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2> 예찬 '용슬재도': 극한의 적막을 여는 정신의 풍경
2017. 3. 29. 05:35ㆍ美學 이야기
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2> 예찬 '용슬재도': 극한의 적막을 여는 정신의 풍경
풍경이 아니다, 깨질 듯 청량하고 고요한 마음이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5-11-17 18:54:57
- | 본지 20면
화면에는 바람도 인적도 없다
원근조차 없다
시선은 사라지고 텅 빈 마음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담박하고 꾸밈없는 예찬의 그림은
원대 문인화에 나타난
'정신의 풍경'의 극한지점이다
우리는 모종의 경계의 끝, 혹은 그 너머 미지의 영역에 들어 선 것이다.
우리의 미의식을 순식간에 뒤흔드는 황량한 들녘 한가운데 우리는 던져졌다. 여기에서 도대체 형상이란 무엇이고, 본다는 것은 또한 무엇이란 말인가? 예찬(倪瓚, 1301~1374)의 '용슬재도(容膝齋圖)', 이 적막한 공간을 방황하는 일은 스산하고 당혹스럽다. 이곳은 산수화의 구경(究竟)인가, 폐허인가?
원나라 말, 예찬은 물의 지방 강소성의 무석(無錫)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부잣집 자제는 다른 것에 도무지 취미가 없었다. 오직 독서와 시 짓기, 서화만을 좋아할 뿐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죽고 자신이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그는 집 안의 '청비각(淸閟閣)'에 전국 시인 묵객을 초빙하여 시와 그림으로 교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전 재산을 친척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는 홀연히 가족을 데리고 방랑길을 떠난다. 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홍건적의 난이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을 즈음이다. 소주(蘇州) 태호 근처, 물 위에 배를 띄우고 떠도는 20여 년, 궁핍하고 외로운 방랑의 시작이었다.
원근조차 없다
시선은 사라지고 텅 빈 마음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담박하고 꾸밈없는 예찬의 그림은
원대 문인화에 나타난
'정신의 풍경'의 극한지점이다
우리는 모종의 경계의 끝, 혹은 그 너머 미지의 영역에 들어 선 것이다.
우리의 미의식을 순식간에 뒤흔드는 황량한 들녘 한가운데 우리는 던져졌다. 여기에서 도대체 형상이란 무엇이고, 본다는 것은 또한 무엇이란 말인가? 예찬(倪瓚, 1301~1374)의 '용슬재도(容膝齋圖)', 이 적막한 공간을 방황하는 일은 스산하고 당혹스럽다. 이곳은 산수화의 구경(究竟)인가, 폐허인가?
원나라 말, 예찬은 물의 지방 강소성의 무석(無錫)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부잣집 자제는 다른 것에 도무지 취미가 없었다. 오직 독서와 시 짓기, 서화만을 좋아할 뿐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죽고 자신이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그는 집 안의 '청비각(淸閟閣)'에 전국 시인 묵객을 초빙하여 시와 그림으로 교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전 재산을 친척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는 홀연히 가족을 데리고 방랑길을 떠난다. 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홍건적의 난이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을 즈음이다. 소주(蘇州) 태호 근처, 물 위에 배를 띄우고 떠도는 20여 년, 궁핍하고 외로운 방랑의 시작이었다.
■고요한 적막감으로 가득 찬 그림
오랜 방랑이 그를 늙고 지치게 만들었을 때, 그는 지인의 부탁으로 한 풍경을 그렸다. 몇 획 마른 선만이 아슬아슬하게 유(有)와 무(無) 사이를 흐르고 있을 뿐 화제(畵題)도 없는 풍경이었다. 뒷날 지인이 그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려고 하니 글을 한 편 써 넣어달라고 다시 찾아왔을 때 이 풍경은 비로소 '용슬재도'가 되었다. 그 다른 사람은 고향 무석의 용슬재 주인이었던 것이다. 예찬은 그림의 글에 죽기 전에 고향에 가서 용슬재에 올라 이 그림을 다시 볼 수 있기 바란다고 써놓고 있다. 스산한 물가에는 송나라 선승 천동정각의 선시 한 편이 떠도는 듯.
몽환의 허공 꽃, 육십칠 년에
흰 새 날아가고 물안개 걷히니
가을물이 하늘에 닿았네.
예찬은 황량한 자신의 그림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아내는 죽고, 자식들은 흩어지고, 그리고 홀로 남게 된 정처 없는 방랑, 그 끝인 죽음의 그림자를 자기 그림에서 언뜻 보았던 것일까? 들뢰즈의 말처럼 진정한 예술가란 그들에게 말없는 죽음의 표지를 달아주는 그 무언가를 본 사람이던가?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예찬은 고향의 친척집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그의 소망대로 고향에서 '용슬재도'를 다시 보았을까? 예찬이 죽은 뒤 강남의 사대부들 사이에는 예찬의 그림을 한 점쯤 소장했는가 아닌가로 인품의 청탁을 가늠했다고들 한다.
고요한 적막감으로 가득 찬 '용슬재도'는 셀 수 있을 정도로 툭툭 찍은 약간의 미점을 빼면 모두 마르고 담담한 붓으로 그려졌다. 전경과 후경을 나누는, 화면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는 강의 수면에는 붓이 거의 닿지 않은 채 텅 비어 있다. 산과 강과 나무, 인적이 없는 정자, 그뿐이다. 화려한 색채도, 세련된 기교도, 힘이 넘치는 용필도 보이지 않는다. 붓은 아무 욕심이 없는 듯 메마르고, 형상들은 고요하고 성기어서 청량하고 소쇄(瀟灑)한 공기로 쓸쓸하게 차 있는 듯하다.
고요한 적막감으로 가득 찬 '용슬재도'는 셀 수 있을 정도로 툭툭 찍은 약간의 미점을 빼면 모두 마르고 담담한 붓으로 그려졌다. 전경과 후경을 나누는, 화면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는 강의 수면에는 붓이 거의 닿지 않은 채 텅 비어 있다. 산과 강과 나무, 인적이 없는 정자, 그뿐이다. 화려한 색채도, 세련된 기교도, 힘이 넘치는 용필도 보이지 않는다. 붓은 아무 욕심이 없는 듯 메마르고, 형상들은 고요하고 성기어서 청량하고 소쇄(瀟灑)한 공기로 쓸쓸하게 차 있는 듯하다.
■"속된 것에 구애받지 않는" 그 마음
구체적인 계절은 여기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럼에도 분명 용슬재의 기운은 만추(晩秋)의 기운이다. 가을의 금기(金氣), 맑은 쇳소리, 그러나 울리지 않고 고여 있는 울림, 건드리면 쩡하고 금이 갈 듯한 적막의 소리를 듣는다. 텅 빈 강, 저 속에 서면 침묵의 소리로 귀가 먹먹할 것만 같지 않은가. 전경의 메마른 나무들이 그 적막에 머리를 잠그고 있다.
형체들은 극도로 간소화되고 화면은 여백으로 충만하다. 동시대 화가 왕몽(王蒙)과는 서로 대극을 이룬다. 왕몽이 '빽빽함(密)'의 극치라면 예찬은 '성김(疎)'의 극치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경외했다. '송하독좌도'는 두 위대한 화가의 역사적인 만남의 현장이다. 예찬의 그림에 왕몽이 세부의 점과 획을 더했다. 왕몽의 복잡함과 비교한다면, 예찬의 화면은 너무나 소략하고 필획은 '일필초초(逸筆草草; 한두 번 붓질로 대략 그림)'하여 소박하고 졸렬해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기교는 졸렬해 보인다(大巧若拙)"는 노자의 말을 상기해 두어야 할 것이다.
왜 당신 그림은 사물과 닮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예찬은 대답하곤 했다. "내 가슴속에 있는 속된 것에 구애받지 않는 기운(胸中逸氣)을 드러내려 했을 뿐이다." 속기를 싫어한 예찬은 자주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미술사가는 그가 병적인 결벽증을 가진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결벽증의 예찬은 물이 가진 정화력을 믿었던 것일까? 혹시 그는 자신의 부유한 재산과 어지러운 시대에 대하여 지식인으로서 어떤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리하여 목욕하듯이, 자신의 허물을 정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강과 호수를 떠돈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다.
화면에는 바람도 인적도 없다. 여기는 원근법도 없는 절대공간이다. 모든 시선은 사라지고 정자가 하나 있을 뿐이다. 장자는 마음을 '신령한 누각(靈臺)'에 비유한 적이 있다. 시선은 사라지고 시선을 거둔 텅 빈 마음 하나가 거기 고요히 놓여 있을 뿐이다. 형상과 시선의 분별이 사라지는 무아지경(無我之境)이 만들어내는 적막감! 킴바라 세이고는 어찌하지 못하는 적막에 다다라야만 비로소 그 예술은 구경역(究竟域)에 다다른 것이라고 하였다. 예찬의 적막은 이 구경의 적막이다.
형체들은 극도로 간소화되고 화면은 여백으로 충만하다. 동시대 화가 왕몽(王蒙)과는 서로 대극을 이룬다. 왕몽이 '빽빽함(密)'의 극치라면 예찬은 '성김(疎)'의 극치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경외했다. '송하독좌도'는 두 위대한 화가의 역사적인 만남의 현장이다. 예찬의 그림에 왕몽이 세부의 점과 획을 더했다. 왕몽의 복잡함과 비교한다면, 예찬의 화면은 너무나 소략하고 필획은 '일필초초(逸筆草草; 한두 번 붓질로 대략 그림)'하여 소박하고 졸렬해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기교는 졸렬해 보인다(大巧若拙)"는 노자의 말을 상기해 두어야 할 것이다.
왜 당신 그림은 사물과 닮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예찬은 대답하곤 했다. "내 가슴속에 있는 속된 것에 구애받지 않는 기운(胸中逸氣)을 드러내려 했을 뿐이다." 속기를 싫어한 예찬은 자주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미술사가는 그가 병적인 결벽증을 가진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결벽증의 예찬은 물이 가진 정화력을 믿었던 것일까? 혹시 그는 자신의 부유한 재산과 어지러운 시대에 대하여 지식인으로서 어떤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리하여 목욕하듯이, 자신의 허물을 정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강과 호수를 떠돈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다.
화면에는 바람도 인적도 없다. 여기는 원근법도 없는 절대공간이다. 모든 시선은 사라지고 정자가 하나 있을 뿐이다. 장자는 마음을 '신령한 누각(靈臺)'에 비유한 적이 있다. 시선은 사라지고 시선을 거둔 텅 빈 마음 하나가 거기 고요히 놓여 있을 뿐이다. 형상과 시선의 분별이 사라지는 무아지경(無我之境)이 만들어내는 적막감! 킴바라 세이고는 어찌하지 못하는 적막에 다다라야만 비로소 그 예술은 구경역(究竟域)에 다다른 것이라고 하였다. 예찬의 적막은 이 구경의 적막이다.
■"예찬의 그림만은 배울 수 없다"
이 구경의 적막을 응축하고 있는 것이 있다. 전경의 나무들 가운데 고사해버린 작은 나무 한 그루! 예찬의 그림에서는 늘 전경의 나무들이 그림의 표정을 이룬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 가끔 큰 나무 옆에 고사한 듯 보이는 마른 나무가 등장하곤 하지만, 이 그림에서처럼 완전히 고사한 나무는 없었다. 그는 화제를 쓰기 위해 '용슬재도'를 다시 보면서 자신도 전율하며 이 나무를 발견했던 것이 아닐까? 말없는 죽음의 표지를 달아주는 그 무언가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을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혼자 조용히 고향을 떠올렸을 것이다.
명의 왕세정은 "송의 그림은 모사하기 쉽고, 원의 그림은 모사하기 어렵다. 그래도 원의 그림은 배울 수 있지만, 오직 예찬의 그림만은 배울 수 없다"고 하였다. 동기창(董其昌)은 예찬의 그림을 '고담천연(古淡天然; 예스럽고 담박하며 꾸밈이 없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평가하였는데, 이러한 예술의 풍격을 '평담(平淡)'이라고 한다. 북송의 시인 매요신은 한 시에서 "시를 짓는 데는 고금이 따로 없이/ 오직 평담하게 짓는 것이 어렵다"라고 하였다. 무미한 평담은 우리 시선을 내면의 의식으로 바꾸어 형상 너머 아득히 정신의 풍경을 연다. '용슬재도'의 이 메마른 평담은 원대 문인화에 나타난 '정신의 풍경'의 한 극한 지점이다.
'美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0> 빈센트 반 고흐 '피아노를 치는 마르그리트 가셰': 흰색의 선율이 흐르는 검은 촛불 (0) | 2017.03.29 |
---|---|
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1> 조맹부 '작화추색도': 새로운 미학의 선언과 그늘 (0) | 2017.03.29 |
고구려의 고분벽화[쌍영총] (0) | 2017.03.26 |
고구려 고분 벽화 (0) | 2017.03.26 |
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3> 파르미자니노 '긴 목의 성모': 연금술의 비의를 담은 유체의 몸 (0) | 2017.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