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25. 10:32ㆍ美學 이야기
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3> 파르미자니노 '긴 목의 성모': 연금술의 비의를 담은 유체의 몸
예수의 탄생, 그 자체로 최고의 연금술이 아닌가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5-11-24 18:48:52
- | 본지 20면
갸웃한 고개와 긴 목
아름다우면서 기괴하게 굽이를 트는
성모의 몸은 그 자체로 물병이다
아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이뤄지는 장소, 그리고 마침내
현자의 돌로 태어나는 그릇
이 아름다우면서도 기괴하고, 우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미완성의 그림 한 점, 온갖 비밀의 전언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수수께끼의 그림 '긴 목의 성모'는 수수께끼의 사내 파르미자니노(1503∼1540)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는 37세로 요절하기 전, 6년 동안이나 '긴 목의 성모'를 그리고 있었다. '미술가 열전'을 쓴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 그림을 그리다 기분이 나빠 완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화가는 오른쪽에 서 있는 기이한 기둥의 기단에 서명을 해놓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송대방이 쓴 '헤르메스의 기둥'은 미술사를 공부하는 주인공 승호가 '긴 목의 성모'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을 찾아가는 추리 형식의 소설이다. 승호의 호기심은 온통 성모 뒤의 기둥에 쏠린다. 그리하여 그는 기둥에 감춰진 연금술의 비의와 기어코 직면한다. 실제로 파르미자니노는 연금술에 심취했다. 말년에 연금술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궁핍 속에서 죽어갔다고 한다. 그는 정말 그림에 연금술의 비의를 감추어놓았을까?
긴 목의 성모는 우아하다. 우아함을 위해 고전주의적 비례와 균형의 경계선을 넘어서 그녀의 몸은 세 번의 굽이를 틀며 공간 속으로 흐른다. 마치 유체처럼.
■ 소설 '헤르메스의 기둥'의 그림
갸웃한 고개와 긴 목을 타고 한 줄기 우울이 잠행하지만, 그것은 우아함을 위해 치러야할 비용인지도 모른다. 성모는 전형적인 마니에리스모(매너리즘)의 몸이다. 본래 마니에리스모는 자연과 분리되어 기교적이고 인위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경향을 비판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미술사가 다니엘 아라스에 따르면, 마니에리스모는 16세기 시대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 대해 신비적이고 마법적인 세계로 대응하는 양식이었다. 현실적 비례를 넘어서는 유체의 몸은 모종의 비현실적 신비를 향한다.
성모의 무릎에는 아기 예수가 위태롭게 놓여있고, 성모의 왼쪽에는 커튼과 5명의 목동(천사인지도 모른다)이 빼곡히 공간을 채운다. 앞의 한 목동은 몸체가 길고, 푸른 물병을 들고 있다. 성모 오른쪽에는, 한 작가로 하여금 장편의 소설을 구상하게 만든 문제의 그 기둥이 서 있다. 아마 프로이트라면 기둥을 남근, 물병을 여음으로 보고 파르미자니노의 성적 욕망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여긴 좀 더 섬세한 탐색이 필요할 듯하다. 기둥부터는 텅 빈 공간이다. 기둥 아래에는 상체를 노출한 마른 사내(성 히에로니무스?)가 두루마리를 펼치고 있다. 이 확고하고도 모호한 형상들이 수수께끼를 품고 우리의 시선을 혼란시키면서 유혹한다.
기둥은 하나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아랫부분은 여러 개 기둥이 열을 지어 선 열주(列柱)이다. 여럿으로 나뉜 그림자를 보라. 하나이면서 여럿인 기둥은 미완성이 아니라 연금술의 비의를 드러내는 것임을 작가 송대방은 발견한다. 무한한 일자(一者; 신성)와 유한한 다자(多者; 세속)가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연금술의 비의이며, 이것을 구현하고 있는 기둥은 연금술을 통해 얻게 되는 ('해리포터'에서는 '마법사의 돌'로 나오는) '현자의 돌'의 상징이다. 황금과 영생의 비밀을 응축한 현자의 돌!
■ 흑화(nigredo) 단계를 이해해야
연금술의 첫 과정은 멜랑콜리아, 물질의 수난과 죽음인 흑화(nigredo) 단계이다. 거친 물질이 현자의 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 죽음은 연금술의 용기(물병) 속에서 이루어진다. 연금술의 용기는 물질이 죽는 무덤이며 물질에서 정신이 태어나는 자궁이다. 융은 연금술의 흑화 단계를 신화에 나타나는 지하세계로 하강, 자궁으로 회귀 모티프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겼다.
정화에 의해 그대는 비밀의 돌을 발견하리라.
―바실리우스 발렌티누스
성모의 무릎 위 예수는 창백하고 위태롭다. 곧 추락하여 수난 속에 내버려질 것만 같다. 죽음이 이 속에 숨어 있다. 잘 보시라, 이 그림의 등장인물은 모두 몇 명일까? 8명인가? 아니다. 한 명 더 있다. 성모의 오른팔 아래 어둠의 얼굴이 하나 숨어 있다. 그 얼굴이 죽음이다.
그렇다면 아기 예수의 흑화가 일어나는 용기는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성모의 몸이다. 성모야말로 연금술의 용기이다. 길게 늘어진 상체와 옷에 의해 과장되게 부풀어 오른 하체는 물병 형상이다. (물병은 여성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문화인류학적 상징이다) 그녀는 물병(자리)이며, 변환의 용기이며, 대지의 내부이며, 자궁이다. 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것이 시작되는 내밀한 흐름이다.
성모의 몸을 감추면서 유체로 드러내는 옷의 주름은 이 그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다. 주름은 묘하게 성모의 배꼽에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서 격렬한 파도를 이룬다. 그 파도 위에 아기 예수는 떠 있다. 그 원심분리적인 파동은 파괴적이지만, 곧 새로운 생성의 물결이 될 것이다.
■ 현자의 돌이 의미하는 것
성모의 몸이 물병이라면, 목동이 든 물병은 차라리 거울의 역할일지 모른다. 그것도 길게 왜곡된 상이 비칠 볼록거울 말이다. 파르미자니노는 열아홉 살 때, 이발소에서 처음 볼록거울을 보고 그 이상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그린 적이 있다. '볼록거울 속의 자화상'이 그것이다. 그의 그림에 나타난 마니에리스모의 몸은 이 체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목동의 '물병-거울'은 이 흑화의 과정이 고전주의의 합리적 비례와 균형으로 가둘 수 없는 초현실적인 사태임을 왜곡되고 휘어진 상으로 보여주려는 것일까?
마니에리스모의 공간은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원근법적 통일 공간(근대적 시공간)을 비틀고 흔든다. '긴 목의 성모'에서 성모가 있는 공간과 기둥이 서 있는 공간은 서로 이질적이다. 성모의 맨발이나 붉은 방석은 성적인 암시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성모의 푸른 옷 선으로 경계선을 이룬 왼쪽 공간은 몸을 긍정하는 (성육신의) 공간이다. 반면 벌거벗은 성자가 있는 공간은 황량하고 텅 빈, 탈세속적 정신의 공간이다. 그러나 흑화의 죽음을 거쳐 재생한 현자의 돌은 대립을 하나로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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