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1> 조맹부 '작화추색도': 새로운 미학의 선언과 그늘

2017. 3. 29. 06:01美學 이야기



     

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1> 조맹부 '작화추색도': 새로운 미학의 선언과 그늘

유치해 보이는 이 그림, 좌우 두 산에 중국회화사를 바꾼 비밀 있다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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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5-11-10 19:12:02
  •  |  본지 20면

   


   

중국 원나라 때 화가 조맹부(1254~1322)의 '작화추색도'. 작산과 화부주산의 가을 풍경 그림이란 뜻이다.


- 송나라 때 유행한 '부벽준' 대신 
- 새 그림기법 피마준·하엽준 도입

- 가운데 큰 나무들이 화면 분할
- 우측 화부주산보다 먼 좌측 작산 
- 원근법 무시해 더 가깝게 보여

- 남송의 사실주의 경향 극복한
- 원대 미학 혁명의 걸작으로 평가


   첫눈에 왠지 좀 유치해 보인다고 생각했다면, 일단 제대로 본 것이다. 짚더미를 쌓아놓은 언덕 같은 산과 허공으로 삐쭉 솟은 삼각형 산은 온갖 기기묘묘한 디자인의 산수화에 길든 눈에는 이발소그림 처럼 졸렬해 보이는데, 물가의 버들과 나무도 별로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가 청록의 채색이라니. 그런데 왜 미술사가들은 회화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걸작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일까?

원대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미학적 결의를 담은 걸작

   


조맹부의 걸작 '수석소림도'.
  '작화추색도'는 조맹부가 고향의 노학자 주밀(周密, 1232∼1298)에게 선물한 그림이다. 주밀 집안은 대대로 제남(濟南, 산동 일대) 땅에 살다 강남 오흥으로 내려왔다. 주밀은 오흥에서 태어났지만, 북방의 제남을 자신의 뿌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 번도 제남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를 위해 조맹부는 그곳 관리로 근무했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 이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러나 '작화추색도'는 단순한 추억의 감성적 풍경이 아니다. 그 추억의 풍경에는 중대한 미학적 모의가 숨겨져 있다. 1296년, 조맹부가 42세, 주밀은 64세 때의 일이다.


   조맹부는 송태조 조광윤의 11세손이다. 그러나 그는 남송을 붕괴시킨 원나라 세조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관직에 나아간다. 이 일은 두고두고 그의 불명예가 되었다. 그는 단순히 부귀를 쫓는 변절자인가? 이민족의 천하에서도 문화의 전통을 지속시키려는 역사의 부름을 들은 자일까? 어쨌든 원대 예술은 그의 미학적 혁명에서 시작한다. '작화추색도'는 그 혁명의 선언서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선언의 외침을 자꾸만 벗어나려는 이미지들이 서식하고 있다.

그의 미학의 핵심 테제는 '고의(古意)'이다. 그것은 망국 남송의 사실적이고 기교적인 미학을 극복하고, 남송 이전인 북송·당의 예술정신과 그 웅건하고 질박한 양식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작화추색도'는 이러한 미학적 결의의 공간이다. 주밀이 제남을 그리워한 것은 단지 조상의 땅이어서가 아니라 그곳이 북송의 문학이 꽃핀 곳이기 때문이었다. 조맹부가 예전의 고졸(古拙)한 양식으로 제남 풍경을 그려서 선물한 것은 노학자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선의를 넘어 일종의 미학적 동맹의 표시가 아니었을까.


■피마준·하엽준…붓의 골기 중시

   '작화추색도'는 작산과 화부주산의 가을 풍경 그림이란 뜻이다. 왼쪽 언덕 같은 산이 작산이고 오른쪽 삼각형의 산이 화부주산이다. 거의 실경을 묘사한 것이지만 두 산은 새로운 회화 양식을 선언하고 있다. 남송 산수화의 주된 기법인 부벽준을 버리고 작산은 삼의 올을 풀어 놓은 것 같은 피마준, 화부주산은 연잎 줄기 모양의 하엽준으로 그렸다. 여기에 당의 청록산수를 불러오고, 화공들이 주도한 형사(形似; 사실적인 묘사) 중시의 남송 미학을 전복하기 위해 붓의 골기(骨氣)와 정신을 중시하는 서예의 기법을 그림에 도입한다. 서법은 미학의 주도권이 화공의 그림에서 문인의 그림으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코드이다. 그는 '수석소림도(秀石疏林圖)'에 직접 써 넣은 시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돌은 비백(飛白)처럼

나무는 주서(주나라 때 글자) 같이 […]

글씨와 그림이 본래 같음을 알아야 한다.



   '작화추색도'에서 첫눈에 유치해 보였던 나무들은 바로 그 주서나 해서(楷書)의 필법으로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림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쓰는'[寫] 것이다.

분명 '작화추색도'는 새로운 회화의 선언이다. 그러나 탁월한 작품이 늘 그렇듯 '작화추색도' 역시 표면을 거스르는 내밀한 그늘을 품는다. 그 그늘은 조맹부가 남송 미학의 전복을 위해 원근감을 없애고 사실주의적 경향을 버렸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은밀히 거슬러 오른다.


   그림의 중앙, 근경의 둔덕에는 압도적인 높이의 나무들이 있다. 배를 탄 사람과 비교한다면 거의 우주적인 나무다. 이 우주적 나무들의 역할은 화면을 양쪽으로 나누는 것이다. 작산과 화부주산은 하나의 화면에 펼쳐져 있지만, 사뭇 다른 공간임을 눈치 채야 한다. 그 분리의 틈에 그늘이 일렁인다. 작산은 지평선 상에서 화부주산보다 뒤에 있지만 훨씬 가까워보인다. 작산 쪽은 원근법이 거의 무시된 평면적 화면이기 때문이다. 반면 화부주산 쪽을 보면 원근감이 뚜렷하다. 깊은 공간감은 근경과 원경의 나무들의 대비에서 나타나지만, 무엇보다 아득히 펼쳐진 지평선 때문이다. 작산 쪽은 둘러싼 나무가 지평선을 지워버림으로써 한정된 시야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작산 쪽은 삶의 현장을 드러내는 한 폭 풍속화다. 여기에는 계절과 집과 사람과 살아 있는 노동이 있다. 버드나무에 둘러싸인 강가에서 어로 작업을 하는 사내와 연두색 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입고 문에서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 모습은 정감이 넘치면서도 사실적이다. 그 뒤로 밭일 하는 사내와 노란 색 다섯 마리 양, 실내가 들여다보이는 집들, 붉게 물든 단풍을 보라. 송대에 꽃피었던 사실주의적 경향은 여기 여전히 숨 쉬고 있다.


■작산과 화부주산과 물

   화부주산 쪽은 깊은 원근을 이루며 아득한 허공으로 펼쳐진 산수화다. 색채도 단조로워 수묵에 가깝다. 황량하고 적막한 강변의 풍경, 수평선에 솟은 수직선은 이곳이 사실적 공간이기보다는 정신의 공간임을 보여준다. 몇 척 배와 사공(어부)들도 삶의 모습이 아니라 수묵산수화를 이루는 기호일 뿐이다. 주밀은 스스로 '화부주산인'이라 칭하였다고 하니, 아마 이곳이야말로 조맹부와 주밀의 정신이 만나는 곳인가 보다.

작산 쪽이 부드러운 버들의 기운을 담고 있다면, 화부주산 쪽은 금속성의 견강한 기운이다. 작산의 경물 배치가 조밀하다면[密], 화부주산은 성기고[疏] 고담(古淡)스럽다. 작산이 삶의 풍경을 담은 청록산수라면 화부주산은 정신의 기운을 담은 수묵산수이다. 작산과 화부주산은 실제로 몇 십리 멀리 떨어져 있다. 조맹부가 이 두 산을 한 화면에 넣은 것은 두 산이 이 일대의 랜드마크이기도 하지만, 제남의 삶의 풍경과 새로운 미학 정신 두 가지를 함께 선물하고자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대립하는 작산과 화부주산 풍경을 물이 하나로 껴안고 있다. 여기는 온통 물의 나라다. 조맹부는 북방의 풍경을 보여주려 의도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물과 어촌 풍경은 강남 오흥의 목가적인 정취를 환기시킨다. 피마준 역시 강남의 산수에 어울리는 준법이다. 북방을 향한 이념과는 달리 그의 시정(詩情)은 자신의 고향을 향했던 것일까?

   
'작화추색도'를 선물 받은 지 2년 후 노학자 주밀은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그들의 미학적 결의는 결국 역사를 바꾼다. 조맹부의 미학은 원대 예술의 새로운 준거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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