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 편람<2>고려의 멸망

2018. 2. 16. 16:31우리 역사 바로알기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秋九月, 李勣拔平壤.]

가을 9월에 이적이 평양을 함락시켰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7년(668년)


 668년. 당나라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 이적과 요동도부대총관 설인귀가 이끄는 당병이 고려의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고려의 5만 대군을 살하수에서 격파한 뒤 대행성과 욕이성을 거쳐 수도 평양성까지 이르렀다. 이미 평양성에는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 계필하력이 와서 포위하고 있었고, 신라군은 대곡성과 한성을 거쳐 사천 벌판에서 고려군을 깨뜨리고 평양으로 오고 있었다. 나당 연합군은 고려의 수도 평양성을 포위하고 고려 멸망을 위한 총공세에 들어갔다.


 고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이 연남산을 보내 항복하고, 태대막리지로서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이던 연남건마저 부하 승려 신성의 배신으로 닷새만에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려는 8백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당나라에서는 고려 땅의 5부, 176성, 69만여 호를 자기들 입맛대로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눠 설치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통치하며, 현지 고려인 가운데 공이 있는 자들을 뽑아 도독 · 자사 · 현령으로 삼아 중국 사람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게 하고,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 설인귀를 검교(檢校) 안동도호로 삼아 2만 군사로 진무하게 하였다.


[北扶餘城州, 本助利非西, 節城, 本蕪子忽, 豊夫城, 本肖巴忽, 新城州, 本仇次忽【或云敦城】桃城, 本波尸忽, 大豆山城, 本非達忽, 遼東城州, 本烏列忽, 屋城州, 白石城, 多伐嶽州, 安市城, 舊安寸忽【或云丸都城.】]

본래 조리비서(助利非西)라 불리던 북부여성주(北扶餘城州)와, 본래 무자홀(蕪子忽)이라 불리던 절성(節城), 본래 초파홀(肖巴忽)이라 불리던 풍부성(豊夫城), 본래 구차홀(仇次忽)【돈성(敦城)이라고도 하였다.】이라 불리던 신성주(新城州), 본래 파시홀(波尸忽)이라 불리던 도성(桃城), 본래 비달홀(非達忽)이라 불리던 대두산성(大豆山城), 본래 오열홀(烏列忽)이라 불리던 요동성주(遼東城州), (그리고) 옥성주(屋城州), 백석성(白石城), 다벌악주(多伐嶽州), 예전의 안촌홀(安寸忽)【환도성(丸都城)이라고도 하였다.】이었던 안시성이다.

《삼국사》 권제37, 지리지4, 고구려 中 '압록수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11성'


 압록강 이북에서는 아직 열한 개의 고려 성들이 버티고 있었다. 양암성이나 목저성처럼, 연남생을 따라 항복한 곳도 열한 곳이나 있긴 했지만 이적이 고종에게 보고한 것을 보면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성' 외에 668년의 평양 함락전 무렵 당에게 함락되어 평정된 줄 알았는데 다시 반기를 들고 고려로 도망친, '압록 이북의 도망친 7성'도 따로 실려 있다. 북부여성과 신성, 요동성, 백석성(백암성)이 그것이다. 힘이 딸려서 항복했거나 아니면 내부 분열로 당에게 넘어간 성들 가운데서도 오히려 당에 반기를 들고 강력하게 저항하는 세력들이 있었던 것이다.


[鈆城, 本乃勿忽, 面岳城, 牙岳城, 本皆尸押忽, 鷲岳城, 本甘弥忽, 積利城, 本赤里忽, 木銀城, 本召尸忽, 犁山城, 本加尸達忽.]

본래 내물홀(乃勿忽)이었던 연성(鈆城), 면악성(面岳城), 본래 개시압홀(皆尸押忽)이었던 아악성(牙岳城), 본래 감미홀(甘弥忽)이었던 취악성(鷲岳城), 본래 적리홀(赤里忽)이었던 적리성(積利城), 본래 소시홀(召尸忽)이었던 목은성(木銀城), 본래 가시달홀(加尸達忽)이었던 여산성(犁山城).

《삼국사》 권제37, 지리지4, 고구려 中 '압록 이북의 도망친 7성'


 여기에 평양 함락 이후 이적 본인이 직접 쳐서 함락시킨 세 성의 이름까지 《삼국사》에는 수록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더 말하지 않기로 한다.


[二年己巳二月, 王之庶子安勝, 率四千餘戶, 投新羅.]

2년 기사(669년) 2월에 왕의 서자(庶子) 안승(安勝)이 4천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지금은 별로 지명도가 높지 않지만, 고려부흥운동사를 개설하는 데에는 가장 첫머리에 안승의 이름을 올릴 수밖에 없다. 왜냐면 안승에서부터 현지 고려인들의 반발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미약하나마 고려 부흥운동군의 동량(棟梁) 노릇을 했던 자 또한 안승이었다. 고로 안승의 계보를 잠시나마 여기서 짚고 넘어가본다.


 안승에 대해 어려서는 보장왕의 외손이라고 배웠었는데 지금은 보장왕의 서자, 즉 후궁 소생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연정토의 아들이라고도 했다. 연정토의 아들이자 보장왕의 외손자, 즉 보장왕이 자신의 딸을 연정토에게 시집보내어 얻은 아들이라고 하는, 이이화 선생이나 임기환 교수의 말을 따라 여기에는 적었다.


[夏四月, 高宗移三萬八千三百戶, 於江淮之南及山南ㆍ京西諸州空曠之地.]

여름 4월에 고종이 38,300호를 강(江)ㆍ회(淮)의 남쪽과 산남(山南)ㆍ경서(京西) 여러 주의 빈 땅으로 옮겼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기사년(669년)


 안승이 망명하고 두 달 뒤인 4월에, 당나라는 고려 유민 중에서도 특히나 반발이 심했던 자들, 그러니까 '불령려인(不逞麗人)'에 대한 강제 이주계획을 입안했다. 이 《삼국사》 기록은 《자치통감》을 보고 쓴 것이다. 《자치통감》에는 고려인 이주 계획을 입안한 원인을 "고려 유민으로서 반발하는 자가 많았다[高麗之民, 多離叛者]"고 기록 앞에 적고 있다.


 계획은 바로 다음 달에 시행되었다.


[庚子, 移高麗戶二萬八千二百, 車一千八十乘, 牛三千三百頭, 馬二千九百匹, 駝六十頭. 將入內地, ○ㆍ營二州般次發遣, 量配於江淮以南及山南幷○以西諸州空閑處安置.]

경자에 고려 유민 28,200호에 수레 1,080승, 소 3,300마리에 말 2,900필, 낙타 예순 마리를 내륙 지역으로 옮기려고 내주와 영주에서 차례대로 출발시켰다. 장강과 회하 남쪽, 산남과 병주ㆍ양주 서쪽 여러 주의 황무지에 각각 안배하여 안치하였다.

《구당서》권제5, 본기5, 고종 하(下), 총장 2년(669년) 5월


 고려 유민이 얼마나 당나라로 끌려갔는가에 대해서 중국 학계에서는 '20만 명'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사》신라 문무왕본기의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福男)ㆍ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으로 돌아갔다[英公以王寶臧 王子福男ㆍ德男, 大臣等二十餘萬口, 廻唐]."기록을 따른 것이다. 고려 인구의 반 이상에 해당하는 숫자인데 이만한 숫자가 당나라로 끌려가 내지화되었다면, 현재 중국인들의 조상이기도 하니 고려 역사는 마땅히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켜서 봐야 한다는 것ㅡ이 중국의 논리다.


 이 기록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것이 있다. 백제가 멸망했을 때와 대조해보면 수치상으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한 뒤, 당나라의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효(孝) · 왕자 태(泰)ㆍ융(隆)ㆍ연(演) 및 좌평 사택천복, 국반성 등 대신과 장사(將士) 88명에 백성 12,807명을 당나라로 압송했다. 두 나라 사이에 국토나 인구에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똑같이 반란봉기의 핵심중추가 될 지도부를 도려내는 데 누구는 요만큼 데려가고 누구는 이만큼 데려가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지금 남아있는 《구당서》나 《신당서》에서도 20만 명이나 데리고 왔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는 데서, '20만'이라고 한 것은 단순한 부풀리기나 글자의 오자가 아닐까 한다는 거다.


 이들은 두 길로 나뉘어 끌려갔는데, 요동 지역의 포로들은 땅으로 요하 건너 영주로 갔다가 중국 서쪽 오지, 지금의 중국 태항산 너머 태원이나 실크로드 주변 감숙성 일대의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황무지(차마고도 있는 곳) 땅에 끌려갔다. 말하자면 거기 황무지 다 갈아놓으라고, 그리고 누구 쳐들어오는 외적 있으면 니들이 알아서 막으라고 거기다가 '던져' 놓은 거다. 거기서 살든 죽든 알 바 아니라는 식으로.


 평양에는 대부분 지위가 높거나 재력있고 명망 높은 장자들이 살았을 것 같은데(한 나라의 수도이니까), 이곳에서 잡은 포로들은 뱃길로 당의 수군 근거지인 동래로 압송했다가 여기서 황하와 양자강 가운데 있는 회수 남쪽, 양쯔 강 일대의 황무지나 상류쪽인 쓰촨 성으로 이주시켰다. 지금도 이곳은 중국 사람들에게는 가장 낙후된 곳으로 꼽히고 있다. 게다가 사람들 성질은 또 얼마나 더러운지(여기 음식이 좀 맵기로 유명하다지) 땅도 척박하고 인심도 엉망인 곳에다 고려 사람들을 데려다 놨으니(순한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말도 안 통하는 것들 사이에서 고초가 오죽했을까).


 고려 유민들 3만 호가 대거 중국 오지로 강제이주당한 이듬해 총장 3년ㅡ함형 원년(670년), 유인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구당서》열전에 보면 유인궤는 안동도호부를 지키기 위한 2만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고려 원정군과, 강제이주되는 유민들을 이끌고 회군한 다음 병으로 사직을 청했고 금자광록대부를 받았는데, 그가 물러나고 14일 뒤인 정월 신묘에 당 조정은 요하 동쪽의 고려 지역을 나누어 주와 현을 설치했다. 그것은 고려 옛 땅의 기미지배에 당나라 관리가 직접 참여하는 체제가 수립되었음을 의미했다.


 고려가 멸망하고 12월에 계획이 입안되어 1년이라는 준비 기간을 거친 '안동도호부' 중심의 지배플랜이 이때 처음 시행된 것이지만, 고려 유민의 본격적인 투쟁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冬, 唐使到傳詔, 與弩師仇珍川沙湌廻. 命造木弩, 放箭三十步. 帝問曰 “聞在爾國造弩射一千步, 今纔三十步. 何也” 對曰 “材不良也. 若取材本國, 則可以作之.”天子降使求之. 卽遣福漢大奈麻獻木. 乃命改造, 射至六十步. 問其故, 答曰 “臣亦不能知其所以然. 殆木過海, 爲濕氣所侵者歟.”天子疑其故不爲. 劫之以重罪. 而終不盡呈其能.]

겨울에 당의 사신이 도착하여 조를 전하고, 노사(弩師)인 구진천(仇珍川) 사찬과 함께 돌아갔다. 나무 쇠뇌를 만들게 하여 화살을 쏘았는데 30보를 나갔다. 황제가 그에게 물었다.

“듣자니 그대의 나라에서 쇠뇌를 만들어 쏘면 1천 보를 나간다고 했다. 지금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는다. 어찌된 일인가?”

“재목이 좋지 못해서 그렇습니다.본국에서 나무를 가져오면 만들 수 있습니다.”

이에 천자가 사신을 보내 재목을 구했다. 곧 대나마 복한(福漢)을 보내 나무를 바쳤다. 다시 만들게 하여 쏘았더니 60보를 나갔다.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신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바다를 건너는 동안 나무에 습기가 스며서 그런 모양입니다.”

천자는 일부러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 생각하였다. 무거운 벌로 위협하였다. 그러나 끝내 자기 재주를 다 드러내지 않았다.

《삼국사》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9년(669년)


 고려인들의 부흥운동과 관련해, 그들의 신라측과의 제휴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다.  고려인들은 당이라는 외세에 맞서기 위해서 '덜 나쁜 외세' 신라와 손을 잡는 것을 택했다. 이 제휴는 아마 669년 5월(노사 구진천이 당으로 보내지기 직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도, 전쟁 이후 평양 이남은 모두 신라에 귀속된다는 당초의 약속을 무시하고 백제령에 대한 영향력을 높여가던,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라는 이름으로 옛 백제령에 주둔하고 있던 당병에 대한 신라의 군사행동을 문제삼은 당 조정의 항의에 대한 '사죄 사절'로서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과 대신 김양도가 당에 파견된 때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려 멸망 그러니까 서기 668년을 전후로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냉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계약위반한 당나라가 잘못이었다. 상원 원년 갑술 2월에 당나라는 웅진도독부에 머무르고 있던 유인궤를 계림도총관(雞林道總管)으로 삼아 신라를 치게 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또, 이때 당나라 군사들이 신라 땅에 머무르면서 기회를 봐서 신라를 습격하여 멸망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문무왕이 먼저 군사를 내어 신라를 쳤고, 당나라 고종은 이 때문에 신라의 김인문과 김양도를 장안 감옥에다 가둬버리고 설방(薜邦)에게 5만 군사를 주어 신라를 치게 했다고도 했다.


[三月, 沙湌薛烏儒與高句麗太大兄高延武, 各率精兵一萬, 度鴨淥江, 至屋骨△△△, 靺鞨兵先至皆敦壤待之. 夏四月四日, 對戰, 我兵大克之, 斬獲不可勝計. 唐兵繼至, 我兵退保白城.]

3월에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려의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다. 말갈병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4월 4일에 마주 싸웠다.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서, 목베어 죽인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당병이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병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을 지켰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10년(670년)


 요동 지역에 대한 신라의 선제공격으로 '나당전쟁'의 포문이 열렸다. 고연무는 고려의 태대형 벼슬을 지낸 자였는데, 국사 시간에 배운 바로는 오골성(지금의 요령성 봉황성)에서 거병한 자였다. 그는 신라의 사찬 설오유와 연계해 고려 부흥운동을 전개했고, 신라군은 문무왕 10년 지금의 압록강을 건넜다. 안정복의 말처럼 신라가 당병을 빌려 일단 백제와 고려 두 나라를 멸하고 그 나라 땅을 모두 차지하려 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 설오유 사찬과 고연무 태대형이 압록강을 건너 오골성으로 갈 때 평양 지역은 마침 진공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앞서의 고려 유민 3만여 호에 대한 강제 이주를 위해 평양에 주둔한 당병이 대다수 동원되느라 평양 일대에 대한 당의 지배력은 크게 약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4월에 있었던 설오유 사찬과 고연무 태대형의 요동에서의 군사행동은 7월에 신라가 남쪽 백제령에서 당병을 상대로 수행했던 군사작전 과정에서 북쪽에 주둔한 당병(고려부흥군 진압을 맡은 동산도행군과 연산도행군)의 한반도 개입을 저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670년 4월에 편성된 이들 동산도행군과 연산도행군이 요동 지역에서 안시성(安市城)의 고려 부흥군을 누르고 평양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 9월의 일이었으니.


[至咸亨元年庚午歲, 夏四月, 劒牟岑欲興復國家, 叛唐. 立王外孫安舜【羅紀作勝】爲主.]

함형(咸亨) 원년 경오년(670년) 여름 4월에 이르러 검모잠(劍牟岑)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당에 배반하였다. 왕의 외손 안순(安舜)【신라기[羅紀]에는 승(勝)이라고 썼다.】을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또 한 사람 검모잠. 고려 부흥운동이라는 화제를 놓고 이야기하자면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들. 검모잠은 수림성 출신으로 대형(大兄) 벼슬을 지낸 장군이었고, 궁모성에서 거병하여 고려 부흥의 기치를 들었던 인물이라고 《삼국사》는 전하고 있다. 말하자면 백제의 흑치상지나 지수신 같은 인물이랄까. 그는 고려의 잔민들을 모아 패강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거치는 곳마다 마주치는 당의 관리들을 죽였다. 그리고 서해, 지금의 경기도 인천 앞바다에 있는 사야도라는 섬에서 안승을 맞이해 와서 한성(漢城), 그러니까 지금의 황해도 재령에 있던 옛 고려의 3경 가운데 한 곳에 건너가 고려 부흥운동의 거점을 마련했다. 6월에 이 소식을 접한 신라에서는 이들에게 금마저(金馬渚)지금의 익산을 내주며 살게 했다고 한다.


《삼국사》 신라지리지 한주조에는 옛 고려의 동비홀이라 불리던 개성군에 속한 세 현 가운데 하나로 임진현(臨津縣)을 들고 있는데, 이 임진현을 고려 때에는 진림성(津臨城)이라 불렀다. 이곳이 검모잠의 고향인 수림성이다. '수(水)'나 '진(津)'이나 모두 '물[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대충 이렇게 유추가 가능하다.(사실인지는 나 자신도 의심스럽지만) 검모잠이 고려 부흥의 기치를 들고 거병한 궁모성이 지금의 어디를 가리키는지를 모른다는 게 나로서는 진짜 답답한 일이었는데, 생각해보면 검모잠이라는 영웅의 고향, 출신지라도 알 수 있다는 게 어디냐 하는 마음에 조금은 답답한 마음이 가시긴 한다. 게다가 개성군ㅡ고려 동비홀(冬比忽)은 지금의 개풍 서쪽의 서성리 일대에 해당하는 곳으로 훗날 왕건이 세운 고려의 수도 개경과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그러고 보니 소설가 박완서씨 고향이 여기 개풍이랬지 아마)


 검모잠이 마련한 부흥운동의 거점은 한성, 황해도 재령인데, 신라에서는 희한하게도 재령에서 멀리 떨어진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땅을 내려주었다고 하니, 이때 옮겨갔나 아니면 나중에 검모잠이 안승에게 살해된 뒤에 이곳으로 옮겨갔던 걸까 의심이 있다. 검모잠은 신라 세력의 힘을 빌어서 장차 당에 맞서려 했던 것 같지만, 당 고종이 보낸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摠管) 고간(高侃)의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검모잠이 부흥 고려의 왕으로 받들었던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나버렸다. 는 것이 기록으로 남은 고려 부흥운동의 전말이다(안정복은 '덜 나쁜 적' 신라의 힘을 빌리면서 '나쁜 적' 당의 관리를 마구 죽인다는 '원수지는' 행위를 한 것이 검모잠의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신라는 고연무의 요동 지역 공격을 후원하고 검모잠의 부흥군 지원 요청을 받아들이면서도, 6월에 검모잠이 일으킨 '반란' 거병을 또 웅진도독부에 알리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당과 맞서기로 결정했음에도 당과의 전면전은 가능한 피하려는 신라였다. 도망쳐 온 안승을 8월 1일 신축에 고려왕으로 봉하고, 그를 "선왕(보장왕)의 유일한 정사(正嗣)"로 인정한다는 요지의 조서를 주었다.


 안동도호부는 당나라 동쪽 방면을 안정시키고 휘하의 기미부ㆍ주를 총괄하도록 한 관청. 그 지배대상에는 옛 고려령뿐 아니라 백제령(웅진도독부), 신라(계림대도독부?)까지도 포함되었다. 웅진도독부ㅡ정확히는 친당파 백제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신라가 반당투쟁을 일으킨 고려 유민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신라-고려 동맹과 당나라-백제 동맹, 둘 사이의 대결양상을 띠게 되었다. 당나라로서는 안동도호부에 대한 고려 유민들의 투쟁, 그리고 웅진도독부에 대한 신라의 투쟁 이렇게 쌍방향의 공격 부담을 지게 된 셈이다.


 한편 검모잠의 거병이 실패로 돌아간 뒤,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주로 옮긴 고간은 안시성으로 쳐들어가 고려 부흥군을 토벌했다. 한편 당 조정은 토번(티벳) 정벌 실패의 책임을 물어 면직된 설인귀를 계림도총관으로 임명해 신라와의 전쟁을 총괄하게 했는데, 《삼국사》에는 이때 설인귀와 문무왕이 주고받은 편지가 기록되어 있지만 내용이 너무 길어 이루 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설인귀는 문무왕에게 이렇게 협박한다.


 "고(高) 장군의 한병과 이근행(李謹行)의 번병, 오(吳) · 초(楚)의 수군과 유(幽) · 병(幷)의 악소배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배를 나란히 하고 내려와 험한 곳에 의지하여 요새를 쌓아 땅을 일구고 농사짓고 산다면 이는 왕에게 씻을 수 없는 가슴 속 깊은 병이 될 거요."


 그리고 설인귀의 협박은 현실이 되었다. 안시성을 함락시킨 고간이 이근행과 함께 안시성에서부터 번병 4만(고간 자신의 군사는 1만, 이근행의 군사 3만)을 거느리고 672년 7월에 평양으로 온 것이다. 지금의 황해도에서 평안도에 걸치는 고려 부흥세력의 와해가 이들 당병의 작전 목표였다. 평양 서남쪽 근교의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이기고 고려 부흥군의 거점인 한성, 백수성(白水城)에서 500보 떨어진 곳까지 밀고 들어온 당병은 신라와 고려의 연합 공격으로 수천 명의 피해를 봤지만, 석문(石門) 벌판에서 신라측을 크게 이김으로서 전세는 뒤집혔다. 신라측은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ㆍ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ㆍ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ㆍ양신(良臣) 등을 잃었고, 이때부터 당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가 아닌 방어전으로 돌아서게 된다.


[四年癸酉歲, 夏閏五月, 燕山道摠管大將軍李謹行, 破我人於瓠瀘河, 俘獲數千人. 餘衆皆奔新羅.]

4년 계유년(673년) 여름 윤5월에 연산도총관(燕山道摠管)인 대장군 이근행이 호로하(瓠濾河)에서 우리를 깨뜨리고 수천 명을 사로잡았다.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석문의 패배 뒤에도 신라와 고려 부흥군은 지금의 예성강과 임진강, 한강 유역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는데, 672년 겨울에 횡수(橫水)라는 강에서 신라군은 다시 고간에게 패했고, 673년 호로하 서쪽에서 고려를 쳐부수었다. 


 호로하는 지금의 임진강이다. 조선조에는 이곳을 호로탄(瓠蘆灘)이라 불렀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지금의 경기도 마전(麻田) 징파도(澄波渡) 하류가 호로하이고 그 남쪽이 바로 옛날 고려의 칠중성(七重城)이라고 주장했었다. 지금은 북한령인 황해도 장단을 통해 개성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인 이곳은 별다른 도하 장비가 없이 걸어서도 건널 수 있어서 삼국 시대에는 삼국의 군사들이 이곳에서 충돌했고, 6 · 25 전쟁 때조차 북한군 주력 전차부대가 개성에서 문산 쪽으로 직진하는 길 대신 우회해서 여기로 강을 건너 남침했던 일도 있다. 


 임진강이 지나는 경기도 연천군에 호로고루가 있다. 현지 사람들은 '재미산(財尾山)' 또는 '재미성'이라고 부르는데, 임진강 북쪽 넓은 벌판 위에 언덕과 같이 솟아 있는 평지성, 전체 둘레는 약 401m 정도에 성내는 해발 22m 정도. 남쪽으로는 임진강을 따라 긴 성을 쌓고 북쪽 벽은 자연지형으로 급경사를 이루었다. 동쪽 벽의 남쪽 부분에 이 안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있는데, 여기가 이 성에서는 유일한 성문이었을 것이라고.


 호로고루라는 이름에서 '고루'를 '구루', 즉 고려 방언으로 '성(城)'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석할 때, 이 호로고루를 고구려의 성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까지는 고려령, 즉 7세기까지 고구려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었다. 고려군은 참 끈질기게도, 이 호로하에서 마지막 항전을 시도했던 모양이지만, 그 시도는 결국 불발이었다. 그리고 《삼국사》는 겨울에 당병이 우잠성(牛岑城, 지금의 황해도 금천면)을 쳐서 항복시키고 거란 · 말갈의 병사들이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멸했다고 전한다.


 호로하의 싸움은 고려 부흥운동 세력의 소멸을 의미하는 사건이라 했다. 669년(굳이 억지로 끌어올리자면 고려 멸망 직후)부터 673년까지 4년에서 5년 동안 고려 부흥운동이 이어진 셈이다.


 이듬해 9월에 신라는 안승을 고려왕에서 다시 보덕왕(報德王)으로 봉했다. 김부식은 《삼국사》에서 이 일을 적으면서 '보덕(報德)'이란 말이 귀명(歸命)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땅 이름인지는 모르겠다고 적고 있다. 당은 문무왕 15년(675년) 2월에 호로하 부근의 칠중성에서 신라군을 격파했는데, 이때 당병 사령관 유인궤는 칠중성 격파 뒤에 다시 당으로 돌아가고, 말갈 출신의 번장인 이근행이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서 공격을 맡게 되었다. 


 문무왕이 당에 보내 사신을 보내 당병에 맞선 것에 대한 '사죄'의 뜻을 표한 데에 대한 보답으로 당의 황제가 문무왕의 신라왕으로서의 작위를 복구시켜 주었을 때, 이미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서 당병을 내쫓고 옛 고려 남쪽 경계까지 그들의 주와 군을 설치한 상태였다. 《삼국사》에는 당병이 거란 · 말갈의 이민족 군사들까지 동원해 신라를 다시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에 모든 군을 내어 대비했다고 적고 있다.

 

 문무왕 16년(676년) 당병이 도림성(道臨城, 강원도 통천군 임남면)을 함락시킨 이 해에, 당은 마침내 한반도 안에 있던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모두 요동 지역으로 옮겼다. 당의 한반도 지배가 실패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안동도호부에서 근무하던 중국인 관리들도 모조리 파직해 본국으로 불러들인 당은 이듬해 2월, 고려의 옛 왕이었던 보장왕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 조선왕(朝鮮王)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 고려 유민들을 달래려 했다.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에게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이들 중에 얼마나 고향으로 돌아왔는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보장왕도 당 조정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얼마 뒤 말갈과 함께 당에 반역하려는 것이 탄로나는 바람에 개요 원년에 중국 오지인 공주 땅으로 소환되었으며, 이후 기록에서 이름이 사라진다.



출처: http://outsiderhistory.tistory.com/19?category=478429 [버려진 역사의 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