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무열왕 김 춘 추

2018. 2. 13. 09:36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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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김춘추

金春秋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진 영웅


요약 테이블
출생 604년
사망 661년

최초의 진골 출신 신라왕

김춘추(金春秋, 604~661)는 왕이었지만 왕호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라 불리지 않고 일반 사람의 이름인 ‘김춘추’라 불린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두 가지다. 김춘추는 왕손이었지만 왕자가 아니면서 왕위에 올랐다. 또 성골만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제도를 뛰어넘어 진골로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신라 왕이었다.

김춘추의 할아버지는 진지왕이다. 진지왕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정치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쫓겨난 뒤 곧바로 죽었다. 그 뒤를 이은 진평왕은 그의 외할아버지이자 종백부(아버지와 사촌 사이가 되는 큰아버지)가 된다. 김춘추는 이처럼 왕손의 혈통을 받았지만 할아버지의 죗값 때문에 그저 귀족의 대우를 받는 처지였다. 그러나 김춘추는 신성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용모가 뛰어나고 행동거지가 신중했으며, 왕족의 풍채까지 갖췄다. 그는 성장하면서 왕실과 귀족 사회에서 두루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큰 뜻을 품고 왕위를 넘보는 한편 삼국통일을 이룩할 야망도 키워 나갔다. 진골의 신분으로 이런 당찬 꿈을 키우게 된 데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신라는 반도의 후미진 동남쪽에 자리 잡은 나라로서 고구려, 백제, 일본의 압박을 끊임없이 받아 오다가 6세기 중엽에 가야를 통합하게 된다. 이 여세를 몰아 국경을 한강 언저리까지 넓히자 고구려, 백제, 일본의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는 수나라와 당나라가 연달아 통일을 이룩하고 있었는데, 신라는 수로로 당과 통하고 있었다.

김춘추의 소년시절 때 고구려와 백제는 끊임없이 신라를 위협했고, 신라는 내정을 다지면서 이에 맞서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김춘추는 큰 뜻을 품게 되었는데 혼자의 역량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함께할 동지가 필요했다. 이때 경주에 그와 뜻을 같이 할 젊은이가 있었다.

처남 매부 사이인 김춘추와 김유신

김유신은 가야의 왕손이지만 폐쇄적인 신라의 귀족사회에서 그의 출세는 한정되어 있었다. 김유신은 용화향도(龍華香徒, 화랑도 집단의 이름)를 이끌며 심신을 수양하고 젊은이들을 훈련시켜 세력을 키워 나갔다.

김유신 쪽에서 먼저 김춘추를 주의 깊게 보았다. 정월 어느 날, 김유신은 김춘추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두 사람은 집 앞마당에서 제기차기를 하며 즐겁게 놀던 중 김유신이 놀이에 열중한 김춘추 옆으로 다가가 일부러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김유신은 그에게 집 안으로 들어가 옷고름을 달자고 했다. 김유신은 첫째 여동생 아해에게 이 일을 시켰는데 아해가 부끄러워하며 사양하자, 둘째 여동생 아기(阿只, 문희)가 나서서 옷고름을 달아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남녀 사이에 사랑이 싹터 아기가 생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유신은 “부모의 허락도 없이 임신했다”며 동생을 크게 꾸짖고, 온 서울에 아기를 불태워 죽인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선덕왕각주1) 이 남산에 놀러가는 날을 택해 마당에 불을 지펴 연기를 크게 냈다. 선덕왕은 이 연기의 사연을 옆에 있던 김춘추에게 듣고는 그에게 두 사람을 구해 주도록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왕의 허락을 얻어 정식 혼인을 했다.

그런데 이 일화에는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김유신은 여덟 살 아래인 김춘추를 꾀어 매부로 삼으면서 신분상 도저히 혼인할 수 없는 관계를 합법적으로 해결했다.

둘째, 꿈에서 첫 여동생이 산에 올라가 온 서울에 가득 차게 오줌을 누었는데, 이 꿈을 동생에게 팔아 결국 왕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조작해서 이 혼인에 정당성을 주었다. 이런 이야기는 뒷날 그들이 권모술수나 부렸더라면 잔꾀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김춘추와 김유신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었고, 이 관계는 신라 역사를 크게 바꿔 놓은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합쳐 줄기차게 두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김유신은 무장으로서 고구려군과 백제군의 침입을 막느라 동분서주했다. 그는 동쪽과 북쪽에서 계속 이어지는 적군의 침입에 맞서 대항하고 때로는 그쪽 땅으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진덕왕 재위시에는 반역을 꾀하는 세력을 토벌하기도 했다. 그의 신임과 명망은 날이 갈수록 치솟아 전 군대를 통솔하는 대총관(大摠管)을 맡게 되었다. 그는 20여 년 동안 실패를 모르는 장수였다.

이에 반해 김춘추는 외교 전문가였다. 그의 발길은 이웃 나라로 바쁘게 움직여 다녔다. 백제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고구려로 들어가서 원병을 요청했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일본으로 건너가서 원조를 청했다. 백제에는 밀정을 보내 정보를 빼내고, 그곳 지배층에 이간을 붙였다. 그는 마침내 배를 타고 멀리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들어갔다. 아들 김법민(金法敏)을 데리고 당나라에 들어간 김춘추는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백제정벌군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마침내 백제 정벌을 위한 나당연합군을 결성시킨 것이다. 나당연합군의 결실은 두 나라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김춘추의 외교가 빚어낸 작품이다. 그는 이 정도의 합의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당나라에 조공의 사신을 보내게 했고, 아들 김인문(金仁問)을 그곳에 머물게 하여 뒷일을 도모했다. 이런 활동으로 그의 명망은 신라의 왕실에 떵떵 울렸다.

마침내 새로운 기회가 왔다. 654년 진덕왕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죽은 것이다. 이때 국왕을 추대하거나 폐위시키는 권한을 쥔 화백회의는 힘이 없었고, 국왕의 직속인 상대등이 화백회의를 좌우했다. 처음 왕손 알천(閼天)에게 섭정을 맡겼으나 김유신과 알천은 뜻을 맞추어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가 진골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명망과 능력 때문이겠지만, 김유신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태종무열왕의 작전회의

태종무열왕을 중심으로 신라의 주요 인물들이 군사작전을 토의하는 장면을 묘사한 기록화이다.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지다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몇 가지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첫째, 당의 문물제도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율령국가의 체제를 다졌다. 이에 따라 중앙집권의 성격을 띤 통치가 원활하게 이루어졌고 국가 관료체제가 확립되었다.

둘째,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통일전쟁에 대비했다. 그리고 김유신을 정점으로 군사 지휘체계를 확실하게 했다.

이렇게 왕권이 강화된 조건에서 김춘추는 먼저 백제 정벌을 단행한 것이다. 당군은 13만 명의 군사력으로 바다를 건너 사비성을 쳤고, 신라군은 5만 명의 정병으로 육지로 쳐들어가 사비성을 공략했다. 끝내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당은 백제의 땅에 다섯 도독부를 두어 신라를 견제했다. 김춘추는 새로운 시련을 맞이했다. 더욱이 고구려군은 북한산 언저리까지 공격해 오고 일본군은 금강 하류까지 쳐들어왔다. 백제의 부흥군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마당에서 김춘추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당군은 백제부흥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본국에 증원군을 요청하기도 하고 신라에 구원을 요구하기도 했다. 김춘추는 당군의 침략의도를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거꾸로 백제부흥군의 항전을 유도하여 당군의 약화를 노렸다. 신라군은 백제부흥군과 전투를 벌일 때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고, 더러 패전하는 경우에도 인명의 손실을 적게 내고 무기를 빼앗기는 전략으로 대응했다.

이런 양면전술은 백제의 유민을 포섭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백제의 벼슬아치들에게 지난날의 자리를 인정해 주고 생활도 안정시켜 주었다. 이런 전술은 김춘추가 죽고 난 뒤에도 계속되었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도 무마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킨 지 꼭 1년 만에 죽어 그의 손으로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다.

그의 나이 59세. 그가 죽고 난 뒤 신라는 진골이 왕위에 오르는 세습군주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그는 후대 신라 왕의 중조(中祖)가 되었고 통일의 기초를 다진 영웅으로 추앙을 받았다.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삼국통일은 그의 아들 문무왕(文武王)과 김유신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통일에는 역사적 평가가 따른다. 그것은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을 이룩한 반토막 통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옛 영역을 모두 확보하지 못했으며,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갈등관계를 빚었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것은 결과론이다. 역사적 결과야 그러했지만 김춘추의 섣부른 통일의지 때문에 빚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뒷날 신라는 당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벌였다. 그런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은 혈연의식을 가지고 서로 협력했고, 신라는 이를 주도하면서 당의 세력을 요동 땅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그 후대들은 한반도의 39도선에서 안존했고 당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에 놀아나 북쪽의 발해와 경쟁했다. 김춘추는 분명히 통일의 기초를 다진 영웅이었고 통일의 화신이었다. 민족 분단을 겪고 있는 오늘날, 남북을 통일시킬 미래의 주역들인 우리 청소년들은 김춘추의 큰 뜻을 다시 새겨 봐야 할 것이다.

태종무열왕릉비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릉 앞에 세워진 돌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비들은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머릿돌에는 이무기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최초의 보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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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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