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美-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21) 경복궁 근정전

2017. 5. 11. 18:20美學 이야기



한국의 美-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21) 경복궁 근정전

                                                                                                            이강근




※ 이미지는 첨부파일 참조
▲ 경복궁 근정전, 국보223호, 30.21×21×22.3m, 태조3년(1394)



자연과 건축의 遠近…절묘한 儒家의 상징


   현재 남아있는 궁궐은 대부분 중앙집권체제였던 조선시대의 유산으로 서울에 집중돼있다. 그 중에서도 正宮인 경복궁, 이궁과 별궁인 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을 흔히 5대 궁이라 부르는데, 개체건물로 따져보았을 때 전문가들은 경복궁의 근정전과 경회루를 ‘최고의 궁궐건축’으로 꼽는다. 이번호에서는 근정전에 대해 짚어보고, 다음호에 경회루를 다루기로 한다.


   19세기 중반에 편찬·간행된 궁궐지의 편자는 勤政殿의 역할과 품격을 ‘受朝賀正殿’이라는 말로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왕이 입궐한 신하로부터 朝會와 賀禮를 받는 것이 근정전의 대표적인 구실이며, 위계와 품격은 경복궁의 정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근정전에서는 왕이 새해의 政令을 반포하거나 대비마마께 하례를 올렸는가 하면, 禪位를 한 경우 즉위식을 거행하는 장소였다. 창건 직후인 태조 때에는 고려의 유풍을 이어 승려를 모아 법회를 열기도 한 종교적인 공간이기도 하였다. 근정전 전면 좌우에 있는 鼎 모양 향로는 향을 피워 왕이 조회에 참석하려고 편전에서 여를 타고 정전으로 출발하였음을 전달하는 통신수단이었다.


   근정전은 몸채를 꽃살문으로 장식하고, 날아갈 듯 휘어 올라간 중층 지붕을 여러 겹의 공포로 받치면서, 다채로운 문양의 단청으로 채색된 채 난간과 장식으로 치장된 2중의 높은 돌기단에 세워져 있다. 근정문에 서서 바라본 근정전의 위용은 뒤쪽의 백악산과 왼쪽의 인왕산의 웅장한 산세로 인하여 장엄함마저 얻고 있다.


   두 산의 풍수적 의의는 익히 언급되어 온 것이지만, 시각적 의의도 자못 크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특히 백악산 정상부 오른쪽 산마루의 하강곡선이 근정전 2층의 처마선과 평행을 이루는 모습에서는 당시의 건축술에 경외감을 표할 수밖에 없다. 근정전과 주변 경관의 조화라는 큰 국면은 자연의 축과 건축의 축이 상생의 개념으로 만나고 있기에 성취된 것이다.


위계질서가 반영된 중층 공간
   九重궁궐이라는 표현은 宮禁 내부의 비밀스러운 중층 구조를 적절하게 암시한 말이지만, 궁궐 전체는 사실 前朝後寢의 내외 2중 구조 또는 외조-치조-연조의 3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궁궐 뒤 안쪽에는 침전, 후궁, 후원 등 생활의 장이, 궁궐 앞 바깥쪽에는 정전과 편전 등 조정이라는 정치의 장이 차례로 배치된다. 여기서 정전-편전-침전 등 3개 영역은 연속된 回 자형 건물로 표현되는데, 근정전 殿庭을 滿朝百官이 조회와 하례를 바치기에 적합하도록 깊이 있는 공간으로 마련한 반면, 회의나 경연 등 실내 활동이 주로 이루어지는 便殿 영역은 전정을 획기적으로 줄인 대신 思政殿·萬春殿·千秋殿 등 三殿을 병렬 배치하면서 행각의 폭은 조금만 좁혀 놓았다. 세 영역의 건물이 기능과 위계에 따라 넓이, 높이, 공간, 색채, 장식 등 모든 면에서 조화로운 구성을 성취했는지가 궁궐건축가의 수준을 평가하는 잣대이다. 세부에 충실하면서도 전체를 아우르는 능력이 뛰어난 궁궐건축가의 기량을 우리는 근정전에서 만날 수 있다.


   근정전과 조정은 回자 모양 건물에 힘입어 독립된 영역을 확보함으로써, 왕권의 권위와 신성성을 웅변하는 공간으로 형성된다. 폭이 2칸으로 複廊 형식인 이 回자 모양 건물은 남쪽은 통로용 월랑, 동쪽은 1층에 관광청, 양미고, 서방색 등의 기관이 들어 있고 2층은 융문루와 창고인 동행각, 서쪽은 내삼청, 예문관, 향실 등이 자리하고 2층은 융무루와 창고인 서행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근정전 뒤 북행각은 정전 영역과 편전 영역을 나누는 경계로서 사정전 쪽으로 열려 있는 內帑庫이다. 回자 모양 건물은 융문루, 융무루의 이름에서처럼 文武의 융성함을 기리면서 왕의 정치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시설로 활용되었다.


근정전의 내부 특징과 상징들
   이제 근정전 안팎을 중심에서 주변부로 이동하면서 살펴보자. 내부를 들여다보면 중심부에서 멀리 뒤쪽으로, 보좌와 천개로 구성된 당가 안에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배경으로 하여 놓여 있는 용상이 눈에 띈다. 보좌 사방에 설치된 계단 가운데 뒤쪽 계단은 임금이 편전에서 정전으로 납실 때 건물 뒤 가운데 문으로 들어와서 보좌에 오를 수 있게끔 마련된 계단이다. 寶蓋 천장과 건물 천장의 중심부에 저마다 새겨진 七爪龍은 일월오봉병에 표현된 天地와 함께 근정전이 ‘하늘의 명을 받아 다스리는 자’의 공간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오로지 기단 남쪽 계단에만은 용이 아닌 봉황을 새긴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 사신을 의식한 이중 암호체계의 일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근정전의 내부는 종교건축인 重層 佛殿(17세기 초 법주사 대웅보전, 18세기 초 화엄사 각황전)보다 훨씬 밝다(왜 이렇게 했을까). 1층과 2층 아무데도 벽을 두지 않고 창호를 사방에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창호지를 투과해 들어 온 은은한 빛은 5칸×5칸 규모의 전돌 바닥에 반사되어 어좌와 용상은 물론 1·2층 천장부의 공포와 단청 나아가 2층 천장의 칠조룡까지 환하게 밝혀 준다. 구름처럼 피어올라간 첨차, 1·2층 천정 둘레의 간략한 雲宮形 천개, 안쪽 높은 기둥과 창방을 장식한 넝쿨무늬 조각판, 2층 천정 소란반자의 단청 무늬 등도 세부까지 눈에 띌 정도이다. 내부 첨차의 구름모양조각은 외부 첨차의 가늘고 길게 뻗어 부드럽게 휘어 올라간 모습과 더불어 19세기 후반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 준다. 15세기 초의 숭례문이나 17세기 초의 창덕궁 돈화문, 창경궁 홍화문과 명정전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러한 모습은 18세기 말의 화성 팔달문이나 19세기 초의 창덕궁 인정전에서 이미 싹을 틔운 것인데, 이후로 더욱 가늘어진 채 힘없이 뻗어나간 모습으로 진전되어 흥인지문이나 기념비각에서도 표현되었다.


   근정전은 가장 빈번하게 조선왕조의 통치행위가 이루어졌던 경복궁의 정전이었므로, 품격이 한 단계 낮은 離宮의 정전(경희궁 숭정전, 창경궁 명정전)이 1층인 반면, 창덕궁 인정전과 함께 보다 높은 격식으로 높다란 돌기단 위에 2층으로 지어졌다. 근정전에는 인정전에 없는 돌난간과 돌짐승 조각이 특별한 상징성을 머금은 채 배치되었다. 난간 기둥의 방위에 맞추어 배열된 四神과 십이지 조각은 정전 둘레에 배치된 채 땅의 방위와 하늘의 시간을 주재하는 왕의 권력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편전(만춘전과 천추전)과 동서 성문(건춘문과 영추문)에 春秋를 배당하여 명명한 것도 자연의 순환적 질서에 순응하여 올바른 정치를 펴야 하는 곳이 왕궁이라는 天命觀을 왕으로 하여금 늘 명심하게 하려는 유가적 관인계층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경회루(33.7×28.2×21.5m)는 근정전 서행각 밖, 편전 영역 서쪽에 있다. 연못의 규모는 근정전 행각 영역과 비슷하며, 건물의 규모는 근정전(30.21×21×22.3m)보다 높이는 약간 작지만 면적이 훨씬 더 크다. 方池 동쪽 물가에 쌓은 사각형 臺 위에 세운 2층 건물이다. 오늘날과는 달리 못 둘레에 담장을 쌓아 독립된 영역으로 구성했었다. 정면 7칸, 측면 5칸 형식의 평면, 1층 부분의 長礎石 형식 돌기둥, 왕이 주재하는 잔치에 맞게 세 부분으로 분할된 2층 누마루 바닥 등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몸채에 비해 지나치게 장대한 지붕은 미관상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으나, 암벽이 두드러진 인왕산을 배경으로 하여 바라보면 육중한 지붕은 자연과 건물의 절묘한 조화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河崙이 “慶會란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난 것을 말한다…태조는 나라 얻는 근본을 勤政으로 하였다면, 전하는 경회를 근정의 근본으로 하여 前代에서 폈던 정사를 이어 힘쓰니, 창업과 계승 모두 참으로 훌륭하지 않은가. 단연코 三代의 경회와 정사를 이루어 영세토록 전하고 무궁한 景福을 누릴 것을 알리라”라고 읊은 ‘경회루기’에서 경회루와 근정전의 역할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 이강근 (경주대·미술사)

※ 필자는 동국대에서 ‘17세기 불전의 장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복궁’, ‘한국의 궁궐’ 등의 저서가 있다.
※ 출처-교수신문 200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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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朝鮮的法宮 正宮,景福宮 경복궁(上) 2012.05.26

      honeyp44.blog.me/130139105171   ♡그대 나를 기억하시..


[경복궁, 조선의 법궁] 근정전 월대, 4신상, 12지신상, 무쇠 드므  2010.09.07

        younghwan12.tistory.com/1803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경복궁, 그곳을 산책하며.... - 통인시장,근정전,사정전,자경전...   2017.04.25

       brunch.co.kr/@2691999/162   김태연의 브런치






경복궁 근정전(국보 제223호) -월대의 석수상

근정전 오른쪽 월대 코너에는 석수상 가족이 있는데, 어미가 새끼를 품에 안고 있다.
당시 석공들의 풍류와 해학이 넘쳐, 보는이들의 시선을 사로 잡으며, 미소를 끌어 내고 있다.


근정전은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여진 구조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다.


건물의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상들을 조각해 놓았다.



경복궁 영제교 난간석 위의 석수상이다

작성자 : 한정구 | 등록일 : 2015-01-12 | 조회수 :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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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으뜸 법전, 근정전(景福宮 勤政殿, 국보 제223호) 일원| 사진 갤러리

들풀/ 이영일 | 조회 50 |추천 0 | 2016.11.19. 09:20



  경복궁의 으뜸 법전, 근정전(景福宮 勤政殿, 국보 제223호)은 주변이 행각(行閣)으로 연결되어 둘러싸고 있다. 남쪽 회랑에 근정문(勤政門)을 두었고 그 바깥에 다시 외행각을 둘러 또 하나의 마당을 조성했으며, 중간으로 금천(禁川)이 흐르고 영제교(永濟橋)를 사이에 두고 외행각 남쪽에는 흥례문(興禮門)을 내었다.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 국보 제223호)은 조선시대(朝鮮時代) 으뜸 전각(殿閣)인 법전(法殿, 正殿)으로 그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린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鄭道傳)이 지었다. 궐(闕) 안에서 가장 장엄한 중심 건물로 왕권(王權)을 상징하며, 왕의 즉위식(卽位式)이나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조회(朝會),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외국 사절의 접견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태조 4년(1395)에 지었으며,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은 것이다.




  

   근정전(勤政殿)은 궁궐전각 밑에 놓인 섬돌의 월대 2단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만들고 앞면5칸, 옆면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여진 구조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다. 건물의 기단(基壇)인 월대(月臺)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상들을 조각해 놓았다. 건물 내부는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뒷편 가운데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병풍(屛風)을 놓았으며, 천장은 쌍용무늬보개와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은 회랑으로 둘러싼 마당, 즉 조정(朝庭)에 깔려 있는 화강암은 햇빛으로 인한 눈부심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다듬었다. 조정 한가운데 주변보다 약간 위로 올라온 길은 어도(御道)라 하여 왕만 다닐 수 있는 길이였다. 어도 좌우에는 문무백관 신하들이 직급별로 도열하기 위한 품계석(品階石)을 세웠다. 근정전 기둥과 조정의 박석에 동그란 쇠고리(薄石고리)가 박혀 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왕과 관원들이 조정에 모여 있을 때 햇빛이나 비를 가려 줄 천막을 치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


   근정전에서 열리는 조회는 한양에 거주하는 모든 문무백관이 참여하는 조회를 한 달에 네 번 열렸는데, 미관말직도 관복을 입고 모두 참여 하였다. 품계석 앞에 신하들은 자리를 깔고 앉았는데, 품계에 따라 표범가죽, 호랑이가죽, 양가죽, 개가죽으로 차별을 두었다.

   처마 밑의 그물과 오지창: 근정전 처마 밑에 그물이 걸려 있는데 이를 ‘부시’라고 한다. 최근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새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옛날부터 사용하던 것이다. 새의 배설물은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지만 강한 산성이라 목조건물인 궁궐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회랑이나 궐담 등 그물을 치기 힘든 곳에는 오지창을 꽂아 새들이 앉는 것을 막았다.





· 근정전 월대의 시설물: 다른 궁궐과는 다르게 난간을 부르고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의 사신(四神)과 십이지신(十二支神) 등을 조각해 놓았다. 이는 근정전의 위상과 법전으로서의 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물상으 근정전과 왕실을 지키는 신령스러운 동물들이며, 민화(民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학과 친근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기단 좌우측에는 향로가 있다. 이는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근정전에서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 향을 피우던 의기(儀器)이다. 궁궐의 주용 전각에 넓적하게 생긴 큰 독 ‘드므’를 설치하고 그 안에 물을 담아 놓았다. 하늘의 화마(火魔)가 그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놀라서 도망감으로써 화재예방을 위한 것이다.

  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킨 왕궁의 위엄을 갖춘 웅장한 궁궐건축이다.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景福宮 勤政門 및 行閣, 보물 제812호)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시대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새로 만든 것이다.

   근정문(勤政門)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양식이라 하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형태가 날카롭고 곡선을 크게 그리고 있어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행각(行閣)은 근정전의 둘레를 직사각형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데, 양식과 구조는 간결하게 짜여 있으며 남행각이 연결되는 곳에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있고 북측으로는 사정문(思政門)이 있어서 사정전과 연결된다. 동·서쪽으로는 각각 밖으로 돌출한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가 있다. 벽에 만든 창의 형태는 사각형의 모서리를 사선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근정문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남문 중 유일하게 2층 건물로 지어져서 법궁의 위엄에 맞게 조성되었으며, 궁궐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경복궁 흥례문(慶福宮 興禮門)은 경복궁에 있는 3개의 문 가운데 광화문(光化門)과 근정문(勤政門) 사이에 있는 중문(中門)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원래는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淸)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인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흥례문을 비롯한 주변 행각(行閣)이 모두 파괴되었다.

   흥례문(興禮門)은 주변 행각과 유화문(維和門)·기별청(奇別廳)·영제교(永濟橋)·어도(御道)·금천(禁川) 등과 함께 정부가 경복궁 복원사업을 시작하면서 역사바로잡기 차원의 일환으로 1996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뒤, 2001년에 복원하였다.


* 경복궁 금천 영제교와 서수: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3556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호)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으로 태조 4년(1395)에 한양(漢陽)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다.

   경복궁의 이름은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3년이 지난 후 완공되었다. 완공된 지 며칠 후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 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비롯해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경복(景福)은『시경(詩經)』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따온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1412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慶會樓)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경회루 남측의 궐내각사(闕內各司) 권역에 집현전(集賢殿)을 짓고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또한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報漏閣)을 세웠으며, 궁궐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簡儀臺)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欽敬閣)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玉漏機輪)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지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궁궐의 대부분을 훼손함에 따라 점차 궁궐의 제 모습을 잃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궐 안에 남아있던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제수각·함화당·집경당·향원정·집옥재·협길당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전해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궐의 왼쪽(동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宗廟)가 있으며, 오른쪽(서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제도인데, 이러한 형식은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으로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법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주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 37, 경복궁 (세종로)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34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