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문화재 - 고구려 고분벽화

2017. 5. 17. 00:05우리 역사 바로알기



       북한의 문화재 - 고구려 고분벽화(1)| ★ … 종착역

수제천 | 조회 471 |추천 0 | 2017.05.06. 18:37



 - 고구려 고분벽화 - 


   세계문화유산 고구려 벽화고분은  고구려 수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고구려는 수도를 졸본 - 국내성- 평양성으로 3번을 옮겼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평양 일대에 처음 그려졌다. 이후 점차 주변으로 퍼져나가 4세기에 들어서면서 수도였던 국내성 지역과 첫번째 도읍이였던 졸본 지역에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7세기 초가 지나면서 고구려 고분벽화도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천기의 고구려 고분중 벽화고분은 현재 약120여기 이상이 조사 확인되었으며 중국의 집안,환인,무순지역에 약38기의 고분벽화가 북한의 대동강 하류 유역인 평양과 그 주변 남포일대,황해도 안악군,황해북도 등지에 80여기 이상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있다.



안악 고분벽화 -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 

조성시기 - 357년(고국원왕27)

















「十三年十月戊子朔廿六日」

癸丑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相昌黎玄菟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安年六十九薨官」 


   영화(永和) 13년 [무자(戊子)가 초하루인]​ 10월 26일 계축(癸丑)에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 낙랑상(樂浪相)이며 창려·현도·대방태수(昌黎玄菟帶方太守​) 도향후(鄕侯)인 유주 요동(군) 평곽(현) 도향 경상리(幽州遼東平郭都鄕敬上里)의 동수(冬壽)는 그 자(字)가 ▨안(▨安​)이며, 69세에 관직[官]에 있다가 죽었다[薨].











덕흥리 고분벽화 -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조성시기 - 408년 (광개토왕18)


13군 태수」











▨▨郡信都縣都鄕中甘里」

釋加文佛弟子▨▨氏鎭仕」

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

龍驤將軍遼東太守使持」

節東夷校尉幽州刺史鎭」

年七十七薨焉永樂十八年」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廿五日」

乙酉成遷移玉柩周公相地」

孔子擇日武王選時歲使一」

葬送後富及七世子孫」

番昌仕宦日遷位至矦王」

造萬功日煞牛羊酒宍米粲」

不可盡掃旦食鹽食一椋記」

後世寓無疆」


   ▨▨군(▨▨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중감리(中甘里) (출신이며) 석가문불(釋加文佛)​의 제자인 ▨▨​씨(▨▨氏) ​진(鎭)​은 건위장군(建威將軍)·국소대형(國小大兄)·좌장군(左將軍)·용양장군(龍驤將軍)·요동태수(遼東太守)·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유주자사(幽州刺史)의 벼슬을 지냈다. 진은 77세에 죽었으니, 영락(永樂​) 18년 [초하루가 신유( 辛酉)인] 무신(戊申)​  12월 25일 을유(乙酉)에 ​(무덤을) 완성하여 옥구(玉柩)를 옮겼다​주공(周公)이 땅을 정하고, 공자(孔子)가 날짜를 택하였으며, 무왕(武王)이 시간을 가렸다. 그 해와 때가 하나같이 좋아, 장례[葬送]를 마친 후에는 그 부(富)가 7세에 까지 미쳐서 자손이 번창하고, ​벼슬을 함에 있어서는 날로 지위가 올라 후왕(矦王)에 이를 것이다. (무덤을) 짓는 데에 1만 명의 공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으니 술과 고기와 쌀밥이 다함이 없었으며, 아침에 먹을 염식(鹽食)이 한 창고나 있었다. 이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니, (이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이 끊임없을 지어다.







「견우와 직녀상」




개마총 고분벽화 - 평양시 삼선구역 노상동

조성시기 - 5세기 










덕화리 고분벽화 -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

조성시기 - 5세기말










쌍영총 고분벽화 - 평남 용강군 용강리 안서면

조성시기 - 5세기 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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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고구려를 다시 보자] <1>북한의 고분벽화…강서대묘(상)| 상식 교양

가원 | 조회 85 |추천 0 | 2004.02.06. 22:28
  

<span style="color: rgb(93, 93, 93); font-family: Gulim,굴림,AppleGothic,sans-serif; font-size: 12pt;">제목없음</span> [고구려를 다시 보자] -동아일보 기획보도-

<1>북한의 고분벽화…강서대묘(상)



강서대묘의 청룡도. 웅혼하고 힘찬 모습이 압록강의 구비구비를 닮았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중국의 고구려사빼앗기는 ‘역사의 현재성’을 일깨우면서 우리에게 심각한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고구려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를 두고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본보는 고구려를 오늘에 생생히 되살려 왜 고구려사가 우리의 역사인지 알리는 기획으로 ‘고구려를 다시보자’를 매주 게재한다. 중국에 맞서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고구려의 웅혼한 정신, 동 시대 세계 어느 문명과 비교해도 뛰어났던 고구려인의 미의식과 생활상, 고구려를 건설하고 발전시킨 사람들의 삶을 조명할 것이다.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증언하는 90여기의 고분벽화를 남겼다.우선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인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1998년 북한을 방문해 사신(四神)의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온 명지대 이태호 교수가 이를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강서대묘 묘실 안의 필자.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5년 전 풍성한 가을을 예고하던 8월 말 제주의 강요배 화백과 북한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평양의 서쪽 대동강 들판을 가로질러 멀리 솔밭 속의 세 고분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가슴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미술사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꿈에도 그리던 고구려 벽화고분, 강서대묘와 중묘가 누렇게 물든 들판 가운데 봉긋봉긋 자리 잡고 있었다.

비좁은 통로를 지나 들어선 고분 안은 깜깜했다. 잠시 후 라이트가 켜지자 묘실 내부는 생각보다 넉넉했다. 금세 보호막으로 설치된 유리가 드러났고 유리창에는 우유빛 성에가 끼어 짙은 안개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10여분쯤 지나자 서서히 성에가 걷히며 속살을 드러낸 벽화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황홀경이었다. 탄성이 절로 쏟아졌고 도저히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우리 일행을 안내했던 분들이 그런 나를 보고 꼭 미친 사람 같아서 속으로 걱정스러웠다고 했을 정도였다.

사신도와 천장벽화는 웅혼한 형상미와 화려한 색감으로 별세계를 연출하고 있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고구려 시대의 옛 그림으로 보이지 않아서였다. 내가 고분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고구려의 화가가 막 벽화를 마무리하고 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환각까지 일게 했다.

이들 벽화는 일제강점기부터 발간된 도록을 통해 눈에 익었던 터라 치밀하면서 탄력이 넘치는 그 형상은 벌써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색감은 전혀 달랐다. 잘 다듬은 판석(板石)에 직접 그린 벽화는 고분 내부의 습기를 머금고 그렇게 첫 형상미와 색채감을 선명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묘실 안에는 1400년 동안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상을 날고 있는 청룡 백호 현무 주작, 그리고 중앙 천장의 똬리를 튼 황룡, 구김살 없이 꿈틀대는 모습의 영물(靈物)들은 또 하나의 거대한 고구려였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자(覇者)로 군림했던 고구려,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의 100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 사람들의 당찬 기백이었다.

이들 벽화를 보며 나는 랴오둥과 만주지역의 억센 산세와 들판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가는 동안 고려항공 비행기 창문을 통해 벅찬 감동으로 내려다보았던 풍경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청룡이나 백호는 굽이굽이의 압록강을 닮았고 천장화의 황룡은 흰 구름을 쏟아내는 백두산을 연상시켰다. 그 광활한 땅에서 말을 달리던 고구려 사람들의 심상이 그대로 강서대묘와 중묘의 벽화에 낱낱이 새겨진 것 같았다.

사신도 벽면 위로 꽉 채워 그린 천장 받침의 벽화 또한 황룡과 어울려 화사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네 벽과 천장을 가르는 당초(唐草)무늬띠, 구름과 어울린 비천(飛天)과 신선(神仙)상, 숲이 있는 산악도, 기린과 봉황, 연꽃 및 인동 같은 상서로운 동식물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상상한 내세의 선계(仙界)를 보여주었다. 또 바닥에 나란히 놓인 두 관대(棺臺)의 장식무늬와 함께 전체 육면체 공간이 한 덩어리의 입체그림이었다.

또한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의 먹선과 적황록 등의 색채는 탄력이 넘치는 형상들에 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는 듯했다. 특히 붉은색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마력을 내뿜었다. 여기에 녹색과 황색 갈색의 화사하고 명랑한 어울림과 흰색의 마감은 절묘했다. 고구려 사람들이 그 대지에서 겪었던, 그리고 우리가 지금 여전히 만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맑고 투명한 원색을 그렇게 녹여낸 것 같았다.

힘차고 간결한 형상에 치밀한 선묘와 화사한 색채의 조화, 그것은 보편적인 회화미와 미학적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화려하다고 할 때, 힘차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또 기운찬 형상이 화려하다거나 치밀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강서고분의 벽화는 그 대조적인 양자를 함께 어울려 낸 것이다. 색채가 형상을 이처럼 완벽하게 만드는 사례가 또 있을까. 세계미술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회화미일 게다.

마음을 진정하고 고분 내부를 찬찬히 살폈다. 보호유리로 벽화를 잘 보존한 상태로 관람할 수 있게 해주어 안심이 되면서도 유리를 통해 그림을 확인하자니 아쉬움도 일었다. 그런데 강서대묘의 묘실 남쪽 통로와 연결된 벽화의 한 부분이 한 뼘쯤 유리 밖으로 드러나 있어 벽화기법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주작도의 가장자리에 당초무늬가 빙 둘러쳐진 부분이었다.

랜턴을 비추어가며 손으로 만져보니 밋밋한 석면에 채색만 한 게 아니고 무늬 부분이 약간 도드라지게 처리되어 있었다. 그 위에 칠한 채색은 붓질을 했다기보다 얕은 부조 위에 안료를 먹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화사하고 명랑한 색채감이 웅혼한 형상과 그처럼 잘 어울리게 하는 기발한 방식이구나 하는 생각에 감탄이 절로 일었다.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전의 강서대묘에 대한 발굴보고서나 글에서 읽지 못했던 기법이었다. 그리고 다른 어느 지역의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화법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이를 석면저부조화법(石面底浮彫畵法)이라고 이름 지어 보았다. 석면저부조화법은 넓은 판석으로 묘실 벽면을 축조해야 가능한,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기법이다. 무덤을 축조하기 전 치밀한 설계에 따라 디자인 계획을 세우고 벽화 제작에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판석에 밑그림을 따라 미리 사신의 외모를 뜨고 그 형상을 따라 석면을 아주 얕은 부조로 쫀 뒤 묘실을 조성해 놓고 벽화를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같은 강서대묘의 사신도를 비롯한 벽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 가장 기세등등하고 세련된 필치의 회화성을 자랑한다. 평양 근처의 진파리 1호분이나 중국 지린성 퉁거우지방의 후기 고분벽화에 보이는 사신도도 배경의 장식문양을 없애 버리고 사신을 각 화면에 단독 배치함으로써 공간을 대담하게 해석한 점이 특출하다. 더욱이 저부조의 정련되고 생동감 넘치는 필치와 원색조의 화려한 채색으로 마감해 벽화의 물상들이 실제 뛰쳐나올 듯 육박하는 감동을 자아낸다. 고구려 사람들이 창출해낸 양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중국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 대군의 침략을 이겨내면서 승리감에 고조된 시절, 고구려 회화의 최고 수준을 대변해 준다고 하겠다. 고구려는 패망 직전까지 그렇게 독자적인 문화의 절정기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태호 교수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진영기자 3Decolee@donga.com">ecolee@donga.com">3Decolee@donga.com">ecolee@donga.com


▼이태호교수 약력▼

△1952년 전북 옥구(현 군산시) 출생

△1974년 홍익대 회화과 졸업

△1978년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석사)

△1978~82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1982~2002년 전남대 미술교육과 교수

△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문화재전문위원


<출처-동아일보>


 






[고구려를 다시 보자]<1>북한의 고분벽화…강서중묘(중)| 기사스크랩

푸른솔아 | 조회 13 |추천 0 | 2004.03.05. 17:23



[고구려를 다시 보자]<1>북한의 고분벽화…강서중묘(중)

   강서대묘와 중묘, 그리고 벽화가 없는 고분 소묘(小墓)는 대안(大安)시 북쪽 무학산(舞鶴山)의 서쪽 능선을 따라 이어진 구릉지 아래로 나란히 무덤군을 이루고 있다. 대동강 하류 광활한 들판을 내려다보는 위치다. 이곳의 옛 지명은 우현리(遇賢里)였고, 세 고분의 발굴 이후 삼묘리(三墓里)로 개칭됐다.

   이 강서고분은 1905년 강서군수 이우영(李宇榮)에 의해 고구려 벽화고분 가운데 가장 먼저 세상에 알려졌다. 그 8년 뒤 벽화가 그려진 무덤이라는 소문을 재확인해 고구려 유적으로 보고서를 쓴 것은 일본인 학자 세키노 사다(關野貞)이다.



▶ 고구려를 다시 보자 시리즈 가기 


강서중묘의 현무도 모사도. 이태호 교수는 현무 아래의 산악도가 풍수지리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지난 회에 살펴본 강서대묘는 고구려 벽화고분 가운데 누구나 주저 없이 최정상급으로 꼽는 것이다. 사신도(四神圖)를 비롯한 벽화가 가장 기세 있고 세련된 필치의 회화성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평양 근처의 진파리 1호분이나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 퉁거우(通溝) 지방의 후기 고분벽화에 보이는 사신도와 달리 배경의 장식문양을 없애 버렸고, 사신을 각 벽면에 단독 배치함으로써 공간 해석을 대담하게 한 점도 특출하다.

    강서중묘는 이러한 강서대묘 벽화와 더불어 고구려 후기인 7세기 전반의 대표적 사신도 벽화고분으로 쌍벽을 이룬다. 하지만 중묘의 벽화는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웅혼한 기운이 떨어져 대묘의 벽화에서 한 발 쇠퇴한 것으로 평가된다.

 

   강서중묘는 대묘의 북쪽에 있었다. 대묘의 벽화가 주는 감동과 충격이 워낙 컸기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중묘에 들어서게 되었다. 두 무덤의 동일한 사신도 벽화들이 오버랩되어 진정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무덤의 외형은 대묘보다 조금 작았지만, 묘실의 넓이는 한 변의 길이가 3m 남짓해 거의 차이가 없었다. 묘실로 들어가는 통로가 대묘보다 2배가량 긴 대신, 천장은 축조방식이 달라 대묘보다 1m가량 낮은 2.5m 정도였다.

 

   묘실을 둘러보니 돌 다루는 솜씨와 정밀한 축조방식이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한 벽면에 하나씩의 대형 판석을 세워 실내를 꾸몄다. 대묘가 두세 층의 판석을 짜 맞추어 벽면을 이룬 데 비해 발전된 축조술로 조성한 것이다.

 

천장의 짜임새는 네 모서리를 삼각형 받침으로 모줄임한 강서대묘나 일반적 벽화고분의 말각조정식(抹角操井式)이 아니다. 평행받침을 2단으로 좁혀 들게 얹고, 넓은 화강암 개석(蓋石)으로 정교하게 마무리한 평천장이다. 그런데 그냥 평평한 하나의 너른 돌을 얹은 것이 아니라 마치 종이를 접어 만든 상자의 뚜껑을 덮은 것처럼 큰 돌을 쪼아 얹은 점이 돋보였다. 단순한 짜임새이면서도 진전된 석조 기술이었다. 치밀한 설계 디자인 없이는 불가능한 구조였다.

 

네 벽의 사신도 중 청룡 백호 주작은 대묘에 버금가는 세련미를 유지했다. 탄력이 넘치는 그 형상은 벌써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흰색과 붉은색, 초록색과 갈색이 찬연하게 어울린 색감은 전혀 달랐다. 특히 흰색 바탕에 붉은색을 올리고 먹선으로 마무리한 백호도가 그러했다. 사납게 포효하는 호면(虎面)의 표정에 웅비하는 형태미가 패기 넘친다. 대묘의 그것보다 한결 유연하고 환상적이었다. 


 

   강서대묘의 사신도보다 가장 못한 것은 현무도였는데 힘이 빠지고 다소 못생긴 점이 눈에 띄었다. 거북의 형상이 다리가 기다란 야생동물 같고 달리는 자세가 아닌 정지된 모습이어서 그런 느낌을 준 것 같다.

 

그런데 현무의 아래로 깔린 산악도가 눈길을 끌었다. 이는 대묘의 남쪽 벽면 주작도 아래 그려진 산악도와 함께 주목되는 그림이었다. 이 산악도는 필자가 25년 전 쓴 석사학위 논문의 주제였기에 가슴을 쳤다. 실물을 대하지 않고 논문을 썼기에 더욱 그랬다.

 

산악은 대칭되는 두 봉우리를 중심으로 여러 겹 이어져 산맥처럼 보였다. 옆으로 길게 늘어선 능선은 부드럽고 완만하면서도 꾸불꾸불한 선이 동시에 구사되어 있었다. 굵고 가는 선으로 농담의 변화를 주고, 그 필선 안에 엷게 갈색을 칠해 산의 부피감을 표현함으로써 다른 벽화의 산수 표현과는 사뭇 다른 맛을 풍겼다.

 


   이러한 산악도는 5∼6세기 무용총의 평면적이고 도식적인 산악 표현에서 발전한 모습이며, 실제 외경의 산세와 비슷했다. 마치 강서무덤을 감싸고 있는 무학산의 산세를 보는 것 같았다. 이런 실경풍의 산악 표현은 당대 중국의 산수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수준이다.

강서중묘와 함께 진파리 1호분과 강서대묘에 산악도가 등장하는 것은, 사신의 방위신적 의미와 연관지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듯하다. 풍수지리적 근거 아래 입지조건의 결함을 보충하려는 뜻에서, 사신도에 산악이나 나무 그림을 첨가하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다.

 

   두 층의 천장받침에는 인동당초문이 장식되고, 넓은 판석의 개석 중앙에는 만개한 연화문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해와 달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 남북에 봉황을, 네 구석에는 연화문편을 장식해 여백이 넉넉한 대칭 화면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천장화의 구성은 그 구조적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후기의 새로운 변화 양상인 듯하다. 더욱 단순화된 묘실 구조와 벽화 형식이 백제 말의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으로 이어진다. 



왼쪽부터 강서대묘, 소묘, 중묘가 무덤군을 이루고 있다.



▼사신도는 후기고구려의 시대정신 ▼

   고구려 후기인 6세기 후반∼7세기 전반의 고분벽화는 사신도를 주제로 삼고 있다. 다실(多室) 양실(兩室) 단실(單室)로 다양했던 석축 묘실의 구조가 단실로 정착되면서, 실내의 네 벽에 동서남북 혹은 좌우전후의 방향에 맞추어 각각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장식하는 묘제가 자리 잡은 것이다.

 

지린성 지안의 퉁거우 사신총과 5회분 4호와 5호묘, 평양지역의 진파리 1호와 4호분, 강서대묘와 중묘, 호남리 사신총 등 10여기가 후기 사신도 계열 고분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들 사신도는 당시 동아시아 미술사를 대표할 만한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4∼6세기 전반만 해도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제는 묘 주인의 초상화를 비롯해 인물풍속도, 장식문양, 사신도 등으로 다양했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이후 주제가 사신도 하나로 급격히 좁혀졌다.

 

그 주제 선택과 회화성은 고구려 후기의 시대형식이자 시대정신이었다. 이 시기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의 패권 다툼, 수·당의 통일로 이어지는 중국 대륙의 정세 변화 속에서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고, 멸망 직전까지 승리를 자축하곤 했다. 이런 시대상황으로 벽사((벽,피)邪)와 수호의 상징이었던 방위신(方位神), 즉 사신이 일상적 생활신앙과 함께 내세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미술]] [고구려를 다시 보자]<1>북한의 고분벽화…(하)덕흥리| 상식 교양

가원 | 조회 49 |추천 0 | 2004.02.16. 23:22
  

제목없음

[고구려를 다시 보자]

<1>북한의 고분벽화…(하)덕흥리

덕흥리 고분 앞칸 북쪽 벽 왼쪽에 그려진 묘의 주인공 유주자사 진.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평양에서 서해안의 진남포로 평야지대를 가로질러 포장도로를 신바람 나게 달렸다. 서해갑문과 남포지역 공업단지를 트럭들이 오가는 산업도로였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북쪽 길로 접어드니 병풍처럼 이어진 산 능선을 배경으로 대안(大安)시 무학산(舞鶴山)이 우뚝 앞을 가로막는다. 학이 춤추는 형상이다. 먼 선사시대부터 이곳의 강변을 일구고 살았던 사람들도 신령스럽게 여겼을 터이다.》

   무학산 주변에는 많은 고구려 벽화고분이 산재해 있다. 현재 90여기의 벽화고분 중 60여기가 평양 주변에 있는데 40기가량이 무학산 일대에 집중돼 있다. 덕흥리(德興里), 대안리, 약수리, 태성리 등의 벽화고분이 산언저리를 끼고 있고, 강서대묘와 중묘가 산의 서쪽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다. 

               

   강서를 지나 용강군에는 용강대총과 쌍영총이 유명하다. 대동강 건너 남쪽 황해남도 안악지방에서는 안악1·2·3호분과 복사리 벽화고분이 발견된 바 있다. 이들 가운데 무덤 주인의 이름과 조성시기가 밝혀진 안악3호분(357년)과 덕흥리 벽화고분이 주목을 끌었다. 


                               



덕흥리 고분 안칸에서 앞칸으로 나가는 통로 오른쪽 그림을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 묘의 주인공인 유주자사의 행차를 알리는 듯 두 기병이 호령하고 있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광개토대왕, 중국 랴오둥 지방에 고구려 관리 파견 증명

   덕흥리 고분은 1976년 8월에 발굴되었다.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이 77세 때인 ‘영락 18년(408)’에 숨졌다는 내용을 포함해 벽화 장면마다 먹으로 글을 써 놓고 있어, 광복 후 우리 고고학의 큰 성과로 꼽힌다. 고분의 문자 기록은 고구려에서는 드문 예로 벽화에 대한 도상(圖上)해석을 가능케 해 준다. 

               

   ‘영락(永樂)’은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 연호이다. ‘유주’는 랴오둥(遼東)지방이고, ‘자사’는 지방장관으로 지금의 도지사 격이다. 이미 5세기 초 고구려가 랴오둥을 지배해 지방관을 파견했음을 알려주는 고분이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무학산 기슭의 남쪽 자락 솔밭 언덕에 오롯하게 썼다. 반지하에 조성한 묘실은 통로가 낮아 허리를 잔뜩 굽히고 들어서야 했다. 벽화의 상태는 양호했고, 앞칸과 안칸 두 개의 방에 고구려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1600년 동안 벽화 속에 갇혔던 고구려 사람들이 나를 향해 마구 뛰쳐나오는 것 같다. 

               

   무덤 주인인 ‘진’은 부채를 들고 마치 부처님이나 도사처럼 평상에 앉아 계신다. 그 앞에는 음식을 차릴 석상(石床)이 놓여 있다. 앞칸이 제사를 지낸 공간임을 말해 준다.

초상화의 서쪽 벽으로는 유주에 속한 13개 고을의 수령인 태수들이 자사를 향해 상하로 도열해 있다. 남벽에는 유주자사와 관리들의 회의 장면도 보인다. 동벽은 질서 정연한 행렬도이다. 이들 모두 유주자사의 공적인 관청(官廳) 생활 장면이다. 

               

   궁륭(穹窿)식으로 좁힌 앞칸의 천장에도 벽화가 빼곡하다. 천장 밑부분에는 산악과 사냥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 위로는 신선들과 동물들이 배열되어 있다. 고구려인의 내세관을 반영한 그림이다. 비천과 신선, 사람 얼굴을 한 네발동물이나 조류, 머리가 둘인 새, 날개 달린 잉어 등 장수와 부귀를 나타내는 영물(靈物)들은 해 달 별과 함께 고구려 사람들의 하늘신앙을 읽게 해 준다.                

   앞칸과 안칸의 통로 부분은 유리로 막지 못해 회벽의 벽화 상태를 그대로 드러냈다. 회벽은 단단했고 벽화 수법을 정밀히 살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림은 묘주인이 저택에서 관아로 이동하는 행차인 모양이다. 소가 끄는 두 대의 수레를 호위하는 기마병과 시녀들이 상하로 각각 그려져 있다. 특히 선도 기마병을 보면 “쉬이, 물렀거라, 자사 납신다” 하고 외치는 표정에 자못 해학미가 흐른다. 단숨에 그린 붉은색과 먹의 선묘는 빠른 붓질이 느껴진다. 

               

●리얼리즘 화풍으로 드러나는 고구려만의 특성

   시신을 모시는 안칸의 벽화는 무덤 주인의 사적인 가정 생활상으로 채워져 있다. 약 3×3m 넓이의 정방형 안칸에 들어서면 바로 맞은편으로 거대한 차일이 쳐진 안에 앞칸과 같은 자세의 유주자사 진의 초상화가 있다. 그런데 의아스럽게도 부인의 자리가 비어 있다.

이 오른편으로는 소가 끄는 수레 상하로 긴 저고리의 주름치마를 입은 양갈래머리의 소녀와 높은머리로 올려 묶은 여인들이 보인다. 또 말을 타고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히는 마사희(馬射戱) 장면, 불교의 칠보행사, 연꽃이 활짝 핀 연못, 2층 누각의 창고가 사방에 빙 둘러 배치되어 있다. 

               

안   칸의 천장은 네 벽면 모서리에 기둥과 목조건물의 뼈대와 불꽃무늬 등을 그려 넣어 앞칸에 비해 단순한 구성을 보여준다. 마치 목조건물의 집안에 들어앉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벽화는 관 속의 죽은 자가 생전의 생활상을 편안히 관망하도록 꾸민 것 같다. 무덤은 혼백이 살아남아 안주하는 성스러운 거처인 셈이다. 


               


   이렇게 4∼6세기 고구려인은 자신들의 삶과 명예를 무덤 안에 재현해 놓았다. 더욱이 중국의 그 시절과는 완연히 다른 화풍(畵風)으로 고구려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벽화들이 누구도 왜곡할 수 없는 우리 고구려의 살아 있는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지 않은가. 당대의 현실과 이상을 담은 고구려 고분벽화는 진정 리얼리즘 예술의 승리이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덕흥리 벽화는 회벽화… 강서대묘-중묘는 석벽화”▼

                               


덕흥리 고분 앞에 선 필자(왼쪽)와 북한 안내원. 고분 너머 봉긋하게 솟아 있는 것이 무학산이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고구려 고분벽화는 크게 회벽화(灰壁畵)와 석벽화(石壁畵) 두 가지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주로 많이 활용된 기법이 회면화법이다. 벽돌이나 잡석, 또는 다듬은 돌로 묘실을 쌓고 석회를 발라 편평한 화면을 만든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일종의 프레스코 기법으로 가장 보편적인 벽화법이다 .

               

   덕흥리 벽화고분에서 확인한 대로 고구려는 석회 다루는 기술이 최고였다. 최근 고구려 회벽화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예보다 불순물이 적고 순도가 높은 석회 혼합기술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 탓에 고구려의 회벽화는 회면이 떨어진 부분을 제외하면 변색이 적고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석면화법은 강서대묘와 중묘의 벽화처럼 너른 판석이나 반듯하게 자른 돌로 묘실을 축조하고 돌 위에 직접 그리는 방식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양질의 화강암이 산출되는 지역이라야 가능한, 고구려의 독자적 방식이다.

석면에 안료가 적응함으로써 며칠 전에 그린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고, 무덤 내부의 장엄 효과도 높다. 석벽화는 회면화법보다 후대에 유행한 기법으로 고구려 후기 경제력이나 문화적 진보의 결과일 것이다.


<출처-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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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걸어요 통일의 길 제2부 탈북민에게 듣는 북한] 4. 북한의 문화유산


북한 국보 1호 평양성 … 경복궁·불국사도 北 문화재?

2017년 04월 24일(월) 00:00

북한의 국보 4호 대동문.



   우리나라 국보 1호는 숭례문이다. 북한의 국보 1호는 뭘까? 경복궁·불국사 등 남한에 있는 문화재도 북한 유적에 포함됐다는데 어떻게 된 걸까? 유네스코가 지정한 북한의 세계유산은 어떤 것이 있을까?

    통일부 통일교육원의 ‘북한의 문화재 실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북한문화유산 답사기’, 인터넷언론 ‘통일뉴스’ 등을 통해 북한의 문화유산을 둘러본다.

◇경복궁·불국사가 북한 문화재?=북한의 문화재는 2008년 기준으로 2816점이다. 유물 208점(국보 87, 준국보 121), 유적 1916점(국보 193, 준국보 1723), 천연기념물 469점, 명승지 223점 등이다. 우리나라 1만1507점에 비해 4분의 1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는 북한의 문화재 정책이 유적과 유물 등 물질문화재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북한의 국보 1호는 평양성이다. 남한의 국보 1호는 숭례문이다.

북한의 유적 중에는 ‘교시유적’이라는 것이 있다. 김일성·김정일이 특별하게 중요하다고 평가한 유적이다. 교시유적에는 경복궁·불국사·석굴암·첨성대·황룡사 9층탑 등 남한에 있는 문화재도 포함돼 있다. 북한에서 교시유적은 학술적 연구나 보존 사업에서 우선적인 대상이 된다. 이는 천연기념물의 영역에서도 최고지도자와 관련한 자료들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김일성·김정일이 직접 심은 ‘릉라도 산벗나무와 전나무들’이 북한 천연기념물 1호인 것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는 고구려고분군과 개성 역사유적지구 등 2개가 있다.

    생물권보존지역으로는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 칠보산 등 4곳이 지정됐다.

    이 중 칠보산은 북한이 ‘함북 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명산이다. 사시사철 풍경도 달라 봄에는 꽃동산, 여름에는 녹음산, 가을에는 홍화산, 겨울에는 설백산이라고 불린다. 북한에서 운전원이었던 탈북청년 김영남씨는 “북한 여행지 중 가장 추천하고 싶은 곳은 함북 칠보산”이라며 “금강산마냥 칠보산도 내칠보·외칠보·해칠보로 나뉘는데, 기암절벽이 금강산보다 빼어나다”고 자랑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생생…고구려 고분벽화=세계유산 ‘고구려고분군’은 평양 부근에 있는 5개 지역 고분군 63기다. 평양시 역포구역 동명왕릉, 진파리 1호분 등 15기,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사신무덤 등 34기,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 고분 3기,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 강서세무덤 3기, 안악3호분, 독립고분 8기 등이다.

유네스코는 고구려고분군을 ▲고분 벽화는 고구려 문화의 걸작이며 고분구조가 정교한 건축공법을 보여주고 ▲고구려 매장문화는 인근 국가에 영향을 끼쳤으며 ▲고분은 고대 매장 양식의 중요한 사례라고 꼽았다.

고구려 고분은 분묘 형태상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돌로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흙으로 덮은 봉토무덤이다. 이 중 평양 고구려 고분은 5∼6세기 후기 고구려 유적으로, 대부분 봉토무덤 형식으로 벽화를 그린 무덤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동명왕릉은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36호로,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함께 옮겨왔다고 전해지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무덤이다.

가로 34m, 세로 34m, 높이 11m의 원형으로 규모가 가장 크다. 이 왕릉 뒷쪽에는 10여 기의 고구려 무덤이 있고, 앞에 정릉사지가 있어 현재 전해지는 고구려 왕릉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능구역이다.

    고구려 고분군이 유명한 이유는 바로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이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안악 3호분과 강서대묘다.

안악3호분은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있으며, 고구려 고국원왕릉으로 알려졌다. 이 무덤의 벽화에는 무악의장대, 주인공이 문무관을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장면, 시녀를 거느린 안주인, 외양간, 차고 등 생활지역 등이 그려져 있다. 특히 회랑에는 왕으로 상징되는 ‘백라관’을 쓴 주인공이 수레를 타고 문무백관·악대·무사 등 250여명에 달하는 인물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어, 당시 사회·문화 등 고구려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평안남도 강서룬 삼묘리에 있는 국보 제3호 강서대묘는 다양한 동물이 그려져 있어 주목받는다. 여기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현무’ 그림이 있다. 북쪽 벽에 그려진 현무는 거북과 뱀 모양을 한 상상의 동물로, 청룡(동)·백호(서)·주작(남)과 함께 북쪽을 상징하는 신이다.

◇국제도시 개성…찬란한 고려=개성은 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년간 고려의 수도였다. 한때 인구가 70만 명에 이르렀다. 중국·동남아·아라비아 등과 교류한 국제도시였다.

개성의 역사유적은 크게 3개 분야로 나눠진다. 고려 왕실의 흔적인 궁궐터와 왕릉(고려왕릉·만월대·첨성대), 도심방어시스템을 보여주는 성벽과 대문(개성 성벽·남대문), 충신 정몽주를 기리는 각종 유적 및 교육기관(고려 성균관·숭양서원·선죽교·표충각)이다.

    유네스코는 ▲고려왕조 이전 한반도에 있었던 여러 국가들의 문화적·정신적·정치적 가치의 동화를 보여주고 ▲5세기 이상 이웃국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된 증거를 보여주고 ▲통일국가 고려시대의 문명을 보여주는 특출한 증거라고 등재 이유를 설명했다.

개성 송악산 북쪽과 만수산의 남쪽 일대에는 고려시대 왕과 왕후의 무덤 20여 기가 남아 있다. 개성역사유적에 포함된 왕릉은 태조 왕건릉(북한 국보유적 179호)과 공민왕릉(국보유적 123호), 고려 29대 충목왕의 무덤인 명릉과 인근 무덤,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무덤군인 칠릉떼 등이다.

    고려왕릉은 통일신라 말기부터 유포된 풍수사상에 따라 주로 산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조성됐다. 3∼4층의 기단을 놓은 후 맨 윗단에 봉분을 쌓고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특히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의 무덤이 나란히 놓인 공민왕릉의 보존상태가 뛰어나다. 규모·형식에서 조선왕릉의 원형이 되는 무덤으로 꼽힌다.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숭양서원은 1573년(선조 6년) 개성의 유림들이 정몽주의 집터에 세운 서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의 하나로 정몽주의 글씨와 초상화·지팡이·의상 등이 보관돼 있다. 숭양서원 인근의 선죽교는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살해된 곳이다. 1216년 다리가 만들어졌을 때 선지교(善地橋)로 불렸지만 다리 주위에 충절을 뜻하는 대나무가 돋아났다고 해서 선죽교(善竹橋)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고려 성균관 건물은 현재 고려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고려시대 유물 1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송악산 기슭에 있던 고려의 궁궐은 조선시대에 모두 소실됐다. 현재는 그 터인 만월대만 남아 있다. 궁궐은 사라졌지만 개성 남대문(국보급문화재 제34호)이 남아 고려시대 건축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전한다. 남대문 안에는 연복사종이 있다. 이 종은 1346년 만들어져 금강산의 연복사에 있다가 1563년 절이 소실되자 이 곳으로 옮겨졌다. 20세기 초까지 타종돼 개성사람들의 ‘시계’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박정욱기자 jwpark@kwangju.co.kr


www.kwangju.co.kr/read.php3?aid=1492959600602643248   광주일보






  도리(2003-05-30 09:14:09, Hit : 4907, Vote : 127
 북한의 고구려 고분 벽화 중국의 방해로 세계 문화유산 등록 불투명....(펀글)



北고구려 벽화고분 세계문화유산 등록 불투명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것으로 알려졌던 북한의 고구려 벽화 고분이 등재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커졌다. 문화재청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등에 따르면 유네스코 산하 세계문화유산위원회의 의뢰로 중국인 전문가가 최근 작성한 심사 보고서가 고구려 벽화의 보존 상태 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6월30일~7월5일 파리에서 열리는 제 27차 세계유산위원회 정기총회에 제출될 예정이며, 21개 이사국이 참여하는 이 총회가 관례적으로 보 고서의 견해를 따라 왔다는 점에서 고구려 벽화 고분의 세계문화유산 등록 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 

   유네스코 자문기관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소속 중국인 학자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보고서는 “북한 고구려 고분군의 상태와 관리 분야 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보류(defer)하는 게 바 람직하다”고 결론지었다.

구체적으로는 고분이 침수돼 벽화가 심하게 손상됐고, 조명 시스템을 갖 추지 못했으며, 모니터링 방법과 관리자 훈련이 미숙해 전반적 보완이 필 요하다는 등의 내용이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관계자는 28일 “최근 벽화 보존ㆍ관리에 문제가 있 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받았다”면서 “북한측이 이를 보완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이번 회의에서는 등재가 불가능하며 1년 이상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화재청도 이날 “25일 이 보고서를 확인한 후 손상 부분 등에 관한 사실 여부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국제교류팀의 김금련 사무관은 “전혀 예 상하지 못한 내용의 보고서가 나와 놀랐다”면서 “훼손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등록을 지원해 온 정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북한의 고구려 벽화 고분은 히라야마 이쿠오(平山旭夫ㆍ73) 일본 유네스코 친선대사 등 일본 인사들이 중심이 돼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해왔다.

유네스코 조사단은 2001년 등록 후보인 평양지역의 진파리고분군(1~9호) 솔매동고분군(11~15호), 강서 고분군, 쌍영총 등 고분 35기를 현장 방문, 영문 보고서를 통해 벽화가 ‘완벽하다(full and complete)’는 평가를 내 린 바 있다. 당시 이 고분군들은 동아시아인들의 생사관의 변화를 보여주 고, 서기 3~7세기 인류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설명하는 건축적 앙상블의 탁 월한 예를 보여주는 것으로 지정 초안에 올랐다.

최종 결정을 한달 정도 앞두고 전혀 다른 내용의 전문가 보고서가 나온 데 대해 국내 전문가들은 중국측의 지속적 방해공작을 중요한 요인으로 들고 있다. 인접국 전문가의 조사가 필요하다는 유네스코의 기본 방침에 따라 문화유산 등재 조사를 위한 감독관에 중국학자가 임명될 때부터 국내 학자 들 사이에는 고구려 벽화 고분이 제외될 수 있다는 우려가 무성했다. 


   임효재 서울대 고고미술학과 교수는 “북한 고구려 벽화 고분의 세계문화 유산 등록이 추진되면서 중국 학자들이 세계 고고학회가 열릴 때마다 강하 게 반대했다”며 “겉으로는 보존ㆍ관리 문제를 들지만 실제로는 다른 고 려를 깔고 있다”고 말했다.

즉, 중국 역사의 일부로 여기고 있는 고구려 유적이 한민족의 역사 유적 으로 지정되는 것을 꺼리는 데다 지안(集安) 장군총 등의 세계문화유산 등 록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마당에 일단 북한의 관련 유적이 먼저 지 정되면 같은 ‘고구려 고분’으로 지정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 이다.

임 교수는 “이번 보고서로 세계유산등록이 완전히 물 건너 간 것은 아니 지만 중국이 반대하는 한 결과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며 “앞으로 북한 문화재에 대한 보수ㆍ관리 등 체계적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

한편 문화재청은 북한이 이 고분벽화의 세계문화유산등록을 추진하던 200 0년부터 문화재 보수ㆍ관리 명목으로 연 10만 달러(약 1억 2,000만원)을 유네스코 본부를 통해 지원해 왔으며 2006년까지 이를 계속할 예정이다.
최진환 c 기자 choi@hk.co.kr

한국일보 2003-05-28 17: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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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짜피 우리 정부 당국이나 주류학계는 믿을게 못되는 게 현실인데..과연 이러한 사태를 어떻게 해야할까요...... 뿌리 없는 한국인이 될지도..뭐 요즘 신자유주의자들은 민족의식이니 역사니 하는것들에 학을 띠며 하루 빨리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의식이 사라져야한다고 하는 판이니...........


www.coo21.rgro.net/bbs/zboard.php?id=con_4&page=894&sn1=&divpag..  






세계문화유산(10)/ 북한/고구려 고분군| ‥‥‥‥세계文化 遺産房

慧堂 | 조회 27 |추천 0 | 2015.04.16. 12:06


세계문화유산(10)/ 북한

고구려 고분군

(The Complex of the Koguryo Tombs; 2004)

 

   고구려 고분군(高句麗 古墳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는 고구려시대 후기의 고분군이다. 대부분이 평양직할시와 평안남도 남포에 걸쳐 있다. 2004년 7월 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 쑤저우(蘇州)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과 지린 성에 걸쳐 소재하는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군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 유산에 등재된 북조선의 고구려 유산은 5개 지역 고분 63기(벽화 고분 16기 포함)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산에 비해 규모는 적은 편이다. 강서 대묘(江西大墓)를 포함해 동명왕릉(東明王陵), 쌍영총(雙楹塚), 약수리 무덤, 수산리 무덤 등이 대표적이다. 안악 3호분처럼 많은 무덤 안에 아름다운 벽화가 있다. 벽화는 10,000여 개의 고구려 고분 중 90곳에서만 발견된 매우 드문 것으로 고분군의 주인은 왕족이거나 계급이 높은 귀족일 것으로 여겨진다.



강서대묘

 


안악 3호분



무용총




덕흥리 고분




용강대묘




약수리 고분




동명왕릉



   중국과 한반도에서 발견된 10,000기 이상의 고분들 중에서 거의 절반이 고구려 고분이며, 이러한 고분들은 왕을 비롯한 왕족, 귀족들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분의 벽화는 당시의 생활상을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 주는데 많은 고분 중에서 90기에서만 이러한 벽화를 찾아볼 수 있다. 북한의 5개 지역에 있는 63개의 고분이 고구려 고분에 포함되는데 이들은 5~6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강서 삼묘(江西三墓)와 동명왕릉, 그리고 16개의 다른 고분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의 범위는 오늘날 중국 북동부의 지린(吉林) 성에서부터 북한의 평양시까지 아우르고 있으므로, 양국의 역사 유적들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역사적 기원을 둘러싼 분쟁의 소재가 되었다. 북한이 역사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고구려가 한반도의 옛 왕국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중국의 역사가들은 고구려의 유물들이 지리적으로 중국 국경 안에 있으며 중국이 소유하고 관리해 왔다는 점에서,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해 왔다. 양국은 각자의 영토에 모두 속한 고구려의 유산을 별도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하는 것을 ‘비정치적’인 행위로 여기는 데 동의했고, 현재 유적을 보존하는 동시에 관광지나 연구 자원으로 활용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당시에 한반도의 삼국 중 하나였던 고구려는 700년 동안 26명의 왕이 통치하며 존속했다. 그들은 모두 고구려인의 행복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군사력을 증강하려고 노력했다. 고구려는 북방의 침략자들에 대항해 싸워야 했기 때문에 고구려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단결되어 있고, 전술 또한 잘 습득하고 있었다. 고구려에는 독특한 문화와 더불어 높은 수준의 교육, 사회, 정치, 군사 체계가 발달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들은 풍부한 색채와 색조를 갖추고 있다. 벽화에 그려진 춤추는 여인, 훈련 중인 전사, 하늘의 새와 용, 강의 물고기, 숲의 짐승, 바람, 구름 등은 매우 현실적이고 생생하여 마치 그림 속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역사적 배경; 고구려는 기원전 277년부터 서기 688년까지 1,000여 년 가까이 존속한 왕국이다. 중국 랴오닝(遼寧) 성 환런(桓仁) 현에 세워진 고구려는 3세기에 지린 성 지안(集安) 시의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427년에 오늘날의 평양시 태성산 지역으로, 그 후에는 오늘날 평양시 중심부의 장안성이 있는 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평양 지역은 오랫동안 고대 왕국 고조선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라는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와 국가 발전에 무척 힘을 썼다. 고구려는 중국 북동부에서부터 한반도의 절반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시키며 동아시아의 강력한 왕국으로 부상했다가 668년에 멸망했다. 고구려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유산은 돌과 흙으로 된 봉분으로 덮인 수백 개의 석조 고분들이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흙 봉분이 덮이고 벽화들이 그려진 고분이 일반화되었고, 다른 지역에서도 이러한 고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고구려 고분은 대개 지난 수천 년 동안 몰래 발굴되어 왔기 때문에,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발굴된 고분은 그 수가 매우 적다. 따라서 발굴된 유물 역시 온전한 것이 매우 적다. 많은 고분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1905년에 이르러서야 고구려 고분은 비로소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최초의 과학적인 연구 및 기록은 1911년과 1940년대 사이에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기적인 연구와 발굴, 기록은 1945년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고분에 들어가는 것을 제한하거나 새로운 입구를 만드는 등의 소소한 보존 조치는 194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다. 정기적인 관리와 보호, 보존 활동은 적절한 법적 조치가 마련되고 유산 관리자를 지정한 1946년에 시작되었다.


cafe.daum.net/nestmoon/Efr2/10   찻잔속에 달이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