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5. 14:06ㆍ잡주머니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2/2 - 김안로(金安老) 고문고사(古文故事)
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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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5. 08:40
● 옛날 사람들이 시를 지어 주고 받는 것은 단지 그 뜻을 화답할 따름이었다. 시에 차운(次韻)하여 짓는 것은 중고(中古) 때부터 처음 시작된 것으로 같은 운(韻)을 왕복하여 거듭 쓰되 갈수록 뜻은 새로운 것이었다. 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에 이르러 대단히 성하였다. 그러나 사(詞)와 부(賦)에 같은 운을 써서 짓는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에 오는 중국의 사신들을 보면 풍속과 민요를 보고 짓는 것이 많아 대개가 모두 이런 식으로 화답된 것이다. 비록 사와 부 같은 대작이라도 반드시 운을 그대로 써서 지었으니, 명 나라 사신인 진감(陳鑑)이 〈희청부(喜晴賦)〉를 지었다. 세조(世朝)가 그 사람을 어렵게 여겨서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을 불러서, “너가 한 번 지어보라.” 하셨다. 괴애가 자기 집에 물러나와 대청에 홀로 누워 정신을 가다듬고 움직이지 않은 채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누워서 골똘히 생각하기를 며칠을 두고 한 후에야 비로소 일어났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붓을 잡게 하고 써서 올리니, 글이 아주 찬란하게 뛰어났고 글의 뜻이 잘 통했으며 운(韻)으로 말하면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세조가 이것을 읽고 기쁘게 생각하고 영성(寧城) 최항(崔恒)에게 명하여 윤색하라 하였다. 영성이 몇 구절을 마음대로 고쳤더니, 괴애가 고친 것을 보고 웃으며, “어찌 천하에 추녀인 무염(無鹽)을 그린 그림으로 천하 미인인 서시(西施)의 단장을 보충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진감이 이것을 보고 과연 크게 칭찬하고 고친 부분을 지적하면서, “이것은 본인이 쓴 글이 아니다.” 하였다. 이때부터 괴애의 이름이 중국에 퍼져서 후일 괴애가 중국 조정에 들어갔을 때 한림원(翰林院)에서 아패(牙牌)를 두른 학자들이 빙 둘러서서 괴애를 보고, “이 사람이 김희청(金喜晴)이다.”라고들 칭찬하였다. 조사(詔使) 예겸(倪謙)이 왔을 때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가 그와 더불어 교류하였다.
신숙주가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는데 그 표지에는 작은 해서(楷書) 글씨로 범옹(泛翁.신숙주의 자)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으니, 이것은 비해당(匪懈堂.안평대군)이 쓴 글씨였다. 예겸이 그것을 보고, “필법(筆法)이 아주 신묘한데 누가 쓴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문충(文忠)이 거짓말로, “나의 벗 강경우(姜景遇)가 쓴 것이오.” 라고 대답하였다. 예겸이 종이를 꺼내어 주며 그 사람의 글씨를 받아 줄 것을 청하였다. 문충이 인재(仁齋.강희안)의 글씨를 받아 주었더니, 예겸이 말하기를, “같은 사람의 글씨가 아닙니다.” 하였다. 세조가 이 말을 듣고, “왕손(王孫)과 공자(公子)는 건전한 문예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니 예술에 있어서 기피할 까닭이 무엇인가.” 하고, 비해당을 시켜 글씨를 써서 주도록 하였다. 그 후에 우리 나라 사람이 중국에 가서 좋은 글씨를 구하려 하면 중국 사람들이, “당신 나라에 제일가는 사람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멀리 와서 글을 구입하려 하오.” 하였다. 이래서 청지(淸之.안평대군)의 글씨가 중국에서 중요시되게 된 것이다. 진감이나 예겸 같은 사람은 감식력(鑑識力)이 신같이 깊어서 한 자 한 구절을 보고도 능히 진짜와 가짜를 판별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귀한 존재였다. 성종(成宗) 때에 호부(戶部) 기순(祈順)이 황제의 명을 반포하러 오면서 도중에 어떤 사물을 볼 때마다 흥이 나서 시를 읊었는데, 원접사(遠接使) 사가(四佳) 서선생(徐先生.서거정)은 마음속으로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신으로 왔던 일을 다 마친 그 다음날 사가(四佳)가 한강에서 놀기를 청하니 기순이 “좋다.” 하였다. 도중에 시로 화답하는 것은 손님이 주인보다 먼저 하였으나 내일 강가에서는 주인이 손님보다 먼저 시를 지어 흥을 돋구기로 하였다. 사가가 미리 율시(律詩) 한 수를 짓고, 또 일찍 지어 두었던 영천명원루(永川明遠樓) 시를 적고는, “이놈의 늙은이 항복을 받고야 말 것이다.” 하였다. 강가 정자로 건너갔을 때 술은 아직 반도 들지 못했다. 자리에 앉은 채 시를 읊조리는 시늉으로 어떤 구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는 붓을 찾아 시 한 편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바람과 달은 황학을 따라가지 않고 / 風月不隨黃鶴去
아지랭이 긴물결은 백구를 보내 온다 / 煙波長送白鷗來
하니, 기순이 즉석에서 붓을 휘둘러,
백제의 지형은 강물을 따라 다하고 / 百濟地形臨水盡
오대산 물줄기는 하늘에서 내려온다 / 五臺泉脈自天來
하였다. 그리고는 사가를 돌아보며, “이게 맞습니까.” 하였다. 필봉(筆鋒)이 빼어나 대항할 수 없자, 좌석에 앉았던 사람들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괴애도 참석하여 화답하고 있었는데 퇴(堆) 자로 운(韻)을 달아 고심하여 읊었으나 생각이 고갈되어 눈썹을 찌푸리고 사람을 돌아보며, “생각도 나지 않고 뜻도 다해 버렸으니 내가 죽을 지경이구나.” 하고, 오래 되어서야 겨우 글을 엮기를,
술이 쌓여 천 병이요, 고기는 백 무더기라 / 崇酒千甁肉百堆
하였다. 그 뒤에 또 두(頭) 자 운을 쓰려는데, 괴애가 말하기를,
검은 구름이 비를 안고 머리 위에 다다랐다 / 黑雲含雨已臨頭
하니, 기순이, “가히 고기 백 무더기를 씻을 만하구려.” 하였다. 배를 타고 노를 띄워 물결 따라 내려오니 강산(江山)이 정신을 사로잡고 잔과 접시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 붓을 잡고 정력을 기울이는 통에 한눈팔 겨를이 없었다. 서쪽 해는 반쯤 산에 걸렸고 저녁 물결이 약간 높았다. 취해서 눈 깜박할 사이에 배는 잠두봉(蠶頭峯) 아래 이르렀다. 기순이 눈을 뜨고, “여기는 지명이 무엇이오.” 물으니, 통역관이, “양화도(楊花渡)라 합니다.” 하였다. 즉석에서 율시(律詩) 한 수를 읊었는데,
사람은 죽엽주(竹葉酒) 잔 중에 취하고 / 人從竹葉杯中醉
배는 양화나루터를 향하여 비꼈도다 / 舟向楊花渡口橫
하니, 사가(四佳)가 그 운에 맞추어,
산은 높은 회포를 안은 듯 길게 비스듬히 누워 있고 / 山似高懷長偃蹇
물은 힘찬 붓과도 같이 다시 출렁거리네 / 水如健筆更縱橫
하였다. 두 사람의 교묘하고 빠른 속도가 거의 대적할 만하여 마치 두 영웅이 서로 진을 치고 지구전을 하는 것처럼 결판이 쉽사리 나지 않아 기습(奇襲)과 정공(正攻)으로 변화무쌍하여 꾀를 서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 같았다. 칼을 맞닥뜨리고 싸움이 붙자 번개같이 빠르고 뇌성같이 날쌔어 진격하고 물러나는 기세가 깃발과 북 사이에 있는 것이다. 비록 당당하게 팔진(八陣)의 진을 치고 부채로 지휘하였지만, 사마중달(司馬仲達)의 계산도 실수 하나 없었으니 역시 항복받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순이 일찍이 말하기를, “선생이 중국에 계셨더라면 의당 시 잘하는 사람 4,5명 중에 들 것입니다.” 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임진강에서 배를 타고 사가가 먼저 장편의 고시(古詩)를 지으니, 기순이 두루마리 끝을 탁자 위에 두고 손을 짚어가며 천천히 보아 내려가는데 한 구를 보면 시 한 구를 지어 손과 눈이 한꺼번에 내려가면서 그것을 잠깐 사이에 다 보자, 운에 맞추어 지은 시도 다 지어졌다. 운을 다 맞추고서도 붓은 계속 멎지 않고 연이어 종이가 다 되도록 시를 짓는데 마치 쌩쌩 바람이 불고 비가 갑자기 내리는 것처럼 또 한 편의 시가 이루어졌다. 사가가 마음속으로 탄복하고 종사관(從事官) 채나재(蔡懶齋)를 돌아보며, “신속하고도 많이 지었다.” 하며, 이마를 약간 찌푸리고는 곧 이어 두 수를 지으니 생각이 샘물처럼 솟아나 다할 줄 몰랐다. 저쪽에서는 한 번 부르면 화답하는 마음이 겹겹이 나와서 많이 짓는 것으로 승부를 삼으려 하니 이것은 정말 세상에 드문 민첩한 솜씨이다. 중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을 보면 서재상(徐宰相)의 안부를 물었다. 사간(司諫) 최보(崔溥)가 일찍이 탐라(耽羅)에서 표류되어 태주(台州.중국 복건성 지방)에 이르러 소주(蘇州)와 항주(杭州)로 거슬러 올라온 적이 있는데, 남쪽 사람들 역시 묻는 사람이 있었다 하니 사가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시강(侍講) 동월(董越)이 왔을 때 행차가 평양까지 와서 풍월루(風月樓)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안찰사로 있던 성허백당(成虛白堂)은 모습이 훌륭하지 못하였다. 동월이 안찰사를 주(州)의 관리인 줄 알고 그렇게 대수롭게 보지 않았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시를 짓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시에 화답하였다. 성허백이 지은 시에,
붉은 비 뜰에 가득한데 복사꽃 이미 떨어졌고 / 紅雨滿庭桃已謝
파란 연잎 물결에 점 일으키며 연꽃이 처음 떠오르더라 / 靑錢點水藕初浮
하였다. 동월이 이것을 보고 정색하고는, “이런 사람이 어째서 주(州)의 관리밖에 못하고 있는가.” 하니, 반접사(伴接使)인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이, “우리 나라에서는 풍화(風化)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하여 조정에서 으뜸가는 사람들을 뽑아서 주관(州官)으로 삼습니다.” 하였다. 동월의 풍월루기(風月樓記)에, “관찰사가 속으로 빼어나고 문아(文雅)하다.” 한 것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가 돌아갈 무렵 압록강에서 전별 잔치를 할 때에 쌍방이 모두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빛이 있었다. 충정공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는데,
푸른 연기는 고요하게 떠 있고 풀은 무성한데 / 靑煙漠漠草離離
바로 강두에서 석별할 때라 / 正是江頭惜別時
말없이 서로 보는 정 한 없으니 / 黙黙相看無限意
이생에 어디에서 다시 만나 즐길고 / 此生何處更追隨
하였다. 두 중국 사신이 서로 보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렸으니, 정말 정과 뜻이 한가지로 통하는 것은 풍속과 지역의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 신사년에 가정(嘉靖) 황제가 즉위하자, 수찬(修撰) 당고(唐皐) 등이 와서 등극(登極)의 조서를 선포할 때, 사신을 접대하였던 용재(容齋) 이택지(李澤之) 가 처음 연회에서 자리를 같이하며 술잔을 들어 앞으로 내어 밀자, 당고가 팔을 뻗어 그 잔대를 잡고 약간 밀쳐서 물러서게 하니, 가까이 오는 것을 꺼리는 뜻이 있는 듯하였다. 당고의 음락시(飮酪詩)가 있었는데, 용재가 차운(次韻)하여,
왕가 8백 리에 비하면 / 若比王家八百里
서생이 너를 용서한 것이 또한 많다 / 書生貸汝亦云多
하였더니, 이때부터 교제가 밀접해지고 늘 시단의 노장이라고 칭찬하였다. 문장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요즈음 중국에 어떤 예부랑(禮部郞)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서적을 구입하는 것을 가혹하게 금지하고, 문장이 해외로 너무 많이 흘러나간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를 예의와 문헌이 있는 나라라고 하여 이적(吏狄)들처럼 낮추어 보지 않는 것은 이상과 같은 까닭이 있어서이니, 진실로 우리 나라 문인들로 하여금 중국에 들어가 여러 선비들 사이에서 고하(高下)를 정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저들에게 모두를 양보하겠는가. 고금에 우리를 이적들처럼 대우하지 않았던 것은 명확한 일이다.
● 조수(潮水)에 대한 학설은 학자들의 설이 모두 같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자루나 젓대 같은 것이 오무려졌다 펴졌다 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하고, 혹자는, “사람이 호흡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바다 미꾸라지가 구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기 때문에 조수가 생긴다.” 하고, 불교에서는, “신룡(神龍)이 변화하여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니, 모두 황당무계하여 옳은 것이 없다.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에는, “물이란 땅의 혈맥으로 기(氣)에 따라 나왔다 물러났다 한다.” 하였고, 노조(盧肇)의 《해조부(海潮賦)》는, “조수는 해를 따라 생기는 것이니, 해가 물을 격동시키면 조수가 생기고 달이 해에서 떨어지면 조수가 커지는 것이다.” 한다. 여양공(餘襄公.여정)이 설(說)을 지어서 이상의 학설들을 비난하면서, “달이 임하는 곳에 물이 따라가니 달이 동서쪽으로 가게 되면 물은 동남쯕으로 불어나며, 달이 북남쪽으로 가게 되면 조수도 남북쪽으로 평평하게 되어, 저쪽이 기울어지면 이쪽이 가득 차곤 하여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이니 조수의 동향은 달과 관계 있는 것이지 해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하였다. 주자(朱子)가 이 설을 상세하게 주장하게 되자 학설이 정설로 되었다. 소자(昭子.소옹)는, “땅이 숨쉬는 것이다.” 하였으니, 그것은 본래 그러한 것이다. 다만 우리 나라 동해에는 조수의 차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선대 학자들의 학설이 모두 성세하고 옳은 것은 아니니 이러한 이치는 끝내 해석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 나라 남쪽 문경현(聞慶縣)에 우뚝 솟은 산이 있어서 그 위에 약간 오목하게 들어간 토구(土口)가 있는데, 그곳의 흙은 언제나 건조한 상태여서 축축하게 음습한 기운이 없었다. 그런데 매일 한 번씩 샘물이 솟아올라 큰 시내를 이루고 흐르다가는 곧 멈추어 버리는데, 물 한 방울 남지 않는다. 이와 같이 물이 솟아나는 시간이 이르고 늦은 것은 언제나 일정하지 않으나, 물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이 절도가 있는데, 그곳을 조천(潮泉)이라 불렀다. 이곳은 문경현에서도 가장 산이 험준한 곳이며, 바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데 지형이 점점 높아져서 아주 높은 곳이다. 샘은 그 산 위에 있으므로 조수와 서로 통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니, 이러한 이치는 아주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물은 땅 속에서 흘러 넘쳐 나오는데 어느 곳이고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하여 비록 산마루처럼 지극히 높은 곳일지라도 샘의 맥이 없을 수 없는 것이 마치 사람의 혈기(血氣)가 온 몸에 두루 흘러서 위로 뇌와 정수리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것과 같다. 만약 혈기가 역행하면 종기가 생기는 법이고, 기운이 위로 솟으면 코피를 흘리게 되니, 모두 그 순조로움을 얻지 못하여 옆으로 터지기 때문이다.
● 혹 땅의 기운이 위로 거슬러 올라가 물줄기의 맥이 그 안에서 막히게 되어 옆으로 터지거나 위로 새어나가면 격렬하게 넘쳐서 나가는 것이므로 땅기운의 호흡이 올라가고 내려가는데 따라 물이 나오고 들어가기 때문에 잠깐 나왔다가 잠깐 들어갔다 하는 것이다. 또 이것을 비유하면, 물을 마구 들어부어 그릇에 가득 담아두고 그 위에 단단한 뚜껑을 덮어 놓는 것과 같으니, 혹 사물의 격동으로 위로 튀어서 틈 있는 곳으로 나오는 것이 막히고 빽빽하여 그 순한 성질을 잃게 되는 것으로, 많고 적은 양과 빠르고 느린 속도가 한결같지 못함은 진실로 이치의 당연한 것이다.” 하였다. 의성현(義城縣)에 또 빙혈(氷穴)이 있으니, 입하(立夏) 이후에는 얼음이 얼어서 점점 단단하게 되었다가 입동이 지나면 얼었던 얼음이 점점 녹게 되니 이치에 어긋나고 상도에 반대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른 매화는 동지(冬至) 전에 피는 것이니, 정자(程子)는, “물체란 제각기 하나의 건곤(乾坤)을 갖고 있다.” 하였다. 여름에 사물이 생장할 때에도 도리어 말라붙는 것이 있으니 겨울날 추울 때에 생겨나는 것이 있음은 괴이하게 생각할 것도 없는 것이다. 사물의 이치란 진실로 한결같지 않기가 이러하며, 또 기(氣)와 유(類)를 가지고 서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물이란 음기의 지극한 것인데, 양기(陽氣)가 물 가운데 모래 있는 곳에서 먼저 생겨나기도 하니, 소자(蘇子.소동파)의 눈에 대한 시에, “이제서야 양기가 흐르는 물에 있는 줄 알게 되었으니, 모래 위 한자 남짓한 강에 얼음이 없더라.” 하였으니, 지금 우물의 물을 보면 겨울에는 언제나 따스하고 여름에는 차가운 것이다. 이 이치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니, 물이 음(陰)이라는 것은 곧 양(陽)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이다. 물속이 밝은 것은 음 가운데 양이 있는 것이며, 음은 같은 음끼리 모이는 것이기 때문에 약한 음을 만나게 되면 성하게 되며 성하면 반드시 양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약한 음을 만나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구괘(姤卦)는 음의 시초이니 곧 단단한 얼음이란 뜻이 있고, 복괘(復卦)는 양의 시초이니 곧 양춘(陽春)의 뜻이 있는 것이다. 늙은 것은 물러가고 젊은 것은 나아가는 것이며 성한 것은 쇠하게 되고 쇠해진 것은 다음에 성하게 되는 법이니, 천하의 사물은 그렇게 된 징조에서부터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 시초를 삼간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목전의 일에 가리워져서 이러한 이치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 빙혈(氷穴)을 보면 그와 같은 이치가 훤히 더욱 드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 이치를 궁리하는 것은 배우는 자의 일이니 바로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물은 지극히 음(陰)한 것이지만 혹 온천이 있는 것과도 같다. 설명하는 자가 말하기를, “물의 근원에 유황이 있으면 그 샘물이 곧 온천이 된다.” 하는데, 지금 유황을 물 속에 넣어도 물이 더워지지 않으니, 이 말을 근거없는 말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신룡(神龍)이 하는 짓이라 하나, 황당무계하여 가소롭기 짝이 없다. 불의 성질은 지극히 뜨거운 것인데도 옛날 선비 중에는, “양주(涼州)에 서늘한 불꽃이 있으니, 음양(陰陽)의 정기가 그 속에 감추어진 것이다.” 하였다. 물속이 밝은 것은 음(陰) 안에 양(陽)이 있고, 불의 중심이 어두운 것은 양(陽) 안에 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니, 온천이 있다면 같은 이유로 서늘한 불꽃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듣자 하니, 채빙군(蔡聘君)이 지리산 상봉에 가니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나무가 있길래 그 나무를 꺾어서 땔감으로 사용하여도 불이 뜨겁지 않으므로 따라 온 사람 가운데 손발이 언 사람이 있어서 그 불 속에 넣고 지졌으나 단지 미지근할 뿐이어서 끝내 지져지지 않았으며, 곡식으로 밥을 지어도 밥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그 나무의 성질이 산만(散漫)하여 기운이 없기 때문에 불이 뜨겁지 않는 것이다. 뽕나무 같은 것은 화기(火氣)가 더욱 세니, 불은 모두 그 나무의 성질에 달려있는 것이지 불의 성질이 달라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은 서늘한 불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정말 불의 성질이 서늘하다면 비록 뽕나무를 땐다 하더라도 덥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물고기는 원래 물에 사는 것이므로, 물을 얻지 못하면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리하다는 뜻을 지극히 심한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사천(四川) 지방에는 나무을 타는 물고기도 있다고 하니, 이와 비슷한 것은 많고도 많아 이루 다 들 수 없다. 그래서 선대의 선비들도 억지로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 선대의 선비가 말하기를, “높은 산에 소라 껍질이 있고, 혹 어떤 것은 돌 속에 있는 것도 있는데, 이러한 돌은 옛날에는 흙이었으며, 소라라는 것은 물속에 사는 생물이다. 그러던 것이 낮은 곳이 변하여 높게 되고 부드러운 것이 변하여 단단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나도 일찍이 산 위를 파서 흙 속에서 물이 마찰된 바둑알 만한 작은 돌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것 역시 천지개벽 이전에는 물속에 있던 물건인가고 의심했던 적이 있다. 소옹(邵雍)의 말에 의하면, “12만 9천 6백 년이 일원(一元)이니, 12만 9천 6백 년 이전에 천지개벽이 한 번 있었다. 그때 산천(山川)ㆍ초목(草木)ㆍ인물(人物)ㆍ벌레와 물고기 및 크고 작고 아름답고 더러운 것들이 수풀처럼 빽빽하게 천지에 가득 차 있어 마치 오늘날과 같았다. 그러다가 다시 천지개벽이 일어날 때 큰 기운이 한꺼번에 불어닥쳐서 천지간을 한없이 크게 흔들자, 가볍고 깨끗하여 위로 올라갔던 것은 탁(濁)해져서 내려 앉고, 엉키고 메워서 내려갔던 것은 터져서 새어나왔다. 산과 냇물이 솟아나고 메워지고, 사람과 물건은 모두 멸하고 말았다. 음양이 혼합하고 원기가 융화된 뒤에 다시 천지의 개벽이 일어나 탁하여 밑에 있던 것들이 다기 맑아져서 하늘이 되고, 터져 새어나간 것들이 다시 엉켜 땅이 되었으며, 산이 솟고 냇물이 흘렀으며 사람이 화생(化生)하여 번식하게 된 것이다. 모든 사물이 모여서 큰 덩어리로 엉켜 굳어지는 것은 어떤 큰 기운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니, 큰 기운이 흩어지면 천지가 모두 혼합되어 흔적 없이 되어 버리는데, 하물며 그 사이 한 물체가 변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용광로에 비유한다면 강하고 단단하고 크고 작은 것 할 것 없이 모두 녹여버리는 것과 같은데, 하물며 천지간에 이미 흩어진 기운이 어찌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있겠는가. 이래서 천지조화란 무궁무진하여 이미 간 것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고, 다시 오는 것이 그 뒤를 이어 나가는 것이다. 지금 저 쇠를 녹이는 기구인 풀무를 보면 부채같은 불꽃이 동(銅)을 녹여서 틀에 부어 물건을 만들게 된다. 그때는 반드시 쇳물이 녹아 물같이 되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응결되어 녹지 않은 것이 없어야만 능히 둥글거나 모난 대로 틀에 맞도록 만들어지는 것이다. 만약 완전히 용해되지 않은 찌꺼기가 있다면 어찌 하자가 없는 완전한 기구가 만들어지겠는가.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흙으로 만든 것이 모양이 매우 조잡하지만 진흙이 익지 않으면 이그러지고 찌그러져 그릇이 완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인데, 하물며 천지의 조물(造物)에 있어서 어찌 한 개의 소라나 하나의 작은 돌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고서야 합하고 흩어지고 녹이고 붓고 열고 닫혀져 천지 형상의 변화가 생기겠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천지개벽 초에는 홍수가 범람하여 물이 산까지 차고 구릉 위로 올라와 소라나 작을 돌들이 산의 돌 사이에 붙게 되었는데, 물이 다 빠지고는 구릉과 계곡이 변하고 바뀌어 지난번에 높던 것이 씻기고 무너져서 다시 낮아지고, 낮은 것은 흘러오는 모래가 쌓여서 다시 높게 되었기 때문에 물속에 있던 물건이 높은 산의 토석(土石) 속에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
● 옛날에 그림 그리는 자는 당 나라 이전에는 그리 많지 않고, 그 필적들도 오래되어서 전해오지 않았다. 당 나라 오도자(吳道子)의 시대는 송 나라와 시대가 그리 멀지 않아서 소자첨(蘇子瞻.소식)이 그래도 한두 그림을 보았을 따름이라 하였는데, 하물며 천년을 내려온 오늘날에 있어서랴. 중국도 이러한 형편인데, 하물며 외국에 있어서랴. 지금 그림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간혹 당 나라 사람의 그림이 있다고 하며, 또 오도자의 그림이라고도 하나, 아마 이것은 모두 진짜가 아닐 것이다. 내가 일찍이 옛날 그림을 얻었는데, 그것은 즉 명황단전도(明皇端箭圖)로 세월이 오래되어 비단 절로 파손되고 이지러져서 그 형태만 겨우 남아있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창연(蒼然)하여 그림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으나 멀리서 보면 가느다란 형체와 쭈구러진 모양들이 분명하여 알아볼 수 있으며, 생동하는 오묘함이 정말 형용할 수 없다. 그 위에 송 나라 사람이 글을 써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이것은 당 나라 신징(辛澄)의 작품으로, 인물의 풍체와 모양들이 자연에서 나왔으니 역대에 인물화를 그린 사람들이 누가 이 그림에 미치리오. 진실로 우러러볼 만한 것이다.” 하였다. 그것이 정말 당 나라 사람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오래된 오묘(奧妙)한 필치는 후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점이라 생각한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그림을 논하려면 마땅히 그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하였는데, 오도자의 그림에 중유(仲由.자로)가 목검(木劍)을 이고 있는 것이 있고, 염령공(閻令公.염립본)의 그림에 왕소군(王昭君)이 유모(帷帽)를 쓰고 있는 것이 있으니, 이것은 목검이 진(晉) 나라 시대에 처음 만들어지고 유모가 본조(本朝)에서 만들어진 것을 모르고 한 말이니, 이것이 모두 그림의 병폐인 것이다. 단전도(端箭圖)에 있는 시희(侍姬)와 위사(衛士)들의 관상복색(冠裳服色)의 제도도 퍽 기이하고 오래된 것으로 근고(近古)의 화가들이 일찍이 본 것들이 아니다. 만약 후세 사람이 옛날 그림을 그린다면 그 당시의 제도를 잊고 그리게 되어 위에 든 예와 같이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만약 당 나라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면 당시의 제도를 모르고 그릴 리는 없지만, 당 나라 사람들의 의복 양식을 지금 상세히 알 수 없으니 박식한 군자가 그 진가(眞假)를 가려 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 고금(古今)에 이름난 화가들의 성명으로는 진(晉) 나라 고개지(顧愷之)를 들 수 있는데 자(字)는 장강(長康)이고, 어릴 때의 자는 호두(虎頭)로, 진능(晉陵) 무석(無錫) 사람이다. 육탐미(陸探微)는 오(吳) 나라 사람이다. 사혁(謝赫)이 강좌(江左) 사람들의 그림을 논평하여 고개지와 육탐미의 그림을 최상품으로 쳤다.
● 당 나라 우승(右丞) 왕유(王維)는 오묘한 이치가 귀신 같아서 그림의 형상을 보고 평하기는 어려우니, 그림을 그리는데 사시(四時)를 불문에 붙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꽃을 그리는데 이따금 복숭아ㆍ살구꽃에다 연꽃을 함께 그리는 따위이다. 또 그의 원안와설도(袁安臥雪圖)에는 눈 속에 파초를 그린 것이 있다. 심존중(沈存中)이 말하기를, “마음 가는 대로 손이 움직여 뜻이 이르게 되면 곧 그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의 이치가 신(神)의 경지에 들어가 멀리 천의(天意)를 얻었으므로 속된 사람과 평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 오도자(吳道子)는 법도를 지키면서도 새로운 뜻이 있어서 호탕한 외에 오묘한 이치를 구사하여 마치 칼날을 놀려도 아직 여지가 있고[游刃餘地], 도끼를 움직이니 바람이 이는[運斤成風]듯한 격조였다. 소설당(蘇雪堂.소동파)이 두보(杜甫)의 시와 한유(韓愈)의 문장과 노공(魯公.안진경)의 글씨에 비교하여 천하의 능한 일은 이것으로 끝났다 하였다. 조패(曹覇)는 위(魏) 나라 무제(武帝) 즉 조조(曹操)의 후손으로 당 나라 능연각(凌煙閣)에 공신(功臣)의 상(像)을 그렸다. 그의 제자 한간(韓幹)은 대량(大梁) 사람으로 인물을 묘사하는데 능하였고, 더욱이 안장 얹은 말을 잘 그려 왕유(王維)가 그를 추대하였다. 그러나 말을 비대하게 그려 살을 그린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무위장군(武衛將軍) 이사훈(李思訓)은 당시에 제일 신묘하다는 칭찬이 있었다. 그의 아들 이소도(李昭道)는 부친의 필치를 변경하였는데, 신묘하기가 부친보다 뛰어났으므로 세상에서 산수 그림을 말하는 데에 큰 이장군(李將軍), 작은 이장군이라 하였다. 염입본(閻立本)ㆍ기악(祁岳)ㆍ정건(鄭虔)은 모두 크게 당시 이름을 떨쳤다. 그 중 정건은 시와 글씨를 잘 써서 삼절(三絶)이라 하였다. 소열(蕭悅)은 대 그림을 잘 그렸고, 왕재(王宰)의 산수와 수목은 형상보다 뛰어났고, 필굉(畢宏)과 위언(韋偃)은 모두 고송(古松)을 잘 그렸다. 위언은 대력(大曆) 2년에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또 신선과 부처의 괴상한 돌을 잘 그렸으며 말도 잘 그렸는데, 필력이 강건하고 풍격(風格)이 높았다. 위언의 백부는 용과 말을 잘 그렸다. 마란(馬鑾)은 산수와 소나무ㆍ바위 등을 잘 그렸다.
● 설직(薛稷)의 자는 사도(嗣道)로, 꽃ㆍ새ㆍ인물 등 잡화(雜畵)를 잘 그렸고, 특히 학을 잘 그려 이름이 알려졌다. 선주 자사(宣州刺史) 주방(周昉)의 자는 경현(景玄)으로, 사람의 뒷면을 그리고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켜는 여자들을 정교하게 그렸다. 영왕(寧王)과 신왕(申王)은 말을 잘 그렸고, 등왕(藤王)은 나비를 잘 그렸다. 강도왕(江都王) 이서(李緖)는 당 나라 초기에 안장을 얹은 말을 잘 그려 그 신묘함이 독보적이었다. 주요(朱瑤)는 당 나라 말기 사람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세상에서 말하는 오도자의 그림은 주요의 그림이 많다.
● 양(梁) 나라 장승요(張僧繇)는 그림을 잘 그린다고 명성이 있었다.
● 고금에 물을 그리는데 평원(平遠)하면서도 잔잔한 물결이 있는 그림이 많아서 그 좋은 것이라도 파도 위에 기복이 있는 것들에 불과하다. 당 나라 광명(廣明) 연간에 처사(處士) 손위(孫位)가 비로소 새로운 생각을 내어 빠른 여울이나 큰 물결이 산과 돌을 따라서 곡절이 되는 것을 그리되 경치에 따라 형태를 묘사하여 물의 변화를 그렸다. 그 후에 촉(蜀) 지방 사람 황전(黃筌)과 손지미(孫知微)가 모두 그 필법을 이어 받았으나, 손지미가 죽자 그 필법은 중도에 단절되고 말았다. 송 나라 성도(成都) 사람 포영승(蒲永昇)은 술을 좋아하고 방랑기가 있어서 성미가 그림 그리는데 알맞았다. 그가 비로소 흐르는 물을 그려 손위와 손지미 두 사람의 필법을 얻었다. 황거래(黃居萊)ㆍ이회곤(李懷袞) 같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따르지 못하였다.
● 황전(黃筌) 부자(父子)가 꽃을 그린 그림은 색소를 잘 쓰는데 신묘함이 있었고, 붓이 극히 가늘어서 거의 먹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가벼운 색으로 물든 것 같이 되어서 사생(寫生)이라고들 한다.
● 강남(江南)의 서희(徐熙)는 묵화로써 약간씩 붉은 색을 썼을 뿐이니, 신통한 기운이 빼어나 유달리 생동감이 있는 것 같았다. 황전은 자기와 상대되는 것을 미워하여 그의 그림은 추하고 속되어서 등급에 들어올 수 없다 하며 헐뜯었다. 서희의 아들이 황씨의 격조를 모방하여 더욱 붓을 쓰지 않고 다만 채색으로 그렸으니 이것을 몰골도(沒骨圖)라 한다. 그러자 황전 등이 다시는 흠을 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기운을 말하면 부친 서희에게는 훨씬 뒤떨어졌다. 이후주(李後主)가 서희의 필적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 개보(開寶 송 나라 태조의 연호) 말년에 서희는 송 나라로 귀의(歸依)하였다.
● 송 나라 혜숭(惠崇)은 건양(建陽) 사람으로 오리ㆍ기러기ㆍ백로ㆍ가마우지 등을 잘 그리고 특히 작은 경치를 잘 그려 차가운 물가에 연기 낀 모래밭 같은 쓸쓸하고 공허한 풍경을 잘 그려 다른 사람들이 이르기 어려웠다. 또 시를 잘 지어 《십승시집(十僧詩集)》에 혜숭이 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조창(趙昌)의 자는 창지(昌之)로, 광한(廣漢) 사람이다. 꽃과 과일 등을 잘 그려 생물을 묘사하기를 거의 실물과 같이 그렸으나 필치가 좀 속되어 옛사람들 같은 품격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에게 견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애선(艾宣)은 종릉(鍾陵) 사람으로, 꽃과 대나무와 조류(鳥類)를 잘 그려 홀로 풍아(風雅)한 경지에 이르러 남다른 풍격(風格)을 가졌다. 변란(邊鸞)은 조류(鳥類)를 잘 그렸다. 이세남(李世南)은 가을 경치를 잘 그렸다.
● 최백(崔白)의 자는 자서(子西)로, 호량(濠梁) 사람이다. 바람 부는 창포와 겨울 기러기를 그렸다. 윤백(尹白)은 변(汴) 사람으로, 꽃을 잘 그렸다. 이기(李頎)는 산을 잘 그렸고, 왕진경(王晉卿)은 연강첩장도(煙江疊嶂圖)를 그렸다. 주상선(朱象先)은 색채를 잘 썼다. 송복고(宋復古)는 소상강(瀟湘江)의 늦은 경치를 그렸다. 문동(文同)의 자는 여가(與可)로, 촉(蜀) 지방 사람이다. 진사에 급제하여 문학으로 이름이 났다. 그가 대를 그리는 묵화는 가장 신묘(神妙)하였다. 소자첨(蘇子瞻)의 신기하고 예스러운 것은 여가(與可) 다음이었다. 진직궁(陳直躬)은 기러기를 그렸다. 곽충서(郭忠恕)는 누각(樓閣)과 대사(臺榭)를 잘 그렸는데, 고상하고 고풍(古風)스러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이공린(李公麟)의 자는 백시(伯時)로, 스스로 용면거사(龍眠居士)라고 불렀으며, 서주(舒州) 사람이었다. 그림을 그리는데 구상을 먼저 하였으며 특히 인물화를 잘 그렸다. 곽희(郭熙)는 산수와 겨울철의 숲을 그려 당시에 독보적이었으며 부채를 즐겨 그렸다. 최각(崔殼)은 꽃과 새를 잘 그렸다. 원(元) 나라 조맹부(趙孟頫)는 글씨와 그림이 모두 신묘하였다. 왕공엄(王公儼)은 화초와 금수를 잘 그렸으며 색깔을 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사원(謝元)과 진의보(陳義甫)도 꽃과 새를 잘 그렸다. 유백희(劉伯熙)는 산수를 잘 그렸으며 기이한 바위와 오래된 나무를 잘 그렸다. 이필(李弼)은 필세(筆勢)가 정미(精微)하여 누각과 인물을 잘 그렸다. 마원(馬遠)은 산ㆍ바위ㆍ수목들을 그리는데 필치가 웅장하고 강건하였으며 또 인물을 잘 그렸다. 교중(喬仲)은 작은 산이나 작은 나무라도 법도를 넘게 그리지 않았다. 유도권(劉道權)은 산수를 잘 그렸는데 특히 짙고 엷은 구별을 잘하였다. 안휘(顔輝)는 바위와 인물을 잘 그렸다. 장언보(張彦甫)와 고영경(顧迎卿)은 특히 청산(靑山)과 백운(白雲)의 어둡고 먼 정취를 잘 그려 각각 신기한 경지에 이르렀다. 장자화(張子華)와 나직천(羅稷川)은 모두 산수를 잘 그렸다. 주랑(周郞)과 임현능(任賢能)은 모두 말을 잘 그리기로 이름이 났다. 중 설창(雪窓)은 난초와 대를 잘 그렸다. 왜승(倭僧) 철관(鐵關)은 산수와 고목을 잘 그려 실물과 흡사하도록 힘썼으나 호탕하고 뛰어난 것이 적어 불교 냄새를 면치 못하였다. 식재(息齋)는 대를 잘 그렸고, 진재(震齋)는 용을 잘 그렸다. 설촌(雪村)은 매화를 그리는데 비스듬한 가지와 오래된 밑둥은 기이하고 강건하게 하여 진짜 같았으나 그의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 종병(宗炳)의 자는 소문(小文)으로, 남양(南陽) 사람인데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다. 도사(道士) 우전(牛戩)은 하내(河內) 사람으로, 새들을 잘 그렸는데 그 중에도 비둘기와 까치를 많이 그렸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그다지 정교하고 고상하게 그리지는 못하였다. 대송(戴松)은 싸우는 소를 잘 그렸다. 유포(劉褒)는 은하수를 그리면 보는 사람들이 모두 더워하고, 북풍(北風)을 그리면 보는 사람들이 모두 추위를 느꼈다. 이성(李成)은 영구(營丘) 사람으로 산수를 잘 그렸는데, 이영구(李營丘)라고도 불렀다. 송민(宋敏)ㆍ섭형(葉衡)ㆍ지환(知幻)은 모두 대를 잘 그렸는데 풍치와 격조가 깨끗하였다. 그 중에서도 송민이 더욱 뛰어났다. 옥면(玉冕)은 묵매(墨梅)를 잘 그렸는데, 역시 표치(標致)가 있었으나 가지와 꽃이 너무 많아 옛 기풍이 적었다. 그 시대를 상세히 알 수 없어 매우 뚜렷이 서적에 기록된 사람들만을 추려 그 대략을 기술하였으며 나의 문견이 미치는 한도에서 대충 기술하여 옛 그림을 모으려는 사람들의 참고가 되게 하고자 하였다. 우리 동방의 화가는 옛날부터 들은 바가 많지 않다. 고려 이영(李寧)의 천수원도(天壽院圖)는 중국에서도 칭찬을 받았으며, 《파한집(破閑集)》에서도 상세하게 그것을 말하였으나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이 희귀하니 왜 그런지 모르겠다. 비해당(匪懈堂.안평대군)은 평소에 옛 그림을 좋아하였으며 또 화법에도 달통하였다. 누구라도 그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값을 배를 주고라도 사 모아서 두루 모으기를 몇 년을 하니, 수백 축에 달하였다. 당송(唐宋)의 물건이라면 비록 떨어지거나 남은 조각이라도 모아서 완상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이영(李寧)은 근세 사람이니 과연 세상에서 진기한 것이라면 어찌 비해당(匪懈堂)의 화기(畵記) 가운데 기록이 없을까. 사람이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민몰(泯沒)되고 전해지지 않으니 정말 의심스럽다.
● 공민왕(恭愍王)은 큰 글씨를 잘 쓰고 색채를 잘 썼다. 아방궁(阿房宮)의 인물을 그렸는데 대단히 작지만 관(冠)이나 옷ㆍ띠ㆍ신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모두 구비되어 있다. 정밀하고 섬세하기가 짝이 없었으니,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는 무능한 자라고 하겠는가.
● 본조(本朝) 안견(安堅)의 자는 가도(可度), 또는 득수(得守)라고도 하며 지곡(池谷) 사람이다. 옛 그림을 박람하여 그 그림의 심오(深奧)한 묘리(妙理)를 알았다. 곽희(郭熙)를 모방하면 곽희의 그림처럼 되고, 이필(李弼)을 모방하면 이필 그림처럼 되고, 유융(劉融)을 모방하거나 마원(馬遠)을 모방하거나간에 모두 똑같지 않음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산수(山水)를 제일 잘 그렸다.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은 글씨와 그림과 시를 잘 하여 당시에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묵화(墨畵)로 소품(小品)을 그리기를 좋아하여 벌레ㆍ새ㆍ풀ㆍ나무ㆍ인물ㆍ물건을 그리는데 필치(筆致)는 세밀하지 않았으나 생기가 있고, 그 무르익은 모양은 화가(畵家)의 본색(本色)에는 미치지 못하나 시인(詩人)의 여운이 있었으니, 마땅히 화사(畵史) 격조(格調) 외에 있을 것이다. 지금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대개 원(元) 나라 사람들의 필적이 많고, 곽희(郭熙)ㆍ이백시(李伯時)ㆍ소자첨(蘇子瞻) 등의 진필(眞筆)도 많이 전하였으나, 그 중에 진짜와 가짜와 본뜬 모본(模本)이 섞여서 분별되지 못하는 것이 많다. 이는 안목(眼目)이 갖추어져 있는 사람과 가려야 할 것이다.
●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에 있을 때,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이제현(李齊賢)을 불러 부중(府中)에 있게 하면서 원 나라 학사 요수(姚遂)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조맹부(趙孟頫)와 교류하도록 하여, 숨겨져 있는 도서와 서적을 밝혀낸 것이 많았다. 그 후에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올 때, 일용(日用) 기물과 간책(簡冊)ㆍ서화(書畵) 등의 물건을 배에 싣고 바다로 왔다. 지금 전해오는 오묘한 그림과 족자(簇子)들이 그 때에 나온 것이 많다고 한다.
● 충청도 지방에 빈 절이 하나 있었다. 수리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떤 늙은 중이 수리할 생각이 있어 공력(功力)을 계산하러 갔다가, 산은 깊고 날은 저물어서 빈 방에 자게 되었다. 밤은 깊고 산은 고요하며 별과 달이 희미한데, 큼지막한 물체가 어떤 것을 옆에 끼고, 별안간 담을 넘어 들어와서 끼고 온 것을 뜰 한가운데 놓아두고, 뒷걸음질하여 쭈구리고 앉아 멀리서 노려 보거나 혹은 꼬리를 끌고 앞으로 가 냄새도 맡으며, 살짝 뛰어넘기도 하고 뛰기도 하여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빙빙 돌기도 하여 희롱하는 듯 놀리는 듯한 것이 마치 고양이가 쥐를 놀리는 형상과 같았다. 창구멍 사이로 바라보니 범[於菟]이 사람을 잡고 있었다. 중이 급히 떨어진 문짝을 던지니 번개가 치고 뇌성이 일면서 산과 바위에 소리가 울리니, 범이 놀라 달아나 소리와 그림자가 모두 없어졌다. 중이 뜰에 내려가 본즉 나이 16세 되는 계집아이였다. 이미 숨은 끊어졌으나 몸에는 상처가 없어 다시 살아날 것 같아 업고 방안으로 들어와 시험삼아 옷깃을 헤치고 가슴을 맞대고 따뜻한 기운을 전해주었다. 새벽부터 시작하여 오정쯤 되니, 생맥(生脈)이 조금 돌아오고 저녁 때에는 숨이 통해졌다. 그래서 미음을 끓여 먹여주고 수일간 조리한 후에야 처음으로 정신이 안정되고 사물을 알아보았다. 거주와 성씨를 물으니 역력히 모두 대답하였다. 집이 전라도에 있어 절과의 거리는 백리(百里)가 넘으며, 범에게 물리게 된 것은 초저녁 일이었는데, 절에 도착한 것은 겨우 밤중이었으니 이것을 보면 범의 걸음이 빨라 멀리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이 이 여자를 데리고 그 마을을 찾아가서 여자는 동구(洞口)에 두고, 거짓으로 탁발하러 다니는 행색을 하고서 먼저 그 집을 방문하니, 여자 집에서는 무당을 맞이하여 죽은 혼을 부르고 있었다. 무당이 죽은 귀신이 범에게 잡아 먹힐 때의 고통을 형용하니 부모 친척들이 발을 구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때 딸이 천천히 집에 들어가니 부모가 보고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다가 오랜 뒤에야 알아보고는 서로 안고 통곡하였다. 그리고 그 중을 후하게 사례하여 돌려보냈다. 여자는 그 고을의 양갓집 딸이었으므로 방아찧고 물깃는 천한 일은 해보지 못했으며, 사람들이 예쁜 규수라고 일컬었는데 중이 조리해서 살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가슴을 맞붙이면서도 음란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 자비심을 생각하고 색욕(色慾)을 떠난 참으로 계행(戒行)이 있는 중이라 이를 만하다.
● 권통지(權通之)는 이름이 달수(達手)이다. 일찍이 급제하여 교리(校理)가 되었다. 연산군이 윤서인(尹庶人)의 사당을 세우는 일을 의논할 때, 크게 위엄을 떨쳐서 신하들의 입을 막았다. 그래서 연산군이 하고 싶은 일을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였다. 권통지가 분개하여 의논하기를 선왕(先王)의 뜻이 아니라고 하니 홍문관(弘文館) 사람들도 그 말에 이의가 없었다. 연산군이 노하여 그들을 매질하여 귀양보내고 말았다. 오랠수록 노기가 더 심해져서 홍문관이나 대간(臺諫) 중에 그 의논을 처음 제창한 사람을 극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지난 일을 소급하여 문죄(問罪)하는데 제창한 사람을 지적함이 날로 혹독하였다. 모두들 먼저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겨 죽은 사람의 묘를 파고 시체를 찢게 하고 자기만 구차히 면하려고 하는데, 권통지 혼자만이 스스로 자기가 그렇게 하였다고 복죄(伏罪)를 하여 죽은 동료를 저버리고 자신만 살려고 꾀하지 않아 대간의 먼저 발론(發論)한 자와 함께 형벌을 받게 되었다. 옥리(獄吏)가 불쌍히 여겨 말하기를, “둘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고 한 사람은 사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였다. 대간이 되었던 사람이 옥리의 뜻을 받아들여 홍문관이 대간보다 먼저 발언하였다고 하니, 권통지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들아 너희들이 과연 나를 본받아서 한 일인가.” 하고, 곧 붓을 빼앗아 공술하기를, “불초 신 달수(達手)가 한 짓이니, 구차하게 숨겨서 살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공술을 끝내고도 안색이 변함이 않고, 술을 주니 서서 다 마시고 사형을 받으면서도 평상시와 변함이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처음 권통지는 용궁현(龍宮縣)으로 귀양갔다가 다시 잡혀올 때 영순리(永純里)에 있는 집을 지나다가 가족들과 영결하였다. 그때 내가 함녕촌(咸寧村)에 살고 있어 술 한 병을 들고 가서 술을 권하니, 권통지가 한 잔 가득히 들이마시고는 나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예전부터 간신들이 임금을 부추겨 악을 인도해서 선비들을 죽이도록 한 자들이 자신들을 끝까지 보전한 것이 있는가. 내가 죽지만 눈을 빼서 달아 두고 보게 하라.” 하는데, 말이 강개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다. 권통지가 죽으니 그 미망인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성조(聖朝)에 와서 권통지에게 관작을 추증하고 미망인은 열부(烈婦) 정려(旌閭)를 세웠으니, 절개와 의리가 짝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음성ㆍ모습ㆍ의지ㆍ기개가 훤히 나의 눈에 어른거리니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고 심히 애통할 뿐이다.
● 연산군이 옛날 그 어머니의 폐비 문제를 의논하였던 신하를 추죄(追罪)할 때, 대간이나 시종으로 있던 사람들 중 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고, 여러 날 동안 어전에서 고문을 받았다. 직경(直卿) 홍언충(洪彦忠)도 죄수 속에 있어서 고문을 마치고 업혀 나와 감옥 담장 밖에서 잠깐 쉬고 있을 때, 내가 그의 옷이 피로 물들여진 것을 보고 측은하여 말하기를, “참혹하도다.” 하였더니, 직경이 말하기를, “이것은 홍문관의 물이 든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은 홍문관이 이 사람을 끌어넣은 까닭으로 홍(弘) 자와 홍(紅) 자는 음이 같으며 피빛이 홍색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고문을 마치고 배소(配所)로 다시 갈 때 내가 교외까지 가 보았더니, 직경이 말하기를, “평생에 학문한 화가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나.” 하면서 매우 괴로워하는 빛이 있었다. 내가 농담으로 말하기를, “만일 자네로 하여금 지혜를 없애버리고 학식도 없애버려 마치 향기와 악취를 가리지 못하고 콩과 조를 섞어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라 한다면 자네 그렇게 하겠는가.” 하였더니, 직경이 계면쩍어 하면서, “아니다. 곤란한 가운데서도 사람이 혹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학문 때문이고, 객지에서 곤란하여 주머니가 빌 때 남이 혹 도와주는 것도 학문 때문이고, 섬에 귀양가 있을 때 정신과 혼백이 울렁거리면 그때 문묵(文墨)을 제외하고는 즐길 만한 것이 없으니 학문의 공이 큰 것이다. 내가 선악을 가리고 시비를 말하여 나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아서 세상의 화를 입게 된 것도 진실로 이 학문 때문인 것이다. 또 내가 학문에 힘 입은 것이 저렇게 많으나 병이 되고 죄가 쌓여서 고초를 받고 형벌을 당하는 것은, 내 학문이 병들게 한 것이어서 내 몸에 큰 흠이 있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였으나, 만일 나를 어리석게 하고 나의 지각을 빼앗아 어리석고 둔하여 한갓 먹기만 한다면 서럽기가 마치 하늘에서 떨어져 뒷간에 빠진 것과 같을 것이니, 비록 백 번 넘어지더라도 내 어찌 이것을 취하겠는가마는, 이따금 뒷간에서 빠져나와 하늘 위의 영화를 누리는 것은 예전에 모두 그러하였다. 하늘 위에 있는 자의 위태로움은 뒷간에서 안락한 것만도 못한 것이니 내 어찌 위태로운 것을 가지고 저 편한 것과 바꾸려 하겠는가.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내 몸에 있는 큰 보배보다 더 좋은 것이다.” 하고, 서로 한바탕 웃었다.
● 용재(容齋)가 당시의 여론(輿論)을 거슬렸기 때문에 당시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그를 헐뜯어서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지목하여 대사헌(大司憲)의 직책을 빼앗았다. 당시 한세환(韓世桓) 공이 이조 판서로 있었고 내가 참의로 있었는데, 임금이 급히 오라고 불러서 대사헌을 교대시키라고 하였다. 당시의 화가 어떻게 미치게 될 지 몰라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고, 선비들의 논의도 수군수군하였다. 이조 판서는 조용히 결국 대사헌을 경질하였다. 그러나 관료들의 말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이 일에 언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걱정하거나 근심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으니, 마치 이 일에 관해서는 하나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참판과 내가 서로 눈짓하면서 말하기를, “마음속으로 격동되는 것을 우리들은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판서는 정중하게 침묵만 지키니 정말 우리로서는 따를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한 자리에서 심중이 밝게 통하고 있는 처지라서 마음속으로는 퍽 불만스럽게 여기고 다시 또 의심하기도 하였다. 용재가 관직을 물러나 고향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남은 평생을 지낼 계획을 하였으나, 집에는 식구들을 먹여 살릴 만한 업이 없었다. 판서의 전답이 그 근방에 있었는데, 전답을 관리하는 노복으로 하여금 수확의 절반을 용재 집으로 보내게 하였다. 매년 가을마다 이렇게 하였는데, 다만 물건만 보내주었을 뿐, 단 한 통의 편지도 문안한 적도 없었으며, 또는 그 뜻을 말하여 간곡한 정을 표시한 적도 없었다. 그제야 그의 마음을 알았으니, 구구하게 분개해봤자 아무런 이익도 없으며 오로지 화만 더할 뿐이니, 오직 마음으로 걱정해 주면 되는 것이지 그 밖의 일이나 헛된 말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 여긴 것이다. 그 후에 또 당시의 무리들에게 칭찬을 받기도 하고 배척당하기도 하는 것을 그때마다 적당하게 억눌러 처리하곤 하였으니, 남들은 할 수 없는 일을 공(公)만이 능하였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낭관(郞官)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고 탄핵당하여 물러났다. 남들은 단지 공이 공손하고 신중할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 뿐이고, 그 마음속에는 꿋꿋한 기상이 이러하였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하물며 용재와 동과(同科)에 급제하고 평소에 그렇게 다정한 사이가 아니어서 뇌(雷)ㆍ진(陳) 두 사람의 친밀한 교제처럼 두터운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낭패를 당하여 곤경에 빠지게 되자 능히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덜어서 도와준 것에 있어서랴. 이런 일은 옛사람들한테서나 들을 수 있었고 지금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나는 이 사실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의 사적을 캐려는 사람에게 들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 박생(朴生)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염병에 걸려 10여 일을 위독하게 앓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의 혼이 홀연히 어딘가로 가는데 마치 어떤 아전들이 쫓아와 잡으려 하는 듯하여 도망을 가서 광막한 사막을 지나 한 곳에 이르니 궁전도 아니고 집도 아닌데, 말끔히 소제된 땅이 꽤나 널직한데 단(壇)이 노천(露天)에 설치되어 있고 붉은 난간이 둘러져 있는 것이 마치 창(槍)이 꽂혀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관리들이 그 안에 줄지어 앉아 있고 머리는 소 같고 몸은 사람 같은 야차(夜叉)들이 뜰 아래 벌려서 있었다. 그들이 박생이 오는 것을 보고는 뛰어 앞으로 나와 잡아서 마당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물이 끓는 가마 속에 던져 넣었다. 박생이 보니, 중과 여승, 남녀 할 것 없이 끓는 물속에 섞여 있었다. 박생은 가만히 생각하니, 그 사람들이 쌓여 있는 아래로 들어가게 되면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양손을 솥 표면에 대고 반듯이 누워서 떠 있었다. 한참 있다 야차가 쇠꼬챙이로 그를 꿰어서 땅에다 내 놓았다. 그런데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조금 있다 야차를 시켜 상급 관청으로 보내게 하였다. 큰 궁궐에 이르러 겹문을 들어가니 의자가 설치되어 있고 좌우에 탁자가 있는 것이 마치 지금의 관청과 같았다. 높은 면류관을 쓰고 수놓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 위에 줄지어 앉아 있고 수레와 호위병들의 성대함은 마치 군왕(君王)과도 같았다. 서류 장부들은 구름처럼 쌓여 있고 판결의 도장이 벼락같이 찍혀지고 있었으며 파란 두건을 쓴 나졸들이 책상 아래 엎드려 있다가 문서들을 나른다. 이 엄숙하고 정숙한 장면이 인간 세상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박생을 끌어와 묻기를, “너는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였으며 또 어떤 직책을 맡아 보았냐.” 하니, 박생이, “세상에서 별다른 일은 하지 않았으며 직책은 의국(醫局)에 속해 있었으며 방서(方書)를 출납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였다. 심문이 다 끝나니 관리가 관리들에게 두루 이것을 알렸다. 여러 관리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운명이 다 끝나지 않았으니 올 사람이 아니다. 관리들이 저승 명부를 잘못 살피고서 이런 실책을 한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지.” 하니, 그 중에 한 관리가 거동이 점잖은 품이 마치 우리 선대의 왕 같았는데, 그가 사사로이 박생을 끌고 자리 뒤쪽에 가서, “지금 너에게 떡을 줄 것인데 네가 만약 그 떡을 먹으면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박생이 엎드려 절하고 땀을 흠뻑 흘리고 물러났다. 과연 한 상자의 많은 떡을 가지고 와서는 박생에게 먹으라고 하였다. 박생이 거짓으로 먹는 체하고 몰래 품속으로 모두 집어 넣었다. 머리를 들고 귀를 기울여 대전(大殿) 위에서 의논하는 말을 들어보니 모두들, “이 사람을 쓸 만하니 이곳에 두고 일을 맡겨 봅시다.” 하니, 한 관리가, “운수가 아직 올 때가 아닌데 그릇된 것을 기정사실로 굳혀버리는 것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는가.” 하며, 변론이 왔다갔다 반복되더니 드디어 판결을 내리기를, “돌려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그리고 한 관리가 한 통첩에 도장을 찍는 것을 보았다. 그 통첩에, “박효산(朴孝山)과 윤숭례(尹崇禮)는 당상관(堂上官)의 품계에 올려주고, 서복경(徐福慶)은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시키는 것이 옳다” 하였으나, 박생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박생이 나오려 할 때 우리 선대왕 같은 사람이 비단폭에다 글을 쓰고 구슬함을 열쇠로 잠가 붉은 비단 보자기에 싸서 박생에게 주면서, “너희 나라 군주에게 전하라. 너희 나라 군주의 소문이 대단히 좋지 못하니 내가 정말 무안할 지경이다.” 하였다. 박생이 하직인사를 하고 서함(書函)을 받들고 나왔다.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을 물끓는 가마솥에 던져넣던 곳까지 나오니 처음 체포하던 옥졸이 박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박생이 그 옥졸에게 따지기를, “관에서 이미 나를 놓아 주었는데 네가 감히 마음대로 구속하여 방자하게 못된 짓을 거리낌없이 하는가.” 하였더니, 그 옥졸이 독살스럽게 말하기를, “나는 문을 지키는 사람이다. 관의 증명이 없으면 나가지 못한다.” 하였다. 박생이 서함을 보이며, “이것이 관의 증명이 아닌가.” 하니, 옥졸이, “그것은 문을 나가는 것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관에 가서 물어 보겠다.” 하고 가더니, 한참 있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이미 관의 승인이 있으니 너는 가도 좋다.” 하고는 하얀 삽살개 한 마리를 주면서 털이 많은 그 개를 따라 경계를 나가라고 하였다. 큰 강이 있는 곳에 이르자 삽살개는 날아가는 것 같이 뛰어 건너므로 박생도 몸을 날려 뛰어드니 강 복판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무엇이 받아주는 데 마치 수레에 앉은 것처럼 편안하였다. 그리고 단지 바람 소리 물 소리만 들리고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떠 보니 자기 몸은 자리 위에 누워 있으며 아내와 자식들이 옆에서 울고 있고 친척들이 모여서 막 자기를 염(殮)하려고 모든 것을 갖추어 놓고 있었다. 박생이 정신이 아찔하여 고함치며 물건을 찾으면서, “나의 옥함서를 잃어버렸다.” 하고, 또, “박효산과 윤숭례는 모두 옥관자를 할 것이고, 서복경은 군수의 부절(符節)을 나눠 받게 될 것이니 내가 가서 알려주어야 한다.” 하면서, 문을 열고 달려가려 하였다. 처자들은 그가 헛소리를 하고 미쳐서 달아나는 줄 알고 뭇사람들이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일주일을 지나서야 비로소 생생하게 자기가 겪었던 이야기를 죽 하였다. 대체로 박효산과 윤숭례는 의원이며 서복경은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서자였다. 나라에서 벼슬길에 서자 출신들은 벼슬하지 못하도록 제정하고 있었다. 박생은 또 평생을 서복경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연산주가 특별히 박효산과 윤숭례에게 절충장군(折衝將軍)의 직을 제수하였다. 서복경은 궁녀의 연줄로 훌륭한 반열에 끼이게 되어 안악 군수가 되었으니 그 말들이 모두 증험이 있었다. 옥함서는 흡사 연산군의 주색에 빠지고 음란함을 경계한 말 같으나 내내 무슨 말을 하였는지 알지 못한다. 박생의 이름은 세거(世擧)로 지금은 내의원(內醫院)에서 벼슬하고 있는데, 의술이 아주 정통하다고 세상에 이름이 나 있다. 일찍이 그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상세하여 내가, “그대의 말은 마치 불교에서 세상을 속이기 위한 말과 똑같다. 괴상한 말과 이단을 말하는 것은 군자가 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저 의원들이 관직에 올라 영화를 누리는 것과 서자가 분수에 넘치는 직분을 무릅쓰는 따위는 진실로 혼조(昏朝.연산군)의 문란한 정치였으니, 거기에서 무슨 운수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으리오. 모든 인간의 이득과 손실, 화와 복, 업(業)을 경영하고 구하기를 도모하는 따위는 모두 그 사람의 잘하고 못함, 어리석거나 간사한 데에 달려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생에서 미리 정해진 운수인 것이다. 때가 되어 이 운수가 펴지게 되면, 반드시 신묘하게도 일들이 척척 들어맞아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 운수를 타서 성공하게 하는 것인데, 성공해서 사람들은 이러한 것도 모르고 망령되게 그 사람의 지력이 어떠하다고들 하면서 마음을 피로하게 하고 정력을 소비해서 죽을 때까지도 그치지 않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그러나 성하고 쇠하고 갚고 받는 것이 사람의 선함에 달려있는 것은 정칙이다. 이 정칙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운수라는 것도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저 의원과 서자들이 얻었던 것이 눈에 차지도 않았으며 연이어 그것도 잃고 말았으니, 어찌 함부로 엿보고 훔쳐서 자기 분수를 돌아보지 않은 소치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 강릉(江陵)에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전손(傳孫)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집 담장 사이에 큰 뱀이 구멍을 뚫어놓고 때로 뜰에 나와서 꾸불꾸불 서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이상스러웠다. 이전손이 보기 싫어 지팡이로 때려 쫓아 버렸다. 뱀이 쫓겨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서너 번을 거듭하니, 이전손이 화가 나서 담장 구멍을 파헤치고 기어이 쫓아버려 뱀이 밭 사이 풀을 쌓아둔 무더기 속으로 들어갔다. 이전손이 그곳에 불을 질러 풀무더기를 태워버렸다. 생각하기를 불이 뜨거우면 뱀이 반드시 딴 곳으로 달아날 줄 알았으나 뱀이 그 속에 엎드려 있다가 타 죽고 말았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뭇 뱀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빙빙돌다가 목을 들고 그 불에 타 죽으면서 마치 비분한 뜻이 있는 듯하더니 무려 수백 마리의 뱀들이 불에 들어가 죽었다. 이전손이 그제서야 그 신령스러움을 깨닫고는 놀라고 뉘우쳤다. 이로부터 가산이 날로 줄어들었다. 이전손이 매양 말하기를, “이것은 뱀을 태워 죽인 보복이다.” 하였다. 그 뒤에 이전손이 과거에 급제하기는 했으나 벼슬은 크게 못하였다. 뱀이 비록 독물이지만 그것에도 남이 뺏지 못할 천성이 있어서 큰 뱀은 군장(君長)이고 뭇 뱀들은 신하와 종들인 것이다. 신하 뱀들이 임금의 재난에 와서 죽는 것을 마치 자기 집에 돌아가듯이 쉽게 하니 전횡(田橫)의 의사(義士)인들 어찌 이보다 훌륭할 수 있으리오. 큰 뱀이 죽으면서 달아나지 않은 것은 정말 모를 일이다. 뱀들도 나라를 위해서 죽고 영토를 지키는 의리가 있어서 그러했는가. 아, 관저(關雎)새의 부부와 승냥이와 수달의 부자와 벌과 개미의 군신이 각각 그 한 가지씩의 의리를 지켜 타고난 천성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 되어서 저들 미물보다도 못한 점이 많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송원(松原)의 어떤 선비가 한 산을 얻어 집을 지으려 하였다. 처음 그 터를 닦아 흙을 두어 자쯤 삽으로 파니 흙과 돌 사이에 거북 같은 여러 벌레들이 한군데 엉켜 있는데, 깊이 팔수록 더욱 많았다. 그 벌레들을 모두 잡아 죽이고는 집을 다 짓고서 그곳으로 이사해 갔다. 1년이 못가서 그 선비의 아내가 갑자기 미친병이 나서 귀신 같은 말로 선비에게 말하기를, “네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우리 사는 곳을 빼앗아가며 우리 종자를 모조리 죽였는가. 우리는 땅속의 금돼지라서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데 사람이 도리어 우리를 이렇게까지 몰살시키는가.” 하니, 그 선비가 놀라고 괴상히 여겨 묻기를, “네가 금돼지라면 내가 너희 족속들을 죽인 일이 없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네가 내 아내를 병들게 하니 사실은 너희들이 사람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이다. 내가 너희들의 집을 모두 파헤쳐서 가차없이 다 죽여버릴 것이다.” 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너에게 잡혀 죽은 거북 같은 벌레가 모두 나의 종들이다. 나는 깊이 황천 밑에 살고 있으니 비록 온 나라의 군사들을 다 동원해서 손끝이 닳도록 파헤쳐도 어찌 그 단단하고 두터운 것을 다 통하도록 판단 말인가.” 하였다. 선비가 공손하게 사과하고 말하기를, “저승과 이승이 같지 않으며 깊은 곳과 얕은 곳이 서로 다른데 어찌하여 이다지도 서로 방해를 한단 말이오.” 하니, 그 아내가 말하기를, “이미 우리 무리들을 죽였으니 어찌 다시 용서하겠는가.” 하였다. 말이 끝나자 아내의 병이 더욱 심해져 죽고 말았다. 선비가 두렵고 겁이 나서 가족들을 데리고 이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 되지 않아 병이 식구들에게 퍼져 결국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죽어버렸으니 매우 괴상한 일이다. 옛날 송 나라 장군 조빈(曹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집이 너무 허름해서 자제(子弟)들이 수리하도록 청하였다. 장군이 말하기를, “지금은 한 겨울인 만큼 담장이나 기왓장 사이에 벌레들이 칩거하고 있을 것이니 그들의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어진 사람들의 마음씀이 이러하여야만 옳은 것이다. 그런데 저 선비는 거북 같은 벌레를 모두 다 죽였으니, 하늘이 낸 생물들을 거의 표독(慓毒)스럽게 죽여버렸던 것이 아닌가. 생물들의 원한에 대한 갚음이 이치상 없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수후(隋侯)의 사주(蛇珠)와 공유(孔愉)의 거북과 인(印) 같은 것을 이루 다 거론할 수 없다. 수후(隋侯)가 뱀이 상처를 입은 것을 보고 약을 발라 치료해 주었다. 그 후 어느 날 뱀이 명월주(明月珠)를 물고 와서 보답하였다. 진(晉) 나라 공유(孔愉)가 거북을 샀다가 다시 놓아 주었다. 그랬더니 거북이 왼쪽을 돌아보면서 사라졌다. 공유가 봉후(封侯)가 되어 금구(金龜)를 만들려 했더니 거북의 모양이 삐뚤어지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 그 거북은 흡사 자기가 살려주었던 거북과 비슷하였다.
● 옛날에 한 재상(宰相)이 남도의 관찰사로 갔는데 그는 성품이 몹시 엄격하여 사적인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뭇 고을들이 엄숙한 풍조가 있었다. 화산(花山.안동)의 아리따운 계집이 재상과 정이 꽤 두터웠으나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보였다. 세숫물을 떠오고 소제를 맡아 보는 기생들이 조금만 잘못하여도 용서하지 않으니, 고을 기생들이 모두 걱정하였다. 아리따운 계집이 기생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저 놈의 영감을 한 번 욕보일까 보다.” 하니, 기생들이, “어떻게 욕을 보인단 말인가.” 하고 물었다. 그 계집이, “한껏 술을 마실 때 세숫대야에다 술을 가득 부어서 욕을 보이겠다.” 하니, 기생들이, “네가 정말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들이 술잔을 받들어 너의 장수를 빌겠다.” 하였다. 그 계집이, “두고 보기만 하라.” 하였다. 봄날 밤에 백옥 같은 달이 휘장 사이로 보여 잠을 자다 잠깐 열고 보니, 꽃 그림자는 창문에 걸려있고 원앙 금침은 훈훈하게 따스하여 정과 경치가 엉켜 있었다. 그때 갑자기 창밖에서 가벼운 신발 소리가 나고 또 가벼운 기침 소리도 들렸다. 기침을 하다가도 억지로 참고 하는 것이 마치 주저주저하며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재상이 그 계집을 흔들어 깨우고, “밖에서 소리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니 계집이 귀를 기울여 듣더니, “꼭 우리 어머니 기침 소리 같습니다.” 하였다. 재상이, “한 번 나가보라.” 하여 계집이 나가서 한참 있다가 돌아와 문을 닫고, “늙은이도 참 쓸데없는 일을 하지.” 하고는, 원망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중얼거리는 폼이 마치 성난듯이 보였다. 재상이 무슨 영문인지 캐물었다. 계집이 고개를 숙이고 수줍어 하는 태도로, “무식한 시골 노파라 사또에게 아뢸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다그쳐 묻자, 천천히 말하기를, “시골에서는 봄과 가을이면 신을 모시는 풍속이 있어서 무당들이 이웃들을 모이게 하는데 마침 집에서 담근 술이 아주 좋습니다. 관찰사께서 맛볼 만하지는 못하지만, 밤이 아름답고 관찰사께서도 심심하기도 하시겠고 아전들도 모두 흩어져 고요하고 인적이 없으니, 사또에게 한 잔 올렸으면 하는 것이 천한 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진심이지만 일이 매우 외람된 것 같기에 꾸짖어 보냈습니다.” 하였다. 관찰사가, “괜찮다. 네가 어찌 그리 싫어하는가. 빨리 가서 데려와라. 빨리 가서 데려와.” 하고 재촉하였다. 계집은 사양하는 체하여 사또의 뜻을 더욱 굳게 하였다. 계집이 거짓으로 나가 늙은 어미를 부르는 척하고 낮은 소리로 사또에게 말하기를, “들고 온 것이 단지 한 개의 술통뿐이고 술잔은 없습니다. 밤이어서 그릇은 모두 부엌에 치워 두었습니다. 지금 옥잔을 꺼내려 하면 시종들이 모두 일어나게 될 것이니 남들을 번거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 사온 깨끗한 세숫대야가 탁자 위에 있습니다. 그렇게 더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는 너무 공손하지 못하오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관찰사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질그릇에 탁주라는 말도 있는데 이러한 시골이고 보면 놋 세숫대야가 질그릇 탁주보다도 사치스럽다.” 하고는 술을 따르라고 재촉하였다. 두 차례 마시고 나서 하는 말이, “옥동서(玉東西)와 금파라(金叵羅) 같은 잔들보다도 좋다.” 하고, 이어서 계집에게, “제발 누설하지 말라.” 하고 부탁하였다. 물론 이 계집이 일찍부터 계획한 일인 줄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기생들은 개미떼처럼 벽에 붙어서 숨을 죽이고 창문을 통해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 그 고을 원이 어떤 일로 책망당할 일이 있어 성적 심사에서 하(下)의 하등급을 받게 되었다. 원이 이 계집을 불러 말하기를, “만약 네 힘으로 나의 등급 문제를 해결해 주면 한 살림 넘도록 톡톡히 보답하마.” 하니, 계집이 사례하며, “마음을 다해 보겠나이다.” 하였다. 심사가 있던 날 저녁에 계집이 문틈으로 몰래 듣고 있었더니, 과연 그 고을 원을 하등(下等)에 두려고 하는 것이었다. 계집이 병풍과 휘장 사이에서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면서 마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형상을 하였다. 관찰사가 몰래 변소에 가는 척하고 나와서 계집의 등을 쓰다듬으며, “무슨 병이 그리 심하지.” 하고 물으니, 계집이 노하여 답하기를, “병이 아닙니다. 우리 고을 원이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것이 서러워서입니다. 옛말에도 있으니, ‘사람을 사랑하면 그 집 지붕의 까마귀까지 사랑한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우리 고을 원님이 하등(下等)이 되는 것을 보았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어지신 어른이 한결같이 이 천첩을 보아서라도 한번 봐주시지 않으시렵니까.” 하고, 관찰사의 귀에 대고 속삭이기를, “일이 위급하니 다시 풀어 놓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천첩의 생사가 여기 달려있나이다. 천첩이 다행하게도 사랑하시는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뒷날까지 길게 누릴 단 한 번의 혜택도 주지 않으시렵니까.” 하니, 관찰사가 다시 한 번 생각하며 말하기를, “이미 보좌관들이 결정한 것이니 어찌 한단 말인가.” 하였다. 계집이 울며 원망하고, 이윽고 두 다리를 관찰사의 어깨에 올려놓고 목을 조르면서, “늙은 이에게 형틀을 씌운다.” 하니, 관찰사가 웃으며, “형틀치고는 좋구나.” 하며, 승낙하고 나가서 그 고을 원을 중(中)의 중등급을 매겼다. 관찰사는 후일 정승에까지 올랐으며 풍채와 도량도 상당히 있었다. 심하구나. 요염한 여자가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조그마한 여자가 허다하게 간교한 꾀를 감추고, 마치 벌레가 물건을 갉아 먹듯이 하여 매끄러운 살결은 뼈까지 녹이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단한 사람을 솜처럼 약하게 하고 강한 사람을 기름처럼 부드럽게 하고, 엄한 사람을 흐리멍덩하게 하고, 힘써 일하는 사람을 완만하게 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우둔하게 하며, 명석한 사람을 혼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자애로운 사람은 자애를 잃게 되고, 효도하는 사람은 효도를 잃게 되며, 충성을 해치고 신의를 빼앗아버리며, 친우을 해치고 형제간의 우애를 끊어버리는 것이 모두 계집의 요염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저 황하를 뛰어 건너는 용기, 눈을 후벼내는 횡포, 칼날 앞에 맞닿아서도 눈을 잠깐도 깜박거리지 않는 것은 모두 기개가 심히 장한 것이고, 백만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나 천자를 보필하는 재상들은 말하고 웃으면서 사람을 죽여도 사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위엄이 매우 무거운 것이다. 그러나 모두 침상의 베갯머리에서 달콤한 부인의 말에 제재를 받고 마음이 달라져서 자신을 해치고 집안을 망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의리와 예절을 지키며 사욕(邪慾)을 버리지 못하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모든 천지 만물은 일정한 운수가 없는 것이 아니니, 진실로 지혜나 어떤 계획으로 이것을 바꾸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힘을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이 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니 스스로 끝까지 밀고 나아가서 궁진함이 없는 것도 이치인 것이다. 공자께서 운명에 관해서는 드물게 말하였고, 정자(程子)가 소강절(邵康節)의 술수를 배우지 않았던 것은 일정한 운수와 운명이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노력이 폐해지는 것을 싫어해서이다. 말하기를, “명(命)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다.” 하였고, 또, “명 아닌 것이 없으나 순순히 그 정당한 명만을 따르는 것이다.” 하였으니, 진실로 일정한 명이 있는 것이다. 말하기를, “천도(天道)는 선한 자에게 복을 주고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린다.” 하였고, 또, “화와 복은 자기가 스스로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으니, 이 말은 화와 복이 옮겨가는 이치를 말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교만한 것은 손해를 초래하고 겸손한 것은 이익을 받게 된다.” 하였으니, 곱하거나 제하고, 가고 오는 이치는 또 그림자와 메아리가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강절(卲康節)의 원회(元會)ㆍ운세(運世)의 학설과 모란이 성하다가 없어진다는 시초점은 부정공(富鄭公)이 서경(西京) 유수로 있을 적에 모란이 만발해 있었다. 그때 문로공(文潞公) 사마단명(司馬端明)과 소선생(邵先生)을 불러 함께 모였다. 앉았던 손님이, “이 꽃이 언제 모두 시들겠습니까.” 하니, 소선생이 시초점을 치고 말하기를, “이 꽃들은 내일 오시(午時)에 모두 없어질 것이다.” 하였다. 다음날 또 모였는데 꽃은 아직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갑자기 말들이 마굿간에서 뛰어나와 서로 물고 차고 날뛰는 바람에 꽃밭 안의 꽃이 모조리 떨어지고 말았다. 크게는 천지개벽에서부터 작게는 한 포기 풀이나 한 송이 꽃의 성쇠에까지 모두 그 운수를 피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유방(劉邦)이 패(沛)땅에 들어갔을 때 돈 한 푼 없었으나, 여공(呂公)이 그가 천자가 될 것을 알았으며, 위청(衛靑)은 남의 집 노예로 곤욕을 당하고 있었으나 어떤 죄인이 그가 봉후(封侯)가 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유방(劉邦)이 패령(沛令)을 축하하면서 거짓말을 하기를, “하례금 만관(萬貫)이 있으나 일전(一錢)도 가지고 오지 못했다.” 하니, 여공(呂公)이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며, “저 사람이 귀하게 될 것은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위청(衛靑)은 어려서 평양후(平陽侯)의 집 종으로 있었는데, 어떤 죄인이 위청의 관상을 보고 말하기를, “귀인이다. 관직이 봉후(封侯)에 이르겠다.” 하였다.조후(條侯)와 등통(鄧通)의 부귀는 세상을 떨쳤으나 반드시 굶주려 죽을 것을 알았다. 허부(許負)가 주아부(周亞夫)의 관상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삼시(三時)로 후(侯)가 될 것이며 팔시(八時)로 장상(將相)이 될 것이나, 그 9년 만에 굶어 죽을 것이다.” 하였다. 문제(文帝)가 등통(鄧通)의 관상을 보게 하였더니, 관상 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가난하여 굶어 죽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등통을 부자로 만들어 주는 것은 나에게 달린 것이다.” 하고, 동산(銅山)을 주어 스스로 돈을 만들도록 해 주었으나, 그 후 관에 몰수되어 남의 집에 기식(寄食)하다가 죽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추측하여 알 수 있는 일이겠는가. 배진공(裴晉公)은 남모르는 공덕이 남에게 미쳐 전도가 만리였으며, 백중령(白中令)은 보물 혁대를 돌려주어서 직위가 신하 가운데 제일 높았다. 배도(裴度)는 형상이 왜소하였다. 관상 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귀하게 되지 않으면 굶어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런 후에 하루는 향산사(香山寺)로 놀러 갔는데, 어떤 부인이 자기 부친이 죄를 입고 있어서 옥대(玉帶)를 구하여 요직에 뇌물로 쓰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것을 난간에 걸어 둔 채 잊어 버리고 갔다. 배도가 이것을 주워 돌려 주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관상 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숨은 덕이 남에게 미쳤으니 전도가 만리입니다.” 하였다.
●백중령(白中令)은 과거에 여러 번 낙제하였다. 호로생(葫盧生)을 찾아가 운명을 물었더니 호로생이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후에 한 부인이 옥대를 잃어버린 것을 보고 공(公)이 지키고 있다가 부인에게 돌려 주어 그것으로 뇌물을 써서 그의 남편을 형벌에서 구출한 것이다. 공이 다시 호로생을 만났더니, 호로생이, “요즈음 숨은 덕이 있사오니 직위가 지극히 높아지실 것입니다.” 하였다.손숙오(孫叔敖)가 머리가 두 개 달린 뱀을 묻어주고, 우공(于公)이 옥사를 다스려 자신이 번창하게 되고 후손들이 부유하게 된 따위는 반드시 번영의 보답이 있었던 것이고, 손숙오는 머리가 두 개 달린 뱀을 묻어주어 결국 초(楚) 나라 정승이 되었고, 우공은 옥사를 다스리는데 숨은 덕이 많았기 때문에 그 아들 정국(定國)이 승상이 되었다.상군(商君)이 여관에서 보답받은 것이나 장돈(章惇)이 집을 빌리다 앙갚음을 당한 것들은 상군이 도망쳐서 국경 근처에까지 가서 투숙하려 하니, 여관집 주인이 말하기를, “상군의 법에, 증명이 없는 사람을 투숙시켰다가는 죄를 받습니다.” 하니, 상군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 법을 만든 폐단이 이렇게 심함 것인가.” 하였다.
● 소자유(蘇子由.소식)가 뇌주(雷州)로 귀양갔을 때 관사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드디어 민가를 빌려 있게 되었다. 그러자 장돈이 이것을 강탈한 것이라고 하여 그 사람을 추궁하였더니, 빌려준 문서가 명확하여 더 추궁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두 해도 못 되어 장자후(章子厚)가 뇌주로 귀양살이 와서 민가에 자기가 있을 집을 구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전번 소공(蘇公)이 왔을 때 장승상(章丞相) 때문에 우리 집이 망할 뻔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빌려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들에 대한 보답이 이러하였다.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부절(符節)처럼 정확히 맞다. 그러니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는 이치가 과연 거짓이겠는가. 사물이 극도로 성하면 반드시 쇠해지는 것이니, 꺼져 없어지고 찼다가 비게 되며, 나아가고 물러나며 쇠진하고 성장하는 이치가 더욱 뚜렷하게 눈앞에 있는 것이다. 음양(陰陽)과 한서(寒暑)가 번갈아가며 나타나고, 풀과 나무의 꽃이나 열매가 번갈아가며 바뀌어가는 것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양지 쪽의 나무와 음지 쪽에 자라는 나무를 보면 꽃피는 시기가 현격한 차이가 난다. 양지 쪽의 꽃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도 남쪽 가지의 꽃봉오리가 가장 좋게 되는데, 이것은 훈훈한 바람과 따듯한 기운이 그 발육과 성장을 돕기 때문이다. 이른 봄날에 온갖 꽃들보다 먼저 피는 것이 찬란하여 귀하기 짝이 없으니 이것을 보면 조물주가 흡사 편파적으로 복을 내린 것 같으나, 그것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은 반드시 먼저 핀 것부터 시작하여 앙상하게 가지를 드러내고 일찍 화를 당하여 깡그리 병이 드는 것이다. 저 음지에 있는 나무는 찬비와 눈에 꺾이지 않음이 없고 추워서 얼어 붙을 때도 별로 구애되지 않는 것 같다. 이러한 때에도 꽃을 간직하고 피게 하니 그 정기가 단단하고 오래가며 먼 곳까지 향기를 피우게 된다. 그래서 이른 꽃들의 흔적이 없어진 뒤에 관상(觀賞)하게 되니, 이 때에는 누가 때를 만나고 못 만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찌 조물주가 저쪽이나 이쪽을 편애해서이겠는가. 자연의 이치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지금의 호사가(好事家)들은 꽃을 심고서 꽃이 피기를 재촉하여 흙집을 만들고 온돌을 만들어 불을 때서 따뜻한 물을 뿌려서 증발시켜 미세한 물방울을 만들어 줌으로써 엄동설한에 밖의 날씨는 추운데도 요염한 꽃이 터져나와 피게 한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기운을 얻어서 피는 꽃이라, 꽃 수술이 단단하지 못하여 마치 얼음을 깎아 만들고 눈을 뭉쳐서 만든 것처럼 잠깐 동안 형색(形色)을 빌렸다가 이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겨우 흙집 밖으로 나오게 되면 그만 바람과 햇빛에 노출되어 얼고 시들어 뿌리까지 말라 죽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꽃 자체의 성질을 무시하고 교묘하게 사람의 힘을 불어 넣어 인력(人力)으로 조화를 부려서 자연의 힘을 잠깐 동안 빼앗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일찍이 바람과 구름을 타고 일월(日月) 같은 권세에 의지하여 평민이 갑자기 귀족으로 변하여 이름과 지위가 빛나게 되는 것은 마치 양지쪽의 나무와 같은 것이며, 힘과 노력을 쌓아서 재주와 명망을 몸에 지니고, 고생과 가난을 수없이 겪은 후 마지막에 가서 큰 영화를 누리는 것은 마치 음지 쪽에서 자라는 나무와 같은 것이고, 자기의 분수를 넘어서 어떤 일을 도모하거나 잘못된 것에 의지하여 외람되게 그릇된 것을 취하고, 함부로 덤벼서 영화를 누렸다가 이내 망해 버리는 것은 마치 토실의 꽃과 같은 것이다. 지위를 비록 부정(不正)하게 얻은 것이 아닐지라도 갑자기 얻게 되면 반드시 찼다가도 비워지는 재앙을 당하는 법인데, 하물며 정도(正道)가 아닌 방법으로 얻고서도 그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여 교만과 방자함으로 재촉하는 무리들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고금(古今)을 두루 살펴보면 모두 각기 분수가 있는 것이다. 근래에 박평성(朴平城)ㆍ유청천(柳菁川)ㆍ성창산(成昌山)은 모두 왕실(王室)을 돕고 백성들을 위급한 상황에서 구제한 공로가 국가에 있어서 죄수들까지도 그들의 은택을 입고 있으니, 이 사람들이 융성한 총애를 받는 것이 마땅하며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람을 살려주면 귀신도 돕는 법이므로 오래도록 영화를 누려야 할 것인데, 6ㆍ7년이 못 되어 모두들 청년으로 요절하고 오래도록 나라의 영화를 누리지 못하였으니, 정말 사람들의 의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늘이 사람에게 주는 분수는 모두 완전하지 않는 것이니, 어찌 한 번 이지러지면 한 번 가득 차게 되겠는가. 이것이 만족스러우면 저것은 손해가 있는 법이고, 부귀가 갑자기 극에 이르면 그 한계는 끝이 있는 것이니, 분수가 이 이상 넘어설 수 있겠는가. 일년 4계절도 차례가 있어서 공을 이룬 것은 물러가듯이 큰 일을 성공시키게 되면 물러가야 하는데, 만약 다시 기대한다면 천도(天道)는 도와주지 않는 것이다. 이윤(伊尹)은 총애와 이익으로 성공을 한 것이 아니며, 장량(張良)은 봉후(封侯)를 사양하고 녹(祿)을 피하였으니, 그 사람들의 뜻을 알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기회를 살펴 세력 있는 사람과 결탁하여 여우처럼 덤비고 원숭이처럼 외모만 꾸미고서 번영과 실패가 입에 달렸고 승진과 침체가 그들 마음대로 되며 세력을 끌어다가 자기 것으로 삼고는 오래오래 누릴 것이라 하여 아주 거만하다가 결국은 그들의 처지도 한 바탕의 웃음으로 변하고 마는 사람들이 있어서랴. 이런 사람들은 정말 음란한 자에게 화(禍)를 주는 천도를 몰랐던 것이다. 말없이 정해져 있는 운수가 눈도 미쳐 깜짝할 사이도 없이 귀신의 벌과 사람의 벌이 한꺼번에 무더기로 오고 떼로 닥치는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전철(前轍)을 밟아 전복되고 마는 것과 같으니 정말 한숨지을 일이다. 근래 어떤 선비가 있는데 사람의 생년 월일 시(生年月日時)를 추산하여 그 사람의 화와 복 단명과 장수를 말하는데, 틀리는 경우가 매우 적었다. 어떤 때는 재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것으로 반드시 복이 크게 올 것입니다. 축하드립니다.” 하고, 어떤 때는 영화를 누리는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것이 재난이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따져 묻기를, “운수가 꽉 막힌 것이 어찌 길하며 형통한 것이 어찌 흉하게 되겠는가. 무슨 그런 되지도 않는 말을 하는가.” 하니, 그 선비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성한 것은 쇠퇴해질 시초이고, 쇠퇴한 것은 성해질 단서로, 사물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하였다. 사람이란 반드시 먼저 변란을 당하고 그 후에 향락을 누려야만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번영하는 것은 혹 하늘이 그 사람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러는 것도 있지만 반면에 하늘이 그 사람에게 화를 입히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고난을 많이 겪는 것은 그 후에 복이 올 기틀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에게 그의 분수에 넘는 번영이 없다면, 어찌 종족을 멸망시키는 화가 있겠는가. 사람이 두려운 마음으로 욕심을 참아내지 못한다면 어찌 위대한 사람이 되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영달하는 사람을 보면 모두 ‘복을 받았다.’ 하고, 아주 불운한 사람을 보면 모두 ‘화를 입었다.’ 하는데, 이것은 미혹된 것이다. 저 선비 같은 사람은 훌륭한 점장이라 할 수 있으니, 화복의 기미가 얽히고 섥힌 묘리와 저 환난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게 된다는 뜻에까지 두루 통했던 것이다.
● 성은 윤씨이고 직함은 첨정(僉正)인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성질이 방탕하여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았다. 술을 즐겨 마셨으며 취하면 큰 소리로 옆에 앉은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려 비록 사람들의 숨겨진 결점이라도 숨기는 것이 없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간혹 견딜 수 없는 일도 있었으나, 그 말이 모두 농담이고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어서, 그저 농담으로 넘기고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의 농담은 생각에서 나왔고 해학이나 풍자도 섞여 있었다. 또 자기의 용기를 믿고서 아첨하거나 굽히지도 않으니, 세상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곧은 사람이라고 지목하였다. 이 때문에 환난을 면하였던 것이다. 그때 아주 젊은 세력가로 한(韓)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바야흐로 그의 재주가 발휘되어 모든 사람들은 선동하여 사헌부와 홍문관에서 팔을 걷어 부치고 당시의 여론을 올리고 내렸으며, 하늘까지도 열고 닫을 듯이 그의 칼끝과 칼날이 닿는 곳은 쇠와 돌까지도 부서질 지경이며, 한 번 숨을 불어주면 썩었던 나무에도 꽃을 피울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한씨의 부친도 농기구를 팽개치고 초가집을 뛰쳐나와 두둑한 봉록을 받는 지위에 올랐다. 그들은 세력을 빌려서 기염을 토하며 세상의 문벌들을 능가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발걸음도 조심할 정도였다. 하루는 윤첨정이 술병을 가지고 흥인문(興仁門.동대문) 밖까지 손님을 전송하였다. 한씨 부친의 직책은 서울 네 군데 산의 소나무를 지키는 것이었는데, 때마침 산을 지키는 나졸들을 길가의 인가(人家)에서 점검(點檢)하고 있었다. 윤첨정은 비록 한씨 부친과 안면은 없지만 자기를 따라온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그의 집으로 가서 한씨의 부친을 보고 말하기를, “나에게 한 병 술이 있으니 함께 마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고는 아이들을 불러 잔에 가득 따라 권하고, 잔을 비우는 대로 따라 주었다. 한씨의 부친은 비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거절할 수는 없었다. 윤첨정이 거기다 조소로 한씨 부친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 농락하기 시작하였다. 왼손으로는 술잔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귀를 당기거나 무릎을 치면서 온갖 모욕을 가하고 한씨 부친의 은밀한 곳을 마구 건드렸다. 한씨 부친은 안색이 의기소침해지고 기운이 없어 숨이 끊어져 곧 죽을 것처럼 되어 엎드려 공손히 복종하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였다. 이래서 윤첨정이 노래하라 하면 노래하고, 춤추라 하면 춤추고, 또 네가 아무개의 애비인가 하면 예 그렇습니다 하고, 너의 성이 한(寒) 자인가 하면 예 그렇습니다 라는 식이었다. 한(韓)과 한(寒)은 음이 같은 것으로 그들의 성질이 차갑고 독살스럽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온갖 모욕을 주는 대로 한씨 부친이 응대하느라 피로하여 땀이 물처럼 쏟아졌다. 그러자 윤첨정을 따라 갔던 사람들이 옆에서 힘껏 말리니, 윤첨정이 그제서야 한바탕 웃고 나가버렸다. 그 다음날 한씨의 아들이 이 말을 듣고 대단히 노하여 윤첨정을 논죄하여 처벌하려고 하니, 그는 본래 미친 사람이라 의논이 되지 않았고, 형벌로 다스리려 하였으나 또 그 말들의 시비를 가리기 어려웠으므로 하는 수 없이 한씨가 윤첨정을 따라 갔던 사람들에게 감사하면서, “그대들이 아니었던들 우리 아버지가 위태할 뻔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은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그리고 공경 대부들까지 윤첨정의 얼굴을 한 번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윤첨정은 또 왕족인 길안정(吉安正)과 같은 마을 사람으로 그와 교분이 있었다. 길안정의 아들 정숙(正叔)은 그 당시 세력가들과 아주 친밀하였으므로 당시의 세력가들이 그를 유향(劉向)처럼 추대하였다. 윤첨정이 길안정을 만나 그의 목을 가리키면서, “슬프다, 네 목이여. 너에게 그런 아들이 있으니 네 목이 어찌 보전될 것인가.” 하였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당시 세력가들이 패망하고, 길정숙은 안처겸(安處謙) 등과 반역을 꾀했다 해서 주살되었다. 윤첨정의 말이 비록 농담이었으나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 당시의 사대부들은 당시의 세력파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비록 마음속으로는 울분이 있었으나 모두 무릎을 꿇고 아첨하여 조정이나 재야(在野)가 모두 벙어리로 지냈는데, 저 한 사람의 미친 선비는 남의 잘못을 마다 않고 바로 지적하였으니, 이런 것을 두고 공자 문하에서는 말하기를, “차라리 광자(狂者)와 견자(狷者)를 얻는 것이 더 좋다.” 한 것인가.
● 진산(晉山)에 강(姜)씨인 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과거 보러 서울에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책을 짊어진 짐꾼 한 사람과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초재[草岾]를 넘다가 중도에 날이 저물었다. 산은 깊고 숲은 빽빽하였으며 호랑이 발자국이 길 여기저기 나 있어서 강씨는 무서워서 어리둥절하였으며, 사방을 돌아보아도 투숙할 만할 곳이 없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얼핏 보니, 한 동굴의 그윽한 바위 사이로 흡사 등불 그림자 같은 빛이 있는 것을 보고서 사람 사는 곳인 줄 알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 쪽으로 가 보았다. 동굴이 마치 집과 같는데 초목이 빽빽하고 그 앞은 가시 울타리를 만들어둔 것이 황폐하여 사람의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 늙은이가 굴안에 홀로 앉아 있는데 모습이 매우 작아보였으며 바위 쪽에 은은한 빛이 반사되어 머리카락까지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선비가 마음속으로는 이상하게 여겼으나 이러지저러지도 못하여 하는 수 없이 몸을 맡겨 쉬어 가기를 청하니, 그 늙은이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묻기에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나그네의 하룻밤 잠자리를 아껴서 하는 말이겠습니까마는, 나에게는 장성한 아들 셋이 있어서 산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곧 돌아올 때가 되었습니다. 혹시 그들을 거스릴까 염려되오니, 조심하여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비가 무서워하면서 그곳을 나왔으나, 밤은 깊고 하늘은 어두워 방향을 알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숲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자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새벽을 기다렸다. 조금 후에 갑자기 산골짜기에서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나무와 풀이 쓰러지며 무엇이 내려왔다. 선비가 숨을 죽이고 개미처럼 엎드리고 살펴보니, 수레의 굴대 만한 세 마리 큰 뱀이 굴속으로 들어가더니, 곧 세 사람의 장부(壯夫)로 변하고 늙은이 앞에 줄지어 앉았다. 늙은이가 일이 잘 되었는지를 일일이 물으니, 첫째와 둘째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는데, 셋째는, “잘 되었습니다.” 하고, 마치 사람을 물어뜯고 사람의 혈기를 빨아 먹은 공을 말하는 것 같았다. 늙은이가, “무엇이 잘 되었단 말이냐.” 하고 물으니, 셋째가 말하기를, “산길과 마을 길을 가로질러 갔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용궁현(龍宮縣)의 집들이 조밀한 곳으로 들어가 우물가 창포밭 속에 도사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더니, 그 고을에서 우두머리쯤 되는 관리가 마침 밤에 술에 취하여 목이 말라 물을 찾고 있는데 한 여자가 물항아리를 이고 나왔습니다. 그때 제가 그 여자의 발꿈치를 물어서 그녀의 혈기를 실컷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하였다. 늙은이가 놀라서 말하기를, “너는 왜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다 죽을지도 모른다.” 하므로 “왜 그러십니까.” 하니, 늙은이가, “고을에서 우두머리 관리라면 그는 구해서 못 얻을 것이 없다. 약을 찾고 재액을 퇴치하기 위해 반드시 극도로 노력할 것이니, 만약 정월 첫 해일(亥日.돼지날)에 만든 참기름을 얻어 끓여서 그 상처에 바르고, 또 그것을 낫자루 구멍에 발라서 울타리 어중간쯤에다 그것을 꽂아 두면 우리들은 다 죽고 마는 것이다.” 하고는, 오래도록 한탄하였다. 선비가 가만히 들어 두었다가 용궁현으로 곧장 달려가서 그 여자 집을 찾아서 물어보았다. 과연 여자가 밤에 물을 긷다가 뱀에 물려서 지금 앓고 있었으므로 선비가 산에서 들은 이야기를 낱낱이 알렸다. 그때는 2월이라 정월이 지난 지 오래되지 않았다. 마침 관리 집에 정월 해일(亥日)에 짠 기름이 아직도 병에 조금 남아 있었다. 그것을 선비의 말대로 바르고 또 재액을 퇴치했다. 그리고 사람들과 그 굴에 가 보았더니 네 마리의 큰 뱀이 서로 베고 엉켜서 죽어 있었다. 여자의 통증도 얼마 되지 않아 나았다.
● 천 년 묵은 정기가 사람 모습으로 변해서 바위에 비추는 것이 야광주(夜光珠)가 아닐까. 내가 살고 있는 이웃에 재남(在南)이란 선비가 있어 그 일을 자세히 듣고서 그 방문(方文)을 전해주었는데, 꼭 정월 해일(亥日)에 기름을 짜서 약으로 간직해 두었다가 뱀에게 물린 마을 사람들에게 주었더니 낫지 않는 이가 없었다. 뱀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판별할 수 없었으니, 뱀굴을 찾아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약이란 모두 상극성(相克性)을 지녔으니, 의원들의 말에 생선가시가 걸린 데는 어망(魚網) 태운 재를 쓰고 말에게 물린 데는 말채찍 태운 재를 쓴다는 것으로, 이런 종류는 매우 흔하다. 돼지가 뱀을 잡아먹기 때문에 뱀은 돼지를 가장 두려워한다. 뱀이 해일(亥日)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일까. 옛적 손오(孫吳.중국 삼국 시대의 오 나라) 시대에 영강(永康) 사람이 큰 거북 한 마리를 잡아 오왕(吳王)에게 진상하려고 커다란 고목에다 매어 두었다. 그런데 밤중에 그 나무가 거북을 불러 말하기를 “고달프겠구나. 거북아, 어쩐 일이냐.” 하니, 거북이 대답하기를, “내가 삶아 지려면 남산의 나무를 다 써도 안 될 걸.” 하였다. 나무가 말하기를, “제갈원손(諸葛元遜.제갈각)은 박식한 사람이니, 반드시 그 일을 도와줄 걸. 만약 나 같은 것들을 구하게 한다면” 하니, 거북이, “너무 말을 많이 하지 마라. 화가 네게도 미치게 될 것이니.” 하자, 나무가 잠잠했다. 거북을 가져오니 손권(孫權)은 삶으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나무를 때도 여전히 말을 지꺼려댔다. 제갈각(諸葛恪)이 말하기를, “그럴 게다. 묵은 뽕나무라야 삶기지.” 하니, 거북을 진상한 자가 거북과 고목끼리 주고 받은 얘기를 말했다. 손권은 즉시 그 나무를 베어와 거북을 삶게 했더니 즉시 익었다. 그 뒤로 거북을 삶을 때는 뽕나무를 쓴다고 하니 앞에서 말한 일과 매우 비슷하다. 거북과 고목이 제갈원손의 박식함을 헤아려 알고, 늙은 구렁이가 능히 우두머리 관리의 재액 퇴치 방법을 짐작하였으니, 어찌 지혜롭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리 비밀스러운 말도 몰래 엿듣는 이가 있다는 교훈을 지키지 않아서 모두 화를 당했으니, 말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됨이 이와 같구나.(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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