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의 향원익청] 조선의 하늘을 그린 ‘별그대’ 류방택

2017. 5. 10. 16:27별 이야기



      

[곽병찬의 향원익청] 조선의 하늘을 그린 ‘별그대’ 류방택

등록 :2017-01-31 18:13수정 :2017-01-31 18:48


   홍건적이 1362년 2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했다. 개경이 함락되고 왕은 남쪽으로 피난 갔다. 강화도로 피신했던 류방택은 달력을 제작해 강화병마사에게 제공했다. 전란 속에서 조정은 국가의 달력조차 만들지 못했고 백성은 시도 때도 절기도 모른 채 살아야 했다. 그제야 그의 천문지식이 조정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도비산으로 돌아가 나오지 않았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은 1985년 국보 228호로 지정됐다. 2006년엔 보현산 천문대에서 발견한 소행성의 이름을 ‘류방택 별’이라 하였고, 2007년엔 만원권 지폐의 도안을 바꾸면서 뒷면에 천문시계인 혼천의와 보현산 천문대 천체망원경 그림을 넣고, 바탕은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깔았다. 낮을 지키는 건 세종대왕이지만 밤을 지키는 건 류방택이다.

   

    서산군 부석면과 인지면에 걸쳐 있는 도비산,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은 새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얻은 이름이다. 지금은 천수만 간척사업으로 형편없이 쪼그라들었지만, 이전만 해도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천수만은 도비산을 삼면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팔봉산으로 흘러가는 나지막한 구릉 때문에 간신히 뭍으로 이어져 있었다. 평지돌출인지라 도비산에선 어디로든 망망무제였다. 소년 류방택이 별을 헤아리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6대조 서령부원군 류성간 이래 할아버지(류굉, 상호군), 아버지(류성거, 전객령)까지 모두 고려의 당상관에 오른 집안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등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낮에는 과거와 무관한 경서나 주역을 읽고, 해 지면 쏜살같이 들이나 산에 올라 별을 보았다. 사실 별을 보고 헤아리는 건 서산 갯마을 사람들의 일과였다. 바다로 나가건 들로 나가건 그들은 별을 보고 방위를 가늠하고, 별을 살펴 내일의 날씨를 예상했다.

    봉화대가 있는 도비산 산마루에선 별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별들의 운행이 한눈에 들어왔다. 북두칠성은 하룻밤에 한 번씩 북녘 하늘을 한 바퀴씩 돌았다. 할머니는 북두칠성 일곱 개 별들이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주관한다고 했다. 그런 북두칠성은 한 번도 북극성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북두칠성은 하늘의 임금 곧 천제가 순라를 돌 때 타는 수레라고 했다.

    별들은 계절에 따라 저마다 짝을 이뤄 온갖 형상을 드러냈다. 봄부터 여름까지 도비산 남쪽 하늘에선 청룡 형상의 별들(서양에선 전갈자리)이 무리지어 떠오르고, 가을 겨울엔 호랑이 형상의 별무리(서양에선 오리온자리)가 떠올랐다. 북두칠성 국자 밑에는 별 두 개씩 계단 모양을 이루는 삼태육성이 있었다. 탄생과 생육을 관장한다 하여 할머니들이 치성 드리는 별자리였다.

    소년은 성년이 되어 예조판서 손애의 맏딸과 결혼했다. 하지만 그의 일과는 바뀌지 않았다. 낮에는 주역과 경서를 읽고 밤에는 별자리를 헤아렸다. 이웃에는 20대 초반에 출사한 사촌 류숙이 살았다. 그는 공민왕이 왕자 시절(강릉대군) 인질로 원나라에 갈 때 그를 시종해 4년간 살기도 했다. 그 인연으로 중국을 드나들게 된 류숙은 올 때마다 새로운 책들을 가져왔다. 준기지학(천문학) 관련 서적도 포함돼 있었다.

    류방택은 32살(1352년)이 되어서야 환로에 오른다. 종8품 섭산원. 7년 만에 한 품계 오른 수직랑이 되었으니, 벼슬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1359년 침입했던 홍건적이 1362년 2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했다. 개경이 함락되고 왕은 남쪽으로 피난 갔다. 강화도로 피신했던 그는 사력(개인이 제작한 달력)을 제작해 강화병마사에게 제공했다. 전란 속에서 조정은 국력(국가의 달력)조차 만들지 못했고 백성은 시도 때도 절기도 모른 채 살아야 했다. 강화병마사는 월과 일, 절기와 일식 월식, 물의 들고 남을 따져 군령과 군정에 이용했다. 그제야 그의 천문지식이 조정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도비산으로 돌아가 나오지 않았다.

    중국 천문학은 음양오행설과 결합돼 하늘의 뜻을 읽고 땅의 도리를 전해주는 제왕의 학문이었다. 제왕은 하늘의 명을 받아 제위에 오르고 백성을 다스리는 존재였다. 천체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천문도는 왕조의 정통성과 권력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증거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부지런히 백성을 보살핀다는 경천근민(敬天勤民)은 제왕의 기본 책무였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 천체의 변화를 읽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춘분점과 추분점이 매년 서쪽으로 미세먼지만큼 이동하고 별자리도 바뀐다. 별의 위치도 2만6000년을 주기로 순환한다. 언젠가 북극성도 그 이름을 잃어버리리라. 그건 자전축이 23.5도 기운 채 돌아가는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류방택의 눈에 그런 변화가 들어왔다. 초저녁과 새벽 자오선을 지나 남쪽에 걸리는(남중) 별들이 고구려 때 다르고 고려 때 달랐다. 대제학을 지낸 정이오는 그런 그에 대해 “낙구의 이치와 천체의 운행을 꿰뚫어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금헌 류방택 행장)고 했다.

    전통천문학은 하늘을 3원 28수로 나눠 관찰했다. 자미궁, 태미궁, 천시궁이 3원이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미궁은 천상의 권부로, 천제와 종실이 거주하는 정궁이다. 태미원은 북두칠성 뒤편 남쪽 하늘에 위치한, 인간 역사를 관장하는 정무궁으로, 태미오제라는 다섯 천제가 번갈아가면서 주인 구실을 한다. 은하수를 끼고 있는 천시원은 하늘의 도시이자 시장이다. 천구를 둘러싼 하늘엔 28개 구역이 있고 제각각 대표 별자리(28수 수거성)가 있었다. 하늘은 1개의 특별시와 2개의 직할시 그리고 28개의 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태미오제는 수덕 화덕 금덕 목덕 토덕을 가진 다섯 천제로, 오덕의 운행에 따라 대위에 올라 세상을 관장한다. 누가 오르느냐에 따라 세상도 그에 맞는 덕의 소유자가 나라를 열고 제위에 오른다. 수덕이 화덕을 이기고, 화덕이 금덕을, 금덕이 목덕을, 토덕이 수덕을 딛고 일어섬에 따라(오행상승설) 나라의 흥망성쇠가 이루어진다.

    1367년 12월 조정의 부름에 따라 서운관에 들어가고, 1375년 실무책임자인 부정(종4품)이 되고, 1379년 원윤으로서 서운관을 총괄하는 판서운관사를 겸직한다. 예감대로 왕씨는 저물어가고 이씨가 일어서고 있었다. 1392년 공양왕이 왕위를 이성계에게 선위했다. 역성혁명이었지만 선위의 형식을 취했기에 고려의 서운관 일관들은 길일을 잡아 태조가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서운관 책임자 류방택은 “천시를 점쳐서 대위에 오를 일시를 선택”(<태조실록>)했고, 그 공로로 원정공신에 책봉됐다. 그러나 다시 도비산으로 숨는다.

    새 왕조는 피의 숙청을 통해 권력은 장악했지만 백성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부패하고 무능한 고려왕조에 등은 돌렸지만 신생 조선 또한 미덥지 않았다. 그런 백성의 마음을 잡아야 했다. 그러자면 조선의 개국과 이성계의 즉위가 ‘천명’에 따른 것임을 세상에 알려야 했다. 아울러 경천근민의 의지를 천명해야 했다.

    마침 고구려 초기 제작된 옛 천문도 탁본이 입수됐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별의 위치가 달라져 있었다. 관측과 계산을 통해 천문도를 다시 작성해야 했다. 서운관 관원들은 말했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류방택뿐입니다.’ 태조는 서산으로 사람을 보냈다. 얼마나 급했던지 태조가 몸소 예산 연봉장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고민 끝에 류방택은 부름에 따른다. ‘이것 또한 저의 운명’이었다. 그는 서운관 책임자(제조)가 되어 한양을 기준점으로 삼아, 고구려본과 비교하며 별자리의 위치 변화를 관찰했다. 우선 절기별로 초저녁과 새벽녘 남중을 하는 별을 헤아려 남중 시각과 거극도(천구 북극으로부터 거리 값)를 계산해 혼효중성도수를 완성했다. 아울러 28수 수거성들 사이의 거리인 수거도를 계산해 천문도를 다시 그렸다. 을해년 작성된 류방택 천문도에는 3원 28수의 별 1467개가 포함됐다. 그가 작성한 혼효중성도수와 천문도는 <신법중성기>라는 이름으로 1395년 6월 태조에게 보고됐다. 태조는 돌에 새겨 소실되거나 인멸되지 않도록 명했다. 그것이 ‘석각 천상열차분야지도’였다.

    그 직후 다시 잠적한 그는 82살 송도 취령산 밑 어디에선가 눈을 감았다. 두 아들에게 “나는 고려 사람으로 개성에서 죽으니, 내 무덤을 봉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금헌 공 행장’)고 유언했다. 별에서 내려와 다시 별이 되어 올라간 그였으니, 이 땅에 무덤을 둘 이유가 무엇일까.

    가로 122.5, 세로 211, 두께 12㎝의 흑요석에 새겨진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은 1985년 국보 228호로 지정됐다. 2006년엔 보현산 천문대에서 발견한 소행성의 이름을 ‘류방택 별’이라 하였고, 2007년엔 만원권 지폐의 도안을 바꾸면서 뒷면에 천문시계인 혼천의와 보현산 천문대 천체망원경 그림을 넣고, 바탕은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깔았다. 낮(앞면)을 지키는 건 세종대왕이지만 밤(뒷면)을 지키는 건 류방택이다.

곽병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