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 회화실] 궁중기록화와 장식화, 일반인들이 그렸던 민화
조선시대 회화 중 실용적인 성격을 갖는 그림으로는 궁중기록화와 궁중장식화가 있다. 기록화는 궁중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행사를 그린 그림으로 오늘날 사진촬영과 같은 성격이다. 궁중기록화는 그 목적에 따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의궤도(儀軌圖)와 기념촬영 성격을 갖는 궁중행사도가 있다. 궁중행사도는 한번에 여러 벌을 그려서 관련자들이 나누어 소장하였다. 또한 중앙박물관 회화실에는 전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민간 상류층에서도 계모임이나 잔치 등을 그림으로 남겨놓고 있다. 이들 그림은 회화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사진처럼 당시의 풍습과 복식 등 다양한 모습을 오늘날 사람들에게 전해주는데 큰 의미가 있다.
궁중장식화는 궁궐의 여러 공간을 장식하거 궁중의식에 사용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을 말한다. 이들 그림은 도화서에 속한 전문화원들이 그린 그림으로 다른 그림에 비해서 예술적인 면은 부족하지만 색감이 화려하고 우아하게 그려졌다.
조선후기에 많이 그려진 민화는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운 사람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취미로서 그렸던 그림이다. 기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일반 민간의 소망과 감정을 표현했다는데 그 가치가 있다. 민화는 대체로 설화나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그린 것이 많다.
궁중기록화, 장식화 등이 전시되어 있는 2층 회화실
궁중기록화
궁중기록화는 궁중에서 벌어지는 특정한 행사를 기념하기 위한 그림이다. 그 종류는 크게 궁중행사도(宮中行事圖)와 의궤도(儀軌圖)로 나눌 수 있다. 궁중행사도는 왕실의 결혼이나 생일잔치 등 중요한 행사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한 번에 여러 벌을 그려서 관련자들이 나누어 소장하였다. 의궤(儀軌)는 궁중 행사의 절차를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 성대한 행렬도와 행사에 사용한 물건들을 그린 도설(圖說) 등 각종 그림들을 실어서 의식의 상세한 내용을 전해 준다. 제작 배경을 정확하게 알수 있는 궁중기록화는 조선시대 궁중 문화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출처:중앙박물관>
관리 등용에 대한 훈계, 친정도(親政圖), 작가 모름, 조선 1785년, 비단에 색
창덕궁 동궁이었던 중희당 앞 마당에 진행된 행사 장면이다.
이 그림은 1785년 12월 28일 창덕궁 중희당에서 정조가 인재 등용의 임무를 맡은 문.무관 인사관들에게 훈계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화면 왼쪽에는 재능을 지닌 관리를 잘 가려 뽑도록 타이르는 정조의 시운(詩韻)에 맞추어 신하들이 화답한 시가 쓰여져 있다. 참석한 관리들은 이병모, 이곤수, 김상집, 홍인호 등 19명이다. 오른쪽 끝에는 홍인호의 양자인 홍희조가 1831년 화답시를 읽고 느낀 바를 기록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신정왕후의 팔순 기념잔치, 정해진찬도(丁亥進饌圖), 조석진, 조선 1887년, 비단에 색
첫번째 장면: 잔치를 시작하는 1월1일의 근정전 진하(進賀). 근정전에서 거행되는 대규모 행사이다.
2번째 장면: 1월27일 낮에 열린 만경전 내진찬(內進饌),
3번째 장면: 1월27일 밤에 열린 만경전 야진찬(夜進饌),
4번째 장면: 28일 고종이 선정왕후에게 술을 따르는 장면(익일회작翌日會酌),
5번째 장면: 29일 왕세자가 술을 따르는 장면(재익일회작再翌日會酌), 진찬도 당랑의 좌목(座目)
1887년(고종24) 1월 대왕대비 신정황후 조씨의 팔순을 기념하여 경복궁 만경전(萬慶殿)에서 열린 궁중잔치를 그린 것이다. 신정왕후는 익종의 부인이자 헌종의 어머니로 익종이 요절한 데 반해 83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왕실의 권한을 쥐고 조선말기 정국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병풍의 내용은 오른쪽에서부터 1월1일의 근정전 진하(進賀)를 시작으로, 1월27일 낮에 열린 만경전 내진찬(內進饌), 밤에 열린 만경전 야진찬(夜進饌), 28일 고종이 선정왕후에게 술을 따르는 장면(익일회작翌日會酌), 29일 왕세자가 술을 따르는 장면(재익일회작再翌日會酌), 진찬도 당랑의 좌목(座目)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궁중장식화와 민화
궁중장식화는 궁중의 여러 공간을 장식하거나 궁중의식에 사용하기 위하여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 종류로는 왕이 집무를 보던 정전이나 왕과왕비의 관을 모시던 빈전, 신위와 혼백을 모시던 혼전 등에 놓는 오봉병, 궁궐을 장식한 용 그림과 책걸이도, 새해를 맞아 그리던 세화, 각종 축하 잔치에 사용한 십장생도와 모란도 등이 있다. 이 그림들은 대체로 어진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 모든 백성이 건강하고 왕조의 평화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궁중의 취향에 맞게 전문화원들이 그렸기 때문에 채색이 화려하고 우아한 기품이 서려 있다. 민화는 전문 화원과 달리 정통으로 그림을 배우지 않은 화가가 그린 것으로, 일반회화의 소재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민간 설화나 무속신앙 등과 관련된 내용도 다루었다. 화려한 기교로 다듬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소망과 감정을 소박하게 표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작가모름, 조선 19세기, 비단에 색
왕의 존재와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는 궁궐을 장식한 그림이다. 다섯개의 봉우리는 오행(五行)관념을 나타내고, 해와 달, 가운데 솟은 봉우리는 땅을 주관하는 왕을 상징한다. 협곡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만물의 소생을, 바다에서 굽이치는 물살은 오행의 불변하는 교류를 상징한다. 좌우대칭으로 서있는 소나무는 용비늘처럼 붉은 줄기와 뿌리를 드러내고, 새싹이 돋아나 있다. 이는 나라의 복이 만년동안 이어지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오봉병은 통치자가 천명을 받아 삼라만상을 조화롭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오봉병 앞 옥좌에 앉은 왕은 우주 질성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며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신령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왕회도(王會圖), 작가모름, 조선 19세기, 실제와는 다르지만 북경 자금성을 참조하여 그렸다.
여러 나라의 사신들이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장면의 그림이다. 이른바 왕회(王會)는 천하가 태평하던 주나라 무왕 때 제후, 사이(四夷)와 번국(蕃國)의 사신이 참가한 성주대회(成周大會)를 기록한 『일주서(逸周書)』의 왕회편에 근거한다. 이 주제는 정조 연간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을 위한 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 화면 구성은 황제가 앉은 외전, 계단을 오르는 사신 행렬, 문 밖에서 대기 중인 수행원 등 세 장면으로 나뉜다. 내용상으로는 청 건륭 연간에 그린 기실화(記實畵)와 유사하며, 그림의 규모나 주제, 황제 뒤에 놓인 오봉병, 건축과 인물상, 나무와 괴석, 화려한 채색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궁중화풍을 띤다. <출처:중앙박물관>
사현의 전투 승리, 사현파진도(謝玄破秦圖), 작가모름, 조선 1715년, 비단에 색.
중국 고사(古事) 중 교훈적인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중국 남조 정권이 북방이민족을 상대로 크게 승리한 비수지전(淝水之戰)을 그린 그림이다. 병자호란으로 만주족에 패배했던 교훈을 되새기고자 하는 의미를 갖는 그림이다.
오호십육국시대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383년 동진을 공격했다가 장수 사현(謝玄)에게 패배한 비수대전(淝水之戰)을 그린 그림이다. 좌우 화면에 무기를 든 채 대적하는 병사와 말의 역동적인 구성은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숙종은 비수 전투를 소재로 4편의 어제(御製)를 지었는데, 이 역사적 사건에서 교훈을 얻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감계화(鑑戒畵)의 성격을 지닌다. 전투에 참여한 수많은 병사들의 몸짓과 표정, 배경이 된 산과 수목의 형상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비수가 강한 필선과 명암의 대비를 통한 기암 등에 절파화풍이 엿보이며, 청록과 금채의 안료는 화려함을 더해준다. 인물과 말을 그린 필치의 차이를 통해 여러 화원들이 공동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관동지역 명승지 그림 병풍 (삼척 축서루, 통천 총석정, 강릉 경포대, 고성 삼일포), 19세기, 비단에 색.
명승지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 산수화라고도 할 수 있지만, 단순히 명승지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민화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여행이 어려웠던 옛 사람들의 여행에 대한 소망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관동지역 명승지 그림병풍 (울진 망양정, 간성 청간정, 평해 월송정, 양양 낙산사)
관동팔경으로 유명한 관동지역 명승지는 수 많은 문인들에게 풍류와 유람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문인들이 관리로 부임하거나 혹은 개인적으로 유람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관동지역 명승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예부터 아름다운 경치를 8경, 혹은 10경으로 묶어 시로 노래하고 그림으로 그리는 문화가 있었다. <관동팔경도>는 금강산도와 마찬가지로 문인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서민계층까지 유행하면서 민화의 소재로 확대되었다. 평생에 금강산이나 관동지역을 유람하기 힘들었던 서민들에게 명승지 그림은 생생한 경치를 대신 볼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하였다. 이 그림은 통천의 총석정에서 시작하여 간성의 청간정, 강릉의 경포대, 고성의 삼일포, 삼척의 죽서루, 양양 낙산사, 울진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 등 관동팔경의 경치를 그리고 있다. 매우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시점으로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즐겁게 노는 아이들, 백동자도(百童子圖), 19세기, 비단에 색.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그림으로 중국의 그림을 연상하면서 그린 것으로 보인다.
백동자도는 넓고 호사스러운 저택의 정원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백명의 남자 아이들을 그린 것이다. 백동자도는 아들을 낳아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였던 조선시대에 자손번창의 바램을 담아 병풍으로 제작되어 아이들 방이나 부인방 등에 사용되었다. 백동자도는 중국 당나라 때 평생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누린 곽자의(郭子儀)의 자손들을 그린 그림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늙어서 백자천손을 거느렸다고 한다. 그러한 한평생의 부귀영화를 그려낸 것이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이다. 이 그림의 사내 아이들은 꽃놀이, 전쟁놀이, 물놀이, 닭싸움놀이, 원숭이 놀이 등을 하며 노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배경에는 건물, 소나무, 괴석, 파초 등으로 표현하였는데, 아이들이 입은 옷이나 배경 표현은 거의 중국식이다. 또한 화려하고 세밀하게 채색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잉어 그림, 약리도(躍鯉圖), 19세기, 종이에 먹. 민화의 소재로 많이 등장하는 동물을 그린 그림이다.
사대부들이 많이 그렸던 사군자화와는 달리 민간신앙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들을 많이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민화의 주된 소재 중 하나로 잉어, 쏘가리 등 어류들이 있다. 이렇게 물고기가 그림의 소재로 채택되는 것은 상징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항상 주의를 경계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다락문에 물고기 그림을 붙여 놓기도 했다. 쌀뒤주에 물고기형 자물쇠를 달거나 서람의 물고기형 손잡이 역시 이런 상징성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물고기는 부부의 금술을 상징하기도 하고 알을 많이 낳는 것 때문에 다산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배가 부른 물고기 그림은 풍요를 상징한다. 특히 잉어가 뛰어 오르는 그림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중국 고사에는 잉어가 물살을 거슬러 폭포로 뛰어 오르면 천둥번개가 치고 꼬리에 불이 붙어 용으로 변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것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입신출세를 상징하며, <어변성룡도(漁變成龍圖)>라고도 한다. 이 그림은 파도에서 뛰어 오르는 세마리 잉어를 그렸다. 물고기 지느러미와 파도에는 푸른 담채를 가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구름 속의 용, 운룡도(雲龍圖), 19세기, 비단에 색.
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실재하는 동물이 아니기에,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통해 재현되었으며, 고귀함과 신성한 힘을 가진 신수로 믿었다. 구름과 함께 표현되는 운룡도가 많이 그려졌으며, 운룡도는 벽사와 길상의 의미를 가지며, 비가 오기를 바라는 기우제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는 다종다양한 용 중에서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응룡의 상징성을 빌린 것이라 생각된다. 이 그림은 용을 그린 두 폭, 호랑이를 그린 두 폭의 총 네 폭 중 한 점이다. 용은 황,적,녹,청색을 진채로 사용하여 화려하게 표현되었으며, 동그랗게 뜬 두눈은 해악적으로 느껴진다. <출처:중앙박물관>
용은 귀신과 재앙을 막아 주는 신통력을 발휘하는 존재이다. 천자를 상징하기도 하여 임금이 앉는 자리, 수레, 옷에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조선시대 용 그림은 대체로 구름이나 물 속을 배경으로 그려지고, 호랑이와 짝을 지어 힘을 겨루는 장면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이 그림은 아마도 정월초 궁궐이나 관청의 대문 등에 귀신과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붙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먹구름 속에서 몸을 들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의 모습은 활달하고 섬세한 황선으로 그려져 있어 힘차고 웅혼한 기상이 느껴진다. <출처:중앙박물관>
신선들의 잔치, 요지연도(瑤池宴圖), 작가모름, 비단에 색
중국 주(周) 목왕(穆王)이 곤륜산(崑崙山)에 이르러 서왕모를 만나 요지(瑤池)에서 벌린 잔치 장면을 그린 요지연도이다. 화려한 청록산수를 배경으로 서왕모와 주 옥황, 춤을 추는 선녀들을 그렸고, 왼쪽에는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파도를 건너오는 신선의 무리들을 표현하였다. 요지연도는 조선후기 현세의 복을 구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으로 널리 사랑받았다. <출처:중앙박물관>
상상 속의 동물인 기린과 해태를 복숭아나무와 함께 그린 그림이다. 기린은 육지에 사는 동물을 대표하는 신성한 동물로 수컷을 ‘기’라고 하고 암컷을 ‘린’이라고 한다. 기린은 이마에 긴 뿔이 하나 돋아 있는데 그 끝에는 살이 있어 다름 짐승을 해치지 않으며 풀도 밟지 않아 인자한 동물로 알려졌다. 해태는 해치라고도 불리며 물에 사는 동물이므로 화재를 방지하는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좋은 의미를 지닌 동물과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장수를 상징하며 진귀한 과일로 여겨진 복숭아나무를 함께 그려서 나쁜 것을 물리치고 좋은 것은 받아 들이고자 하는 바람을 나타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이런 종류의 그림은 병풍으로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림이라기보다는 장식의 의미가 강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책거리, 19세기, 종이에 색
책거리, 19세기, 작가 모름, 비단에 색
여러 칸으로 나누어진 서가에 고동기, 도자기, 꽃병과 서책, 붓, 벼루, 연적 등 각종 문방구류를 진열한 모습을 그린 그림을 책거리 또는 책가도라고 한다. 책거리 그림에 등장하는 여러 기물들은 당시 문인들이 고동기 등 진귀한 물건들을 수집하며 보고 즐겼던 취미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조선후기부터 그려지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책거리 그림은 중국에서 명말청초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림은 진귀한 골동품과 문방구류를 소재로 하여 새롭게 투시도법과 명암법을 사용하여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이 책거리 그림은 화면을 가득 채운 책가에 책과 기물들을 배치하고 다섯번째 폭 상단에는 인장을 그려 작자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책거리 그림 화가인 이형록의 화풍과 유사하나 인장의 글씨가 불명확하여 작자를 확인할 수 없다. <출처:중앙박물관>
책거리(왼쪽), 책가도(冊架圖), 작가모름, 조선 19세기, 비단에 색
책거리(오른쪽)
책거리는 책가라고도 하는데, 책을 놓은 시렁을 의미한다. 조선후기에는 책과 각종의 기물들을 함께 그린 책거리도가 유행하였다. 정조연간에 규장각의 자비대령 화원을 위한 시험에 출제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가 점차 양반과 중인, 서민들에게 퍼져나갔다. 각 폭마다 책갑(冊匣)이 놓여져 있고, 투시도법으로 그려진 기물들은 전체적인 통일감을 준다. 채색과 먹의 농도를 달리하여 기물을 입체적으로 표현하였다. 각 폭의 구성요소를 보면, 노란 불수, 화병, 수선화와 과일, 붓과 벼루, 동백꽃, 청동솥, 작약, 공작털, 시계 등은 호사스런 느낌을 주면서도 다산과 행운을 바라는 길상의 소재들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