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13. 01:24ㆍ경전 이야기
[스크랩] 선(禪)의 깨달음, 그 정체와 문제점 ▣ 글 모음방
선(禪)의 깨달음, 그 정체와 문제점 김성철 서울대 치과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 동국대 인도철학과 석·박사과정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저서에 《중론》《원효의 판비량론 기초 연구》를 비롯하여 다수의 논문이 있다. 최근 우리의 ‘선’은 재탄생을 위한 산고(産苦)를 겪고 있다. 근원의 불교인 인도불교의 시각에서 선을 분석함으로써 선을 소생시키는 데 일조(一助)하고자 이 글을 쓴다. 결론부터 말하면, ‘선’이란 ‘초기불교의 진정한 부흥’이다. 소승의 현학주의와 대승의 허구, 금강승의 번잡함을 모두 넘어서 일격(一擊)에 분별고(分別苦)를 타파하는 ‘최상승(最上乘)’의 가르침이 바로 ‘선’이다. 1. ‘선’은 선인가 ‘선’은 선인가? 다시 말해 동아시아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은 인도불교에서 말하는 선(禪: dhya?a)과 그 의미가 같은가? 선에 대한 혼란은 일차적으로 그 용어의 혼란에 기인한다. 우리는 선사들의 문답을 선문답(禪問答), 이런 문답이 담긴 문헌을 선어록(禪語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도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선문답이나 선어록에는 선(dhya?a)이 아니라, 반야(prajn??)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보시(da?a), 지계(s뇹?a), 인욕(ks.a?ti), 정진(v┓rya), 선(dhya?a), 반야(prajn??)의 육바라밀 가운데 ‘불교의 명상수행법’인 선이 아니라 ‘불교적 지혜’인 반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선문답과 선어록인 것이다. 우리의 앎에는 지식과 지혜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앎은 그 성격이 상반된다. 지식은 쌓아서 이룩되고 지혜는 부수어서 얻어진다. 《반야심경》이나 《중론》과 같은 반야의 가르침에 등장하는 무수한 부정표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앎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 세상에 더러운 것도 있고 깨끗한 것도 있으며, 무엇이 생기기도 하고 무엇이 사라지기도 하며, 눈도 있고, 코도 있고, 귀도 있고, 혀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본래 아무 것도 없다. 《반야심경》에서 노래하듯이 눈도 없고, 코도 없고, 귀도 없고, 혀도 없으며, 무엇이 생기는 일도 없고, 사라지는 일도 없으며,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다. 엄밀히 보면 《반야심경》에서 노래하듯이 모든 것이 해체된다. 선사들 역시 제자들과의 문답이나 행동을 통해 이런 해체의 지혜를 가르쳤다. 기상천외한 답변을 통해 제자의 고정관념을 해체하지만, 그런 해체에 집착할 경우 그런 해체 역시 다시 해체해 버린다. ‘부처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 마조는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다’라는 가르침을 내리지만, 시일이 지난 후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말을 바꾼다. 구지 선사는 일반인들에게 한 손가락을 들어 설법했지만, 그 한 손가락의 설법에 집착했던 동자승은 거꾸로 한 손가락이 없음을 보고 깨닫는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대답했던 조주는 얼마 후 태연하게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반야경에서 ‘모든 것이 공하다’고 가르치지만, 그런 공에 집착할 때 다시 ‘공도 역시 공하다(空亦復空)’고 그 계형을 상승시키듯이 반야의 가르침, 해체의 가르침에서는 궁극적으로는 그 가르침조차 해체시킨다. 그리고 이런 해체의 가르침이 가득한 선어록은 인도불교적 견지에서 볼 때 선에 대한 어록이 아니라, 해체의 지혜인 반야에 대한 어록이다. 이렇게 볼 때 《육조단경》에서 말하는 신수와 혜능의 게송도 둘 중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 각자 본심의 반야의 성품을 포착해서 게송 하나를 지어보라는 홍인의 지시에 따라 신수와 혜능은 각각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짓는다. 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의 나무요 心如明鏡臺 마음은 밝은 거울 면과 같구나 時時勤拂拭 부지런히 털고 털어서 勿使惹塵埃 속진(俗塵)이 묻지 않게 할지어다 - 신수 - 菩提本無樹 보리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 밝은 거울 또한 면이 아니어서 本來無一物 원래 아무 것도 없는데 何處惹塵埃 어디에 속진이 묻겠는가? - 혜능 - 《단경》의 편집자 하택 신회(668∼760)가 남종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 두 수의 게송을 대비시킨 것인지는 몰라도, 이 두 게송은 그 우열을 가를 수 없다. 양자의 주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도불교적 견지에서 볼 때, 신수는 ‘선’ 수행에 대해 노래했고, 혜능은 ‘반야’ 지혜에 대해 노래했던 것이다. 양자를 비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범주의 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하는 일이다. 선어록에는 우리의 일상적 사유를 뒤집는 선사들의 일화들이 가득하다. 다시 말해, 신수의 게송과 같은 선 수행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혜능의 게송과 같은 반야의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선어록은 선어록이 아니라 ‘반야어록’이라고 불러야 하고, 선문답은 ‘반야문답’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또 선종은 ‘반야종’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인도불교의 견지에서 볼 때 동아시아의 불교계에서 말하는 선은 선이 아니라 반야다. 현재 제3의 수행법들이 범람하게 된 것은 ‘선문답’이나 ‘선어록’이라는 이름에 속아 과거 조사 스님들의 ‘반야의 가르침’을 ‘선에 대한 가르침’으로 오해하여 좌선 수행법의 개발에 소홀했기 때문일 수가 있다. 그러나 선어록에는 반야에 대한 내용만 가득할 뿐 ‘좌선 수행법’에 대한 가르침은 극히 적다. 앞으로 불교적 ‘좌선 수행법’들이 많이 발굴되고 개발되어 선어록에 담긴 반야의 가르침을 보완해야 할 것이다. 1) ‘부처 되기’와 ‘부처라는 개념을 해체하기’ 초기불전의 수행자들은 ‘다시는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 아라한’을 수행의 목표로 삼았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아비달마 논서에서 이러한 아라한을 수행의 정점에 위치시키긴 하지만, 이에 곁들여 3아승기 100겁에 걸친 석가모니 부처님의 ‘보살’ 수행을 소개한다. 여기서 말하는 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을 의미하는 ‘고유명사’였다. 그러나 대승불전이 출현하면서 보살은 ‘보통명사’로 그 외연이 확장되었고, 불자의 수행목표는 아라한이 아니라 보살도를 통한 성불로 상승하였다. 성불하려는 사람, 즉 부처가 되려는 사람은 3아승기 100겁에 걸쳐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도를 닦아야 한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의 삼신(三身)을 완성하는 것인데, 법신은 공성(空性)을 자각함으로써 완성되기에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무량한 공덕을 갖춘 아뢰야식인 보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3아승기 겁에 걸쳐 공덕을 쌓아야 하고, 32상(相) 80종호(種好)를 갖춘 육체인 화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후 다시 100겁에 걸쳐 상호(相好) 업을 쌓아야 한다. 이것이 아비달마 논서나 대승불전에서 말하는 성불의 방법이다. 복덕과 지혜를 구족한 분이 부처님이라고 할 때 복덕의 완성은 보신과 화신으로 구현되고 지혜의 완성은 법신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선에서는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다’, 더 나아가 ‘내가 곧 부처다’라든지, ‘누구나 다 부처다’라든지, ‘두두물물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3아승기 100겁이 걸려야 이룩되는 성불이 선 수행을 할 경우 단 한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대승불교의 교학에 비추어 볼 때 누군가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태어날 때부터 그 모습이 32상 80종호를 갖추고 있어야 하고, 그 아뢰야식 내에는 3아승기겁에 걸쳐 쌓은 무량한 공덕이 저장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에서는 깨달음의 조건으로 32상 80종호의 외모와 무량공덕의 아뢰야식을 갖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깨달은 선승이 ‘내가 곧 부처이다’라고 말할 때, 그 부처는 대승교학에서 말하는 부처와 그 의미가 같지 않다. 그러면 ‘내가 부처다’라거나 ‘누구나 부처다’라거나 ‘두두물물이 부처 아닌 것이 없다’는 선승의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단적으로 말해, 이는 ‘부처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한 말’일 뿐이다. ‘반야경’의 공 사상에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갖가지 개념에 실체가 없다는 점을 가르친다. 예를 들면, ‘긴 것’에는 실체가 없다. ‘짧은 것’과 대비할 때 ‘긴 것’이 되었지만, 더 긴 것과 비교하면 짧아지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그것이 처한 상황에 따라 긴 것이 되기도 하고 짧은 것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긴 것’이라든지, ‘짧은 것’이라는 생각은 연기(緣起)한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실체가 없다’는 것은 ‘공하다’는 말과 그 의미가 같다. 이렇게 모든 개념들은 연기한 것이기에 그 실체가 없다. ‘부처’라는 개념 역시 우리가 사용하는 ‘갖가지 개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긴 것에 실체가 없기에 내 눈앞에 놓인 볼펜도 긴 것일 수가 있고,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도 긴 것일 수가 있으며, 내 눈썹의 길이도 긴 것일 수가 있고, 내 손가락의 길이도 긴 것일 수가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긴 것일 수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라는 개념에 실체가 없기에 모든 것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실체가 없다’는 절대부정의 조망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의 ‘반야’적인 조망이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절대긍정의 조망은 일즉일체(一卽一切)의 ‘화엄’적인 조망이다. 그래서 ‘그 어디에도 부처가 없고, 그 어떤 것도 부처가 아니지만, 모든 곳에 부처가 있고 모든 것이 부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선사들의 교화대상이 되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불교와 성불에 대해 강한 집착을 가진 수행자들이었다. 그래서 선어록에는 부처와 불교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가르침이 자주 등장한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상식적인 대답은 ‘불성이 있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열반경》에서 말하듯이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一切衆生 悉有佛性). 그러나 그런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불교적 앎이 아니다. 불교적인 앎, 다시 말해 반야 지혜는 그런 지식체계를 포함한 모든 고정관념들이 해체될 때 체득된다. 그래서 조주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상식을 초월하여 ‘무(無)’라는 답을 던졌던 것이다. 그때 질문자의 지식체계는 모두 무너지면서 해체의 지혜인 반야가 체득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조주의 이런 ‘무’라는 대답이 또 다른 고정관념으로 굳어지자, 조주는 ‘유(有)’라고 답함으로써, 지식으로 변질된 ‘무’를 해체시킨다. 지금은 상투적 문답으로 회자되기에 그 맛을 상실했지만, 부처의 정체를 묻는 물음에 대한 선사들의 다종 다양한 답변들 역시 그 당시에는 기상천외한 것들이었다. ‘마른 똥막대기다’ ‘마삼근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 이렇게 볼 때, 선사들이 말하는 ‘내가 곧 부처다’라는 명제는, 내가 법신과 보신과 화신의 삼신을 갖춘 부처라는 말이 아니라 ‘부처에 실체가 있다’든지, ‘부처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실체론적 부처관에 대한 비판일 뿐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부처라는 개념은 눈, 귀, 코, … 산, 돌, 나무, … 삶, 죽음 등과 같은 갖가지 개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선에서 말하는 ‘내가 부처다’라는 명제는 내가 실제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법보화 삼신을 갖춘 부처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부처가 따로 있다’는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말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다시 말해 부처라는 개념이 공(空)하다는 선언이다. 2) 초기불교의 아라한과 선에서 말하는 부처 초기불전에서는 부처님은 물론이고 그 제자들 역시 수행의 목표로 아라한과 부처를 구별하지 않았다. 《사분율》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도한 후 제자들을 만나 교화하는 일화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어떤 일화에서든 교화된 제자와 부처가 동등하게 아라한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교진여 등의 다섯 명의 비구를 교화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야수가(耶輸伽: Yasa)라는 청년을 교화한 후 그 친구 네 명과 오십 명을 차례대로 교화하는데 그에 대한 《사분율》의 설명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때에 세존께서 이런 가르침을 내리셨을 때 다섯 비구 모두는 번뇌로 가득했던 마음에서 벗어나 아무 것에도 걸림 없는 해탈의 지혜를 얻었다. 그때 이 세상에는 여섯 명의 아라한이 존재하였다. 다섯 제자와 여래가 참된 등정각에 도달하여 모두 여섯이 되었던 것이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나의 가르침 속에서 고결한 행을 닦기를 결심하고 괴로움의 뿌리를 제거하거라. 이를 이름하여 ‘구족계를 받는다’고 하느니라.” 이들이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거듭거듭 관찰하자 번뇌에 찌든 마음에서 벗어나 걸림 없는 해탈의 지혜가 생겼다. 그때 이 세상에는 육십 명의 아라한이 존재하였으며 제자들과 여래를 합하면 육십 한 분이었다. 여기서 부처와 해탈한 그 제자들은 모두 아라한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부처와 아라한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아함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증일아함경》에서만은 보살도를 말하며 부처와 아라한을 구분한다.) 부처는 ‘대승적 의미의 부처’가 될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칠 뿐이다. 《잡아함경》에 자주 등장하는 해탈의 가르침 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때에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물질과 형상의 세계(色)가 무상함을 관찰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은 올바른 관찰이며 이렇게 올바로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서 애착은 사라지며 애착이 사라진 사람을 심해탈(心解脫)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느낌의 세계(受), 온갖 생각들(想), 의지적인 것들(行)은 물론이고 인식된 모든 것들(識)이 무상하다는 점을 관찰하거라. 이렇게 관찰하는 것은 올바른 관찰이며 … 심해탈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심해탈한 사람이 만일, 스스로 깨닫고자 한다면, ‘나의 삶은 이제 다 끝났다. 청정한 수행을 모두 완성했고,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을 내 스스로 아노라’라는 것을 능히 깨달을 수 있느니라. 무상함을 관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苦)·공(空)· 비아(非我)를 관찰하거라.” 초기불전에서 말하는 불교 수행의 목적은 현생에 당장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아라한이 되는 것이었다. 아라한이 된 자는 내생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다시는 이 괴로운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어떤 곳에 태어난다는 말도 아니다. 지금까지 무량겁에 걸쳐 계속되어 온 생존을 마감하는 것이다. 세속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는 사람의 경우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은 공포로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가르치듯이, 색· 수· 상· 행· 식이 모두 무상하다는 점, 다시 말해 쉼 없이 변해가기에 그 어디에도 안주할 곳이 없다는 점에 대해 철저히 자각한 수행자는 색· 수· 상· 행· 식이 궁극적으로 괴로운 것(苦)일 뿐임을 알고, 그 모두 실체가 없어서(空) 영원한 아뜨만일 수 없음(非我)을 알게 되어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해탈을 진정으로 희구하게 된다. 이렇게 초기불전에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해탈을 가르칠 뿐 보살의 이념을 가르치지도 않고 부처와 아라한을 구분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런 해탈은 먼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생에 완성될 수 있다. 혹 세속에 대한 집착의 일부가 아직 남아 있는 경우에는 내생에 색계의 하늘나라에 태어나 열반하는 아나함이 되거나, 내생에 한 번은 욕계에 태어난 후 그 다음에 색계의 하늘나라에 태어나 열반하는 사다함, 또는 내생에 많아야 일곱 번 욕계에 태어난 후 그 다음에 색계의 하늘나라에 태어나 열반하는 수다원이 된다. 어쨌든, 부처와 아라한을 구분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을 지향할 뿐이란 점에서 초기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공통된다. 초기불전에서는 부처든 아라한이든 모두 아라한이라고 불릴 뿐이다. 그러면 선의 경우를 보자. 선사들이 아라한이나 보살, 또는 부처의 구분을 거론하긴 하지만, 선 수행의 범위 내에서는 이런 구분이 사라진다. 수행을 통해 성불하든, 아니면 본래 부처임을 자각하든 선 수행자는 단지 ‘깨달음’을 지향할 뿐이다. 그리고 선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는 시기(時期)는 대승에서 말하듯이 3아승기 100겁 이후가 아니라 바로 현생이다. 선 수행자는 현생에서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자각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두두물물 가운데 부처 아닌 것이 없음을 자각한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했듯이, 대승에서 말하는 부처이기 위해서는 태어날 때부터 32상 80종호의 육체를 갖고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선 수행에서는 이런 부처의 상호를 수행자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선 수행자가 말하는 부처는 결코 대승교학에서 말하는 부처일 수는 없다. 그러면 무엇인가? 깨달은 선사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서 아라한이라든지, 부처라는 이름을 모두 지워버리고 초기불교의 수행과 선 수행의 의미만을 비교해 보자. 그럴 때 초기불교의 수행과 선 수행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첫째는 양쪽 모두 그 수행 목표를 현생에 달성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양쪽 모두 ‘깨달은 자’를 양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기불교의 경우도 현생에 해탈, 열반하는 것이 목적이고, 선의 경우도 현생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목적이다. 또 초기불교의 경우 부처든 아라한이든 해탈한 자 모두 ‘아라한’으로 동등한데, 선의 경우에도 부처와 아라한과 보살의 구분 없이 ‘깨달은 자’만 거론할 뿐이다. 깨달은 자에 대해 부여하는 호칭이 서로 다를지 몰라도, 수행의 궁극에 도달한 성자를 다시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초기불교와 선은 공통된다. 초기불전에는 아직 대승적인 성불의 교리가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비달마 논서에 이르러 부처와 아라한의 차별이 발생하였고, 석가모니 한 개인의 전생을 의미할 뿐이었던 보살이라는 호칭이 대승불자들에 대한 일반적 호칭으로 바뀌면서 3아승기 100겁의 수행이라든지 무주열반(無住涅槃)이라는 엄청난 이념들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불교가 등장하면서 이런 대승의 이상 모두가 허물어진다. ‘수행자는 현생에 모든 것을 끝낸다. 깨달은 자는 오직 한 종류일 뿐이다.’ 대승의 허구를 깨고 초기불전에 나타난 불교의 참뜻을 다시 살려낸 것이 바로 선인 것이다. 조주(趙州, 778~863) 스님에게 어떤 제자가 물었다. “스님,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열반경》에서는 ‘모든 생명체에게 불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 제자 역시 이런 가르침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도대체 개와 같은 미물에게도 불성이 있는지 궁금하였다. 만약 《열반경》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대답했어야 한다. 그러나 조주 스님은 ‘없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조주 스님은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셨을까? 조주 스님은 《열반경》의 가르침을 거스르며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셨을까? 참선 수행자는 가부좌 틀고 앉아 호흡을 가다듬은 후 이와 같은 화두를 들고 그 답을 찾아내기 위해 몇 달, 몇 년을 노력한다. 화두를 풀기 위해 머리를 굴려서는 안 된다. 단지 의문만 강화시키면 된다. 조주 스님은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무(無)〕고 했을까? 조주 스님은 왜 무(無)라고 했을까? 왜 무(無)라고 했을까? … 이것이 참선하는 방법이다. 앞이 꽉 막혀 있다. 출구가 없다. 너무 궁금하고 참으로 의심스러운 ‘화두’만이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조주가 내린 ‘무(無)’라는 답을 ‘있음’에 대립되는 ‘없음’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있음’이라고 이해해도 안 되며,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다’라고 이해해도 안 된다. 조주의 ‘무’자에 대해 우리의 생각을 집어넣을 수가 없다. 이것이 화두이다. 백 척이나 되는 긴 장대 끝에 올라갔을 때 더 이상 발을 디딜 곳이 없듯이, 칠통(漆桶) 속에 들어간 쥐가 막다른 곳에 다다라 옴짝달싹 못하듯이, 화두를 대하고 있으면 더 이상 생각이 나아갈 곳이 없다. 그러나 의심만 떠올리며 집요하게 물어 들어가다가 은산철벽과 같던 화두가 와르르 무너질 때, 백 척의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 캄캄한 칠통이 탁 깨질 때 깨달음이 열린다. 그런데 간화선에서 화두를 들 때 우리의 생각이 나아갈 곳을 이렇게 모두 막는다는 점은 용수(龍樹, 150∼250경)의 《중론》과 그 방식이 일치한다. 《중론》 역시 주어진 문제에 대한 사구적(四句的)인 대답을 모두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씨앗에서 싹이 발생할 때 ①‘씨앗에 있던 싹이 발생한다’고 해도 옳지 않고, ②‘씨앗에 없던 싹이 발생한다’고 해도 옳지 않으며, ③‘씨앗에 있으면서 없던 싹이 발생한다’고 해도 옳지 않고, ④‘씨앗에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던 싹이 발생한다’고 해도 옳지 않다. 첫째, 싹이 씨앗 속에 미리 존재했다면 싹이 다시 발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리 존재하는 것을 다시 만들어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미리 존재하는데도 굳이 다시 만들어 낸다면 싹이 두 개로 되는 오류에 빠진다. ‘애초에 싹을 만들기 위해 씨앗 속에 존재하던 싹’과 ‘나중에 만들어져 발생한 싹’이라는 두 가지 싹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의 것은 싹을 ‘발생케 하는 싹’이고 뒤의 것은 그렇게 해서 ‘발생된 싹’이다. 그러나 하나는 두 개가 될 수 없다. 씨앗에서 싹이 발생하는 과정에 대해 제1구의 방식으로 이해하면 이렇게 하나가 두 개로 되는 잘못이 있게 된다. 둘째, 그와 반대로 어떤 싹이 애초의 씨앗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오류에 빠진다. 애초의 씨앗은 싹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애초의 씨앗이 거기서 나올 싹과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어떤 싹이 발생한다면, 그 싹과 관계가 없는 다른 모든 곳에서도 그 싹이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감자 싹이 그와 무관한 사과 씨에서 나올 수 있어야 하고 조약돌을 심어도 사과 싹이 나올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러나 이 세상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씨앗에서 싹이 발생하는 과정에 대한 제2구적 이해 역시 이렇게 오류에 빠진다. 씨앗과 싹의 관계에 대한 흑백논리적인 생각, 즉 ‘씨앗 속에 존재하던 싹이 발생한다’거나 ‘씨앗 속에 존재하지 않던 싹이 발생한다’는 상반된 두 가지 이론이 모두 논리의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싹 전체’가 아니라 ‘싹의 요소’가 씨앗 속에 있는 것이라는 제3의 이론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싹의 요소가 씨앗 속에 있다’는 판단은 ‘싹의 일부는 씨앗 속에 있고, 다른 일부는 씨앗 속에 없다’는 판단으로 재해석되며, 중관논리로 풀면 이는 결국 ‘싹이 씨앗 속에 있으면서 없다’는 제3구의 판단이 될 뿐이다. 무언가가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는 것은 모순된다. 마치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듯이 있음과 없음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그와 반대로 싹이 씨앗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제4의 대안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중관논리에서 볼 때 이는 제4구 판단인데, 있음도 부정하고 없음도 부정하는 제4구 판단은 ‘흑백논리로 작동하는 우리의 사유’의 세계에 들어올 수 없는 무의미한 판단이기에 비판된다. 이렇게 ‘씨앗에서 싹이 발생하는 과정’에 대해 그 어떤 이론도 구성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생각을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이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무(無)’라는 답에 대해 ‘없다’(제2구)거나 ‘있다’(제1구)거나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제4구)는 그 어떤 해석도 옳을 수가 없었듯이, 《중론》에서는 그 어떤 판단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우리의 사구적인 해석을 비판하며 우리의 생각을 궁지로 몰아가 버린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린다’고 말할 때에도, 이 말을 ‘내림을 갖는 비가 내린다’고 해석할 수도 없고, ‘내림을 갖지 않은 비가 내린다’고 해석할 수도 없다. 전자는 제1구적 해석이고, 후자는 제2구적 해석이다. ‘내림을 갖는 비가 내린다’고 제1구적으로 해석하면 내림이 두 번 존재하는 꼴이 된다. 이는 ‘역전(驛前) 앞’이나 ‘처가(妻家) 집’과 같은 중복표현이 될 뿐이다. 그와 반대로 ‘내림을 갖지 않은 비가 내린다’고 제2구적으로 해석하면 사실에 위배된다. ‘내림을 갖지 않은 비’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의 생각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버린다. 칠통 속의 쥐와 같이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간화선과 《중론》 모두 이렇게 우리의 분별적 사유를 차단함으로써 우리를 지적인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그 목적이 일치하긴 하지만 그 방식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직관을 사용하고, 후자는 분석을 사용한다. 직관은 순간적이고 전체적으로 일어나지만 지극히 주관적 방법이고, 분석은 누구나 동참할 수 있는 객관적 방법이긴 하지만 장시간을 요하며 그 조망이 부분적이기 쉽다. 어쨌든 간화선의 방식은 《중론》의 사구비판에 그 맥이 닿아 있다. 또, 사유의 출구를 모두 막아버리는 《중론》의 사구비판이 초기불교 경전의 무기설(無記說)에 그 뿌리를 두고 있듯이, 간화선 역시 무기설과 대비시킬 때 그 진정한 취지가 되살아난다. 부처님은 몇 가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셨다. 그런데 그런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모두 사구로 배열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세상과 자아가 상주하는지’ 여부에 대해 질문자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 세상과 자아는 ①상주하는가 ②무상한가 ③상주하면서 무상한가 ④상주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은가?’ 그리고 부처님은 이 네 가지 판단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고 침묵하셨다. 간화선에서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조주 스님의 ‘무(無)’라는 대답을 ①‘있다’거나 ②‘없다’거나 ④‘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이해하는 것이 모두 틀리듯이, ‘이 세상과 자아의 한계’에 대해 사구(四句) 가운데 그 어떤 판단으로 이해해도 모두 옳지 않은 것이다. 간화선 수행자는 사구분별의 출구를 모두 막고 은산철벽과 같은 화두를 대면하고 앉아 있는데, 《중론》에서는 논리적 분석의 몽둥이로 우리의 사구분별 하나 하나를 모두 부수어 버린다. 그리고 무기설에서는 사구로 배열된 형이상학적 의문들에 대해 부처님이 은산철벽과 같이 침묵하신다. 4. 맺는 말 : 의미있는 선 수행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 지금까지 분석해 보았듯이 초기불교의 정신을 되살린 것이 선이라면, 선 수행을 하는 현대의 수행자들도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들이 그랬듯이 대부분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럴까? 부처님 당시의 수행과 비교할 때, 지금의 선 수행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해서는 문제를 아주 쉽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소승이라거나, 대승이라거나, 금강승이라거나, 최상승이라는 복잡다단한 교학적 분별을 모두 지워버리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도대체 우리가 불교 수행을 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한 마디로 말해 ‘부처님’과 같이 되기 위해서이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로 네가 될 수 없고, 이 나무가 그대로 저 나무가 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대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단지 부처님과 같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부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부처님을 닮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부처님의 몸과 마음 중 그 마음을 닮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문제는 아주 단순해졌다. 우리는 부처님의 마음을 닮기 위해 수행을 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마음을 닮는다고 할 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부처님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던 ‘감성’이고 다른 하나는 출가 후 성도하여 체득한 ‘깨달음’이다. 그리고 문제는 대부분의 선 수행자가 이 가운데 ‘깨달음’만을 체득하기 위해 수행한다는 데 있다. 보리수 아래 앉아 체득한 부처님의 깨달음은 지적(知的)인 깨달음이다. 무명이 타파되면서 연기의 이치를 자각하신 지적인 깨달음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출가하기 전부터 우리와 다른 위대한 ‘감성’을 갖추고 계셨다. 하나는 모든 생명체를 자신의 몸과 같이 대하는 ‘자비심’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인 쾌락을 싫어하는 ‘염리심(厭離心)’이다. 12살 어린 나이의 싯다르타 태자가 농경제에 참가했을 때, 밭이랑에서 꿈틀대던 벌레를 날아가던 새가 채가고, 그 새 역시 큰 새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보고 비감에 젖었다는 일화가 부처님의 ‘자비심’을 입증하고, 쓰러져 잠에 든 궁녀들의 모습에 역겨움을 느끼며 화려한 왕궁을 버리고 출가했다는 일화가 ‘염리심’을 증명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경우는 이런 감성이 완성된 상태로 태어났기에 보리수 아래 앉아 지적인 수행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남에게 화내고, 시기하고, 남을 미워한 적도 있으며, 재물이나 명예나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을 모두 버리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탐· 진· 치의 삼독심을 모두 갖고 태어나 그것을 모두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란 말이다. 삼독심 가운데 탐심은 부정관 수행을 통해 정화할 수 있고, 진심은 자비관 수행을 통해 정화할 수 있으며, 치심은 연기관 수행을 통해 정화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음 전체를 닮기 위해서는 선 수행을 통해 지적인 깨달음을 추구하기 전에, 탐심과 진심을 가라앉히는 부정관과 자비관을 닦음으로써 우리의 감성을 정화해야 한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 앉아 체득하신 지적인 깨달음을 체득하기 이전에,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 앉기 전부터 갖고 있던 두 가지 마음, 즉 염리심과 자비심을 먼저 체득해야 한다는 말이다. ‘견성 후에도 습기를 제거해야 한다’든지, ‘견성 후에 보림〔보임(保任)〕한다’는 말이 선가의 격언으로 회자되어 온 것은 ‘선 수행’만으로는 탐욕이나 분노, 교만과 같은 ‘감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혹, 견성 후에 습기를 제거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가장 안전한 것은 부처님의 자취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리라. 다시 말해 감성의 문제를 모두 해결한 다음 지적인 수행에 들어가야 한다. 나를 향해 끄는 마음인 탐욕은 나로부터 미는 수행인 부정관을 통해 제거되고, 나로부터 미는 마음인 분노심은 나를 향해 끄는 수행인 자비관을 통해 제거되며, 나를 높이는 마음인 교만심은 나를 낮추는 마음인 하심에 의해 제거된다. 그리고 율(律)의 준수와 자자, 포살 의식은 이런 감성의 조련(調練)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다. 이런 감성 수행들이 선 수행을 뒷받침할 때 선 수행은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 |
출처 :여여불여 如如不如 원문보기▶ 글쓴이 : slowdream
cafe.daum.net/cbuddhism/6EAh/85 현대불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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