이 품위없고 경망스러우면 멀어진다. 고개지는 신발 신고 나가는 찰나의 움직임을 잡아내어 그림 하나에 이야기가 실려간다.
■ 왼쪽 7번 그림 - 여자가 겉모습은 꾸밀 줄 알아도 성격을 가다듬을 줄 모른다. 마음이 엉망인데 꾸미는 것 무슨 소용있나?
여사잠도(女史箴圖), 동진시대, 비단에 채색, 24.8×348.2㎝, 당 모사본,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 왼쪽 8번 그림 - 영광의 길은 험하고 멀어도 (먼지로 산을 쌓는 것처럼 어렵고), 망하는 길은 순식간이다.( 활사위를 당기는 것 같이 쉽다).
■ 왼쪽 9번 그림 - 왕이 가마 위의 창문에서 부인을 보고 있다. “부인 왜 가마 안 타?” 여사잠도 훈계의 내용은 훌륭한 왕은 행차시에 충신을 옆에 두고 그저 그런 왕은 후궁을 옆에 둔다. 나의 편안함보다 남편의 입신영명을 먼저 두어야 한다는 훈계이다. 가씨부인은 전용가마가 여러개 있었다.
여사잠도(女史箴圖), 동진시대, 비단에 채색, 24.8×348.2㎝, 당 모사본,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 왼쪽11번 그림
■왼쪽 12번 그림 - 첩인 펭부인이 남편인 왕이 다칠까봐 곰을 막는다. 왕이 동물을 보고 있는데 갑자가 곰이 튀어나오자 작은 펭부인이 용감하게 나서는데 또 다른 후궁은 왕 뒤에 숨어 두 첩의 행동을 대비 시킨다. 한편 가씨는 남편을 죽일 생각만 했다.
낙신부도(洛神賦圖)
‘낙신부’ 중 <신녀>라는 시의 원문
洛神賦 (曹植)
遠而望之 , 皎若太陽升朝霞 ;
迫而察之 , 灼若芙?出? 波 .
?纖得衷 , 修短合度 . 肩若削成 , 腹如束素 .
延頸秀項 , 皓質呈露 . 芳澤弗加 , 鉛華弗御 .
雲?峨峨 , 修眉聯娟 . 丹唇外朗 , 皓齒內鮮 .
明眸善? , ? 輔承權 .
“멀리서 바라보면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 하늘처럼 빛나고,
가까이서 보면 흰 연꽃이 녹빛 물 위에 피어난 것 같네.
몸매는 날씬하고 키도 알맞아 어깨선은 깎은 듯 매끄럽고
허리에는 흰 비단을 두른것 같아.
목덜미는 길고 갸름하며 흰 살결을 드러내고 있고
향기로운 연지를 바르지도 않고 분도 바르지 않았네.
구름같은 모양으로 머리는 높직하고 길게
그린 눈썹은 가늘게 흐르는구나.
빨간 입술은 선연하게 눈길을 끌고 하얀 이는
입술 사이에서 빛난다.
초롱한 눈은 때로 곁눈질 치고 보조개는 귀엽기 그지없도다.”
낙신부도(洛神賦圖), 견본(絹本), 27.1 cm X 572.8 cm, 베이징 고궁 박물관 소장.
낙신부도(洛神賦圖), 견본(絹本), 27.1 cm X 572.8 cm, 베이징 고궁 박물관 소장.
물 위를 춤추듯 걸어 다니는 낙수의 여인이 오른쪽에 있는 조식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조식이 묘사한 미인의 아름다움이 기러기, 용, 국화, 소나무, 구름 등의 구체적인 형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말을 쉬게하는 장면
<낙신부도>는 동진의 유명화가 고개지(顧恺之)가 조식(曹植)의 걸작 <낙신부>를 바탕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전 권은 3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조식(曹植)과 낙신(洛神)의 진실한 사랑의 기승전결이 분명히 묘사되어 있다. 인물들도 조밀하고 적절히 배치되어 있으며 다른 시공간에서 자연스럽게 교체, 중첩, 교환되며 산과 물의 경치가 묘사되어 있어 공간미가 넘쳐난다. 붓 끝의 선이 살아 있으며 그림 전체가 섬세하고 소박하게 묘사되어 초기 산수화의 특징을 잘 구현하고 있다
시종들에게 부축을 받고 서 있는 조식이 낙수에서 노닐고 있는 여신을 발견한다.
부채를 들고 화면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여신의 모습은 한 마디로 '수골청상(秀骨淸像)'이다. 갸름한 얼굴의 수려한 모습이라는 뜻이다. 고대 미인의 전형이다. 바람에 휘날리듯 유연하면서도 부드러운 윤곽선은 마치 봄 누에가 실을 토하듯 끊이지 않고 가늘게 이어져 '춘잠토사(春蠶吐絲)'라고 불리운다.
이런 필법은 고개지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낙신부도>는 물론이고 <열녀인지도>, <여사잠도>에서도 발견된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신의 자태를 보고 마음이 흔들린 조식은 자신이 사모하는 마음을 알리고자 구슬 노리개를 풀어서 전해준다.
(고개지가 그린 <낙신부도>의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대신 송대와 명대 때 보고 베낀 여러 본의 모사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구슬노리개를 주는 장면은 요녕성박물관에 소장된 모본에 실려 있다.)
조식이 여신에게 마음의 징표로 구슬노리개를 주고 있다.
그러나 한번 실연의 상처를 간직한 조식은 아름다운 그녀를 곁에 두고서도 쉽사리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다시 버림받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가슴 속에 간절한 마음을 지녔으나 머뭇거리며 의심하는 조식의 마음을 여신인들 왜 모르겠는가. 아무 말없이 그저 그의 곁을 배회할 뿐이다. 이리 저리 헤매이며 아름다운 옷자락을 나부끼는 여신의 모습은 날렵하기가 나는 새 같고 아름다운 얼굴이 눈부셔 식사를 잊을 정도였다.
다음 장면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여신과 부질없는 걱정으로 갈등하며 앉아 있는 조식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때로 여자는 사랑에 목숨을 건다. 남자가 사랑에 목숨을 걸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밖에 난 몰라’ 하며 여자가 몸을 던질 때, ‘눈물은 묻어둬라. 당분간은 일만 하자’며 이성적일 수 있는 사람이 남자다. 안타까움과 망설임이 교차하는 동안 주어진 시간은 어느 새 다 지나갔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여신과는 반대로 부질없는 걱정으로 갈등하며 앉아 있는 조식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오랜 갈등 끝에 그녀에게 마음을 허락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가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는 왜 몰랐을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이럴 줄 알았더라면 버림받을까 봐 염려하고 두려워 할 시간조차 아껴 사랑했을 텐데 후회는 항상 뒤늦게 찾아온다. 충분한 사랑을 받았건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그의 눈 앞에 이별을 알리는 존재들이 속속 등장한다.
낙수의 여신답게 바람신은 바람을 거두고 강의 신은 물결을 잠재운다. 그녀를 모시고 갈 전령들은 북을 울리고 노래를 부르며 문어를 띄워 수레를 지키고 옥방울을 울리며 기다린다. 이윽고 여신은 여섯 마리 용이 수레를 끌고, 고래가 뛰어올라 바퀴를 돌보며, 물새가 날아올라 호위하는 가운데 북쪽 물가를 넘어 남쪽 산을 향해 떠난다.
채워지지 못한 여신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떠나가면서 여신은 흰 고개를 돌려 맑은 눈동자로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열어 천천히 말한다. 사람과 신의 길이 다르매 아름다운 나날에 함께 하지 못함을 원망하노라고. 비록 깊은 곳에 있을지라도 이 마음 긴히 군왕께 있겠노라고 눈물을 적시며 떠나간다.
시간이 되자 낙수의 여신은 여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떠난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 지를. 시인은 배를 타고 다니며 그녀의 흔적을 찾아보는가 하면, 밤새 잠들지 못하고 새벽이 될 때까지 이슬을 맞고 앉아 있다. 이윽고 마부에게 명하여 수레를 내게 하고 자신의 임지로 돌아가기 위해 말고삐를 잡았으나 서운함을 감추지 못해 되돌아보는 것으로 조식의 <낙신부>는 끝을 맺는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조식도 임지로 떠난다.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자기도 모르게 빠져드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 있다. 한 사람만을 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살고 싶어도 운명의 장난을 피할 수 없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목숨까지 요구하는 참혹한 사랑도 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끊어낼 수 없고 속수무책 받아들이고 앓아야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예고 없이 찾아 와 무례하게 마음을 훔쳐가도 억울하다는 하소연 한 번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그것도 사랑이다. 여기, 사랑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사랑을 감추어야만 했던 시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 얘기를 듣고 자신의 일처럼 마음 아파했던 화가가 있다. 그들의 사랑 얘기를 들어보자.
낙수의 여신을 만나다
“그대들도 보이는가? 그녀는 누구이기에 저토록 고운가?”
“제가 듣기로는 낙수의 신을 복비(宓妃)라 하는데 군왕께서 보신 이가 그이가 아닐까 하나이다. 저희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그 모습이 어떠한 지 소인도 궁금하옵니다.”
“그 자태는 놀란 기러기처럼 날렵하고 노니는 용처럼 유연하구나. 가을의 국화처럼 빛나고 봄날의 소나무처럼 무성하며 엷은 구름에 쌓인 달처럼 아련하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벼우니, 멀리서 보면 아침 노을 위로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고 가까이서 보면 푸른 물결 위로 피어난 연꽃과 같도다.”
조식(曹植:192-232)의 「낙신부(洛神賦)」는 그렇게 시작된다. 내용은 조조의 셋째 아들인 조식이 낙수를 지나가다 낙수의 여신과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 인간과 신의 길이 달라 서로 헤어진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읽은 동진(東晋:371-420)의 고개지(顧愷之, 345~406년경)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낭만적으로 만든 작품이 두루마리로 된 <낙신부도>다.
화면 곳곳에 시적인 정취가 넘쳐나는 <낙신부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는 조식이 낙수의 여신을 만나 아름다움에 놀라는 장면이고, 두 번째는 서로 감정을 나누는 장면, 마지막 세 번째는 이별 장면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두루마리 속에 펼쳐진 애달픈 사연
조식 일행이 낙양에서 임지로 돌아가는 길에 경산이라는 곳에 이르러 해가 저물었다. 이에 수레와 말이 지쳐 물가에 수레를 쉬고 풀밭에서 여물을 먹이는 중이었다. 버들숲에 앉아 흘러가는 낙수를 바라보던 조식은 문득 바윗가에 서 있는 여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2)는 시종들에 둘러싸여 서 있는 조식을 그린 것이고, 조식의 시선이 향하는 왼쪽 (그림1)에는 그의 앞에 홀연히 나타난 여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두 명의 시종이 조식의 팔을 부축하고 서 있는 군왕의 모습은 왕실의 인물을 묘사할 때 쓰는 도상 형식이다.
여신의 주변을 살펴보면 놀란 기러기, 노니는 용, 가을 국화, 봄날의 소나무, 엷은 구름, 바람, 태양 등으로 묘사된 시적인 은유가 고개지의 붓끝에서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두루마리 그림의 특성상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개되는 <낙신부도>는 한 화면에 같은 인물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야기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배경으로 등장하는 산과 나무와 강에 의해 적절히 구획되어 있다.
낙수의 여신과 견황후
조식이 지은 「낙신부」는 표면상으로 보면 시인과 여신의 사랑 얘기다. 자가 자건(子建)인 조식은 이미 열 살 때 십만 자나 되는 글을 외울 정도로 총명하고 시의 재주가 뛰어났다. 북제 때의 문장가인 사령운(謝靈運)은 조식을 가리켜, "천하의 문장이 다만 열 되인데, 자건이 홀로 여덟 되를 얻었다.'고 평가했다. 그런 조식이고 보면 낙수에 얽힌 복비의 이야기를 모를 리 없다. 낙수의 여신을 노래한 시나 부는 조식의 작품이 아니라도 얼마든 지 많다. 그런데도 굳이 조식의 「낙신부」가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고 화가의 손을 움직여 붓을 들게 한 것은 또 다른 사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조식은 형 조비의 아내 견후를 사랑했다. 아무리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지만 시동생이 형수를 사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불륜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위태로웠지만 두 사람은 시동생과 형수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도 애써 무시하며 살았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애틋한 눈빛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무관심한척 하는데도 어쩔 수 없이 얽혀드는 뜨거운 시선을 알아차린 것은 두 사람이 아닌 조비였다.
조조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조비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 조식의 재주에 시기심과 열등의식을 느끼며 살았다. 그런데 황후인 견후의 마음까지 동생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틈만 나면 조식을 죽이려고 했다. 조식은 그런 형의 눈을 피해 변방으로 쫓겨나서도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조식이 미워 그를 죽이려고 한 조비는 동생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 한 수를 지으라 명했다. 시제(詩題)는 ‘형제’인데 시 안에 형제라는 단어를 한 마디도 써서는 안되는 조건이었다. 그 때 지은 시가 ‘칠보시(七步詩)’ 즉 ‘일곱 걸음에 지은 시’다.
‘콩을 삶는데 콩대를 때니/
콩은 솥 속에서 울고 있네/
본디 같은 뿌리에서 났으면서/
들볶기가 어찌 저리 심할까.’
조비의 다른 동생들은 죽임을 당했는데 시가 그를 살렸다.
조식은 살아났지만 견후는 달랐다. 조비의 사랑을 독차지한 후비 곽씨에게 황후 자리를 빼앗기고 갱형(坑刑)을 당했다. 입 속에 쌀겨를 메우고 머리칼로 얼굴을 덮은 채 땅 속에 산 채로 생매장당한 것이다.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한 조식이나 질투에 눈이 멀어 아내를 생매장시킨 조비나 불행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 사람을 땅에 묻은 후 두 사람은 화해를 한 것일까. 아니면 이젠 죽어 어쩌지 못할 테니 시혜를 베푼 것일까. 조비는 견후의 침실에 있던 그녀의 베개를 아우에게 준다. 자신과 같은 침실을 쓰면서도 돌아 누워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는 동생을 생각했을 견후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라도 인정하겠다는 뜻이었을까. 애증에 사로잡힌 조비의 행동은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낙신부」는 견후가 죽었다는 부름을 받고 황궁에 다녀온 조식이 죽은 연인의 유품인 베개를 받고 임지로 돌아오는 길에 지은 글이다. (낙수의 여신은 베개 대신 부채를 들고 있는데 그녀가 떠나간 후 그 부채는 조식이 들고 있다.)
그렇다면 낙신의 여신이 어떻게 견후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원래 이 글의 제목은 「감견부(感甄賦)」즉 견후를 만난 후 감회를 쓴 글이었다. 그러니까 조식이 만난 낙수의 신은, 낙수를 건너다 물에 빠져 죽어 낙수의 여신으로 거듭난 복비가 아니라 견후였다. 이것을 후에 황제가 된 견후의 아들 조예가 「낙신부」로 이름을 바꾸도록 명했다고 한다. 조예로써는 숙부가 어머니를 사랑해서 지은 시를 사람들이 아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그 불가해한 사랑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저 불륜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것만이 두려웠겠지.
사랑, 그 불가해한 정념덩어리
한 생애를 두고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인생은 편안할 것이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누구나 편안한 사랑을 갈망하지만 어떤 사랑이 찾아 올 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의 인생은 그에게로 향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고, 그녀에게 가는 길이 끝났을 때 우리의 인생도 끝이 난다. 사랑을 보내주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의 운명이다.
내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랑을 위한 길이라면 죽음의 길이라도 걸어가야 하는 것이 사랑이다. 견후(여신)는 당당히 사랑의 길을 걸어갔고, 조식은 미적거리다 사랑을 놓쳤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한 견후(여신)는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지만 사랑이 왔을 때 사랑을 살지 못한 조식의 마음속에는 회한과 아쉬움만이 남았다. 하긴, 그 회한이 남았기에 오늘날 우리가「낙신부」를 읽고 <낙신부도>를 감상할 수 있지만 말이다.(끝)
열녀인지도권(烈女仁智圖券)
<열녀도(列女图)> 또는 <열녀인지도(列女仁智图)>라고도 부른다.견사본(绢本)이며, 묵필로 착색했다. 세로 25.8cm, 가로 417.8cm다. 열녀도는 원래 동진시기 고개지(顾恺之)의 작품으로 이를 남송 사람이 모사했다.
한나라 성제(汉 成帝)는 주색을 탐하고, 조비연(赵飞燕)자매를 총애했으며, 조정의 권력은 외척의 수중에 떨어져 류씨 정권이 위험에 처했다. 초 원왕(楚 元王) 4대손 손광록 대부 류향(刘向 기원전77-기원전6年)은 이런 상황을 겨누어, 예로부터 시서상 기재된 현비, 정부, 총희 등 황실여인들의 자료를 모아 <열녀전> 한권을 편찬하여 한 성제에게 올려, 교훈을 명심하여 류씨정권 보존하고자 하였다.
당시 열녀전에는 부녀의 도덕규범과 국가 통치,혼란의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를 담고 있었으며, 모의(母仪), 현명(贤明), 인지(仁智), 정순(贞顺), 절의(节义), 변통(辩通), 얼폐(孽嬖) 7단락으로 구성되어으나, 그중 인지편 일부만이 남아 있다.
한나라 류향(刘向)의 저작 <고열녀전(古列女传)>에 근거하면 인물은 창작되었고, 내용은 부녀자의 지혜와 미덕을 찬미하는 것이다. 송인의 글(题跋)에 근거하면 원래 15편이 있었으며, 남송시기에 이르러 이미 완전치 못했고, 현재 그림상에는 28인이 있은데 8 단으로 나누어지며 각 단마다 인물명과 찬사가 적혀 있다.
비교적 굵은 붓을 이용한 철선묘사로 선은 묵직하고, 인물 얼굴과 옷 주름 등에는 훈염법을 사용했다. 배경은 없으나 그림 사이에 병과 기둥 등 물건이 그려져 있다.
고개지는 인물화 창작상에서 '형태로 정신을 묘사(以形写神, 悟对通神)'하고자 했으며, 이 그림상 인물간의 상호관계를 처리하고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데 생동감있고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위령부인(卫灵夫人)"의 장면상에서도 보면 위령공과 부인의 대화장면에서 그는 내심 부인이 선량하고 총명함 보이도록 표현했다.
열녀인지도,두르마리 비단에 담채, 25.8 cm X 470 cm, 베이징 고궁박물관
<열녀인지도>는 고개지 초상화의 성취도를 보여준다 , 유향의 <열녀전> 중의 사건을 주재로 그린 그림이다. 원본은 약 천년 전에 소실되었고, 송대의 모본이 10단 중 7단이 수선을 통해 고궁에 보존되었다. 이전 시대인 한대의 고정적이고, 어색한 표현방식에서 발전되었으며 병렬구도 형식의 도입으로 공간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인물의 상호관계, 인물의 표정 형식화, 구상의 표현 기술 등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디.
晉朝畫家顧凱之所作《列女仁智圖》中叔向、叔魚母子部分,
전 고개지, <열녀인지도(부분)>,두루마리, 송 모본, 비단에 담채, 25.8×470cm. 고궁박물원:
고개지의 인물은 바람에 날리듯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윤곽선은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사족 -화성(畵聖)과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307-약365)가 서성(書聖)이라면, 고개지는 화성(畵聖)이라 부른다. 글씨와 그림에서 성인(聖人)의 반열에 들 정도로 뛰어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개지는 화가이자 탁월한 비평가였는데 그 이전에는 한 사람이 작가와 이론가를 겸한 예가 없었다. 전신(傳神:정신을 전하는 것)을 회화 비평의 최고 기준으로 삼은 고개지의 이론은 나중에 사혁(謝赫:500년경-535년경 활동)이 정립한 ‘6법(六法)의 바탕이 되었다.
<논화(論畵)>, <위진승류화찬(魏晉勝流畵贊)>, <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등의 화론(畵論)을 남겼는가 하면, <열녀인지도(列女仁智圖)>, <여사잠도(女士箴圖)>, <낙신부도(洛神賦圖)>등의 두루마리 그림을 남긴 고개지는 사안(謝安:320-385)이라는 사람으로부터 “그대의 그림은 사람이 생겨난 이래 일찍이 없었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의 그림이 얼마나 흡인력이 있었는 지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그가 와관사라는 절에 <유마힐상>을 그렸다. 그림이 완성되자 인물의 표정이 얼마나 생생하던 지 얼굴에서 나온 빛이 온 절을 환하게 비추어 시주하는 사람들이 절 안에 가득 차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 한다.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를 보면 고개지에 대한 평가가 자세히 실려 있다. 그는 사람을 그리면서도 수 년동안 눈동자를 찍지 않았다고 하는데, 전신(傳神)의 요체가 눈동자에 있기 때문이었다. 사지의 육체가 잘 생기고 추한 것은 작품의 오묘한 작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나 정신을 전하여 인물을 그리는 것은 눈동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손으로 5현을 타는 것은 그리기 쉽지만 돌아가는 기러기를 보내는 것은 그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낙신부도>에서 여신이 속마음을 감춘 채 ‘차마 떨치고’ 가는 모습이 아련하게 느껴지는 것도 고개지의 이런 화론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열녀인지도>와 <여사잠도>에서 유교사회에서 여성이 지켜야 할 도리나 원칙을 담아 그렸다. 그러나 같은 인물화이면서도 <낙신부도>는 당시의 가치기준과는 전혀 다른(오히려 상반되는)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고개지가 조식의 시에 매료되었다는 원인 못지 않게 당시 유행하고 있던 지괴(志怪) 소설에 크게 빠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괴소설은 초현실적인 사건을 기록한 괴담, 괴이소설 쟝르를 말한다. 고개지가 살았던 동진은 북중국을 이민족에게 빼앗기고 강남으로 쫓겨와서 세운 나라였다. 불안과 혼란이 뒤섞인 망명정부에서 사람들은 현실 도피적인 경향이 매우 강했다.
때문에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든지'라는 의식이 지배적이었다. 동진 때 간보(干寶)가 지은 『삽신기』나 곽박의 『현중기』는 모두 유령과 도깨비가 날뛰는 세상에 대한 얘기와 선계(仙界)를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고개지가 여신과 인간의 사랑얘기가 담긴 조식의 <낙신부>에 솔깃했던 것도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가 한 몫 했을 것이다. 아니라면 혹시 고개지도 조식의 경우와 비슷한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었던 것일까. 모를 일이다.(조정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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