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0> 빈센트 반 고흐 '피아노를 치는 마르그리트 가셰': 흰색의 선율이 흐르는 검은 촛불

2017. 3. 29. 06:13美學 이야기



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0> 빈센트 반 고흐 '피아노를 치는 마르그리트 가셰': 흰색의 선율이 흐르는 검은 촛불

하얗게 흐르는 순결한 욕망, 고흐의 마지막 평화였기를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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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5-11-03 18:49:33
  •  |  본지 20면

   


   

고흐의 '까마귀 나는 밀밭'.


    남프랑스 아를에서 고갱과의 불화 끝에 자신의 귀를 자르고 발작을 일으킨 고흐는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감옥 같은 몇 달의 병원 생활 뒤 고흐는 오베르로 간다. 오베르, 그곳은 그의 마지막 풍경이다.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70일간 고흐는 무려 80여 점의 유화를 완성한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 권총을 겨눴다.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고흐가 북프랑스 오베르로 가게 된 것은 피사로의 권유에 따라 닥터 가셰의 치료를 받기 위한 것이었다. 외로운 화가는 그곳 풍경에 매료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마지막을 예감한 것이었을까? 그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그렸다. 고흐의 영혼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예술이란 놈의 탐욕스러운 광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40년 동안 그녀 침실에 걸린 그림

   그곳에서 그는 우울하고 신비로운 '오베르의 교회', 강렬한 색채의 저 섬뜩한 '까마귀 나는 밀밭' 등을 완성한다. 그런데 오베르 시기의 그림 가운데 '피아노를 치는 마르그리트 가셰'는 색다른 느낌으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자신 또한 정신병원에 9년 감금되었다가 파리의 한 쓸쓸한 요양원에서 죽어간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는 고흐를 "모든 화가 중에서 가장 진정한 화가"라고 하였다.

1947년 파리에서 열린 '고흐전'을 보고 쓴 '반 고흐,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이란 글에서 아르토는 정신과 의사들을 신랄하게 비난한다. 그들은 "스스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시달리는 고릴라 무리"이다. 가셰 같은 인물이 어찌 고흐를 알랴. 그런 자들이 고흐를 죽였다고 아르토는 분개한다. 그러나 아르토의 주장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렸다. 닥터 가셰에게는 아르토가 모르는 묘약이 있었다. 닥터 가셰 자신도 몰랐던 묘약, 바로 그의 딸 마르그리트이다. 그녀는 그때 스무 살의 눈부신 꽃이었다.

   마르그리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피아노를 치는 마르그리트 가셰'를 자신의 침실에 40년 동안 걸어놓고 있었다 한다. 그 때문에 마르그리트가 고흐의 마지막 연인이었다는 소설이 만들어진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반 고흐의 마지막 연인', 앨리슨 리치먼) 하지만 그 짧은 기간에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이제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고흐가 그녀 그림을 3점이나 그린 것을 보면 오베르 시기, 고흐에게 마르그리트가 특별한 존재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3번째로 그린 마르그리트 초상화 한 점은 고흐의 편지 속에만 존재한다. 아마 그것은 고흐의 뜨거운 신화 속으로 증발해 버렸으리라.


■한 개의 초, 서늘한 소멸

   
고흐의 '피아노를 치는 마르그리트 가셰'


   마르그리트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그녀는 금발을 틀어 올렸는데 부드럽게 유동하는 듯한 녹색의 변주가 상반신을 감싼다. 그러나 바닥은 격정을 담은 붉은 색이다. 그녀는 흰색 상의에 흰색 치마를 입었다. 고흐의 다른 그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세로로 긴 화면, 그 화면을 압도하는 도저한 흰색의 물결이다. 텅 빈 흰색 악보에서 흘러내린 흰 음표는 피아노 건반을 울리며 그녀의 손을 타고 흘러들어와 그녀의 온몸으로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흰색의 선율이 된다. 흰색의 선율을 만들어내는 고흐의 붓 터치는 강렬한 힘과 율동 속에, 지금 바로 거기 있는 듯하다.

그것은 시각적이기 이전에 촉각적이다. 그 진동의 힘은 즉각적으로 우리 몸에 전달된다. 그녀를 통해 드러나는 이 흰 선율의 율동을 위해 고흐는 화면을 길게 하여 그녀의 전신상을 그렸는지 모른다. 오베르에 오기 전 잠시 들른 파리에서 고흐는 로트레크가 그린 '피아노를 치는 마리 디오 양'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그러나 로트레크의 그림은 검은색 의상의 반신상이었다.

   흰색은 수많은 색을 품고 있다. 고흐의 색은 온통 은유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녹색이 수면 아래에서 요동치고 있는 이 흰색의 물결은 한 여인의 다채롭게 변전하는 감정이 담긴 순결한 욕망이다. 반면 그녀의 흰색 뒤에 숨은 고흐의 흰색은 그가 창조한 모든 색을 지우려는 욕망인지 모른다. 칸딘스키는 "흰색은 물질적 성질과 존재로서의 모든 색이 사라진 어떤 세계의 상징과 같다"고 하였다. 이 아름다운 그림의 흰색에서 모든 색이 사라지는 서늘한 소멸의 느낌이 언뜻 스치는 것은 그림 속에서 가장 사소해 보이는 디테일, 한 개의 초 때문이다.


■그리고 밀밭으로 이어지다

   '피아노를 치는 마르그리트 가셰'의 일차적인 주제는 마르그리트와 음악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따뜻한 평화다. 고흐는 광기가 흐르는 '까마귀 나는 밀밭'을 그리기 전에 이 아름다운 평화를 느끼고 그것을 그린 것이다. 마르그리트는 그의 순결한 평화다. 이 평화가 지속되었더라면 그는 자기 가슴에 총을 겨누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평화에는 균열이 져 있다. 그 균열로 불길한 예감이 스며든다. 그것은 이 그림의 숨겨진 주제인데, 여인과 음악과 자신의 생명이 가지는 시간성, 즉 소멸이다. 불이 꺼져버린 초를 보라. 고흐가 왜 거기 초를 그려 넣었겠는가?

고흐는 초를 녹색 바탕 위에 선으로 쓱 윤곽만 그렸는데, 촛불은 꺼져 있다. 빛을 품은 불꽃은 이미 심지를 떠나 녹색 벽을 수놓는 수많은 붉은 점이 되어 떠돈다. 오선지를 떠난 음표처럼. 그런데 그는 꺼져버린 초의 검은 심지를 마치 불꽃이 춤추는 것처럼 그렸다. 검은 불꽃이다. 자신의 소멸과 그 소멸에도 남아 허공을 떠돌 자신의 예술혼에 대한 의미심장한 은유인 것만 같다. 그는 마르그리트의 선율과 평화에 머물지 못하고 그 균열을 통해 기어코 까마귀가 나는 들녘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마르그리트의 상반신을 품던 녹색은 '까마귀 나는 밀밭'에서 어둠의 끝으로 울려 퍼지는 징소리 같은 파랑으로, 바닥의 붉은 색은 온몸으로 타오르다가 한순간에 방전해 버릴 것 같은 광기의 노랑으로 바뀔 것이다. 파랑과 노랑의 이 눈부신 병치. 그리고 마르그리트의 충만하고도 텅 빈 흰색의 선율은 검은 촛불 속으로 수렴됐다가 밀밭을 나는 까마귀 떼가 될 것이다. 모든 의미와 기호의 구멍 같은 검은 까마귀는 파랑과 노랑의 극한 대립 사이를 나는 고흐의 마지막 음표일 것이다. 아르토는 탄식한다.



반 고흐가 더 이상 대지의 물살을 품을 수 없을 듯한 대지 위에서

까마귀들의 날개가 울리는 우렁찬 심벌즈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죽음이다



   
   마르그리트는 묘약이 아니었던 것일까? 외로운 화가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화가의 구애를 소녀는 뿌리쳤을까? 그녀가 고흐의 한 손을 잡았다면 고흐의 다른 손은 총을 잡지 않았을까? 알 수 없다. 그저 우리는 고흐는 고흐의 길을 끝까지 가고야 말았다고 말할 수밖에. 그러나 '피아노를 치는 마르그리트 가셰'는 잠시일지라도 마르그리트가 고흐의 안식이었음을 보여준다. 오베르의 그녀는 고흐가 꿈 꾼 "노란 높은 음"의 별로 가는, 아름다운 마지막 정거장이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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