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4> 관휴 '십육나한도': 삶과 영원을 껴안는 돌 속의 선정

2017. 3. 25. 10:22美學 이야기



      

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4> 관휴 '십육나한도': 삶과 영원을 껴안는 돌 속의 선정

무정해 보이는 이 돌에서 우주의 생명력과 영험함을 보았다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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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5-12-01 19:18:41
  •  |  본지 20면





   

제14존자- 관휴(貫休, 832∼912)가 그린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 가운데 제14존자의 모습이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부처의 제자를 일컫는다. 관휴는 나한도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했다.
- 다른 나한의 깊은 주름과 달리
- 오직 제14존자 만이 평온

- 날카로운 이빨처럼 생긴 돌은
- 모든 것을 삼킬 듯이 보이지만
- 나한의 공력 앞에서 굳어져
- 둘이 마치 하나가 된 듯한 형상

- '추함의 美' 기괴한 선묘에
- 치열한 구도의 고행 담아내



   릴케는 한 시에서 "돌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가 되게 해주소서"('당신 말씀의 파수꾼으로')라고 썼다.

그것은 사물 속에 숨은 본질과 (신의) 신비를 찾고자 하는 기도이리라. 미켈란젤로는 돌 속에 숨어 있는 형상을 찾아내기 위해 돌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리고 돌 속에 갇힌 형상을 끄집어내었다. 그것이 그의 위대한 조각들이다. 그러나 여기, 돌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형상이 있다. 당 제국의 말기와 오대(五代)의 혼란기를 살았던 관휴(貫休, 832∼912)가 그린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 그 가운데 제14존자의 모습이다.

고행승은 돌 속에서 선정(禪定)에 들었다. 구도자의 얼굴은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로워서 그는 이제 영영 돌 밖으로 나오지 않을 작정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벗어둔 신발 위로 숱한 계절이 머물다가 지나가고, 바람의 발자국만 남을 때까지. 그러면 그는 돌이 될 것이다.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울음"(바쇼) 소리를 듣는다. 돌의 내부와 신발이 있는 외부는 우주 전체의 시공만큼이나 아득하다. 여기는 실상 까마득한 벼랑이다. 마치 조정권의 시 '독락당(獨樂堂)'처럼.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은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관휴가 그린 16점의 나한도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독락당이다. 저 선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허공의 독락당을 지었던가? 그곳에 자신의 자리도 있었을까?


■나한도의 새로운 전형을 보이다

   

제9 존자- 관휴의 '십육나한도' 중 제9 존자. 형상과 골격이 기괴하며 강렬한 인상을 준다.
   관휴는 7세 때 출가하여 항주 영은사 등에서 수행을 하였다. 세상은 그가 혼자만의 독락당에서 폐관하는 것을 허하지 않았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살았던 당 말기는 안녹산의 난 이후 끊임없는 혼란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교의 방술에 빠진 무종(武宗)이 일으켰던 '회창의 법난(法亂)'은 무려 사찰 4600여 군데를 헐어버린 불교 대학살이었다. 그것은 어린 사미승 관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의 체험이었으리라. 그의 '십육나한도'에는 이 참혹한 고통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십육나한도는 당나라 말과 오대시기에 상당히 유행하여 그것만으로도 이름이 회자되는 화가가 많을 정도였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부처의 제자를 일컫는 말이다. 관휴의 나한도가 기존의 수많은 나한도를 압도하며 새로운 전형을 보여준 것은 그 기괴함에서이다. 관휴의 나한도 대부분은 형상과 골격이 몹시 기괴하여 강렬한 표현주의적인 '추의 미'를 보여준다. 그렇게 그리는 이유를 누가 물었을 때, 관휴는 자신이 꿈속에서 본 형상이라고만 말하였다. 아마 그 꿈은 생의 근원과 닿아 있는 심층 무의식이거나 혹은, 어린 사미승 시절의 트라우마(심리적 외상)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괴한 나한들의 깊이 파인 주름과 우울한 표정은 심후한 수행과 고행의 공력을 형상화하면서 원형적 이미지들을 불러내지만 또한 화가 자신의 천 갈래 쓰라린 삶의 고뇌가 만든 흔적을 드러낸다. 그런데 '십육나한도'(일본궁내청 소장) 가운데 오직 제14존자만이 주름도 그늘도 없이 온전한 평화 속에 있다. 제14존자의 평화로운 선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돌 때문인 것 같다. 돌은 무정물(無情物)의 원형이다. 돌은 마음이 일어나기 전의 고요한 들녘으로 나한을 이끈다.

'십육나한도 제14존자'의 기괴함은 나한의 형상이 아니라 돌의 기괴함이다. 고요한 나한의 형상은 기괴한 돌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돌의 주름은 억센 철선묘(鐵線描)로 뾰족뾰족한 가시가 돋친 것처럼 그려졌다.

돌의 날카로운 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는 나한의 옷 주름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데, 관휴의 나한상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 선들의 리듬과 더듬이들이 만지는 주름의 촉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한이 돌 위에 깔고 앉은 얇은 자리(방석)가 물결 파동을 이룬다. 자리의 선은 옷의 주름과 돌의 주름 사이에서 대립하는 두 주름을 이어주고 있다. 두 주름은 서로의 율동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 모양이다.


■돌의 신령함과 상상력

   제14존자의 그림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돌이 나한을 삼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나한이 가진 선정의 신통력이 그를 둘러싼 허공을 천천히 석화시키고 있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미구에 나한의 무량한 공력은 앞쪽에 아직 트인 허공까지 모두 석화시켜버리지 않겠는가. 결국 나한의 형상은 돌 속으로 잠기고 나한과 돌은 하나가 될 것이다. 뜬구름 같은 삶의 상처와 영겁의 시공이 응축된 돌! 돌은 그 적연부동(寂然不動)의 독락당이며 그리하여 모든 형상들을 삼키고,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리고, 영겁 너머 저 아득한 무(無)로 통하는 문을 연다. 동아시아 회화의 추상은 실로 '괴석도'와 같은 돌의 형상에서 최고의 경계를 구현한다.

   돌은 무정한 추상이지만 동시에 가장 역동적인 힘과 다양한 표정을 가진다. 동아시아의 옛 사람들은 무정한 돌에서 근원적인 우주 생성의 힘과 신령함을 보았다. '서유기'의 손오공은 화과산의 신령한 돌에서 태어나고, '홍루몽'의 주인공 가보옥은 여신 여와가 하늘을 메우고 남은 돌이 인간계로 내려온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동해의 고기와 용도 돌로 변하고, 부처도 돌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탑상편 어산불영조) 산수화의 준법이란 돌의 주름을 넣으며 돌에 생명을 부여하는 묘사의 방식이다.

 
   제14존자 역시 온몸이 무정의 심연에 잠겨들면서도 생동하는 생명의 힘을 잃지 않는다. 붉은 온기를 잃지 않는 그의 입술을 보라. "적연부동한 가운데 속에서 뇌성벽력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조지훈 '돌의 미학')이 우주적 생명력의 온기를 띠고 거기에 있다. 소동파가 한 화가가 그린 '십팔나한도'를 보고 지은 송 한 구절을 듣는다.('십팔대아라한송')



묻는 일도 없고 대답도 없이

마음대로 스스로 횡행하네.

증점(曾點)의 비파소리 이미 희귀하고

소씨(昭氏)는 거문고를 타지 않네.

그 사이에 곡조 하나 있으니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춘다.



   
   관휴의 '십육나한도'는 그 기괴한 선묘에 치열한 구도의 고행을 담는다. 임제 선사의 '할'이나 덕산 스님의 방망이처럼 그의 선은 우리의 미의식을 내리친다. 그리하여 오르는 길이 없는 독락당처럼,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절벽처럼 우리 앞에 돌연히 침묵하고 선다. 아니, 노래하고 춤춘다. 그리하여 관휴의 나한도는 도석인물화의 새로운 경계를 열고 석각과 양해, 법상 등의 선화(禪畵)를 예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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