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서화평론’ <15> 매창(梅窓) 조지운(趙之耘)의 화첩(畫帖) 뒤에 쓰다

2018. 3. 5. 19:16美學 이야기



       

조선시대의 서화평론’ <15> 매창(梅窓) 조지운(趙之耘)의 화첩(畫帖) 뒤에 쓰다
큐레이터 이택용
2011년 10월 30일 [경북문화신문]

   ‘해설 : 서계 박세당선생은 창강 조속의 아들 매창 조지운의 그림에 대하여 붓과 먹물로 하얀 종이에 그린 그림은 맑으며 깨끗하고, 필력이 힘차고 뛰어나서 그 풍류가 천고에 빛날 정도라면서 그림을 칭찬하고, 죽어서 보지 못하니 아쉽다고 말하고 그림을 그릴 적에 고심하여 구상한 적이 없고 붓을 잡으면 곧바로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불똥이 튀고 번개가 치듯 거침없이 이리저리 휘둘러 빠르기가 마치 신과 같다고 자랑했다. 즉 짙고, 옅음과 굴고, 가늠이 제각각 잘 조화되게 그렸다고 말했다.




-조지운(趙之耘)의 화첩(畫帖) 발문-


   매창(梅窓) 조지운(趙之耘)이 평소에 붓과 먹물로 하얀 종이에 그린 그림은 소쇄(瀟灑)하고 주일(遒逸)하여 그 풍류가 천고(千古)에 빛날 정도인데, 다만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나는 조지운(趙之耘) 군이 지은 “옥축(玉軸)으로 갈무리한 그림은 속절없이 보배롭고, 술동이에 남은 술은 영영 줄지 않는다.”라는 시(詩)에 곡(哭)하노니, 이것이 조지운을 아는 이들이 깊이 슬퍼할 바이다.


조지운은 그림을 그릴 적에 고심하여 구상한 적이 없고 붓을 잡으면 곧바로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불똥이 튀고 번개가 치듯 거침없이 이리저리 휘둘러 빠르기가 마치 신(神)과 같았다. 그런데도 농담(濃淡)과 추세(麤細)가 제각각 알맞았으니, 단번에 백장의 종이에 붓을 휘둘러 쓴 당나라의 승려 회소(懷素)의 신묘한 초서(草書)가 전대(前代)에 명성을 독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 하겠다.


이 화첩은 평산인(平山人) 신확(申瓁)이 수장하고 있는 것인데, 나에게 그 만년의 농필(弄筆)이 이와 같았던 것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매상숙조도(梅上宿鳥圖)’



경북문화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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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之耘 1637(인조 15)~?

조선(朝鮮, 1392~1910)의 문인화가(文人畫家).

자(字)는 운지(耘之), 호(號)는 매창(梅窓)⋅매곡(梅谷)⋅매은(梅隱), 본관(本貫)은 풍양(豊壤).

   문인화가 조속(544)의 아들로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아버지의 화풍(畫風)을 이어받아 수묵사의(水墨寫意) 화조화(花鳥畫)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묵매(墨梅, 수묵화의 매화)와 영모(翎毛, 새와 짐승 등을 소재로 그린 그림)를 잘 그렸다. 묵매 그림에서는 어몽룡(309)의 영향이 보인다.

   능참봉(陵參奉)으로 있을 때 우의정(右議政) 허목(許穆, 1595~1682 조선의 학자이며 문신)의 청으로 부채에 그림을 그려 준 적이 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노론(老論)이 그를 비난하자 그 뒤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에 실려 있는 묵매를 잘 그려 이 때문에 중국에 다녀왔다.’고 하는 [해동호보(海東號譜)]의 단편적인 기록을 통하여 그가 뛰어난 화재(畫才)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으로 [매상숙조도(梅上宿鳥圖)](56.3×109cm,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매죽영모도(梅竹翎毛圖)]⋅[묵매도(墨梅圖)]⋅[송학도(松鶴圖)]⋅[숙조도(宿鳥圖)]⋅[홍료추순도(紅蓼秋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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