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숨은벽 들꽃다회 - 둘 / 完
20170602 금요일, 맑고 무더움, 가끔 세찬 바람
등산로 아래 수직에 가까운 암벽에서 자라는 둥근잎털개회나무
이 나무는 잎의 모양이 다소 길쭉해 보여 그냥 털개회나무로 불러도 좋겠다.
개체 마다 잎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인수봉 뒷태
-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시조 온조왕 조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삼각산의 옛 이름인 부아악(負兒岳)은 이 인수봉의
귀바위가 튀어나온 형상이 마치 아이를 업은 어머니의 모습과 닮아서 붙혀진 이름이다.
후대의 문헌인 <고려사>, <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도 부아악의
승계지명(承繼地名)을 삼각산(三角山)으로 지목하고 있다.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 2대왕인 유리왕을 피하여 남하하다가 한산주(漢山州)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도읍지를 정할 때, 뒤를 쫓아오는 고구려 군사들을 방어하기 쉬운 곳인
한성에 13년간 도읍을 정하였다가, 어머니인 소서노가 죽고 말갈족이 침입하자
철갑 개마무사들에게는 천연 해자와 같은 한강 건너편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한
기사가 보이며, 김부식이나 승(僧) 일연이 활동하던 고려시대에만 하더라도 도읍이
현 개성으로 개경(開京)이 한산주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한산주(현 서울)를 방문하는
고려인들이 삼각산인 북한산의 뒷모습에 익숙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신라시대 부터 고려시대 까지 북한산(北漢山)은 지금 처럼 삼각산을 지칭하는
산이름이 아니라, 한강을 중심으로 하여 한산주(漢山州)를 두 지역으로 나누어서
한강 북쪽 지역은 북한산주로, 그리고 한강 남쪽은 남한산주(南漢山州)으로 부르던 지역명이였다.
즉 북한산, 남한산은 특정한 산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명칭으로 쓰여왔다.
長曰沸流 次曰溫祚 恐後(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 馬黎等十臣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岳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濟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雛忽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漢成帝鴻佳(嘉)三年也
큰 아들은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고 했다.
두 왕자가 후에 태자에게 인정은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대 오간과 마려 등 10여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니,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
마침내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려고 하니 10명의 신하가 말했다.
오직 하남의 땅만이 북쪽으로 한수를 끼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그 천연의 요새와 이로운 땅은 또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여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으니, 이때가 한나라 성제 홍가 3년(기원전 18년이다.)
출처 : 삼국유사(일연)
김원중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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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시조 온조왕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弥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弥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陁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 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 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於是沸流謂弟溫祚曰 始 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疣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弥鄒忽以居之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 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아버지가 추모이다.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세 명의 딸만 있었는데, 주몽을 본 후,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는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뒤를 이었다. 주몽은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은 비류, 둘째 아들은 온조라고 한다.(혹은 ‘주몽이 졸본에서 월군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이곳에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이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그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다.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사람 연타취발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비류, 둘째는 온조였다. 어머니는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컸으므로, 주몽은 소서노를 극진히 사랑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과 같이 대우하였다. 주몽은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류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그 후 그가 주몽의 뒤를 잇게 되었다. 이 때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설도 있다. 한 편,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 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부아악을 오른 비류, 온조 2013.05.19
cafe.daum.net/bhmou/p3ri/1 북한산성(北漢山城)
백제의 도읍변천사를 간단히 정리해 보면,
* 온조 원년(BC 18년) 한수 이북에 위례성 도읍을 세우다,
* 온조 14년(BC 5년) 한수 이남(한산)으로 천도. 하남 위례성
(百濟 溫祚王 取之 十四年(BC 5년) 丙辰 (漢 哀帝 建平 二年) 築城)
* 개루왕 5년(132년) 광주(북한산성)로 천도(三國史 云 蓋婁王 五年(132) 壬申 築北漢山城
漢山 本高句麗 漢山郡 今 廣州 <「三國史記」地理志> )
* 근초고왕 371년 한산으로 천도.[近肖古王 二十六年(371) 辛未 (晉 簡文帝 咸安 元年)
- 移都. 광주시 신도읍 북한리에서 한산(한양)으로...]
* 이후 蓋鹵王 二十一年(475) 乙卯 (宋 蒼梧王 元徽 三年) - 高句麗 長壽王 來圍 蓋鹵 出走遇害 城遂廢.
* 문주왕 475년 공주로 천도
* 성왕은 538년 사비로 천도
* 의자왕 660년 백제 멸망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때의 초기백제 위치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한강)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온조왕은 처음에 한수 이북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국모(소서노)가 돌아가시고 말갈이 쳐들어오자 도읍을 한수 이남으로 옮긴것으로 보인다. 한수는 지금이 한강, 한산은 지금의 서울(한양) 정도의 위치라고 보여진다.
일산 신도시와 한강 하류
고도가 높아지자 주위 사방의 조망이 시원해진다.
오봉, 오봉능선, 도봉주능선,신선대, 도봉삼봉(자운봉,만장봉,선인봉)
우이령과 수락산
신선대,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금마타리
수직 절벽 아래에 아구장나무
아구장나무
아구장나무 접사
국수나무
잎 뒷면에 털이 촘촘히 나있는 멍석딸기
바위 모양으로 보아 흔히 물개바위라고 부른다
오른쪽이 노고산
인수봉과 숨은벽 암장
북쪽에서 바라본 삼각산 - 좌로부터 인수봉, 숨은벽, 백운대
백운대 정상의 태극기와 우측의 장군봉
좌로부터 사패산, 오봉, 도봉산, 뒤로 희미한 포천 운악산
암벽 틈새에서 자라는 둥근잎털개회나무
좌로부터 장군봉, 염초3봉
금마타리
인수봉과 숨은벽
숨은벽 암장
북쪽에서 바라 본 삼각산
절벽 저 아래 바위틈에서 자라는 둥근잎털개회나무
좀양지꽃
숨은벽 암장 아래 숨은문을 지나다
아구장나무
- 꽃의 색갈은 연한 붉은 색으로 참조팝나무를 닮아 있으나,
참조팝나무는 새가지가 연두색인데 비하여,
아구장나무는 진한 갈색을 띄고 있어서 서로 교잡된(?) 아구장나무로 보았다.
아구장나무와 호랑꽃무지
암벽에서 자라는 둥근잎털개회나무
아구장나무
국수나무에 배추흰나비
족두리풀 - 뿌리를 건조시킨 약재가 세신(細辛)
애기나리
단풍취 - 봄에 어린 싹은 산나물
참새발고사리 - 중생대에 지구상에 나타난 양치식물은 어렵다.
함박꽃나무 - 산목련
북한에서는 국화를 함박꽃나무로 정하고 목란(木蘭)이라고 부른다.
석양빛이 투과되는 단풍나무
산골무꽃
족두리풀
익어가는 귀룽나무 열매
하오의 숲
금마타리
참새발고사리
노박덩굴과의 나래회나무 꽃
숨은벽 서벽
나래회나무 꽃
수직에 가까운 암벽에서 자라는 둥근잎털개회나무
- 꽃대의 액생이 뚜렷하다.
숨은벽 계곡의 정상부에 있는 호랑이굴
호랑이굴
고갯마루를 오르자 노고산과 일산 시내 그리고 저멀리 인천 앞바다 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현장에서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고 꽃이 연한 자주색을 띄고 있어
묵은 가지 끝에서 곧추 꽃대가 올라오는 (정생頂生) 꽃개회나무가 아닌가 하였으나,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로 사진을 확대하여 보니 묵은 잎겨드랑이에서 꽃대가
액생(腋生)하는 둥근잎털개회나무로 판단된다.
미군정 당시 미스김라일락의 종자를 가져간 미더 교수의 보고서에도
북한산의 둥근잎털개회나무(일명 : 둥근잎정향나무)에는 꽃이 흰색과 보라색
두 종류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숨은벽 호랑이굴 고갯마루에서 바라본 서울 강북구 일대
세잎양지꽃
생명의 위대함 그리고 끈질긴 삶이 한국인의 심성을 그대로 닮아있다.
미역줄나무
끝물인 쪽동백나무
- 중부지방 이북에서는 가을에 까많게 익는 쪽동백나무와 생강나무
열매를 짜 기름을 얻어 동백기름이라 하여 머릿기름으로 사용하였다.
작은 우주 - 세잎양지꽃과 산꿩의다리
백운대 오름길의 복원한 북한산 성벽과 아구장나무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불교문헌의 번역과 유통’ 학술대회 개최 |
‘대승기신론’ 최고본(最古本) 주석서 발견 주장 제기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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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10월 09일 (화) 18:15: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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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케다 마사노리 (池田 將則) 교수 |
금강대(총장 정병조) 불교문화연구소(소장 김천학) 인문학연구센터는 9일 본관 사이버강의실에서 ‘불교문헌의 번역과 유통’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됐다. 이날 학술대회는 대승불교의 대표적 논서인 ‘대승기신론’의 최고본(最古本) 주석서가 발견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끌었다.
현재까지 ‘대승기신론’의 최고본(最古本) 주석서는 중국 남북조시대 열반학파 담연(曇延)의 ‘대승기신론의소’로 알려져 있었으나 오늘 발표에서 이 보다 앞선 새로운 주석서가 발견됐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이케다 마사노리(池田 將則)HK교수는 학술발표에서 자신의 논문 ‘쿄우쇼오쿠(杏雨書屋) 소장 돈황문헌 [大乘起信論疏](擬題,羽333V)에 대하여’을 통해 “‘대승기신론’의 내용을 ‘대승기신론의소’와 비교한 결과 후자가 전자를 인용하거나 축약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에서 원효의 ‘판비량론’으로 추정되는 사본 일부가 존재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고마자와대학 후지이 준(藤井 淳)교수는 ‘일본에 현존하는 불교 사본 문헌 수감(手鑑)과 주경(注經)’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통해 이 같이 주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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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초아 기자 Choa@dhnews.co.kr |
수락산과 불암산
불암산과 별내지구 상공에 나타난 물결모양의 구름
-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는 이런 물결모양의 구름이 지진 일어나기
1주일 전에 나타난다고 하여 많은 걱정을 하고 있으나,
비교적 지진 안전지대에 속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일주일이 지났어도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참고자료 :지진 전에 하늘 구름의 징조가 보인다는데 믿어지나요
지진 전에 하늘 구름의 징조가 보인다네요 믿어지나요? 우리나라도 지진으로부터 안전하지가 않 ...
2017.04.09 | 블로그 > 네이버블로그 blog.naver.com/viwing/220978495173
애정 비행하는 산까마귀 한쌍
- 바람 가르는 쉬~익 쉬~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행한다.
산까마귀들이 허니문 비행을 하고 있으니 지진 걱정이랑 저만치에...
의상능선과 뒤에 응봉능선 그리고 한강
좌로부터 멀리 인천 계양산, 김포지구 한강, 더 멀리 인천 앞바다, 무의도, 영종도
한강과 곂쳐 있는 응봉능선, 구파발 신도시개발 지구
의상능선 용혈봉, 용출봉, 국녕사, 의상봉
좌로부터 수락산, 현리 운악산, 화악산, 용문산, 불암산
좌로부터 만경대, 보현봉, 문수봉, 나한봉,나월봉, 앞에 노적봉
백운대 등로길섶 난간 옆 암벽에 둥근잎털개회나무
- 세찬 바람으로 나뭇잎이 나부낀다.
듬직한 사내를 닮은 인수봉
백운대 돌사다리
척박한 환경에도 생명들은 자라고..... 아구장나무와 팥배나무
한참을 올라 갔어도 산까마귀들의 사랑비행은 계속되고...
아구장나무
제2롯데빌딩과 만경대
서서히 저녁노을이 물들어 가고 ...
세찬 바람 속 노린재나무
원효 ‘판비량론’연구서 2권 동시 출간
불교논리학이자 인명학서로 알려진 원효의 〈판비량론〉에 대한 연구서가 나란히 출간됐다. 한신대 김상일 교수의 서구 논리철학과 비교한 〈괴델의 불완정성 정리로 본 원효의 판비량론〉과 동국대 김성철 교수의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연구〉가 그것.
〈판비량론〉은 현장과 그 제자들이 고안했던 논증식에서 발생한 논리적 오류를 원효가 지적한 철학서다. | 사진설명: 원효스님 저서 ‘판비량론’ 필사본. |
그간 판비량론에 대한 번역은 초서체로 쓰여진 필사본과 산실된 부분 등으로 각 연구자간 분석의 차이와 오류도 컸다. 김성철 교수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해서체 교정본을 초서체 원문과 대조해 나름의 교정본을 완성했다. 또 당대 최고의 현장의 유식비량에 대한 원효의 비판 뿐 아니라 현장의 제자였던 규기가 원효에게 반박한 논쟁도 처음으로 다루고 있다.
‘괴델의…’ 괴델.원효 유사성 논증
‘원효의…’ 1차 자료 교정본 작성
김상일 교수는 20세기의 인물인 서구 수학자 괴델과 7세기 인물인 원효와의 가상대화 등을 통해 그들의 공통점을 찾고 있다. 1930년대 서구 수학자인 괴델은 수학에서 발생한 역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선학자를 비판, 당시 수학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역설조차도 비결정적인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유식 안에서 발생하는 역설을 회통으로 제거하고자 한 현장을 비판한 원효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것. 김 교수는 “괴델이 부정 논증을 통하여 긍정 논증을 하고, 다시 그것을 부정하여 긍정하는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긍정도 부정도 모두 동시에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원효 역시 〈판비량론〉11절에도 이와 같은 역설의 논리를 그대로 사용, 괴델의 정리와 병행해 시대의 최첨단 사유구조를 향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판비량론〉11절에는 ‘소리는 영원하다’라는 성론사적 입장과 ‘소리는 무상하다’는 승론사적 입장을 동시에 만족시킨다는 모순, 즉 이율배반의 예가 제시되고 있다.
판비량론에 대한 기존의 연구로는 최초로 〈판비량론〉 필사본이 발견된 일본의 우후키하라 쇼신(富貴原章信)의 ‘판비량론’과 신현숙의 ‘원효의 인식과 논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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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과 인수봉
노고산 일대 전경
- 멀리 감악산 , 개성 송악산, 연천 고대산
백운대 정상의 기미독립선언 각자(刻字)
상장능선 뒤로 여성봉, 사패산, 오봉, 도봉주능선, 신선대, 도봉삼봉(자만신)
백운대 정상에서 저녁노을
백운대 정상 마당바위에서 헌다(獻茶)
현대판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茶汀 형님이 네팔학교로 떠나시기 전에 주신 다포(茶布)
주간리뷰 : 『원효의 판비량론』(김상일 지음, 지식산업사 刊, 2003, 760쪽) |
괴델로 읽어낸 '불교 해설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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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다. 그는 신앙과 논리, 철학과 과학, 기독교와 불교, 수학과 형이상학, 서양 사상과 동양 사상을 전부 설명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 물리학과 한국철학'(1991)에서는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와 홀론·파동설과 이기론·프랑크 상수와 정다산의 閭田制를 상호 비교하며, '수운과 화이트헤드'(2001)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와 에피메니데스의 논리·동학의 신과 천도교의 신·힌두교의 인격신과 불교의 비인격신·수운의 至氣와 과정신학의 창조성·브래들리와 화이트헤드와 수운 등을 상호 비교하며, '원효의 판비량론'(2003)에서는 칸트의 이율배반과 불교의 양론·마이농과 원효·칸토어의 집합론과 원효의 유식론 등을 상호 비교한다. 실로 그의 학문 세계는 문자 그대로 종횡무진이고 사통팔달이다. 김상일은 단순히 동양 사상과 서양 사상이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그들의 유사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제시하려고 노력하며, 그것도 관념적인 글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그의 첫째 특성이다.
김상일의 또 다른 특성은 그가 철학을 전개하면서 언제나 논리학, 특히 '거짓말쟁이의 역설'로 표출된 논리학을 주된 매개체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특히 불교의 경우에는 철학이 곧 논리학이며 논리학이 곧 철학이라고 말하며, 논리학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 역설에 얽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모든 종교의 중심에는 바로 이런 역설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의 둘째 특성이다.
"서양철학에서 논리학은 부착물 정도다. 반면 불교에서 논리학은 철학의 중심이요 핵심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과정에서 논리학을 배운다"-본문 37쪽에서. 그러나 김상일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가 '국적 있는 학문'을 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이다. 조동일의 四學八方論으로 표현하면, 그는 '수입학'과 '시비학'과 '자립학'의 경지를 넘어서 '창조학'을 선사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이런 태도는 실로 서양 이론을 그대로 적용시키려는 대부분의 우리나라 학자들, 혹은 단지 그들의 학문 대상(소재)이 서양이 아니라 동양이거나 한국이라는 이유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 국적 있는 학문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소수의 학자들에게 큰 경종이 돼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의 셋째 특성이다.
1969년 일본의 한 엿장수의 손에서 발견된 이래 최근에 언론을 통해 약간 그 가치가 재조명됐으나 아직도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원효의 '判比量論'은 한국 최초의 유일한 논리철학서, 불교를 인명 논리학의 三支作法으로 명쾌하게 설명한 해설서다. 김상일은 이미 1974년에 한태동 교수의 '의상과 원효에 대한 소고: 민족 연구의 일단면으로'를 접할 때부터 이를 무려 30년 동안 연구해 왔다. 이제 그 결과물이 바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풀어본 원효의 판비량론'이다.
김상일은 앞의 세 가지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다만 오지랖이 넓은 그가 가끔 너무 단순화시키거나 아예 삭제한 부분을 어떻게 만회하고 있으며, 국적 있는 학문을 하려는 사람이 받아야 할 국수주의자라는 비판을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되받아치는 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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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에 본 원효봉능선과 일산 야경
- 멀리 노란 가로등 불빛을 이으면 한강 ...
******* 상당히 여러 장의 사진들과 다소 장황한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 보니 본의 아니게 해가 저문지도 모르고 산행을 하게 되었네요.
혹시라도 제 글과 사진들이 북한산국립공원 내에서 생태보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뜻에서 올린 것이오니 너그럽게 해량하여 주시옵고, 우리의 귀중한
생명자원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茶 宗 베드로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