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추보속해 후〔推步續解 後〕
2018. 3. 31. 22:36ㆍ과학 이야기
추보속해 후〔推步續解 後〕 |
남병철 지음
노대환 옮김
청나라 초부터 지금까지 2백여 년 동안 석학들이 연달아 나오면서 경학이 크게 갖추어지고, 실사를 구시하여 육예(六藝)가 밝혀짐으로써 상수학(象數學)을 유자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왕 효암(王曉菴)ㆍ매 물암(梅勿菴)ㆍ완 운대(阮芸臺) 등 제공이 혹은 전문적으로 힘을 쓰거나 혹은 경서를 공부하며 곁가지로 통하였는데, 정밀하고 심오한데 도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강 신수(江愼修) 선생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어째서인가? 서양 역법을 확신하여 헐뜯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서법을 믿고 헐뜯지 않고 그것을 취하였는가? 그가 공평하기 때문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인가?
순임금 때에는 선기(璿璣 천체의 좌표를 측량하는 의기)로 관찰하였고, 주나라 때는 토규(土圭 해의 그림자를 측량하던 기구)로 측량하였으니 즉 보산술(步算術 추보하고 계산하는 기술)이 삼대시대에 모두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주인(疇人 천문ㆍ역학을 담당하는 관리) 자제들이 주나라가 망하면서 나누어 흩어져 희화씨(羲和氏)의 법수(法數)가 전해지지 않아 잡술이 뒤섞이고 망녕된 작법이 어지러이 생겨났다. 한나라와 위나라 때 사용한 법은 거의 도참에 가까웠고, 당나라와 송나라 때 사용한 방법은 부연하여 짓기에 얽매였으니,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숫자는 전하는 것이 진짜가 아니며, 원(元)ㆍ회(會)ㆍ운(運)ㆍ세(世)의 편은 말의 근거가 없다. 관상감 벼슬을 맡은 자들이 천체의 운행과 합치하기 위해 하늘을 징험하였지만 잃은 것이 더욱 심해져 이 때문에 전리(躔離 해와 달이 운행하는 길)가 어긋나고 교식(交食 일식과 월식)이 어그러짐이 어느 시대엔들 그렇지 않았던가? 비록 대대로 역법을 바꾸어 후대로 갈수록 점차 정교해졌지만 아는 것이 정밀하지 않고 언급한 것은 상세하지 않아 막힌 것이 여전하고 쓸모없는 것은 제거되지 않았다.
만력(萬曆,1573~1619. 명나라 신종의 연호) 연간에 서양 역법이 처음 중국에 들어왔는데 지금은 그 법을 사용하여 시헌력(時憲曆)을 만든다. 중국 선비들이 이에 그 기술에 통하여 전보다 아는 것이 더욱 정밀해지고 말하는 것이 더욱 상세해졌을 뿐만이 아니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것을 얻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또한 중국이 본래 가지고 있는 법이지만 통하지 못했던 것을 서양 역법으로 인해 비로소 통하게 된 것도 있었다. 그로 인해 서양 역법이 정밀하고 명확하며 간편하고 수월하기가 중국보다 훨씬 나은 것을 알게 되자 중국 선비들이 그것을 병통으로 여겨 위문괴(魏文魁)ㆍ오명훤(吳明烜)ㆍ양광선(楊光先) 등이 전후로 서양 역법을 헐뜯어 배척하였다. 그러나 헐뜯어 배척한 이유가 모두 망령되고 제멋대로이며 단지 의기(意氣)로만 이기려고 하였던 까닭에 거의 대개 스스로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총명하고 학식 있는 선비들이 서법을 헐뜯어 배척할 수 없음을 알아 교묘한 수단으로 빼앗는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지원설(地圓說)에 대해서는 《대대례(大戴禮)》에서 징험하고, 이차(里差)에 대해서는 《주비경(周髀經)》에서 징험하였으며, 혼개상통(渾蓋相通)에 대해서는 최영은(崔靈恩)의 논리에서 징험하고, 청몽유차(淸蒙有差)에 대해서는 강급(姜岌)의 이야기에서 징험하였으며, 구중천이 겹겹이 땅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초사(楚辭)〉에서 징험하고, ‘칠요이도(七曜異道)’에 대해서는 극맹(郄萌)에게서 징험하였으며, 태양에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은 《고령요(考靈曜)》의 ‘지유사유(地有四遊)’에서 징험하고, 항성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세차가 된다는 것은 주자의 ‘마땅히 태허(太虛)를 먼저 논한 후에 천행(天行)을 논해야 한다.”는 것에서 징험하고, 오성(五星)에 본륜(本輪)과 차륜(次輪)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소강절(邵康節 강절은 소옹(邵雍)의 시호)의 ‘별은 달을 따르고 달은 태양을 따르고 태양은 하늘을 따른다.’는 것에서 징험하였으며, 360정도(整度)에 대해서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서 징험하였다. 털끝 만큼이라도 비슷하다고 의심되는 것이 있으면 제멋대로 해석하고 부연하여 끌어다 합쳐 증거로 삼았으니 심지어 나선(螺旋)ㆍ아륜(牙輪 자명종의 톱니바퀴)의 자잘한 것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일과 한 가지 물까지 빼앗아 중국의 법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 없고 또한 중국의 방법을 끌어다 증거로 삼지 않음이 없으니 진실로 이상하다.
만약 그 말대로라면 서양 역법은 모두 중국이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인데 스승의 가르침이 이미 끊어져 전해지지 않는 것이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의 조상이 아름다운 집이 있었는데 그 자손이 수리하지 못해 무너지게 되어 다른 사람이 그 제도를 따라 짓자 그 자손이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섬돌을 펼쳐 놓은 것, 이는 우리 집안의 법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기둥으로 버티어 놓은 것, 이는 우리 집안의 법이니 이 역시 우리 집이다.’라고 하며 마침내 빼앗아 거처하는 것과 같으니 천하에 이러한 이치는 없다. 중국의 인사들이 서양 역법에 대해 혹시 이와 가깝지 않은가? 더욱이 이러한 것을 존화양이의 학문으로 삼는 까닭에 지식이 더 나은 것을 볼 적마다 그 폐단이 더욱 심해진다.
역법은 천상(天象)을 검증하는 것을 으뜸으로 여긴다. 삼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혹은 개천(蓋天)으로 하고 혹은 혼천(渾天)으로 하였으며, 혹은 원운동으로 보기도 하고 타원 운동이라고 하였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대상(大象 우주)은 고요하고 여러 별들은 벌려 있다. 중국이든 서양이든 따지지 않고 오직 정밀하게 관측하고 교묘하게 계산하는 것이 합당하다. 저 일ㆍ월ㆍ오성이 어찌 인간 세상에 존화양이의 뜻이 있는 것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서양 역법으로 하면 검증되는 것이 많고 중국 역법으로 하면 검증되지 않는 것이 많은 이런 사실은 원망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다만 하늘의 검증 여부를 논할 뿐 사람의 화이를 논하지 않는 것이 옳다. 역상은 비록 유자의 일이기는 하지만 한 가지 기예에 불과하며 서양인들이 능한 바이다. 지(知)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의 덕(德)과 효(孝)ㆍ우(友)ㆍ목(睦)ㆍ연(婣)ㆍ임(任)ㆍ휼(恤)의 행(行)과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의 예(藝)를 모두 통하는 것은 중국의 선비들이 능한 바이다. 따를 것과 물리칠 것은 실로 여기에 있다. 또한 배척하는 것은 그 사람을 배척하는 것이지 그 능한 바까지 아울러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곤(鯤)의 성과 걸(桀)의 기와를 어찌 곤과 걸이 나쁘다고 해서 폐하였던가? 저 서양인들은 9만 리 바다 밖에 있는 어리석은 오랑캐들이다. 요순의 교화를 받지 못하였고 예악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여 재화의 이익을 목숨처럼 여기는 까닭에 강약이 서로 잡아먹는 것을 염려하고 근심하여 오직 기계와 술수에만 힘을 쓴다.
서양 사람들은 머리가 둥글고 발이 모난 것은 사람과 닮았지만 그 성질은 편벽되는데, 그 성질이 편벽된 까닭에 총명과 지각 역시 편벽되었다. 편벽되면 쉽게 매달리고 매달리면 쉽게 지혜로워지기 때문에 그 하는 바가 때로는 철저한 것이다. 편벽되면 좁고 좁으면 두루 통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하는 바가 때로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저들의 역법이 중국보다 나은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측험에 정밀한 점이다. 측험의 정밀함은 실로 한 사람, 한 때의 능함이 아니라 그 몸에서 끝이 나면 대대로 전하여 천백 인으로 무리를 이루고 천백 년으로 기한을 삼아 부지런히 쉬지 않으므로써 얻은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편벽되면 전문하고 전문하면 슬기롭다는 것이니, 어찌 그 총명지각이 중국사람보다 나아서 그런 것이겠는가? 비유하자면 비바람은 사람이 예측하기 어렵지만 날짐승은 바람이 불 것을 알고 들짐승은 비가 올 것을 안다. 사람이 날짐승이나 들짐승과 바람이 언제 불고 비가 언제 올지 아는 것을 겨룬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중국의 인사들도 서양 역법을 이처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저 서양인들이 기계가 정리하고 술수가 미묘한 것으로 중국에 자랑하면서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것은 하나는 교역을 위해서이고 하나는 천주교를 퍼뜨리기 위해서이다. 서양의 이른바 교(敎)라는 것은 허황하고 탄망하며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여서 조금이라도 분별이 있는 자라면 반드시 사람에게 화를 끼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점점 천주교 속으로 빠져 지금 ‘이천피발(伊川被髮)’의 탄식이 없는 곳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생각하건대 저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이 서양의 기계가 정밀하고 수술(數術)이 미묘한 것을 보고 말하기를 ‘저들의 기계와 수술의 능함이 이와 같으니 그 이른바 교라는 것 역시 그와 같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더 많은 사람들을 물들게 하는 것이다. 중국의 선비들 또한 간혹 이를 근심한 까닭에 저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빼앗아 사람들로 하여금 저들이 정밀하고 미묘한 것은 사실은 중국이 가지고 있던 것이며 저들이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님을 알게 하니 부러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역법에서 중국과 서양을 심하게 따지는 것은 이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말하건대 “그렇지 않다. 중인 이하는 모두 기계와 술수도 모르니 교에 물드는 것이 이 때문이 아니다. 중인 이상은 다른 사람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교가 패악함을 알고 있으니 교에 빠지지 않는 것은 또한 이 때문이 아니다. 교에 물드는 일은 마땅히 따로 논의해야 할 것이다.”
역학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고 모르는 사람은 많은데 하물며 중국과 서양의 역법을 분별하여 근원을 거슬러 궁구하는 일은 박학다문(博學多聞)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진실로 이 때문에 사람들의 미혹을 깨우치고자 한다면 그 계책은 매우 우원한 것이다. 좋은 것을 좋게 여기고 좋지 않은 것을 좋지 않게 여기는 것이 충(忠)과 신(信)의 일이다. 사람을 대하는 도리는 충신이 귀함이 되며 이적을 대하는 도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부자(夫子)께서는 “말이 충신(忠信)하고 행실이 독경(篤敬)하면 비록 오랑캐의 나라라고 하더라도 행해질 수 있다.”고 하셨다. 처음 이마두(利瑪竇)ㆍ탕약망(湯若望)의 무리가 역산의 방법을 가지고 중국에 왔을 때 서광계(徐光啓, 1562~1633)ㆍ이지조(李之藻, 1564~1630) 등이 서국(西局)을 설치하도록 청하여 번역해서 《숭정역지(崇禎曆指)》를 만들었는데 이는 그것을 좋게 여긴 것이다. 번역한 후 의론이 분열되어 마침내 사용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그것을 좋지 않게 여긴 것이다. 그 후에 청인들이 드디어 그 책을 사용하니 이는 또 그것을 좋게 여긴 것이다. 사용한 지 10년 만에 양광선 등 여러 사람의 말로 인해 다시 폐기하였으니 이는 또 좋지 않게 여긴 것이다. 그 5~6년 후에 양광선이 패하여 다시 그 법을 사용하니 이는 또 좋게 여긴 것이다. 법은 진실로 하나인데 좋게 여기고 좋지 않게 여기는 것이 무상하였다. 저들은 본래 교활하여 이미 중국에 정견이 없음을 엿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역법에 소략한 것이지 덕이 한결같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로는 비록 폐기한 일은 없었지만 문학하는 인사들이 경전을 고증하여 샅샅이 뒤지고 찾아내어, 서양인들이 처음 얻었다고 일컫는 묘한 것을 모두 빼앗아 중국의 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빼앗은 바의 사유는 역시 구차함이 많다. 또 서양인들은 이미 중국에 오랫동안 거처하여 언어에 통하여 문자를 해독하니 하나하나 그 이야기를 살펴 그것에 성심(誠心)과 양선(揚善)의 뜻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에 능한 것을 질투한다고 의심하고 좋은 것을 훔치려는 것으로 알아서 그 서운한 바가 모르고 진퇴하는 것이나 근거 없이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보다 더욱 심하였다. 이에 중국을 가벼이 여기고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겨났다.
근일에 전문한 바로 논하더라도 저들이 과연 중국을 가벼이 보고 업신여기는 마음이 없어, 중국 재상은 재물과 이익으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자연 8백 만 냥의 뇌물은 없었을 것이며, 그 뇌물이 없었다면 자연 그 뇌물을 받고 부탁을 배반했다는 원망이 없었을 것이며, 그 원망이 없었다면 천진(天津)에서 창궐하고 황성에서 충돌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니 이는 충신으로 이적에게 미쁨을 보이지 못해 스스로 모욕하고 모욕이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일의 실마리가 각기 다르고 경중이 같지 않아 이 일을 역법의 변론에 그 허물을 돌릴 수는 없지만 이적에게 체모를 잃어 저들의 마음을 열복시키지 못한 것은 한 가지이기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일찍이 왕 효암을 보았더니 수치와 이론에 모두 지극하였고 측험 또한 정밀하여 고 정림(顧炎武, 1613~1682) 선생이 일찍이 말한바 ‘학문이 천인에 대해 궁구하여 확고하여 꺾이지 않는 자’였다. 그는 중국 역법을 견지하여 힘써 서양의 학술을 공격한 것이 특히 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법은 전차(躔次 일ㆍ월ㆍ별 등이 운행하는 길)를 적도를 따라서 계산하지 않고, 할원은 세제곱으로 수치를 얻어내는 방법을 쓰지 않았으며 다른 것은 불과 축한(逐限)ㆍ종소(從消) 등 새로운 이름을 세운 것뿐인데 그 실은 즉 서양 역법을 사용한 것으로 역시 모두 서양의 방법을 통해 얻은 것이다.
매 물암은 필생의 정력을 축적하여 한 가지 예에 종사하여 이로써 정미한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고 변화를 신명하는 데 도달하였고 서양 역법에 대해 발명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항기주력(恒氣注曆)’과 ‘십이궁호(十二宮號)’에 대해 논변을 그치지 않았는데 그 가부는 이미 정론이 있다. 무릇 이 두 가지는 원래 역리에 크게 관계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말을 늘어놓았으니 바로 이른바 서양인들의 자질을 녹여 중국의 틀에 귀속시킨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완 운대는 경술과 문학이 천하의 종장이 되고 백가(百家)를 두러 섭렵하여 삼물(三物)에 모두 통하고 옛 교훈을 본보기로 삼고 실용에 힘을 쏟았다. 일찍이 여러 역사서를 모으고 여러 책들을 널리 수집하여 위로 황제부터 아래로 근세에 이르기까지, 바깥으로는 서양까지 덧붙여 역법산학지인을 기록하여 《주인전(疇人傳)》을 지었다. 재신(梓愼)ㆍ비조(裨竈)의 이야기나 태을(太乙)ㆍ임둔(壬遁)의 방술과 같이 내학(內學 참위학이나 신선술)에 연관된 것은 하나도 수록하지 않았으니 그 명분과 의리가 바른 곳으로 돌아간 것을 볼 수 있다. 후대의 독자는 비로소 역산이 본래 유자의 실학이며 고금의 명공 대유 가운데 이에 종사한 이들이 매우 많은 것을 알아 거의 향모하는 마음이 일게 될 것이다. 또 그의 논평은 본원을 환히 보았고 철저하게 살펴 시비가 공정하고 취사가 올발랐다. 오묘한 것을 가려낸 취지와 시비를 분별한 뜻으로 후학을 깨우치기를 마치 손바닥을 보듯 하였다. 이것은 비록 용법과 예제(例題)를 내세워 일가의 말을 세운 것과는 규모가 다르지만 역산지학에 대한 공은 실로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없다. 그러나 중국 역법을 거들고 서양 역법을 깎아내린 것은 또한 지나침을 면치 못하였고, 곳곳마다 장황하여 읽기에 지루하다. 나는 운대의 학문에 대해 일찍이 마음으로 열복하였지만 다만 이 한 가지만은 감히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오직 강 신수만이 서법을 확신하여 일찍이 비방하여 헐뜯지 않았다. 다만 그 편부를 논의하면서 다만 견지한 의론이 공평하여 과격하게 돕거나 억압하는 말이 없으니 이 때문에 매각성(梅瑴成)과 같은 이는 강 신수가 서양인들에게 아부했다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강신수 역시 중국의 학자로 그의 경학과 문장은 세상의 통유(通儒)가 되고 그가 저술한 바가 세상에 퍼져 있으니 그 글을 읽으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서양인들에게 아부했다고 하는 것인가? 이는 구구절절 변론할 것도 없다. 선생의 뜻은 역상 한 가지 기술이, 서법이 과연 중국보다 낫다면 좋은 것은 감출 수 없으며 이미 그 기술로 인해 우리가 얻는 바가 많다면 그 효험이 없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도(道)를 가지고 도리어 그 도를 해치는 것은 군자가 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설령 따질만한 것이 있더라도 늘 여유를 지녔으니, 많은 사람들이 남의 사소한 허물을 찾는 습성과는 닮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선생이 박식한 고증의 학문으로 단간잔편(斷簡殘編)을 뒤져서 훔치고 빼앗으며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남들과 달랐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서로 시비를 분별하는 것은 오직 사군자만이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오직 선한 사람만이 거리낌 없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고 선인이 아니면 조금이라도 그 뜻을 거스르면 의심과 분노가 생긴다. 저 서양인들이 사군자인가? 선인(善人)인가? 더욱이 그 역산은 저들이 믿고 아끼는 것이다. 그 믿는 바를 비난하고 그 아끼는 바를 빼앗았으니 그들의 성질이 불끈하는 것이 당연히 어떠하겠는가. 또 하물며 주공과 공자는 모르고 단지 윤선과 화포만 아는 자들과 어찌 장단을 비교하며 선악을 논하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선생이 서법을 훼손하지 않은 점을 취한 것은 단지 역산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적을 대하는 방법에 있어서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동이(東夷)의 사람이다. 군자는 먼저 근심하고 나중에 즐거워한다. 비록 감히 자처할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원하는 것은 공자를 본받는 일이고 바라는 것은 중화(中華)에 사는 것이다. 늘 바깥소식을 들을 때마다 홀어미의 탄식을 금할 수 없어 역법에 대한 논설을 빌어 그 대략을 밝혀 면수(沔水)ㆍ학명(鶴鳴)의 뜻에 붙인다. 우리나라의 근심에 대해서는, 보잘 것 없는 재주로 상경(上卿 정1품과 종1품의 판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낭묘(廊廟 조정)의 일은 감히 모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좋은 계책을 이야기할 것이 없으니 또 감히 사사로이 논하지 않는다.
[주D-001]상수학(象數學) : 고대 중국에서 물상(物象)을 부호화ㆍ계량화하여 사물의 관계와 변화를 헤아리던 학설. 역학(易學)의 분과 학문으로 상(象)은 사물이 처음 생겨났을 때의 모양이고, 수(數)는 사물이 번식한 모양으로, 모든 사물은 먼저 모습이 생긴 다음에 번식하여 수(數)가 상(象)에서 비롯하여 생겨난다고 파악한다. 《춘추좌씨전》에 “만물은 태어난 이후에는 모양〔象〕이 생기고, 모양이 생긴 이후에는 불어나며, 불어난 이후에는 숫자〔數〕를 갖게 된다.”라고 하였다.
[주D-002]왕 효암(王曉菴) : 명말 청초의 학자 왕석천(王錫闡, 1628~1682). 서양의 수학과 역학에 정통하였다. 스스로 신법(新法)을 만들어 이를 이용해 일식과 월식을 관측하였다. 저서에 《효암신법(曉庵新法)》이 있다
[주D-003]매 물암(梅勿菴) : 명말 청초의 학자 매문정(梅文鼎, 1633~1721). 명말 이래 수입된 서양의 수학에 능통해서 전통 수학과 조화시켰다. 1675년(강희14) 《숭정역서(崇禎曆書)》를 처음 알게 되면서 40년간 벼슬하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천문 역산에 관한 저서가 80여 종에 이른다.
[주D-004]완 운대(阮芸臺) : 청나라 문신ㆍ학자 완원(阮元, 1764~1849). 1789년(건륭54)에 진사가 되고, 편수(編修)에 올랐다. 조정의 요직을 역임했고, 회시총재(會試總裁)를 지내기도 하였다. 청나라 여러 학자의 경학에 관한 저술을 집대성하여 1829년(도광9) 《황청경해(皇淸經解)》 1,408권을 편찬하였고, 《적고재종정이기관지(積古齋鐘鼎彛器款識)》 등을 저술하여 청나라 고증학을 집대성하였다.
[주D-005]강 신수(江愼修) : 청나라 학자 강영(江永, 1681~1762). 혜동(惠棟) 중심의 오파(吳派)와 함께 고증학의 양대 계통을 이루었던 환파(皖派)의 핵심 인물로 박학풍을 견지하였다. 특히 천문역학 방면에 뛰어나 《수학(數學)》(8권)과 《추보법해》(5권)를 남겼다
[주D-006]원(元)ㆍ회(會)ㆍ운(運)ㆍ세(世) : 북송의 학자 소옹(邵雍)이 내놓은 지난 역사의 연대를 추산하는 이론. 세상의 시작부터 소멸까지의 한 주기를 1원(元)으로 삼고, 1년 12개월, 1월 30일, 1일 12시진(時辰), 1시진 30분의 수치를 이용하여 천지의 역사를 계산하였다. 즉 1원은 12회(會)이고, 1회는 30운(運)이고, 1운은 12세(世)이고, 1세는 30년(年)으로 1원의 수는 12만 9,600년이 된다. 세상은 이처럼 시작하여 끝나고, 끝나면 다시 시작되어, 부단히 반복 순환한다고 보았다.
[주D-007]양광선(楊光先) : 명나라 말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 천문과 역학에 종사하며 성과를 내면서 흠천감에 서국(西局)이 증설되는 등 서학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중국인들 가운데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위문괴ㆍ오명훤ㆍ양광선은 그러한 움직임을 주도하던 인물들이다. 특히 양광선은 1665년 흠천감 감정(監正)에 오르자 오명훤을 불러들여 이전의 역법을 다시 쓰게 하는 등 반(反)서학 정책을 주도하였다. 양광선은 자신의 저서 《부득이(不得已)》에서 “차라리 중국에 좋은 역법이 없을지언정 중국에 서양인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서양인들에 대해 반감이 깊었다.
[주D-008]지원설(地圓說)에 …… 징험하고 : 《대대례(大戴禮)》는 한나라 때의 대덕(戴德)이 공자의 72제자의 예에 관한 설을 엮은 책이다. 그 가운데 선거리(單居離)가 스승 증자에게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지다 하는데 그렇습니까?”라고 묻자 증자가 “만일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지다고 한다면 사방의 각(角)을 가릴 수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한 내용이 나온다. 증자의 이 대답은 지구를 둥글다고 보았던 증거로 이용되었다. 매문정은 이를 근거로 지원설을 주장하였고(매문정, 《역학의문(歷學疑問)》 권1 〈논천원가신(論天圓可信)〉) 조선에서도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지구설이 《대대례기》에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서명응, 《선구제(先句齊)》 〈일전제(日躔齊):유기가감(遊氣加減)〉).
[주D-009]이차(里差)에 …… 징험하였으며 : ‘이차’는 지역 간의 경도차를 말한다. 《주비경》은 후한 무렵에 편찬된 《주비산경(周髀算經)》을 말하는데 이광지(李光地 1642~1718)는 시헌력의 ‘이차’에 관한 설이 《주비산경》의 그것과 합치한다고 주장하였다.(이광지, 《용촌집(榕村集)》 권20 〈역법(曆法)〉 참조.)
[주D-010]혼개상통(渾蓋相通) : 중국 명나라 말기 이지조(李之藻, 1565~1630)는 중국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인 이마두[利瑪竇;Matteo Ricci]에게 ‘별을 관측하는 쟁반’이라는 성반(星盤, astrolabe)에 대하여 배우고, 후일 도설(圖說) 형태로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 2권을 지었다. 이지조는 〈서문〉에서 ‘혼개통헌’이라는 책이름을 풀이하여 “전체 그림은 ‘혼(渾)’이 되고, 원을 나눈 것은 ‘개(蓋)’가 된다.(全圖爲渾, 割圓爲蓋.)”라고 하고, ‘혼천(渾天)’과 ‘개천(蓋天)’은 천상을 관측하는 방법에 있어서 서로 통하며 단지 관측의 각도가 다를 뿐이라고 하였다.(남병철 편, 남문현ㆍ진구금(陳久金) 역, 《국역 의기집설 하권》 〈혼개통헌의〉,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3, 185~186쪽 참조.)
[주D-011]혼개상통(渾蓋相通)에 …… 징험하고 : 최영은은 남조 양 나라 사람으로 혼천설과 개천설을 통합하여 하나로 이해한 인물이다. 《주인전(疇人傳)》 권6 〈갈홍(葛洪)〉조에 “혼천설과 개천설이 예전부터 어지러웠는데 최영은이 혼천과 개천을 하나로 하였다.(渾蓋自古紛, 崔靈恩以渾蓋爲一.)”는 구절이 보인다.
[주D-012]청몽유차(淸蒙有差)에 …… 징험하였으며 : ‘청몽유차’는 대기의 굴절에 의해 천체가 실제보다 더 높이 떠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말하는데 완원 《주인전》 권6 〈강급(姜岌)〉조에서 “서양인들이 말하기를 몽기차가 낮은 것을 높게 올리기도 하고 작은 것을 크게 비추기도 한다고 했는데 강급의 말과 딱 합치한다.(西人言蒙氣差, 能升卑爲高, 映小爲大, 與岌所稱正合.)”고 하였다.
[주D-013]구중천이 …… 징험하고 : ‘구중천’은 하늘이 9겹의 천구가 지구를 둘러싸고 있으며 일ㆍ월ㆍ행성 등이 각기 다른 하늘에 위치하고 있다는 우주론을 말한다. 이마두의 《천주실의(天主實義)》에 소개되어 있는데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천문’에도 “둥근 것은 아홉 겹이니 누가 재랴.(圜則九重, 孰營度之.)”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주D-014]칠요이도(七曜異道)에 …… 징험하였으며 : ‘칠요’는 일ㆍ월ㆍ수성ㆍ화성ㆍ목성ㆍ금성ㆍ토성을 말한다. 한나라 사람 극맹은 〈선사상전(先師相傳)〉에서 일월ㆍ오성의 운동은 일정치 않고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아 다르게 운동한다고 주장하였다.(山田慶兒, 〈중국 우주론의 형성과 전개〉, 《중국전통문화와 과학》, 창작과 비평사, 1986, 144쪽 참조.)
[주D-015]태양에 …… 징험하고 : 《고령요(考靈曜)》는 《상서위(尙書緯)》의 일종으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데 여기에 ‘지유사유’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지유사유’는 동지에는 땅이 북으로 올라가며 그로부터 서쪽으로 움직여 3만 리를 갔다가 하지에는 남으로 내려가며 그로부터 동쪽으로 움직여 3만 리를 간다는 주장이다. 북극성의 운동을 지구의 공전이 아니라 땅의 회전운동으로 본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山田慶兒, 앞 논문, 151~152쪽 참조.)
[주D-016]항성이 …… 징험하고 : ‘세차’는 지구의 자전축 방향이 해마다 각도 50.26초씩 서쪽으로 이동하여 춘분점과 추분점이 조금씩 앞당겨지는 현상을 말한다. 주자의 이야기는 《주자어류(朱子語類)》 권2 〈이기(理氣)〉 하(下), “역법에 대해 계통(남송대의 학자 채원정(蔡元定))의 이론은 마땅히 먼저 하늘의 운행을 논의한 다음에 칠정(일ㆍ월ㆍ금성ㆍ목성ㆍ수성ㆍ화성ㆍ토성)을 논의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이것도 역시 좋지 못하다. 마땅히 먼저 태허에 대해 논의한 다음에 365와 4분의 1도를 살펴서 각각의 위치를 정한다. 그리고 하늘의 운행에 대해 논의한 다음에 하늘의 도수를 살펴 1년을 구분한 가상적인 수치를 계산해야 한다. 1년의 구분이 결정된 후에야 비로소 칠정이 가지런할 수 있다.(曆法, 季通說, 當先論天行, 次及七政, 此亦未善, 要當先論太虛, 以見三百六十五度四分度之一, 一一定位. 然後論天行, 以見天度, 加損虛度之歲分. 歲分旣定, 然後七政乃可齊耳.)”에 보인다.
[주D-017]오성(五星)에 …… 징험하였으며 : 본륜과 차륜은 서양 천문학의 천체운행론에서 상정하고 있는 운행 궤도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嘉数次人, 〈江戸時代の天文学〉(5), 《天文敎育》20-2, 2008, 9쪽 참조.) 소옹(邵雍 1011~1077)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권14 〈관물외편(觀物外篇)〉하(下)에는 “日隨天而轉, 月隨日而行, 星隨月而見, 故星法月, 月法日, 日法天.”이라고 하여 태양, 달, 별이 각기 다른 궤도를 움직이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주D-018]360정도(整度)에 …… 징험하였다 : 360정도는 주천(周天 하늘의 별자리가 한 바퀴 돌아서 처음으로 돌아오는 것)의 도수를 360도로 정한 것을 말한다. 반면 동양 역법에서는 주천의 도수를 대개 365와 4분의 1로 사용하였다. 360정도가 《황극경세서》에 있다는 내용은 청대 학자 진혜전(秦蕙田)의 《오례통고(五禮通考)》 권181 〈가례(嘉禮)〉 54, “서역의 여러 법은 모두 360정도를 사용하니 소 강절의 은밀한 도와 합한다.(西域諸法, 幷用三百六十整度, 合乎邵子藏諸用之道.)”에 보인다.
[주D-019]개천(蓋天)으로 …… 하였으며 : 원문의 ‘개지’는 방형의 땅을 반구형의 하늘이 덮고 있다는 개천설을 말하고, ‘혼지’는 구형의 하늘 안에 방형의 땅이 들어 있다는 혼천설을 가리킨다.
[주D-020]원운동으로 …… 하였는데 : 오랫동안 사람들은 하늘을 운행하는 천체의 움직임이 원운동일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을 타원으로 설정하였다.
[주D-021]이천피발(伊川被髮) : 주평왕(周平王)이 동천(東遷)하였을 때 대부 신유(辛有)가 이천(伊川)에 갔다가 그 곳에서 산발하고 들에서 제사지내는 자를 보고는, “백년이 못 되어 이곳이 융(戎)이 되리라. 예가 먼저 없어졌구나.” 하였는데, 양왕(襄王) 때에 진(晋)나라가 육혼(陸渾) 땅의 융을 이천으로 옮겼다는 고사를 말한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2년조 참조.)
[주D-022]말이 …… 있다 :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可行.(《논어》 〈위령공(衛靈公)〉.)
[주D-023]서광계(徐光啓) : 명나라 문신ㆍ학자. 1604년(만력32) 진사가 되었다. 중국에 와 있던 이마두[利瑪竇;Matteo Ricci]를 만나 그에게 서양 천문학과 수학을 배웠으며 천주교도 신봉하여 1603년 세례를 받았다. 선교사들이 구술한 것을 한역하여 《기하원본(幾何原本)》 6권을 완성하였고 《숭정역서》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주D-024]이지조(李之藻) : 명나라 문신ㆍ학자. 1598년(만력26) 진사가 되었다. 서광계와 함께 이마두[利瑪竇;Matteo Ricci]에게 서양과학을 배우고 세례도 받았다. 용화민(龍華民), 탕약망(湯若望) 등과 함께 서양의 천문ㆍ수학서 등을 번역 소개하였다. 저서로 《원용교의(圓容較義)》와 《신법산서(新法算書)》ㆍ《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ㆍ《천학초함(天學初函)》ㆍ《동문산지(同文算指)》 등이 있다.
[주D-025]숭정역지(崇禎曆指) : 1631~1634년에 완성된 《숭정역서(崇禎曆書)》를 말한다. 일식ㆍ월식의 관측, 특히 1629년 여름 일식 때에 재래의 역법과 서양역법의 추산정도(推算精度)가 비교되어 우수성이 판명되자, 서광계(徐光啓)ㆍ이지조(李之藻)와 탕약망 등이 서양역법을 적용하여 편찬하였다.
[주D-026]덕이 …… 아니었다 : 《서경(書經)》 〈함유일덕(咸有一德)〉에 “덕이 한결같으면 매사에 길하지 않음이 없고 덕이 한결같지 못하면 매사에 흉하지 않음이 없다(德惟一, 動罔不吉; 德二三, 動罔不凶.”)는 내용이 나온다.
[주D-027]학문이 …… 않는 자 : 亭林先生廣師篇云, 學究天人, 確乎不拔 吾不如王錫闡.(진강기(陳康棋), 《낭잠기문(郎潛紀聞)》 권8.)
[주D-028]전차(躔次)를 …… 않았으며 : 서양천문학에서는 황도를 중심으로 천체의 위치와 변화를 계산한 반면 동아시아 천문학에서는 적도를 중심으로 계산하였다. 할원술은 천구상의 위치와 각도의 차이를 나타낼 때 필요한 것인데, 서양에서는 구면삼각법이라는 완벽한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평면상에서 곡선을 자잘한 직선의 변화가 합쳐진 것으로 보고 계산하였다. 따라서 왕석천이 ‘전차를 적도를 따라 계산하지 않고, 할원은 세제곱으로 수치를 얻어내는 방법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방법이 아닌 서양 역법을 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분의 해석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용훈 교수의 자문을 받았다. 지면을 빌어 전용훈 교수께 감사를 드린다.
[주D-029]축한(逐限)ㆍ종소(從消) : ‘한’은 각도의 한계를 나타내는 개념이며, ‘소’는 원주율 계산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전용훈, 〈조선후기 서양천문학과 전통천문학의 갈등과 융화〉,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4, 108쪽 주341 참조.)
[주D-030]항기주력(恒氣注曆) : 매문정이 “今以定氣註曆”이라고 하여 정기법을 쓰는 것을 비판했던 것과 비교하면 원문의 ‘注曆’은 ‘註曆’의 오기로 생각된다. 시헌력 도입 이전 중국에서는 절기를 배치할 때 태양의 운행과는 상관없이 1년의 길이인 365와 4분의 1을 24개로 평균 분할하는 항기법(恒氣法)을 사용하였다. 반면 시헌력은 태양의 일주를 360도로 보아 15도마다 절기를 하나씩 배치하는 정기법(定氣法)을 사용하였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정확한가를 놓고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 매문정은 정기법을 쓰는 것은 “사람들이 미혹되고 선왕 계절을 바르게 했다는 이치에 어둡게 되는 것”이라며 정기법의 채택을 비판하였다. 논란에 대해서는 전용훈, 앞 논문, 118~123쪽 참조.
[주D-031]십이궁호(十二宮號) : 12궁은 황도(黃道)의 둘레를 12부분으로 나눈 것을 말하는데 중국에서 역법에 종사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세차 때문에 전통의 12궁의 위치가 고대의 그것과 많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위치를 재조정하였다. 반면 매문정 등은 궁의 위치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매문정, 《역학의문보(曆學疑問補)》 하(下) 〈논주천십이궁병이성상득명불가이동(論周天十二宮並以星象得名不可移動)〉 참조.)
[주D-032]삼물(三物) : 삼사(三事). 즉 육덕(六德)ㆍ육행(六行)ㆍ육예(六藝).
[주D-033]재신(梓愼)ㆍ비조(裨竈)의 이야기 : 재신(梓愼)은 춘추시대 노(魯)나라 대부로 술수에 밝았던 사람이며, 비조(裨竈)는 춘추시대 정(鄭)나라 대부로 역시 점술에 능하고 천문학에 정통하였다.
[주D-034]태을(太乙)ㆍ임둔(壬遁)의 방술 : 태을과 육임은 모두 점법을 말한다. 태을은 병란ㆍ재화ㆍ생사 등을 관장하는 태을성이 유행하는 위치를 보고 길흉을 점치는 법이며, 임둔은 점술의 일종인 육임(六壬)과 둔갑법을 말한다
[주D-035]중국 …… 것 : 완원은 명대에 실학에 힘쓰지 않아 천문산수술(天文算數術)의 명맥이 단절되었지만 과거 중국의 연구 성과는 서양인들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며 ‘중국원류설’을 내세웠다.(완원, 《연경재속집(揅經室續集)》 권2 하(下) 〈주인이마두전론(疇人利瑪竇傳論)〉.)
[주D-036]매각성(梅瑴成) : 1681~1764년. 청나라의 학자ㆍ관료. 매문정의 손자로 어려서부터 가학을 이어받아 수학ㆍ역법에 정통하였다. 1715년(강희54)에 진사가 되었다. 고조우(顧祖禹)ㆍ만사동(萬斯同) 등과 친하게 지냈고 벼슬은 좌도어사(左都御史)에 이르렀다. 《명사(明史)》 〈천문지(天文志)〉와 《율력연원(律歷淵源)》 편찬에 참여하였고, 저서로 《증산연산법통종(增刪演算法統宗)》ㆍ《적수유진(赤水遺珍)》ㆍ《조만치언(操縵卮言)》 등이 있다.
[주D-037]단간잔편(斷簡殘編) : ‘간(簡)’은 죽간(竹簡)을, ‘편(編)’은 죽간을 매는 가죽 끈을 각각 가리킨다. ‘단간잔편’은 흩어져 온전하지 못한 서적을 뜻한다. 북주(北周) 유신(庚信)이 지은 〈사등왕집서계(謝滕王集序啓)〉에서 나온 말이다.
[주D-038]면수(沔水)ㆍ학명(鶴鳴)의 뜻 : ‘면수(沔水)’는 《시경》 〈소아(小雅)〉편에 있는 난리를 걱정하는 내용의 시이며, ‘학명(鶴鳴)’ 역시 소아편에 있는데 학이 깊은 곳에서 울어도 소리가 들에 들린다는 내용으로 성실함을 가릴 수 없다는 의미이다. 난리를 걱정하는 뜻을 성실하게 밝힌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주C1-001]추보속해 후(推步續解 後) : 남병철(南秉哲), 《규재유고(圭齋遺藁)》 권5 〈서추보속해후(書推步續解後)〉
[주D-002]왕 효암(王曉菴) : 명말 청초의 학자 왕석천(王錫闡, 1628~1682). 서양의 수학과 역학에 정통하였다. 스스로 신법(新法)을 만들어 이를 이용해 일식과 월식을 관측하였다. 저서에 《효암신법(曉庵新法)》이 있다
[주D-003]매 물암(梅勿菴) : 명말 청초의 학자 매문정(梅文鼎, 1633~1721). 명말 이래 수입된 서양의 수학에 능통해서 전통 수학과 조화시켰다. 1675년(강희14) 《숭정역서(崇禎曆書)》를 처음 알게 되면서 40년간 벼슬하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천문 역산에 관한 저서가 80여 종에 이른다.
[주D-004]완 운대(阮芸臺) : 청나라 문신ㆍ학자 완원(阮元, 1764~1849). 1789년(건륭54)에 진사가 되고, 편수(編修)에 올랐다. 조정의 요직을 역임했고, 회시총재(會試總裁)를 지내기도 하였다. 청나라 여러 학자의 경학에 관한 저술을 집대성하여 1829년(도광9) 《황청경해(皇淸經解)》 1,408권을 편찬하였고, 《적고재종정이기관지(積古齋鐘鼎彛器款識)》 등을 저술하여 청나라 고증학을 집대성하였다.
[주D-005]강 신수(江愼修) : 청나라 학자 강영(江永, 1681~1762). 혜동(惠棟) 중심의 오파(吳派)와 함께 고증학의 양대 계통을 이루었던 환파(皖派)의 핵심 인물로 박학풍을 견지하였다. 특히 천문역학 방면에 뛰어나 《수학(數學)》(8권)과 《추보법해》(5권)를 남겼다
[주D-006]원(元)ㆍ회(會)ㆍ운(運)ㆍ세(世) : 북송의 학자 소옹(邵雍)이 내놓은 지난 역사의 연대를 추산하는 이론. 세상의 시작부터 소멸까지의 한 주기를 1원(元)으로 삼고, 1년 12개월, 1월 30일, 1일 12시진(時辰), 1시진 30분의 수치를 이용하여 천지의 역사를 계산하였다. 즉 1원은 12회(會)이고, 1회는 30운(運)이고, 1운은 12세(世)이고, 1세는 30년(年)으로 1원의 수는 12만 9,600년이 된다. 세상은 이처럼 시작하여 끝나고, 끝나면 다시 시작되어, 부단히 반복 순환한다고 보았다.
[주D-007]양광선(楊光先) : 명나라 말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 천문과 역학에 종사하며 성과를 내면서 흠천감에 서국(西局)이 증설되는 등 서학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중국인들 가운데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위문괴ㆍ오명훤ㆍ양광선은 그러한 움직임을 주도하던 인물들이다. 특히 양광선은 1665년 흠천감 감정(監正)에 오르자 오명훤을 불러들여 이전의 역법을 다시 쓰게 하는 등 반(反)서학 정책을 주도하였다. 양광선은 자신의 저서 《부득이(不得已)》에서 “차라리 중국에 좋은 역법이 없을지언정 중국에 서양인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서양인들에 대해 반감이 깊었다.
[주D-008]지원설(地圓說)에 …… 징험하고 : 《대대례(大戴禮)》는 한나라 때의 대덕(戴德)이 공자의 72제자의 예에 관한 설을 엮은 책이다. 그 가운데 선거리(單居離)가 스승 증자에게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지다 하는데 그렇습니까?”라고 묻자 증자가 “만일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지다고 한다면 사방의 각(角)을 가릴 수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한 내용이 나온다. 증자의 이 대답은 지구를 둥글다고 보았던 증거로 이용되었다. 매문정은 이를 근거로 지원설을 주장하였고(매문정, 《역학의문(歷學疑問)》 권1 〈논천원가신(論天圓可信)〉) 조선에서도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지구설이 《대대례기》에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서명응, 《선구제(先句齊)》 〈일전제(日躔齊):유기가감(遊氣加減)〉).
[주D-009]이차(里差)에 …… 징험하였으며 : ‘이차’는 지역 간의 경도차를 말한다. 《주비경》은 후한 무렵에 편찬된 《주비산경(周髀算經)》을 말하는데 이광지(李光地 1642~1718)는 시헌력의 ‘이차’에 관한 설이 《주비산경》의 그것과 합치한다고 주장하였다.(이광지, 《용촌집(榕村集)》 권20 〈역법(曆法)〉 참조.)
[주D-010]혼개상통(渾蓋相通) : 중국 명나라 말기 이지조(李之藻, 1565~1630)는 중국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인 이마두[利瑪竇;Matteo Ricci]에게 ‘별을 관측하는 쟁반’이라는 성반(星盤, astrolabe)에 대하여 배우고, 후일 도설(圖說) 형태로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 2권을 지었다. 이지조는 〈서문〉에서 ‘혼개통헌’이라는 책이름을 풀이하여 “전체 그림은 ‘혼(渾)’이 되고, 원을 나눈 것은 ‘개(蓋)’가 된다.(全圖爲渾, 割圓爲蓋.)”라고 하고, ‘혼천(渾天)’과 ‘개천(蓋天)’은 천상을 관측하는 방법에 있어서 서로 통하며 단지 관측의 각도가 다를 뿐이라고 하였다.(남병철 편, 남문현ㆍ진구금(陳久金) 역, 《국역 의기집설 하권》 〈혼개통헌의〉,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3, 185~186쪽 참조.)
[주D-011]혼개상통(渾蓋相通)에 …… 징험하고 : 최영은은 남조 양 나라 사람으로 혼천설과 개천설을 통합하여 하나로 이해한 인물이다. 《주인전(疇人傳)》 권6 〈갈홍(葛洪)〉조에 “혼천설과 개천설이 예전부터 어지러웠는데 최영은이 혼천과 개천을 하나로 하였다.(渾蓋自古紛, 崔靈恩以渾蓋爲一.)”는 구절이 보인다.
[주D-012]청몽유차(淸蒙有差)에 …… 징험하였으며 : ‘청몽유차’는 대기의 굴절에 의해 천체가 실제보다 더 높이 떠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말하는데 완원 《주인전》 권6 〈강급(姜岌)〉조에서 “서양인들이 말하기를 몽기차가 낮은 것을 높게 올리기도 하고 작은 것을 크게 비추기도 한다고 했는데 강급의 말과 딱 합치한다.(西人言蒙氣差, 能升卑爲高, 映小爲大, 與岌所稱正合.)”고 하였다.
[주D-013]구중천이 …… 징험하고 : ‘구중천’은 하늘이 9겹의 천구가 지구를 둘러싸고 있으며 일ㆍ월ㆍ행성 등이 각기 다른 하늘에 위치하고 있다는 우주론을 말한다. 이마두의 《천주실의(天主實義)》에 소개되어 있는데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천문’에도 “둥근 것은 아홉 겹이니 누가 재랴.(圜則九重, 孰營度之.)”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주D-014]칠요이도(七曜異道)에 …… 징험하였으며 : ‘칠요’는 일ㆍ월ㆍ수성ㆍ화성ㆍ목성ㆍ금성ㆍ토성을 말한다. 한나라 사람 극맹은 〈선사상전(先師相傳)〉에서 일월ㆍ오성의 운동은 일정치 않고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아 다르게 운동한다고 주장하였다.(山田慶兒, 〈중국 우주론의 형성과 전개〉, 《중국전통문화와 과학》, 창작과 비평사, 1986, 144쪽 참조.)
[주D-015]태양에 …… 징험하고 : 《고령요(考靈曜)》는 《상서위(尙書緯)》의 일종으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데 여기에 ‘지유사유’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지유사유’는 동지에는 땅이 북으로 올라가며 그로부터 서쪽으로 움직여 3만 리를 갔다가 하지에는 남으로 내려가며 그로부터 동쪽으로 움직여 3만 리를 간다는 주장이다. 북극성의 운동을 지구의 공전이 아니라 땅의 회전운동으로 본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山田慶兒, 앞 논문, 151~152쪽 참조.)
[주D-016]항성이 …… 징험하고 : ‘세차’는 지구의 자전축 방향이 해마다 각도 50.26초씩 서쪽으로 이동하여 춘분점과 추분점이 조금씩 앞당겨지는 현상을 말한다. 주자의 이야기는 《주자어류(朱子語類)》 권2 〈이기(理氣)〉 하(下), “역법에 대해 계통(남송대의 학자 채원정(蔡元定))의 이론은 마땅히 먼저 하늘의 운행을 논의한 다음에 칠정(일ㆍ월ㆍ금성ㆍ목성ㆍ수성ㆍ화성ㆍ토성)을 논의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이것도 역시 좋지 못하다. 마땅히 먼저 태허에 대해 논의한 다음에 365와 4분의 1도를 살펴서 각각의 위치를 정한다. 그리고 하늘의 운행에 대해 논의한 다음에 하늘의 도수를 살펴 1년을 구분한 가상적인 수치를 계산해야 한다. 1년의 구분이 결정된 후에야 비로소 칠정이 가지런할 수 있다.(曆法, 季通說, 當先論天行, 次及七政, 此亦未善, 要當先論太虛, 以見三百六十五度四分度之一, 一一定位. 然後論天行, 以見天度, 加損虛度之歲分. 歲分旣定, 然後七政乃可齊耳.)”에 보인다.
[주D-017]오성(五星)에 …… 징험하였으며 : 본륜과 차륜은 서양 천문학의 천체운행론에서 상정하고 있는 운행 궤도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嘉数次人, 〈江戸時代の天文学〉(5), 《天文敎育》20-2, 2008, 9쪽 참조.) 소옹(邵雍 1011~1077)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권14 〈관물외편(觀物外篇)〉하(下)에는 “日隨天而轉, 月隨日而行, 星隨月而見, 故星法月, 月法日, 日法天.”이라고 하여 태양, 달, 별이 각기 다른 궤도를 움직이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주D-018]360정도(整度)에 …… 징험하였다 : 360정도는 주천(周天 하늘의 별자리가 한 바퀴 돌아서 처음으로 돌아오는 것)의 도수를 360도로 정한 것을 말한다. 반면 동양 역법에서는 주천의 도수를 대개 365와 4분의 1로 사용하였다. 360정도가 《황극경세서》에 있다는 내용은 청대 학자 진혜전(秦蕙田)의 《오례통고(五禮通考)》 권181 〈가례(嘉禮)〉 54, “서역의 여러 법은 모두 360정도를 사용하니 소 강절의 은밀한 도와 합한다.(西域諸法, 幷用三百六十整度, 合乎邵子藏諸用之道.)”에 보인다.
[주D-019]개천(蓋天)으로 …… 하였으며 : 원문의 ‘개지’는 방형의 땅을 반구형의 하늘이 덮고 있다는 개천설을 말하고, ‘혼지’는 구형의 하늘 안에 방형의 땅이 들어 있다는 혼천설을 가리킨다.
[주D-020]원운동으로 …… 하였는데 : 오랫동안 사람들은 하늘을 운행하는 천체의 움직임이 원운동일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을 타원으로 설정하였다.
[주D-021]이천피발(伊川被髮) : 주평왕(周平王)이 동천(東遷)하였을 때 대부 신유(辛有)가 이천(伊川)에 갔다가 그 곳에서 산발하고 들에서 제사지내는 자를 보고는, “백년이 못 되어 이곳이 융(戎)이 되리라. 예가 먼저 없어졌구나.” 하였는데, 양왕(襄王) 때에 진(晋)나라가 육혼(陸渾) 땅의 융을 이천으로 옮겼다는 고사를 말한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2년조 참조.)
[주D-022]말이 …… 있다 :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可行.(《논어》 〈위령공(衛靈公)〉.)
[주D-023]서광계(徐光啓) : 명나라 문신ㆍ학자. 1604년(만력32) 진사가 되었다. 중국에 와 있던 이마두[利瑪竇;Matteo Ricci]를 만나 그에게 서양 천문학과 수학을 배웠으며 천주교도 신봉하여 1603년 세례를 받았다. 선교사들이 구술한 것을 한역하여 《기하원본(幾何原本)》 6권을 완성하였고 《숭정역서》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주D-024]이지조(李之藻) : 명나라 문신ㆍ학자. 1598년(만력26) 진사가 되었다. 서광계와 함께 이마두[利瑪竇;Matteo Ricci]에게 서양과학을 배우고 세례도 받았다. 용화민(龍華民), 탕약망(湯若望) 등과 함께 서양의 천문ㆍ수학서 등을 번역 소개하였다. 저서로 《원용교의(圓容較義)》와 《신법산서(新法算書)》ㆍ《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ㆍ《천학초함(天學初函)》ㆍ《동문산지(同文算指)》 등이 있다.
[주D-025]숭정역지(崇禎曆指) : 1631~1634년에 완성된 《숭정역서(崇禎曆書)》를 말한다. 일식ㆍ월식의 관측, 특히 1629년 여름 일식 때에 재래의 역법과 서양역법의 추산정도(推算精度)가 비교되어 우수성이 판명되자, 서광계(徐光啓)ㆍ이지조(李之藻)와 탕약망 등이 서양역법을 적용하여 편찬하였다.
[주D-026]덕이 …… 아니었다 : 《서경(書經)》 〈함유일덕(咸有一德)〉에 “덕이 한결같으면 매사에 길하지 않음이 없고 덕이 한결같지 못하면 매사에 흉하지 않음이 없다(德惟一, 動罔不吉; 德二三, 動罔不凶.”)는 내용이 나온다.
[주D-027]학문이 …… 않는 자 : 亭林先生廣師篇云, 學究天人, 確乎不拔 吾不如王錫闡.(진강기(陳康棋), 《낭잠기문(郎潛紀聞)》 권8.)
[주D-028]전차(躔次)를 …… 않았으며 : 서양천문학에서는 황도를 중심으로 천체의 위치와 변화를 계산한 반면 동아시아 천문학에서는 적도를 중심으로 계산하였다. 할원술은 천구상의 위치와 각도의 차이를 나타낼 때 필요한 것인데, 서양에서는 구면삼각법이라는 완벽한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평면상에서 곡선을 자잘한 직선의 변화가 합쳐진 것으로 보고 계산하였다. 따라서 왕석천이 ‘전차를 적도를 따라 계산하지 않고, 할원은 세제곱으로 수치를 얻어내는 방법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방법이 아닌 서양 역법을 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분의 해석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용훈 교수의 자문을 받았다. 지면을 빌어 전용훈 교수께 감사를 드린다.
[주D-029]축한(逐限)ㆍ종소(從消) : ‘한’은 각도의 한계를 나타내는 개념이며, ‘소’는 원주율 계산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전용훈, 〈조선후기 서양천문학과 전통천문학의 갈등과 융화〉,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4, 108쪽 주341 참조.)
[주D-030]항기주력(恒氣注曆) : 매문정이 “今以定氣註曆”이라고 하여 정기법을 쓰는 것을 비판했던 것과 비교하면 원문의 ‘注曆’은 ‘註曆’의 오기로 생각된다. 시헌력 도입 이전 중국에서는 절기를 배치할 때 태양의 운행과는 상관없이 1년의 길이인 365와 4분의 1을 24개로 평균 분할하는 항기법(恒氣法)을 사용하였다. 반면 시헌력은 태양의 일주를 360도로 보아 15도마다 절기를 하나씩 배치하는 정기법(定氣法)을 사용하였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정확한가를 놓고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 매문정은 정기법을 쓰는 것은 “사람들이 미혹되고 선왕 계절을 바르게 했다는 이치에 어둡게 되는 것”이라며 정기법의 채택을 비판하였다. 논란에 대해서는 전용훈, 앞 논문, 118~123쪽 참조.
[주D-031]십이궁호(十二宮號) : 12궁은 황도(黃道)의 둘레를 12부분으로 나눈 것을 말하는데 중국에서 역법에 종사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세차 때문에 전통의 12궁의 위치가 고대의 그것과 많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위치를 재조정하였다. 반면 매문정 등은 궁의 위치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매문정, 《역학의문보(曆學疑問補)》 하(下) 〈논주천십이궁병이성상득명불가이동(論周天十二宮並以星象得名不可移動)〉 참조.)
[주D-032]삼물(三物) : 삼사(三事). 즉 육덕(六德)ㆍ육행(六行)ㆍ육예(六藝).
[주D-033]재신(梓愼)ㆍ비조(裨竈)의 이야기 : 재신(梓愼)은 춘추시대 노(魯)나라 대부로 술수에 밝았던 사람이며, 비조(裨竈)는 춘추시대 정(鄭)나라 대부로 역시 점술에 능하고 천문학에 정통하였다.
[주D-034]태을(太乙)ㆍ임둔(壬遁)의 방술 : 태을과 육임은 모두 점법을 말한다. 태을은 병란ㆍ재화ㆍ생사 등을 관장하는 태을성이 유행하는 위치를 보고 길흉을 점치는 법이며, 임둔은 점술의 일종인 육임(六壬)과 둔갑법을 말한다
[주D-035]중국 …… 것 : 완원은 명대에 실학에 힘쓰지 않아 천문산수술(天文算數術)의 명맥이 단절되었지만 과거 중국의 연구 성과는 서양인들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며 ‘중국원류설’을 내세웠다.(완원, 《연경재속집(揅經室續集)》 권2 하(下) 〈주인이마두전론(疇人利瑪竇傳論)〉.)
[주D-036]매각성(梅瑴成) : 1681~1764년. 청나라의 학자ㆍ관료. 매문정의 손자로 어려서부터 가학을 이어받아 수학ㆍ역법에 정통하였다. 1715년(강희54)에 진사가 되었다. 고조우(顧祖禹)ㆍ만사동(萬斯同) 등과 친하게 지냈고 벼슬은 좌도어사(左都御史)에 이르렀다. 《명사(明史)》 〈천문지(天文志)〉와 《율력연원(律歷淵源)》 편찬에 참여하였고, 저서로 《증산연산법통종(增刪演算法統宗)》ㆍ《적수유진(赤水遺珍)》ㆍ《조만치언(操縵卮言)》 등이 있다.
[주D-037]단간잔편(斷簡殘編) : ‘간(簡)’은 죽간(竹簡)을, ‘편(編)’은 죽간을 매는 가죽 끈을 각각 가리킨다. ‘단간잔편’은 흩어져 온전하지 못한 서적을 뜻한다. 북주(北周) 유신(庚信)이 지은 〈사등왕집서계(謝滕王集序啓)〉에서 나온 말이다.
[주D-038]면수(沔水)ㆍ학명(鶴鳴)의 뜻 : ‘면수(沔水)’는 《시경》 〈소아(小雅)〉편에 있는 난리를 걱정하는 내용의 시이며, ‘학명(鶴鳴)’ 역시 소아편에 있는데 학이 깊은 곳에서 울어도 소리가 들에 들린다는 내용으로 성실함을 가릴 수 없다는 의미이다. 난리를 걱정하는 뜻을 성실하게 밝힌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주C1-001]추보속해 후(推步續解 後) : 남병철(南秉哲), 《규재유고(圭齋遺藁)》 권5 〈서추보속해후(書推步續解後)〉
推步續解 後 |
粤自淸初,至今二百餘年,宏儒輩出,經學大備,實事求是,六藝昌明,以象數之學,爲儒者所當務。若王曉菴梅勿菴阮芸臺諸公,或專門用工,或治經傍通,莫不造乎精奧淵微。然余則謂以江愼修先生爲最,何哉?以其確信西法而不毁也。信西法而不毁,奚取焉?以其公平也。何以言之?
夫虞在璿璣,周測土圭,則步算之術,非不畢具於三代之上。然疇人之子弟分散,羲和之法數不傳,雜術參互,妄作紛興。漢魏之法,冀合圖讖,唐宋之術,拘泥演撰,河圖洛書之數,傳者非眞,元會運世之篇,言之無據。履觀臺而領司天者,皆爲合驗天,失之彌遠,是以躔離之爽 交食之舛,何代不然?而雖世有改憲,後出愈巧,知而不精,言而不詳,障蔽尙存,渣滓不去矣。
明萬曆間,西法始入中國,今則用其法爲時憲,中國之士,乃通其術,不惟從前知者益精,言者益詳而已。得其所不覩而所不聞者甚多,而亦有中國素有之法而不能通者,因西法而始通者,乃知其法之精明簡易,過中國遠甚。於是中國之士病之,如魏文魁ㆍ吳明烜ㆍ楊光先諸人,前後譏斥之。然所以譏斥者,皆妄庸逞臆,徒欲以意氣相勝,故擧皆自敗,而有聰明學識之士,知其法之不可譏斥,乃有巧取豪奪之事。
於是乎地圓則徵之以大戴禮,里差則徵之以周髀經,渾蓋相通則徵之以靈恩之論,淸蒙有差則徵之以姜岌之言,九天重包則徵之以楚辭,七曜異道則徵之以郄萌,太陽之有高卑則徵之以考靈曜地有四遊也,恒星東移而爲歲差則徵之以考亭先論太虛天行也,與五星有本輪次輪則徵之以康節星法月月法日日法天也,三百六十整度則徵之以皇極經世書也。苟有一毫疑似髣髴者,則斷章取義,敷演牽合,援以爲徵,至於螺旋牙輪微瑣之類,無不如是。故一事一物,莫不奪之爲中國之法,而亦莫不有其爲中國法之援徵,誠異哉。
假如其言,西法皆是中國之所已有者,師授旣絶,不傳久矣。譬若有人厥祖先有美第宅,其子孫不能葺修而頹圮之,有人依其制度而築焉。其子孫者見之曰 鋪之以砌,是我家之法也。又曰擎之以柱,是我家之法也,是亦我家也已,遂奪以居之,則天下無是理矣。中國之士,其於西法,無或近是歟?且以是爲尊華攘夷之學問,故每見知識愈勝則其弊愈甚。
盖曆法者,驗天爲長。自三代以至于今,或蓋之或渾之,或輪之或撱之,天何言哉?大象寥廓,諸曜參差,不擇中西,惟精測巧算是合,彼日月五星,安知世間有尊華攘夷之義哉。故以西法則驗者多,以中法則不驗者多,此豈非不可以怨尤者乎?是以只論天之驗否,不論人之華夷可也。然曆象雖爲儒者之事,不過是一藝,西人之所能也。知仁聖義忠和之德,孝友睦婣任恤之行,禮樂射御書數之藝咸通者,中國之士所能也。可尊也可攘也實在是,而且攘之者,卽攘其人,非幷其所能而攘之也。鯀之城桀之瓦,何嘗以人而廢之歟?彼西人者,九萬里海外之蠢夷也。不被堯舜之化,不知禮樂之敎,而以貨利爲命,故强弱相食,是慮是患,惟器械數術是務。
其圓顱方趾,雖類乎人,其性也偏,其性偏,故其聰明知覺亦偏。偏則易專,專則易慧,故其所爲有時乎到底焉。偏則隘,隘則不能傍通,故其所爲有時乎不移焉。彼曆法之能勝於中國者,一言以蔽曰精於測驗也。其測驗之精,實非一人一時之能,乃終之以身,傳之以世,千百人爲羣,千百歲爲期,矻矻不已以得之也。是所謂偏則專,專則慧者,何嘗其聰明知覺有勝於中國者而然哉?譬風雨人所難占,巢居知風,穴居知雨,未聞人與居巢穴者爭風雨也。中國之士,於西法亦如是觀可也。
或曰:“彼西人以其器械之精利,數術之微妙,誇耀於中國而遍行海內,一則爲交易也,一則爲行敎也。其所謂敎者,虛荒誕妄,不倫無理之說,則稍有分个者,知其爲禍人病國必矣。然而浸浸然入於其中,今伊川被髮之歎,無處不有,其故何也?意者,彼愚不知,見其器械之精數術之微 曰:‘彼之器械數術能若是,則其所謂敎者,亦必有若彼者矣。’ 由是之故,染汙益衆也。中國之士,亦或慮乎是,而故奪彼所以誇耀者,使人知彼之能精利微妙者,是實中國之所有,而非彼所能自獲,則豔羡之心,無從而生矣。曆法之斤斤於中西者,其非爲此而然歟?” 曰:“不然。凡中人以下,並其器械數術而不知,其所染敎,不在是也。中人以上,不待人言而知其敎之爲悖,其所不染敎,又不在是也。其染敎一事,是當別論者也。”
至於曆學,知者少,不知者多,而况其辨難中西,溯窮源委,則非博學多聞,不能焉。苟欲因是以牖夫夫之迷,其計甚迂遠矣。夫善者善之,不善者不善之,忠信之事也。待人之道,忠信爲貴,而至若待夷狄之道,尤有甚焉。故夫子言可行於蠻貊,以忠信篤敬也。初利瑪竇湯若望輩,以其曆算之法來中國,其時徐李諸公,請設局而譯之爲崇禎曆指,是善之也。譯已,因諸議之携貳,竟不用焉,是不善之也。其後淸人遂用其書,是又善之也。用之旣十年,又因楊光先諸人之言,復廢之,是又不善之也。其後五六年,光先敗,還用其法,是又善之也。法固一也,而其善不善之無常,彼本狡黠,已窺中國之無定見,然此猶屬於疎於曆法,非德之二三也。
自是厥後,雖未有廢棄之事,然文學之士,考據經傳,窮搜冥索,盡奪彼之所稱刱獲獨得之妙,以爲中國之法。然其所以奪之之辭,亦多苟且矣。彼旣久處中國,能通言語,以解文字,一一得見其說,知其無誠心揚善之意。是乃疑以嫉能,認以掠美,其所憾有甚於不知之進退無據之譏斥,而輕易侮嫚之心,於是乎生焉。雖以近日所傳聞者論之,彼果無輕侮中國之心,中國宰相知不可以貨利動其心,則自可無八百萬包苴之金,旣無其金,則自可無受其賂而背其囑之寃,旣無其寃,則亦可無天津之猖獗皇城之衝突。此非不能以忠信見孚於夷狄,自侮而來侮之致哉?事端各異,大小不同,則此事不可歸咎於曆法之辨論,而其損失體貌於夷狄,未能悅服彼心則一也,故言之如此。
嘗見王曉菴,數理俱到,測驗亦精,顧亭林先生所言學究天人,確乎不拔者也。其主持中法,力攻西術特甚,然其新法,躔次則不以赤道起算,割圜則不以三乘得數,所異者不過是逐限從消等,刱立新名,其實則用西法,而亦皆因西法而得之者也。梅勿菴積畢生之精力,從事一藝,是以所造能究極精微,神明變化,其於西法,發明甚多。然恒氣注曆及十二宮號,論辨不已,其可否已有定論,而大抵此二條,原不足爲曆理之大關係,非不知之,猶此費辭者,直爲所謂鎔西人之姿質,歸中國之型範之語所致也。
阮芸臺經術文學,爲天下宗匠,博極百家,咸通三物,古訓是式,實用是務。嘗掇拾諸史,薈萃羣籍,上自黃帝,下至近世,外附西洋,凡爲曆法算學之人,錄爲疇人傳。若梓愼裨竈之說,太乙壬遁之方,涉於內學者,一不收焉,已見其名義歸正。後來讀者,始知曆算本是儒者之實學,古今名公大儒,從事於此者甚多,庶幾起其向慕之心。而其論評則洞見本原,深徹底蘊,是非公而取捨正。鉤玄摘微之旨,分渭辨涇之義,啓牖後學,如示諸掌矣。此雖與出法例,成爲一家之言者,䂓模不同,其有功於曆算之學,實莫之與京。然於中西扶抑,亦不免太過,隨處張皇,讀者支離。余於芸臺之學,嘗有心悅,然惟此一事,不敢無竊議焉。
惟江愼修確信西法,未嘗詆毁。而或議其便否,但持論公平,無過激扶抑之語,以是如梅瑴成以附西人目之。夫江愼修亦中國之士,而况其經學文章,爲世通儒,其所著述,行於海內,讀其書則其人可知。抑以何故,諂附於西人?此不足多辨也。盖先生之意,曆象一術,西法果善於中國,則善者不可掩也,旣因其術,我之所獲益多,則不可曰無其效也。以其道反害其道,君子不爲,是故雖有可議,每持紆餘,不似諸人吹毛覓瘢之習。不然以若先生淹博考證之學,何難繙閱於斷簡殘編,勦掠掩奪,攻擊排斥?不如人哉,不徒如是。
夫相與辨難是非者,惟士君子爲能。是以惟善人,能受盡言,否則少拂其意,疑怒生焉。彼西人者,士君子乎?善人乎?况其曆算,卽彼之所恃而所愛也。非其所恃,奪其所愛,則拂於其性,當何如哉。又况與不知周公孔子,只知輪船火砲者,有何較短長而論善惡哉?故余之取先生不毁西法,非但爲曆算,其於待夷狄之道,爲有得也。余東夷之人也。先憂後樂,雖非所敢居,所願則學孔子也,所慕則在中華也。每聞日邊消息,不禁婺婦之歎,故借曆說而薄言之,以自附於沔水鶴鳴之義,而至若小邦之憂,顧以菲材,忝據上卿,廊廟之事,非敢曰不知,而旣無嘉謨嘉猷而紓之,則亦不敢私論。
夫虞在璿璣,周測土圭,則步算之術,非不畢具於三代之上。然疇人之子弟分散,羲和之法數不傳,雜術參互,妄作紛興。漢魏之法,冀合圖讖,唐宋之術,拘泥演撰,河圖洛書之數,傳者非眞,元會運世之篇,言之無據。履觀臺而領司天者,皆爲合驗天,失之彌遠,是以躔離之爽 交食之舛,何代不然?而雖世有改憲,後出愈巧,知而不精,言而不詳,障蔽尙存,渣滓不去矣。
明萬曆間,西法始入中國,今則用其法爲時憲,中國之士,乃通其術,不惟從前知者益精,言者益詳而已。得其所不覩而所不聞者甚多,而亦有中國素有之法而不能通者,因西法而始通者,乃知其法之精明簡易,過中國遠甚。於是中國之士病之,如魏文魁ㆍ吳明烜ㆍ楊光先諸人,前後譏斥之。然所以譏斥者,皆妄庸逞臆,徒欲以意氣相勝,故擧皆自敗,而有聰明學識之士,知其法之不可譏斥,乃有巧取豪奪之事。
於是乎地圓則徵之以大戴禮,里差則徵之以周髀經,渾蓋相通則徵之以靈恩之論,淸蒙有差則徵之以姜岌之言,九天重包則徵之以楚辭,七曜異道則徵之以郄萌,太陽之有高卑則徵之以考靈曜地有四遊也,恒星東移而爲歲差則徵之以考亭先論太虛天行也,與五星有本輪次輪則徵之以康節星法月月法日日法天也,三百六十整度則徵之以皇極經世書也。苟有一毫疑似髣髴者,則斷章取義,敷演牽合,援以爲徵,至於螺旋牙輪微瑣之類,無不如是。故一事一物,莫不奪之爲中國之法,而亦莫不有其爲中國法之援徵,誠異哉。
假如其言,西法皆是中國之所已有者,師授旣絶,不傳久矣。譬若有人厥祖先有美第宅,其子孫不能葺修而頹圮之,有人依其制度而築焉。其子孫者見之曰 鋪之以砌,是我家之法也。又曰擎之以柱,是我家之法也,是亦我家也已,遂奪以居之,則天下無是理矣。中國之士,其於西法,無或近是歟?且以是爲尊華攘夷之學問,故每見知識愈勝則其弊愈甚。
盖曆法者,驗天爲長。自三代以至于今,或蓋之或渾之,或輪之或撱之,天何言哉?大象寥廓,諸曜參差,不擇中西,惟精測巧算是合,彼日月五星,安知世間有尊華攘夷之義哉。故以西法則驗者多,以中法則不驗者多,此豈非不可以怨尤者乎?是以只論天之驗否,不論人之華夷可也。然曆象雖爲儒者之事,不過是一藝,西人之所能也。知仁聖義忠和之德,孝友睦婣任恤之行,禮樂射御書數之藝咸通者,中國之士所能也。可尊也可攘也實在是,而且攘之者,卽攘其人,非幷其所能而攘之也。鯀之城桀之瓦,何嘗以人而廢之歟?彼西人者,九萬里海外之蠢夷也。不被堯舜之化,不知禮樂之敎,而以貨利爲命,故强弱相食,是慮是患,惟器械數術是務。
其圓顱方趾,雖類乎人,其性也偏,其性偏,故其聰明知覺亦偏。偏則易專,專則易慧,故其所爲有時乎到底焉。偏則隘,隘則不能傍通,故其所爲有時乎不移焉。彼曆法之能勝於中國者,一言以蔽曰精於測驗也。其測驗之精,實非一人一時之能,乃終之以身,傳之以世,千百人爲羣,千百歲爲期,矻矻不已以得之也。是所謂偏則專,專則慧者,何嘗其聰明知覺有勝於中國者而然哉?譬風雨人所難占,巢居知風,穴居知雨,未聞人與居巢穴者爭風雨也。中國之士,於西法亦如是觀可也。
或曰:“彼西人以其器械之精利,數術之微妙,誇耀於中國而遍行海內,一則爲交易也,一則爲行敎也。其所謂敎者,虛荒誕妄,不倫無理之說,則稍有分个者,知其爲禍人病國必矣。然而浸浸然入於其中,今伊川被髮之歎,無處不有,其故何也?意者,彼愚不知,見其器械之精數術之微 曰:‘彼之器械數術能若是,則其所謂敎者,亦必有若彼者矣。’ 由是之故,染汙益衆也。中國之士,亦或慮乎是,而故奪彼所以誇耀者,使人知彼之能精利微妙者,是實中國之所有,而非彼所能自獲,則豔羡之心,無從而生矣。曆法之斤斤於中西者,其非爲此而然歟?” 曰:“不然。凡中人以下,並其器械數術而不知,其所染敎,不在是也。中人以上,不待人言而知其敎之爲悖,其所不染敎,又不在是也。其染敎一事,是當別論者也。”
至於曆學,知者少,不知者多,而况其辨難中西,溯窮源委,則非博學多聞,不能焉。苟欲因是以牖夫夫之迷,其計甚迂遠矣。夫善者善之,不善者不善之,忠信之事也。待人之道,忠信爲貴,而至若待夷狄之道,尤有甚焉。故夫子言可行於蠻貊,以忠信篤敬也。初利瑪竇湯若望輩,以其曆算之法來中國,其時徐李諸公,請設局而譯之爲崇禎曆指,是善之也。譯已,因諸議之携貳,竟不用焉,是不善之也。其後淸人遂用其書,是又善之也。用之旣十年,又因楊光先諸人之言,復廢之,是又不善之也。其後五六年,光先敗,還用其法,是又善之也。法固一也,而其善不善之無常,彼本狡黠,已窺中國之無定見,然此猶屬於疎於曆法,非德之二三也。
自是厥後,雖未有廢棄之事,然文學之士,考據經傳,窮搜冥索,盡奪彼之所稱刱獲獨得之妙,以爲中國之法。然其所以奪之之辭,亦多苟且矣。彼旣久處中國,能通言語,以解文字,一一得見其說,知其無誠心揚善之意。是乃疑以嫉能,認以掠美,其所憾有甚於不知之進退無據之譏斥,而輕易侮嫚之心,於是乎生焉。雖以近日所傳聞者論之,彼果無輕侮中國之心,中國宰相知不可以貨利動其心,則自可無八百萬包苴之金,旣無其金,則自可無受其賂而背其囑之寃,旣無其寃,則亦可無天津之猖獗皇城之衝突。此非不能以忠信見孚於夷狄,自侮而來侮之致哉?事端各異,大小不同,則此事不可歸咎於曆法之辨論,而其損失體貌於夷狄,未能悅服彼心則一也,故言之如此。
嘗見王曉菴,數理俱到,測驗亦精,顧亭林先生所言學究天人,確乎不拔者也。其主持中法,力攻西術特甚,然其新法,躔次則不以赤道起算,割圜則不以三乘得數,所異者不過是逐限從消等,刱立新名,其實則用西法,而亦皆因西法而得之者也。梅勿菴積畢生之精力,從事一藝,是以所造能究極精微,神明變化,其於西法,發明甚多。然恒氣注曆及十二宮號,論辨不已,其可否已有定論,而大抵此二條,原不足爲曆理之大關係,非不知之,猶此費辭者,直爲所謂鎔西人之姿質,歸中國之型範之語所致也。
阮芸臺經術文學,爲天下宗匠,博極百家,咸通三物,古訓是式,實用是務。嘗掇拾諸史,薈萃羣籍,上自黃帝,下至近世,外附西洋,凡爲曆法算學之人,錄爲疇人傳。若梓愼裨竈之說,太乙壬遁之方,涉於內學者,一不收焉,已見其名義歸正。後來讀者,始知曆算本是儒者之實學,古今名公大儒,從事於此者甚多,庶幾起其向慕之心。而其論評則洞見本原,深徹底蘊,是非公而取捨正。鉤玄摘微之旨,分渭辨涇之義,啓牖後學,如示諸掌矣。此雖與出法例,成爲一家之言者,䂓模不同,其有功於曆算之學,實莫之與京。然於中西扶抑,亦不免太過,隨處張皇,讀者支離。余於芸臺之學,嘗有心悅,然惟此一事,不敢無竊議焉。
惟江愼修確信西法,未嘗詆毁。而或議其便否,但持論公平,無過激扶抑之語,以是如梅瑴成以附西人目之。夫江愼修亦中國之士,而况其經學文章,爲世通儒,其所著述,行於海內,讀其書則其人可知。抑以何故,諂附於西人?此不足多辨也。盖先生之意,曆象一術,西法果善於中國,則善者不可掩也,旣因其術,我之所獲益多,則不可曰無其效也。以其道反害其道,君子不爲,是故雖有可議,每持紆餘,不似諸人吹毛覓瘢之習。不然以若先生淹博考證之學,何難繙閱於斷簡殘編,勦掠掩奪,攻擊排斥?不如人哉,不徒如是。
夫相與辨難是非者,惟士君子爲能。是以惟善人,能受盡言,否則少拂其意,疑怒生焉。彼西人者,士君子乎?善人乎?况其曆算,卽彼之所恃而所愛也。非其所恃,奪其所愛,則拂於其性,當何如哉。又况與不知周公孔子,只知輪船火砲者,有何較短長而論善惡哉?故余之取先生不毁西法,非但爲曆算,其於待夷狄之道,爲有得也。余東夷之人也。先憂後樂,雖非所敢居,所願則學孔子也,所慕則在中華也。每聞日邊消息,不禁婺婦之歎,故借曆說而薄言之,以自附於沔水鶴鳴之義,而至若小邦之憂,顧以菲材,忝據上卿,廊廟之事,非敢曰不知,而旣無嘉謨嘉猷而紓之,則亦不敢私論。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남문현 남종진 (공역) ┃ 2014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글쓴이 : 낙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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