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윤석의 이재난고

2018. 3. 31. 07:17차 이야기



       일기로 본 조선  

황윤석의 이재난고

동의어 서학을 좇는 한 지식인의 기록 



전 생애를 촘촘히 기록한 일기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신경준(申景濬, 1712∼1781)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로 거론되던 인물이다. 그런데 신경준이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한 반면 황윤석은 문과 급제에 실패했다. 일찍이 영조가 “신경준은 다행히 나를 만나서 그 재주를 펼 수 있었는데, 황윤석만은 나를 만나지 못했으니 다른 날에 그 누군가 쓰는 자 있으리라”라고 하며 황윤석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것을 애석해했다는 일화도 이런 사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황윤석은 1766년(영조 42) 38세의 나이에 천거를 통해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 목천현감(木川縣監),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등을 역임하다가 전의현감(全義縣監)을 끝으로 1787년(정조 11)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는 당대의 노론(老論)-낙론계(洛論系)의 대표적 학자인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서울생활을 통해 여러 저명한 학자와도 교유했다. 따라서 황윤석은 18세기 후반 조선의 사상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이재난고(頤齋亂藁)』는 황윤석이 평생에 걸쳐 작성한 일기다. 여기에는 그의 나이 열 살 때인 1738년(영조 14)의 단편적인 기록을 시작으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인 1791년(정조 15) 4월 15일까지, 황윤석의 삶의 궤적이 촘촘하게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황윤석의 생애와 사상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재난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중요성에 착안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1994년부터 초서(草書)로 된 『이재난고』의 탈초·영인 사업에 착수했고 마침내 2004년에 이르러 완간하였다. 이로써 황윤석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글에서는 『이재난고』에 실려 있는 ‘서학(西學)’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황윤석이 서양의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과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이재난고』, 황윤석, 25.4×22.6cm 내외, 전북 유형문화재 제111호, 18세기, 황병관
『이재난고』, 황윤석, 25.4×22.6cm 내외, 전북 유형문화재 제111호, 18세기, 황병관


서학서를 빌려 보고 서학 지식을 좇다

   조선 후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서학서(西學書)가 전해졌다. 특히 청(淸)왕조가 안정기에 접어든 17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수용된 서학서는 조선왕조의 지식인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1785년(정조 9) 서양의 학문을 비판하기 위해 쓴 「천학고(天學考)」라는 글에서 “서양의 책(西洋書)이 선조 말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명경석유(名卿碩儒)각주1) 들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잘 드러낸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서학서가 연행 사절을 통해 국내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서학서가 어떤 경로를 통해 지식인 사회에 유통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볼 때 황윤석의 『이재난고』는 18세기 후반 조선사회에서 서학서의 유통 현황을 적실히 보여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 가운데 하나다.


   황윤석은 십대 후반부터 서학 관련 서적을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로 그는 천문역산학을 비롯해 과학기술과 관련된 서학서에 관심을 두었고, 관련 서적들을 구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서학서를 접한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였다. 첫째는 양반 사대부들과의 교유를 통해 서학서를 빌려 보는 경우다. 황윤석은 적극적인 방문이나 서신 교환을 통해 지인들에게 서학서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천거(薦擧)를 통해 1766년(영조 42) 중앙 정계에 진출한 황윤석은 이후 여러 해 동안 서울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과 접촉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 여러 유생과 사귀었고, 중앙 정부의 여러 관청을 경유하면서 다양한 인물과 교유관계를 맺었다. 그중에는 조선 후기 과학기술사와 사상사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황윤석의 교유관계에서 먼저 주목할 만한 인물은 김용겸(金用謙, 1702∼1789)이다. 김용겸은 안동 김문(金門) 김수항의 손자이며 김창즙의 아들로 ‘북학파(北學派)’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예악(禮樂)에 밝고 예술적 자질이 풍부했으며 홍대용,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의 구성원들과 나이를 뛰어넘어 사귀었다. 황윤석 역시 김원행의 문하라는 학문적 기반 위에서 김용겸을 매개로 다양한 인물과 교유관계를 확장할 수 있었다.


   소론(少論) 계열의 정경순(鄭景淳, 1721∼1795)도 황윤석이 교유한 중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황윤석은 정경순의 아들인 정동기(鄭東驥, 1750∼1787)와 그의 사촌인 정동유(鄭東愈, 1744∼1808)를 통해 천문역산학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주영편(晝永編)』이라는 독특한 저술의 저자인 정동유는 경학(經學)과 예학뿐만 아니라 천문학, 지리학, 수학, 의학과 같은 자연학 분야와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한 인물이었다.


   정철조(鄭喆祚, 1730∼1781)·정후조(鄭厚祚) 형제와 그 매제인 이가환(李家煥, 1742∼1801) 등도 주목된다. 정철조는 홍대용, 박지원 등과 밀접한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혼인관계를 통해 박지원의 반남(潘南) 박씨(朴氏) 가문, 이가환의 여주(驪州) 이씨(李氏) 가문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정철조는 당시에 “재예(才藝)가 절륜(絶倫)하다”고 소문이 자자했으며, 그의 아우인 정후조는 지리학으로 이름이 높았고, 이가환은 박식하다고 평가되었던 인물이다.


   그 밖에 황윤석의 교유권에서 주목되는 인물로는 달성 서씨(達城徐氏) 가문의 서명응(徐命膺, 1716∼1787)·서호수(徐浩修, 1736∼1799) 부자, 풍양 조씨(豊壤趙氏) 가문의 조진관(趙鎭寬, 1739∼1808)·조진택(趙鎭宅, 1746∼?) 형제, 그리고 당대에 박학자로 명성을 얻었고 정조대에 『문헌비고(文獻備考)』 증보 작업에 참여했던 이만운(李萬運) 등을 들 수 있다. 황윤석은 이처럼 개성 있는 학자들과 활발히 교유하면서 그들이 소장하고 있던 서학서를 빌려 보기도 하고, 그 내용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펼쳐나가기도 했다.



   둘째는 서울에서 관료생활을 하면서 직무 수행과 관련하여 서학서를 접하게 된 경우다. 황윤석은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관청의 서리(書吏)들을 통해 평소 관심 있는 서학서를 구입하기도 했고, 각종 사행에 참여하는 역관들과 친분이 있는 이서배(吏胥輩)들에게 부탁해서 중국에서 서학서를 구입해오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1766년(영조 42) 황윤석은 원흥윤(元興胤)으로부터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황윤석이 평소에 갖고 싶어했던 『수리정온(數理精蘊)』이나 『역상고성(曆象考成)』을 구입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매형인 이심해(李心海)가 사행갈 때 역관에게 부탁하면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에 황윤석은 이심해에게 편지를 보내 두 책을 구해줄 것을 요청했다.


   1768년(영조 44) 8월에는 의영고(義盈庫)의 서원(書員)인 김흥대(金興大)를 통해 10월에 동지사 부사로 연경에 가는 구윤옥(具允鈺, 1720~1792)을 수행하게 된 김흥대의 동생에게 『기하원본』과 『수리정온』을 구입해오도록 부탁했다. 1769년(영조 45) 8월에는 관상감(觀象監) 서원(書員)을 역임한 바 있는 서리를 시켜 『역상고성』 한 질을 구입하고자 했으며, 동부도사(東部都事)로 재직 중이던 1778년(정조 2) 8월에는 부리(部吏) 윤성창(尹聖昌)을 시켜 그와 친분이 있는 관상감 책색서리(冊色書吏) 황덕문(黃德文)으로부터 『역상고성』과 『수리정온』 두 질을 구입하게 하였다.



『역상고성』,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어제수리정온』,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기하원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어제역상고성후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셋째는 서적 판매상인 책주릅[책아인(冊牙人)]을 통해 서학서를 구입하는 경우다. 황윤석은 일찍이 『율력연원(律曆淵源)』을 열람하고 이 책이 진한(秦漢) 이래로 율(律)·역(曆)·수(數) 삼가(三家)에 일찍이 없었던 바라고 하면서 찬탄을 금치 못했다. 『율력연원』은 『역상고성』 『율려정의(律呂正義)』 『수리정온(數理精蘊)』의 3부작으로 구성된 거질의 총서로(100권), 그 내용은 천문역산학(天文曆算學), 율려학(律呂學), 수학을 포괄하고 있었다.


   황윤석은 여러 경로를 통해 『율력연원』을 구입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770년(영조 46) 4월 15일 황윤석은 박사억(朴師億), 박사항(朴師恒), 이원복(李遠福) 등 책주릅 세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이들은 황윤석에게 김선행(金善行)의 집에 있는 『율력연원』 70책을 130냥에 구입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황윤석은 주변에서 돈을 빌려서라도 이 책을 구입하고자 노력했다. 이 책을 구입해서 고향으로 내려가 사방의 벽에 비치해두고 때때로 살펴보기를 염원했기 때문이다.


   황윤석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책값이 지나치게 비싸게 책정되었다며 이는 책주릅들이 부당하게 이익을 꾀하는 것이라고 한탄하기도 했고, 황윤석이 빚을 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발 벗고 나서 주선하기도 했지만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당시 책주릅들은 구매 의욕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책값을 흥정했는데, 황윤석에게 130냥의 높은 가격을 부른 것은 황윤석의 책 욕심과 구매 의욕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황윤석은 빚을 내는 일이 쉽지 않자 『율력연원』을 구입하려던 계획이 어그러질까봐 입맛을 잃을 지경이었다. 결국 『율력연원』을 구입하려 했던 황윤석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황윤석은 6월 13일에 전승지 김치공(金致恭)의 둘째 아들이 75냥의 가격에 『율력연원』을 구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책이 주인을 잘못 만나 불행하다고 한탄했다.


   이처럼 여러 경로를 통해 황윤석이 접한 서학 관련 문헌과 물품을 분류해보면 [표 1]과 같다.



종류 서명·품명
천문역법서
(天文曆法書)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 표도설(表度說),
역상고성(曆象考成), 칠요표(七曜表), 신법역인(新法曆引),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編), 서양역통(西洋曆通)
산서
(算書)
동문산지(同文算指), 기하원본(幾何原本), 구고의(句股義),
원용교의(圜容較義), 수리정온(數理精蘊)
천문도
(天文圖)
태서건상도족자(泰西乾象圖簇子),
황적이극총성도(黃赤二極總星圖)
세계지도
(世界地圖)
이마두오대주지도(利瑪竇五大洲地圖),
이마두만국전도(利瑪竇萬國全圖), 만국전도(萬國全圖),
서양오대주지도(西洋五大洲地圖) 양폭(兩幅),
서양만국곤상전도(西洋萬國坤象全圖) 남북면(南北面) 2폭(幅)
천주교
교리서
천주실의(天主實義)
수리학
(水利學)
태서수법(泰西水法)
기계자명종(自鳴鍾)
그림
대서양화족자(大西洋畫簇子),
서양화본[西洋畫本, 서양화족자(西洋畫簇子)]

[표 1] 황윤석이 열람한 서학 관련 문헌·물품 목록 

                    
「곤여만국전도」, 비단에 채색, 177.0×533.0cm, 보물 제849호, 1557년경, 서울대박물관



자명종에 대한 집념

   황윤석은 일찍부터 자명종[自鳴鍾, 윤종(輪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황윤석이 초산(楚山, 정읍의 옛 이름)의 이언복(李彦復)이 60냥에 구입해서 소유하고 있던 자명종을 구경한 것은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인 1746년(영조 22) 8월이었다. 그때 자명종은 서양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거나 왜국(倭國)을 거쳐 조선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 자명종을 제작할 수 있는 인물로는 서울의 최천약(崔天若)과 홍수해(洪壽海), 그리고 전라도의 나경훈[羅景壎, 나경적(羅景績)]이 거론되었다.


   황윤석은 1761년(영조 37)에는 김상용의 현손인 김시찬(金時粲, 1700∼1767)의 집에서 나경적이 강철로 제작한 자명종을 직접 보았으며, 1769년(영조 45) 4월에는 이해(李瀣, 1496∼1550)의 후손인 이광하(李光夏)로부터 홍대용이 자명종과 혼천의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기도 했다. 실제로 홍대용은 숙부 홍억(洪檍, 1722∼1809)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 자명종을 구경하기 위해 흠천감(欽天監) 박사(博士)인 장경(張經)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천주당을 찾아가서 자명종을 구경하기도 했다. 당시 홍대용이 얻어왔다는 자명종은 크기가 담배 상자(南草銅匣)만 한 것이었다고 한다.



혼천의, 홍대용, 35×50.2×35cm, 18세기, 한국기독교박물관 

                        
자명종, 14.0×10.0×18.0cm, 17세기, 실학박물관 

                        
『을병연행록』, 홍대용, 28.2×19.0cm, 18세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홍대용이 연행했을 때 한글로 기록한 여행 견문록이다. 그는 이때 중국의 지식인들을 만나 교류하였다.

   그렇다면 자명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서양의 기계식 시계를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동시보장치를 갖춘 천문시계[혼천시계(渾天時計)]를 뜻하는 것이었다. 황윤석은 후자를 ‘윤종(輪鐘)’이라고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자명종은 본래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창시된 것인데 마테오 리치에 의해 중국에 전파되었고, 이후 북경의 시장에서 거래되어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으며, 장저(江浙) 지역의 무역선들을 통해 일본에도 전파되었다고 한다.


   황윤석은 1774년(영조 50)에 염영서(廉永瑞)라는 사람으로부터 윤종을 구입했다. 염영서는 일찍이 나경적과 함께 윤종을 제작한 적이 있고 홍대용의 대기형(大璣衡) 제작에도 참여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1772년(영조 48) 박찬선(朴燦璿)·박찬영(朴燦瑛) 형제의 초청에 따라 흥양(興陽)의 호산(虎山)에 수년 동안 머물면서 윤종 2가(架)를 제작했다. 황윤석이 구입한 것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홍대용이나 박찬선 형제는 모두 김원행 문하에 출입했던 인물들로 황윤석과 학연이 있었다. 염영서는 이들을 통해 황윤석이 천문의기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에 윤종을 판매하고자 황윤석을 직접 방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매매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혼천시계, 송이영, 철·나무, 52.0×119.5×97.0cm, 국보 제230호, 1669, 고려대박물관 

                       

   염영서가 일부 장치가 고장난 윤종을 가지고 황윤석을 찾아온 것은 1774년(영조 50) 1월 20일이었다. 염영서는 5일간 머물다가 선급금으로 5냥을 받고 1월 24일 돌아갔는데, 3월에 와서 고장난 곳을 고쳐달라는 황윤석의 부탁에 난색을 표했다. 이에 황윤석은 2월 2일 이웃 마을 사람과 수리를 시도했다. 염영서가 수리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터라 막연히 기다릴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2월 25일 염영서가 다시 와서 황윤석과 함께 수공업자(冶家)를 찾아가 윤종을 수리했으나 3월 3일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이에 염영서는 돌아갔고 황윤석은 2냥을 얹어주면서 다시 와서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9월에도 염영서는 고치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해를 넘겨 1775년(영조 51) 전주부(全州府)의 장인 김흥득(金興得)이 와서 윤종을 수리해주겠다면서 수리비로 4냥을 제시했다. 2월 21일에 드디어 야장(冶匠) 송귀백(宋貴白)이 와서 함께 윤종을 수리했는데 그는 뛰어난 기술자였다. 3월 27일 마침내 수리가 대략 마무리지어졌고 송귀백이 돌아갈 때 황윤석은 4냥을 지급했다. 2월 21일부터 3월 27일까지 36일 동안 황윤석은 수리 작업에 골몰하다가 손가락에 마비 증세가 오기도 했는데, 그는 이것이 ‘상지(喪志)각주2) ’의 해로움이라고 탄식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781년(정조 5) 12월 12일 나주에 거주하는 염영서의 아들 염종득(廉宗得)이 친척인 염종신(廉宗愼)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빌려준 윤종을 돌려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황윤석에게 보냈던 것이다. 이에 황윤석은 염영서가 자신에게 윤종을 팔고 전후로 7냥을 받아간 사실을 적시하고, 만약 당시에 윤종 수리가 완벽하게 되었다면 돈을 더 지불했을 텐데 염영서가 두 차례에 걸쳐 수리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은 자신이 야장 송귀백과 한 달 넘게 수리하면서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으므로 돌려줄 수 없다는 뜻을 전달했다. 황윤석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수리한 부분이 절반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황윤석은 왜 이토록 자명종에 애착을 품었을까? 그는 이것이 자신의 ‘호고(好古, 옛것을 좋아함)’ 취미에서 비롯되어 ‘완물상지(玩物喪志)’로 귀결된 것이라고 자책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는 주희나 이황, 송시열이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제작하여 소유한 사례를 본받고자 한 행위였다. 선기옥형은 『서경(書經)』에 등장하는 천체관측 기구로서 요순(堯舜)으로 대표되는 유교의 성왕(聖王)들이 천명을 받드는 정치를 어떻게 행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도구였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자명종은 단순한 ‘완물(玩物)각주3) ’이 아니라 ‘이수(理數)’와 관계된 중요한 물품이었던 것이다.


서학과 율력산수학, 그리고 『성리대전주해(性理大全註解)』

   이처럼 황윤석은 서학서나 서양식 기계장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황윤석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황윤석은 서양의 과학기술 가운데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취사선택했다. 그것은 자신의 학문 체계를 정립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렇다면 황윤석이 주목했던 서양의 과학기술 분야는 어떤 것이었을까?


   1764년(영조 40) 2월 7일 황윤석은 전주에 있는 이기경(李基敬, 1713∼1787)의 집을 방문했는데 여기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보게 되었다. 이 책을 접한 황윤석의 첫 소감은 “몹시 천박하고 누추해서 볼만한 것이 없다”는 비평이었다. 여기서 황윤석은 서학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서양의 천주교에 대해서는 매우 ‘천박하고 누추하다(淺陋)’고 평가한 반면 역산(曆算)과 수법(水法)에 대해서는 ‘‘천고(千古)에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卓絕千古)’고 높이 평가했다.


   “성현들의 성리학문(性理學問)의 학설은 염락관민(濂洛關閩, 주돈이·정호·정이·장재·주희의 성리학)보다 숭상할 바가 없고, 역산의 방법은 서양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는 것이 아마도 바꿀 수 없는 논의인 것 같다”는 그의 평가가 이러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황윤석은 「제서양화족(題西洋畫簇)」이라는 글에서 “그 도(道)가 『천주실의』에 실려 있으나 나는 보지 않는다. 그 수(數)는 『기하원본』에 갖추어져 있는데 나는 취한다”라고 읊었다. 이는 서학의 도(道, 종교)와 수(數, 과학기술)를 구분하여 수만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황윤석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황윤석은 청에서 편찬한 『율력연원』을 진한(秦漢) 이래로 율(律)·역(曆)·수(數) 삼가(三家)에 일찍이 없었던 책이라고 찬탄하였다. 황윤석은 우리나라의 선배들 가운데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에 대해서는 언급한 이가 있었지만 이수(理數)의 미묘함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황윤석 자신이 보기에 율력은 국가를 경영하고 천하를 다스리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이는 유자(儒者)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황윤석은 ‘율력’의 문제를 ‘이수’의 차원에서 주목했으며, 수를 밝히면 율력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포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율·역·수 삼가에 대한 황윤석의 관심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1788년(정조 12)의 기록에 따르면 황윤석은 서양의 학문 가운데 역상·수리·율려(律呂)·공장(工匠) 네 가지가 ‘천고에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고 평가하면서 천주교 신앙 문제 때문에 이것들까지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서거 직전인 1791년(정조 15) 4월 11일의 기록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그는 『천주실의』로 대표되는 서교(西敎)에 대해서는 ‘이단사설(異端邪說)’이라고 단언했지만 서양의 ‘율려·역상·산수’의 삼가, 기계제작술과 화법[공야단청지법(工冶丹靑之法)]은 후세에 전해야 하는 것으로 높이 평가했다. 이는 서양의 수학과 천문역산학, 그리고 과학기술과 화법에 대한 황윤석의 긍정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예다. 동시에 그가 ‘율·역·수’의 문제, 다시 말해 율력학과 수학의 문제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가를 절실히 보여준다. 이와 같은 황윤석의 학문적 관심이 최종적으로 율·역·수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는 서적인 『율력연원』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황윤석은 십대 후반부터 성리학의 기본 텍스트인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탐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이러한 황윤석의 노력은 평생토록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성리대전』의 의심나는 부분을 차록(箚錄)하고 틀린 부분을 바로잡는 작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역범(易範)·성명(性命)·이기(理氣)의 근원으로부터 율력산가(律曆算家)에 이르는 전통 학문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박학(博學)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것이 『성리대전』의 완벽한 주석 작업을 위한 필수적인 학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요컨대 황윤석은 서학에 기초한 최신의 율력산수학(律曆算數學)을 활용하여 『성리대전』을 수정·보완함으로써 새로운 대전(大全, 『성리대전주해(性理大全註解)』)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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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만옥 집필자 소개

경희대 사학과 교수. 저서 『朝鮮後期 科學思想史 硏究 Ⅰ-朱子學的 宇宙論의 變動』, 공저 『韓國實學思想硏究 4-科學技術篇』 『韓國儒學思想大系-科學技術思想編』 외 다수

    



황윤석의 이재난고

                                                       (서학을 좇는 한 지식인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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