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 박희용 (서울학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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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한국사관련 논문
樂民(장달수) | 조회 48 |추천 0 | 2017.07.05. 03:43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첨부파일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pdf

 


박희용 (서울학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Ⅰ. 머리말
Ⅱ.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역사지리적 위상
1. 우대와 서촌의 명칭과 장소성
2. 한양 천도와 인왕산 기슭의 역사지리적 위상
Ⅲ. 준수방과 장의동의 위치와 영역
1. 준수방의 위치와 영역
2. 장의동(장동)의 위치와 영역
Ⅳ. 세종 탄생지 추정
1. 세종 탄생지의 위치와 규모에 대한 전제
2. 세종 탄생지의 종합적 고찰
Ⅴ. 결론

 

 

I. 머리말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의 제4대 국왕 세종의 탄생지를 비정하는 것이다. 세종의
탄생지에 대해서는“한양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태어나셨다.”는 짧은 기록
만이 있을 뿐이다.1) 이 기록에 토대를 두고, 준수방이 있던 한양 도성 서북쪽 지역에
대한 문헌사료적 분석과 지형 및 입지 조사를 통해 세종의 탄생지를 추정하려는 것
이다.
세종 탄생지에 대한 조사는 일찍이 1956년 한글학회와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에 의해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2) 당시 조사는 한양 도성의 서북쪽 지역에 대한 현장

 


* 이 논문은 2011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인문사회연구역량강화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NRF-2010-413-A00002)
1)『 世宗實錄』總書 太祖 6년(1397) 4월 10일/壬辰
2)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1 서울편, 2000, 5, p.245

 


답사를 통해 통인동 137번지 일대를 세종 탄생지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
은 조선초기의 행정구역 체계와 옛 지도 자료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거치지 않았고,
당시 왕실 가족들의 제택이 상당히 큰 규모였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재론의 여지가 있다.
본 연구는 세종의 탄생지를 비정함에 있어서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첫째, 세종의 탄생지인 준수방 잠저가 곧 세종의 부친인 태종의 잠저이기도 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태종과 세종의 잠저를 함께 분석하였다. 여기에는 경복궁 서쪽 지역의
방명에 대한 검토에서부터 그 지역의 역사지리적 위상에 이르는 연구를 통해 준수방
과 이 일대의 장소성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였다. 둘째, 조선초기 잠저의 규모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준수방을 중심으로 한 경복궁 서쪽 지역의 지형과 입지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문헌과 현장조사를 통해 확인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연구를
통해 세종 탄생지가 현재 어느 지점에서 얼마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추정하고, 그 결과를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도 자료를 활용한 비
교 분석적 접근을 통해 현재의 지도에 도시하였다.

 

Ⅱ.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역사지리적 위상

 

1. 우대와 서촌의 명칭과 장소성

 

조선초기에 준수방이 위치했던 경복궁 서쪽 지역은 흔히‘우대’혹은‘웃대’라고
불렸다.3) 이 지역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북부에 속하였고, 그 공간 범위는 백악산
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하면서 경복궁과 사직단 사이로 경계지어졌다.
조선후기에 안민영이 편찬한 시조집인『금옥총부 金玉叢部』서문에는 당시 인왕
산 밑 필운대를 중심으로 가곡 예술을 펼친 박효관(朴孝寬)과 운애산방(雲崖山房)

 


156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3) 사전적으로 우대는 옛날 서울 도성 안의 서북쪽 지역, 곧 인왕산 부근의 동네를 이르던 말로, 웃대 사람은 우대에 살던 胥
吏계급의 사람으로 설명되고, 아래대는 서울에서 동대문과 광희문쪽을 이르는 말로, 아랫대 사람은 아래대에 사는 軍摠계
급의 사람으로 설명된다.(금성출판사『, 국어대사전』, 199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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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모임을설명하면서이장소를‘우대(友臺)’라고불렀다. 즉‘, 우대소리’의현장으
로 필운대 주변을 지칭하였다.4) 이것을 볼 때 우대는 조선시대부터 경복궁 서쪽 지
역의 백운동천과 옥류동천이 흐르는 장소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1929년『별건곤 別乾坤』에 실린「옛날 경성 각급인(各級人)의 분포상황」이
란 글에서는 광통교(廣通橋) 위를 우대로, 효교동 아래를 아래대라고 하였다. 다음의
글이 그것이다.
北山밑을 北村, 南山밑을 南村, 駱山근처를 東村, 西小門內外를 西村, 長橋·水
標橋어름을 中村, 廣通橋以上을 우대, 孝橋洞以下를 아래대, 江邊을 五江, 城밖 四
面十里以下를 字內(字內라 함은 서울 城壁에 天地玄黃의 順으로 어느 點으로부터 어
느 點까지의 間은 天字區城或은 地字區城이라 하야 그 文字와 文字의 間을 各軍營에
서 分擔守備한 故이다.)라 하야 東·西·南·北의 네 村(通稱曰四山밑)에는 兩班이
살되 北村에는 文班, 南村에는 武班이 살았으며, 또 같은 문반의 양반이로되 西村에는
西人(朝鮮의 全體를 亡해 버린 所謂四色別의 元始인 西人·東人의 稱號가 생긴 原因
은 西人의 張本人沈義謙은 西村貞洞에 살고 東人의 張本人金孝元은 東村蓮洞에 살
은 故로 가론 東人가론 西人이라 한 것이다.)이 살았으며, 그 후 서인이 다시 老論·
少論으로 나뉘고 동인이 다시 南人·北人또 大北·小北으로 나뉨에 미쳐서는 西村
은 소론, 北村은 노론, 南은 남인이 살았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실은 소론까지 잡거하되
주로 무반이 살았으며, 東村에는 소북, 中村은 中人, 우대는 六曹以下의 各司에 소속
한 吏輩·庫直족속이 살되 특히 茶洞·相思洞등지에 商賈(통칭 市井輩)가 살았고,
아래대는 각종의 軍屬(將校·執事등류)이 살았으며, 특히 宮家를 중심으로 하여 경
복궁 서편 樓下洞근처는 소위 大殿別(宮家의 隷屬)派들이 살고, 창덕궁 동편의 苑南
洞·蓮池洞근처는 武監족속이 살았으며, 동소문 안 성균관 근처는 館人(속칭 館사

 


4) 허경진,『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주)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pp.164-170
한편 조풍연은 경복궁의 서쪽과 북쪽 동네를 우대라고 설명하면서, 이곳의 주민이 서울 사람을 대표하며, 특히 우댓말을 사
용하여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억양이 달랐다고 하였다『( 뿌리깊은 나무』, 1983, p.140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洞名沿革
考』종로구편, 1992, pp.80-81에서 재인용).

 


람)이 살고, 往十里에는 軍銃(兵村)들이 살고, 五江邊에는 船人·商賈들이 많이 살았
는데, 속칭 강대 사람이라 함은 강변에 사는 사람을 지칭함이었다.5)(밑줄 :필자)
위 글에서 광통교는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가는 길 위에 놓인 청계천의 다리로 광
교라고도 하며, 효교동은 효경교(孝經橋)가 있어서 이름 붙은 마을로 효경교는 청계
천의 물이 오간수문으로 빠져 나가기 이전인 종묘 앞(남쪽)에 놓인 다리이다.6) 즉 광
통교와 효경교를 통한 우대와 아래대의 장소성 인식의 시작점(기준)은 남대문로와
종묘 앞으로 추측되며, 그 사이의 공간은 도성 내의 물줄기가 합류되어 흐르는 곳으
로 지형적으로 평지여서 우대와 아래대의 사이공간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대와 아래대의 장소명은 도성 내부의 중앙을 흐르는 청계천을 기준으로 물
줄기가 시작되는 백운동천과 옥류동천의 상류쪽을 우대, 물줄기가 빠져나가는 동대
문과 광희문 사이의 하류쪽을 아래대로 각각 명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별건곤』에서는우대외에서촌이라는장소명도사용하여서소문내외를지
칭하고 있는데, 그곳은 서인 세력이 살았던 곳으로 정동지역이라고 밝혀 놓았다. 이
사실은 1899년『독립신문』논설에서 서촌이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공사관
이 있는 지역이라고 한 데서도 확인된다.7)
서촌은사전적으로는서쪽마을이나서울안의서쪽에있는마을로설명되고,『 세
종실록지리지』등에도 각 군현의 지명으로 많이 등장한다. 한양 도성을 기준으로 고
려해보면 도성 서쪽에 위치한 서대문과 서소문 부근 지역으로 볼 수 있지만, 전통시
대 한양의 도성구조에서 중심공간이 북쪽에 치중되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넓게
는 경복궁 서쪽 지역까지 포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지리적인 측면에서 도성의 내사산 가운데 하나인 인왕산은 도성의 서북쪽에
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산이다. 인왕산은 한양 도성을 쌓기 시작하는 조선초기부터

 

158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5)『 別乾坤』1929년 10월, p.89
6) 孝經橋는 孝橋라고도 하였으며, 부근에 소경들이 많이 살아서 소경다리, 혹은 새경다리라고도 불렸다.『 한경지략』교량조에
는 新橋를 지나 낙선방에 있는 다리를 永風橋라고 하는데, 다른 이름으로 효경교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에도 신교 동쪽에 영풍교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 지명사전』, 2009, p.957 ; 유본예
저, 권태익 역,『 한경지략』, 탐구당, 1981, p.174).
7)『 독립신문』1899년 11월 27일
8)『 太祖實錄』권8, 太祖 4년 윤9월 25일/丙戌“西山에 거둥하여 성 쌓을 터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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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西山)으로 불렸으며,8) 중종 이후에는 필운산으로도 불렸다.9) 그리고 서산과 관
련되어 인왕산 기슭의 옥계(玉溪;옥류동천)에서 풍류를 즐겼던 중인들의 시사모임
을 서사(西社) 혹은 서원(西園)이라고 하였으며10), 성 밖의 시단(詩壇)은 서교(西
郊)11)라고 불렀다. 아울러 조선시대 경복궁의 서편에는 어류와 식육, 연료 등을 공급
하는 관아인 사재감(司宰監)이 있었는데 훈련도감의 좌영에 속해 서영(西營)이라고
도 했다. 조선후기 지도에는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에 인접해서 사재감이 표시되어
있고, 1902년 서울지도(Map of Seoul)에는 영추문 옆에 서영교12)도 확인된다. 즉 인
왕산과 관련된 지리적 요소와 경복궁과 관련된 관서들의 명칭을 고려해 보면 당시
사람들은 경복궁 서편 지역을‘서촌(西村)’으로 인식했던 것으로도 생각된다.
그러나 17세기 말에 한양을 묘사한 정래교(鄭來僑)가 삼청동 북쪽의 백련봉에서
필운대에 이르는 지역을 북부라고 설명하고 있듯이13),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행정구
역 명칭은 북부였다. 아울러 북부의 행정구역 명칭과 관련하여 백악산 아래에 살면
서 정선(謙齋鄭敾), 이병연 ( 李秉淵)등과 교유하면서 지낸 문인 화가 조영석
( : 1686-1761)은 경복궁 서편의 순화방을‘북리(北里)’라고 불렀다.14) 성호
이익의『성호사설』에서도 북리는 세도가들이 사는 곳으로 설명되고 있는데15), 즉 북
리는 경복궁 서북쪽 지역을 지칭하는 북부의 또 다른 장소명이었다.
이렇듯 경복궁 서쪽 지역을 지칭하는 장소명은 행정구역으로 북부, 당대 세도가들
의 주거지가 있었다는 의미에서 북리, 서대문 주변의 도성 서쪽 공간은 서촌, 이 지

 

9)『 中宗實錄』권84, 中宗 32년 3월 14일/癸巳“副使 吳希孟과 함께 正使로 나온 명나라의 을 초대해 경회루에서 연
회를 베풀면서 백악산과 인왕산의 이름을 고쳐줄 것을 청하자 북악은 북쪽에 위치한 산이어서‘拱極’으로 하고, 인왕은 서
쪽(우)에서 왕(운룡)을 보필한다는 의미의‘右弼雲龍’을 취해 필운으로 하였다.”
10) 허경진,『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랜덤하우스, 2008
11) 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4, 휴머니스트, 2006, p.467
12) 서영교는 서영 앞에 놓였던 다리로 뒤에 서근다리라고 불렀다고 하며, 경복궁 서쪽 금천에 놓인 다리라는 의미에서 서금
교(西禁橋) 또는 서금다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洞名沿革考』종로구편, 1992, p.169 ;대통령경
호실,『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2007, p.285).
13) 허경진,『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랜덤하우스, 2008, pp.240-241
14) 최완수,『 겸재 정선』1, 현암사, 2009, p.47 ; 서울역사박물관,『 서촌 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1, 이경구,「 장동과 그 인근
의 역사적 위상과 사대부들의 활동 -장동 김문을 중심으로-」2010, 12, pp. 85-86. 재인용
15)『 星湖僿說』제28권, 詩文門 城南“당나라 高適의 시에,‘ 성 남쪽 젊은 여인 애가 닳아 끊어지련다(少婦城南欲斷腸)’하였
고, 두보의 시에,‘ 성 남쪽 젊은 아낙네 시름겨워 꿈도 많네(城南少婦愁多夢).’라 하여, 다 城南을 말했다. 생각컨대, 도읍의
제도에 귀한 사람은 북쪽에 살고 천한 사람은 남쪽에 살게 되어서 貴戚의 第宅을 北里라 칭한 모양이다. 이를테면, 盧照隣
의 시에,‘ 남맥과 북당이 북리를 연했도다(南陌北堂連北里).’라는 것이 이것이다. 저 수자리 사는[征戍] 무리는 다 閭里의
천한 예속들이라, 그 집이 흔히 南下지역에 있으니, 지금 우리 서울을 두고 경험해 봐도 알 수 있다.”*원문의 번역은 민
족문화추진회,『 국역 성호사설』ⅩⅠ, 1989, 75쪽에서 인용

 

역 사람들의 성향과 풍속 등을 고려한 우대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 지역이 갖는 인문지리적인 특성과 경복궁과 인접한 곳이라는 입지
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려된다. 또한 지형적 요인으로 필운대를 중심으로 위
쪽과 아래쪽 지역은 지리적으로 다르게 구분되었던 점, 즉 조선시대에는 필운대에서
뻗은 능선을 기준으로 북부와 서부의 행정구역 경계가 구분되는 등으로 인해 여러
장소명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16)

 

2. 한양 천도와 인왕산 기슭의 역사지리적 위상
조선을 건국한 직후 태조 이성계는 천도를 추진했다.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
궁(壽昌宮)에서 즉위한 태조는 8월 13일 도평의사사에 한양 천도를 명하였다.17) 즉,
한양 천도는 태조의 즉위와 거의 동시에 추진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신하
들은 천도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천도 후보지를 둘러싼 이견들이 표출되어 한양 천
도는 당분간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18)
조선초기 천도 후보지로는 우선 계룡산 일대가 거론되었으나 입지가 국토의 남쪽
에 치우쳤다는 점과 풍수적 결함 등을 이유로 10개월간 지속된 수도 건설이 중지되
었다.19) 그 뒤로 선고개(鐥岾)와 송림(松林) 불일사(佛日寺), 적성(積城), 도라산(都羅
山) 등 여러 지역이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그 가운데 지금 서울에서 후보지로 거론된
곳으로 무악(毋岳)이 있었다.20) 무악은 태조 당시에는 땅이 좁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 결국 후보지에서 탈락했지만 뒷날 정종 때 개성으로 환도했다가 태종
때 한양으로 재천도할 때도 3개 후보지 중 하나로 거론되었고, 그때도 역시 후보지

 

160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16) 근대 측량지도인 1921년 지도를 보면(그림 5 참고) 사직단 북쪽의 필운대(현재 배화여자대학)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이
있었고, 이 능선을 경계로 북부와 서부가 구분되었다. 즉, 필운대에서 뻗어 나오는 능선이 조선시대 행정구역의 지리적 경
계요소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 문헌에서도 이 지역을 경계로 북부와 서부를 구획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필운대는 북부에 속하지만 그 바로 아래의 사직단을 포함하는 인달방은 서부에 속했다. 그리고 이 능선은 필운
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우대 소리의 지리적 경계이기도 했다. 참고로, 근대 이후 이러한 지형은 인식하기 어렵게 되었고 특
히 사직로의 개통은 이 지역의 장소성을 크게 변화시켰다.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장소명을 사용할 때에는 이러
한 변화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17)『 太祖實錄』권1, 太祖 원년 8월 13일/壬戌“敎都評議使司 移都漢陽”
18) 조선 건국 직후 천도논의에 대해서는 李泰鎭,「 漢陽 천도와 風水說의 패퇴」『韓國史 市民講座』, 一潮閣, 1994 및 장지연,
「麗末鮮初遷都論議에 대하여」『韓國史論』43, 서울大國史學科, 2000 참조
19) 『太祖實錄』권4, 太祖2년 12월 11일/壬午
20) 『太祖實錄』권5, 太祖3년 2월 18일/戊子
서울학연구ⅩLⅦ (2012. 5) 161

 

에서 탈락했지만 태종이“후세에 반드시 도읍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애
착을 보였던 곳이다.21) 결국 태종은 자신이 상왕으로 있던 세종 3년 무악 주변에 연
희궁(衍喜宮)을 지어 아쉬움을 달랬다.22)
무악의중요성은조선시대를통해줄곧인식되었다.『 한경지략』에는차천로(車天
輅:1556-1615)의『오산설림 五山說林』을 예로 들면서 인왕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팔도감사에게 유교를 보내서 신승 무학을 찾아오게
하여 스승의 예로 대우하고 새나라 도성을 정할 일을 의논하였다. 무학이 한양을 터
잡고 하는 말이‘인왕산을 배경으로 하고 백악과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정도전이 반대해서 말하기를‘옛날부터 제왕들은 모두 남향으로 앉
아서 나라 정사를 하였으며 동향을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노라.’하니, 무학의 말이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백년 뒤에 내 말을 생각하게 되리라.’하였다. 상고해 보면 2
백 년째는 즉 선조 임진년인데 왜구들이 들어왔을 때 도성이 헐려버렸으므로 그 말이
과연 맞았다고 하겠다.23)
이렇듯 조선시대 수도의 입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부터 인왕산은 줄곧 중요한 장
소로 거론되었으며, 한양을 호위하는 내사산 중에서 우백호에 해당하여 높은 지세를
하고 있어 자연히 서고동저형의 도성 입지를 형성케 했다. 이러한 입지조건을 가진
한양 도성의 서북쪽은 조선초기 경복궁이 건립되는 순간부터 왕족과 세도가들의 주
거지 및 명승지로서의 장소성을 형성했다.
우선 왕족의 제택(第宅)과 관련하여, 조선초기부터 영추문 서편에는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첫째 아들인 무안군(撫安君) 방번(芳蕃)의 집이 있었다. 무안
군 제택은 태조가 무안군을 문병차 방문하기도 했고,24) 정종 때는 태조가 상왕으로

 

21) 『太宗實錄』권8, 太宗4년 10월 6일/甲戌
22)『 世宗實錄地理志』에는 무악이 모화관 서쪽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연희궁이 있는데, 이 터가 명당이 되어 도읍을 세울만한
곳이어서 세종 3년 태종이 그 말을 생각하고 이궁을 짓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무악 남쪽을
연희궁 터로 비정하였다(母岳南疑今衍喜宮之基).
23) 유본예 저, 권태익 역,『 한경지략』, 탐구당, 1981, pp.13-14
24) 『太祖實錄』권8, 太祖4년 윤9월 24일/乙酉

 

있으면서 이곳으로 이어하려다 만 적이 있으며,25) 태종 5년에는 태종이 태상왕을 위
해 태상궁을 지으려 했던 곳이기도 하다.26) 이 무안군 제택은 뒤에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자수궁(慈壽宮)으로 변모되었다.27)『한경지략』에는 장동( ) 부근에 있
는 자수궁 다리를 언급하고 있고, 조선 후기의 지도에서 경복궁 후원과 비슷한 높이
로 백운동천이 흐르는 물줄기에‘자수궁교(慈壽宮橋)’가 표시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그 대체적인 입지는 현재의 옥인동 일대로 추정된다.28)

 

162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25) 『定宗實錄』권1, 定宗원년 정월 19일/庚寅
26) 『太宗實錄』권10, 太宗5년 11월 8일/庚子
27)『 文宗實錄』권1, 文宗 즉위년 3월 21일/乙丑“上命修撫安君舊第 號慈壽宮 將以處先王後宮也”
자수궁은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했던 곳으로 이후 여승들이 후궁들을 모시면서 살다가 결국 尼院으로 되었다가 영조 40년
에 철거되었다『( 仁宗實錄』권1, 仁宗 원년 3월 24일/丙戌『; 英祖實錄』권106, 英祖 41년 8월 8일/辛亥).
28)『 世祖實錄』기사를 보면 자수궁은 경복궁과 근거리이면서 경복궁 후원과 비슷한 높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世祖實
錄』권5, 世祖 2년 12월 6일/辛丑),『 成宗實錄』에서는 자수궁이 영추문과 인접하면서 물줄기를 끼고 서쪽에 위치한 것으
로 확인된다( 『成宗實錄』권19, 成宗3년 6월 16일/辛巳). 이외에도 자수궁의 입지와 관련된 실록의 기록들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모두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준다. 이후 자수궁지는 松石園의 일대가 되었다가 근대 시기 윤덕영의 碧樹
山莊과 순화병원, 이완용의 저택이 들어서기도 했다. 지형을 보면 북쪽으로 급한 경사가 형성되고 있어 조선초기에는 이곳
의 북쪽으로 주거지가 형성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자수궁교(좌상)와 벽수산장(좌하)의 모습과 18세기 무렵 도성대지도의 자수궁교 위치(우)
(자료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서촌 역사ㆍ경관ㆍ도시조직의 변화』, 2012, 12)
서울학연구ⅩLⅦ (2012. 5) 163

 

태종이 즉위한 이후 정종은 상왕으로 지내면서 돈의문(서대문) 부근에 제택을 마
련했다. 당시 정종이 거주하던 제택은 인덕궁(仁德宮, 仁德殿)으로 그 위치는 앞이
막히고 좁다는 기록과,29) 태종이 경복궁 서편에 있던 잠저인 장의동 본궁으로 행차
할 때 인덕궁에 가서 연회를 즐겼던 기록 등으로부터30) 경복궁 서편의 구릉지 일대
로 추정되며,31) 좀 더 구체적으로는 돈의문 북쪽과 사직단 근처로 추정된다.32) 그리
고 인덕궁과 인접해서는 태종의 최측근이자 권력자였던 이숙번(李叔蕃:1373-1440)
의 집도 있었다.33)
조선시대의 명승지이자 제택지로 이름난 안평대군(安平大君:1428-1453)의 집도
인왕산기슭수성동에있었다.『 한경지략』에는이제택이인왕산기슭의깊은골짜
기에 있고 경치가 좋다고 하였고, 또 그곳에 기린교(麒麟橋)가 있다고 하였다.34)『동
국여지비고』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안평대군이 죽은 이후에는 효령대군의
제택이 되었다고 하였다.35) 수성동은 조선후기에 김정희(1768-1856)가 쓴 글에서
‘대낮에 걸어가는 데도 밤인 것 같네.’36)라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매우 깊숙한 곳
이었고, 이곳 주변으로 인가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초기에도 이
곳에는 주거지가 형성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후기에 지어진 소설 운영전
(雲英傳, 壽聖宮夢遊錄, 柳泳傳)에도 안평대군의 제택을 소재로 한 내용이 있는데,
거기서는 제택의 개략적인 위치와 경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수성궁은 안평대군의 옛집으로 장안성 서쪽 인왕산 아래에 있었다. 산천이 수려하
고 용이 서리고 범이 일어나 앉은 듯하며, 사직은 남쪽에 있고 경복궁이 동쪽에 있었
다. 인왕산의 산맥이 굽이쳐 내려오다가 수성궁에 이르러서는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

 

29) 『世宗實錄』권1, 世宗즉위년 8월 17일/甲午
30)『 太宗實錄』권14, 太宗 7년 8월 16일/丁酉 ;권21, 太宗 11년 3월 6일/丙寅
31) 조선시대 세력가의 주거지는 구릉지에 기대어 앞으로 평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입지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돈의문 부근
은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구릉지였다는 점에서 산 능선이 평지와 접하는 위치에 입지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2) 사직단과 인접해서 조선 중기에는 都正宮이 있었는데, 나각순은 도정궁을 인덕궁이 위치했던 곳으로 추정하였다( 『돈의문
원형복원을 위한 학술발표회 자료집』(2010년 5월 27일), 조선후기 돈의문의 건축과 주변 지형의 변화 -서울성곽과 돈의
문의 가치-, p.8).
33) 『世宗實錄』권99, 世宗25년 2월 2일/戊子
34) 유본예 저, 권태익 역,『 한경지략』, 탐구당, 1981
최근 기린교가 옥인동 옥인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발견되었다.
35)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동국여지비고』, 2000, p.129
36) 최완수,『 겸재의 한양진경』, 한국일보, 2006, pp.143-144에서 재인용

 

고, 비록 험준하지 않지만 올라가 내려다보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사면으로 통
한 길과 저자거리며, 온 성안에 여러 집들이 바둑판과 같고, 하늘의 별과 같아서 역력
히 헤아릴 수 없고, 번화장려함이 이루 형용치 못하였다. 동쪽을 바라보면 궁궐이 아
득하여 구름 사이에 은은히 비치고 상서로운 구름과 맑은 안개가 항상 둘러 있어 아
침저녁으로 고운 자태를 자랑하니 짐짓 이른바 별유천지(別有天地) 승지(勝地)였다.
때의 술꾼들은 직접 가아(歌兒)와 적동(笛童)을 동반하고 가서 놀았으며, 소인(騷人)
과 묵객(墨客)은 삼월 화류시절과 구월 단풍절에 그 위에 올라 즐기고 음풍영월하며
경치를 즐기느라 돌아가기를 잊었다.37)
이와 더불어 조선초기에 경복궁 서편 지역에는 궁궐과 인접한 까닭에 이와 관련된
관서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즉 태조 1년 7월 28일에 설치된 내시부는
궁중 안의 식사 감독, 왕명의 전달, 수문과 수직, 청소 등의 일을 맡아보는 관서로,
『한경지략』과『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경회루 남쪽에 있던 것을 옮겨 북부 준수방에
두었다고 한다.38) 그리고 궁중의 채소와 원포(園圃)를 관장하던 기관인 사포서(司圃
署)는『한경지략』에는 중부 수진방(壽進坊: 현재 수송동 116번지 부근으로 추정함)
에 위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동국여지비고』에는 수진방으로 이전하기 전 북부 준
수방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건국 초에는 경복궁 서편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
다. 또한 여러 궁전에 대한 공상(供上), 2품 이상에게 주는 술과 안주, 왜인과 여진인
에게 주는 음식물과 직포(織布) 등의 일을 맡은 관서인 내섬시(內贍寺)도『동국여지
비고』에는 처음에 북부 준수방에 있었다가 이후 서부 인달방으로 이전한 것으로 기
록되어 있다.39) 따라서 경복궁 서편에는 주거지와 명승지뿐만 아니라 내시부, 사포
서, 내섬시 등 궁중과 긴밀한 관련성이 있는 관서들이 밀집해 있었으며, 그곳에 종사
하는 관리들도 이 일대에 살았을 것을 짐작된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볼 때, 조선초기의 경복궁 서편 지역은 일반인들을 위한 거주

 

164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37) 허경진,「 문학작품에 나타난 서촌의 모습」『서촌 역사·경관·도시조직의 변화』, 서울역사박물관, 2010, pp.37-38에서 재
인용
38) 유본예 저, 권태익 역,『 한경지략』, 탐구당, 1981, pp.162-16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동국여지비고』, 2000, p.68
39)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동국여지비고』, 2000, p.49
서울학연구ⅩLⅦ (2012. 5) 165

 

지로서의 성격을 갖는 장소가 아니라 왕족들과 당대 세력가들의 제택지나 명승지로
서의 장소성을 갖는 지역이었으며, 또한 경복궁과 관련된 관서가 위치하거나 이와
관련된 사람들이 거주하는 정도의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Ⅲ. 준수방과 장의동의 위치와 영역

 


1. 준수방의 위치와 영역

 

준수방은『世宗實錄』에서 세종의 탄생지로 기록된 지역이다. 조선초기 한양의 행
정구역은 태조 5년 한성부를 5부 52방으로 구분하고 방명표를 세우면서 정해졌다.40)
『세종실록』총서에서 세종 탄생지를 준수방 잠저라고 한 것은 이때의 행정구역명에
근거한 것이다. 이후 준수방과 관련된 기록은『세종실록지리지』에서 한성부의 북부
에 속한 방명으로 나올 뿐 다른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준수방의 정확
한 위치와 영역을 추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종-태종 때에 개성으로의 환도와 한양으로의 재천도가 반복되면서 한성부의 방
명이나 행정구역의 경계가 정착되지 못하고 변경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각 방의 경계는 기본적으로 도성안의 공간을 동서남북과 중부로 구분하고,
여기에 자연 지형과 물길, 경복궁과 종묘·사직 등 국가 상징 시설물들을 중심으로
구획한 것이므로 큰 틀에서 영역과 경계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
하여 조선초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한성부 북부와 서부의 방명을 정리하면 <표 1>
과 같다.41)

 

40) 『太祖實錄』권9, 太祖5년 4월 19일/丙午
41) 이 표는 고동환,「 조선후기 漢城府 행정편제의 변화」『( 서울학연구』11, 1998)을 참고하여 재정리한 것이다.
166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구 분
태조 5년
(1396)
太祖實錄
세종대
世宗實錄地
理志
중종대
新增東國
輿地勝覽
영조대
御製
守城綸音
정조 13년
(1789)
戶口摠數
고종 4년
(1867)
六典條例
비 고
북 부
광화방(廣化坊)
양덕방(陽德坊)
가회방(嘉會坊)
안국방(安國坊)
관광방(觀光坊)
진정방(鎭定坊)
순화방(順化坊)
명통방(明通坊)
준수방(俊秀坊)
의통방(義通坊)
이전과
같음
이전과
같음
이전과
같음
광화방
양덕방
가회방
안국방
관광방
진장방
순화방
명통방
준수방
의통방
광화방
양덕방
가회방
안국방
관광방
진장방
순화방
-
준수방
의통방
鎭定坊은
鎭長坊의
오기임
상평방
연희방
연은방
상평방
연희방
연은방
서 부
영견방(永堅坊)
인달방(仁達坊)
적선방(積善坊)
여경방(餘慶坊)
인지방(仁智坊)
황화방(皇華坊)
취현방(聚賢坊)
양생방(養生坊)
신화방(神化坊)
반석방(盤石坊)
반송방(盤松坊)
-
인달방
적선방 여경

-
황화방
-
양생방
신화방
반석방
반송방
이전과
같음
-
인달방
적선방
여경방
-
황화방
-
양생방
신화방
반석방
반송방
이전과
같음
이전과
같음
용산방
서강방
<표 1>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서부 방명의 변천
<표 1>에서 한성부 북부는 태조 때 만들어진 10개의 방명이 영조 때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아 방의 경계도 조선후기까지 큰 변동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17세기 후반
부터 경강변에 새로운 방이 신설되면서 정조 12년(1788) 북부에 상평방, 연희방, 연
은방 등 3개 방이 신설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후기 상업적인 번성으로 인해 서
울의 도시공간이 도성 밖으로 팽창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도성 밖 서울과 의주를

 


서울학연구ⅩLⅦ (2012. 5) 167

 

잇는 도로변 지역들이 해당된다.42) 한편, 북부와 인접한 서부는 태조 때 11개 방으로
시작되었지만 세종 때 3개의 방이 없어지고, 영조 때 새로 2개의 방이 신설되는 변화
가 있었다. 세종 때 서부 지역 방의 변화는 인접한 북부 지역으로 방이 흡수되거나
또는 서부 내의 인접한 방과 통합된 것으로 보이고, 영조 때 용산방과 서강방의 신설
은 북부와 마찬가지로 조선후기 상업활동과 관련된 것이었다. 따라서 북부와 서부의
방은 인접한 방들이 서로 통합되거나 새로운 방이 생기는 등의 변화가 있었지만 커
다란 변화는 없이 대체로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주변 방들과의 상대적인 위치를 살펴보면 좀 더
분명하게 확인된다. 우선 태종 13년 경복궁 좌우에 위치한 장의동과 관광방에 대한
기록으로,“ 장의동문(藏義洞門)과 관광방 동쪽 고갯길은 바로 경복궁의 좌우 팔”이
라고 한 데서43) 경복궁 서쪽에 장의동이, 동쪽에 관광방이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종 3년 기록에서는 진장방이 경복궁 동쪽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44) 이
러한 기록들은 조선후기 문헌자료 및 지도와 비교해 보면 정확하게 일치한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국초에 만들어진 사직이 인달방에 있고, 종묘는 정선방(貞善
坊)과 연화방(蓮花坊)의 중앙에 있으며, 문묘는 숭교방(崇敎坊), 혜정교는 서린방(瑞
麟坊), 운종가는 서린방과 수진방(壽進坊)의 중앙부, 태평관은 황화방에 있다고 되
어 있는데, 이 또한 조선후기 문헌 및 지도 자료와 일치한다. 여기서도 한성부의 행
정구역이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변하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조선후기 모든 지도에서 준수방은 그 중심 영역이 백운동천과 옥류동천이 흐
르는 두 물줄기 사이에 표시되고 있으므로 조선초기에도 이 일대가 준수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의 <그림 2>는 조선후기 지도에 나타난 준수방의 위치를 표시
한 것이다.

 

42) 고동환,『 조선시대 서울도시사』, 태학사, 2007, pp.279-352
43) 『太宗實錄』25권, 太宗13년 6월 19일/丙寅
44) 『世宗實錄』권12, 世宗3년 7월 3일/癸亥
<그림 2> 조선후기 지도에 표시된 준수방 위치
(자료출처 : 李燦·楊普景,『 서울의 옛 地圖』, 서울학연구소, 1995)

 

2. 장의동(장동)의 위치와 영역
준수방과 관련된 경복궁 서편 지역의 장소명으로 조선초기 기록에는‘장의동’이
라는 명칭이 자주 나온다. 장의동은 한자로‘藏義洞’,‘ 壯義洞’, 혹은‘莊義洞’으로
쓰였고, 창의동(彰義洞)이라고 불리기도 했다.45) 그리고 조선후기 지도와『동국여지
비고』,『 한경지략』등여러자료에서장의동은장동(壯洞)과함께사용되고있어동
일한 장소를 가리키는 명칭임도 알 수 있다.46)
장의동은 태종과 세종 때‘장의동 본궁’이라는 기록으로 자주 언급되는데, 본궁이

 

168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45) 조선왕조실록에‘藏義洞’은 태종 5년부터 총 31건 등장하고『( 太宗實錄』권9, 太宗 5년 4월 12일),‘ 壯義洞’은 세조 9년
부터 총 9건『( 世祖實錄』권30, 世祖 9년 5월 11일),‘ 莊義洞’은 宣祖 27년 이후 총 4건『( 宣祖實錄』권52, 宣祖 27년 6월
3일),‘ 壯洞’은 숙종 21년 이후 총 8건『( 肅宗實錄』권28, 肅宗 21년 3월 20일, 고종 때 1건),‘ 彰義洞’은 중종 1년 이후
총 8건이 보인다( 『中宗實錄』권1, 中宗원년 11월 7일). 그리고 세종 30년 궁성의 좌우측 저수시설에 대한 언급에서‘昌
義洞’으로 기록된 것도 있다( 『世宗實錄』권122, 世宗30년 10월 17일).
46)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경지략』, 1956, p.30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동국여지비고』, 2000, p.134
옛 지도인 도성삼군문분계지도와 여지도(輿地圖) 등에는‘壯義洞’으로 표시되어 있고, 수선전도와 조선성시도, 도성도(靑丘
指掌) 등에는‘壯洞’으로 표시되어 있다. 한편, 김상용(1561-1673)과 김상헌(1570-1672)의 후손들이 청풍계와 인왕산록
에 거주하게 되면서 이들을‘장동 김문’이라고 부른 것이나, 정선(1676-1759)의‘장동팔경’이 경복궁 서편 일대의 명승
지를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장동은 조선시대를 통해 경복궁 서쪽지역을 대표하는 장소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학연구ⅩLⅦ (2012. 5) 169

 


란 왕이 즉위하기 전, 즉 잠저시에 거처하던 곳을 말한다.47) 따라서 태종과 세종 때의
장의동 본궁은 태종과 세종이 즉위하기 전에 거처하던 곳이고, 세종의 탄생지가 바
로 이 장의동 본궁이 된다. 따라서 장의동 본궁은 세종의 탄생지를 찾는 작업에서 핵
심적인 키워드가 된다고 할 수 있으므로 장의동의 위치와 영역에 대헤서는 좀 더 상
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장의동이라는 지명은 창의문 밖에 있는 장의사(藏義寺)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도성의 서북쪽 소문인 창의문 안쪽에 위치한 동네라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
다. 장의사는 신라 무열왕 때 창건한 사찰로48) 고려시대에는 왕이 남경에 거둥하였
다가 삼각산 장의사 및 승가굴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어 한양 정도 이전부터 줄곧 존
재해 왔음이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비 신의왕후의 기신제를 여는 등
각종 법회를 거행하였고, 이후 장의사 터에 탕춘대를 쌓았다. 현재는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에 장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235호)가 남아 있어 이 일대에 장의사
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창의문은 태조 5년 도성의 성을 쌓을 때 서북의 소문으로 세운 것으로,49) 흔
히자하문이라고불리었다.50) 창의문은‘장의문’,‘ 장의동문’등으로불렸는데, 이로
부터 창의문 일대에 장의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51) 특히 장의동은 경복궁 서편의
대표적인 장소명으로 거론되었다. 즉, 태종 때 개천을 준설하면서 장의동구(藏義洞
口)부터 종묘동구(宗廟洞口)까지 석축으로 쌓았다는 기록은52) 장의동의 명칭이 도성

 

47)『 世宗實錄』권30, 世宗 7년 11월 2일/丁酉“潛邸時所御處 俗謂之本宮”『; 明宗實錄』권30, 明宗 19년 7월 3일/癸卯“本宮
潛邸時宮私藏餞穀處也”
48)『 三國史記』권5, 新羅本紀 太宗武烈王 6년『; 三國遺事』권1, 紀異2 長春郞 罷郞
49)『 太祖實錄』권10, 太祖 5년 9월 24일/기묘
창의문은 태종 때 풍수지리설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중종 때 개방되었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영조 16년 다시 세웠다
( 『英祖實錄』권52, 英祖16년 8월 1일/己亥;권53, 英祖17년 정월 22일/戊子).
50) 자하동은 자하문이 있는 동네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고, 자하문이 창의문의 별칭이므로 자하동은 창의문 부근의 동네
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개성 송악산의 북성문 아래에도 자하동이 있었다는 점에서 성 아래 동네를 자하동
이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訓蒙字會』에 의하면 자하동은 우리말의‘잣동’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으로,‘ 잣’은 옛말로
‘성(城)’의 뜻이 있고 속칭‘자(子)’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문을 잣문으로 불렀을 것이고, 잣골은 성문 아래 마을을 지칭하
는 것이 되므로 결국 잣문은 자하문, 잣골은 자하동이 된다.
51)『 太宗實錄』권32, 太宗 16년 7월 22일/辛亥『; 世宗實錄』권112, 世宗 28년 4월 15일/壬子『; 세조실록』권27, 世祖 8년 2
월 18일/癸未
52)『 太宗實錄』권23, 太宗 12년 2월 15일/庚午

 


洞口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지만, 사전적으로는 주요 장소로 진입하는 길의 어귀를 의미하
므로 장의동구는 백운동천과 옥류동천 두 개의 물줄기가 합류하여 남동쪽으로 흘러가는 지점 즉 예전에 경복궁 남서쪽에
있었던 금천교 주변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장의동은 경복궁 서편 일대 전체를 포괄하는 장소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 물줄기가 시작되는 경복궁 서
편의 대표적인 장소명으로 사용
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나아
가 장의동의 영역은 세종 11년과
성종 3년, 영조 46년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여러 물줄기가 합해
지는 지역이라는 점과 경복궁 서
편의 자수궁이 있는 지역도 지칭
한다는 점, 그리고 경복궁 서문
인 영추문(연추문)이 있는 지역
을 포함한다는 점 등에서 북쪽의
창의문으로부터 남쪽의 영추문
주변에 이르기 까지 폭넓게 걸쳐
있었다고 하겠다.53) 아울러『독
립신문』에도 자수궁 다리가 있는
곳을‘북장동’이라고 하여54) 장
동이라는 장소명은 근대까지도
계속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장의동은 이 지역의 상징적 구심점으로서 그 영역은 경복궁
서편 지역 대부분을 아울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조선후기 지도에서 경복궁
서편의 동명은 대부분 백운동과 옥류동, 장의동 혹은 장동으로 표현되었는데, 백운
동은 창의문과 인접한 동명으로, 옥류동은 인왕산과 인접한 지역으로 되어 있고, 장
의동(장동)은 경복궁과 인접한 동명으로 표현되고 있어 경복궁 서쪽의 대표적인 장
소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조선후기 정선의 화첩에는‘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2

 

170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53)『 世宗實錄』권46, 世宗 11년 12월 9일/辛巳“장의동은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한 시내로 모여 들어 다른 곳으로 흘러 내려
가는 곳이 없기 때문에...”『; 成宗實錄』권19, 成宗 3년 6월 16일/辛巳“장의동의 냇물을 끌어서 경복궁으로 흘러 들어오
게 하는 것의 편리 여부를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였는데, 신 등이 관상감 제조와 더불어 영추문 안의 냇물을 살펴보니, ...
자수궁 동쪽의 냇물을 끌어서 영추문 수구에 흘러 들어오게 하는 것을 정지하여 명당의 수맥을 보존하게 하소서...”『; 영
조실록』권115, 英祖46년 8월 1일/甲戌“내가 어젯밤 꿈속에서 장동 延秋門옛 동네의 사람을 만나보았는데...”
54)『 독립신문』1897년 11월 6일 잡보 4면 1단
<그림 3> 항공지도에 표시한 장동팔경 위치
(최완수,『 겸재의 한양진경』을 바탕으로 작성함)
서울학연구ⅩLⅦ (2012. 5) 171

 

본이 전하는데, 팔경의 대상이 다른 것이 있어 모두 합치면 11곳이 된다.55) 이 11곳
을 지도상에 표시해 보면 창의문에서 필운대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분포한다.
여기서도 장동, 즉 장의동의 범위가 경복궁 서편 지역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음을 확
인할 수 있다.56)
한편,‘ 동(洞)’으로지칭되는장소명은조선시대정식행정구역명칭은아니었다.
조선시대의 행정체계는‘부(部)’와‘방(坊)’으로 구성되고, 조선후기에 들어서‘계
(契)’가 추가되었다. 한성부의 행정구역으로 동이 나타나는 것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의 일로 계 아래 775개 동이 설치되었다.57)
동은 그 어원이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후기『한경지략』에서 동에 대한 어원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고,58) 정약용의『아언각비 雅言覺非』에서는 동이‘리(里)’와
‘촌(村)’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고 하였다.59) 그리고『동국여지비고』나『한경지략』
등에 나타난 동명을 살펴보면, 동은 지형적 특성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골짜기를
나타내는 용어로도 사용되었으며, 특정 지역의 마을을 지칭하거나 자연촌락을 의미
하는 용어로도 사용되는 등 지역 주민들이 자신들의 동네를 지칭할 때 편의적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동은 정식 행정구역 명칭이 아니었고,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자연촌락 등의 동네 이름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경복궁 서편 지
역을 준수방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장의동(장동)이라고 부르기도 한 것은 공식 행정
구역 명칭을 사용하느냐 아니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동명을 사용하느냐의 차이로
이해된다.

 

55) 장동팔경은 간송미술관 소장본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 전한다. 대은암, 독락정, 청송당, 청풍계, 취미대는 공통적으로
그려져 있고, 그 외에 간송미술관 소장본에는 청휘각, 자하동, 필운대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는 백운동, 창의문, 수성동
이 그려져 있다.
56) 장동팔경의 명소가 장동에 포함되는 지역인지, 아니면 장동에서 바라다보는 명소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지만, 장동의 경관
(물리적+시각적)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장동의 장소성을 가진 영역으로 고려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57) 동(洞)에 대한 연구로는, 박경룡,『 개화기 한성부 연구』, 일지사, 1995, pp.19-22 및 고동환,「 조선후기 한성부 행정편제의
변화」『서울학연구』11, 서울학연구소, 1998, pp.60-66 참고. 박경룡은 영조 41년(1765) 한성부에서 제작한 李普寅의 호적
에 행정구역이 部, 坊, 契, 銃, 戶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계 아래로는 총과 호가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58) 유본예 저, 권태익 역,『 한경지략』, 탐구당, 1981, p.209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경지략』, 1956, p.283“ 지금의 서울
여러 거리를 모두 洞이라 하는 것은 중국의 과 같은 것이다. 農岩雜識에 보면 중국에서 洞이라 하는 데는 모두 바위
틈 사이 가운데가 비어서 거처할 만한 곳을 이름이라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도성의 坊里도 역시 洞이라 한 것은
더욱 말도 안 된다. 무슨 까닭에 이런 잘못이 있는지 모르겠다. 또 楊升庵集에 보면 요새 거리 골목을 胡洞이라고 하고 혹
은 衙洞, 또는 이라고도 했으니 우리나라에 있어서 洞자를 쓴 것은 모두 자를 쓰는 것이 옳다 하였다.”
59) 박경룡,『 개화기 한성부 연구』, 일지사, 1995, p.21에서 재인용“洞은 원래 空 혹은 洞穴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요즈음은
흔히 里, 村과 같은 마을의 의미로 쓰이게 되고, 깊은 골짜기를 뜻하게 되었다.”
결국, 세종의 탄생지와 관련하여『세종실록』총서에서 준수방이라고 한 것은 실록
의 성격에 맞는 정식 행정구역명을 사용한 것이고, 장의동은 일반적으로 호칭되던
장소명을 사용한 것으로, 두 명칭이 동일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Ⅳ. 세종 탄생지 추정
1. 세종 탄생지의 위치와 규모에 대한 전제
잠저는 국왕이 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사저(私邸)의 미칭이며, 본궁(本宮)이라고
도 한다. 따라서 왕의 탄생지와 잠저(본궁)가 반드시 동일한 곳은 아니다. 그러나‘장
의동 본궁’은 세종 때 태종 잠저의 옛터가 장의동에 있다고 한 점,60) 태종·세종 때
본궁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장의동 본궁에 대한 내용이라는 점, 왕세자인 세종이 태
종과 함께 개성에 있는 신의왕후의 제릉(齊陵)을 배알하고 한양으로 돌아와 거처한
곳이 바로 장의동 본궁이었다는 점,61) 세종이 즉위한 이후 창덕궁 확장공사를 진행
하던 기간에 이 본궁에서 정사를 보았다는 점62) 등에서 세종의 탄생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세종 7년 왕이 장의동 잠저로 이어했다는 기록에서63) 직접적
으로 자신의 잠저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전후의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장의동 잠저는 태종의 잠저이자 세종의 탄생지로 판단된다. 그리고 세종 때 잠저라
는 표현이 이때 처음 언급된 점과, 다른 장소에서는 잠저라고 지칭한 것이 없다는 점
에서도 장의동 본궁이 세종의 탄생지일 것으로 추정된다. 즉, 장의동 본궁은 준수방
잠저를 달리 말한 것이다.64)

 

172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60) 『世宗實錄』권61, 世宗15년 7월 21일/壬申
61) 『太宗實錄』권36, 太宗18년 7월 20일/戊辰
62) 『世宗實錄』권1, 世宗즉위년 8월 11일/戊子;8월 25일/壬寅;9월 13일/庚申
63)『 世宗實錄』권29, 世宗 7년 윤7월 28일/乙丑“戌時에 임금이 연을 타고 서문으로 나가 장의동 잠저에 이어하였다. 隨駕하
는 총제·대언 이하는 모두 걸어서 따랐다. 날이 이미 어두웠으나 등불을 켜지 아니하고, 세자도 따라갔다.”
64)『 世祖實錄』總書에는 세종의 아들인 세조가 태종 17년(1417)에 본궁에서 탄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종 17년은 세종
이 아직 왕세자로 책봉되지 않았던 시기이고, 따라서 세조는 궁궐 밖 세종의 잠저, 즉 장의동 본궁에서 탄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世祖實錄』의 기록에 세조가 잠저에 있을 때 세종을 사모하면서 시를 지었다고 한 데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世祖實錄』권7, 世祖3년 3월 29일/壬辰).
서울학연구ⅩLⅦ (2012. 5) 173

 

한편,『 태종실록』에는 장의
동 본궁에 대한 기록과 함께
태종 11년 영견방(永堅坊) 본
궁의 수리에 대한 언급이 있
다.65) 영견방은 태조 때 한성
부를 5부 52방으로 구분하면
서 서부 지역의 방명으로 처음
등장하고 이후 방명으로 존재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주변의
다른 방에 흡수된 것으로 보이
는데, 어느 방에 흡수되었는지
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태
조실록』에 52방이 기록된 순서를 보면 대부분 인접한 방 순으로 되어 있으므로 영견
방은 인달방과 서로 인접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달방은 서쪽으로 사직단과
필운대 등 서부 지역의 가장자리에 접한 지역이었으므로 인달방의 동(북)쪽이 영견
방이었을 것이고,66) 그렇다면 영견방은 준수방과도 인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울
러 태종 11년 영견방 본궁의 수리와 관련된 기사에서‘임금이 지난 봄 본궁에 있을
때’라는 내용이 있는데,67) 실제로 같은 해 3월에 태종이 상왕인 정종의 인덕궁에 가
서 헌수한 다음 장의동 본궁으로 행차한 기록이 있다.68)
영견방이 준수방과 인접해 있었던 점은 다음의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태
종 11년에 박자청으로 하여금 영견방 본궁을 수리하게 하면서 본궁 서쪽에 못을 조
성했는데 그 규모가 동서 170척, 남북 150척에 달했으며, 연못 중앙에 누각을 세웠
다.69) 이것을 현재의 길이 단위로 환산하면 동서 52.7m, 남북 46.5m 내외의 크기로

 

 

65) 『太宗實錄』권22, 太宗11년 7월 3일/壬戌
66)『 太祖實錄』의 기록에는 서부의 방명이 영견방에서 시작되어 인달방, 적선방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본문의 <표 1> 참고).
조선후기 지도에서 인달방은 사직단과 인접해 있고, 그 남동쪽으로 적선방이 있다. 따라서 영견방은 인달방과 인접한 동
(북)쪽 지역으로 짐작된다.
67) 앞의 주 64)와 같음
68) 『太宗實錄』권21, 太宗11년 3월 6일/丙寅
69) 『太宗實錄』권22, 太宗11년 8월 9일/戊戌

 


<그림 4> 도성대지도를 바탕으로 도시한 준수방과
인달방, 장의동(장동), 영견방 위치관계 개념도
약 742평 정도의 연못을 조성한 셈이다.70) 조선시대 가대제한에서 대군이나 공주 등
의 집터 규모와 비교해 보면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상당히 큰 규모의 면적이다. 그러
나『태종실록』에는 6년 여 만에 이 연못을 메우면서“본궁의 작은 연못(本宮小池)”이
라고 표현하였다.71) 즉, 태종 때 영견방 본궁은 상당한 규모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
고, 당시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할 때 복수의 방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준수방과 영견방은 서로 인접해 있었고, 두 방에 걸쳐 본궁이 입지해 있었던 것
으로 추정된다. 즉, 장의동 본궁과 영견방 본궁은 동일한 제택을 가리키는 명칭이었
던 것이다.
잠저의 규모를 추정하기 위해서 조선시대 가대(家垈)의 규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태조 때 한양 천도와 함께 궁궐과 종묘사직, 관청 등의 위치가 결정된 이후 도성에 거
주할 사람들에게 가대를 나누어주었다. 이때 가대를 나누어준 기준이『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성종 9년에 이것을 다시 정리하여『경국대전』에 수록하였다.72)

 

174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70) 대체로 조선시대 영조척의 단위 길이는 척 당 31㎝ 내외로 계산한다. (윤장섭, 『건축학연구』「한국의 영조척도」, 1985,
pp.63-82 참조)
71) 『太宗實錄』권33, 太宗17년 2월 24일/辛巳
72) 태조 4년의 가대 결정은 애초에 정1품이 60부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신도 한양의 면적이 그리 넓지 않아 반으로 줄여서
확정했다( 『太祖實錄』권7, 太祖4년 정월 14일). 또한『경국대전』에 수록된 가대는 성종 때의 논의를 거쳐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成宗實錄』권88, 成宗9년 정월 16일).
태조 4년 경국대전
品階負數현행평수 品階負數현행평수
1品35 1,376 大君·公主30 1,179
2品30 1,179
王子君·翁主25 983
3品25 983
4品20 786 1, 2品15 589
5品15 589
3, 4品10 393
6品10 393
7品8 314 5, 6品8 314
8品6 235
7品이하 및 有蔭子孫4 157
9品4 157
庶人 2 78 庶人 2 78
<표 2> 태조 4년과 경국대전의 가대제한 규정
(주남철,『 한국주택건축, 일지사, 1994. 1. 인용(1부의 면적은 약 39.32평))
서울학연구ⅩLⅦ (2012. 5) 175

 

잠저의 규모 추정에 있어서 주의할 점은 가대제한이 한양 천도 이후에 규정되었기
때문에 가대 제한 이전에 태조를 따라 한양으로 온 왕족이나 측근들의 집터에는 적
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천도 초기 가대제한 규정이 마련되기 이전에 판개성
부사 이거인이 다른 사람의 집터를 빼앗았다는 기록으로 보아73) 왕족이나 신하들이
집터를 확장해 가는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고, 집터의 면적에 대한 규정도 엄격하
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집터에 대한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가대제한을 실시하
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 특징적인 것으로는 태조 때의 가대제한에는 1품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의 규정만 마련되었을 뿐, 왕족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가대제한 규정만으로 세종이 탄생한 준수방 잠저의 규모를 추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대제한 규정은 조선시대 제택의 규모
를 짐작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본 자료가 된다. 즉, 그러한 규정이 시행되었다
는 사실은 반대로 이러한 규정을 벗어나는 사례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그렇
다면 조선시대 왕족 등 특별한 사람들의 제택이 규정보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
었을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글학회와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가 세종 탄생지를 추정한 것에 한 가지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준수방 잠저로
알려져 있는 세종의 탄생지는 일반 가옥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지도상에 표시할 때에도 점이 아니라 일정한 면적으로 나타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경복궁 서편에 위치했던 조선 별궁(宮家)들의 사
례를 보면 더욱 명확하게 이해된다.
우선 경복궁 서남쪽에 인접했던 창의궁(彰義宮)은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
처했던 잠저로 옛 지도와 근대 지도에 비교적 궁역이 명확하게 표시되고, 근대에 작
성된 도면도 남아 있어 궁가의 평면구성도 확인이 가능하다. 전체 궁역을 태조 때 가
대규정과 비교해 보면 4.5배 이상의 면적을 차지한다. 또한 사직단 남서쪽에 인접한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종손 이하전(李夏銓)의 궁가인 도정궁(都
正宮)은 현재 그 터가 없어지고 전각의 일부가 건국대학교 교내로 옮겨졌지만, 이전
되기 전의 자료를 살펴보면 그 개략적인 면적이 확인된다. 그리고 순조의 생모인 수

 


73) 『太祖實錄』권6, 太祖3년 12월 15일/庚辰;권7, 太祖4년 정월 8일/癸卯

 

빈박씨의 사당으로 알려진 경우궁(景祐宮)과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위
를 봉안하고 제사하던 선희궁(宣禧宮), 궁역을 명확하게 추정하기 어렵고 많은 변화
가 있었던 효종의 잠저로 알려진 용흥궁(龍興宮, 下於義宮) 등의 예를 보면 상당히
넓은 궁역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한경지략』에는 조선 초 정도전의 집이 수
진방에 있었는데 그 규모가 말 천 마리를 맬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므로74), 당시 지
배층은 상당히 넓은 규모의 집터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탄생지의 영역 추정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고려할 점으로 고려 말부터 존재
해 왔던 왕족들의 사병제도가 있다.75) 특히 사병 가운데 반당( )으로 지칭되는

 

176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그림 5> 경복궁 서편에 입지한 별궁 분포
(좌측의 지도는 1차적으로 현재의 지적도에 1912년 지적도를 대조하면서 도면화하고, 2차적으로
1912년 지적을 다시 18세기 무렵 도성대지도와 비교 검토해서 18세기 길ㆍ물길의 모습을 추정
복원한 것이다. 그리고 1921년 지형도(우측 지도)에 나타난 등고선을 축척에 맞게 그린 것이다.)
74) 유본예 저, 권태익 역,『 한경지략』, 탐구당, 1981, p.210
75) 고려말, 조선초의 사병과 관련해서는 閔賢九,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 韓國硏究院, 1983 및 韓嬉淑, 「朝鮮初期의
」『歷史學報』112, 1986 참조
서울학연구ⅩLⅦ (2012. 5) 177

 


계열은 건국 이후 중추적인 사병집단으로 사제숙위(私第宿衛)와 배종(陪從) 등의 일
에 종사하였다.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은 사병 폐지를 둘러싼 갈등이 직
접적인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것이었고, 난의 과정에서 왕자들의 사병이 중추적인 군
사력으로 동원되었다. 세종이 태종의 잠저에서 탄생한 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
나기 한 해 전이었으므로 태종의 사병조직이 한창 강화되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이
무렵 태종 잠저에는 많은 사병들을 거느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을 것이므로 그
잠저의 면적은 상당히 넓었을 가능성이 크다.

 


2. 세종 탄생지의 종합적 고찰
세종 탄생지의 위치와 규모를 추정하기 위해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정리해보면 다
음과 같다.
첫째, 세종의 탄생지인 준수방은 물줄기가 흐르는 곳에 위치하며, 이곳은 조선초
기부터 장의동(장동)이라는 장소명으로 불렸다. 그리고 준수방에 있던 잠저를 장의
동 본궁이라고도 했으며, 이곳이 태종의 잠저이자 세종의 잠저, 즉 세종의 탄생지로
판단된다.
둘째, 영견방은 조선초기 행정구역에서 서부에 속했지만 북부의 준수방과 인접해
있었다. 그 때문에 장의동 본궁은 영견방 본궁이라고도 불렸으며, 이곳에는 상당히
큰 면적의 연못이 있었다.
셋째, 조선초기에 왕족의 제택은 가대제한의 규정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고, 특
히 세종이 태어났을 때는 가대제한이 실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왕족들은 상당히 넓
은 집터를 소유하고 있었고, 더욱이 사병을 두는 것이 허용되었으므로 당시 태종은
많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따라서 세종의 탄생지는 일반 주택과 같이 점으로 표
시할 수 없는, 즉 여러 지역 경계에 걸쳐 넓은 면적에 입지했을 것이다.
넷째, 세종 탄생지의 위치를 주변의 장소와 관련지어 상대적인 위치를 추정하면,
태종 잠저이자 세종 탄생지는 북쪽으로 무안군 방번의 제택(뒤의 자수궁)에 인접했
고,76), 남쪽으로는 돈의문(서대문) 부근에 있던 상왕 정종의 제택인 인덕궁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에서도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의 지도를 보면 영추문에서 준수방으로 통
하는 수평의 지름길이 확인되므로 이 길을 통해 준수방과 경복궁이 최단거리로 연결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여러 가지 내용을 토대로 18세기 무렵의 지도인 도성대지도와 근대의 실측
지도인 1912년 지적도, 그리고 최근의 지적도에 세종 탄생지의 위치와 규모를 추정
해 보면, 현재 통인동을 중심으로 옥인동과 누하동, 체부동의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178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76) 개국 초기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와 태종, 그리고 어린 이복동생들 간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했을 것이다. 이러한 가족
관계와 조선이 개국하는 시점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면 태조의 자식들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일정한 영역에 서로 인
접해서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충희,「 잠저기(1367-1400) 태종연구」『大丘史學』56, 1998, pp.61-102 참조
77) 이러한 추정은 조선시대의 길과 물길이 크게 변화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이다. 실제로 여러 문헌들을 검
토해 보면 한양 도성 내의 지형은 크게 변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를 조건으로 세종 탄생지를
비정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수 있지만, 현재의 자료로 추정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그림 6> 세종 탄생지 위치 및 범위 추정
서울학연구ⅩLⅦ (2012. 5) 179

 

넓은 영역에 입지했던 것으로 판단된다.77)

 

Ⅴ. 결론
본 연구는 조선초기 문헌자료에 대한 정리, 분석과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 이
해를 통해 세종의 탄생지를 추정해본 것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
신하고자 한다.
경복궁 서쪽 지역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북부에 속했지만 필운대를 경계로 아
래 지역은 서부에 속했으며, 도성의 서편에 위치한 입지적 요인과 궁궐을 비롯한 주
요 기능이 주로 북쪽에 편중된 점 등에서 서촌(西村)으로 인식되었을 것으로 짐작된
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에는 도성 내의 물줄기인 청계천을 기준으로 백운동천과 옥
류동천이 시작되는 상류 지역을 우대라고 불렀고, 동대문과 광희문 사이의 하류 지
역을 아래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상류 지역은 주로 당시 세도가들이 살았다는 의미
에서 북리(北里)라고도 불렸다.
지역명에서 이와 같이 여러 명칭으로 불렸던 것은 경복궁 서쪽에 입지한 장소성,
그리고 도성내의 물줄기와 필운대를 중심으로 한 지형적 요인 등에 의한 것으로 생
각된다. 최근 이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의 혼돈은 이런 요인과 더불어 역사 지리적 변
동에 따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경복궁 서쪽 지역의 상징적 경관 요소로는 인왕산이 있다. 인왕산은
조선시대 수도의 입지 논의에서 천도 후보지로 거론되는 등 중요한 장소성을 갖는
곳으로 줄곧 인식되었고, 이러한 장소성은 결국 한양 천도시 권력층을 위한 주거지
와 명승지로 선택되어 여러 제택과 별장들이 입지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경복궁
과 인접한 장소성으로 인해 궁궐과 관련한 여러 관서와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던 곳이기도 했다. 이렇듯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은 일반인들을 위한 거
주지로서의 장소가 아닌 경복궁과 관련된 공간이자 권력층의 장소였던 것으로 고려
되었다.
세종의 탄생지는『세종실록』에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라고 한 기록 외에는 참
고할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과 지도 등 시각 자료도 모두 18세기 이후의 자료들이라
는 한계로 인하여 정확한 고증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여러 관련 자료를 검토해 보
면, 준수방 잠저는 백운동천과 옥류동천의 물줄기 사이에 입지하고, 무안군 방번의
제택이 있던 자수궁(慈壽宮)과 북쪽으로 인접하며, 남쪽으로는 정종의 인덕궁(仁德
宮)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 그리고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에서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또한 세종의 탄생지는 태종의 잠저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준
수방 잠저는 장의동 본궁, 또는 영견방 본궁으로도 불렸다.
세종 탄생지의 영역에 있어서는 조선시대 왕족과 권력층들의 집터를 고려하면
상당히 넓은 면적이었음을 알 수 있고, 더욱이 세종이 태어난 무렵은 왕자의 난이 일
어나기 직전으로 태종은 많은 사병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이들을 위한 공간도
사저에 마련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존에 작은 면적의 점적으로 추정된 세종 탄생
지는 그 영역에 있어서 보다 넓은 면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그 위치와 범위는 현재의
통인동을 중심으로 그 주변 일대에 걸친 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180 일제하 종묘를 둘러싼 세력 갈등과 공간 변형
접수일 : 2012. 4. 2 심사일 : 2012. 4. 27
게재확정일 : 2012. 4. 30
주제어 : 우대, 서촌(西村), 북리(北里), 백운동천(白雲洞川), 옥류동천(玉流洞川), 필운대(弼雲臺),
인왕산(仁王山), 무안군 방번(撫安君芳蕃), 인덕궁(人德宮), 준수방 잠저(俊秀坊潛邸), 장의동
본궁(藏義洞本宮), 영견방 본궁(永堅坊本宮), 통인동(通仁洞).
서울학연구ⅩLⅦ (2012. 5) 181

 

■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2.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경지략』서울사료총서 제2, 2000, 8. ; 권태익 역,
탐구당, 1981, 2
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동국여지비고』서울사료총서제1, 2000, 8.
4『. 신증동국여지승람』고전국역총서40, (재)민족문화추진회, 1986, 3.
5.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동명연혁고』Ⅰ종로구편, 1992, 2.
6. 김영상「, 세종대왕과 이충무공의 탄생지 -현지답사전말보고-」, 서울특별시사편
찬위원회『, 향토서울』제3호, 1958. pp. 53-63.
7. 김용국「, 자수궁과인수궁」,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향토서울』제27호, 1966.
pp.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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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서울학연구ⅩLⅦ (2012. 5) 183
ABSTRACT
The Placeness of west area of Gyeongbok Palace
in early Joseon Dynasty and birthplace of
King Sejong
Park, Hi-Yong
Chief Researcher, Institute of Seoul Studies
Lee, Ik-Joo
Professor, University of Seoul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understand the placeness of west area of
Gyeongbok Palace(景福宮) in early Joseon Dynasty(朝鮮時代) and assume the
birthplace of King Sejong(世宗) who was the first king born in Hanyang(漢陽).
The west area of Gyeongbok Palace(景福宮) belonged to the northern side(北部) of
the administrative district, but area below the boundary of Pilwoondae(弼雲臺)
belonged to the western side(西部). Since it was located on the west side of the capital
city and major functions including palace were mainly concentrated in the north side,
I guess it might be recognized as the west village(西村). Besides, the area located
upstream which started Baekwoondong stream(白雲洞川) and Okryudong stream(玉
流洞川) based on Cheonggye stream(淸溪川) which was the main stream in the capital
city in Joseon Dynasty(朝鮮時代) was called Wudae and the area located downstream
between East Great Gate(東大門) and Gwanghee Gate(光熙門) was called Araedae. In
addition, since the area located upstream where many families in power at the time
184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lived, it was called Bukri(北里).
The reason why the area was called by multiple names was that the placeness located
on the west side of Gyeongbok Palace(景福宮), streams within the capital city and
geographical factor based on Pilwoondae(弼雲臺) were considered. Recent confusion
of the term referring to this area is caused by these factors and no consideration of
aspects based on historical and geographical variations.
In addition, the symbolic landscape element in the west side of Gyeongbok
Palace(景福宮) includes Inwang Mountain(仁王山). Inwang Mountain(仁王山) had
been recognized as the place which had the important placeness. For example, it was
mentioned as the candidate for transfer of the capital in the discussion of position of
capital in Joseon Dynasty(朝鮮時代). Due to this placeness, this area was eventually
selected as residence and scenic spot for powerful toads upon transfer of the capital and
it was a cause to locate residences, pavilions and villas. In addition, due to the placeness
adjacent to Gyeongbok Palace(景福宮), there were several governmental offices
associated with Palace and residences for employees who worked. Accordingly, it has
been considered that the west area of Gyeongbok Palace(景福宮) in early Joseon
Dynasty(朝鮮時代) was not the place of residences for the public but the place
associated with Gyeongbok Palace(景福宮) and the place for the power class.
Meanwhile, since there were almost no materials about the birth place for King
Sejong(世宗) except King Sejong Chronicle(世宗實錄) saying that he was born in the
private house in Joonsubang(俊秀坊潛邸) and many visual materials such as maps
were made after the 18th century, accurate historical investigation has the limitation.
However, if you review there relative materials, the private house in Joonsubang(俊秀
坊潛邸) was located between Baekwoondong stream(白雲洞川) and Okryudong
stream(玉流洞川) and the north side was adjacent to Jasu Palace(慈壽宮) which was
the residence of Muangun-BangBeon(撫安君芳蕃). It was likely that the south side
was close to Indeok Palace(仁德宮) of King Jeongjong(定宗) and was relatively close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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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chu Gate(迎秋門) of Gyeongbok Palace(景福宮). Because the birthplace for
King Sejong(世宗) was the private house for King Taejong(太宗), private house in
Joonsubang(俊秀坊潛邸) was called Bon-Gung of Jangeuidong(藏義洞本宮).
Furthermore, since Joonsubang(俊秀坊) and Younggeonbang(永堅坊) were adjacent to
each other, it seemed to be called Bon-Gung of Younggyeonbang(永堅坊本宮).
In terms of realms of the birthplace of King Sejong(世宗), it must be a large area
with a consideration of the site of house for royal families and power class in Joseon
Dynasty(朝鮮時代). Moreover, the time when King Sejong(世宗) was born was just
before royal prince’s war occurred. Therefore, since King Taejong(太宗) must have
large group of private soldiers, a huge space should be prepared in private house.
Therefore, the existing birthplace for King Sejong(世宗) which was assumed to be a
small area should be corrected in a wider area. It was assumed that the location and
scope could be current Tongin-dong(通仁洞) and its neighboring area.
Keywords : Wudae, west village(西村), Bukri(北里), Baekwoondong stream(白雲洞
川), Okryudong stream(玉流洞川), Pilwoondae(弼雲臺), Inwang Mountain(仁王山),
Muangun-BangBeon(撫安君芳蕃), Indeok Palace(人德宮), private house in
Joonsubang(俊秀坊潛邸), Bon-Gung of Jangeuidong(藏義洞本宮), Bon-Gung of
Younggyeonbang(永堅坊本宮), Tongin-dong(通仁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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