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역사를 수집하는 것은 단순히 만화 스토리로 쓸 소잿거리, 소설 주제로 쓸 소잿거리를 찾아다니는 취재작업이고, 나 자신이 그만큼의 소양이 있는지 없는지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판별해야 할 문제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야사가(野史家). 이런저런 잡다한 야사를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이다. 제목을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라고 쓴 것은 역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임을 말한 것이고, 야사가라고 한 것은 내가 한 말이 과연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나 자신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 쓰면서 책은 그래도 좀 읽는다. 아예 맹탕으로 내 대갈 속에 아무 것도 없으면 이런 글을 쓸 시도도 않았겠지.
발해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생각해둔 것이다. 고려편을 그냥 끝내기 찝찝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퍼온 사진들을 감당하려니 이젠 컴퓨터 용량이 꽉 차서 안 되겠기에 그걸 '블로그 포스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걸고 인터넷에다 다시 풀려는 거지 뭐. 책임감없이. 그러니 글 쓰다가 내용보다 사진이 더 많더라도 이해해주시길.
부처님의 자비가 글을 읽는 분들에게 모두 고루 돌아가기를 바라며. 나무아미타불.
일단 내가 저본으로 삼는 것은 《발해고》. 조선조의 실학자이자 국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혜풍 유득공의 저술이자 우리 역사에서 발해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논문집이다. 조선 정조 18년(1784년) 처음 편찬된 이래 필사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1910년에 육당 최남선의 조선고서간행회(조선광문회)에서 발간했고 그 뒤에도 여러 번 간행되었다. 같은 제목으로 다산 정약용의 《강역고》(1811)에도 《발해고》와 《발해속고(渤海續考)》라는 이름의 지리고증논서가 있는데 기회가 되면 이것도 읽어봐야 되겠다. 《발해고》의 서문에서 유득공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고려가 부진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 고씨가 북쪽에 거주했으니 곧 고구려이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했으니 곧 백제이고, 박 · 석 · 김씨가 동남쪽에 거주했으니 곧 신라인데, 이것이 삼국이다.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으니 고려가 이것을 지은 것은 옳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고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했고, 대씨(大氏)가 그 북쪽을 차지했으니 이것이 발해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쓰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발해고》서문
유득공은 우리 나라에서 발해라는 나라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조사연구한 사람이면서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다.옛날 고려와 백제, 신라와 가야가 대치하던 사국시대, 그리고 고려와 백제, 신라가 이 갈고 으르렁대며 싸우던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발해와 신라가 각기 우리나라와 만주를 놓고 남북에서 서로 대치하던 시대를 가리켜 남북국시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
무릇 대씨(大氏)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차지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이다.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크게 넓혔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뒤에 왕씨(王氏)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다.그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차지했지만, 그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차지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女眞)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契丹)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때에 고려를 위한 계책을 세우는 사람이 마땅히 빨리 발해사를 지어 이를 갖고 가서 여진을 꾸짖어
"어째서 우리에게 발해 영토를 안 돌려주느냐. 발해 영토는 곧 고구려 영토다."
하고 장군 한 명을 보내 거두어 들였으면 토문강 이북 지역을 가질 수 있었다. 이를 가지고 거란을 꾸짖어
"어째서 우리에게 발해 영토를 안 돌려주느냐. 발해 영토는 곧 고구려 영토다."
하고 장군 한 명을 보내 거두어 들였으면 압록강 서쪽을 다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발해사를 짓지 않아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발해고》서문
사실 고려 조정이 발해의 역사를 편찬했는지 안 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우리 나라에 지금 남아있는 사료는 《삼국사》나 《삼국유사》이전으로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다만 고려에서도 실록을 편찬했던 일만은 확실하다. 삼국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는 《삼국사》 이전에 이미 《구삼국사》가 있었고, 그 책을 편찬한 원사료는 모두 신라에 남아있던 옛 문헌들이었을 터다.
그리고 유득공이 고려에게 왜 발해사를 쓰지 않았냐고 비판하면서 발해사만 제대로 편찬해놨더라도 우리가 저 땅을 장군 한 사람만 보내서 다 찾았을 거라고 말하는 것도 너무 이상주의적인 판별이다. 중국도 발해사는 편찬하지 않았으니까. 《발해국기》니 동이, 북적열전이니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정식기록에 딸려놓은 부연설명이거나, 개인적인 지리서에 기행문일 뿐이잖아. 그리고 역사책 하나 어느 날 갑자기 떡 만들어놓고 그걸 들이대면서 땅 내놓으라 하면 참 잘도 내놓겠다. 지금도 확실하게 그 땅이 우리 땅임을 실증할 자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도 못 믿겠다면서 땅 뺏으려는 저기, 섬나라 애들도 있는데.
"발해가 요(遼)에 멸망당했는데 고려가 어떻게 그 역사를 편찬할 수 있겠는가?"
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발해는 중국 제도를 본받았으니 반드시 사관(史官)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 수도인 홀한성(忽汗城)이 격파되었을 때 세자 이하 10만여 명이 고려로 도망쳐 왔다. 사관이 없으면 반드시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고, 사관도 없고 역사서도 없다 하더라도 세자에게 물어 보면 역대 발해 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은계종(隱繼宗)에게 물어 보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10만여 명에게 물어 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張建章)은 당(唐)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만 왜 혼자서 발해사를 편찬할 수 없었단 말이냐?
《발해고》서문
유득공의 지적대로 고려 당대에 발해의 역사를 알자면 어떤 루트로든 알 방법은 많았다. 발해의 세자 대광현이 고려로 망명해 왔을 때 따라온 무리가 10만 명. 그들에게 다 물어보면 발해의 역사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무곡(巫曲)이 많았다는 발해악(勃海樂)만 하더라도 9세기 중엽 고려의 우방악(右方樂)에 편재되었다고 하니까. 《삼국유사》나 《제왕운기》가 지어지던 고려 말까지도 전해졌다는 옛 발해인들이 갖고 있었음직한 고대의 문헌, 《단군기》나 《단군본기》, 《단군고기》, 《신지비사》같은 것이며, 조선조 세조 때에 민간에서 다 거둬오라고 시킨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삼성기(三聖記)》, 《삼성밀기(三聖密記)》, 《단기고사(檀奇古史)》(←이건 아닌가?;;)
발해와 관련된 정보ㅡ특히 발해인들이 갖고 있던 고려에 대한 옛 자료를 (왕건)고려가 다 이어받았을 텐데도 왜 그걸 정리할 생각은 하지 못했는가 하고. 옆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가볍게 보는 것은 우리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고질병. 아직은 사소하고 단순한 것의 중요함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듯. 그렇게 본다면 우리 역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없앴다고 탄식하신 단재 선생의 말씀이 어찌 이리도 가슴에 와닿는지. 그래도 그 '단순한' 것과 '사소한' 것, '가까운' 것의 중요함을 깨달은 사람이 있었기에 이런 단편적인 글로서나마 우리는 소중한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아, 문헌이 흩어진 지 수백년이 지난 뒤에 역사서를 지으려 해도 자료를 얻을 수 없구나. 내가 내각(內閣)의 관리로 있으면서 궁중의 도서를 많이 읽고, 발해의 역사를 편집하여 임금, 신하, 지리, 직관, 의장, 물산, 국어, 국서, 속국 등 아홉 가지 고(考)를 만들었다. 이를 '세가(世家)'나 '전(傳)', '지(志)'라고 하지 않고 고찰한다는 뜻의 '고(考)'라 한 것은 아직 역사서로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가 없다.
갑진년(1784년) 윤3월 25일.
《발해고》서문
실학자답다. 발해의 역사를 저술하면서도 자신의 역사연구가 아직 미흡한 점이 많다는 걸 드러낸 부분에서 철저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역사학을 주창한 국학자의 면모가 《발해고》에서 드러난다. 단재 선생도 유득공에 대해 '대씨 3백 년의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의 사업을 수록하여 1천여 년이나 사학가들이 압록강 이북을 베어버린 결함을 보충한' 학자라는 평가를 내렸으니, 이 책이 우리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는 단재 선생의 평가 하나만으로도 족하고, 이제는 내가 머릿속에 든 잡생각을 풀어서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