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회화 주제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그렸던 산수화와 함께 사대부들이 마음을 수련하는 사군자화나 꽃, 새나 곤충 등이 있다. 식물을 주제로 그린 그림 중 사군자화(四君子畵)는 선비의 정신을 상징하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그린 그림을 말하며 선비들이 교양으로 즐겨 그렸던 주제이다. 사계절을 대표하는 사군자의 고결한 모습 때문에 희노애락의 감정을 담아 표현하였다. 사군자화를 잘 그렸던 대표적인 화가로는 대나무를 잘 그려 조선 3대 묵죽 화가로 손곱혔던 이정, 유덕장, 신위가 있으며, 이들이 그린 작품들을 중앙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사군자 이외에 문인화로 다양한 꽃그림도 그렸는데 새나 곤충과 함께 그려졌다. 꽃그림은 조선후기에 많이 그려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기존의 간결하고 대담하게 그렸던 것도 있지만, 다양한 채색을 써서 세밀하고 화려하게 그린 그림들이 많이 남아있다. 꽃을 많이 그린 화가로는 조선초기의 신사임당과 후기의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이다. 꽃과 함께 새, 동물들을 그린 그림을 화조.동물도라 한다. 이들 그림은 산수와나 사군자화와는 달리 화려한 채색을 사용하거나 동물을 생동감있게 표현하는 등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중앙박물관에서 여러 점의 화조.동물도 중에서 신윤복이 그린 <닭싸움(鬪鷄圖)>가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다. 풍속화에서 보여준 섬세한 표현이 그대로 잘 드러나 있다.
사군자화(四君子畵)
사군자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군자에 비유하여 일컫는 말이다. 이른 봄의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속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풍기는 난초, 늦가을 첫추위를 견디며 늦게까지 꽃을 피우는 국화,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지니는 대나무 등은 어떤 시련에도 굽히지 않는 군자의 정신을 나타낸다. 사철 내내 변함없이 고결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화가들은 사군자화에 희로애락의 감정을 담아 표현하였다. 사군자화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시기는 9,10세기 무렵이다. 중국 송.원나라에서 들어와 고려시대 왕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전문화원을 선발하는 시험에서 대나무 그림을 1등 과목으로 삼을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출처:중앙박물관>
매화, 조희룡, 19세기, 종이에 색. 6폭의 병풍에 그려진 대작으로 활짝 핀 매화를 상당히 화려하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조선말기 문인화가였던 조희룡은 누구보다도 매화를 사랑한 인물이었다. 매화에 대한 각별한 애호로 여러가지 일화를 남겼고, 많은 매화 그림을 그렸다. 호도 우봉과 호산 외에 매수나 매화두타를 사용하여 매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조희룡의 서예나 난초 그림은 스승인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매화 그림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보여 주었다. 두 그루의 매화가 가로로 긴 화면 전체에 펼쳐진 모습으로 매화나무는 용이 솟구치는 듯 구불거리며 올라가며 그 줄기들은 좌우로 긴 가지를 뻗어내고 가지에 백매와 홍매가 가득 피어 있다. 매화들은 꽃 봉오리, 반쯤 핀 꽃, 활짝 핀 꽃 들을 점을 툭툭 찍어 표현하고, 꽃받침과 꽃술을 농묵으로 나타내었다. 줄기의 내부에는 필선을 가하지 않고, 윤곽선 부분에 농묵으로 먹점을 찍어 입체감을 살렸다. 작품의 오른편에는 자신의 매화그림의 독창성을 강조하는 제사를 적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파초도(芭蕉圖), 심사정(沈師正, 1707~1769),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파초를 호방한 필치로 힘있게 그렸다. 세밀함보다는 굵고 힘이 넘치는 그림이다.
조선 후기의 화가 심사정은 산수, 인물, 화조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인 화가였다. 시원하고 아름다운 잎을 지닌 파초는 일찍부터 관상수로 또한 화조화의 소재로 사랑받았다. 특히 종이 대신 파초잎에 시를 썼다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서예가 회소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어, 파초는 문인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심사정은 커다란 잎을 늘어뜨린 파초와 괴석을 한쪽에 배치하고 그 옆에 국화와 난초를 그려 넣었다. 국화와 함께 그린 파초는 가을날의 정취를 전해준다. 파초, 국화, 난초, 괴석 등 문인의 정서를 나타내는 소재를 심사정 특유의 호방한 필치와 능숙한 묵법으로 표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대나무, 묵죽도(墨竹圖), 이정(李霆, 1544~1626), 1622년, 비단에 먹. 조선3대 묵죽화가로 손꼽히는 이정이 그린 작품이다. 대나무 잎에서 곧은 힘이 넘친다.
이정은 세종의 후손으로 호는 탄은이다. 임진왜란때에 왜적의 칼에 맞아 오른팔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 다음부터 붓을 잡으면 신이 도와주는 것처럼 격조가 한층 높아졌다고 한다. <천계임술춘>의 관지가 있어서 1622년, 그의 나이 81세 때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대나무, 유덕장 (柳德章, 1675~1756), 1748년, 종이에 먹, 이 그림은 8폭 중 2폭으로, 1748년 74세 때 그린 그림이라고 밝혔다. 양쪽에 눈이 소복히 쌓인 설죽을 그린 것이다. 여유로운 구성과 담백하고 왕성한 필기, 농암의 적절한 조화 등이 특징이다.
난초, 묵란도(墨蘭圖), 민영익(민영익, 1860~1914), 19세기말, 종이에 먹. 시와 글씨,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던 민영익의 난 그림이다.
시와 글씨,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던 민영익의 난그림이다. 짙은 먹을 써서 난 잎의 끝을 뭉툭하게 뽑아낸 것이 특징이다. 그림 좌측에 ‘민원정사의(閔園丁寫意)’라고 적혀 있고 ‘천심죽재(天心竹齋)’라는 주문방인이 찍혀 있다. 원정과 천심죽재는 민영익의 호인데 천심죽재는 민영익이 중국 상해 망명시절에 기거하던 집의 이름이기도 하다. 화면 중간에는 망명시절 사귄 벗인 중국 청나라 서화가 포화(蒲華, 1832~1911)의 제시(題詩)가 적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대나무, 풍죽도(風竹圖), 신위, 조선 19세기 전반, 비단에 먹, 조선 3대 묵죽화가인 신위가 그림 대나무 그림이다.
조선후기 문인화가 신위가 그린 쌍폭의 묵죽도 대련으로 신위는 이정, 유덕장과 함께 조선의 3대 묵죽화가로 손꼽힌다. 우측에 있는 대나무는 화면 좌측 하단에서 우측 상단을 가로질러 힘차게 뻗은 대나무를 그렸고, 좌측의 대나무는 화면 우측에서 좌측 상단으로 뻗어 내려 서리와 눈발을 맞아 처연한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신위는 특히 화면에 제시(題詩)를 잘 썼는데, 여기에서도 제시를 통해 각각 봄날의 신죽(新竹)과 가을의 고죽(故竹)을 묘사하였음을 보여준다. 우측에 적혀 있는 글은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문인 임고도(1580~1666)가 쓴 ‘희제(喜齊)’라는 화제(畵題)를 옮긴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대나무, 묵죽도(墨竹圖), 유덕장, 조선 1751년, 종이에 먹,
이정, 신위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알려진 수운(峀雲) 유덕장의 작품이다. 바위를 앞에 두고 자라난 일군의 대나무가 표현되어 있다. 잎은 작고 모두 하늘로 향해 있으며 이제 막 올라오는 죽순도 그리는 등, 새로 자라나고 있는 풋풋한 대나무를 묘사하였다. 화면 좌측 상단에는 “신미년(1751) 5월에 팔십 노인 유덕장이 젊은 벗 김자송을 위해 그렸다”는 발문이 있어 노년의 유덕장이 젊은이에게 선물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매화도(梅花圖), 이공우(1805~1877),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조선말기 문인화가인 이공우는 매화 그림으로 유명하였고 김정희, 권돈인(1783~1859) 등과 교유했던 인물이다. 동 시기 역시 매화로 명성이 높았던 조희룡(趙熙龍, 1789~1866)과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하나,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 않은 편이다. 세로로 긴 화면을 가득 채운 6폭의 대형 매화 그림으로 다양한 구도에 갖가지 형태의 매화를 묘사하였다. 굵지 않은 가지들이 자유롭게 뻗어 있거나 끝이 부러진 줄기를 다양한 구도로 여러 폭에 나누어 그리는 방식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매화도의 형식 중 하나이다. 각 폭에 적은 제시(題詩) 역시 전통적인 매화의 운치를 노래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묵매도(墨梅圖), 전 어몽룡(漁夢龍, 1566~1617), 조선 17세기말~18세기초, 비단에 먹, 간략하면서도 이른봄 꽃을 피우는 매화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꼿꼿이 솟아오른 가는 가지와 연륜이 오래된 굵고 곧은 가지는 매화의 선비다운 기품을 잘 드러낸다. 또한 가느다란 가지에 듬성듬성 핀 매화는 왼쪽 위에 둥그렇게 떠 있는 달빛과 어우러져 고아한 멋을 더한다. 인장이나 서명이 없어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화풍상 어몽룡의 작품으로 오랫동안 전해져 왔다. 어몽룡은 호가 설곡, 설천 등으로, 진천현감을 지낸 선비화가이다. 어몽룡의 매화는 이정의 대나무, 황집중(黃執中, 1533~?)의 포도 그림과 함께 조선중기의 삼절로 꼽힌다. <출처:중앙박물관>
묵매도(墨梅圖), 홍수주(洪受疇, 1642~1704), 조선 1704, 비단에 먹
매화와 대나무, 포도그림으로 유명한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홍수주의 묵매도로, 밑둥 부분은 부러진 채 줄기가 ‘S’자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절매(折梅)이다. 줄기 끝은 거의 부러져 날카로운 부분을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가지에는 새로 난 또는 다른 가지가 위를 향해 곧게 올라가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절매는 당시에 즐겨 그려졌던 주제로, 홍수주의 작품에서는 줄기가 더욱 거칠고 위로 뻗은 가는 줄기 역시 날카롭게 표현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름을 지운 흔적이 있지만 “갑신년(1704) 가을 친구를 위해 호정에서 그렸다”는 관지가 남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꽃그림 이야기
꽃그림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서 생활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조선시대 꽃그림은 보통 새나 곤충, 동물들과 함께 그려지는데, 그 화풍은 수묵을 주로 써서 간결하고 대담하게 그린 것과 다양한 채색을 써서 사실적이면서도 세밀하게 그린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꽃을 많이 그린 대표적인 화가로는 조선초기의 신사임당, 후기의 심사정(1707~1769년), 김홍도, 말기의 신명연(1809~1886년), 장승업(1843~1897년) 등을 들 수 있다. 모란, 국화, 원추리, 백합, 수선화, 수국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이 화가의 붓으로 화폭에 옮겨졌다. 그중에서도 채색으로 그린 꽃그림은 다른 분야의 그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각적인 참신함과 구성력을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신명연이 그린 수선화, 신명연, 19세기, 비단에 채색. 수선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화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꽃이었던 것 같다.
이 그림은 꽂가지만을 가까이에서 확대하여 산뜻하게 채색함으로써 참신한 느낌을 준다. 수선화를 그린 이 그림은 오른쪽의 남계우의 수선화와 구도나 배치가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출처:중앙박물관>
남계우가 그린 수선화, 19세기, 비단에 채색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소년 나르시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껴안으려다가 연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뒤 연못에서는 예쁜 꽃 한송이가 피었는데, 사람들은 그 꽃을 ‘나르키소서(Narcissus: 수선화)’라고 발렀다. 나르시즘이라는 말은 자기애라는 뜻으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수선화의 꽃말은 고결, 자존심이다. 봄이 오기 전 추운 겨울 날씨에도 수려한 자태를 뽐낸다해서 설중화(雪中花, 눈속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꽃이다. 고결하고 고고한 모습에 추사 김정희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나보다. 그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겨울의 추위와 모진 바람을 이겨내고 향기롭게 피어나는 수선화를 바라보며 자신의 울분과 외로움을 달랬다고 전한다. 은쟁반에 금잔을 하나 올려놓은 형상이라고 해서 ‘금잔은대’라고도 한다. 신명연, 남계우 등 19세기에 활동한 화가들이 수선화 그림을 많이 남기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노귤도(盧橘圖), 정충엽(鄭忠燁, 1724~1800 이후), 1756년, 종이에 엷은 색. 18세기 작품으로 서양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화려하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정충엽은 조선후기의 중인 화가로 호를 이호 또는 이곡이라고 썼다. 강세황과 교유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산수화와 화조화로 이루어진 화첩 가운데 한면으로, 화첩 마지막 면에 ‘병자년 여름에 그리다’라고 쓰여 있어 1756년 즈음에 그린 작품으로 추정한다. 괴목(槐木)으로 만든 과반(果盤)에 놓인 노귤을 그리고 화면 윗부분에 시를 써 넣었다. 윤곽선 없이 그린 노란색 귤과 싱그런 초록 이파리, 과반에 엷게 베푼 분홍색 선염이 산뜻한 색채감각을 보여준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 ‘정충엽인’과 그의 자 ’일장(日章)’을 새긴 도장을 찍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서화첩, 신위, 1837년, 종이에 먹 또는 엷은 색
신위는 조선말기를 대표하는 문인 가운데 한 명으로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로 불렸다. 특히 대나무를 즐겨 그렸는데, 강세황(1713~1791)에게 죽석 그림을 배웠고, 김정희와는 서로의 예술관에 깊이 공감하여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 화첩은 신위가 과거에 합격한 남병철의 부탁으로 1837년에 제작한 것이다. 모두 12면으로 낙지론(樂志論, 중국 후한 말의 유학자 중장통(仲長統, 179~219의 글)과 『사기』중 「노자열전(老子列傳)」이 쓰여져 있고, <십죽재화보(十竹齋畵譜)>를 임모하여 그린 매, 죽, 난, 석과 산수화가 포함되어 있다. 신위는 강세황의 영향으로 <십죽재화보>를 임모하면서 자신의 묵죽화풍을 완성해 갔는데, 이 화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꽃가지, 화훼도(花卉圖), 신명연(申命衍, 1809~1886), 19세기, 비단에 엷은 색 – 난초, 원추리, 옥잠화,
등꽃, 수국, 연꽃,
금낭화, 양귀비, 황촉규,
신명연은 사대부 화가로, 조선 말기 서화가 신위의 아들이다. 그의 수묵 산수와 대나무 그림은 전통성이 강하다. 이에 비해 장미, 해당화, 수국, 난초, 연꽃 등 갖가지 꽃을 그린 이 그림은 19세기에 새롭게 퍼져 나간 색채에 대한 관심과 감각을 보여준다. 꽃송이를 가까이에서 크게 잡아 대담하게 표현한 구도가 참신하다. 산뜻하면서도 세련된 색조는 근대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수철은 조선 말기 화원화가로 자는 사암 호는 북산이다. 산수화와 꽃그림을 잘 그렸다. 추사 김정희가 김수철의 글미에 대해 “배치가 대단히 익숙하고 붓놀림이 막힘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간략한 구성과 별선, 수채화와 같은 밝은 채색, 고운 색의 시료 등 독창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조선말기 이색 화풍으로 분류한다. 금박이 뿌려진 하늘색 냉금지에 들초화와 모란을 그렸다. 좁고 긴 화면에 어울리게 꽃을 빠른 필치로 그려 배치하였다. 감각적인 필치와 색채는 김수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화조.동물화
화조.동물화는 꽃과 새, 동물을 그린 그림이다. 고려 후기 이규보의 시에 나오는 “새와 짐승 그림을 보고 즐기기 위해 좌우에 두네”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화조.동물화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꽃처럼 아름답게, 나무처럼 싱싱하게, 바위처럼 의젓하게 그리고 그 속에서 정답게 노니는 동물들처럼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또 나쁜 일에서 인간을 보호하고 복을 불러온다는 의미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수묵만으로 그린 문인 취향의 화조.동물화가 유행하는 한편,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채색을 사용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전통도 확립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닭싸움, 투계도(鬪鷄圖), 신윤복, 1808년, 종이에 엷은 색.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신윤복이 그린 그림이다. 화려한 색감과 함께 생동감이 넘치는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신윤복이 두마리의 싸움닭을 소재로, 잠깐 동안의 소강기를 포착하여 그렸다. 왼쪽의 화려한 깃털을 뽐내는 붉은 수탉은 꼿꼿한 자세로 상대에게 다가가고 있고, 반면 검은 수탉은 땅바닥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화면 상단의 시는 중국 송나라 시인 한유(韓愈)가 쓴 ‘투계(鬪鷄)’의 한 구절이며, 관지(款識)의 내용을 통해 신윤복이 1808년 음력11월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풍속화 뿐 아니라 동물화에도 능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산양, 작가미상, 조선전기, 비단에 색
양은 유순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상서로운 동물로 통한다. 예로부터 그려진 양은 지금의 우리에게 익숙한 면양(綿羊)이 아니라 이와 같은 산양이나 염소였다. 배경을 과감히 생략하고 얼룩무늬의 산양의 털끝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묘사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많이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양이 길상의 소재로 오래 전부터 애호되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화원별집>에 속한 용 그림으로, 석경의 도장이 오른쪽 상단에 있다. 한 발에 여의주로 보이는 것을 들고 있으며 구름 속을 뚫고 나와 비바람과 거친 파도를 몰아치는 모습이다. 석경은 용을 잘 그린 화가로 기록에 남아 있는 조선초기 화가다. <화원별집>은 그림 74점, 묵서 5점, 총 79점으로 구성된 조선후기에 하나의 화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화첩이다. 산수화, 고사인물화, 풍속화, 화조화 등으로 화목도 다양하며, 고려말 공민왕 그림 1점을 비롯하여 조선초기부터 18세기 화가의 그림까지 시기도 폭이 넓다. 가히 명작으로 엄선된 작품들로, 조선후기 회화 감상과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출처:중앙박물관>
꽃과 나비, 남계우, 19세기, 종이에 채색. 조선후기 나비 그림의 대가였던 남계우가 그린 그림으로 그의 나비에 대한 식견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남계우는 역대 문헌에 나오는 나비의 이름과 생태를 연구하고 실제 나비들을 채집하여 종과 특징들을 분류하고 연구한 것을 토대로 그림을 그린 화가다. 나비 그림을 잘 그려 ‘남호접’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 그림은 대련으로 제작된 나비 그림으로, 섬세한 꽃과 어우러지게 그렸다. 하단에는 자색모란과 백모란을 대칭적으로 배치하고 푸른색의 붓꽃을 그려넣었다. 사항제비나비와 호랑나비를 중심으로 흰나비, 부처나비 등을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섬세한 공필로 그려진 나비와 절지 형태의 꽃의 모습과 전형적인 3단 구성 등 남계우 호접도의 특징들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꽃가지, 신명연, 19세기. 이 그림은 꽃가지만 가까이서 확대하여 산뜻하게 채색함으로써 참신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묘사는 중국 청나라 화가 추일계의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물고기와 게, 어해도(魚蟹圖), 장한종(張漢宗, 1768~1815),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물고기와 게 등 수중 생물을 그린 그림을 어해도라고 한다. 화가 집안에서 태어난 장한종은 어해도를 잘 그리는 것으로 이름났다. 어려서 숭어, 잉어, 게, 자라 등을 사오면 비늘과 껍질을 관찰하여 실물과 똑같이 그렸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어해도를 보면서 물고기와 관련된 선현들의 교훈을 상기하거나 물 속의 세상처럼 여유있고 풍족한 생활이 계속되기를 염원했다. <출처:중앙박물관>
용맹한 호랑이, 맹호도(猛虎圖), 작가 미상,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동물의 왕이며 영물인 호랑이를 그린 그림은 힘과 용맹을 상징하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의미가 있다. 소나무 또는 대나무, 까치 등과 함께 그리기도 했지만 이 그림에서는 배경을 생략하고 화면에 꽉차게 호랑이만을 그렸다. 안으로 야무지게 말린 꼬리, 눈빛과 표정, 묵직한 발놀림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화가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가는 붓으로 꼼꼼히 그린 치밀한 묘사는 조선 후기 동물화의 특징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나무 위에 앉은 한 쌍의 까치,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 조속(趙涑), 17세기, 비단에 먹
조속은 먹으로만 꽃과 새 그림을 즐겨 그렸다. 화려하게 채색한 화조화와는 달리, 이러한 그림은 문인화가가 주로 그려 자연의 조화와 흥취를 드러냈다. 특히 조속은 성글고 거친 붓질과 간소한 구도로 겉모습보다 마음 속의 뜻을 중시하는 그림을 그렸다. 독특한 세모꼴의 잎이 달린 나무를 담담하게 그렸는데, 마주 보는 새들의 정겨운 모습에서 조선 중기 화조화의 특징인 시정을 느낄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는 새, 숙조도(宿鳥圖), 조지운(趙之耘, 1637~1691), 조선 17세기, 종이에 먹. 나무가지에 앉아 졸고 있는 새를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조진운의 자는 운지, 호튼 매창, 매곡으로 수묵화조화와 매화를 잘 그린 문인화가이다. 부친은 까치 그림으로 잘 알려진 창강 조속이고, 사촌형인 조종운 역시 서화에 능하였으니, 그의 가문은 조선 중기 화단의 뛰어난 문인화가 집안이었다. 매화가지 위에서 고개를 숙이고 자고 있는 새를 묘사하였다. 반원을 그리며 뻗어 나온 대나무와 매화나무 가지, 고요하게 졸고 있는 새, 경물을 최대한 생략하여 수묵으로만 이루어낸 화면은 간결하면서도 뛰어난 구성미를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새, 화조도(花鳥圖), 홍세섭(洪世燮), 19세기, 비단에 먹
홍세섭은 조선 말기의 문인화가로 자는 현경 호는 석창이다. 명문사대부가의 출신으로 아버지 홍별희는 공조판서, 작은 할아버지 홍학연은 공조판서와 영충추부사를 역임했다. 홍세첩은 49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부부승지에 올랐다. 아버지 홍별희도 그림을 잘 그려 부자가 합작을 하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잘 분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까치와 매화, 물가의 오리, 길가의 백로, 갈대와 기러기, 바닷가의 가마우치 등 계절감을 나타내는 풍경과 새를 조합했다. 수면 위를 헤엄치는 오리를 그린 유압도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채색없이 먹만으로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구도와 자유로운 화면 구성, 먹을 흩뿌리는 기법 등의 새로운 시도로 참신한 화조화의 세계를 이루어냈다. <출처:중앙박물관>
해돋이를 맞이하는 매, 욱해창응도(旭海蒼鷹圖), 정홍래(鄭弘來, 1720~),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매의 용맹한 습성은 일상생활에서 나쁜 것을 막아주는 벽사(僻邪)의 의미로 받아들여져 길상을 상징하며 예로부터 그림의 소재로 널리 애호되었다. 조선 후기의 도화서 화원이었던 정홍래는 매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하였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넘실대는 파도와 물결 위로 솟아 오른 해를 배경으로 바위에 앉아 있는 날카로운 눈매의 매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모든 일이 상승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위풍당당하게 해돋이를 맞이하는 매가 주변의 나쁜 것들을 물리쳐 주리라는 기원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꽃과 새, 화조도(花鳥圖), 전 채용신(蔡龍臣, 1850~1941), 20세기초, 비단에 색
병풍으로 만든 그림
10폭의 화면에 사계절에 피는 꽃과 열매 나무, 짝을 지어 노니는 새의 모습을 다채롭게 묘사한 작품이다. 첫번째 화면에 ‘석지(石芝)’와 ‘정산군수챙신인장’이라는 주문방인(朱文房印)이 있어 19세기말~20세기 초에 활동한 화가 채용신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화면에는 각각 꿩, 원앙, 공작, 제비 등과 다채로운 꽃나무들이 조합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화사한 채색에 길상을 의미하는 꽃과 새들로 가득 채우는 채용신의 화도도 병풍은 여러 점이 전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화사한 장식용 화조병풍을 애호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출처:중앙박물관>
연화백로도(蓮花白鷺圖), 이건(李健, 1614~1662), 조선 17세기, 종이에 먹
가을난 연못에 깃든 새들의 정경을 그린 그림이다. 금색지로 뿌려 장식한 종이에 엷은 먹으로 연잎을 그리고, 백로와 물총새를 한 쌍식 그려 넣었다. 주변에 짙은 먹으로 난엽처럼 갈댓잎을 그려 생동감을 주었다. 해원군 이건은 왕실 출신으로, 선조의 손자이며 자는 자강, 호는 규창이다. 시서화 삼절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영모화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그림 위쪽 비단에는 훗날 1711년 숙종이 그림을 감상하고 쓴 어제시(御製詩)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꽃과 새, 동물의 상징
원앙.물고기쌍(부부해로, 부부금실), 모란(부귀영화), 팔가조(효도),
패랭이꽃(장수), 매(화재, 수재, 풍재의 삼재 예방), 연꽃(다산.청결.연과連科-과거에 연달아 합격), 고양(70세노인),
맨드라미.닭(벼슬.명성), 나비(80세노인), 오리.백로(장원급제), 갈대와 기러기(노후의 안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