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재난고 조선시대 인기 벼슬 능참봉

2018. 3. 30. 17:37차 이야기

조선시대 인기 벼슬 능참봉

 
조선왕릉은 40기 모두가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유교철학과 풍수사상이 담긴 탁월한 조형미에다 단일 왕조 왕가의 무덤 모두가 남아 있다는 점을 인정받았다. 무려 500년, 왕릉은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온전히 견뎌낼 수 있었을까. 직책은 낮았으나 다방면에서 역량을 발휘했던 ‘능참봉’이 있어서 가능했다. 
능참봉은 종9품의 관리였다. 오늘날로 치면 9급 공무원이니 말단이다. 하지만 임금의 능을 모시는 실무자로서 직책보다 큰 권한을 행사했다. 조선시대 대표적 능참봉인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 등의 기록에 따르면 능참봉은 종3품의 부사와도 거리낌없이 왕릉 관리 문제를 의논했다.

“나이 70에 능참봉을 했더니 한달에 거동이 스물아홉번”이라는 말이 대변하듯 능참봉의 역할은 다양했다. 두 사람이 보름씩 2교대로 재실(齋室·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에 기거하며 근무했는데 왕과 왕비의 제례를 관장하고 능을 살피는 ‘봉심’(奉審), 능역 내 수목관리, ‘투작’(偸斫·함부로 나무를 베는 일) 감시 등이 주 업무였다. 능역 안 건물과 석물을 개수하는 일에 감독을 맡았고, 관리 인원도 살폈다. 유학적 지식은 물론 건축, 토목, 조경 등 기술분야의 전문성까지 겸비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순종의 유릉을 조성하는 모습.
시험을 거치지 않고 특별채용 형식으로 능참봉을 임용했다는 ‘성종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데다 왕릉 수호라는 권한 때문에 당대 최고 선호 직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은 ‘경국대전’에 규정을 둘 정도로 능역 관리에 신경을 썼다. 능참봉이 그 중심에 있었다. 

왕릉이 긴 시간을 살아남아 세계적 가치를 인정받은 데는 능참봉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조선왕릉관리소를 중심으로 동부·서부·중부 등 3개 지구, 14개 권역에서 문화재청 직원들이 능참봉의 역할을 계승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원호 학예연구사

이재난고

다른 표기 언어 頤齋亂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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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1984년 9월 20일)

 

조선 후기

 

유고(遺稿)

 

문헌

 

50책

 

언론·출판/출판

 

황병관(黃炳寬)(개인소장)

요약 조선 후기의 학자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의 유고(遺稿).

이재난고

[내용]

50책 6,000장.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저자가 10세부터 63세로 서거하기 2일 전까지 듣고 보고 배우고 생각한 문학(文學)·경학(經學)·예학(禮學)·사학(史學)·산학(算學)·병형(兵刑)·종교(宗敎)·도학(道學)·천문(天文)·지리(地理)·역상(易象)·언어학(言語學)·전적(典籍)·예술(藝術)·의학(醫學)·음양(陰陽)·풍수(風水)·성씨(姓氏)·물산(物産) 등 정치, 경제, 사회, 농·공·상 등 인류생활에 이용되는 실사(實事)를 망라하여 쓴 일기 또는 기사체(記事體)로서 책마다 쓰기 시작한 연대와 끝낸 연대를 기록하고 난고(亂藁)라는 표제를 달았다.

황윤석은 소과합격(小科合格)에 그쳤고 관직도 낮은 지위에 그쳤지만 학문으로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보다 1세대쯤 앞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학문의 영역이 광범하고 학풍이 정치(精致)한 점에 있어서도 높이 평가된다.

그의 학문은 사후(死後) 53년인 1829년(순조 29)에 후손 수찬(秀瓚)과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조인영(趙寅永)에 의하여 간행된 ≪이재유고 頤齋遺藁≫ 12권 7책과 이 유고가 간행된 지 114년 뒤인 1942년에 역시 후손 서구(瑞九)와 향유(鄕儒)들에 의하여 속간된 ≪이재속고 頤齋遺藁≫ 14권 7책과 ≪이수신편 理藪新編≫ 10책에서 그 학문적 도량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현재까지 간행되지 않고 유고(遺稿) 그대로 남아 있는 ≪이재유고≫에서 그 학문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이재난고≫는 그 엄청난 양뿐만 아니라 실학적인 내용과 함께 한국의 저술사상 최고의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는 특히 속고 간행시에는 난고 중에서 선집(選輯)한 것도 약간 있지만 시문이나 언어·산학·도학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것도 난고 내용의 1/5도 못되는 것이며, 난고는 실학적인 면에서 귀중한 학술연구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황병관(黃炳寬)이 소장하고 있다. →이재유고

 

 

'이재난고'로 본 18세기 각사(各司)의 서리(書吏)들

이지양(부산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 목 차 >

1. 문제제기
2. 대갓집 겸인(傔人)인 각사(各司) 서리(書吏)들
3. 서리와 하급관원의 갈등.
4. 맺음말

1. 문제제기

여항문학(혹은 중인문학, 위항시사)에 대해서는 한문학 분야에서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여항인들의 역사 현실적 존재 양상이나 활동 조건에 대한 연구는 강명관이 주도하다시피 해왔다. 역사학 분야의 이조후기 중인 연구 역시 양적으로 많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두 분야의 선행 연구 성과에 힘입어 이조전기와 달라진 이조후기 서리층의 변화 상(像)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조전기에는 경아전 서리들을 취재(取才)를 통해 선발했으며, 6월과 12월 도목정사를 통해 이들도 인사 변동이 있었으나, 이조후기에 와서는 선발 방식이 변하여 궁가(宮家)나 권세가의 하인들로 임의 충원되거나 서리가 세습되었다는 것이 요점이다.


본 연구는『이재난고』를 통해 대갓집 겸인으로서 발탁된 18세기 후반의 중앙 각사 서리들의 존재 양상과 활동상에 대해 보고하고자 하는 바, 이 시기의 서리층에 대한 이해의 큰 윤곽은 기존 연구 성과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집중 고찰하고자 하는 ‘대갓집 겸인이 중앙 각사 서리로 임용되어 활동하는 문제’는 앞서 이미 유봉학(1990)에 의해 ‘우의정 박영원(朴永元)의 겸인인 이윤선(李潤善: 1826~1869)’의 경우가 알려졌고, 유봉학․ 강명관에 의해 ‘연안이씨 가문 이만수(李晩秀) 집안의 겸인들 약 30명 명단과 『진휘속고』자료’ 등을 통해 그 양상이 알려져 있다. 그러니 전체 논지나 윤곽은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재난고』를 통해 18세기 후반의 각사 서리들의 존재와 활동상을 조명하는 것은, 단순히 추가 근거를 보탤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조후기 중앙 각사의 서리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세부적인 의문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의문들이다. 서리는 결정권이 없는 실무 수행자인데, 왜 상전이 유배되면 함께 유배되는가, 서리로서 목숨을 걸고 상전을 지키는 관계는 인간적 의리 외에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일까, 서리들이 포흠(逋欠)을 지게 되는 이유는 뭔가, 그들이 축적한 부는 부정한 것인가, 이들이 수탈을 일삼고 문서농간을 할 때 책임자인 상급관원들은 왜 징계하지 못했는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는가 묵인했는가 아니면 자신들이 주도자였는가, 이들은 공적인 녹봉 없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서리의 승진이나 탈락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들이 하는 일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서리가 대갓집 겸인으로서 권력자의 위세를 등에 업고 있다면 하급관원과 알력이 심하지 않았을까, 대갓집 겸인으로서 중앙 각사의 서리가 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있는가 등등이 그것이다.


본 연구는『이재난고』를 중심으로 삼고,『이향견문록』을 보조 자료로 삼아 진행될 것이다. 이 두 텍스트는 사관(史官)의 기록이 아니라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 판단의 공식적 성격은 부족하지만, 기초적 세부 사실의 정확성과 객관성은 신뢰할 만하며 서술자의 입장과 정감이 결부된 세부 묘사는 도리어 관찬 역사서의 단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기에 유리한 점이 있다고 하겠다.『이재난고』는 개인의 일기라는 점에서,『이향견문록』은 객관적 사실을 중시하는 인물 전(傳)자료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 정보의 구체성과 정확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자료를 중심으로 연구를 할 경우, 일반적 역사 연구 논문처럼 광범위한 통계치로 근거를 삼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개별적 사례 중심으로 사건의 인과 관계를 구성해 봄으로써 통계적 사실이 확인시켜 주지 못하는 구체적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위의 자료로써 선행 연구 성과에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근거를 추가하여 줄 뿐 아니라, 선행 연구에서 미처 풀지 못했던 몇몇 의문에 대해 근사치의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연구는 하나의 현상에 대해 종합적인 상(像)을 형성하여 이해를 쉽게 한다는 점에 일정한 유익성이 있다 하겠다. 본 연구가 18세기 후반의 각사 서리를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미세한 국면들을 통해 18세기 후반의 각사 서리와 관료들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한 걸음 더 다가서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위에 열거한 여러 의문들 가운데,『이재난고』를 중심으로는 각사(各司) 서리(書吏)들이 어느 대갓집의 겸인(傔人)이었으며 어느 정도나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과 하급관원과의 갈등 양상을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의문들에 대해서도『이향견문록』을 참고하여 해답을 암시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대갓집 겸인(傔人)인 각사(各司) 서리(書吏)들


『이재난고』에는 서울 중앙의 각사 서리들 명단이 2건 수록되어 있다. 하나는 1778년 2월 16일자 일기 속의 사복시(司僕寺) 각색(各色) 서리(書吏) 명단과 강창(江倉) 고지기 명단이고, 다른 하나는 1786년 5월 2일자 일기 속의 전생서(典牲署) 원역(員役) 명단이다.


앞의 명단은 황윤석이 사복시 주부로 복직되었을 때, 배사령(陪使令)이 명목(名目)에다 아무댁 하인이라고 주석을 달아서 납입한 것이며, 5월 1일에 전생서 주부로 근무를 시작하면서 서리들의 인적사항을 파악한 것이다. 우선 두 개의 명단을 차례로 보기로 한다.

< 1778년 2월, 사복시(司僕寺) 각색(各色) 서리(書吏) 이하 명목(名目)>

직급

서리 성명

소속 대갓집

인원 합계

1

馬籍色書吏

朴昌華

昭格洞 奉朝賀 金致仁宅 下人 *

2

李行得

磚石洞 故政丞 鄭載嵩宅 下人

3

盧鼎曄

龍洞 判書 尹汲宅 下人

4

琴德興

金致仁宅 下人 *

5

方處和

磚石洞 領敦寧 金陽澤宅 下人 #

6

高允昌

金陽澤宅 下人 #

7

洪完琦

戶曹判書 具允鈺宅 下人

8

金重燁

守禦使 洪樂性宅 下人 ◎

9

鄭碩鎭

兵曹判書 李徽之宅 下人 ◇

마적색서리9명

10

牧場色書吏

崔潤祜

金陽澤宅 下人 #

11

李挻漢

大寺洞 判府事 李溵宅 下人

12

金泰鼎

洪樂性宅 下人 ◎

13

金命喆

金陽澤宅 下人 #

14

朴載儉

李徽之宅 下人 ◇

15

洪宅琦

右議政 徐命善宅 下人 ☼

목장색서리6명

16

工房色書吏

韓德秀

左議政 鄭存謙宅 下人 @

17

李世禎

苧洞 故判書 權䙗宅 下人

18

金養賢

鄕校洞 判書 金鍾正宅 下人

19

任世雄

鄭存謙宅 下人 @

공방색서리4명

20

軍色書吏

金聲協

鄭存謙宅 下人 @

21

金思秦

鍾峴 判書 徐命膺宅 下人

22

崔擎日

鄭存謙宅 下人 @

23

李昌祿

徐命善宅 下人 ☼

24

戶房色書吏

金壽泰

鄭存謙宅 下人 @

25

白瑞瑜

倉洞 故政丞 洪重普宅 下人

26

李景顯

領議政 金尙喆宅 下人 ○

호방색서리3명

이상 본시 26명

27

內寺書吏

尹駿瑞

金尙喆宅 下人 ○

28

劉大英

徐命善宅 下人 ☼

29

朴性黙

李徽之宅 下人 ◇

30

金純得

徐命善宅 下人 ☼

이상 모두 30명

江倉 庫直

李德淳

鄭存謙宅 下人 @

李義集

徐命善宅 下人 ☼

金聖尹

徐命善宅 下人 ☼

姜渭瑞

都承旨 洪國榮宅 下人 ●

강창 고직 4명

大廳直

林鳳集

徐命善宅 下人 ☼

대청직 1명


위의 명단을 보면, 소수의 몇몇 정승․판서 집안 하인들이 종부시와 강창을 장악하고 있다. 우의정 서명선의 하인이 7인으로 가장 다수이고, 그 다음이 좌의정 정존겸의 하인 6인, 영돈녕부사 김양택의 하인 4인, 병조판서 이휘지의 하인 3인, 김치인․김상철․홍낙성의 하인 각 2인, 그 외는 모두 1인의 하인을 배치시켰다. 대갓집의 권세와 하인의 숫자가 밀접하다는 것을 추측하게 된다.(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서리 자리 쟁탈이 심했으므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도승지인 홍국영의 하인이 1명뿐이라는 사실이다. 한 해 전인 1777년 11월에 숙위소가 설치되었고, 이해 6월에 홍국영의 매(妹)를 임금이 빈(嬪)으로 들였으며, 이듬해 4월에 홍국영이 훈련대장으로 승진하던 무렵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인들의 포진 상황을 보아서는 홍국영의 권세가 확장되고 있긴 하지만, 실제 현장에 깊숙이 세력을 구축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황윤석은 이 명단을 보고, “대개 들으매 이들은 모두 대가에 의탁한 하인으로서 하나의 관사에 이름을 올려두고 문득 주인노릇을 하여, 이른바 낭료들은 곧 지나가는 길손과 같이 되어 좌우에서 부딪쳐도 손 쓸 방법이 없다 하니, 어찌하는가.”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황윤석이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는 집의 주인 역시, “본시의 서리․하예가 모두 대갓집 청지기들입니다. 무릇 사복시 안의 관원들의 일동일정이 그로 인하여 점검되지 않는 것이 없겠지만, 나리에 대해서는 더욱 엿보고 관찰할 것입니다. 행여 모름지기 서리․하예를 대우할 때는 상세히 살피고 삼가 조심하여 지나치게 강하게도 하지 마시고 지나치게 부드럽게도 하지 마십시오. 비록 지금 뜻을 얻었더라도, 원망 사는 일이 없는 것이 좋습니다.” 라고 나름의 충언을 고하는 것도 들었다. 중앙 관서의 하부조직을 몇몇 권세가의 하인들이 장악하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자료라 하겠다. 다음은 두 번째 명단이다.


< 1786년 5월 전생서(典牲署) 원역(員役) 명목 >

직급

성명

거주

다른 역할

소속 대갓집

1

首吏

餘木色執吏

嚴性觀

司醞洞

城內都家★

松峴 領相 徐志修 廳直

2

牛色執吏

申星杓

貞洞

都家 ★

貞洞 判書 黃景源 廳直

3

牛色隨從

崔致驥

竹廛洞

都家 ★

寒井 判書 徐浩修 廳直

以下輪直

4

餘木色隨從

金浩元

生祠洞

本署(一朔三直)

鑄洞 判書 李在協 廳直

5

猪色執吏

張福漢

松耳橋

五直

果木洞 判書 李性源 廳直

6

羊色執吏

金光集

笠井洞

六直

生民洞 判書 嚴璹 廳直

7

猪色隨從

李義亨

捕什洞

八直

泥峴 判書 洪良浩 廳直 *

8

羊色隨從

劉澤成

墨洞

八直

泥峴 判書 洪良浩 廳直 *

9

掌務

羔色執吏

安宗得

吏曹前

都家 ★

安國洞 判書 金履素 廳直

10

首庫直

猪色

鄭履元

梨峴

十直

明洞 判書 李衍祥 廳直

11

牛色

尹在莘

泥峴

十直

泥峴 判書 洪良浩 廳直 *

12

羊色兼科色

金仁光

會賢洞

十直

明洞 參判 李敬養 廳直

13

提調色丘

黃龍大

內資洞

下人

14

丘從

金利男

多方洞

貢人 ☆

15

主簿 陪使令

金三金

洞口內前

生民洞 判書 崔璹 下人

16

雨裝直

崔於屯金

山林洞

貢人 ☆

17

直長 陪使令

金壽祚

社洞

泥峴 判書 洪良浩 下人 *

18

雨裝直

金春目金

桂山洞

貢人 ☆

19

奉事 陪使令

申道興

齋洞

大廟洞 判書 沈傭 下人

20

雨裝直

金同伊

廣通橋

貢人 ☆

21

留司 使令

崔世重

本署 前

전생서(典牲署)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따르면, 제조 1인, 주부(종6품) 1인, 직장(종7품) 1인, 봉사(종8품)1인, 참봉(종9품) 2인, 서리 8명을 두었다. 그런데 1797년(정조21)에 주재관으로 판관(종5품) 1인을 새로 두었으며, 서리를 서원(書員)으로 격을 낮추었다. 『경세유표』제1권 ‘교관지속(敎官之屬)’ 항목에 보면, 전생서의 조직 구성을 “제조 경 1인, 주부 중사 1인, 봉사 하사 2인, 서리 6인, 조례 10인”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전생서의 조직 구성이 조금씩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도표가 비록 원역(員役)들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제조, 주부, 직장, 봉사, 유사에 대해 각각 하인이 배정되어 있으므로 전체 조직도 약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번째 명단에서 주목되는 것은 집리(執吏:주임 서리)․수종(隨從: 물건 운반)이 도가(都家)라는 점이고, 그들이 정승․판서의 청지기들이라는 점, 그리고 구종(丘從: 거마를 이끄는 사령)․우장직(雨裝直: 우장지기) 같은 하예들이 공인(貢人)이라는 점이다. “대동법 실시 직후에는 노비나 각사의 하예가 경주인에 차정되었으나, 18세기 이후 경주인권이 권리로서 이권화 됨에 따라 양반 관료 등 권세가들은 자신의 문객이나 겸종․겸인으로 하여금 경주인(京主人) 업무를 대행토록 하였다.”는 선행 연구를 참조하면, 이들이 바로 경주인으로서 도고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조나 선혜청 같은 관청이 아니라, 전생서인데 이런 경우라면, 다산 정약용(1762~1836)의『경세유표』기록에 경주인권 값이 폭등했다는 것이 결코 과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두 명단은, 권력자가 하인을 관청에 실무자로 배치시켰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보와 정세를 보고 받고 권력을 유지할 뿐 아니라, 권력을 통해 부를 집중화 하는 데에 개입할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황윤석이 들었던 충고의 맥락과도 통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곧장 특정 정승이나 판서 개인의 도덕성과 직결시켜 생각할 수는 없다. 개연성은 있지만, 구체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위의 두 명단은 중앙의 각사 서리와 하예들이 특정한 대갓집 청지기나 하인이며, 그들이 도가(都家)를 겸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보여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재난고』에는, 서리 자리를 두고 일어나는 자리쟁탈전이랄까, 신경전 같은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1769년 10월 7일자 일기에, 황윤석이 봉직중인 종부시에 쌍호(雙湖) 조정(趙晸) 대감의 청지기 임덕겸(林德謙)이 와서, 수리(首吏) 이인창(李仁昌)이 괴로운 근무에서 놓여나고 싶으니 파면해달라고 한다고 전해주었다. 이틀 뒤, 황윤석이 확인해보니 이인창은 집이 너무 가난해서 그럴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황윤석은 10월 9일자 일기에서 “이것은 능창군(綾昌君) 쪽 사람인 이인창을 밀어내려는 계략”이라고 해석했다. 같은 해 12월 3일자 일기에는 임덕겸이 황윤석에게 서리 1명을 도태시키기를 바랬는데, 그가 그 서리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서 그러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고 쓰고 있다. 결국 임덕겸은 그 다음해인 1770년 4월 6일에 종부시 서리가 된다. 해운군의 청지기로서 종부시 서리로 있었던 임세웅(任世雄)이 포흠진 돈을 갚지 못해서 곤장을 맞고 도태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들어왔던 것이다. 서리가 도태되는 경우는 대체로 포흠 때문이고, 스스로 그만두는 경우는 경제적으로 충분히 넉넉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리가 될 때에는 이 시기에는 대부분 상전의 보살핌으로 임명되곤 했다.


임덕겸도 그 자리에 오기까지 과정에, 이제조(二提調) 집의 겸인인 한덕수(韓德秀)와 신경전이 있었다. 그런데 한덕수가 임명받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덕겸이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리를 양보하는 데에는 대개 경제적으로 급하지 않은 상황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상전이 임명하거나 기회를 주더라도, 자신들끼리 형편을 고려하여 양보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연(金掾)이 그런 경우이다. 그는 선혜청(宣惠廳) 서리 자리가 비어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죽은 이는 저의 옛 친구입니다. 몇 개월 병을 앓는 동안 매일 문병하러 다녔는데 지금 만약 그 자리를 대신한다면 친구의 죽음을 다행으로 여긴 것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사양하였다. 그 다음에 다시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도 그는, “지금 대감 문하에 있는 아무개가 곤궁함이 저보다 심합니다. 우선 그를 먼저 뽑으십시오”라고 사양하였다. 이렇게 상전의 돌봄으로 서리가 된 자들 가운데는 결정적 상황에서 충복(忠僕)으로서의 의리를 지켜 기림을 받기도 한다. 학록암(鶴鹿庵) 윤수하(尹壽河), 조태채(趙泰采, 1660〜1722)의 겸인으로서 선혜청 서리를 지낸 홍동석(洪東錫), 홍봉한에게 발탁되어 가깝게 지낸 노동지(盧同知), 서유린(徐有隣) 집안과 관련 깊은 박윤묵(朴允黙)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럼 서리들이 포흠을 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봉록이 없기 때문일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서리들이 공적인 녹봉이 전혀 없었던 것 같지 않은 것이, 김수팽(金壽彭)의 일화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김수팽은 호조 서리였고, 그의 동생은 선혜청 서리였는데, 동생이 염색업으로 돈을 벌겠다고 마당에 동이를 늘어놓은 것을 보고 아우를 매질하면서, “우리 형제가 모두 후한 녹을 받고 있는데도 이 같은 것을 업으로 한다면 저 가난한 사람들은 장차 무엇을 생업으로 하겠는가?” 하며 동이를 엎어버렸다는 것이다. 중앙의 각사 서리들의 경우는 많지는 않았더라도 일정한 녹봉을 지급 받았던 것 같다. 박윤묵의 경우에도 “봉록으로 받은 것이 있으면 모두 형제에게 나누어주고 사사로이 갖는 것이 없었다”는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넉넉하지 못했기에, 서리들은 공금을 빌려 썼고, 임세웅처럼 28냥을 빌려 쓰고 갚지 못해서 곤장을 맞고 도태당하기도 했던 것인데, 실제 사회적으로 문제가 심각했던 것은 공금을 빌려썼다가 갚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전반기 이서층의 중간 포흠에 대한 선행연구에 의하면, 서리들은 주로 대동법과 관련하여 조직적인 장부 농간을 일삼아 포흠을 지는 것이었다. 실제 창고의 곡물 보관량과 장부상 회계가 어긋난 것, 도량형의 통일 미비로 중간 농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 대동미를 방납하면서 곡물 시세가 오르내림을 이용하여 곡물을 환전하는 가격을 농락할 수 있다는 것, 운반과 보관 과정에서 농간을 부릴 수 있다는 것 등등의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들은 부정한 방법을 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서리들이 문서농간을 하거나 포흠을 질 때, 그 서리를 임용한 대갓집의 권세가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는가, 묵인했는가, 아니면 자신이 주도자였던 것일까? 임세웅의 경우를 보면, 그와 연계된 대갓집인 종실 해운군 이련(李槤)이 진 포흠 규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해운군에 대해서도 포흠과 관련한 별 다른 처벌이 없었고, 임세웅 역시 쫓겨났다가 다시 복직하여 서리로 활동하는 것을 보면, 포흠에 대한 처벌이 미미했음을 알 수 있다. 기강이 해이해 있었던 것이다. 서리들이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고 할 때 대갓집에서는 그것을 문제 삼기보다 오히려 대단하게 여기기도 했으며,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 노동지(盧同知)의 경우, 홍봉한이 “관직 생활의 소득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소인이 사또의 은택을 입어 좋은 진(鎭)을 맡아서 삼년의 수입으로 남양의 전토를 매득하였기로, 이제 평생을 자족하게 지낼 만하옵니다.”라고 답했다. 대답에 대한 반응은 “매우 다행한 일이로구나”였다. 그리고 노동지가 이제 떠나겠다고 하면서, “소인이 정성을 바쳐 사또께 힘을 다하였던 것은 장차 구하는 것이 있어서였습니다. 이제 소득이 바라던 바를 넘어 흡족하온데 다시 무엇 하러 남아있겠습니까? 이제 떠날까 하옵니다.” 하자 홍봉한은 할 말이 없어 그냥 허락하고 말았다. 서리나 하인배들의 부정에 대해 반드시 상납을 받는 관계도 아니었으며, 어느 정도의 자율성이 보장되었던 것이다. 까닭에 서리들이 부를 축적하고 나면 거침없이 물러나와, “어찌 세상사에 골몰해 지내겠는가”(임준원)하며 시회를 열고, 주변에 인심을 쓰고, “평생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쌓았다 흩었다 한 것이 여러 만냥.”(박윤묵)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들이 소속된 관청의 직속 상관들은 이들을 징계하거나 단속할 수 없었는가? 대갓집 권세가의 비호 때문에 엄히 단속하기가 어려웠다. 황윤석에게 ‘이들 서리들에게 원망을 사서 좋을 일이 없으니, 가까이도 말고 멀리도 말라’고 당부했던 서울 집주인의 말처럼 이들은 호락호락 징계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던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그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3. 서리와 하급관원 사이의 갈등

이재 황윤석은 1766년 6월 종 9품직인 장릉(莊陵) 참봉(參奉)에 제수되어, 1768년 6월에 종 8품직인 의영고(義盈庫) 봉사(奉事), 1769년 6월에 종 7품직인 사포서(司圃署) 직장(直長)이 되었다가 같은 품직인 종부시 직장으로 옮겨 갔다. 권세가의 자제들, 혹은 서리들이나 권세가에 뇌물이라도 준 사람들이 2년도 되기 전에 승륙(陞六)하는 데에 비하면, 황윤석은 만 5년이 지난 1771년에야 겨우 승륙하여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가 되었다. 하급관원의 고달픔을 한 단계 한 단계 빠짐없이 다 겪은 것이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1769년 6월 17일의 일기 내용이다. 서리 김덕준이 황윤석을 찾아와서 만약 사포서에서 상환(相換)하려면 종부시로 옮겨야 한다면서 종부시의 이점을 말해주고 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6월 19일 도목정에서 황윤석은 정말 종부시 직장으로 옮겨 갔다. 그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사포서를 잃고 종부시를 얻은 것은 순릉(順陵)을 얻은 것보다 나음. 종부시는 한미하고 박하다지만, 청현(淸顯)한 아문(衙門)이라 임무가 한가롭고 지경이 고요하여 좋다”고 만족감을 표한 다음, “권세 없는 사대부를 생각하니, 약간의 구채(丘債)가 있는 관청을 얻었더라도, 도리어 권세 있는 중인과 서얼이 공격(公格)을 빙자해 상환해버려 떠나게 되고 마니, 참으로 가소롭다.”라고 개탄하였다. 지금은 자신이 이점이 많다고 들은 자리로 옮겨오긴 했지만, 권세 없는 사대부의 처지가 남의 일 같진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종부시 직장의 녹봉이 쌀 13말, 말먹이 콩[馬太] 6말이라고 기록해 두었다.


이때 황윤석을 찾아와 이런 정보를 준 서리 김덕준과 황윤석의 관계도 흥미롭다. 황윤석이 1759년 진사시 복시에 합격하여 사은숙배를 할 때에 이조 서리로 있던 김덕준을 알게 되었다. 1766년 7월 15일자(계미) 일기에는 그를 소개받았던 장면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앞서 기묘년(1759) 소과(小科)에 급제하여 사은할 때, 나와 온제(溫弟)는 민영감[閔鏽-역주]의 행랑에 머물고 있었는데, 민영감은 그때 흥덕 사또로 계셔서 그의 큰 아들인 영철(閔英喆, 명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삼았다.-원주)이 주인(主人)이 되어 나를 접대하였다.하루는 이조의 집리서리 김덕준(金德峻)이 왔는데, 민영철(閔英喆)이 내게 ‘이 사람은 바로 우리 부친의 단골(單骨)이 된 서리(書吏)입니다. 모든 일을 돌보지 않음이 없지요. 이 사람은 남행(南行)의 문ㆍ무관이 상례적으로 매개[間]하는 자입니다. 그대가 만약 대과(大科)나 혹은 남행(南行)이 되거든 이 사람을 단골로 삼아도 무방합니다’ 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러겠다고 하였다. 김덕준도 자청하여 굳게 약속하고는, 그 때 사은의 육항단자(六行單子)를 지어 내게 사은할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그런 인연이 있어서 황윤석은 관직을 제수받자 김덕준의 소재부터 파악했었고, 그 이후 이런 식으로 실제적인 도움을 받았다. 이들 서리는 관료가 해야 할 일을 관료보다 더 자세하게 알고 있었으며, 자신과 관련 있는 관료들의 일거일동을 개인 비서처럼 챙겼으며, 그들을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있게 하려고 노력하였고, 녹봉을 관리해주기도 하였다. 황윤석 역시 그런 실질적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앞 장에서 배사령이 사복시 서리 명단을 그토록 자세하게 작성해 들여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리들은 그야말로 “모든 일을 돌보지 않음이 없지요”라는 말에 걸맞게, 그들이 맡아 처리하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로 온갖 실무를 주관했다. 김덕준은 누각동(樓閣洞) 곁의 체부동(體府洞)에 살았는데, 그의 아들 김문흠(金文欽) 역시 이조서리가 되었다. 김덕준은 처신을 잘했는지, 1771년 1월 26일 일기에는 그가 동지(同知)라는 가자(加資)를 받은 덕에 교련관(敎鍊官)이 되어 우상가(右相家)에 입번(入番)했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일찍이 성호 이익은 ‘서도포폄(胥徒襃貶)’이라는 글에서 서리(書吏)ㆍ서원(書員)ㆍ영리(營吏) 등 서도에게도 포폄을 시행하여 권선징악(勸善徵惡)한다면 서도의 폐단이 시정될 것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관원과 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하였다.

“지금 모든 기관에 속한 관리들은 오직 자주 이리저리 옮겨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만 생각하고, 일찍이 맡은 공무에는 모두 유의하지 않는다. 무릇 여러 가지 헌장(憲章)의 조항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어 머리만 숙이고 앉았을 뿐 서리(胥吏)에게 의지하고, 공경대신(公卿大臣)이 입대(入對)할 때면 반드시 조리(曹吏)를 찾아 물어본 다음에 결정하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속담에 “조선(朝鮮)은 서리 때문에 망한다.”고들 하나, 나는 우리나라는 오히려 서리 때문에 유지되고 이 서리가 없다면 온갖 제도도 장차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벼슬아치가 임의로 서도를 출척(黜陟)하고 여러 가지 잡무를 사역(私役)하므로 서리들이 모두 어리석고 무식하기만 하다.”

관원은 실무에 어둡고 무지하며, 서리는 실무에 밝으니 나라의 제도가 서리 덕분에 유지되어 왔는데, 근래에는 그 관원들이 서리를 임의로 등용하고 쫓아내며 여러 가지 잡무를 사사로이 부리는 까닭에 서리들마저 어리석고 무식한 상황에 왔음을 개탄한 것이다. 하지만 『이재난고』에 나타난 서리들의 활동을 보면, 서리들이 어리석고 무식하다는 지적보다는 실무에 밝아서 서리 덕분에 나라의 제도가 유지된다는 지적에 공감하게 된다.


권세가의 겸인이기도 한 이들 각사 서리들은 시골양반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월등한 정보력과 식견을 지녔고, 정보 면에서는 중앙의 품급이 낮은 관원들보다도 오히려 우세했다. 그들은 중국 사행길에 수행하는가 하면, 궐내의 상황과 문서 수발을 환히 꿰고 있었고, 박학한 관원들 사이에서 서적에 관한 정보를 심부름하기도 하고, 필사해주기도 하며, 온갖 필요한 정보와 물품을 수소문해서 조달해주는 실무자였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들은 시문 창수 능력이나 다른 저술을 함에 있어 사대부에 못 미치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들이 관원 자신의 편에서 움직이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이들의 농간에 하급관원들은 곤란한 처지에 놓이곤 했다. 정고 및 각종 서류 처리를 미루거나, 지시한 사항을 이행하지 않고 빠뜨리거나 거부한다거나, 직무 배정을 불리하게 한다거나, 대갓집 위세를 빙자하여 공무보다 사적인 일을 우선한다든가 하여, 하급관원들을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황윤석 역시 이러한 일들을 겪었고, 서리 단속에 애를 먹었다.


한두 가지 중요 사례를 살펴본다.


첫째, 황윤석이 종부시 직장(종7품)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하기 시작했을 때, 일제조(一提調)인 해운군의 청지기인 공방서리 임세웅(任世雄)을 징계했다가 자신도 난처해진 경우이다.


1769년 7월 13일 일기에 임세웅이 충훈부(忠勳府) 문안(文案)에도 실려 있지 않은 장가(張家)의 일을 도맡아 하면서 일제조의 분부라고 핑계댔는지, 황윤석은 “앞으로 감히 제조대감(提調大監)의 분부라 허칭하지 말라 하고 다시 그런 일을 하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오후에 다시 임세웅이 와서 일제조 분부라 칭하므로 황윤석이 크게 꾸짖 태형을 세게 열 대 치라고 명한 일이 있었다. 같은 날 임세웅 뿐만 아니라 수리(首吏) 조덕린(趙德藺)과 장무서리(掌務書吏) 임세흥(林世興)도 관례대로 직장(直長)께 알리지 않았다고 각각 곤장 20대를 치게 했다.(이 사실은 13일의 일이지만, 15일 일기에 나옴) 그 다음날인 7월 14일 일기에, “임세웅은 해운군의 옛 청지기로 당상(堂上)의 위세를 믿고 농간을 부리다 나에게 곤장을 맞고는 앙심을 품고 해운군에게 고자질을 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황윤석의 지인이 나서서 해운군과 친분이 있는 이최중(李最中) 대감에게 줄을 대어 이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하니, 황윤석은 사직하고 귀향할 결심을 했다. 그러자 황윤석을 발탁하고 늘 돌봐준 조엄(趙曮) 대감이 노친이 계시니 경솔하게 하지 말고 형세를 관망하라고 충고한다. 15일에 마침내 장무서리 임세흥이 정순(呈旬: 辭任願書) 문서 및 장지(壯紙) 한 장을 가져와서 주고 갔다. 황윤석은 고민에 빠져 사흘간 출근하지 않았다. 7월 17일 일기에 장무서리가 어제 이제조(二提調) 댁에 가서 내가 아직 하인을 죄준 한 일로 출사(出仕) 않고 다시 정순 제출을 명했음을 고했다고 하였고, 7월18일 일기에 공방서리 홍우정(洪禹鼎)을 시켜 다시 정순을 제출케 했고, 이어서 장무서리를 시켜 다시 이조(吏曹)에 제출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주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황윤석은 심정이 복잡했다. “이 번 일을 세간에서 이야기하니, 다소 청렴한 의리인 줄은 모르겠으나 처신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고 기록했다. 상전의 권세를 둘러대어 공무보다 특정 사가(私家)의 일을 우선하는 서리를 징계했다가 겪게 된 마음고생은 9월 15일에야 일단락된다. 일제조인 해운군 이련(李槤)이 숙배(肅拜)하고 사조(辭朝)한 뒤에 황윤석을 만난 자리가 있었다. 일제조는 황윤석에게 과문(科文)의 각 체(軆)를 두루 공부했는지 묻고, 선세(先世)가 송시열(宋時烈)에 연원이 있다는 말이 사실인지를 묻고, 미음(渼陰:김원행)에 왕래하는 지를 물었다. 황윤석은 그런 사실 다음에 해운군의 옛 청지기 임세웅이 방자하게 굴어 내가 곤장을 친 일로 해운군이 내게 공무 집행[行公]을 하지 말라고 명했다가 조엄 대감을 통해 이 일이 무마되었으며, 해운군이 자신을 용서해준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고 기록했다. 하급 관원이 대갓집 청지기인 서리 한사람의 부당함을 징계하는 데는 자신의 현직을 걸어야 했다. 일이 해결된 다음에도 유감의 앙금이 알게 모르게 지속될 만큼, 그렇게 큰 심적 부담을 지는 일이었다.


둘째, 황윤석이 종 7품직인 종부시 직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서리들이 문서를 다루면서 하급관원들의 일상 업무 배정에 농간을 부리므로, 갈등이 빚어진 상황이 보인다. 1769년 12월 15일 일기에, 자신이 23일 납향(臘享)에 사직봉조관(社稷捧俎官)으로 차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서리 김문흠(金文欽) 면제시켜 달라고 거듭 부탁하고, 부득이하면 휘녕전(徽寧殿)으로 옮겨달라고 당부한 내용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사직(社稷)에 차출되었으면 옮겨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종묘봉조관(宗廟 捧俎官)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조 제향색서리(祭享色書吏)가 선공감 주부 홍경(洪儆)에게서 뇌물을 받고 황윤석과 역할을 교환시켰기 때문이다. 뇌물을 주면서까지 역할을 바꾼 이유는 종묘(宗廟) 12실 행례(行禮)는 가장 더딘 까닭에 그에 해당된 자는 심히 괴롭지만, 사직(社稷) 행례(行禮)는 오히려 빠른 까닭에 그랬던 것이다. 황윤석은 장무서리 임세흥에게 엄히 그 까닭을 따져 묻고 이조 제향서리에게 화급히 예전대로 하라고 명함으로써 다시 자신이 사직봉조관으로 가도록 상황을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이는 제향서리(祭享書吏)의 속임수이다. 내가 장차 그를 엄히 볼기 쳐서 제외시킬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이틀 뒤인 17일에 장무서리가 와서 다시 사직으로 환차(還差)되었음을 고했고, 19일에는 제향색서리가 자신이 제태(除汰)될까 심히 두려워 주선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1771년 2월 4일 일기에서 황윤석은 다시 서리의 농간에 자신이 당하는 것을 분하게 여기며 업무 배정이 부당함을 기록했다. 종부시 정(正) 최일민(崔日敏)은 7일 사직제(社稷祭)에 수차(受差)되고, 주부 홍귀서(洪龜瑞)는 6일 문묘동무분헌관(文廟東廡分獻官)에 수차되었다가 승은묘(乘恩廟) 전사관(典祀官)으로 옮겨가고, 자신이 문묘동무분헌관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조의 해당 색리(色吏)가 뇌물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 다음날, 황윤석이 제관으로 가야할 곳은 엉뚱한 곳으로 바뀐다. 2월 5일에 그는 동무분헌관으로서 수향(受香)하려다가, 대성전(大成殿) 전사관(典祀官)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급히 봉상시(奉常寺)에 가서 석존제물(釋奠祭物)을 배봉(陪奉)하여 성균관 전사청(典祀廳)에 도착해야 했다. 그는 종일 감수(監守)하고서 병이 날 것 같았다. 더구나 황윤석을 기분 나쁘게 한 것은 가야할 장소가 서리 맘대로 바뀐 것뿐 아니라, 역할 자체도 부당하게 떠맡겨진 것이라는 점이다. 황윤석은 이렇게 쓰고 있다. “옛 관례에 석존제관(釋奠祭官)은 협률랑 외에 모두 문관(文官)을 임명하고 전사관(典祀官)은 본관(本館) 참상(叅上) 전적과(典籍窠)에서 차출하는데, 근래 이조 제향색리(祭享色吏) 이한주(李漢柱)라는 자가 뇌물을 받고서 허다히 문관을 면차(免差)하고 음관(蔭官)으로 병차(並差)하는 까닭에, 지금 이 석존분헌관(釋奠分獻官) 가운데 홍준한(洪駿漢)ㆍ한용화(韓用和)ㆍ송한명(宋韓明)ㆍ이원상(李元祥)ㆍ정홍연(鄭弘淵) 등 7인이 모두 차출되고, 나는 참하(叅下)로서 차입(差入)되었으니, 가소롭다.” 황윤석은 무엇이 문제인지, 왜 부당한지, 환히 꿰뚫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더 이상 항의하지 않았다. 뇌물 받는 서리를 징계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리들은 예고도 없이 당일 아침에 제관으로 차출되었다는 통보를 해왔다. 2월 20일에는 장무서리가 와서 오늘 선릉(宣陵)에 한식(寒食) 전사관(典祀官)으로 차출되었다고 하므로, 황윤석은 깜짝 놀랐다. 그는 그날 과장(科場)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황윤석은 이유를 말하며 안 된다 하고, 급히 변통(變通)하려고 노력하여 겨우 변통하고서 달려가 종가(鍾街)에 도착했지만 이미 과장인 흥화문(興化門:경희궁) 이 닫혀 들어가지 못했다. 중앙의 벼슬아치라 하더라도 문벌가 출신이 아니고, 현재 권세가와 밀접한 관련이 없는 하급관원은 서리들에게 얼마든지 곤란을 겪을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반대로 하인이나 서리가 양반 관료들의 알력 사이에서 심부름을 하느라 겪는 고통 역시 컸다. 신분제 사회이니 당연히 하인들이나 서리들이 겪는 일상적 고통이 하급관원과는 비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황윤석의 일기에는 그런 고충을 이해하며, 자신이 하인을 위해 져주는 경우도 기록해두었다. 그가 의영고 봉사로 근무하던 1769년 6월 16일 일기이다. 의영고 하인 이한추(李漢樞)가 와서 내일 이주부(李主簿)가 출번(出番)하는데 이직장(李直長)이 일이 있어 체직(遞直)하지 않으려 한다고 고하며, 황윤석에게 입번(入番)할 것을 청했다. 황윤석은 “이는 필시 번(番)드는 일로 내게 불만을 품은 지 오래된 이직장이 등 떠밀어 부탁해서 그런 것일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이직장과 나 사이에서 번 드는 문제로 왔다 갔다 하던 이한추가 괴로움을 하소연하며 오열하니, 이에 내가 내일은 우선 이한추를 위해 번을 들겠다”고 말한다. 같은 해 11월 7일과 8일 일기에는 이틀 모두 장무서리가 와서 유주부(柳主簿)가 황윤석에게 당직(當直)을 대신해주기를 청한다고 고했는데, 황윤석이 거절한 사실이 보인다. 며칠 뒤인 11월 10일에도 같은 부탁을 받자, 황윤석은 결국 배사령(陪使令)에게 내일 체직(遞直)해 주겠다고 전하라고 하였다. 유주부같은 사람과 비교되기 싫다는 것이 이유였다. 권세가의 자제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당직 근무를 다른 관원에게 미루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떠맡지 않으려는 다른 관원과 갈등을 빚었는데, 그럴 때는 하인과 서리가 양쪽을 오가며 번거로운 심부름에 시달렸던 것이다. 1771년 6월 28일 일기에는 “경화(京華) 부유한 자제는 작록(爵祿)을 아낄 줄만 알고 번(番)을 드는 일은 전적으로 향리(鄕里)에게 미루는” 실정을 탄식하는 글이 보인다. 황윤석은 문벌이 없는데다 호남출신의 한미한 선비여서, 하급관원생활의 고달픔을 피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겪은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신분제 사회에서 서리나 하인의 고통이 하급관원에 비할 바가 아님은 상식적인 상황이기에 새삼스럽지 않고, 하극상처럼 보이는 갈등이 빚어진 것은 당시 사회 상황과 관련하여 새삼 주목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 장에서는 각사 서리, 특히 대갓집의 비호를 받는 각사 서리와 하급 관원의 갈등 상황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았다.


4. 맺음말

이상에서『이재난고』의 1778년 사복시, 그리고 1786년 전생서, 두 곳의 서리 및 하예 명단을 중심으로 18세기 중앙 각사의 서리들의 활동과 그들과 권세가와의 연계성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조 후기 서울의 각사 서리에 대한 학계의 선행 연구에 비추어 볼 때 서리들과 권세가의 연계성 문제는 기존에 보고된 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 하급 관료 생활을 했던 황윤석의 상세한 일기 기록을 통해, 서리들의 활동에 대해 그간 전혀 알 수 없었던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국면들을 알게 된 것은 본 연구의 의의라고 하겠다.


『이재난고』는 일기 자료인 까닭에 하루에 일어난 일이 시간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서, 그 자체로는 마치 CCTV 기록 테이프와 같다. 그 테이프 자체가 어떤 문제나 사건을 구성해서 그 인과 관계를 알려주지는 못하지만,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쳐서 접근하고자 할 때에는 결정적 단서를 준다. 뿐만 아니라 그 기록을 자세히 살피면 그 기록 내에 있는 사건 간의 인과 관계와, 기록자의 내밀한 심리 및 의식 상태를 재구성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본 연구는 그런 점에 착안하여 18세기 각사 서리들에 대해 그 활동상과 인맥관계를 고찰하였다. 서리들이 대갓집 권세가와 연계되어 있음으로 해서 생겨나는 하급관원과의 갈등 양상은 그간 학계에 보고된 바가 없었기에, 비록 미세한 사건을 통해서나마 서리들의 실무 농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18세기 각사 서리들의 일상 생활과 실무 행정 속에서의 인간관계를 살펴보는 데는 유익했지만, 이들이 겸하여 도가(都家) 활동을 한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들과 연계된 대갓집과 관련하여 고찰하지는 못했다. 서리들의 숫자와 대갓집의 재정 및 권세가 지닌 상관성을 고찰할 수 있어야 이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과 분석이 가능할 터이나, 필자가 고전문학연구자로서 가져온 관심과 역량으로는 그 문제에 접근하거나 그 문제가 가진 깊은 의미를 알아차리기 힘든 영역이었음을 밝힌다.

- 한국실학학회 2009.05.10

 

출처 : 가야산역사문화연구회
글쓴이 : 내포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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