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韓國 實學期의 數學史 - 數學者와 數學書를 中心으로

2018. 3. 31. 22:35과학 이야기

東國大學校 敎育大學院 數學敎育專攻
徐 淑 姬
2003年 12月

 

목 차
Ⅰ. 서론
Ⅱ. 중국 수학
Ⅲ. 실학기
Ⅳ. 실학기의 수학자
Ⅴ. 실학기의 수학서
Ⅵ. 결론 및 제언
참고 문헌

 

Ⅰ. 서론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수학사라고 하면 주로 서양 수학사를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이 세계적인 수학사의 흐름에 있어서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는 전통수학이 없었던 것처럼 인식될 우려가 있다고 본다. 서구 수학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계산술 그 자체에 주된 관심을 둔 중국계의 수학을 서구 수학의 한 제한된 예로서 취급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중국 수학은 생성, 발전, 그리고 쇠퇴를 거듭하는 긴 역사를 지닌 하나의 수학으로서 엄연히 존재하여 왔다. 그 영향은 지금도 여전히 중국을 비롯한 그 주변의 여러 나라의 생활 곳곳에 배어있다. 따라서 중국 수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한국 수학사를 다룰 때에는 서구 수학에 비추어 그 특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배경을 추구하는 데 관심을 두어야한다고 본다.

 

율령정치(律令政治)의 산수적(算數的) 기초로서 성립한 중국수학은 논증적인 학문이 아닌 실천적 기술이라는 제약 밑에서 출발하여야 했다. 동시에 역(歷)․산(算)․역(易) 등 중국 고유의 전통적인 기본 사상 사이의 매개역할을 했음으로 곧 사상사(思想史)이기도 했다. 중국수학의 한국화의 과정에서 수학은 단지 고전으로서 취급받는 경직화(硬直化) 현상을 보였고 또 다른 한편에선 관료조직 속의 실용적 기술인 잡학(雜學)으로 비하되어 서양수학이나 한국에서의 유학처럼 고도의 정신적인 형이상학의 학문으로서 취급받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만 하더라도 산사(算士)라는 전문 기술관료를 2000명 가깝게 배출한 한국의 전통수학은 다른 독자적인 역사를 이룩하였다고 본다. 한국의 전통수학은 중국 수학의 축소판 또는 복사판 정도로 생각되고 있지마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한국 특유의 수학과 그 사상의 발자취가 있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이 문서로 기록되어 상세히 보존되어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문헌이 미비하여 역사 속의 한국 수학을 전반적으로 알아보기는 어려움이 많다.

 

그럼에도 비교적 많은 수학활동의 자료들이 남아있는 실학기의 수학자와 그들의 수학활동들을 제한적으로 살펴보고, 역사 속의 한국 수학의 간략한 계통 정도를 살펴보는데 이 연구의 주된 목적으로 하고자 한다. 또 다른 실학기의 수학사 연구의 동기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이 실학기와 비슷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알려진 현 한국의 수학교육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상황을 살려 보면 다음과 같다.

 

많은 이공계 우대정책에도 불구하고 대학진학에서는 실제로 이공계 기피현상을 볼 수 있다. 중앙행정기관 공무원 가운데 이공계 출신 비율은 24.7%에 불과해서 4급 이상 공무원에 대한 기술직 임용할당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하였다.1) 실제로 상장회사의 임원 가운데는 이공계 출신이 상경계 출신보다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등기부등본에 나타나지 않은 실무형 임원 집행임원은 이공계 출신이 절반이 넘는 51.6%에 달했다.2) 공무원 이외의 기업에서는 이공계 출신이 많은 것은 사회적 요구로 보인다.


이에 본 연구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실학기의 수학과 실학기의 수학자들이 영향을 받은 중국의 수학을 알아보았다. 또한 실학기의 수학자들을 실학자, 중인 수학자, 실학자 이외의 양반 수학자를 구분하여 그들의 저서와 함께 조사하였다. 덧붙여 실학기의 이공계 중 수학 관련 산사제도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고 주체성 회복의 외침이 가장 강한 실학기에 지식체계의 무모순(無矛循)과 정합(整合)을 추구하는 수학에의 열의가 과학발전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실학기의 활발한 수학활동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1) 동아일보 2003년 7월 11일
2) 중앙일보 2003년 8월 14일

 

Ⅱ. 중국 수학


1. 중국 수학의 특징


중국의 수학은 그 내용으로 볼 때 매우 실용적인 것이고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계산 문제가 연구대상이었다. 그리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볼 수 있는 논증성을 중국의 수학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중국의 수학은 기하학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계산술과 관련된 대수학은 유럽 수학보다 앞서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자연 세계의 연구도 모든 인간과의 관계에서 따졌으며 자연학은 곧 인간학이었다. 그러므로 중국 수학은 실생활과 관련된 수단 또는 기술로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친 중국 수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럽 수학이 수학만을 위한 독립된 학문으로 성립한데 비해 중국 수학은 실생활과 관련된 수단 또는 기술로서 발전하였다. 물론 실용을 떠난 순수한 지식체계로서의 측면도 있었으나 수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받은 적은 없었다. 중국 수학은 주로 관료 조직 하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서양 수학과 비교해볼 때 학문으로서 자율성과 독립성이 약했다.

 

둘째, 중국수학은 대수학과 관련된 계산술은 발달 즉, 정의나 증명보다 계산 방법이나 절차를 중시했으나 기하학 분야에서는 엄밀한 증명을 바탕으로한 논리적인 방법은 도입되지 않았다. 유럽의 기하학이 이론의 증명에서 발달한 데 비해 중국의 대수학 발달은 농업생산과 관련된 실용적인 필요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셋째, 대수학이라 하여도 필산이 아닌 산목을 사용해서 계산하는 산기대수학(算器代數學)이 주류를 이루었다. 넷째, 실용성을 전제로 삼은 중국의 관영수학의 특성 때문에 일상적, 실무적 성격을 떠난 자연과학상의 이론과 결부하지 못했다.

 

다섯째, 수학서의 경전화 경향이다. 새로운 개발이나 문제제기보다 과거의 수학서를 권위화해서 마치 경전 대하듯 주석하고 해설하는 것에 그친 것이 전통 중국 수학의 경향이다.[4] 이런 중국 수학은 유학이 형이상학적으로 흘러 현실을 소홀히 한 탓과 수의 미신에 빠진 점수술이 수에는 심오한 이치가 내재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과거나 미래를 밝힐 수 있다고 그릇 주장한 탓으로 근세 수백년 동안 유럽에 크게 뒤쳐져 있다.


2. 중국수학서-주로 실학기에 영향을 준 수학서 중심


아래에 있는 『산학계몽』, 『양휘산법』, 『상명산법』은 세조 이래『경국대전』에 명시된 산사 채용 취재(取才) 학습 교재였었고, 이밖에 수학서는 실학기의 수학자들이 연구하거나 책을 저술할 때 참고로 했던 중국의 수학서이다.


(1) 산학계몽(算學啓蒙)


『산학계몽』(3권)은 원의 주세걸이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성(趙城)이 쓴 서문에는 곱셈 구구, 나눗셈 구구, 무게의 단위(斤兩)환산, 산대에 의한 수의 표시, 대수와 소수의 명칭 즉, 좀더 자세히 말하면 대수(大數)에 관하여는 억(億), 조(兆), 경(京), 해(垓), 자(秭), 양(壤), 구(溝), 윤(潤), 정(正), 재(載) 등 10개의 단위 다음에 새로 극(極), 항하사(恒河沙), 아승기(阿僧祇), 나유타(那由他), 불가사의(不可思議), 무량수(無量數) 등을 첨가했다. 소수(小數)에서는 분(分), 리(釐), 호(豪), 사(絲), 미(微), 섬(纖), 사(沙), 녹(鹿), 애(埃), 묘막(渺漠), 모호(模湖), 준순(逡巡), 수유(須臾), 순식(瞬息), 탄지(彈指), 찰나(刹那), 육덕(六德), 허(虛), 공(空), 청정(淸淨)이다. 이들 단위 명은 불교경전에서 차용한 것들이다. 도량형의 표시, 농토의 측량단위, 원주율에 관한 예부터 쓰여진 여러 가지 수치, 분수의 명칭, 음수, 양수끼리의 연산사칙, 제곱근 구하기(개방술)의 알고리즘에 관한 <노래말>등을 총괄적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전체(3권)를 20장으로 나누어 259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상권 및 중권에서는 『상명산법』, 『양휘산법』과 같은 종류의 문제, 이를테면 비례산 어림셈, 학거북셈(2원1차연립방정식의 산술적 해법), 여러 가지 형태의 농토의 넓이 계산 등을 다루고 있다. 쉬운 문제에 대해서는 계산방법의 설명없이 답만을 제시하고 심지어는 산대에 의한 계산방법마저도 생략하고 있는 민간 수학서이다.

 

『산학계몽』의 특징인 하권에 첫째, 퇴적환원(堆積還源)인 급수의 문제로 비실용적인 급수의 연구가 일찍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진지하게 다루어진 이유는 한마디로 수의 규칙성에 대해 주목한 결과로 보여진다. 둘째, 연립방정식의 문제(方程正負)이다. 3원1차방정식의 문제로는 현대식으로 나타내면 4x+5y+6z=1219, 5x+6y+4z=1268, 6x+4y+5z=1263 로 이것을 산대를 써서 각 항의 계수만으로 된 행렬로 전환시켜 답을 구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고 있다. 셋째, 천원술에 의한 고차방정식의 해법<개방석쇄(開方釋鎖)>로 개방(제곱근 구하기)과 개립(세제곱근 구하기)의 문제를 예비적으로 다룬 데 이어 27개의 천원술을 써서 풀고 있다 (참조 [3, pp. 236-242]).


(2) 양휘산법(楊輝算法)


중국수학의 황금기를 이룬 것은 송․원 시대(960-1367) 그 중에서도 13세기 후반의 50년 동안이 가장 눈부신 수학활동기였다. 『양휘산법』의 저자 양휘도 이 시대의 남송을 대표하는 수학자였다. 양휘는 남송의 수도 항주 근처의 전당(錢塘) 출신이고 아호를 겸광(謙光)이라고 불렀다. 『양휘산법』은 『승제통변본말』(3권), 『전무비류승제첩법』(2권), 『속고적기산법』(2권)의 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전문 수학서라기 보다는 계몽서로서 송대의 수학을 집대성하였다는 것과 다음 명대의 민간수학의 기틀이 되었다는 점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승제통변본말』: 제1권인 『산법통변본말』의 내용을 보면 상승(上乘), 하승(下乘)에 관한 곱셈의 기본 규칙을 비롯하여 ∼×1위수(<單因>), ∼×합성수(<重因>), 그리고 ∼×2위수에서 일자리의 수가 1인수 (<신전인(身前因)>) 또, 곱하는 수와 곱해지는 수 사이에 1이외의 공약수가 존재하는 경우 등 곱셈의 기초에 관한 계산 알고리즘을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또 간단한 나눗셈을 다루고 있다. 제 2권『승제통변산보』의 내용은 곱하는 수가 11, 12, 13, … , 19인 것(<加一位法>)은 분배법칙을 이용하여 계산을 치른다. 그리고 加二位法은 a X 61 = (a X 122)∻2 = (100a+20A+2a) ∻ 2, 重加는 a X 195 = a X 15 X 13 = 10 X (10a+5a) + 3 X (10a+5a) 또, 감술사법(減術四法)에서는 나눌 수의 첫머리 1 또는 위에서 둘째자리까지의 수가 1일때의 나눗셈의 간편셈을 치른다. 예를 들어 19152 ∻ 56=38304∻112 → 38304 - 33600 - 4704 - 4480 → 224 - 224(몫, 342)로 나타내고 있다. 제 3권『법산취용본말』에서는 1부터 300가지의 범위에서 곱셈, 나눗셈의 계산방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 전무비류승제첩법(2권): 제1권은 주로 농지측량에 관한 문제들이다. 원주율Π의 근사값으로 3.14(微率), 22/7(密率)을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농지측량의 실용적 지식보다는 모눈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석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 2권은 고차방정식의 해법을 다루고 있다. 그 예로


세로의 길이가 가로보다 12보 짧은 직전(직사각형의 땅)이 있는데 넓이는 864보(= 보²)라고 한다. 세로의 길이는 얼마인가?


지름이 13보인 원전(원형의 땅)을 절단하였더니 넓이가 33보(=보²)였다. 현과시(현과 원둘레의 최대거리)는 각각 얼마인가?


․ 속고적기산법:『양휘산법』중에서 가장 기이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속고적기산법』이다. 양휘 자신도 서문에서 어느 땐가 문득 유벽윤이나 구허곡 등이 쓴 수학책을 통해 예로부터의 희귀한 문제를 읽었다는 것이 이 책을 엮게 된 동기라고 술회하고 있다. 제1권은 낙서수(洛書數)․하도수(河圖數)․오오도(五五圖)․육육도(六六圖)․칠칠도(七七圖)․육십사도(六十四圖)․구구도(九九圖)․백자도(百子圖)․취육도(聚六圖)․취팔도(聚八圖)․적구도(積九圖)․육진도(六陳圖)․연환도(連環圖) 등을 내용으로 삼는 마방진(魔方陣)으로부터 시작한다.

 

명칭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듯이 역(易)과 결부된 신비주의적 수(數)사상이 바탕에 있다. 『 하도․낙서를 원형으로 하는 마방진이 그것이다. 하도와 낙서란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의하면 황하와 낙수에서 나왔으며 성인들이 깊이 아로새긴 신비의 그림과 글이라는 것이다. 하도는 1에서 9까지 그리고 낙서는 1에서 10까지의 수를 점을 찍어 구상화한 것이다. 『속고적기산법』에서는 3차의 마방진(낙서)에 이어 4차의 마방진(화십육도)을 비롯하여 가로․세로의 합이 각각 505인 10차의 마방진 등이 실려 있다 (참조 [3, pp. 242-248]).


(3) 상명산법(詳明算法)


명대 초기에 안지제(安止齌)가 편찬한 것으로 문자 그대로 대중적인 계몽수학서이다. 수학적인 내용은 『산학계몽』이나 『양휘산법』에 훨씬 못 미치지만 (참조 [3, p. 268]) 조선조의 관영 수학책으로 채택되었다. 이 책의 특징으로는 각 장마다 가결(歌訣)형식으로 공식을 내세우고 있는 점이다. 김용운․김용국은 『한국수학사』에서 송․원에서 명초로 이어진 시기에 간행된 산서(算書)의 공통된 특징이며 산목(算木)을 사용하면서도 산목 사용법에 관한 설명은 일체생략하고 있다고 한다. 상․하 2권으로 되어 있고 『구장산술』의 목차를 소개한 구장명수(九章名數), 소수, 대수, 억, 조를 구분하여 나타내는 소대명수(小大名數), 구구의 표가 나타나 있는 구구합수(九九合數), 척량(斤量)을 환산하는 척형(斤衡), 승법(乘法), 제법(除法)에 관한 구결(口訣)의 순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현재의 비례식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들이 실려 있다.


(4) 구장산술(九章算術)


『주례』에 따르면 귀족의 자제에 대한 교육과정을 예(禮)․악(樂)․사(射)․어(馭)․서(書)․수(數)로 정하고 각 과정마다 몇 가지로 세분하여 가르쳤다. 이 때 수학의 내용을 9가지 장으로 분류하였으므로 九章의 이름이 생겼으며 구장의 九는 九數에서 비롯되었다. 구수란 방전(方田)․속미(粟米)․차분(差分)․소광(少廣)․상공(商功)․균수(均輸)․방정(方程)․영부족(盈不足)․방요(旁要)를 가리킨다. 이것이 대체로 전한 말기 수학 교육과정의 주된 내용이며 중차(重差)․석걸(夕桀)․구고(勾股)등은 그 후 수학에 새로운 발전에 있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구장산술』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목차 및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성립시기를 진․한 이후로 단정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前漢의 학자가 秦대의 수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볼 수 있고 또한 2세기 초에는 『구장산술』이라는 명칭이 정착하였으나 현재 알려진 『구장산술』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또, 『구장산술』은 적어도 몇 사람에 의해 정리, 보완 작업을 거쳐서 성립되었다. 따라서 이 책은 기원전 100년 내지 200년 사이에 수학서로서 체계화된 것만은 거의 확실하다 (참조 [3, pp. 72-75]).


『구장산술』을 비롯한 대개의 중국수학책은 [문(問,물음)], [답(答)], [술(術, 계산법)]의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물음] 원형의 땅이 있다. 둘레가 30척, 지름이 10척일 때, 그 넓이는 얼마인가?
[답] 75척²
[풀이] 반지름에 원둘레의 반을 곱하여라.


제1장 방전(38문)은 밭(경작지)의 측량, 여러 형태의 밭 넓이를 계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로가 12보, 세로가 14보인 (직사각형의) 밭이 있다. 이 밭의 넓이는 얼마인가? 답:168보, 해법(術曰): 가로와 세로의 보수를 서로 곱하여 넓이를 구하는 것이다.


제2장 속미(46문)는 곡물의 환산, 주로 당시의 주식인 좁쌀(粟米)을 중심으로 한 곡물 교환의 문제로 계산은 비례식으로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다.


제3장 쇠분(20문) 안분비례, 쇠분은 차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차등을 두어 비례 안분하는 계산법을 말한다. 예를 들면 “베를 잘 짜는 처녀가 있다. 날마다 전날의 두 배씩을 짜서 5일 동안 5척의 베를 짰다. 매일 각각 얼마씩의 베를 짰는가?” 여기서는 대수적으로 구하지 않고 1, 2, 4, 8, 16의 안분비례에 의해 답을 얻고 있다.


제4장 소광(20문)은 넓이 계산으로 방전장과 마찬가지로 넓이를 다루고 있지만 방전장과 다른 점은 넓이를 제시하여 변의 길이를 구하는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로의 길이가 1보 반, 넓이가 1무3)인 땅이 있다. 세로의 길이는 얼마인가” 답:160보


제5장 상공(28문)은 토목 공사와 관련된 부피계산을 주로 다루고 있다. 商이란 곧 계산을 뜻한다. 성을 쌓거나 땅을 파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입체도형의 부피를 계산할 필요가 있다.


제6장 균수(28문)는 세로 걷어 들이는 곡식의 운반을 다룬다. 이 장의 내용을 통해서 보는 한 노동력을 동원할 때, 그들이 부담이 공평하게 할당되도록 각별히 배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이 장의 마지막 문제에는 뜻밖의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 다섯 군데의 검문소통과세가 모두 합쳐 금 1근일 때 처음에 가졌던 돈의 액수가 얼마였는지를 묻는 문제이다. 즉, 첫번째 검문소에서는 소지금의 절반을 바치고 나머지 네 검문소에서는 각각 잔금의 1/3, 1/4, 1/5, 1/6 씩을 바쳤는데 그 합계가 금 1근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역산으로 계산하면 처음 소지금은 1근4)(斤) 3량(兩) 4주(銖) 수 4/5가 된다.


제7장 영부족(20문)은 과부족셈, 2원 1차 연립방정식의 산술적 해법이다. 예를 들면 “공동으로 물건을 사는데 각자가 8전(전)씩 내면 3전이 남고 7전씩 내면 4전이 부족하다. 사람수와 물건의 값은 각각 얼마인가?” 답: 사람수는 7명, 물건 값은 35전이다.


제8장 방정(18문)은 다원 일차방정식 문제로 오늘날 방정식이라는 용어가 이 장의 제목에서 비롯되었다.


제9장 구고(24문)는 피타고라스 정리의 응용한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다루는 문제는 직각삼각형의 두 변의 길이를 알 때 나머지 한 변의 길이를 구하는 문제가 많다 (참조 [3, pp. 75-85]).

 

3) 1무=240평방 보


(5) 산법통종(算法統宗)


『산법통종』즉, 『신편직지산법통종(新編直指算法統宗)』은 민간수학서로서 명대의 정대위에 의해 쓰여졌다. 이 책은 동아시아 삼국(중국․한국․일본)에서 유명해졌으며 단연 근세 민간수학의 대표로서 이들 나라에서 오랫동안 판을 거듭한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굳혔다. 저자 정대위는 당시 상업중심지의 하나인 안휘성 휴령 사람으로 민간 수학자로서 일생을 보낸 것으로 보여지며 청․장년 시절에는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수학자를 방문하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수학에 대한 연구를 한 듯하다 (참조 [3, p. 273]). 또한 산재된 수학서를 여기저기서 찾아내어 연구했다. 『산법통종』(17권)은 1592년 그가 60세 때에 완성하여 곧 간행되었으나 그는 6년 후에 이 책의 요약본을 『산법찬요(算法纂要)』라는 이름으로 엮었다.

 

『산법통종』의 문제는 이전의 수학서에 실린 것들 중에서 뽑은 것들이 많다. 거의가 『구장산술』의 체계에 따라 문제를 소개하고 있으며 이 밖에 다른 계산법도 소개하고 있다. 주판에 의한 계산은 가감승제에 그치지 않고 개방(開方)까지 다루고 있다. 이 부분은 황윤석의 『산학입문』에 많은 참고가 되었으며 17권에 보이는 마방진은 양휘의 『속고적기산법』에 상세히 설명된 내용이지만 이는 최석정의 『구수략』속에 마방진 연구에 참고자료가 된 것이다. 민간 수학서답게 서민생활에 밀착된 문제가 많이 실려 있어서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
도 당시의 사회 경제의 실태를 반영하는 훌륭한 사료가 된다. 일반 서민은 말할 것도 없고 관리의 실무에도 많은 도움이 되어 『산법통종』은 널리 읽혀지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4) 1근= 16량, 1량= 24주

(6) 측원해경(測圓海鏡)


저자인 李冶(1192-1279)는 하북성(河北省) 출신의 한인으로 남송의 학자관료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수학 이외에도 널리 문학․역사․천문․철학․의학 등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한 때 금 지배하의 하남에서 지방장관을 지내기도 했으나 그 무렵 몽고군의 침입으로 피신하여 북방의 산간 여기저기서 은거 생활을 했다.『측원해경』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나이가 들어 동연구용(洞淵九容)의 이론에 공명하여 이것을 아침 저녁으로 깊이 새기며 지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싫어하는 자들은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산중 생활은 한가로워서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설명을 하는 동안에 百七十문제에 이르렀다.


이 책은 천원술을 계통적으로 다룬 책으로 아마 천원술은 그가 도교적인 은둔생활의 명상 속에서 얻은 결과로 보여지며 실제로 천은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의 으뜸, 원은 시초라든지 근원을 뜻하며, 둘 다 역과 관계가 깊은 말이다. 이 원이라는 문자로 미지수를 나타내고 지금의 미지수를 x로 한다는 뜻으로 천원의 1을 세운다고 말했던 데서 입천원일술(立天元一術)이니 천원술(天元術)이니 하는 명칭이 생겼다 (참조 [3, pp. 223-224]). 자신의 노작 『측원해경』을 후세사람들이 반드시 평가해 줄 것으로 믿었고 실제 이 책은 중국수학사에서의 금자탑의 하나다 (참조 [3, p. 224]). 『측원해경』은 실용성과 거리가 먼 추상적인 수학서로 실무관리용의 핸드북의 성격을 전혀 지니지 않으며 순전히 수학지상주의의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중국수학의 전통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순수수학이 논문이다. 남병길과 남병철의 수학저서에 많은 참고가 된 책이다.


(7) 사원옥감(四元玉鑑)


저자 원의 주세걸은 화북의 북경 근처 태생이며 13세기 후반에 주로 활약하였으며 민간인 상대의 수학교수 생활을 하면서 20여년 동안 중국 각처를 두루 찾아다닌 것으로 보여지며 마지막 생애는 양자강 하류의 양중서 보냈다. 그의 수학 강의에는 배움을 받기 위해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 책은 미지수가 1개인 천원술을 2원, 3원 및 사원의 고차 연립방정식으로까지 확장한 것이다. 『사원옥감』(3권)은 그 제목이 말한 대로 미지수가 하나인 천원술에서 시작하여 288문제 중 2원 연립방정식 36개, 3원 연립방정식 13개, 4원 방정식 7개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x,y,z,w의 4개의 미지수를 각각 천(天)․지(地)․인(人)․물(物)의 네 글자로 나타내어 그 계수를 써서 4원 방정식을 도식화하였다 (참조 [3, pp. 233-234]).


(8) 수리정온(數理精蘊)


청나라 강희제 시대에 계획되고 옹정 원년(1723)에 완성을 본 음율․역법․수학에 관한 삼부작 『율력연원(律曆淵源)』 중의 수학분야인 『수리정온』은 대체로 17세기 이전의 유럽수학의 중요 부분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율력서원』은 모두 100권으로 이루어진 총서인데 그 중 53권을 『수리정온』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율력연원』은 수학에 보다 많은 역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상편의 첫머리의 수리원본에서 하도․낙서에 관한 고색짙은 수리철학을 내걸고 있지만 내용면에서는 『기하원본』으로부터 고차의 대수방정식의 해법에 이르는 유럽 수학의 지식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참조 [3, p. 297]). 17세기 유럽에서는 방정식의 해로서 음수․양수의 둘을 똑같이 다루고 있으나 『수리정온』에서는 양수만을 구하고 있다. 방정식의 해를 구하기 위한 유럽식 방법을 차근방(借根方) 또는 Algebra(代數學)의 중국음을 따라 아르제바르라고 불렀고, 중국인의 자존심을 돋우기 위해 동래법(東來法)이라 부르기도 하고 있다 (참조 [3, pp.2998]). 『수리정온』은 이러한 서양과학기술과 함께 실학기 거의 모든 수학자에게 영향을 준 책으로 보여진다.


(9) 동문산지(同文算指)


마테오 리치와 이지조가 편찬한 책으로 유럽수학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으로 편찬한 서양수학의 번역판이다. 이지조(1565-1630)는 만력 26년(1598)에 진사에 급제하여 남경에서 기술 분야의 관리를 지내는 중 마테오 리치를 만나서 서양 역산을 배우고 나서 적극적인 서양과학의 신봉자가 되었다. 1613년에 서양천문학에 관한 설명서를 조정에 바치면서 서양 과학서를 서둘러 번역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동문산지』는 클라비우스의 『실용산술개론(實用算術槪論)』(Epitome arithmeticae practicae, 1585)을 바탕으로 하여 여기에 정대위의 『산법통종』(1592)을 비롯한 중국계의 수학서에서 많은 문제를 발췌해서 엮은 나름대로의 중서(中西)수학의 합작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참조 [3, p. 328]). 이 책은 지금과 같은 유럽식 숫자(아라비아 숫자)를 대입하고 가로쓰기로 나타낸 것뿐이다. 그러나 어설픈 절충식 태도 때문에 새로운 수학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동문산지』는 전편 3권과 통편 8권(1613), 별편 1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전편은 주로 자연수와 분수의 사칙연산을 다루고 그 중에서 가법과 감법, 승법 및 분수의 제법은 현재의 연산과 기본적으로 같고 자연수의 제법은 15세기 말에 이탈리아의 수학자가 사용한 이른바 갈레법(galley method)을 선보이고 있으나 신기한 느낌을 주는 정도이다 (참조 [3, p. 329]). 통편은 비례, 비례 분배, 과부족셈(영부족) 문제, 급수, 다원 1차 연립방정식, 거듭제곱근 구하기, 2차방정식 및 3차 방정식의 해법 등으로 되어 있다. 그중에서 다원1차 연립방정식, 2차 방정식 및 고차방정식의 해법은 클라비우스의 책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내용도 중국의 고대 수학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별편은 단지 절원현산(截圓弦算) 1절만 있을 뿐이다.


『동문산지』에 실린 필산은 현재의 산법에 상당히 가깝다. 편리한 연산체계를 중시하고 그 결함을 끊임없이 보완하여 차츰 완성시켰다.


(10) 수서구장(數書九章)


화북땅에서 천원술이라는 새로운 수학이 탄생될 무렵 남송에도 수학연구의 붐이 일어났다. 『수서구장』이나 『양휘산법』등의 수학서는 그 성과이다. 『수서구장』의 저자인 진구소는 청년시절에 수도 항주에 가서 천문대의 학자들과 접촉했다. 천문대에서 취급하는 역법에서 쓰이는 수학적 내용은 전통적인 계산술이 중심이었다 (참조 [3, p. 215]). 진구소의 수학이 비교적 전통적인 수학의 흐름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서구장』(1247)은 천문학상의 계산의 기점을 추산하는 경험적인 방법을 발전시켜 복잡한 1차 부정방정식 문제의 해법을 계통적인 수학이론으로까지 높였다.

 

그러나 송대의 이른바 이학자(理學者, 朱子學派)가 우주의 기원인 정신과 물질의 상호의존관계를 연구하고 한편으로는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에서 소박한 변증법의 요소를 도입하고도 한편으로는 그 신비주의적인 경향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들의 철학(宋學)에는 상수(象數)라는 이름의 저 신비주의 사상이 다분히 풍겨있었다. 수학자들도 물론 그 영향을 받았다. 이 『수서구장』의 서문에는 수의 기원에 대해 “하도․낙서가 그 오의(奧義)를 전개한 후로……”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11) 해도산경(海島算經)


저자인 유휘(劉徽)는 한이 망한 뒤 천하가 위․오․촉의 3국으로 나뉘어졌을 때, 화북의 중심부를 차지한 위나라 사람이다. 그밖에 그에 관한 자세한 이력은 알 수가 없다. 『해도산경』은 『구장산술』구고장의 부록 형식으로 쓰여졌으며 본래는 중차(重差)라고 불렀으나 나중에 독립된 책을 책으로 엮어졌다. 책이라고 해야 통틀어 불과 9문제이다. 그 제 1문은 바다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섬까지의 거리나 높이를 산출하는 측량상의 문제로 100보를 기선(基線)으로 하여 100리 이상의 거리에 있는 지점을 측량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유휘의 이 수학논문은 고도로 발달한 중국의 지도학을 뒷받침한 책으로도 주목받을 만하다. 그 밖의 문제도 모두 직각삼각형의 성질(=피타고라스의 정리)을 이용하여 해를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내용면에서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수학이 본래 측량술과 결부되어 발달한 사실에 주목한다면 이 『해도산경』의 의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참조 [3, pp. 137-138]).


(12) 손자산경(孫子算經)


『손자산경』은 산경십서5)의 하나로 손자는 얼핏 전국시대의 孫子라는 군략가를 연상시키지만 그렇게 추측할 수 있을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이 책은 상․중․하의 세 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에서는 대수의 명칭은 만만을 억으로 하고 억 이상의 조․경․해 ……등을 모두 10마다 자리바꿈을 한다. 산대(籌)에 의한 기수법이며 곱셉․나눗셈에 대해 설명하고 중권에서는 예를 들어 산대를 사용한 계산법이며 분수, 제곱근 구하기(開平)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 고대의 계산을 고증하는 좋은 자료가 되어 준다. 응용 문제는 거의가 일상적인 보기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구장산술』이래의 실용적인 전통에 충실한 초보자용의 학습서로 꾸며진 듯 싶지만 하권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아낙이 강변에서 그릇을 씻고 있다. 관리가 물었다. 무슨 그릇이 그렇게 많은가 아낙이 대답하길 두 사람이 밥을 함께 먹고 세 사람이 술을 함께 마시고 네 사람이 고기를 함께 담아 먹었거든요. 그래서 모두 65개의 그릇을 썼는데 손님이 몇 사람이었는지는 알수가 없어요.


또, 다음 문제는 이른바 학거북셈으로 우리와도 친숙한 문제이다.


지금 꿩과 토끼가 같은 바구니에 들어 있고 그 머리 수는 35마리, 발의 수는 84개이다. 꿩과 토끼는 각각 몇 마리인가


그리고 다음은 산대의 수표시 방법을 나타낸 것이다. 계산할 때에는 먼저 수의 자리와 구조를 알아야 한다. 1자리는 세로이고 10자리는 가로, 100자리는 세로로 서 있지만 1000자리는 가로로 누워 있다. 그러므로 1000자리와 10자리의 수는 똑같이 보이며 또한 10000자리와 100자리도 같다. ……6이 되면 더 이상 자획을 쌓지 않는다. 즉, 다음과 같다.


<그림 Ⅱ-1> 산대 수 표시


예를 들어 2567, 23016, -732 산대를 써서 나타내면 0은 ○로 나타내고 음수인 경우는 막대기를 비스듬하게 놓음으로써 표시한다.

 

5) 중국고전수학의 총서로『주비산경』,『구장산술』,『해도산경』,『철술』,『집고산경』,『손자산경』,『하후양산경』,『장구건산경』,『오조산경』,『오경산술』등 10권이 수학책을 통틀어 가리킨다. 여기서 산경이라는 호칭을 붙인 것은 역경․시경․서경 등의 고전에 비유할 수 있는 수학의 중요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13) 기하원본(幾何原本)


독일의 수학자 클라비우스(Clavius, 1537-1612)가 주석을 붙인 유클리드『원본』중 6권까지만 번역한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기하원본』 제1권을 스스로 번역을 시작하였지만 그의 이름으로 된 6권까지의 번역출판(1607)은 1600년에 그가 남경에서 알게 된 후 줄곧 가장 가까운 벗이자 가톨릭의 독실한 신자였던 서광계의 협력을 얻은 결과이다. 이 번역 작업은 과학에 관한 서광계의 학문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기하원본』은 리치가 구술한 것을 서광계가 받아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일단 만들어진 초고는 서광계에 의해서 다시 다듬어 졌다 (참조 [3, pp. 316-317]).

 

『기하원본』서론으로 쓰여진 마테오 리치의 역기하원본인(譯幾何原本引)과 서광계의 각서(刻序)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학문상의 위치와 기하학의 논리구조에 관한 명확한 설명이 있다. 명백한 가정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다음 명제로 차츰 나아가는 유클레이데스의 기하학 『원론』의 논리적 구조를 서광계는 서양 학문의 핵심적인 방법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중국 고유의 문화 전통을 충실히 지켰다는 점에서 서광계는 여느 지식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서광계는 사대부 독서인답게 고전의 소양까지를 동원하여 동서 수리관의 일치를 꾀했던 것이다.

 

<그림 Ⅱ-2> 산대로 표시된 수의 예

마테오 리치, 아담 샬, 페르비스트에 이어 예수회중국전도단을 통솔하여 실제로 핵심적인 활동을 하였던 부베(Bouvet, 白進)는 북경 도착(1688, 康熙 27년) 이래 제르비용(Gerbillon, 張誠)등과 함께 강희제에게 천문․역학․수학 그리고 의학 등을 교수하였다. 수학교과서로는 유클레이데스와 아르키메데스의 기하학을 비롯한 이론 및 응용기하학을 만주어․중국어로 번역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기하원본』이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한 학자관료 증국번의 휘하에는 당대 수학계의 제일인자 이선란이 있었다. 그는 이 후원자에게 “수학자에게는 필독의 서이고, ……지금 당장에 인쇄해 두지 않으면 망실의 염려가 있는……”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의 번역을 완성할 수 있도록 원조해 줄 것을 간청하였던 것이다.


Ⅲ. 실학기


실학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줄임말이다. 이는 중국 한 대의 반고(班固)가 쓴 책 한서(漢書) 하간헌왕전에 나오는 말로 “학문을 닦고 옛것을 좋아하며 실사에서 옳음을 구한다”에서 나온 것이고 그 원래의 의미는 학구적인 태도는 실제적이고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조 [12, p. 13]).

 

17세기 초 조선에서 대표적인 신사조이자 학풍으로서 실학사상의 형성은 임진왜란과 두 차례에 걸친 호란으로 인구가 감소한 데다 유민의 발생, 또 농경지의 감소로 농업생산이 현저히 줄어 백성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곤궁에 처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자 양반계층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토지 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사회개혁안을 내놓았다. 또한 중국과의 잦은 교유와 조선에 표류해 정착한 외국인들을 통해서 전래된 서양의 자연과학기술은 실학 사상 형성의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였다.

 

이즈음 발생한 실학이란 첫째,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적으로 하는 실사구시의 학문이다. 둘째, 민본적 민주사상이다. 셋째,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외국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사대주의와 무조건 본받으려는 모방주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연구하고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등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바탕 위에서 외국의 선진 과학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넷째, 실학파의 실학사상에는 모두 사회개혁사상이 들어있다. 이들 사회개혁사상의 특징은 옛날 사람의 도를 빌려 현실을 개혁하려는 탁고개제(托古改制)의 방법에 있다. 다섯째, 실학파의 철학사상은 그 철학의 기본 경향은 理일원론이 아니라 氣일원론, 즉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참조 [3, pp. 34-51]). 이러한 실학사상은 특정 분야의 개혁운동이라기 보다 사회전반적인 분야의 개혁 및 혁신 운동이라도 볼 수 있다.

 

1. 실학기 수학의 특징


16세기 후반부터 싹튼 약 300년에 걸친 실학파의 계몽운동의 특징은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였다는 점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조선문화의 중흥기라고 보여지는 18세기의 영․정조(1725-1800)의 치세를 맞이하여 적극적인 과학기술 정책의 실현은 역학(曆學)․산학(算學)․의학(醫學)의 기술 관료를 대폭으로 증원한다는 형태로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환경 속에서 긍지와 의욕을 가득히 자극 받은 중인 산학자들이 실무에 관한 기술적 지식이상의 수학 일반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리하여 실학기의 수학은 종래에 없었던 대단히 중요한 변혁을 거쳐 급속도로 성장한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우선 중인 산학자 사이에서의 의욕적인 수학연구의 붐 및 저술활동이 있었고 실학자 스스로의 수학상의 저술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이른바 사대부 수학과 중인수학과의 교류가 있었고 일부 수학자의 유럽수학에의 접근 및 한국 수학의 독자적 계기 마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실학기의 수학이 더 이상 발전을 못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과학의 영역이 수학과 역산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수학의 주류는 여전히 『상명산법』, 『양휘산법』, 『산학계몽』이 중심이었다는 것, 즉『경국대전』에 규정된 산학이 당시까지도 지속적으로 실현되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셋째, 『동문산지』․『수리정온』등 유럽계의 근대적인 수학서가 소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 즉 여전히 전통적인 고전 수학의 패턴이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 등이다.

 

2. 실학기의 산학제도


고려의 제도를 본뜬 조선 초기의 관료조직 내의 기술학(雜學)은 세종 때. 병학(兵學), 율학(律學), 자학(字學), 역학(譯學), 의학(醫學), 산학(算學), 유학(儒學), 이학(吏學), 음양풍수학(陰陽風水學), 악학(樂學)의 십학(十學)으로 완성을 보였으나 세조 때 착수되고, 성종 16년에 완성 공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종래의 十學이 醫․譯․律․陰陽․算․樂․畵․道 의 八學으로 바뀌게 된다.

 

『대전』을 보면 산학은 육조(六曹) 중 호조(戶曹)에 속하고 있다. 호조는 호구(戶口)․전지(田地)․조세(租稅)․부역(賦役)․공납(貢納)․진대(賑貸,정부곡물의 대여) 등의 사무를 관장하는 판적사(版籍司)에 비축되어 있는 대폐(貸幣)․양식(糧食) 등에 관한 재고조사의 업무를 담당하는 회계사(會計司), 왕실 내의 여러 가지 지출을 맡은 경비사(經費司) 등 국가 재정을 다루는 부서들로 이루어져 다른 부서에 비해 직원이 많았을 것으로 비추어진다. 잡학 중에서도 의(醫)․역(譯)․율(律)․음양(陰陽)의 네 과는 정식의 과거제도가 있었지만 산(算)․화(畵)․도(道)․악(樂)의 사학(四學)에는 필요에 따라 각 부서에서 직접 행하는 채용고시인 취재(取才)법이 있었을 뿐이다 (참조 [4, pp. 167-169]).

 

『경국대전』속에 이렇게 고정적으로 명시된 이래 산학(算學)의 격하의 개선은 실학기 동안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역대 왕들은 과학의 하나인 산학을 심지어 가장 과학과 산학이 융성한 발달을 보인 세종 대에서조차도 학문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 수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상수(象數)의 이론처럼 인간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어떤 실천적 기능을 다룬다면 그 지식 체계는 학문의 영역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본 자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생활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여도 지배 원리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 쓰이는 수학을 비롯한 과학기술 분야는 잡기(雜技)라는 이름으로 보다 낮은 위치를 강요당했다.

 

<표 Ⅲ-1> 실학기 동안의 산사 채용 인원표


왕(집권해수) 채용 서력기간 합격자수 비고
孝宗(11년)    1650-                26
顯宗(16년)    1660-                11
肅宗(26년)    1666-                98       현종7년부터
景宗(4년)      1692-              185      숙종18년부터
英祖(52년)    1723-1776        190       경종3년부터
正祖(24년)    1777-1800        180
純祖(34년)    1801-1834        246
憲宗(15년)    1835-1849         95
哲宗(14년)    1850-1863         73
高宗            1864-1888        257


<표Ⅲ-1>은 양란이후 청대 문물의 유입이 봇물처럼 들어오던 시기인 효종부터 고종까지의 산학 합격자수를 본 것이다. 오늘날 정부 내의 이공계출신 비율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실학기 내의 왕조에서 비록 정규적인 채용시험이 아니라 왕들의 집권기간에 부족인원 만큼이나 대규모 국책사업 등의 필요에 따라 뽑은 산사(算士)의 수여서 표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떤 해는 산사를 한 명도 뽑지 않은 경우도 있고 한 해에 가장 많은 뽑은 인원으로는 고종8년(1871)에 90명까지 뽑은 예도 있다. 오늘날과 비교해서 한 번 살펴 볼만은 하다.

3. 산사의 직무내용과 정원


실학의 발달과 직접적인 산사의 정원 증가와 비례할 수는 없지만 영조21년에 공표된 『속대전』에서는 산생(算生)의 정원이 이전의 15명에서 61명으로 대폭적인 증가를 보이고 있다. 실학의 성숙기라 볼 수 있는 영조 20년(1744)에는 서양 근대의 역산법을 습득해 온 관상대 기사(技士)들에게 특히 포상을 내리고 있다. 순조 8년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관료체제 내의 산사 60명의 직무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표 Ⅲ-2> 산사의 직무내용


배치부서 정원 직무 내용
會計司5 各司․各道의 錢穀, 관리의 녹봉에 관한 회계
版籍司6 本司 소속의 각부서에 관한 회계, 湖南․湖西지방의 토지대장․양곡대장의 관리
支調色6 別例房 소속의 각 부서의 회계, 嶺南․關北비방의 토지대장․양곡대장의 관리
版別房6 본방 소속의 각 부서의 회계, 湖南․關東지방의 토지대장․양곡대장의 관리
解由色6 소속된 각부서의 회계, 京畿․關西․江華府․開城府․水原府․廣州府의 토지대장․양곡대장의 관리
歲幣色4 본사 및 廣興倉․外都庫의 회계
作米色5 別營․別庫의 회계, 방출하는 양곡의 대장 관리
收貢栗色※ 10 팔도의 奴婢로부터의 수공 및 그 회계문서 관리
應辨色4 본사(외국 사신의 접대)의 회계
木物色※ 2 國用의 목재 출납에 관한 사무
金銀色※ 2 본사(金․銀의 제련)의 회계
鑄錢所監官2 본소의 회계 및 주전에 관한 문서 관리
宣惠廳※ 3 전곡의 출납, 현물화폐의 회계
均役廳※ 2
兵 曹※ 2
粮飽廳※ 1
禁衛營※ 1
御營廳※ 1
收稅所※ 2 강물에 떠내려 오게 한 목재에 대한 십분의 일세를 과하는 업무

(※표를 한 부서는 다른 부서 計士가 겸임 또는 파견 근무를 한다.)

Ⅳ. 실학기의 수학자


1. 실학파 수학자


실학파 수학자는 양란의 혼란기에 정체성을 상실한 즈음 청을 통한 유럽계의 과학기술의 수용에서 야기된 서양의 충격과 청대 문명에의 접근으로 보다 실질적인 이용후생이나 부국강병의 수단으로서 기술이 지닌 중요성을 정부당국에 건의하고 필요선이어야 할 기술의 존재가치를 일반 식자층에게 재인식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중인과학자의 긍지와 의욕을 돋구었다는 것으로 의의가 크다.

 

그러나 실학자들의 손으로 엮어진 수학서는 유럽계의 그것을 인용하고 있으면서도 수학의 개념이나 방법은 전통적인 산학의 범위를 한걸음도 벗어나고 있지 않다. 게다가 계몽서라는 제약때문인지 당시 산학의 출전(양명산법, 양휘산법, 산학계몽)에 비해서 수학서로서의 체계, 그리고 수준 등의 면에서 휠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거론한 실학파 이외에도 많은 실학자들은 중국을 통해 서양과학 문물과 동시에 학문을 받아들이면서 합리적인 면과 실용적인 과학의 바탕이 되는 수학을 연구하고 관심을 기울였다고 보여진다.


(1) 최한기(崔漢綺)


최한기는 1803년(순조3) 빈궁한 양반 가문에서 최치현의 독자로 태어났다. 자는 지로(芝老)이고 호는 혜강(惠岡), 명남루(明南樓)이다. 영의정의 후손으로 순조25년(182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을 마다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아들이 고종의 시종이 되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노인직(老人職)이 수여되었다. 전통적인 성리학의 입장을 탈피하고 철두철미한 경험주의로 일관한 실천적 사상가였다고 하는 최한기는 그러나 수학을 이해하는 점에서는 틀림없는 전통주의자였다.

 

즉, 그의 수학관은 ‘산학(算學)과 음양술수(陰陽術數)를 동일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라고 갈파하여 수학이 형이상학이나 미신으로 타락하는 것을 경고하였던 그이기도 하지만 그의 수학관은 소위 신기(神氣)의 합일설(合一說)이라는 철학을 부연하기 위한 수단에 그쳤던 것이다 (참조 [4, p. 263]). 그러나 “수학에 관한 지식의 정도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식견을 재어보고 수학적 사고의 여부에 의해서 합리적 태도의 여하를 통찰할 수 있다 (참조 [4, p. 219]).”고 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이며 실학이 학문으로서 이론적으로 구명되지 않고 사상적으로 통일된 기본 원리로서도 다루어지지 않았던 당시에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의 기반 아래 무실사상(務實思想)을 전개하여 실학의 철학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경험주의적인 과학철학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특히 교육사상에 있어서 직업교육을 제창하였다. 10세에 아버지 최치현이 세상을 떠나 그는 종숙인 최광현의 양자로 들어갔다. 최한기의 벼슬은 생원에 그칠 정도의 명색이 양반일 뿐 빈궁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그는 피지배층과 고락을 같이 함으로써 그들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그 개선의 절박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최한기는 빈궁한 처지에서 저작에만 몰두하다가 1873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으며 과학과 진리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천문학, 지리학, 수학, 성리학, 철학 등 모든 분야에 조예가 깊었으며 일생동안 자신의 연구 성과를 개괄한 수많은 저서를 썼다 (참조 [12, p. 237]). 천문학 계통의 저술로는 『만국경위지구도(萬國經緯地球圖)』『의상리수(儀象理數)』『우주책(宇宙策)』『지구전요(地球典要)』가 있다. 수학서로서 알려진 것은『습산진벌』 五卷이다. 이것들은 모두 명남루전집(明南樓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최한기는 19세기 중엽에 기일원론 철학을 집대성한 탁월한 철학자이다.

(2) 홍대용(洪大容)


홍대용은 1731년(영조7) 나주목사를 지낸 홍력(洪轢)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덕보(德保), 호는 홍지(弘之)이며 당호는 담헌(湛軒)이다. 가문은 부유하지는 못했으나 증조할아버지는 참판, 할아버지는 대사간, 아버지는 목사 등 몇 대에 거쳐 벼슬을 한 집안이었고 정치적으로도 당시 집권한 서인 노론파에 속한 이름난 양반 가문이었다. 홍대용은 어려서 당시 대학자로 이름이 높던 김원행에게서 유학을 배웠다. 예서보다는 책력을 꾸미고 계산하는 일이 오히려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조선 봉건사회에서 양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중인인 직관이나 하는 것들로 천대하던 천문, 역학, 수학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30세에 이르기까지 학문에 전념하여 마침내 육예의 고학(古學)과 상수(象漱), 음악, 천문, 율력, 병법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다. 또한 북학파(北學派)라 일컫는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뜻을 같이하고 학문을 논하였다. 그는 1765년 35세 때에 중국에 가는 숙부 홍억을 수행하여 북경에 가서 절강의 문인 육비(陸飛)와 엄성(嚴誠), 항주의 선비 반정균(潘庭筠) 등과 학술을 교류하였다. 또 북경에 머물던 독일 사람 흠천감정(欽天監正) 헬레슈타인과 부감 고가이슬과 만났으며 관상대를 견학하고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외유를 통해서 선진문명에 접하였고 유럽 과학의 우수성도 체험하였던 홍대용은 북학파의 학자 중에서도 가장 진취적인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자택 안에 사설의 천문대까지 꾸며 놓았었다는 그는 가장 실천적인 과학자이기도 한 셈이다.


1774년 44세 되던 해에 벼슬도 하여 좋은 정치를 베풀고자 하였으나 봉건제도의 여러 가지 폐단에 가로 막혀 어쩔 도리가 없자 1783년 53세 되던 해 벼슬을 그만두고 실학연구에 전념하였다. 대표적인 저서인 『담헌서』외집 4-6권 『주해수용』에서는 수학과 천문학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주해수용』서문을 보면 수학에 대한 조예와 그의 수학관이 잘 나타나 있다. 서문에서 그는 그때까지의 수학책이 『구장산술』의 범위와 방법을 벗어나지 못한 것을 비판하면서 수학이 새로운 창조와 경험에 의해서 새롭게 풍부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해수용』에서 그는 수학을 배우는 목적은 사고능력을 길러 품성을 형성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특히 수학을 창조적으로 학습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대용은 많은 중국의 수학책을 참고로 하여 정리하고 연구하여 당시 수학을 집대성했다. 또한 홍대용의 수학수준은 대단히 높아 당시 수학의 거의 모든 부분을 망라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결점까지 발견하고 분석했다. 그 내용도 배율법․약분법․면적․체적 등 근대적인 표현을 썼으며 실제로 필요로 하는 지식만 대상으로 하는 그의 현실주의적이고 합리적인 기본태도를 볼 수 있다.

 

그는 18세기 후반기 조선의 탁월한 자연과학자이자 철학가이며 북학파의 거두이다. 홍대용의 자연과학사상은 실학적 학풍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우선 우주 공간의 무한성을 주장하면서 우주공간에는 모양이 둥글고 회전운동을 하는 별이라는 천체들이 무한히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홍대용의 우주 자연관은 당시 지배사상인 주자학적 우주관에 큰 타격을 가한 것이었으며 천문학 분야를 근대 과학의 길로 접어들게 한 진정한 시초였다.

 

홍대용의 실학사상은 역사적으로 볼 때, 상당히 진보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인류사회는 그 어떤 조물주에 의하여 만들어지거나 성인이나 현명한 군주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진화해 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교육제도의 개혁을 제기하면서 서울에서 지방의 면 단위에 이르기까지 학교를 세우고 8세 이상의 아이들을 교육하되 효, 제, 충, 신 그리고 사격, 기마 등의 군사교육, 글씨 쓰는 법, 수학 등을 가르칠 것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의산문답』『하경론』,『주해수용』, 『연행기』가 있다.


(3) 황윤석(黃胤錫)


황윤석(1729-1791)은 현재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에 해당되는 전라도 흥덕현 귀수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영수(永搜)이고 호는 이재(頤齋), 서명산인(西溟山人)․운포주인(雲浦主人)․월송외사(越松外士) 등이다. 황윤석의 집안은 학문과 덕망이 있는 명문가였다. 그의 부친 전(廛)은 벼슬이 장릉(莊陵) 참봉에 머물렀지만 학덕으로 이름이 높았다. 황윤석은 5세 때 조모에게 소학(小學)을 배우고 차례로 사기(史記)와 사서오경(四書五經)․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그는 경학을 위주로 하면서도 새로운 학문 수용에도 적극적 태도를 보였다. 그의 이러한 면은 그가 10세 때부터 죽기 이틀 전까지 썼던 일기 이재난고(頤齋亂藁)에 잘 드러난다.


황윤석은 31세 때 농암 김창협의 손자로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는 미호 김원행의 제자로 입문한 이후 주자학․역학(易學)․율려(律呂)․상수학(象數學)․자연과학에까지 두루 수학하며 평생토록 스승의 학문에 심복하였다. 황윤석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철저하게 고증학적인 방법에 입각하여 자료들을 수집하고 분석․정리하였다. 그의 저서들을 통해 평생동안의 학문적 관심 분야를 살펴본다면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역상학(天文易象學)․산학(算學)․기하학(幾何學)․자연과학․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 등에 두루 미치고 있다.

 

황윤석은 31세(1759)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7년이 지나 장릉 참봉에 임명되고 뒤이어 사포서(司圃署)6)를 거쳐 세자 익위사(世子 翊衛司)7)의 익찬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당대 일가를 이룬 당파와 상관없이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였으며 말년에는 후학을 가르치며 저술에 몰두하며 여생을 마쳤다. 황윤석은 가학을 바탕으로 하여 학문을 익혔으나 나이 10여 세 무렵 과거공부 이외에 성리설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고 힘써 그것을 탐구하였다.


그의 학적 태도는 학문을 어느 한 분야에 한정시키지 않는 박학정신(博學精神), 널리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다는 궁리정신(窮理精神), 또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밝히고 그대로 행동하려는 실천정신이 주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황윤석은 육예(六藝)의 하나인 수(數)에 관심을 돌렸다. ‘수(數)’는 아홉가지 수학상의 법칙이며 사물의 변화를 극진히 궁구할 때 매개역할을 하는 공통분모적 추상개념이다. 즉, ‘수’는 객관적 이법(理法)을 파악하는 동양학문 범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가 학문의 학 분과로서 ‘수’를 기초로 한 자연과학 사상을 탐구한 것은 우주자연의 순환성에서 주기적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간의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초석은 『이수신편』을 저술하는 계기, 그리고 우리말 소리의 고저․장단 등을 분석하는 틀, 더 나아가서는 서구과학사상을 수용하는 발판이 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황윤석의 학문은 요컨대 이이의 성리설을 체(體)로 삼고, 용(用)으로는 스승 김원행의 학문에 힘입어 역학․율려․상수학․자연과학․수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성취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그의 박학정신은 서구의 새로운 자연과학사상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일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다.

 

황윤석이 살았던 영․정조 시기에 『군도(君道)』와 『치도(治道)』를 지어 “지금이 계책은 먼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근본을 올바르게 하며 근원을 깨끗이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라고 하여 근본의 확립과 위로부터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세상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원통함이 있다고 하면서 첫째는 서얼이 죄가 없으면서도 버림을 당하는 것이요, 둘째는 부녀자의 개가를 금하는 것이요, 셋째는 노비들이 세습적으로 매매되는 것이다. 이는 천하 고금에 없는 바인데 우리나라의 풍속에만 있는 것이니 또한 어진 사람과 군자가 측은히 될 바이다"라고 했다. 

 

17세기 중국을 거쳐 서양의 종교와 과학 등 西學이 전래되자 조선의 학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황윤석은 어떤 경위로서 서학을 접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34세(1762) 때, 그의 친구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기하원본』을 언급하고 선배들이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 때 이미 서구의 수학과 기하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참조 [13, pp. 168-169]). 황윤석은 많은 서학서적을 보았지만 특히 수학과 기하학의 원리에 관한 『기하원본』과 서양 역법을 수용하여 중국의 전통 역법을 보완한 『신법역인(新法曆引)』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그가 수학과 기하학의 원리에 관하여 쓴『산학문답(算學問答)』, 『산학입문(算學入門)』, 『산학본원(算學本源)』등에서는 가감승제의 원리와 여러 가지 형태의 길이․넓이․부피․무게 등을 계산하는 기하학의 원리를 기술하고 있다.

 

이는 학문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궁극적 목표는 도량형의 기준을 통일하여 백성들의 신뢰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즉, 산학에 대한 그의 심도 있는 탐구는 당시 도량형 규격의 차이에서 오는 탐관오리의 수탈 행위를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학적 원리의 적절성과 동일성을 토대로 도량형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정사(政事) 즉 애민정신을 펼칠 수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서구의 정확한 과학사상(수학적 계산법)을 수용하여 지구가 기울어져 있음과 태양의 황도(黃道), 지구의 적도(赤道)를 들어 지원설을 주장하였다.

 

이를 보아도 그의 과학사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학에 대한 그의 수학적 탐구는 실학적이고 실용적 학문으로서 경세치용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자연과학사상의 특징이자 우리 과학사의 발전적인 면을 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황윤석이 많은 서구 사상 중 특히 수학을 탐구한 것은 수학이 모든 학문을 정밀하게 사유할 수 있는 기틀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조 [13, p. 172]). 수학에 대한 그의 정밀한 탐구는 조선 말기에 빈번하게 수학서책을 간행하여 외세에 대항하려 했던 부국강병책에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6) 호조의 소속으로 궁중의 원예․채소에 관한 직무를 맡던 벼슬
7) 병조의 소속으로 왕세자의 侍衛를 맡던 벼슬

(4) 이규경(李圭景)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에 두드러진 역할을 한 실학자이다. 북학파 실학자 이덕무의 손자이기도 하다. 이규경의 호는 오주 혹은 소운거사(嘯雲居士)이며 평생에 벼슬하지 아니하고 청조 고증학의 영향을 받은 할아버지 이덕무의 영향을 받아 방대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저술하니 총 1천4백 여종의 항목으로써 60책에 달한다. 그는 이 책에서 『기하원본』을 해설하면서 기하학의 목적을 열거하는 현실적인 기술주의에 입각한 한국인이 전통적인 수학관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참조 [3, p.447]).

 

“명물도수(名物度數)의 학은 한 대(漢代) 후로 끊어진 지 오래라고 한다. 명나라 말기 중국인이 점차 그 가운데로 파고 들어가 습관이 되어 이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서광계․왕징이 절학한 뒤에 일어나 계발한 것이 많아 상수학을 창시하니 명물도수가 밝게 다시 세상에 밝혀지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전문 명가가 점점 나오게 되었다. 이 학문이 동방(조선)으로 흘러옴에 뜻있는 선비가 마음을 다하여 힘써 심오함을 추구하나 이목이 한정되어 다만 껍질만 짐작할 뿐이요, 그 정밀한 깊이를 해득하지 못하여 평소에 비록 능한 듯 하나 실지에 있어서는 어리둥절하고 어두우며 그 본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모르고 그것을 물으면 머뭇거릴 따름이니 이는 도리어 처음부터 알지 못하는 자만 못하다. 나는 장구(章句)를 묵수하며 이러한 유용한 학을 아는 것이 없어 그 실마리도 모르나 마음으로 이것을 좋아하여 세월이 쌓이는 동안에 혹은 글 가운데서 얻는 것이 있고 혹은 생각을 마음에 일으킨 것이 있다”고 했다.

 

이규경은 서광계와 왕징의 명물도수학과 유용학을 위하여 『산고(散稿)』를 저작했다고 하니 백과전서적 실학의 대표적인 저술이고 또 그 파의 대표적 학자이다. 그는 박학했으나 서출인 까닭에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고 1778년 심염조를 따라 북경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교유하고 산천․궁실․누태(樓台)․초목․충어(蟲漁)․새․짐승까지 연구하여 북학을 제창했으며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는 백과전서적인 조선 후기 실학의 중요자료이다.『청장관전서』는 사전처럼 온갖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앙엽기(盎葉記)』는 소백과사전이라 하겠다.

 

박제가와 함께 북학파에 속하여 그 학을 집대성했는데 성리학에 대해서 그 공리(空理)함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 학자는 대개 성리학에서 공담(空談)하여 문장을 꾸미는 데 고심하고 육예(六藝)와 시무(時務)를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실재 일에 임하여는 망연자실하고 아무것도 못한다.” 오주는 또한 다음과 같이 유용학(有用學)을 강조했다. “격물궁리(格物窮理)한다는 학자가 인체의 내외 모양과 내장․골격․근육의 상태가 어떠한지 모르고 다만 천지에 대하여 공담하고는 스스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자만하나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나라는 격물을 가장 소홀히 하여 천하일용(天下日用)을 위한 물건을 홀로 놓아두고 사용하지 아니하여 실용할 방법을 연구하지 아니하니 안타깝다.” 그러나 그의 수학서가 없어서 구체적인 활동을 알기는 어렵다.


2. 중인 수학자


중인 산학자들은 구제적으로 수학을 활용하는 사람들의 수학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토지측량, 회계, 세무 사무를 맡은 형식적인 수학 그리고 천문학과 달력을 만드는데 국가가 필요로 하는 소위 관수용(官需用)의 실질적인 수학을 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첫째, 당시의 중인 산학자들은 실학파를 포함한 양반지식인들에 비하면 대륙의 사정에 어두웠다는 것이다. 그런 중인 산학자 입장에서는 구태의연한 산학제도 아래서 옛 그대로의 산서를 대하고 있을 뿐 중국어로 번역한 유럽계의 수학서는 아직 입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 그 반면에 중국에서는 이미 끊긴 천원술과 포산법(산목계산)의 전통이 이 땅에서는 계속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특히 『산학계몽』은 중국에서는 1839년에야 겨우 나사림(羅士琳)에 의해 조선판을 근거로 복각되었고 그 때 비로소 이 산학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나 그 사이 한국에서는 이 책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산사 채용고시의 교재로 사용되어 왔다. 셋째, 전통수학의 테두리 안에서는 『구일집』에서의 홍정하와 중국사력과의 대화내용을 보면 당시의 중인산학자의 수준이 오히려 중국수학을 앞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인 수학자들의 산사집단은 지식의 독점적인 세습화를 이루어 후계자들에게 일종의 자부심을 안겨주어 수학연구에 정진하는 분위기였다. 홍정하의 경우는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는 물론이고, 외가의 할아버지, 장인까지 수학자였던 전형적인 예이다. 또한 『산학입격안(算學入格案)』8), 『주학팔세보(籌學八世譜)』9)를 편찬하여 그들만의 전문성을 요하는 학자적 경지의 산학자로서의 긍지와 계통을 보여주고 있다.


8) 편저 미상으로 弘治(성종19년, 1488년)라는 년호만 보일 뿐 연월일에 대한 기록은 없다. 권1은 홍치로부터 건융48년(정조7년, 1783년)사이의 산학입격자 함영부부터 시작하여 최성원까지 838명과 권2의 건융49년(정조8년, 1784)부터 광서14년(고종25년, 1888)사이의 산학입격자 이경윤부터 시작해서 김인선까지 789명의 성명과 가계가 기재되어 있으며 처가의 신분도 밝히고 있다.
9) 편자․간년미상으로 산학자들의 가계 등을 약기한 책이다. 이호풍으로부터 진희면에 이르기까지 443명의 산학자의 성명과 그들의 팔세대(때로는 그 이상)에 걸치는 가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생년월일, 혼인관계, 관직명 등이 기재되어있어 중인산학자의 가계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1) 경선징(慶善徵)


경선행은 본관은 청주이고, 1616년(광해군8)에 태어났으며 자는 여휴이며 조선시대의 수학자이다. 초명(初名)이 선징이고 아버지는 주별제인이라는 벼슬을 지낸 사람이다. 『주학팔세보(籌學八世譜)』에도 올라 있고, 교수산별제(敎授算別提)를 지냈으며, 당시 이미 제일급의 산학자로 손꼽히던 인물이다. 그는 활인서의 별제로 사회에 널리 알려진 산학자였다. 김시진의 산학계몽 중간본의 출간에 있어서는 국초인본을 입수하여 간행하였으며 그 서문에는 지부회사였던 경선행이 파손된 부분을 바로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최석정의 『구수략』에는 “동국의 대표적인 수학자-서양으로는 맛테오릿치와 아담 샤알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있어서는 경선징이 가장 저명하다”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 산학자들의 약력을 소개한 『산학입격안(算學入格案)』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나와 있다. 또한 홍대용은 『담헌서(湛軒書)』 외집의 인용서 목록에 “詳明數訣, 本國慶善徵撰”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전형적인 중인 출신 산학자로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묵사집』뿐이다.


(2) 이상혁(李尙爀)


뒤에 나오는 남병길의 수학상의 공동 연구자인 이상혁은 중인 출신의 산학자이다. 그래서 그에 관한 기록은 『산학입격안(算學入格案)』에 다음과 간단하게 나와 있을 뿐이다. 이상혁은 산학의 고시(考試)에 급제한 다음 서운정(書雲正), 그러니까 역산(曆算)을 다루는 천문관리직에 있었고 남병길보다는 10세가 연상이었다. 이상혁의 저서 가운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천문학서에 『규일고(揆日考)』, 수학서에『익산(翼算)』, 『차근방몽구(借根方蒙求)』, 『산술관견(算術管見)』등이 있다.

 

한국 수학의 전통의 평가에 관해서 지나치게 인색한 일본인 수학자로 하여금 그의 연구의 독창성을 유일하게 인정받을 만큼 전문 수학자다운 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산술관견』에서는 도해를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펼친 연구는 한국수학사를 그저 결과적으로 나타난 수학상의 업적만으로 평가하려고 했던 일본의 수학사가들로 하여금 ‘모두가 중국의 주해(注解)뿐이었던 조선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를 개척하였다.’고 감탄시키기까지 하고 있다(참조 [4, p. 273]). 이러한 이륙(離陸)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양반 사대부들의 형이상적 수리사상과 교양주의적 수학관과 다른 실질적 수학활동을 하는 일이 중인 수학자인 이상혁에게는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공동의 연구자이면서 남병길과 이상혁의 수학이 그토록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이유는 수학적인 소질이나 능력의 문제에서보다 두 사람의 의식을 지배한 사상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이상혁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인한 결과라기보다 고전수학 속에서 오로지 수학의 내부에만 눈을 돌릴 수 있었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상혁을 포함한 전통사회의 수학연구가들은 산학자들이었으며 근대사회의 수학자 구실은 힘들었다고 할 수 있다.


(3) 홍정하(洪正夏)


그는 1684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여광(汝匡)이며,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또 장인까지 수학자였던 전형적인 중인 수학자였다. 임준(任濬)의 『산학계몽 주해』등 일부 양반 식자층의 이 산서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사실은 중인 산학자들의 뒷받침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구일집』에 집약된 천원술 연구 부움의 배경에는 산학의 확장이라는 체제상의 변혁이 있었다는 점도 아울러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즉, 숙종대(1675-1724)부터 대폭적으로 증가한 산사의 등용이 그것인데 많은 산학자들이 공인으로서의 신분을 보장받고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꾸준한 자발적인 공동연구를 통해서 천원술이 실학기의 수학계에 폭넓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수학을 알려주는 문헌, 그중에서도 특히 산서는 거의 소멸해 버린 지금 추측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하긴 하지만 실학기의 수학연구의 중심은 중인산사들이었고 양반층의 수학 애호가들은 그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심증이 짙다. 『구일집』의 저자의 주위에는 산사라는 직업인으로서가 아닌 수학 그 자체에 진지한 연구욕을 품은 동호인들이 적지 않게 있었던 것 같다.

 

그 예가 잡록에 실려 있다. 서양의 학문처럼 대화로 앎을 알아나가는 것이다. 1713년 5월 29일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 중국은 문화국임을 자부했으며 가능하면 그들은 일류 학자를 사신으로써 외국으로 보냈으며 그것은 간접적으로 문화국임을 과시한 것이다. 홍정하와 유수석(劉壽錫) 두 수학자는 마침내 조선에 온 중국인 사력(司曆)10) 하국주(何國柱)를 방문하여 수학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라고는 하지만 일종의 문화 과시를 위한 시합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거기서 그는 조선의 직업적 산사의 수학 실력을 유감없이 보인 것으로 보인다.


3. 실학파 이외의 양반 수학자


이들은 대개 중국 고전적 정신에 입각한 유교적인 수학을 해온 사람들로서 중국 고대 사상에 충실하려고 했다. 중국의 오랜 전설은 치수와 관계가 있는 것이 많다. 하도(河圖)란 황하에서 나온 용마(龍馬)가 입에서 물고 온 두루마리 속에서 나왔다고 하며 낙서(落書)는 낙수(落水)에서 나온 큰 거북의 등에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마방진으로 숫자놀이에 불과하지만 옛날 중국 사람에게는 중대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유교의 근원은 음양오행설이었으며 특히 오행설은 모든 대상을 5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한 것이다. 조선의 유학자는 특히, 이것을 기초로 해서 여러 종류의 마방진을 많이 만들었으며, 수를 가지고 여러 가지 표를 만들면서 수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의 성질을 보다 깊이 파악하는 정수론 같은 것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못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실학파는 아니지만 남병길 형제의 경우는 천문학에 대한 관심의 한 축으로 수학 자체에 대한 매력을 느껴 수학을 연구기도 했다.

 

10) 중국 천문대의 관직

(1) 남병철(南秉哲)․남병길(南秉吉)


남병철의 자는 자명(子明)․원명(原明)이며 호는 규재(圭齋)이며, 이조판서겸대제학(吏曹判書兼大提學) 등 요직을 지냈다. 홍문관 대제학에 임명되는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수학과 천문학에 뛰어나고 수륜차(水輪車)․지구의(地球儀)․사시의(四時儀)를 제작하였다. 그의 동생인 남병길은 문신이며 과학자로 초명(初名)이 병길이며 실제 이름은 남상길(南相吉)이다. 철종 1년(1850)에 증광문과(增廣文科)의 병관(丙科)에 급제하여 이조참판․형조판서를 거쳐 철종 13년에는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역임하였다. 천문학에 정통하여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이조 말기의 최대의 과학자인 두 사람은 이른바 실학파와는 거리가 먼 당시의 파벌 정치의 한 세력으로써 영작(榮爵)을 누린 사대부였다. 당시의 계몽가 중에서 실제로 수학의 연구에 전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두 사람의 존재는 과학기술의 진흥이라는 구호만으로 끝나고 스스로는 과학의 내부를 파헤치려고 하지 않았던 실학파 운동의 취약한 일면을 보여주는 예이다.

 

남병철(1817-1863)에게는 『추보속해(推步續解)』, 『의기집설(儀器輯設)』등의 천문학서를 비롯하여 측량술에 관한 『해경세초해(海鏡細草解)』가 있다. 『해경세초해』의 결론 부분에서 “수학은 격치(格致)의 실학(實學)이며 국가의 실용(實用)이니 경세(經世)를 담당한 자 먼저 힘써야 할 바”하고 하였다. 또한 그는 ‘총명하기 그지 않고 산술진보에 정통하였다’고 명성이 높았으나 단명의 탓인지 저서는 많지 않다.

 

동생인 남병길도 장수하지는 못했으나 그가 남긴 천문학 및 수학에 관한 저술은 실로 방대하다. 천문학에 관한 것으로는『시절기요(時節紀要)』,『성경(星鏡)』, 『항성출중신표(恒星出中入表)』등이 있고 수학에 관한 것으로는『양도의도설(量度儀度說)』, 『측량도해(測量圖解)』, 『구고술도요해(勾股述度要解)』, 『무이해(無異解)』, 『산학정의(算學正義)』, 『구장술해(九章術解)』, 『집고연단(緝古演段)』, 『옥감세초상해(玉鑑細草詳解)』등이 있다.

 

『측량도해』(1858)는 『구장중차(九章重差)』, 『해도산경』, 『수서구장』등의 고산서의 내용에서 구고(句股)에 관한 부분을 추려내어 문제마다 도해(圖解)를 붙인 일종의 주해서이다. 제재(製材)면에서는 복고적이다. 사대부 수학의 속성의 하나였던 형이상학의 수리관은 완전히 사라지고 진정한 뜻으로 수학적 지식이 될 수 있는 것만이 다루어지고 있다. 서문을 중인 출신의 이상혁이 권두언을 실음으로써 전통사회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태도는 수학 그 자체에 대한 저자의 순수한 열의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수학 해설서 중에서도 가장 완벽했던 도해(圖解)에서도 종래의 산서에서 볼 수 없었던 전통수학에 대한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구고술도요해(일명, 유씨구고술요도해)』에서 피타고라스 정리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주비산경(周髀算經)』에 있는 동양의 전통적인 증명법과 서양식의 둘을 함께 내건 도해적 방법에 대한 열의는 확실히 종래의 수학서에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서명(書名)에도 저자 남병길의 고전적인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런 취미는 개인의 기질이라기 보다 중국 수학계의 영향에서 오는 유행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남병길이 순수한 열정을 기울이면서도 그의 연구의 범위가 고전 수학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의식이 전통적인 가치구조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또 『무이해(無異解)』에서는 방정식의 연구로 유명한 청의 이예(李銳, 1773-1817)가 차근법은 천원술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상소법(相消法)에서는 다르다고 한 주장을 논박한 것이다. 즉 이예의 설에 대해서 그 반례를 들고 있으며 또 상소(相消)의 방법이 같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그의 태도에서 수학 그 자체의 세계를 진지하게 파헤치는 수학자像을 볼 수 있다.


(2) 최석정(崔錫鼎)


전주 최씨인 문정공(文貞公) 최석정(1646-1715)은 이조 중기 숙종대의 정치가로서 치열한 당파 싸움의 한가운데서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당시 당파 싸움을 격렬한 정도를 살펴보려면 최석정이 영의정을 10회 이상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인 최명길이 형제들과 함께 광해군을 몰아내는 인조 반정에 참여한 뒤로부터 일문이 당대의 명문세가가 되었다. 최명길은 후일 병자호란 시 청나라와 화친하자는 주화파의 영수로서 역사의 기록에 남아있다.

 

최석정은 당시에 정권을 잡았던 소론(서인의 일파)의 우두머리로서 숙종이 장희빈을 폐비하고 인현왕후를 복위하려는 것에 반대하여 1710년에 소론과 함께 세력을 잃었다. 정치에서 물러난 이후부터 임종까지 오년의 기간에 우리 역사상 몇 안되는 수학책인 『구수략』을 저술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는 30세로 진사의 시험에 수석 합격, 그 후 부제학(副提學)․이조참판 우의정, 좌의정, 대제학 그리고 마침내는 영의정 등 왕조의 현직(顯職)을 모두 거쳤던 최석정은 명재상 최명길의 손자로서 명가에 태어났고 정쟁에도 참가하고 있지만 동시에 당시의 사대부가 이상으로 삼은 교양을 고루 갖춘 이조의 전형적인 대귀족 학자․정치가 였다.

 

최석정의 『구수략』은 중인(中人)의 수학과는 이질적인 이조 사대부층의 수학사상의 단면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우리에게 흥미가 있다. 그의 마방진에서 보여지는 수의 신비성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주술적인 수 개념과 닮아 있다.

 

Ⅴ. 실학기의 수학서


실학기의 수학서들의 대부분은 중국으로부터 한자가 전래된 이래 전해졌거나 이들 중에는 이미 중국에서 사라진 중국수학서가 참고문헌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또한 이 시기 한자로 번역된 서양 수학서가 참고 문헌이 되어 이들 수학서들을 술해하거나 재해석 해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재해석하는 경우에는 직접적인 서양 문물의 유입의 결과가 아니라 중국화된 수학서를 통하여 서양수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리학적인 사고로 전통적인 수학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해(圖解)를 통한 술해나 비판적 수용, 부분적으로 독창적인 내용이나 시도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나 여전히 전통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양반과 중인 간의 수학이라는 학문적 교류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당시 지금의 동호회처럼 수학이라는 공통점으로 이들의 학술활동이 있었던 것으로도 보여진다.

 

또한 중인 계급의 산사라는 직업의 세습적인 면을 보면 산학(算學)은 결국 소수 집단의 가정학습을 통해 명맥을 이어져 오다가 사회적 변혁기인 실학기를 통해 과학과 합리성을 요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1. 실학기의 수학서


(1) 습산진벌(習算津筏)-최한기


<그림 Ⅴ-1> 습산진벌 서문

 

이 책은 최한기의 명남루 전집의 제3책 중에 들어 있는 것으로 성균관대학교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체 5권으로 되어 있으며 도량권형․구수승결․가감승제․평방입방 등 수학의 응용 및 원리에 관한 저술이다.

 

서문의 날짜는 철종1년(1850)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지만 내용을 보면 『수리정온』의 다음 부분을 요약해서 옮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덧붙인 부분은 몇 가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한반도에서 쓰여지고 있었던 아동두승법(我東斗升法)과 아동전결부(我東田結負), 九九八十一에서 시작하는 고식(古式)의 구구승결(九數乘訣) 그리고 산목의 모양․배열방법․가감산의 설명도를 보여주고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산목계산의 형식은 새로운 방법의 시도라는 점에서 이 책의 특징이 있다(참조 [4, p. 262]).

 

이 새로운 필산법(筆算法)은 문자 대신에 산목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태도는 『주해수용』의 경우와는 대조적이다. 수학에 대한 조예라는 점에서는 새로운 것을 일부러 낡은 형태로 재현시켰다는 점과 유학자 특유의 냉철한 합리사상 이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림 Ⅴ-2> 습산진벌 立方

 

(2) 주해수용(籌解需用)-홍대용


국립중앙도서관에 원본이 소장되어 있는 이 책은 『담헌서(湛軒書)』외집 권4-권6에 실려 있는데 수학 및 천문학을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보통의 산술은 내편 상에 그리고 고급의 산법인 천원술은 역산에 쓰이는 삼각법이나 측량술과 함께 내편 하에 포함되어 있다. 외편 하에서는 천문학상의 측지(測地)․측천(測天)의 기술 그리고 천문의(天文儀)․악률(樂律)등의 문제가 주로 다루어지고 있다.

 

내편 上의 내용은 우선 제목부터가 내율법(內率法)․약분법(約分法)․면적법(面積法) 등 근대적인 표현이 쓰여지고 있으며 실제로 필요한 지식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저자의 현실주의적이고 합리적인 기본 태도가 내용에 잘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면 양전법에서는 양전에는 많은 형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종만이 쓰여진다는 전제 아래 방전(方田), 직전(直田), 구고전(勾股田), 규전(圭田), 제전(梯田) 등에 관해서 각각 한 문제씩만으로 간단히 끝내고 있다.


일등전으로부터 육등전까지의 세율은 동일 면적에 대하여 100분의 15씩의 차이가 있다. 즉 일등전 백에 대하여 이등전 팔십오, 삼등전 칠십…육등전 이십이다. 다음 물음에 답하여라.


방전의 한변이 백이십팔척이라고 한다면 전체 면적 및 일등전에서 육등전까지의 세는 각각 얼마인가?


그밖에도 사회적 실정에 어울리는 소재로 엮어 내려는 저자의 고심의 흔적이 보이는 문제가 있다.


칠십오영(七十五營), 사사(四司), 삼초(三哨), 이기(二旗), 일대(一隊)가 있고 각 병졸마다 화약 육근육량칠전사분씩을 휴대시키려고 한다. 전체의 화약량은 얼마인가 단 일영은 오사, 일사는 오초, 일초는 삼기, 일기는 삼대, 일대는 총수 십인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한다.


牛黃이 八斤三兩五錢이 있다. 一斤이 인삼 七斤十三兩六分에 상당한다. 모두 인삼과 바꾸기로 한다면 인삼 얼마에 해당하는가?


易은 六十卦, 一卦는 六爻이다. 모두 몇 爻가 되는가?


형식적인 이데올로기를 쑥 빼버리고 합리적인 기술로서만 수학을 다루려는 저자의 태도는 전통적인 산목계산을 의식적으로 일체 무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여기서는 fgjkdfjg의 계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표 Ⅴ-1> 35×25

 

이 방법은 겉으로 보기에 『수리정온』에 실려 있는 계산형식이 여기서는 일체 생략되어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계산 알고리즘의 차이가 문제이다. 앞에서 그려 보인 설명도는 사실 구조상 종래의 포산 형식과 동질적이며 『수리정온』의 그것을 모델로 삼은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이 신식의 필산은 겉치례에 지나지 않고 실제의 계산에 있어서는 여전히 산목계산을 실시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필산이 형식을 도외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에서 인용된 서책은 다음과 같다. 『수학계몽』, 『수학통종』, 『수법전서(청,장수성)』, 『운개통헌』, 『상명수결(본국,경선징)』, 『수원(본국,박유택)』, 『율력연원』, 『수리정온』이다. 여기에도『양휘산법』과『산학계몽』이 들어있는데 이 끈덕진 전통산학의 지속현상은 과학의 세계에서도 전통은 그리 쉽사리 끊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해수용』의 의의는 수학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고 수학의 지식을 사회화하였다는 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 (참조 [4, p. 260]).


(3) 산학입문(算學入門)-황윤석

 

황윤석(1729-1792)의 백과전서적 저술인 『이수신편(理藪新꟟)』중 제21-24권에 실린 수학서이다. 현재 사본 2권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이 책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소수(小數)․대수(大數)․양률(量率)․형률(衡率)이하 구구합수(九九合數) 등의 항에서는 고금의 사서(史書)․역서(曆書)․산서(算書)들을 갖가지로 인용하면서 저자의 박식함을 보여주고 있다.


전관술(箭管術) 즉, 일차합동식에 관해서는 『손자산경』, 『산법통종』,『양휘산법』등으로부터 인용한 예제나 가결(歌訣) 등을 모아서 실었으며 부록에는 『산학계몽』과 『양휘산법』의 서문 그리고 『산학계몽』의 목차가 소개되어 있다.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보면 가감승제에 관한 기초 문제는『양명산법』에서 중급 정도의 문제는 『양휘산법』과『산학계몽』에서 그리고 고급의 것은 『산학계몽』에서 발췌하는 짜임새로 되어 있다 (참조 [4, p. 260]). 이밖의 참고서적으로는 『구장산술』, 『오조산경』, 『동문산지』,『수리정온』, 『지명산법』, 『응용산법』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 책은 백과전서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나 당시의 한국수학계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학사에 관한 좋은 자료가 된다. 당시의 한국수학의 주류는 여전히 『산학계몽』, 『양휘산법』, 『산학계몽』이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문산지』『수리정온』등 유럽계의 근대적인 수학서가 소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이 거의 나타나지 않아 여전히 전통적인 고전수학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4) 산학본원(算學本源)-황윤석


황윤석의 『이수신편(理藪新꟟)』중 제23권에 실린 수학서로 『산학입문』의 자매편이다. 권이십삼의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단서가 있다.


일찍이 박율(朴繘)이 저술한 산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최석정의 서문을 붙여 아들 두세(斗世)의 손으로 간행되었으나 오류가 많고 빠진 곳도 있어서 보완하였다. 원본(朴繘의 『산학본원(算學本原)』이 『산학계몽』을 바탕으로 삼았던 것처럼 이 책도 원본을 바탕으로 엮은 수정판이다 (참조 [4,p. 254]).


박율의 이름은 최석정의 『구수략』, 홍대용의 『주해수용』등에 소개되어 있으나 『조선인명사전』에는 선조 대(1568-1608)에 문과에 합격하여 장서부사(長瑞府使)를 지냈다는 정도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내용은 주로 구고현(句股弦), 즉 직각삼각형의 성질을 이용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직각삼각형의 밑변․높이가 각각 4尺11)․9尺일 때의 빗변의 길이


직각삼각형의 밑변이 四尺三十六分尺의 十七(4와17/36)빗변이 十尺八十四分尺의 五(10과5/84)일 때의 밑변의 길이


<그림 Ⅴ-3> 산학본원 머리말
<그림 Ⅴ-4> 산학본원구고현
<그림 Ⅴ-5> 산학입문


이밖에 천원일술(天元一術)의 항에서는 『산학계몽』중의 천원술과 『수리정온』에 소개된 차근방(借根方), 즉 유럽계의 방정식해법이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황윤석이 덧붙인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전문수학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는 천원술과 차근법을 비교할만큼 깊은 연구를 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아마도 중국인 수학자 매곡성(梅穀成)이 쓴 『적수유진(赤水遺珍)』에 언급된 내용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책은 『동문답지』, 『수리정온』등 유럽계의 수학서 이름을 들고는 있으나 실제 내용면에서는 박율의 것을 거의 그대로 복원시킨 것으로 보인다.

 

11) 『경국대전』에 의하면 1척이 황종척 8촌 9분 9리 였고 오늘날의 환산법으로 한다면 약30㎝정도 이다. 1장=10尺, 1尺=10寸, 1寸=10分, 1分= 10厘, 1厘= 1모

(5) 묵사집(黙思集)-경선징


이 책은 국내에는 필사본이 전하며 북경대학도서관에 원본이 소장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권 십문, 중권 십문, 하권 오문으로된 총 이십오문 삼백오십팔문을 싣고 있다. 목차를 보면 『산학계몽』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곧 알 수 있지만 첫머리에 구구합수(九九合數)의 대목에서는 『산학계몽』의 경우와는 반대로 곱셈 구구(九九)가 九․九 八十一부터 시작하고 있으며 이것을 나눗셈 九九에까지 철저하게 적용시키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참조 [4, p. 232]).

 

이 산서가 저술된 시기는 『산학계몽』중간본 서문에서 김시진이 밝힌 바와 같이 전통수학의 대부분이 거의 망각 속에 묻혀버린 시기였다. 따라서 이 산서는 산학을 부활시키고 전통산학을 되찾겠다는 중인 산학자로서의 사명감과 포부를 마땅히 담고 있어야 했고 그러한 의도에서 성립이 가능했다. 이 책에는 당시의 사회적 현실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그것은 곧 저자가 수학지식을 충분히 소화하여 응용했음을 시사해준다.

 

<그림 Ⅴ-6> 묵사집에 나타난 구구

 

한편으로는 예컨대 “삼으로 나누면 일, 오로 나누면 이, 그리고 칠로 나누면 삼이 남는 수는?, 매일 소나무는 반씩 대나무는 배로 성장한다면 며칠 만에 길이가 같아질까? ” 등의 문제라든가 직각삼감형의 두 변의 길이를 알고 남은 변의 길이를 구하는 정도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어서 『산학계몽』의 수준에 못미치는 대목도 있다. 다만 『산학계몽』에는 생략되어 있는 산목계산에 대한 설명인 포산선습문(布算先習門)을 삽입하고 있는 등 처음부터 『산학계몽』과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쓰여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산학이 입문서로서 특히 중인 산학자를 대상으로 쓴 것이다.


(6)『산술관견(算術管見)』-이상혁


남병길이 서문을 쓰고 있는 『산술관견』은 각등변형합유(各等邊形拾遺)․원용삼방호구(圓容三方互求)․호선구현시(弧線求弦矢)․현시구호도(弦矢求弧度) 그리고 부록의 부분선삼율법해(不分線三率法解)라는 제목으로 이상혁 자신의 연구 결과를 내용으로 담은 저서이다 (참조 [3, p. 448]).

 

이상혁은 제 1장 각등변형습유 첫머리에서 “수리정온에는 ……정다각형의 한변의 길이를 기초로 하여 그 면적․내접원 및 외접원의 지름을 구하는 문제를 취급하고 있으나 다만 정률 비례를 제시할 뿐 상세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 이것을 보완한다”하여 집필의 동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참조 [3, p. 449]). 그리하여 스스로 고금독보(古今獨步) 고무전자(古無傳者)임을 자부하는 문제풀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전히 전통적인 방법이 지배하고 있으며 연역적 논리적인 표현은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삼각형부터 십각형까지의 정다각형에 관한 16문제를 다루었으며『수리정온』은 정다각형에 있어서 일변의 길이를 중심으로 하여 그 면적과 내접원 및 외접원의 지름을 구하는 문제를 취급하고 있으나 다만 정율비례를 보여주는 상세한 설명이 부족하다 하여 보완을 위해 예제를 내놓는다 하여 다음 예제가 그림과 함께 실려 있다.

 

<그림 Ⅴ-7> 산술관견에서 삼각함수
<그림 Ⅴ-8> 산술관견 목차

一邊이 十二尺인 정삼각형이 있다. 그 면적 및 내접과 외접원의 지름을 구한다.


답: 면적 六十二尺三十五寸三十八分强, 내접원의 지름 六尺九寸二分八厘二毫强, 외접원의 지름 十三尺八寸五分六厘四毫强


이 밖에도 전체 11문제의 해법을 설명하고 있다. 제3장의 호선구현시(弧線求弦矢)에서는 매곡성(梅穀成)의 『적수유진(赤水遺珍)』에 나오는 두덕미(杜德美, Tartoux, P.)의 할원첩술(割員捷術) 및 현시첩술(弦矢捷術)은 아주 난해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고 전제하여 다룬 문제와 원호․반지름․정현․정시(正矢)=r(1-cosθ)의 상호관계로부터 미지의 값을 셈하는 계산을 다룬다. 제4장 현시구호도(弦矢求弧度)에서는 정현(正弦)․정시(正矢) 등을 알고 대응하는 호 및 중심각을 구하는 공식을 내걸고 이에 관한 예제 5문제를 실었다. 이 중 마지막 문제는 부록의 부분선삼율법해(不分線三率法解)는 목니각(穆尼閣, Smogolenski, J.N.)의 『천보진원(天步眞源)』중에 있는 구면삼각형의 공식을 도해한 것이다.


반지름 이천오백척, 정시 이천삽백육십척칠촌삼분일리칠호일 때의 호 및 중심각을 구한다.

 

답>호의 길이 이천팔백팔십칠척칠촌이분구호, 중심각 팔십구도육분 리


이 책에서 보여진 이상혁의 독자적 연구는 한국수학사를 낮게 평가하던 일본 수학사가들이 “모두가 중국수학이 주석(註釋)이었던 조선에 있어서는 신천지를 개척하였다”라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참조 [4, p. 273]).


이밖에 이상혁의 저서인 『차근방몽구(借根方蒙求)』는 유럽계의 대수방정식 즉 차근방(借根方)에 관한 해설서로 이차방정식인 면류(面類)와 삼차방정식인 체류(體類)의 두 장으로 나누어서 다루어지고 있다. 면류는 35문제로 되어 있으며, 체류는 16문제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구․고의 합이 이십삼척, 구․현의 차가 구척이다. 구․고․현 각각의 길이를 구한다.

 

이 문제를 차근법을 써서 다음과 같이 풀고 있다.


法借一根爲股 股의 길이를 x로 한다
二十三尺少一根爲勾 勾의 길이를 23-x
三十二尺少一根爲弦 따라서 弦의 길이는 32-x
五百二十九尺少四十六根多一平方爲勾積 (23-x)²=529-46x+x²
一千零二十四尺少六十四根多一平方爲弦積 (32-x)²=1024-64x²+x²
五百二十九尺少四十六根多二平, x²+(23-x)²=529-46x+2x²
與一千零二十四尺少六十四根多一平方相等=1024-64x²+x²(股²+勾²=弦²)
一平方多十八根與四百九十五尺相等 x²+18x=495(x+9)²=576=24²
以縱較平方開之得十五尺卽 股 x=15(股의 길이)
二十三尺內減十五尺得八尺爲勾 23-15=8(勾의 길이)
八尺加九尺得十七尺爲弦 8+9=17(弦의 길이)


또한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는『익산(翼算)』의 서문에서 남병길은 “수(數)는 비록 일예(一藝)이지만 너무나 내용이 심오하여 옛날 유가에서는 반드시 연구한 바가 있었으나 오늘날은 그렇지 못하고 명나라가 흥융한 이후 산서가 수백이나 간행되어 깊이 연구한 바 되었으되 방정과 입천원일지정부술(立天元一之正負術)을 발명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정부의 구별을 모르고 수에서는 손익의 변화를 알지 못하므로 저자가 상편에서 정부론을 하편에서 퇴타설을 합하여 익산이라 하여 발간한 책이다.”고 하였다.

 

상권의 정부론(正負論)에서 천원술에 의한 고차방정식의 해법을 설명하는데 정부(正負)란 현대적인 표현으로는 +, -인바 이것은 동양수학에서 이미 『구장산술』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실지의 셈에 있어서는 실수할 경우가 허다하며 실지 중국의 청대에는 이 산법이 매우 난해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책에서는 방정식의 해법에서의 음수의 뜻 제곱근 문제의 보기는 『산학계몽』등에서 택하고 있고, 세제곱근 문제의 보기는 『사원옥감』을 이용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의 서문을 쓴 남병길의 『산학정의』의 문제도 언급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야(李冶)의 『측원해경』과『익고연단(益古演段)』,『수리정온』등을 참고로 하여 천원술의 본격적인 체계화를 시도하고 있다.

 

하권의 퇴타(堆垜)에서는 급수론(級數論)을 다루고 있다. 술독 따위가 사다리꼴로 쌓인 것의 총합을 구하는 문제 등 여러 가지 형태의 기하학적인 급수문제와 산술적인 급수문제를 다루고 있고 상권의 정부술과 마찬가지로 하권의 퇴타술도 천원술로 푼다. 이로써 동양수학의 정수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솜씨는 과연 당대 제일의 수학자다운 면모를 풍기고 있다.


(7) 구일집(九一集)-홍정하


그 사본이 서울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근세 조선의 중인 출신 산학자 홍정하의 저술이다.

 

구일집의 가장 큰 특징은 관수용(官需用)인 앞의 수학 즉 기술관리용 핸드북이나 산생(算生)의 교과서가 아닌 수학 그 자체에 대한 왕성한 지식욕과 순수한 과학적 탐구정신을 바탕으로 수학서가 엮어졌다는 것은 적어도 이 시점에서 한국수학사가 어떤 획기적 전환기에 접어 들었다는 것, 형식이나 체재(體裁)의 면에서는 종래의 산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전통의 제약 밑에 있었기 때문에 겉보기만으로는 알아차리기 어려우나 실은 내면에서는 수학에 대한 해석, 그리고 탐구의 자세가 크게 선회(旋回)하여 상고주의(尙古主義), 실용주의(實用主義)에만 박힌 경화(硬化)된 수학관이 순수한 과학지(科學知)으로서의 수학을 향하는 유연성(柔軟性)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참조 [5, pp. 103-105]). 범례(凡例)에서는 고대의 원주율의 값, 원의 지름․둘레․넓이 및 구의 지름․부피 등의 관계, 산목에 의한 곱셈의 방식 거듭제곱의 요령을 소개하고 있다.

 

『구수략』으로부터 겨우 10여년이 지난 다음에 엮어진 이 수학서에서는 전자에 전혀 보이지도 않았던 천원술의 방법이 그것도 『산학계몽』에서는 27개에 대하여 그보다 엄청나게 많은 166개를 헤아리는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그동안 중국 본토에서 잊혀지고 말았던 천원술의 전통이 반도의 중인산학자 사회에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사원옥감』에서 이미 보인 파스칼의 삼각형이 보여진다.

 

<그림 Ⅴ-9> 구일집의 파스칼삼각형
<그림 Ⅴ-10> 구일집의 파스칼삼각형

卷一: 물물교환․이자․통관세(縱橫乘除門), 상품의 판매가격․운반비(異乘同除門), 여러 가지 꼴의 농지측량(田畝形段門), 일정액의 돈으로 단가가 다른 둘 또는 세가지 물건을 구입하는 문제 등이 실려 있다.


卷二: 일정이 비율에 따라 분배하는 문제(貴賤差分門, 差等均配門), 일정액의 차이가 있는 물건을 두 가지 구입할 때의 각 단가 또는 구입 개수를 구하는 문제(貴賤反率門) 등이다.


卷三: 분수의 통분에 관한 문제(之分齊同門)등을 다루었다.


卷四:다원 일차 연립 장정식에 관한 문제(方程正同門) 이를 테면 이장의 첫문제는 ꀌ2x+y=100 의 꼴이지만 x,y등의 미지수를 사용하지 않고 그계수나 ꀘx+2y=92 상수항을 산목을 써서 나타내는 것이 방정(方程)이다. 지금의 방정식과는 약간 뜻이 다르지만 해법은 동일하며 예를 들어 뒤 식으로부터 하나의 미지수를 없애고 나머지 한 미지수에 관한 일원일차식(一元一次式)으로 고쳐서 해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의 부피 및 두께가 있는 구의 무게. 급수, 용량.부피들을 셈하는 문제등이다.


卷五: 피타고라스 정리의 응용에 관한 문제(句股互隨門, 望海島術門)을 다루고 있다. 권6-권8: 처음에 제곱근․세제곱근의 문제를 다루고 이어서 천원술에 의하여 x에 관한 이․삼차방정식을 푸는 문제를 싣고 있다.(開方各術門 上․中․下)


卷六-卷八: 처음에 제곱근․세제곱근의 문제를 다루고, 이어서 천원술에 의하여 x에 관한 2․3차 방정식을 푸는 문제를 싣고 있다.(開方各術門 上․中․下)


卷九(雜錄): 극히 간단한 천문계산과 관련된 문제(十六問)와 전통음악의 음계와 피리의 길이 사이의 관계를 적은 공식에 이어 1713년(숙종 39년)에 저자가 마침 조선에 왔던 중국인 사력(司曆) 하국주(何國柱)를 유수석(劉壽錫)과 함께 찾아가서 대담한 내용을 적어놓았다.

 

하국주는 강희제(康熙帝)의 명에 의하여 착수된 유럽계의 천문학지식을 바탕으로 한 역산서(曆算書)『역산고성(曆象考成)(옹정1년, 1723년완성』상하편의 편찬에 교산으로 참가했던 천문관리이다.

 

처음에는 중국인 사력이 조선 측의 방문객을 시험하는 형식으로 시작되는 이 대담은 간단한 셈으로부터 원에 내접하는 정오각형의 일변의 길이와 그 넓이를 구하는 문제 등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삼각함수표인 팔선표(八線表), 기하원본(幾何原本), 측량전의 등 유럽계의 새로운 지식을 듣고 그것을 흡수할 것을 갈망하고 있으며 사력측에서는 중국에서 이미 그 자취를 볼 수 없는 산목 계산에 새삼 경탄하고 있다. 또 사력이방정, 곧 다원일차 연립방정식과 정부, 곧 양수․음수의 가감산이 수학 중에서도 난해한 부분에 속한다고 말한 데 대해 저자가 이런 정도는 별로 어렵지 않다고 응답하는 대목이 흥미를 끈다. 잡록에 실린 기사는 한국근세수학사의 중요한 일면을 밝혀준다.


홍정하가 지은 『구일집』에 사력 하국주와 수학에 관한 대담 내용이 들어 있다. 공손히 ‘아무것도 모르니 산학을 가르쳐달라’고 말하는 홍정하는 중국인은 어깨를 우쭐대며 ‘이런 문제를 알겠는가’하고 내 놓은 문제는 다음과 같다.

 

“360명이 한 사람마다 은1냥 8전을 낸 합계는 얼마나 되는가?”(1냥은 10전), “은 351냥이 있다. 한 가마의 값이 1냥 5전이라 한다면 몇 가마를 구입할 수 있겠는가” 물론 답은 바로 나왔다.

 

그 다음 내놓은 문제는 “제곱한 넓이가 225평방자(尺)일 때, 1변의 길이는 얼마인가”, “대소 두 개의 정사각형이 있다. 그 넓이의 합은 468평방자이고, 큰 정사각형의 1변은 작은 쪽의 1변보다 6자만큼 길다고 한다. 두 사각형의 각 1변의 길이는 얼마인가?”, “막대의 왼쪽 끝에 무게 3냥의 돌을 달고 오른쪽 끝에 물건을 달아메고 꼭 수평을 이루도록 막대를 들어 올렸을 때 이 점으로부터 왼쪽 끝까지의 거리는 5치 8푼, 오른쪽 끝까지는 7치 2푼 5리였다고 한다. 잰 물건의 무게는 얼마인가?”로서 우리 산학자들은 모두 정답을 내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중국사신의 상사 아제도(阿齊圖)가 사력의 실력을 치켜 세우면서 조선의 젊은 서생들을 얕잡는 참견을 한다. “사력은 산법에 관해서는 천하에서 제4인자의 실력가이다. 그의 산학의 조예는 깊기가 한량이 없다. 여러분 따위는 도저히 산학지식을 견줄 바가 못된다. 사력은 이미 많은 질문을 하였으나 아직 군들은 한 문제도 묻고 있지 않다. 여러분도 그에게 문제를 제시하고 그의 術을 시험에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래서 홍정하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내놓았다. “지금 여기에 공 모양의 옥석이 있다. 이것에 내접한 입방체의 옥을 빼 놓은 껍질의 무게는 265근 15냥 5전, 단 껍질의 두께는 4치 5푼이라 한다. 옥석의 지름 및 내접하는 입방체의 1변의 길이는 각각 얼마인가?” 이 문제를 듣고 하국주가 말하기를 “이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이다. 당장에는 풀지 못하지만 내일은 반드시 답을 주겠다”고 하였다.(그러나 끝내 정답을 내놓지 못하였다. 정답은 입방체의 1변의 길이는 14치이다.)

 

이 한번의 질문을 받았을 뿐 또다시 사력이 계속 문제를 내고 있다. “지름 10자의 원에 대한 외접 정팔각형의 1변의 길이는 얼마인가?”이에 대해서 4자라고 답하니 하국주는 그 방법을 묻는다. 그래서 유수석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병(丙)을 곱하여 그것을 2배한다. 그 제곱근을 구하고 丁을 더하여 乙丁戊를 얻는다. 이것이 지름의 길이다. 이 식을 산목 계산으로 풀었다. 하국주는 정답이라고 말한다.

 

<그림 Ⅴ-11> 삼각형의 외심
<그림 Ⅴ-12> 내접 정오각형
<그림 Ⅴ-13> 외접 정팔각형

또 하국주는 “정삼각뿔이 있다. 1변의 길이가 10자이면 부피는 얼마인가?”, “117자 8치 4푼 9리 6모 1작”이라고 대답하였더니 정답이라 말했다. 다시 하국주가 문제를 낸다. “지름 10자인 원에 내접하는 정오각형의 1변의 길이와 넓이는 각각 얼마인가?” “즉, 지름 10자를 제곱해서 그 4분의 3을 구하면 원의 넓이75자²을 얻는데 그 6분의 5를 잡아 정5각형의 넓이 62.5자²를 구한다.…”

 

유수석이 하국주에게 물었다. “동국(조선)에는 아직 이런 학문이 없다. 어떤 방법으로 하는 것인가?” “8선표(삼각함수표)가 있으면 곧 값을 구할 수 있으나 일일이 계산한다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 답할 수 없다” 그러자 홍정하는 “아무리 심오하다 하여도 배울 수는 있다. 그 길을 말해 달라”고하자 하국주는 답한다. “『기하원본』, 『측량전의』의 두 책을 읽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홍정하와 유수석의 수학수준은 상당함을 인정했고 다시 “산학 중에서 대수학(方程, 正負)법이 가장 난해한 부분인데 당신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라고 묻자 홍정하는 “방정의 분야는 산학중에서도 중위에 속한다.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다.”고 말하면서 포산(布算, 산목계산)을 실제로 해보이자, 하국주는 중국에는 이러한 것이 없으니까 가지고 돌아가서 모두에게 보이고 싶다고 한다. 산목을 주었더니 그 중 40여개를 가지고 갔다.

 

이 때 하국주가 내놓은 문제는 고차방정식 문제가 있었는데 조선인 두 수학자는 그것을 산
목셈으로 척척 풀었다. 즉 천원술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소멸되어 버렸으나 조선에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8) 산학정의(算學正義)-남병길


『산학정의』는 현재 奎章閣에 소장되어 있으며 상․중․하 세편으로 1867년에 출간되었다. 이상혁이 교정하였고 남병길이 編撰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가법․감법․승법․제법 등의 명칭이 『수리정온』을 따르고 산목의 배열방법을 설명하거나 구구팔십일부터 시작되는 곱셈의 구구 역시 옛날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구고율(勾股率)․각면율(各面率)․각체율(各體率) 등의 기하학의 장에서는 도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수리정온』이전의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는 등의 모순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더군다나 입체도형을 다루는 각체율에서는 일체 도해를 생략한 채 공식을 적용한 체적 계산에 그치고 있다 (참조 [3, p. 448]).

 

각『동문산지』,『수리정온』등의 근대적인 수학서를 인용하면서도 여전히 고색 짙은 동양 수학의 전통적 방법에 대한 집착을 보이고 있으며 그런가하면 실제의 주제가 되는 것은 고대도 근대의 것도 아닌 천원술․사원술․대연구일술(大衍求一術) 등의 宋․元시대의 수학을 보여준다.

 

특히 하편에 소개되어 있는 대연술(大衍術)은 한국수학사상에 별로 없었던 것이다. 대연술은 원래 개력(改曆)을 할 때 역원(曆元)을 정한 바 없는 한국 전통사회에서는 필요하지 않았던 산법이다. 대연술은 고력(古曆)의 연기(演紀)의 법이며 『구장산술』에서도 언급이 없었고 천원술로도 다룰 수 없는 심오한 이론이라고 저자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상당히 난해한 것이어서 산학자들 사이에서 경원시 당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수학적인 내용은 일차합동식의 해법이다. 원래는 중국의 산학고전인 『손자산경』에서 취급된 것인데 송의 진구소가 『수서구장』에서 보다 일반적으로 취급한 것이다. 대연이란 명칭은 역(易)에서의 대연술(大衍數)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에는 이에 관하여 2문제가 소개되어 있으며 비교적 쉬운 첫 번째 문제는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주어져 있다.

 

<그림 Ⅴ-14> 산학정의 서문
<그림 Ⅴ-15> 산학정의 대연

이십명에게 술 한섬씩 주면 삼인분이 남고, 십육명에게 고기를 주면 칠인분이 남고, 십오명에게 장 한말씩 주면 십이명분이 부족하다.


이 내용을 현대식으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x ≡ -3 mod 20 ⇔ x ≡ 17 mod 20
x ≡ -7 mod 16 ⇔ x ≡ 9 mod 16
x ≡ 12 mod 15 ⇔ x ≡ 12 mod 15


이것에 대하여 남병길은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들어 계산하고 있다.


<표 Ⅴ-2>


이 시기에 역원(曆元)을 계산하기 위한 대연수가 소개된 사실은 동양문화권에서 스스로 독립된 나라임을 나타내는 일은 자신의 역을 갖는 일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말의 국제적인 의식을 이 책에서도 엿볼 수 있다.

(9) 구고술도요해(勾股述度要解)-남병길


『구고술도요해』즉, 『유씨구고술도요해』는 같은 책으로 현재 서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문에 의하면 저자 남병길이 중인 산학자인 이상
혁을 통하여 이 책의 원본을 보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상혁이 모가(某家)에
서 발견한 이 책의 처음 편자는 유씨로 되어 있다. 남병길은 그 유씨가
『구일집』의 저자인 홍정하와 함께 1713년 오월 내조(來鮮)중이던 당시 중
국의 저명한 산학자인 사력 하국주와 수학을 논한 바 있는 유수석이라고 추
측을 한다. 이 때 유수석은 책이 단순히 구고술이 아닌 유씨라는 이름을 덧
붙인 것은 이러한 내력 때문일 것이다. 저자 남병길은 유씨의 이 원본에 그
림을 첨가하여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책의 내용은 직각
삼각형에 관한 문제와 그 풀이인데 모두 224문제이다. 피타고라스의 직각삼
각형에 관한 정리는 일반적으로 a²+b²=c²의 형태로 알려져 있다. a는 밑변,
b는 수선, c는 빗변이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밑변을 구, 높이는 고, 그리
고 빗변을 弦이라 부른다. 거의 모든 고대 문명국가에서는 직각삼각형의 성
질로서 3²+4²=5²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특히 고대중국의 산서인 『주비
산경』에서는 그 내용을 그림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 증명법은 a,b,c가 임의
의 수일 때에도 성립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산서는 전
통적으로 a=3, b=4, c=5의 문제로 다룬다. 중국수학의 전통은 원래 기하학적
인 문제에 관해서도 도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이 책의 특징은
종래의 전통을 탈피하여 적극적으로 도형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문제의
내용을 분류하여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勾․股․弦중에 두 가지를 알 때 나머지 하나의 길이를 구하는 것
둘째, 勾․股․弦중 하나의 길이와 두 가지의 합․차 또는 곱을 알 때 모르
는 둘의 길이를 구하는 것
셋째, 勾․股․弦중 예를 들면 勾․股의 길이의 합과 勾․弦의 합을 알고
勾․股․弦의 길이를 구하는 것
넷째, 勾․股․弦를 이용한 어떤 관계식을 알 때, 勾․股․弦를 구하는 것 등
이다.
결국 이들 문제는 모두 a²+b²=c²이라는 성질을 이용하여 이차방정식으로
귀착된다. 문제의 배열 순서는 난이도를 감안하여 적절히 학습하기 쉽게 하
였고 특히 설명이 명백하다.


(10) 집고연단(緝古演段)- 남병길


현재 서울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남병길이 원말의 중국산서
인 『익고연단(益古演段)』연구에서 나왔다. 원의 이예(李銳)는 천원술과 차
근법의 차이를 주장하고 『익고연단』을 해설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상혁
이 『차근방몽구』를 출간하여 이들 사이에 다름이 없음을 주장하였는데 남
병길은 이 사실에 자극을 받아 새로이 『익고연단』의 해설을 시도하였다.
저자는 『익고연단』에 포함되어 있는 구고의 문제에 관해 분명치 않은 부
분을 보완하고 문제의 내용을 파악하기 쉽게 편집하였다. 이 문제의 내용
가운데 특히 앙관대(仰觀臺)에 관한 것은 『구장산술』의 상공장(商功章)과
균수장(均輸章)을 혼합시킨 것이다. 즉 상공(商功)은 토목공사에 관한 문제
이며 수로를 파서 둑을 쌓아올리는 일의 양을 계산하고 공사할 때 노동자의
하루 하는 일의 양을 알고 수로를 파는 데 소요되는 인원수를 구한다. 균수
는 부역하는 농민을 각 고을에서 공평하게 징집시키는 계산이다. 이 책의
문제는 어느 토목 공사를 하는 데 소요되는 인원수를 구하고 그 인원수를
각 고을에서 공평하게 징집시키는 것이므로 상공과 균수를 혼합하여 『구장
산술』의 내용을 가일층 복잡하게 만든 것이다. 문제의 내용으로는 수로 공
사 또는 천문관측대 건설 등에서 전체의 길이, 단면도의 사다리꼴 윗변과
아랫변과 높이 등의 값을 주어 대상물의 부피를 계산하고 공사시기인 여름
에 노동자 일인당의 작업량을 계산하여 필요한 인원을 구하며 갑현(甲懸),
을현(乙懸)의 인구비율로 사람을 동원하여 소요인원수 등을 계산한다. 공사
내용은 모뿔이, 원기둥, 원뿔이 등이 될 때가 있고, 사계절에 따라 공사에
소요되는 인원이 다르다. 특히 상공장의 문제풀이에 관해서는 여러 종류의
입체의 부피계산이 포함된다. 이것을 설명한 것은 유휘(劉徽)인데 저자 남병
길도 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원래는 붉은 것과 검은 색칠을 한 입체의
소모형을 사용하여 주어진 입체를 이 기(棋)의 집합으로 생각했다. 이 책에
서는 모뿔(陽馬), 삼각뿔을 사용하여 계산하고 있다.


(11) 측량도해(測量圖解)-남병길


위(魏)의 유휘의 주에 대하여 남병길이 도해(圖解)하고 이상혁이 서문을
쓴 책으로 1858년에 간행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서는 측량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책 제목처럼 조선 말에서의 측량학의
수학이론 전문서이다. 동양문화권의 산학은 주로 왕조정치의 기구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특히 농업국가의 행정적인 지식으로서 중요시되었다. 측량은
농토의 넓이를 계산하기 위한 필수의 지식이었기 때문에 산학서에서는 반드
시 취급되어 왔다. 『구장산술』의 방전장, 구고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편
왕조정치의 사상적 기반은 천인상련의 사상이었으므로 천상(天象)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 천문학에는 별․태양의 위치계산에 따른 측량문제가 나
온다.『주비산경』은 천문에 필요한 측량이론을 다루고 있다. 또 당대에는
산서가 정비되어 『산경십서』가 이순풍(李淳風)에 의해 편찬되었고, 우리나
라 신라시대의 산학제도에 반영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해도산경』이 주
로 측량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 명말청초에는 서양의 삼각법이 예수회 선교
사에 의해 중국으로 도입되었다. 이 책은 과거 동양 산학에 포함되어 있는
앞서 언급한 측량관계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것과 서양의 삼각법
이론도 가미하여 체계화하였고 특히 이것에 그림을 넣어 이해하기 쉽게 하
였다. 이 책의 내용을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희의 『구장중차(九章重差)』의 注에 대한 남병길의 도해가 실
려있다. 유휘는 『구장산술』을 주석(注釋)하고 『해도산경』을 저술한 인물
이다. 원래『해도산경』은 『구장산술』의 구고장을 보완한 것으로 중차(重
差)라 했던 것을 후에 독립시켰다. 이 부분의 내용은 『구장중차』의 8개문
제인데 이들은 모두 『구장산술』의 구고장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이다.
둘째, 『해도산경』9개문제를 도해하고 있다. 문제 자체는 별로 어려운
것은 없으나 측량과 지도학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준 내용이다. 『해도산경』
의 마지막 부분에는 청말의 대진(戴震)의 『해도산경정와(海島算經正譌)』를
싣고 있다.
셋째, 남송의 진구소(秦九韶)의 『수서구장』의 측망류(測望類)의 문제 9
개를 도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저자는 고전적인 문제를 취급하고 있으면서
도 문제의 서술에는 반드시 도해를 곁들여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기하
학적인 방법을 정면으로 도입하여 새로운 시점에서 종래의 측량에 관한 이
론을 체계적으로 해설한 것이다.


(12) 해경세초해(海鏡細草解)-남병철


전체 12권으로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남병철이 찬한 것
으로 1861년에 간행되었다. 동생인 남병길이 서문은 썼다. 이 책의 원본은
남병길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元나라 정종3년(1248) 천원술(天元術)의 창시
자로 알려진 이야(李冶)의 『측원해경』12권으로 『측원해경』의 해설서이
다 (참조 [4, p. 264]). 여기서 2차방정식의 해법으로 천원술을 사용하면서
이 방법은 서양의 소위 차근법(借根法)과 같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측원
해경』은 천원술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원성
도식(圓城圖式)이 있으며 직각삼각형에 내접하는 원을 성으로 보고 있다.

 

<표 Ⅴ-3> 해경세초해의 구고현 명칭


원에 외접하는 직각삼각형 天地乾의 각 변은 通弦(天-地), 通勾(乾-地),
通股(天-乾)라 한다. 이것을 세분해서 생기는 새로운 직각삼각형의 세 변
역시 弦․股․勾에 특별한 글자를 써서 구별한다. 12권 전체에 걸쳐 통현
(通弦)은 680보, 통구(通勾)는 320보, 통고(通股)는 600보를 정수로 삼고 있
다. 제2권 이하 170문제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직각삼각형과 원의 관계에
관한 계산 문제이다.
이 책의 특징은 다른 동양의 산서(算書)와는 달리 행정상의 실용성을
생각한 바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순전히 수학을 위한 수학이라는 현대적인
뜻에서의 수학태도로 일관되어 있다. 가령 제2권의 14문을 두고 생각한다면
처음에 문제가 주어지고 계산방법을 제시하는 法이 있고 그 뒤에 계산 과정
을 자세히 설명하는 草가 있다. 이 책에 기재되어 있는 원성도식(圓城圖式)
을 참조하면 문제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중국식으로 南은 위로 두고
있으며 원의 四方(北․東․西 )에 문이 있고 다음과 같이 문제가 주어진다.
<그림 Ⅴ-16>
해경세초도해의 원성도식 <그림 Ⅴ-17> 직각삼각형의 구고현
서문을 나가서 南行하면 四百八十步의 자리에 나무가 있다. 북문을 나가서
東行해서 이백보의 자리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성의 반지름은 얼마냐? 이
어서 法은 二行의 보를 서로 곱하여 실로 삼고, 이 행의 보를 더하여 종으
로 하고 일보를 상법으로 한다. 여기서 반지름을 미지수로 삼고 이차의 계
수가 상법이고, 일차의 계수가 이행의 합 680步이고 상수항은 이행의 수의
곱이다. 이어 해경세초해에서는 계산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天
元一을 세워 반지름으로 한다.
南行步를 지에 두고 그 속에서 천원의 반지름을 감하여 -x+480을 얻는다.
이와같이 대수적으로 표시하고 마지막에 이차방정식을 얻어 이것을 풀고 백
이십보를 얻는다. 여기에 대수계산과 0의 기호가 사용되어 있는 점도 종래
에는 없었던 방법이다.


(13) 구수략(九數略)-최석정


『구수략』은 제대로된 책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책의 시작에서는 목록,
부록, 참고서적 등의 오늘날의 책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또한,『구수략』은
갑을병정 네 편을 두 책으로 만들었다. 이 중 갑을병 세권에는 청나라를
통하여 조선으로 들어온 내용으로 당시에 서양에서는 이미 알려진 내용들이
대부분이고 정편은 부록으로 『양휘산법』의 영향을 받은 것과 최석정이 찾
아낸 마방진(魔方陣)12)과 라틴(Latin)방진13)들이 특히 수학적인 가치를 가지
고 있다 (참조 [14]).

 

<그림 Ⅴ-18> 구수략 속의 하도와 낙서
<그림 Ⅴ-19> 구수략 서문


직교라틴 방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오일러(Euler)가 1782년에 제시한
36장교의 문제이다. 그 문제는 다음과 같다. 6개의 부대에서 6명씩 서로 다
른 계급을 가진 장교들(소위부터 대령)이 선발되었다. 이들 36명을 가로 세
로 6줄로 세워서 어떤 가로줄이나 세로줄의 6사람도 모두 소속 부대가 다
르고 모두 계급이 다르도록 세울 수가 있는가? 사실 그런 배열은 불가능하
다. 그리고 만일 그런 배열이 가능하다면 계급만 적어도 또 다른 라틴 방진
을 얻게 된다. 또한 그런 배열에서 계급과 소속 부대를 함께 적으면 6차와
10차 직교 라틴방진이 모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10
차 방진이 여러 번 나타난 것을 보아 최석정은 10차 직교 라틴 방진을 만들
려고 시도하였던 것 같다. 1959년에야 오일러의 예상이 틀렸고 10차 직교라
틴 방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마방진을 합성하는 방법은
A.Adler가 1993년에 발견하였으며 Adler의 논문의 대부분의 결과 그대로를
최석정의 합성법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조 [14]).
『구수략』은 동양에 있어서의 중세적 보에티우스14) 수학에 견줄 수 있
을 만큼 그 서술이 유럽의 사원(寺院) 수학의 스타일과 비슷하다. 우선 모든
정수는 삼위일체의 <三>을 원리로 다음 셋으로 분류된다.
完全數: 6처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약수의 합이 그 자신이 되는 수
不足數: 8처럼 자신을 제외한 약수의 합이 자신보다 작은 수
過剩數: 12처럼 자신을 제외한 약수의 합이 자신보다 큰 수
그리고 우수(偶數)는 우수적 우수(偶數的 偶數)․우수적 기수(偶數的 奇
數)․기수적 우수로 기수는 소수․비소수․互소수라는 따위로 초월적인 수
의 신비성을 문제로 삼고, 이러한 수의 기능을 신학의 경전해석에까지도 적
용하였다. 최석정의 『구수략』도 형이상학적인 역학사상에 의해서 논문을
전개하고 있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 책은 첫머리에 <數原第一>이라 내걸
고 <數生於道, ………太一者數之始夜, 太極者道之極>과 같이 수의 본원, 즉
그 존재론적 기초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형이상학적 독단론
의 입장에서 각각 수사, 단위 산목의 배열방법, 산목, 계산의 사칙 등에 관
해서 각장을 음양사상에 결부시켜서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이것에 <구장분
배사상>이라는 어려운 명칭을 붙이고 있다.
태양(일), 一, 방전(方田)
태음(월), 二, 속미(粟米), 소광(少廣)
소양(성), 三, 상공(商功), 쇠분(衰分), 영육(盈朒)
소음(진), 四, 균수(均輸), 구고(勾股), 방정(方程)
그 이유에 관해서는 방전장(方田章)은 승법(乘法)이기 때문에 태음(太陰)

에 그리고 또 소광장(少廣章, 容積計算) 이 가장 심유(深幽)하기 때문에 역
시 태음에 속한다.
․甲篇: 처음 수원(數原)에서는 형이상학적인 수의 정의, 수명(數名)은 당
시 통용된 여러 단위에 관한 것 수위는 명수법의 설명, 수상(數象)은 산목에
의한 수의 표시, 수기(數器)의 구조, 그리고 수법(數法)에서는 산목에 의한
계산법을 설명하는데 승제법(乘除法)에 정수이법과 변수육법이 있음을 설명
하고 있다. 그 계산은 위로부터 元 또는 商(피승수 또는 몫)․實(몫 또는 피
제수)․法(승수 또는 제수)의 삼단계로 나누어 행하는데 이것을 저자는 삼
격산이라 부르고 이 승제법을 음양정수이법(陰陽正數二法)이라 칭한다. 음양
변수육법이란 위의 방법과는 달리 피승제수와 승제수를 두단계로 나눈 이격
산이며, 곱셈의 경우에는 피승수의 끝자리부터 그리고 나눗셈의 경우에는
역으로 피제수의 위자리부터 계산을 하는 방법, 즉 지금의 주산의 방법과
같이 승제산을 행하는데 그 방법인 인(因)․가(加)․승(乘)․구귀(九歸)․감
(感)․귀제(歸除)등 여섯가지에 관해서 설명한다.
一爲主乘一得一, 乘二得二, 乘三得三…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어서 구구의
표(九九子數名圖), 그리고 마지막에 구구의 노래(구구합수명도)
승제원류․손익일결은 분수계산에 관한 설명과 손승․익제에 관한 가결을
엮은 것이다. 지분약법에서는 천학초함으로부터 분수의 기본연산에 관한 문
제 열가지를 인용․수록하였다.

 

<표 Ⅴ-9> 구수략 436×62


․乙篇: 먼저 통론사상에서 만물이 생김으로써 象(形態)이 있으며 상(象)
은 자(滋)를 그리고 자는 수(數)를 낳는다. 수는 원일, 일을 태극으로 삼는
다. 일은 이를 낳으며 이것이 곧 양의이다. 또, 이는 사를 낳으니 이것이 곧
사상이다. 가감승제를 셈법의 사상으로 삼는다. 곧 사상은 각각 네 수를 갖
추며 양의 양이 태양, 음의 음이 태음, 음의 양이 소양, 양의 음이 소음이다.
태양은 해, 태음은 달, 소양과 소음는 성진을 가리킨다. 천지에는 오직 사상
이 있을 뿐이며 수의 이치가 아무리 깊다 하여도 이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
는다. 그래서 사상의 새로운 관점에서 수학의 여러 원리를 설명한다라고 전
제하고 태양지수, 태음지수, 소양지수, 소음지수 등의 이름으로 곱셈, 나눗셈
을 설명한다. 사상을 본뜬 사격산에 의하여 기지수를 삼단에 산목으로 나타
내고 곱하거나 나누면 어떠한 계산문제도 풀 수 있다고 한다. 그 방법을 각
경우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總乘
總除 x= a×b×c
準乘 x=c÷( a ×b )
準除 x= b×( c ÷a)
x = c× ( a÷b )
로 나누어 해설된다. 그리고 사상변수, 방승, 방제 등은 제곱, 제곱근을 구하
는 방법에 관한 설명이다.
․丙篇: 사상변수 이하 소음지수까지는 을편의 계속으로 포산(布算, 산목
셈)을 사격산으로 설명한다. 고금산학에서는 수학에 조예가 있는 한국인으
로서 신라시대의 최치원을 비롯하여 이조의 남재, 황희, 서경덕, 이황, 이이,
김시진, 이관, 박율 그리고 중인출신의 직업적인 수학자로서 유일하게 산사
경선징을 꼽고 있다.

 

<그림 Ⅴ-20> 구수략의 백자생성교수도
<그림 Ⅴ-21> 구수략의 지수귀면도

․丁篇: 문산(文算)은 곧 필산이며 속칭 사산(寫算), 일명 포지금(鋪地錦)
이라 한다는 단서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산법통종』으로부터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산(籌算)은 발생적으로 보아 인도․아라비아식의 계산
이며 구조적으로 보아 격자산(格子算)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
다. 다만 17세기경 유럽으로부터 역수입된 것이 주산이라고 불리어진 것이
다. 저자는 이 두 셈법이 청조수학의 영향임을 밝히고 있다. 주산에 관해서
는 주판의 구조를 도시하여 주판에서의 수의 표기법을 설명하는데 그쳤다.
최석정의 『구수략』은 형이상학적인 역학사상에 의해서 수혼을 전개한
점에 특징이 있다. 수사단위 산목 포산 가감승제의 계산사칙을 비롯하여 심
지어 동양수학의 대표적 고전인 구장산술의 명장(名章) 음양사상과 결부시
켰다.
5) 부록(附錄) : 말미에 저토록 많은 지면을 소비하고 있는 하낙변수 곧
마방진은 저자 최석정의 중세적 수학사상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는 『양휘산법』으로부터의 인용과 자신의 연구를 소개하면서 각각 구수음
면, 백자자수음양석종면, 백자생성순수면, 천수용오면, 하도구오면, 낙서사구
면, 중상용구면 등 역에 관련된 형이상학적인 명칭을 붙이고 있다. 이 마방
진의 연구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처럼 단순한 수학유희였던 것이 아니라
훨씬 심각한 일종의 신앙고백이었으며 주로 수의 신비적 기능을 빌어 우주
질서와의 조화를 꾀함으로 써 법열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보아야
한다.

 

12) 행이나 열의 숫자 합이 모두 같게 되도록 숫자들을 배열해 놓은 것
13) 가로줄이나 세로줄의 수들이 모두 같은 것
14) 보에티우스식 수학은 수의 이론을 정립하기보다는 수를 분류하는 데 더욱 힘을 썼
다. 이 점은 주역에 담겨진 동양의 수리 사상과 매우 비슷하다

(14) 주서관견(籌書管見)-조태기


사본으로 지금 서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는 조태기
(1660-1723)이며 1718년에 저술한 산서이다. 내용을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수명에서는 동양의 전통적인 황종수(黃鍾數)를 설명한다. 즉, 황종관(黃鐘
管)15)에서 길이, 둘레, 무게를 단위로 하여 차례로 수의 단위를 정한다. 도
량형의 명칭과 단위를 정하는 것, 수단위(십진법)의 설명, 대수(大數), 소수
(小數)의 설명은 『산학계몽』의 내용과 거의 같다. 구결(口訣)의 내용은
『상명산법』,『산법통종』과 거의 같다. 그러나 해복법(解卜法)은 이들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일등백 이등팔십오 삼등칠십 사등오십오 오등사십
육등이십오’는 십오를 등차로 하는 등차수열인데 지목(地目)을 구분하여 세
수를 계산하기위한 것이다. 원주율, 단위원에 내접하는 정다각형의 일변이
길이를 구하는 문제 등이 피타고라스적인 수론과 곁들여 있다.
<그림 Ⅴ-22> 할원법
<그림 Ⅴ-23> 해복법
<그림 Ⅴ-24> 동국명산가
승제는 전통적인 산목 계산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 책에는 수론적인 문제
가 실려 있는데 내용은 간단한 이원일차방정식으로 귀착시킬 수 있으나 문
제형식이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뒷부
분 즉 구장명의(九章名義)로부터 구고(勾股)까지는 전통적인 『구장산술』의
항목 및 셈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문제내용은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있
으며 당시의 행정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문제서술의 형식은 『구장
산술』의 問․答․術의 방법 그대로이다. 구고장의 문제에는 상당부분에 그
림이 이용되고 있어 당시 18세기초의 실학 풍조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구
장문답장에서는 『구장산술』각 장의 명칭과 그 유래 및 내용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서양수학, 즉 예수회 선교사를 통하여 중국에 소개된 수
학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있다. 특히 할원법(割圓法)에서는 내접다각
형의 문제를 원주율의 문제와 연관시켜 제기하고 있으며 개평(開平)․개립
(開立)의 문제가 기하학적으로 해설되어 있다. 마지막에는 태을수(太乙數)에
대한 설명도 있어 고전적 수신비사상이 보인다. 동국의 명산가(明算家)로서
수학자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중인학자인 경선징은 술사로 소개되어 있다.
현실면이 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신비사상을 내포하고 있고 또한 새로운
서양수학의 영향도 담고 있다.

 

15) 『악학궤범(樂學軌範)』크기는 길이 9촌, 지름 9분, 부피 810분이고, 기장 1,200
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황종관은 부피와 무게를 재는 단위의
기준이기도 했다.

(15) 산학십유(算學拾遺)-조희순(趙羲純)


편찬한 조희순의 생몰연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남상길의 서가 붙어
있기 때문에 시기를 짐작할 뿐이다. 서양식 산학이 한국에 전래되는 가장
큰 길은 중국을 통해서였는데 남상길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전통산학을
정리하고 서양수학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동․서 산학의 비교가 행해졌고
『수리정온』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저자는 『수리정온』의 내
용에서 미흡하다고 느낀 점을 골라서 해석을 하였으며 남상길은 그 일에 큰
의의를 두고 있었다. 책 내용은 처음 『수리정온』의 12․13권의 구고의 부
분에서 미흡한 점을 지적하고 그림을 이용하여 해석하였다. 구․고․현의
길이 가운데 두 개의 합과 나머지 길이 또는 다른 두 요소의 합 또는 차의
관계에서 이차방정식을 유도하고 또 연비(連比)의 계산을 도식하여 알기 쉽
게 해석하였다. 간단한 삼각법의 정의 및 직각삼각형의 각 변의 비의 관계
를 이용한 계산, 삼각법의 일반적 원리 등이 취급되어 있다. 여기서는 전통
수학처럼 현실적인 문제에서 법칙을 터득시키는 방법을 일체 배제하고 있으
며 처음부터 정리 중심으로 논리가 전개되어 새로운 수학 경향을 알 수 있
다. 등변다각형의 외접원 또는 내접원의 반지름을 구하는 일을 기하학적인
방법을 피하여 모두 방정식으로 귀착시키고 천원술을 이용한다. 말하자면
서양수학과 동양수학이 공존하고 있는 형태로서 조선말 산학활동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16) 산학실용(算學實用)-변언정(邊彦廷)


저자는 변언정으로 생몰연대는 알 수가 없다. 인용서목과 내용으로 보아
조선 말기의 저술로 추정이 될 뿐이다. 총례에서 처음에는 구구구결(九九口
訣)을 싣고 있는데 9×9로부터 시작하여 1×1로 끝난다. 구귀가(九歸歌, 나눗
셈의 구결)에서등이 있고 석(石)․두(斗)․합(合) 등의 단위를 설명한다. 척
량(尺兩)의 관계, 척(尺)․촌(寸)․분(分)……사( 絲)의 단위계산의 설명, 간
단한 곱셈․나눗셈의 설명, 원주율의 계산, 원넓이, 구의 부피에 관한 것, 내
외접정다각형의 넓이 계산이 있고 원뿔이․모뿔이의 부피에 관한 계산법칙
이 있다. 저자는 산(算)자를 쓰는 대신 수(數)자로 표시하고 있다. 가령 『算
학계몽』은 『數학계몽』이라는 식이다. 내편 상에는 먼저 승법(乘法)에 관
해서 8개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인법 8문, 상제법 8문, 귀제법 8문 등
모두 나눗셈인데 약간씩 방법을 달리하여 이름을 구별하고 있다. 사율법은
서양식의 비례산이라 설명하고 복비에 관하여 여섯 문제가 있다. 내편하에
는 쇠분법 5문, 면적법 5문 등이 있고, 외편상에는 구고율에서 전통적인 구
고술과 서양의 직각삼각형의 이론을 비교하여 그 성질을 설명하고 있다. 외
편하는 천문관측의 이론을 설명하는데 천문의기와 방법에 관한 일반적인 설
명이다. 여기에는 북극의 결정문제, 지구의 크기, 지구와 천체의 경도 및 위
도의 이론이 소개되어 있으며 실지 이들에 관한 문제가 40개 있다. 마지막에
개평법, 개립법의 설명이 있으며 특히 내피어 로트(對數尺)의 사용법을 천문문
제와 곁들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 산학자의 손으로 적극적으로 서양
수학을 소화하면서 계몽서 이상의 내용을 담은 전문적인 서적이다.
이밖에도 실무관리를 위한 문자 그대로의 핸드북으로 엮어진 듯한 『동
국산서(東國算書)』의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전제(田制)와 관련된 기사
(記事) 중에서 숙종 무년(戊年, 1718)이라는 년대가 나온 것으로 미루어 영
조 治世에 속하는 18세기 중엽쯤의 판으로 생각된다. 이 책의 기초편에서는
곱셈․나눗셈․분수․비례산 따위에 관한 기본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응용
편 중에 田制에 관한 문제에서는 전품(田品)에 따르는 각 수획고(收穫高)를
1등전 100에. 2등전 85, 3등전70, 4등전 55, 5등전 50, 6등전 25를 정했다. 이
것을 환산하기 위한 조견표가 실려있다.
<표 Ⅴ-11> 등급에 따른 조견표
권말에는 “三人同行七十稀, 五柳門前二十一,七月七夕三五夜, 冬至寒食百五
除” 라는 시구(詩句)가 아무런 설명없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묵사집』의
일차합동식에 관한 가결(歌訣)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동국산서』는
수학서 자체로서의 의의보다는 근대화의 과정에 영업기술의 하나로서 요구
된 산술의 실제적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구일집』과 같은 순수한 수학서와는 이질의 실무관리용의 산서가 따로 있
었다는 것, 그러니까 수학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음을 뜻하는 분화현상을 나
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수학사적으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저자 미상인
『동산(東算)』은 天․地․人의 3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각 장은 『구일
집』의 제목 그대로이다. 문제의 내용 그리고 해법의 설명까지가 꼭 같지만
다만 문항의 수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부록에 실린 문답편에서는
역시 『구일집』잡록 중의 역산(曆算)․악률(樂律)에 관한 문제 그리고 중국
의 사력과의 대답에 나온 문제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좀 색다른 점이
있다고 하면 이 산서는 『구일집』이 원본인 것은 확실하지만 누구에 의해
엮어진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동산(東算)』이라는 이름으로 한
국인이 저술한 한국인의 산서임을 과시한 것은 한국 수학의 주체성을 그만
큼 강하게 의식한 탓이었다고 생각된다. 가감승제 따위의 기본적인 계산규
칙이 일체 생략되어 있다는 점에서 원본『구일집』과 마찬가지로 이 책이
실무용의 핸드북 또는 산생을 교육하는 교재로서는 쓰여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Ⅵ. 결론 및 제언


한국 수학사에서 볼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정치에 새로운
혁신의 바람이 불면 수학 또한 새로운 풍조가 생긴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관영수학으로써 존재해야 했던 한국의 제도 과학의
공통적인 숙명이기도 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했을 때 바로 산학 제도가
정립되었고 또 세종대왕이 혁신정치를 단행할 때도 수학이 중요시 되었다.
조선의 근대 실학파의 합리주의 운동에 있어서도 한결 같이 수학의 합리성
이 강조되고 그 교육의 필요성이 중시되었으며 조선이 마지막 재생의 길을
모색한 것도 수학교육을 통해서였다. 특별히 실학기는 정치적 쇄신 뿐만 아
니라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혁신을 가져오는 시기로 변화와 격동의 시기였
다. 이에 단순한 중국 산서의 활용이 아니라 적극적인 중국 산서 해설서와
독자적인 수학서의 집필 등 다양한 수학활동이 이루어졌던 시기로 볼 수 있
다. 실학기의 수학자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제한적인
자료와 번역되지 않은 수학서로 인함이다. 실학기는 실제로 한글 창제 이후
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관용에서는 한자를 사용함은 수
학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오늘날과 비교해 보아도 법률용어나 그 밖의
행정용어 등이 한자어인 것을 생각한다면 반성의 여지가 있다. 여기서는 단
순히 실학기에 영향을 준 중국수학서, 실학기의 우리나라 수학자, 그리고 우
리나라의 수학서는 어떤 수학서가 있었는가를 살펴보는가에 불과했지만 이
후 한자로 쓰여진 이들 수학서가 오늘날의 수학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과 상
관없이 역사의 한 부분으로써 한글번역 작업과 재해석 하는 일이 필요하다
고 보여진다. 아울러서 학교에서의 수학․과학의 장려는 물론이려니와 공직
에서의 이공계 출신의 적극적인 기용을 위한 제도가 보다 구체적으로 시급
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 연구자는 생각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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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주칠성, 실학파의 실학사상, 서울, 예문서원, 1995.
[13]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실학사상사, 서울, 다운샘, 2002.
[14] 한상근, 한국과학기술원, 한국수학교육학회, 서울, 뉴스레터 제14권 제2
호 통권 제54호, 1994.
[15] 한철순, 조선시대 산서를 통해 본 수학에 관한 고찰, 계명대학교 석사
학위논문, 1993.
[16] 홍소연, 중국수학이 한국 수학에 미친 영향,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글쓴이 : 낙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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