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5> 오위 '답설심매도': 천지의 마음을 찾는 붓의 춤

2017. 3. 25. 09:47美學 이야기



       

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5> 오위 '답설심매도': 천지의 마음을 찾는 붓의 춤

만취한 화가의 붓질에서 자유분방한 예술혼 숨쉬는 듯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5-12-08 19:23:46
  •  |  본지 20면

   


   

'답설심매도'에서 은자가 다리를 건너는 부분을 확대한 것. 은자 뒤를 시동이 금(琴)을 들고 따른다.
겨울과 봄의 경계(다리) 위에 은자 자신이 홍매화처럼 핀 듯하다.



- 예술적 오만과 치기에 사람들 열광
- 궁정생활도 못 견뎌 강호서 떠돌며
- 명나라 절파의 화풍 절정기 이끌어

- 어지러운 선들로 가득한 산과 바위
- 즉흥적이면서 강한 에너지 느껴져
- 후대 사대부 광태사학파라 조롱도

   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인 겨울 계곡의 저 아득한 적막! 그러나 그 켜켜이 쌓인 적막을 밀어내면서 겨울의 풍경 속으로 성큼 들어가 본다면 우리는 경악할지도 모른다.

설국의 고요 아래에 문득 날을 세운 사나운 바람이 계곡의 공기를 찢고, 한기(寒氣)를 움켜잡으려는 마른 가지들을 마구 헝클어 놓는다. 산과 바위들도 거칠게 주름을 흔든다. 명대 절파(浙派)의 절정기를 이끈 화가 오위(吳偉, 1459∼1508)의 '답설심매도(踏雪尋梅圖; 눈을 밟으며 매화를 찾아다니는 그림)'이다. 그는 절파의 창시자인 대진을 이어받아 절파의 화풍이 온 천하를 석권하게 만든다.

오위는 강하(江夏) 출신이다. 그의 조상들은 그 지방 관리를 지냈다. 서화에 능했던 부친은 연단술(煉丹術)에 빠져 가산을 탕진해 버렸다. 집이 파산하자 그는 다른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자라면서 스승도 없이 그림에 신묘한 재능을 보였고, 결국 직업화가가 되었다. 그가 성년이 되어 남경에 갔을 때, 그는 이미 남경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어 있었다. 남경 최고 권세가 성국공 주의(朱儀)는 항상 술에 취해 있으면서 황홀한 속필로 그림을 그려대는 그 괴상한 화가에게 매료되어 '소선(小僊; 작은 신선)'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답설심매도' 오른쪽 상단의 여백에는 "강하오소선(江夏吳小僊)"이란 서명이 있다. 강하 지방의 오 씨 성을 가진 작은 신선, 오위이다.


■ 세밀하고 어지러운 선들의 진동

   

'답설심매도(踏雪尋梅圖)'. 명나라 때 절파(浙派) 화풍의 절정기를이끈 오위(吳偉, 1459∼1508)가 그린 걸작이다. '눈을 밟으며 매화를 찾아다닌다'는 제목의 이 그림은 기운생동의 미학을 품고 있다.

   오위는 세 번 왕실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예술적 자만심과 치기와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으려는 성정 때문에 궁정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술과 그림으로 강호를 떠도는 생활로 되돌아가곤 했다. 관료들이 재물을 보따리로 싸가지고 와 그의 그림을 구했지만 반 폭도 얻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술적 오만으로 가득 차 있으며 술을 좋아하는 이 천재 화가에게 열광했다. 두 번째 그를 부른 효종은 그에게 '화장원(畵壯元)'이란 칭호를 하사했다. 그러나 세 번째 무종이 불렀을 때 작은 신선은 북경의 궁정에 도착하기도 전에 술에 취해서 죽어버렸다. 아직도 다 그려내지 못한 만리의 만학천봉(萬壑千峰)을 가슴에 품고서.

   '답설심매도'는 오위의 만년 작품이다. 여전히 마하파의 영향을 받은 일각의 사선구도를 취하고 있지만, 부벽준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붓을 눕혀 두텁게 긋는 부벽준 대신 산과 바위는 온통 세밀하고 어지러운 선들로 진동하고 있다. 흔히들 난시준(亂柴皴)이라 한다. 그것은 어떤 격식이 있는 묘사 방식이라기보다 즉흥적인 붓의 춤일 뿐이다. 규정할 수 없이 자유롭고 빠르고 어지럽게 휘날리는 주름들. 오위는 많은 부분에서 대진을 계승했지만, 그의 붓은 대진보다 훨씬 자유롭고 빠르고 방일하다.

반쯤 드러난 은자의 초옥을 둘러싼 나뭇가지들은 일대 장관이다. 소매가 신기(神氣)로 부풀어 오르고 번개가 허공을 치고 회오리바람이 하늘을 휘몰아치는 듯 붓이 춤추고 먹이 사방으로 튀는 화가의 아찔한 퍼포먼스를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다. 나뭇가지들 사이에 고이고, 소용돌이치고, 휘날리며 단장의 잔나비소리를 내는 천 갈래 바람이 보인다.

   이러한 진동 위로 겨울 폭포가 수직으로 낙하하고 있다. 폭포는 아래의 소요 위에 적막의 깊이를 드리운다. 일각구도의 오른쪽 풍경은 성기다. 아득한 무(無)에 잠겨드는 설봉들, 그 아래 오래된 절이 겨울 숲에 싸여 있다. 그리고 계곡물이 흐르고 다리가 있다. 아마 '답설심매도'를 볼 때 감상자의 눈은 대체로 제일 먼저 이 다리 위의 은자에게로 향했을 법하다. 그것은 다른 산수화에 비해 사람의 형상이 제법 크고 상세하며, 담채로 붉게 채색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이 은자가 지금 매화를 찾아 나서는 길인지 아니면 하루 여정을 끝내고 건너편 초옥으로 귀가하는 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뒤로 시동 한 명이 따르고 있다.


■ 생동하는 천지의 운율을 찾아서

   동아시아의 옛 시인 묵객은 눈 속에 봄을 알리는 매화의 개화에서 '천지의 마음'[天地之心]을 보았다. 천지의 마음을 눈 속 매화에서 찾는 '심매'는 그저 사대부의 고상한 취미 활동이 아니라 실상 치열한 정신의 구도 과정이다. 등을 구부린 다리 위 은자의 고단한 자세를 보라. 이 복잡한 구성과 춤추는 난시준의 선들이 오직 성긴 가지에 핀 한 송이 매화를 위한 것이다. 심매의 시 한 편!



수묵의 허공

마른 가지 하나로만 충만하게 할 수 있는


텅 빔 속에


매화꽃

절벽처럼 핀다


천지의 마음


   천지의 마음은 '주역'의 복괘(復卦)에 잘 나타나 있다. 복괘는 다섯 개의 음효(--) 밑에 한 개의 양효(-)가 막 올라오고 있는 형상이다. 절기로는 동지(冬至)에 해당하는데, 음기로 가득 찬 겨울의 심연에서 막 움트는 한 줄기 생명의 양기를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 천지의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은 생생지덕(生生之德), 낳고 낳는 생명의 힘이다. 이 낳고 낳는 생명의 힘이야말로 우는 옛사람들이 눈 뜨면서도 찾고 잠들면서도 찾던 바로 그 도(道)가 아니겠는가.

우주의 마음, 천지의 생명력을 포착하는 것이 또한 동아시아 고전 미학의 요체인 기운생동(氣韻生動)이 아니고 무엇이랴. 눈 속의 매화 한 송이를 찾는 일은 생동하는 천지의 운율, 천지의 가락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선비의 뒤를 따르는 시동은 집에 넣은 금(琴)을 안고 있다. 매화 한 송이에서 천지의 마음, 천지의 운율을 발견하게 되면 선비는 그것을 금으로 연주할 작정이었을까? 그는 이미 금을 연주하고 귀가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저 금을 울리지 못한 채 구도의 여정 속에 있는 것일까? 그러나 천지의 가락을 찾는 구도자 자신이 이미 붉게 물든 홍매화처럼 저 겨울과 봄의 경계(다리) 위에 피어 있다.


■ 누가 광태사학파라 이름 했나

   눈 덮인 겨울의 적막 속에 숨어서 생동하는 오위의 선들이야말로 다섯 개의 음기 아래에서 진동하기 시작하는 생생한 양기다. 술 취한 그의 붓은 거침이 없어 전기 절파의 화가들보다 더욱 즉흥적이면서 더욱 강렬한 에너지의 진동으로 가득하다. 오위는 16세기 명나라 화단을 석권했고, 일세를 풍미했다. 많은 화가들이 오위의 화풍을 추종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시켜나갔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장로, 장숭, 종례, 정문림 등이었다. 이들은 절파 말기를 이루는데 훗날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라는 다분히 부정적이며 조롱조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들은 오위의 후계자들이다.

   

이들에게 광태사학파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들은 도대체 누군가? 그들은 오위 이후로 확산되었던 절파의 양식에 위협받고 위축된 채 미학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던 문인 사대부들이었다.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