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아 마음 밖에 천지없다” / 문수사 혜정스님

2018. 2. 14. 06:50잡주머니



[스크랩] “세상 사람아 마음 밖에 천지없다” / 문수사 혜정스님| 內外의 前現스님

道門최일수 | 조회 101 |추천 0 | 2017.01.01. 12:55



“세상 사람아 마음 밖에 천지없다”

문수사 혜정스님

2002.09.09


   
 


   하늘이 열렸다. 강풍을 동반하고 하염없이 쏟아진 빗줄기는 상처 깊은 중생들의 삶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물의 대란(大亂). 누구도 붙들거나 막을 수 없었다. 중생들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삶의 터전 위에서 새로운 삶을 찾고 있다. 풀뿌리처럼 깊은 생명력을 갖고 있는 그들은 우리 시대의 부처님이다. 고난 속에서도 그들의 삶은 늘 가득찬 가을처럼 충만하다. 그래서 그들은 삶을 실천으로 담보해낸 부처님인 것이다.

어느새 가을의 첫머리에 도달해 있다. 지난 2일 서울의 북한산도 가을 패랭이꽃도 비에 젖어있었다. 문수도량 문수사는 혜정스님이 주석하며 세파에 지친 중생들의 삶을 깨우고 있다.


   “세상 굴곡이 너무 심합니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온통 대~한민국하며 축제의 분위기더니 불과 서너달만에 병풍 총리 청문회 등으로 국민의 기운을 쏙 빼놓습니다. 이번에 태풍이 불어 중생들의 마음을 또 아프게 합니다.


우주의 흐름은 우리사회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근원적인 생명체인 우주는 병이 들면 그 병을 치유하기 위해 바람을 부르고 비를 부르고 안되면 땅속의 뜨거운 기운도 부르기도 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은 그 앞에서 속수 무책일 수 밖에 없습니다.”

   디지털시대에 세상은 빠르게 혼돈으로 빠진다. 대중들은 영문도 모른체 그 혼돈 속에 한꺼번에 몰려들어간다. 이른바 대중시대의 실상인 것이다. 대중의 시대에는 물질적인 허상만 존재할 뿐이지 진정한 자아를 찾는 진체(眞體)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이어도’ 같은 존재다. 스님은 많은 중생들이 자가당착에 빠져있음을 지적했다.


   “모든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 되는 존귀한 존재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명에 스스로 예속되어 있음으로 인해 자가당착적 모순과 원치않는 불행에 빠져듭니다. 인간이 자기의 관리권을 어떤 신명에게 위탁하는 한 신의 노예가 되어 천진(天眞)의 인권을 스스로 행사하지 못하거나 또는 물질의 노예로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기위해서 각성(覺性)이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각성은 모든 것의 출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각성은 초발심인 것이다. 스님은 인간이 부처의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자아완성을 향한 길을 떠나야 함을 역설했다.


   “인간은 오직 자아완성을 통해 구제될 수 있습니다. 한발짝 더 나아가서 개인의 구제는 곧 사회의 구제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말합시다. 내가 내 마음을 단속해 나아가서 번뇌망상을 자꾸 없애버리는 것이 바로 자아완성인 것입니다. 순수한 본래의 자기 마음 곧 부처의 마음 청정한 나를 깨닫는다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다. 우리를 존재하게 해주는 천지가 만약 나를 죽이려한다면 그 천지를 나는 두들겨 부숴 버려야 한다. 세상을 활보하는 많은 철학이나 종교들은 ‘나’라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에 주목하기보다는 객관화시켜 버린다. 객관화의 실체는 곧 어떤 것에 대한 구속이요 예속을 잉태한다. 예속과 구속을 통해 인간의 마음은 안으로 닫혀버리는 불행한 일이 초래된다고 혜정스님은 지적한다.


   “노자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노자의 도설은 인식의 객체에서 진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근원이며 마음이 만물을 포용하고 있음을 알지못하고 밖에서 찾으려한 노자의 사상은 참 나의 깨달음과 거리가 아주 멉니다. 저의 은사이신 청담스님께서는 자아완성의 경지를 이렇게 설파하셨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아 마음밖에 천지가 없다.


내 마음이 참 좋으면 온 세상이 다 좋다오. 남의 탓을 하지말고 이 내 마음 바로 갖자. 무서운 저 지옥도 내 발로 걸어가고, 한없이 좋은 천당 내 복으로 올라간다. 고해바다 육도중생 제 저질러 꿈이로다. 한 생각만 돌이켜 이 내 본심 바로 깨쳐. 꿈속 품의 꿈 밖으로 생사꿈 깨고 보면 온 우주에 주인공이 내 아니고 누구더냐. 천상천하 나만 높다 우리 마음 가르쳤네.”


   
 


   불교는 사회를 부드럽게 한다. 좀더 속을 들여다 본다며 소유권을 통해 빚어지는 갈등과 투쟁을 해소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혜정스님은 불교의 참뜻은 편안함을 추구하기보다는 깨달음을 기초로 해 구세를 위해 봉사하는 보살본원(菩薩本願)의 자세에 있다는 것을 일깨웠다.


   “불교는 베푸는 종교입니다. 자꾸 베풀어야 합니다. 진정한 보살심으로 베풀 때 중생들이 부처님의 품으로 귀의하게되고 그 귀의처에서 깨달음을 향한 첫 초발심을 피워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구세의 길이기도 합니다.”

   실천없는 신앙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 목적지를 알아도 그곳에 가기위해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비방이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은 병을 진정으로 낳게 할 때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비방(秘方)은 진정한 비방이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철저하게 실천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수행자는 신명을 다해 중생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마침내 안락정토를 성취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행(因行)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인이나 이땅의 지도층 인사들도 마찬가집니다. 지도층이란 중생들을 위해 올바른 전범을 세워 봉사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부나 권력이 많은 사람들은 지도층이 아닙니다. 그들은 탐욕에 물든 중생들일 뿐입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비워낼 때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지금 자신의 것을 버리고 중생들의 복락을 추구하기위해 헌신하는 지도층이 절실합니다.”

   빗물이 쏙빠진 푸른 하늘은 어느새 텅 비어있었다. 가끔식 푸드득 거리며 하늘 향해 차고 나르는 멧새들만 북한산의 고요를 깨뜨리고 있었다. 혜정스님은 문수봉과 보현봉을 가르켰다. ‘문수와 보현을 가르키고 있는 이 손가락이 문수와 보현인가. 저 곳에 있는 문수와 보현이 문수와 보현인가.’


* 혜정스님의 ‘화두’

   북한산의 얼굴인 문수사는 최근 2년사이에 크게 면모를 일신했다. 헬기로 모든 장비를 이동시켜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생들이 함께 부처님의 법을 듣고 실천할 수 있는 도량으로 가꾼 것이다. 혜정스님은 도량을 제대로 정비한 다음 ‘문수사지’ 발간을 준비중이다.

   “도올 김용옥씨가 등산 삼아 주말에 문수사에 자주 오지요. 엊그제는 최근 인도를 방문, 달라이라마를 만난 이야기를 쓴 저서를 가져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 교육방송에서 하는 불교강의에 관한 모니터링을 요구도 합니다. 허심탄회하게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특히 금강경에 실린 삼심(三心.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중 어느곳에 마음의 점을 찍을 것인가), 불교를 과학으로 볼 것인가 종교로 볼 것인가, 참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문수사에 온지도 한 18년 됐습니다. 문수사는 문수도량으로 고려시대 명필가로 이름 날린 탄연국사가 창건한 곳입니다. 지금처럼 건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천연굴이었지요. 이곳에서 오랫동안 정진하다 문수보살을 친견했습니다. 문수굴에서 정진하던 태고스님이 청의동자에게 차를 얻어 마신후 저 너머 중흥사에 머물며 불교중흥을 위한 큰 법을 폈습니다.

이곳은 옛부터 서울의 얼굴로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진산(鎭山)이라고도 합니다. 한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도량입니다. 문수사는 버려져 있었습니다. 이곳이 인연터요 원력을 세워야 할 곳이구나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많은 신도들이 이곳에 와서 문수의 지혜와 중생의 짐을 잠시라도 내려놓는다며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처음엔 산을 등반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부처님의 말씀과 은사스님의 마음법문이 담긴 문서포교를 했습니다. 문수사에서 점심공양을 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조그만 책자들은 고정적인 구독자들을 가질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몇해전 부터는 매주 일요일 대중법회를 엽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법관이나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꽤 됩니다. 불교에 대한 이해나 공부가 높은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정치 경제 등 사회상황에 맞는 법문을 하기위해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21세기 정신문명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더욱 불교는 삶의 현상을 이해하고 헤쳐나가는데 금과옥조 같은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삶에 대해 명쾌한 주인적인 삶을 가르치는 교육을 사찰에서 많이 실시해야 합니다. 신도들도 단지 맹목적인 받아들임보다는 정확하게 판단하고 사고해 그 자신의 삶을 실천적으로 가꿀 수 있는 안목을 키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