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 보현봉으로 오르다 外

2018. 2. 13. 17:15잡주머니



       

평창동 보현봉으로 오르다| 등산 사진


진송하 | 조회 82 |추천 0 | 2011.02.28. 13:26


 

                    평창동은 평창에서 유래되었다

                 평창터 표지석 옆 문인석의 모습이 이채롭다

  월탄 박종화선생의 집필장소 쌍조선루 

  월탄의 별채 "一片氷心"

 평창동 보현 산신각

  여산신각 할매당

  보현봉 아래 일선사 대웅전과 약사전

 보현굴의 산신

 보현굴의 칠성

 보현봉에서 본 형제봉과 구준봉 백악산 그리고 남산. 저 멀리 관악산과 청계산의 윤곽도 보인다

  보현봉 아래서 잠시 포즈를 취하다 

 보현굴 위의 여자바위

 형제봉에서 본 왕녕사

 형제봉에서 본 보현봉

형제봉에서 본 비봉의 보습이 장쾌하다

 


cafe.daum.net/CAUmounta...   중앙대학교 역..  

(일선사 옆 보현굴에는 신선도가  암각되어 있고)

(굴 우측에는 칠성도가 암각되어 있다.)

 

다라니굴이라 불리우는 보현굴은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수도하던 곳이라 하는데

신선과 동자, 호랑이, 그리고 일곱 성인들 얼굴은 알아볼수 없다.

 

보현봉은 풍수지리적으로 기가 쎈 곳이라 하여

신라, 고려시대는 물론 유교적 이념을 숭상하던 조선시대에서도 중요시 여기던 봉우리인데

특이하게도 풍수지리를 신봉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부 개신교에서도 기도의 명당터로 여겨서 배타적인 신자의 만행으로 훼손되었다.

 

바위에 암각한 신선과 동자, 그리고 호랑이..

인터넷에서 언뜻 훼손 전 사진을 본 듯도 한데 다시 검색하여도 찾을수 없다.

 

보현굴에서 정상까지는 쇠줄 난간을 잡고 올라간다.



cafe.daum.net/nightmoun...   강북오산야등  





형제봉능선의 600년 전 풍수논쟁과 정릉골짜기에 숨어있는 7개의 잊혀진 절터 이야기| 답사 후기
정릉토박이 | 조회 196 |추천 0 | 2015.11.03. 17:04




■  일 시 :  2015.10.31 (토)

 

■  만 남 :  국민대학교 정문 앞

 

■  코 스

 

국민대도착(09:22)→도로앞 삼곡사 이정표(09:42)→석굴암터(10:04)→형제1봉(아우봉)11:02→흔들바위(11:10)→형제2봉(형님봉)11:15→포대화상(12:24)→一禪寺(일선사)(12:27)→포대화상앞 회기(중식:12:42~13:24)→절터(13:35)→대성문(13:51)→회기(일선사앞 삼거리)14:24→영취사(14:41)→영취샘(14:59)→정릉골제1절터(15:11)→제2절터(15:27)→제3절터(15:41)→제4절터(15:42)→정릉탐방지원센터(15:56)→뒷풀이(산전수전)(16:15~17:37)

 

■  후 기

 

날씨가 꽤청하다.통행금지된 41년만에 2009년 시민에게 개방을 한지 6년이 지난 지금,  그 길을 이한성교수님과 함께 가는 이야기길이다.코스는 석굴암터에서 보토현 언덕을 올라 북한산 형제봉능선을 타면서 신라 도선국사가 창건한 일선사(一禪寺)를 지나 절터를 확인하고, 옛길로 다져진 대성문에 당도한다.계단이 많아 쉽지 않은 길이다.대성문은 북한산성 가운데 가장 큰문이며,축성시에 공사를 담당했던 실명책임자 이름도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성문앞에서 교수님 강의가 끝난후  일선사앞 삼거리로 다시 회기한다.

하산중에 북한산의 멋진 능선들이 시야에 펼쳐진다.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은 포근하고,친근하며,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풍경이다.북한산이 이러한 값진 면이 있기 때문에 애착이 가는 산이기도 하다.일선사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500m정도 굽이굽이 산골짜기를 내려오면 기도도량,성취도량 대한불교조계종 영취사가 산 절벽밑에 위치해 있다.절마당에는 아담하고, 조선초에 건립한 5층석탑과 대웅전,삼성각이 있으며 중간 계단 옆에는 용왕신을 모시는 조그만 전각이 있다.사찰주변에 쉼터가 있고,북카페도 보이고,약초를 달인 차를 등산객이 마실수 있도록 배려해 조용한 산사의 여유로움과 나그네의 발길을 잠시 묶어둔다.오늘 7개의 절터를 확인했는데 , 어떤 절터는 기와편이 보이는 곳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에서는 옛축대의 흔적만 보이는 곳도 있었다.또 어떤 곳은 많이 다녔어도 눈에 띠지 않은 등산로옆 돌절구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절터였다.옆 평탄지에는 등산객이 쉴 수 있도록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한쪽구석이 깨진채로 빗물이 고여있는 돌절구는 이끼가 잔뜩 낀채로 세월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었다.

오늘 답사하면서 느낀점은 정릉골짜기가 절터골이라는 점이다.7개 말고도 더 많은 절터가 역사의 뒤안길로 혹시 사라지는 절도 있질 않을까! 기록도 없고 이름도 없는 여러 절터를 만나면서 이곳들이 절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판으로 세웠으면 등산객들이 지나가면서 역사의 한부분을 인식하고, 머나먼 과거가 옛날이 아닌 현재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자기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생겨 절터골이 된 시대적 상황도 고찰해 보는 시각적 안목도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조용한 생각도 해본다.

뒷풀이로 산전수전 주막집에서 막걸리에 안주로 시킨 파전이 오늘따라 참 맛있게 느껴졌다...

 

 국민대학교 정문 앞

 

대학정문에서 북악터널 방향으로 나아가면 공영주차장이 나온다.

 

북악터널앞 100m 쯤 되는 위치에서 출발지점이다.청학사,약수암,삼곡사 굿당,여래사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큰바위를 절단하기 위해 구멍을 판다음 참나무를 집어넣어 물을 집어 넣으면 부피가 팽창해 바위가 갈라진다고 알려 주시네요

 

오늘의 일정을 보토현 옛길(화장실 앞)에서 지도을 펴서 알려주시는 교수님

삼곡사를 나와 보토현을 오른다. 잠시 후 정비된 길이 나타나면서 깔끔하게 설치한 화장실도 만나고 성북구에서 설치한 북악하늘길 안내판과 함께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도 세워져 있다. 형제봉 1575m, 하늘교 920m.

 

당굴샘(석굴암터에 올라가기 바로 전에 있다)

 

석굴암터

누군가 바위에 써 놓은 당굴샘, 등선대, 석굴암이란 글씨를 만난다

 

마애민불 좌상

잠시 뒤 조그만 절터를 만난다. 석굴암(石窟庵)터이다. 아마도 그리 머지않은 때에 세워졌다가 공비 김신조 사건 이후 폐사되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지역이 1968년 1월 그날 31명 공비 중 일부가 탈출로로 택했던 김신조 루트였기 때문이다. 절터에는 눈여겨보아야 할 세가지 흔적이 있다.
첫째는 바위에 새긴 작은 마애불이다. 솜씨 없는 동네 아저씨가 망치로 돌을 다듬어 모신 것 같은 민불(民佛)인데 손에는 여의주(如意珠)처럼 보이는 약함을 들고 계시다. 둘째는 바위에 뚫려 있는 작은 네모 구멍이다. 이 절에 인연 맺었을 누군가의 사리(舍利: 주검을 다비하고 수습한 구슬같은 고형물)를 모신 사리공(舍利孔)이다. 물욕 많은 누군가가 마개를 열고 사리함을 가져갔나 보다. 사리공만 덩그마니 열려 있다. 세째는석굴암이란 절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굴이 하나 있는데 마치 멧돼지가 나올 것 같다. 그 어둠 속에 불을 비추면 벽면 끝에 벽화가 남아 있다. 불상은 아니고 신장(神將)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오랜 세월 빈 절터를 지키다 지치셨는가, 많이 퇴락했다

 

 석굴암터에 있는 작은굴

 

불상은 아니고 神將(신장)의 모습을 하고 있다

 

보토현 고갯마루 옆 철조망(불과 몇년전 까지만 해도 이길은 출입금지였다)

안내판을 따라 들어간 곳에서 길을 왼쪽으로 꺾어 언덕길로 오른다. 지금은 정릉에서 평창동으로 가는 길이 북악터널로 연결되지만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이 고갯길로 넘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고갯길 이름이 보토현(補土峴)이었다.

보토현은 장의동(藏義洞:지금의 평창동, 세검정 초등학교 자리에 신라시대 절 장의사가 있었기에 붙은 지명)과 사을한리(沙乙閑里: 지금의 정릉)를 잇는 고개였다. 이 고개는 조선이 한양천도 하면서부터 중요하게 여겼던 고개였다. 풍수(風水)로 볼 때 북한산의 기운이 형제봉과 보토현을 거쳐 한양으로 이어지니 사람으로 치면 목(項)에 해당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보토현으로 사람들이 다녀 고개가 훼손되니 대안을 세워야 했다.
연산군 때 조치사항을 보자. 1503년(연산군 9년) 11월에는 이 길을 통행금지시켰다.
“사을한리(沙乙閑里)에서 무계동(武溪洞)까지의 길과 장의동(藏義洞)에서 사을한리까지의 길에 사람들 통행을 금하라.”(自沙乙閑里至武溪洞路及自藏義洞至沙乙閑里路, 禁人通行). 무계동은 무계정사가 있던 지금의 창의문 밖 부암동이다. 과연 연산군답게 백성은 염두에 두지 않는 일처리 방식이었다.

한편 1773년(영조 49년) 구선행이 올린 상소문 기록도 있다.

1968년 김신조 탈출로에 있는 ‘석굴암’

“형제봉 아래(보토현)는 오랫동안 나뭇군 길로 통하여 모래와 흙이 흘러내려서 언덕이 점점 허물어지게 되었으니, 그 외면(外面)에 새로이 흙을 보충하여 떼를 입히고 나무를 심어서 곡성(曲城) 밑까지 연접하게 하고 이어서 산책(山柵)을 만든다면, 높이 솟은 절벽이 되니 누가 감히 쉽게 오르겠습니까? (至於兄弟峰以下, 則久通樵路, 以致沙土流下, 崖岸漸圯, 從其外面, 添補新土, 被莎植木, 接連於曲城下, 仍成山柵, 則斗絶懸崖, 誰敢容易攀登?)

통행금지보다는 흙을 보충하고 떼를 입히고 나무를 심자는 제안이다. 같은 문제를 대하는 시각에도 이런 차이가 있었다.

보토현 마루에 서 있는 이정표에는 형제봉 1215m를 알리고 있다. 이제부터 능선길이다. 잠시 후 북한산 둘레길과 교차한다. 평창동에서 정릉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이 이곳으로 지나가는 것이다. 둘레길 안내판에 친절하게 쓰여 있는 지혜의 글이 재미있다.

‘나는 광고지를 읽지 않는다. 갖고 싶은 것들로 내 모든 시간을 소모할 테니까 Franz kafka’. 아 이 분은 견물생심(見物生心)에 아예 눈감는 것으로 답을 찾았구나.

 

북한산 기운이 굽이치는 수도 서울의 목(項)

길은 서서히 바윗길로 바뀐다. 위험구간은 없으나 아기자기한 암릉을 지나가는 길이 재미있다. 큼지막한 바위에 누군가가 은석바위라고 써 놓았다.

잠시 후 오른쪽 숲속에 조그만 절이 보인다. 오래 된 절은 아닌데 고즈넉하다. 이 능선길을 지나다가 목마르면 들려 가는 곳이다. 절 이름도 달리 붙여 놓지 않아 알기 어려운데 대흥사다. 여러 날 전 스님은 출타하셨는지 절 마당은 고요하고  흰 고무신이 절을 지키고 있다. 산 쪽 방향으로 계단이 이어져 있어 궁금해 올라가 본다. 산신각은 없고 정성드리는 바위뿐이다.

내려오는 길 바위에 어느 애타는 영혼이 발원문을 적어 놓았다. 山神靈任 合意同心 祝願成(산신령님 합의동심 축원성: 산신령님 뜻 합하고 마음 모으니 소원 이루어 주소서). 기도하는 대상은 달라도 이 땅에 사는 영혼들은 못 이룬 일들이 너무도 많은가 보다. 시원한 샘물 한 잔 마시고 돌아 나온다. 형제봉까지는 700m 남았다

 

대흥사 밑 바위전망대에서 바라본 국민대학교와 내부순환도로

 

이윽고 형제봉 중 아래쪽 아우봉을 오른다. 조선시절 이 길 형제봉능선은 중요한 능선이었다. 지금도 광화문 네거리에서 경복궁을 바라보면 북악산 너머로 비죽이 서울을 내려다보는 봉우리가 보인다. 보현봉(普賢峰)이다. 삼각산 정기(精氣)가 인수봉, 백운대, 망경봉에서 일어난 후 주능선을 타고 내려 와 다시 한 번 솟구친 곳이 보현봉이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내달리면 문수봉, 가사봉을 지나 한 줄기는 의상봉 능선을 이루고 서쪽으로 달린 한 줄기는 비봉능선을 형성한 후 한강까지 나지막한 산줄기를 만들며 달린다.

그러나 조선의 왕실이나 지도층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산줄기는 보현봉에서 남으로 벋어내려 형제봉능선, 보토현, 구준봉(狗蹲峰)을 이루는 서울의 목줄기와 여기에서 이어져 서울을 품에 감싸는 내사산(內四山: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타락산-낙산)이었다. 태조의 한양천도 때부터 이 산줄기를 살폈으며 경복궁을 백악산 아래 자리잡은 후에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세종 15년(1433년) 음력 7월에는 경복궁터가 명당이냐 아니냐로 한 여름을 달구었다. 문제의 발단은 풍수사 최양선이었다. 보현봉에서 형제봉능선을 타고 내려온 정맥(正脈)은 서쪽으로 달려 백악산(북악산)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달려 승문원(承文院)자리로 곧바로 이어진다는 주장이었다. 승문원자리는 당시 북촌 양덕방으로 지금의 계동, 원서동 지역이다. 이 줄기는 북악산 동쪽 성벽을 따라 내려가다가 창덕궁 종묘를 자리하게 한 응봉 줄기를 말하는 것이다.

 

흔들바위

 

형제봉(형님봉)

 

 형제봉(형님봉)에서 보현봉쪽 일선사가 보인다

조선 왕실과 지도층의 최대 관심 지역
논란이 결론 없이 계속되자 세종은 영의정 황희 정승에게 영(令)을 내린다. 직접 산에 올라 보고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70 노구의 황희 정승은 하연, 정인지 등 5명과 함께 이틀 만에 보현봉과 백악산에 올라 산줄기를 살핀다. 그래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세종이 직접 백악산에 올라 살폈다. 당신도 딱 잘라 답을 내기 어려웠다. 다시 영을 내린다. 지리서(풍수책)을 연구해 결론을 내라는 것이었다. 그때 황희 등 학자와 전문가들이 읽고 내린 결론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의룡경(疑龍經), 금낭경(錦囊經), 감룡경(撼龍經), 호순신(胡舜臣의 지리신법)이었다. 그 결론을 보자. 답은 경복궁이 정맥(正脈)이라는 것이다.

요즈음도 때때로 이 문제를 끌어내어 조선이 경복궁을 정궁(正宮)으로 삼았기에 망했다는 이야기를 즐기는 술사(術士)들이 있다. 들을 이야기가 아니다.

세종이 직접 백악산 올라 보현봉 지맥 살펴

“경복궁이 앉은 자리는 보현봉에서 부터 내려와서 두 번이나 성봉(풍수적으로 빼어난 봉우리)를 일으키고 종횡으로 솟고 낮추다가 백악(북악)에 이르러 특별히 성봉을 이루어 자리잡으니, 보현봉과 더불어 물에는 물로 응하고 돌에는 돌로 응하니, 자식이 어미를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목멱이 남쪽에 있어서 주객이 서로 응하고 있으니, 이는 곧 백악의 정맥됨이 분명하옵니다.(景福宮坐地, 則自普賢峯而降, 再起星峰, 縱橫起伏, 至白岳特作星峯而住, 與普賢峯坎以坎應, 石以石應, 子不離母, 而木覓在丙方, 主客相應, 是則白嶽之爲正脈明矣)”
사관(史官)은 이 문제의 발단을, 문제를 일으켜 승진의 계제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두 사람의 실명을 소문이라며 거론하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그런 사람들은 있었다.

형제봉을 지나면서 600년 전 풍수논쟁이 떠오른다.

 

이제 앞 쪽 형님봉을 지나 내려오면 정릉 방향과 갈라지는 삼거리에 닿는다. 대성문 1.9km 영불사 0.8km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평탄한 능선길로 직진한다. 이윽고 평창동에서 올라오는 삼거리에 닿는다. ▼

 

오늘은 시간이 없어 좌측 평창동 내려가는 길로 가질 않았지만, 여기서 10분 남짓 내려가면 오른쪽 샛길로 청담샘 가는 길이 갈라진다. 그 안쪽 막다른 길에 청담샘이 있다.(일선사가 250m앞에 있다)

청담샘에는 정교하게 남아 있는 축대가 있다. 옛 절터이다. 이곳에 있던 절 이름이 청담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확인할 방법은 없다. 은평뉴타운에서 발견된 기와에 신라적 화엄십찰 청담사 명문이 나왔으니 그 청담사는 아니다. 절터 동쪽으로는 퇴락한 옛 돌층계가 보인다. 보현굴 지나 보현봉으로 이어지던 길이다. 이제는 출입금지로 막혀 있다. 아쉽지만 온 길을 되짚어 삼거리로 돌아간다. 일선사 전 250m 되는 지점이다.

 

포대화상

중국 당나라 시대 때의 걸승.생존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나 사후에 그 덕을 기려 찬양하고 있으며,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하고,깨끗한 마음과 모든것을 베플어 주는 자비의 화신으로 대변되는 분이다.출생과 이름을 알 수 없고 ,항상 등뒤에 커다란 포대를 메고 다니며 탁발시주를 하였다 하여 포대화상이라고 이름 붙였으며,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도와 주웠다고 함.

 

포대화상에서 일선사로 올라가는 길..왼쪽은 화장실 가는길

 

대웅전

잠시 올라 왼쪽 길 안 일선사에 들린다. 안내판에 일선사 연혁이 적혀 있다. 신라 도선국사 창건했고, 고려 때 탄현선사중창하고, 무학대사, 함허득통도 거쳐 갔다 한다. 근년에는 고은 시인이 환속하기 전 이곳에서 수행했는데 그때 자신의 법명 일초(一超)와 도선(道詵)국사의 법명에서 한 자씩 뽑아 일선사(一詵寺)라 했다 한다. 지금은 한자가 禪으로 바뀌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 좌우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대웅전 주련

 

佛身普遍十方中(불신보변시방중)

三世如來一切同(삼세여래일체동)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부진)

汪洋覺海渺難窮(왕양각해묘난궁)

 

부처님 몸은 시방세계에 두루 가득하시네.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와 한가지시네.

 

크고도 넓은 원력구름은 항상 다함없어라.

 

한없이 넓은 깨달음바다 끝도 아득하여라.

 

약사전

 

보현봉

창건 당시에는 이곳으로부터 300m 서쪽 보현봉 아래에 보현사로 창건되었다 한다. 지금은 휴식년으로 방문할 수 없는 곳이다.
일선사도 바로 옆에 있는 보현굴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니 이곳은 보현(普賢)을 떠나서는 무언가가 부족한 곳이다. 지금 보현굴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데 민초들 솜씨인 북한산 산신과 칠성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믿음을 달리하는 이들에 의해 모두 훼손되었다. 소중한 민속자료를 잃은 것이다. 보현봉과 문수봉의 기운이 이곳에 내려앉은 것인가.비구니스님들이 다듬어 놓은 도량은 정갈하다

중식타임

 

절터(대성문 중도길에 위치)

일선사를 나와 대성문을 향해 오른다. 약 700m 남은 길이다. 나무로 다듬은 층계가 나타나는데 그 오른 쪽 평탄지가 절터이다. 절터로 내려서면 무너진 축대와 깨진 기와편이 밟힌다. 기록에 남지 않았으니 이름도 없다

 

기와편이 발견된다

 

대성문

이제  대성문(大城門)으로 오른다. 북한산성 축성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성능스님의 북한지(北漢誌)에는 大成門으로 기록되어 있다. 북한산성 문 가운데서는 가장 큰 문이다. 아마도 형제봉 보토현을 통해 도성과 연결되는 문이어서 크게 지은 듯하다. 문의 홍예(虹霓)가 아름답다.

조선 정조 9년(1785년) 북한산성 안찰어사 신기가 올린 보고서에는 그 당시 대성문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문수봉 오른쪽에 문수봉의 암문이 있는데, 지금은 대남문(大南門)이 되었으며, 문선(門扇)의 대접철(大楪鐵)은 탈락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대남문 오른쪽은 보현봉이요, 보현봉 아래에 대성문(大城門)이 있는데 경진년에 영구히 폐쇄(閉鎖)한 뒤부터 문루(門樓)와 처마가 퇴락하였습니다.”

이렇게 퇴락했던 대성문이 우리 시대에 다시 번듯해졌음은 기쁜 일이다

 

 성돌 우측에는  성돌을 쌓은 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石手邊首 金善云(석수변수 김선운) 禁營監造牌將 張泰興(금영 감조패장 장태흥)이다. 석수의 우두머리 김운선과 금위영 패장(장교) 장태흥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이다

 

그곁에는 근래의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도 개발세발 써 놓았고 6.25전쟁 중에 어느 되지 못한 군인이 마구 총질한 흔적도 선명히 남아 있다.

 

형제봉능선이 조선시대에는 북악산 기운이 굽어치는 목에 해당된다고 이야기 해 주시네요

 

대성문에서 일선사앞 삼거리로 이동중(회기)

 

일선사앞 삼거리(좌측길이 영취사로 내려가는길)

 

대성문을 돌아 다시 일선사 앞으로 내려온다. 정릉 방향 갈림길에는 영취사 0.5km, 정릉탐방지원센터 2.2km를 알리고 있다. 영취사로 내려간다.

 

영취사로 내려가는 길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길은 밧줄로 연결해 내려가는 길 이였지만 지금은 나무계단으로 잘 만들어 났다.

 

절 마당에는 고졸한 5층 석탑이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건립한 석탑인데 전문석수가 만든 작품은 아니다. 서울시 문화재 자료 40호라고 내력을 기록해 놓았다. 정갈하게 정돈된 절 분위기가 길손을 편하게 한다. 높은 층계를 오르면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고,중간에는 용왕신을 모신 전각이 있다. 분위기가 편한 절이니 지나는 길이다.

내려가는 길은 정릉 방향이다. 잠시 후 영취샘을 지나고 새로 다듬어 놓은 길에는 기와편들이 흩어져 있다. 아마도 이 길 가까이에 잊혀진 절터가 있을 것이다.

 

                       용왕신을 모신 전각                                                    대웅전

                   영취사에서 하산중                                                       <삼봉사 이정표 앞에 있는 홈이 있는 돌>

 

약수터 갈림길을 지나면서 삼봉사 200m를 알리는 갈림길을 만난다. 이정표 뒤쪽이 절터이다.<제1절터>

 

제1절터에서 큰돌을 옆으로 끼고 내려오면 개울을 끼고 양편으로 두 개의 절터가 있다. 이름은 잊혀지고 기와편과 옛 축대의 흔적만 남았다. 119안내목이 서 있는데 08-02번이다.<제2절터)

 

<옛 축대의 흔적이 보인다>▼

 

제2절터앞 계곡천에서 발견된 기와편과  청자조각

 

선덕교

 

돌탑

 

다시 하산길로 내려온다. 돌무더기와 선덕교를 지나면 또 하나 돌무더기가 나타나는데 잠시 후 화풍정(和風亭) 샘물을 만난다. 여기에서 50여m 아래 우측 쉼터는 또 하나의 절터다. 축대도 기와편도 보기 어렵다. 개울가로 내려가면 비로소 기와편들을 볼 수 있다. 절터의 흔적마저 잊혀진 절터인 셈이다.<제3절터>▼

 

그런데 절터는 이곳뿐만이 아니다. 다시 50여m 아래 좌측에 공터 휴게공간이 있는데 그 입구에는 세월에 묻혀 이끼를 가득 키우는 닳고 닳은 돌절구가 절터를 지키고 있다. 빗물이 담겨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정릉 골짜기는 절터골이었다. 기록도 없고 이름도 잊혀진 여러 절터를 만나면서 이곳들이 절터였음을 알리는 표지판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선배들의 손길 발길이 스민 자리는 시간을 넘은 그리움이 있는 곳이니까. <제4절터> ▼

 

                                깨진 돌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