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2018. 3. 31. 22:39과학 이야기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 1768년~1771년까지의 한양 생활을 중심으로-


이 지 양 *

목 차
1. 문제제기: 왜 이 시기에 주목하는가?
2. 圖書 貸出과 筆寫, 그 과정의 文化 衝擊
3. 漢陽의 知的 雰圍氣와 黃胤錫의 圖書 購入
4. 맺음말


국문초록
頤齋 黃胤錫의 일생에서 1768년(40세)부터 1771년(43세)까지 4년은, 한 향촌 지식
인이 한양의 도시적 분위기 속에서 ‘博學之士’로 성장하는 과정을 매우 잘 보여주는 독
특한 기간이다. 본 논문은 頤齋亂藁를 통해 黃胤錫이 이 시기에 구입한 도서 및 대
출하여 필사한 도서의 목록과 그 경로를 정리함으로써, 黃胤錫의 학문적 성장과정 및
그 시기 경향 간의 지식 동향을 고찰한 것이다.
2장은 1768년부터 1771년까지의 연도별 필사 목록을 제시하고, 그 도서 대출 경로와
필사 목록의 특징을 분석하였다. 黃胤錫에게 가장 많은 지적 자극과 도움을 준 사람은
金用謙이었다. 그는 李顯直과 沈有鎭 등의 인사들을 黃胤錫에게 소개함으로써 律曆
분야 학자들의 근황과 학문 동향을 알 수 있게 도와주었다.
3장은 黃胤錫이 이 시기에 구입한 도서의 목록과 그 과정 및 경로를 연도별로 제시하
고 그 이유와 그 시기 京鄕 間의 知的 雰圍氣를 비교하였다. 지방의 선비들은 과거를
염두에 두고 經學과 詞章學에 골몰하고 있었지만, 한양의 관리들은 청나라를 통해 유입
되는 西學 관련 서적을 비롯하여 사전류의 도서를 탐독하며 博學에 열중하고 있었다.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전자우편: y529@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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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胤錫의 생애 가운데 도서구입 및 필사에 대한 열의가 가장 높았던 것은 바로 이
시기이다. 그는 7품직이라는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박학함으로 인해 이미 영조 임금
에게까지 알려져 거듭 칭찬을 들었다. 그의 지적 활동에는 한양의 이런 지적 풍토가
큰 자극을 주었다.


주제어 : 京人, 鄕人, 黃胤錫, 金用謙, 西學, 博學, 頤齋亂藁, 律曆淵源.


1. 문제제기: 왜 이시기에 주목하는가?
頤齋 黃胤錫(1729~1791)이 53년간 총 57책 분량으로 남긴 일기인 頤
齋亂藁의 상당 부분은 다른 책을 필사한 것이다. 그것은 과거급제를 통
해 중앙정치무대로 진출하고자 했던 그가 과거급제 외에 다른 경로, 즉 폭
넓은 독서를 통해 ‘博學之士’로 진출을 모색한 흔적이기도 하다. 호남 흥
덕현의 在地士族으로서 한미한 처지였던 그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오로
지 독서를 한 결과였다. 그의 일생 가운데 1768년부터 1771년까지 4년은,
그가 ‘博學之士’로 成長하는 過程을 매우 잘 보여주는 기간이다. 1766년
(38세) 6월에 음직으로 莊陵參奉을 제수 받아 2년간 근무를 마치고 1768
년(40세) 6월에 義盈庫 奉事로 이동하여 1771년(43세) 6월에 司圃署 別
提로 陞六하기까지가 바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1771년 12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1771년은 그의 한양생활에 한 매듭이
지어지는 시점이기도 하다.
黃胤錫은 義盈庫 奉事로 이직하여 漢陽에서 일종의 文化 衝擊을 경험
한다. 과거 시험을 치르는 광경에서부터 京儒들의 서적 정보라든가 그들
의 인맥과 생활상 등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는 넓었다. 그런 중에 그는 노
론 및 소론 명문가 인사들을 통해 많은 양의 도서를 대출하여 열람하고
필사하기 시작했으며 소식이 들리는 대로 책을 구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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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그가 대출하여 필사하거나 새로 구입한 도서는 분량으로만 보
더라도 한양에 오기 전이나 陞六한 이후와 명확히 구분된다. 불과 4년 정
도의 기간이지만 이 기간 동안에 黃胤錫은 그가 평생토록 탐독할 서적들
을 대부분 확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선비들의 知
的 動向에 대해서도 예민한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활동을 대부분 포착하
고 있다. 서적에 대한 관심과 학자들에 대한 관심은 맞물려 있는 것이 당
연한 듯하지만 身分, 黨色, 京鄕 간의 경계를 무시할 수 없었던 18세기 조
선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 과정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黃胤錫의 頤齋亂藁에 나타난 도서 구입에 대해서는 이헌창․구만
옥․김영진의 선행연구1)가 있다. 이헌창은 ‘3절 지식의 유통과 학술서적
시장’에서 경제적 관점으로 다루었으며, 구만옥은 黃胤錫의 산학 연구와
관련된 서적 구입과 필사를 통해 黃胤錫이 산학에 관심을 둔 계기와 그
연구 내용 및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상세히 규명하였고, 김영진은 黃胤錫
의 서적 입수 경로 및 책값, 거간꾼의 존재 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구입 도
서 목록을 소개하였다. 본고는 黃胤錫의 도서 구입 사실 및 다른 지식인과
의 교유2)에 대해서는 선행 연구와 일정한 근거를 같이 하지만, 연구 대상
의 범위 및 연구 관점에 있어서는 차이를 지닌다. 연구 범위에서는 도서
구입 뿐 아니라 대출과 필사 목록까지 포함시켰으며, 연구 관점에 있어서
도 黃胤錫의 학문적 성장과정뿐 아니라 해당 시기의 경향 간 지적 분위기
의 차이까지 살펴보려고 한 것이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하고자 한다. 우선 頤齋亂藁라는
산만한 일기 속에서 黃胤錫이 한양에서 처음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한 초
기 4년간의 필사 도서 및 구입 도서의 목록을 파악하여 연도별로 정리해


1) 이헌창(2007); 구만옥(2009a); 구만옥(2009b); 김영진(2010) 참조.
2) 구만옥(2009b)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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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화 한다. 그 다음 연도별 도표에서 도서 목록의 경향과 그 대출 및 구
입 경로를 고찰한다. 그리고 황윤석은 왜 이 시기에 이러한 지적 성향을
강화하게 되었는가하는 점을 분석하고, 그 당시 한양과 지방의 지적 분위
기의 차이를 조명한다. 1768년부터 1771년까지 4년간 황윤석이 필사한
도서 및 구입한 도서의 목록은 그 자체로 이미 황윤석이라는 개인의 지적
성향은 물론이고, 18세기 당시의 지적 환경과 움직임을 포착하는데 사실
적 근거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2. 圖書 貸出과 筆寫, 그 과정의 文化 衝擊
黃胤錫이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출입하면서 종종 경화거족 자제들의
위세를 목격하곤 했다. 경화거족 자제들은 과거장에 수많은 하인을 대동
하고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정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응시하고 쉽게 합격
했는데 그것은 문화적 충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문제적 현상으로서 개탄
을 자아냈다. 그런데 황윤석이 鄕儒로서 京儒에 대해 문화적 충격을 실감
하는 경우가 있었다. 크게 세 가지 사항3)에서였는데 첫째는 과거시험에
대한 내밀한 최신정보, 둘째는 그들의 빠른 陞六과 불성실한 근무태도, 셋
째는 그들 가문이 소장한 엄청난 양의 서적에서였다. 黃胤錫은 그 세 가지
사항 중에서 그들이 많은 서적을 소장하고 있는 것을 진심으로 부러워했
다. 그런 까닭에 그가 한양에서 근무하게 되자 거의 매일 관아나 지인들을
통해 책을 빌려 읽고 초록하거나 필사했다. 그 목록을 정리해 보면 현대인
이 서적을 기계로 복사하는 것을 연상시킬 만큼 양이 많다. 1768년부터
1771년까지 황윤석이 필사 한 도서 목록을 연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


3) 이지양(2008), ‘3절 鄕儒와 京儒, 그 文化的 境界線에서’에서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해
보고한 바 있다.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07


다. 이 도표를 통해 그 도서 대출 및 필사 경로와 도서목록의 성격을 살펴
본다.
(1) 1768년 6월부터 義盈庫 奉事로 在職
월일 소장자 저자 도서명
가격
문의
필사/
구입
비고
06.02~11 尹孟玉耽羅聞見錄(1冊)
열람
필사
鄭運經이 부친을 따라 제주도에
갔을 때 編成한 것으로 모두 3編
이고, 橘譜 3品이 첨부
06.06 金履萬晉書 (2書) 필사
06.07~10 許穆記言 열람
06.12 雜鈔 필사
유구국의 문화, 일본 長崎島 등
에 끌려간 조신인 포로 이야기와
표류한 선원들의 이야기 등
06.19 嚴敬中趙希逸神道碑銘印帖 열람
우암 송시열이 짓고, 谷雲이 예
서를 썼으며, 文啓가 전서를 쓴
것임
06.23 李瀷
星湖僿說과
漢書地理誌
열람 한사군의 영역 비교
07.04 宋浚吉 同春集 서울에서 신간했다는 소식 들음
07.11
李命勳의
부친 海興君
집안
數理精蘊 1질
대출
열람
07.15 관상감 관원 曆象集 제2권 의영고 首吏 池永老가 빌려옴
07.16
大典禮典儀章
國朝喪禮補編
大典兵典烽燧
일부
필사
07.17~20 李孟休 撰春官志 2권 필사
좌랑 李孟休가 수집한 것
좌랑 金圭瑞 가 보내줌
07.21 徐光啓 등 新法曆引 필사
07.28 朱氏啓蒙 필사
07.29
洪量海․
李用休
幾何原本 6책
대출
열람
홍량해를 一代의 算學家로 평가.
이용휴와 利瑪竇, 熊三發 등 서
양학자와 徐光啓, 李之藻 등에
대해 토론
108 第53輯
08.06 金元行太玄經 洪樂舜이 빌려다 줌
08.08~11 趙晸輿地勝覽 두 권 조인숙을 통해 빌림
08.16 李用休幾何原本 편지로 요청해서 빌림
趙曮氏族源流 전질 편지 요청
新法曆引
跋文을 씀
저술 경위와 우리나라에 들어오
게 된 연유
08.17 鄭喆祚
幾何原本을 소장
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니 幾何
原本이 아니라
數理精蘊
기하원본은 觀象官 李德星이
소유했다는 말을 들음
08.18 義盈庫通軌 一冊 改修 마침
08.19 荷潭日錄 열람
氅衣, 紗帽, 湯巾 등의 유래에 대
해 이야기함
08.21
明皇誡鑑과
七政內 外篇
대출
문의
安峽 鄭持淳에게 이 책들을 보고
싶다고 함
08.22 擊蒙要訣 一冊다시 보았는데 매우 開發됨
鄭喆祚
數理精蘊과
曆象考成
토론함
李家煥幾何原本
정철조의 매부인 李家煥이 소장
함을 확인
鄭喆祚
數理精蘊末部와
根方比例, 線類 1권
대출
花卉圖, 「동국8도지도」, 「盛京
地圖」를 관찰, 서양율력의 疑義
및 천주교의 大旨,徐光啓의 근황
을 들음
09.04 鄭喆祚曆象考成
구입
문의
一帙이 몇 권인지 燕京에서의 가
격 문의
鄭喆祚數理精蘊
대출
문의
빌려줄 것을 부탁
09.11 鄭喆祚曆象考成 共三冊 대출 조인숙에게 구입 여부 문의
09.16 金元行太玄經 二冊
대출
열람
홍낙순을 통해 받음
09.17 金文欽搢紳內外官案
대출
필사
구입여부 문의
10.02 七曜表 八卷구경
首吏 池永老가 바침. 11.07일에
책 가격 알려줌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09
10.03 金元行太玄經
필사
보완
洪樂舜家 寫本을 謄草하여 補寫
10.07 鄭喆祚
曆象考成 三冊,
渾蓋通罡 模本 二紙
대출 曆象考成 燕京 구매가 문의
10.16 李恕
叅同契 自序,
道德經注解 自序,
職方外記 自序,
唐畵 丹家書畵인
五峰秘藏
구경 西齋로 찾아가 토론하다가 구경
10.18 豊山洪氏 族譜 新本구경 구경
10.20
洪樂舜,
樂顔, 樂莘
明人 錢塘
鍾人傑이
편찬
性理會通 七冊
대출
열람
椒洞으로 방문하여 대출
10.23 尹志述「太學事故跡」朴廷烘이 가져와서 보여줌
11.06 <平壞趙氏 族譜> 열람
11.14 「靑粧曆」 一件입수 金德峻이 보내줌
11.17 七曜表 八冊
관아에
구입
庫直이가 三兩으로 4책 낙질본
구입
11.18 己丑七政曆
관아에
구입
本庫 書員輩에게 구입을 명함
11.21 尤庵年譜
발췌
필사
11.24 上舍 李恕
曆象考成 後編.
職方外紀 寫本 一冊
東史會綱 一帙
대출
열람
授時大統分母化法 이야기. 주역
에 대해 토론
12.01 東史會綱 열람
12.14 職方外記 초록 앞서 필사한 것에 2권 없음
12.18
玉匣占夢書漫錄
一本
얻음
12.23
淸語老乞大新釋
共八卷中 一卷,
蒙語老乞大 一册,
倭學捷解新語
第六卷 三種 一册
열람 수리 池永老가 빌려옴
12.25
三譯總解 共十卷 中
一卷
열람
池永老가 빌려줌, 이는 三國志
演義를 蒙古語로 번역한 것
110 第53輯
1768년에 黃胤錫이 책을 빌려 본 곳은 몇몇 소론과 노론 가문, 그리고
근기 남인인 성호 이익 가문의 인물들이었다. 소론 가문은 鄭景淳(1721~
1795)․鄭持淳 형제, 정경순의 아들 鄭東驥(1750~1787)와 조카인 鄭東愈
(1744~1808), 趙曮과 趙鎭寬 부자, 趙晸과 趙仁叔 부자 집안이었다. 이들
은 모두 黃胤錫이 벼슬길에 오르도록 추천하고 도와준 인물들이다. 그리고
노론 가문은 黃胤錫의 스승인 金元行과 그 맏아들인 金履安(1722~1791),
그리고 김원행의 제자인 洪樂舜, 부안현감을 지낸 李運海(心海로 개명,
1710~?)와 李重海(1708~1782) 형제, 이운해가 소개한 鄭喆祚(1730~
1781) 집안이다. 정철조는 김원행의 제자로 홍대용․박지원과도 가깝게 지
냈다. 소론은 관직 추천으로 노론은 학맥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데 비해 남
인과의 연결은 미미하지만 특별한 경로를 보인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정철조의 여동생이 李用休(1708~1782)의 아들인 李家煥(1742~1801)에
게 시집을 갔기에 정철조와 이가환이 처남매부지간이 된 까닭에 黃胤錫과
도 연결이 되었던 것이다. 이용휴는 남인인 星湖 李瀷의 조카이다. 이런
경로로 해서 黃胤錫은 남인인 성호 집안의 저술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李孟休가 찬술한 春官志를 구해 본 것은 동료인 병조 좌랑 金東稷
을 통해서였지만 서적에 대한 관심과 열의 때문에 어떤 경로로든 남인들의
지적 동향에도 접촉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李恕는 成均館 齋生으로 만난 노인인데 周易을 천 번이나 읽
었고 利瑪竇의 曆象 理論에 정통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과거를 폐한지
가 30년인데 群書에 博通하여 黃胤錫이 종종 成均館의 西齋로 찾아가 대
화를 하곤 하였다. 그리고 金文欽은 書吏 金德峻의 아들이다. 이 한 해 동
안 그가 빌려보고 필사한 책들은 자신의 학문적 관심사인 律曆 분야 서적
과 관직 생활의 실무와 관련된 서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11
(2) 1769년 6월에 司圃署 直長, 19일에 다시 宗簿寺 直長으로 移職
월일 소장자 저자 도서명
가격
문의
필사/
구입
비고
03.14 黃胤錫太玄筮法附解
내가 쓴 책을 楊州 平丘의 上舍 李恕가
와서 빌려감
03.14
參奉
趙重國
乾象要覽 대출열람
중봉선생이 필사한 것으로 漢書ㆍ晋
書ㆍ宋史ㆍ高麗史의 誌 및 <步天
歌>를 죄다 모아놓은 것. 重峯이 16세
때 土亭 李之菡에게서 얻은 것
重峯集
전질 10책
대출열람 신간 대출
03.17 金用謙
氏族源流
7책 한질
대출열람
(03.08
~22 필사)
김어른이 氏族源流를 보여주고 諸
姓譜ㆍ姓苑叢錄과 비교함
03.21
淸人
黃宗羲
明儒學案 열람
03.22 交食表
池永老가 와서 觀象監 안에서 交食表
를 간행하는데 만역 종이가 있으면 인
쇄하여 바치겠다고 말함
03.23 金用謙四聲通解 2책 대출열람
03.25 ≪西洋地圖≫ 정보
掌務書員 李漢樞가 연행에서 돌아올
때 가져왔다고 듣고 빌려보기로 함
03.26 金用謙
律曆淵源
전질
대출부탁
예정
金善行이 연경에서 사왔단 말을 들음
03.28 任兗
姓源叢錄
18권
정보
姜游가 빌려갔다고 들음(宋相殷을 통한
소식)
丁時述의
자손
丁時述이
편집
丁氏諸姓譜 정보 金輝世에게서 들음
李恕≪萬國全圖≫ 열람 이서가 서양에서 온 것을 보여줌
04.06 沈有鎭
唐本 字彙
5권
가격:3냥 반 심생이 조만간 가지고 오겠다고 함
04.10
李光夏
(李瀣의
후손)
≪古杭遺式≫ 정보
홍대용이 嚴誠ㆍ陸飛 등과 주고받은
편지를 作帖하여 표제한 것 소개
04.27 高峰集 열람
05.03 金用謙
律呂正義
(상․하․속)
한 질
대출 김용겸 어른이 보내줌
112 第53輯
05.08
≪附冬至
使別單≫
필사
05.11 鄭東驥
數理精蘊ㆍ周
髀經解ㆍ幾何原
本ㆍ算學原本
대출 정동기에게 가서 빌려옴
≪觀象監單子≫ 필사
05.18 <嶺儒疏本> 1紙김용겸 어른께 찾아 보내드림
05.19 樂學軌範 필사 예정
06.13 ≪交食表≫ 1책
5錢(貢人李
鵬에게 5錢
으로 값을
치렀음.)
의영고 首吏 池永老가 留仕使令 崔占
乭을 시켜 보내줌
06.17 金用謙博古圖 대출부탁 김용겸 어른께 빌려달라고 편지
06.19 金用謙
朴世采
편집
東儒師友錄 대출 예정 김용겸 어른이 빌려주시겠다고 함
07.05 鄭東愈
數理體部
末部 16권
대출열람 정동유가 보내줌
08.09 金用謙通文館志 3책
대출열람
부분필사
08.14 璿源本錄
열람
부분필사
08.16 金用謙律曆淵源 대출부탁 김용겸 어른이 빌려서 보내주시기로 함
08.17
참판
金善行의
아들
曆象考成 2套
29책(曆象
考成 및 數理
精蘊과 律呂
正義)를 합쳐
律曆淵源이라
칭한다고 함)
대출
金用謙어른이 빌려 보내심
내가 사람을 보내 가져오게 함
08.19 律曆淵源 열람 전부를 살펴봄
08.26 曆象考成 1질 구매부탁
舊 觀象監 書員이었던 書吏 에게 구매
부탁
08.29 金用謙朴世采
東儒師友錄
全帙(十八卷)
대출부탁 편지로 대출부탁
09.25 金用謙朴世采
東儒師友錄
二冊
초록
필사
10.02
三嘉聖循
金履鐸
安東金氏世譜 열람 고향 다녀오는 길에 방문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13
10.06
日本大字節用
(一帙)
열람
일본 문자가 한자 초서에서 온 것임을
알고 여러 나라의 문자와 비교
10.08
淸人
張安茂가

頖宮禮樂全書 열람
樂律을 논한 것을 보니 악기의 설명이
주자와 채침의 新書와 조금 다름
10.12 沈有鎭宋時烈尤庵別集 3卷대출 편지로 부탁해서 빌림
10.26
≪白頭山南北對
境圖≫
模寫완료
11월16일에 鮮洲南北對境圖라고 새
로 제목을 붙임
11.06
~12
金用謙
三淵集
全帙(18卷)
대출
초록
11월 4일에 편지로 빌려달라고 부탁
해서 6일에 받음
11.14
金用謙
(李彦黙
家의 것)
明末人所

元人所撰
樂仙琴譜
(唐本)
中原音韻
龍飛御天歌
康熙御纂
周易折中
구경
11.17 沈有鎭
族譜[沈譜]
五冊을
빌려달라고 함.
대출
11.17
~12.02
金用謙
大明一統志
全帙
龍飛御天歌
全帙
대출
초록시작
11.19 徐文重朝野記聞 열람
12.05 金用謙
汪俊慶
程松壽
樂仙琴譜正音
2책
松風閣琴譜
(附抒懷操)2책
대출
열람
김용겸이 보내줌
12.14
宋鼎休
(掌苑署
소장본)
≪西洋畫
簇子≫ 1軸
그 세밀하고 정치함, 사람과 물체가 높
고 멀리 있는 것은 작고 짧게, 아주 가깝
게 있는 것은 크고 길게 그리는 것과,
그들 曆法으로 星辰日月을 측량하여 遠
近大小를 다르게 보는 설은 같은 곳으
로 귀결되는데, 이는 범범히 보고 헤아
릴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논평
12.23 金希孟현상벽 「舟中錄」
빌려달라고 요청. 화재로 소실되었다
고 회답 옴
114 第53輯
1769년에 黃胤錫은 김용겸의 소개로 沈有鎭(1723~?)과 알게 되었고,
주로 그 두 사람을 통해 자신이 읽고 싶은 책들을 맘껏 빌려보고 필사했
다. 위의 독서 목록이 보여주듯이 그는 지난해와 다름없이 율력 분야의 책
을 공부했고 광범위한 독서를 했다. 이해에는 조엄․조정 집안에서 책을
빌린 것이 없었다는 점이 지난해와 다르다.
이해에 黃胤錫이 만난 사람 중에서 주목되는 경우는 豊基의 선비인 李
光夏를 들 수 있다. 그는 黃胤錫이 전에 반촌에서 만난 적이 있었으며 퇴
계의 형인 李瀣의 후손인데 4월 10일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광하
는 자신이 洪大容과 친하며 홍대용이 嚴誠ㆍ陸飛 등과 주고받은 편지를
作帖하여 ≪古杭遺式≫이라고 표제를 삼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홍대용을
소개하고 칭찬했다. 黃胤錫은 이광하로부터 홍대용에 대해 좋은 인상을
먼저 받고서 1770년 10월 24일에 다시 김용겸으로부터 홍대용을 소개 받
았다. 김용겸은 홍대용이 김원행의 夫人과 從姪 間으로 일찍이 김원행에
게 왕래했으며, 문학과 재예며 견식이 俗儒와 다르고, 연경에 가서 서양
자명종이며 구라철사금, 그리고 數理精蘊 1질(帙)을 구매해왔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6월 21일에는 충청도 連山에서 崔生이란 사람이 와서 申光洙가 黃胤錫
의 全州 公都會 壯元詩에 대해 칭찬했다는 얘길 전해주었다. 그리고 같은
날 참판 兪彦民이 黃胤錫이 會試에서 지은 시를 칭찬했다는 소식을 들었
다. 또 동학을 통해 스승인 김원행이 黃胤錫이 經學에 전념한다면 크게
성취할 것인데 文詞의 부화함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염려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8월 17일에는 선전관 白泰源이 찾아와서 만났는데, 그는 寶城의
武人 朴慶武에 대해 들려주었다. 박경무는 朴孝立의 후손으로 經書ㆍ兵
法ㆍ算法ㆍ相法ㆍ占法에 밝게 통하지 않음이 없다고 했다.
이해에 黃胤錫은 群書에 박학한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고 그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15
들의 근황과 공부한 서책 목록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黃胤錫
역시 박학한 선비라는 명성도 높아져 호남은 물론이고 한양에서도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3) 1770년, 宗簿寺 直長으로 근무
월일 소장자 저자 도서명
가격
문의
필사/
구입
비고
01.05 鄭文柱洪世泰海東遺珠 一冊 구경 홍세태가 農岩의 命을 받아서 한 것임
01.06
李之藻
張安茂
禮樂疏詁
泮宮禮樂全書
黍稷과 秫에 대한 언급을 발췌
沈有鎭十三經注疏
대출
요청
편지를 보냄
01.13 資治通鑑綱目全書 열람
01.17
~18
鄭存謙
高麗史世家
5권(성종~예종)
열람
檢籤
17일에 정존겸이 책을 보내고 檢籤을
요청, 18일에 회송
01.19
~20
鄭存謙
高麗世家 5권
(예종 이하~高宗)
열람
檢籤
20일에 회송
01.21 鄭存謙
高麗史世家 (元宗
이하 및 別傳․志․
表) 40여권
열람
檢籤
22일에 회송
01.22 鄭存謙宣廟寶鑑 1질 5권
발췌
필사
01.23 鄭存謙任有後休窩雜纂 1질 3책
발췌
필사
01.24 鄭存謙
三國史記 1질 8책
중 6책
발췌
필사
01.28 李光鉉
葉培恕
所定,
王志長
所輯.
周禮註疏刪翼 열람
02.01 鄭存謙
徐命膺
編輯
國朝名臣錄 4책
열람
檢籤
02.03 鄭存謙東史補遺 2책
열람
檢籤
116 第53輯
02.05 金用謙
宣和博古圖二匣
15권, 大明會典
禮部儀制 司冠服 1권
발췌
필사
01.21일에 편지로 대출 요청했음
02.06 象村集
열람
발췌
필사
02.07 河西集
열람
발췌
필사
02.10 鄭存謙荷潭破寂錄 1책
열람
檢籤
발췌
필사
02.24 鄭存謙
西厓集
芝峯集
厚齋集
열람
檢籤
교정을 보다가 피로에 지쳐 巧者拙之勞
라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며 탄식
02.25 金用謙農政全書 1질 편지로 대출 요청
03.05 高益擎鄭來僑浣岩集 2책 열람
都事 高益擎을 방문. 정래교에게 金鍾
秀․金鍾厚가 어려서 나아가 배웠으며
그들의 대인 墓文을 청하기도 했음
03.11
李光鉉
(徐命彬
의 家藏)
朝野記言1帙
열람
초록
이광현이 빌려온 것을 다시 빌림
03.15 鄭載崙
公私聞見錄
儀禮通解
초록
03.27 經國大典 초록
04.06 李灝
幾何原本 1질
(文光道의 사본)
數理精蘊 하편
1질(金亨澤의 인본)
皇極經世外篇
(성리대전에 편재)
이호가 黃胤錫에게 질문, 답해줌
04.07 李顯直
宋朝文鑑
唐本 85編
陳希夷의 「龍圖序」를 살펴보라고 함
04.10
~13
鄭存謙
文獻備考
中草 3冊
교정 교정 후 회송
04.14 李顯直
大戴禮
唐本 3책
대출
열람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17
04.15 鄭存謙
文獻備考
中草 5책
교정
회송
李灝王鳴鶴
登壇必究
제1갑
대출
열람
구입을 권유했으나 하지 대출 열람. 병서
04.17 鄭存謙文獻備考 中草 1책
교정
회송
종부시
黃正幹
文獻備考 中草 刑制
제1권
체제
잡아
회송
體裁를 다듬어 달라고 요청
04.18
서리
劉成郁
≪燕中使行別單≫ 1통 베껴서 보내줌
04.20 黃正幹
文獻備考中草 刑考
제 2권
교정
회송
04.21 鄭存謙
文獻備考中草 樂考
數三軸
교정
회송
지금의 朝紳은 모두 자신이 편하고자 남
을 볶으니 高官美爵으로 자기를 위하
고, 苦海愁陣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니
우습다라고 기록함
04.23 金用謙
茅元儀
安命老
武備志 52책
演機新編 2冊
대출
예정
빌려주시기로 함. 黃胤錫이 6월 19일
부터 무비지 열람
04.28 沈有之歷代總目 대출
05.04 沈有之
「國朝天文圖」 (홍무
을 해 석각 인본 족자
한 벌), 「江碧鳥逾白」
전편 (成聽松 수필
족자 1벌) 서양에서
만든 오대주 지도 2 폭
족자 각 1벌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
낙서 윤덕희 및 이인상
화첩, 화원 韓宗愈의
미인도 족자 1벌.
열람
구경
심유지의 집을 방문해서 봄
05.05 鄭存謙
文獻備考 「選擧考」
中草 1책
교정
회송
05.06 鄭存謙
文獻備考 「選擧考」
中草 1책
교정
회송
05.07 鄭存謙
文獻備考 「選擧考」
中草 1책
교정
회송
05.08 鄭存謙
文獻備考 「選擧考」
中草 1책
교정
회송
118 第53輯
06.06 尹東國璿源譜, 濟州高譜 열람
06.26 金用謙
李光地
安命老
周易折中 唐本 2匣
16冊 演機新編
鄕本 3冊(嶺南 梁山郡
판본)
대출
열람
李顯直
李顯直
의 증조
부 芝湖
公 편찬
勝國新書 1冊열람 방문했다가 보게 됨
07.04
徐浩修
편찬
文獻備考의
제1~4, 象緯考 中草
열람
구해서 열람
9일에 黃赤宮界가 크게 잘못 된 것을 발
견하고 改正함
07.18
先達
洪樂遠
三才圖會 1질 구경 燕京에서 새로 구입한 것을 보여줌
07.22 鄭景淳經世八編類纂 1질 구경 정경순이 질의, 내가 답함
08.11
韓光會
(종부시
신임
이제조)
柳氏隨錄
1질(嶺營간행)
구경
한광회 대감댁에서 구경(7월 6일 柳翼
星에게서 말로만 듣고 이날 봄)
08.12
鄭東驥
(정경순
의 아들)
八編類纂 9匣 (도합
91권) 全帙
대출
열람
정동기가 보내줌
08.21 金用謙爵秩全覽 4책
대출
열람
초록
09.09 璿源錄鈔攷
초록
(그림)
우연히 열람
11.01 皇明馮應京實用編
11.08 閔鏽南溪禮說 10卷 1帙구경 閔三水의 새 거처를 방문하여 우연히 봄
12.17
漢書에 나오는
司馬相如의 賦
필사
12.26 李顯直韻府群玉 제6편
대출
필사
낙질을 구입했기 때문
1770년의 黃胤錫의 생활을 간추려보면 몇 개의 핵심어로 집약된다. 文
獻備考, 律曆淵源, 李顯直(1735~1773)4), 李灝, 主上의 知遇, 洪啓禧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19
(1703~1771), 徐浩修(1736~1799)이다. 이해에는 조정에서 文獻備考
편집을 시작했는데, 그 편집 당상관 8인 가운데 黃胤錫을 벼슬길에 추천
해준 李最中(1715~1784)과 黃胤錫이 근무하는 종부시의 이제조인 鄭存
謙(1722~1794)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黃胤錫은 이들을 대신
해서 거의 이 일에 매달려 지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文獻備考에 넣
을 내용을 발췌하여 요약하고 교정하는 데 사용했으며, 나머지 시간에만
율력 관련 서적과 典故를 알 수 있는 서적을 읽었다.
이해에는 沈有鎭에게서 소개받은 李顯直으로부터 우리나라의 數理와
曆象 분야에 일정한 경지에 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매우 폭넓고 자세하
게 듣게 된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의 은둔한 학자들의 이야기부터 조정에
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학자에 이르기까지 한 분야에 매우 밝은 소식통이
었다. 黃胤錫은 그로부터 인물과 서적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생원인 李灝로부터도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 4월 2일 일기를 보면 이
호 역시 沈有鎭․沈有之의 소개로 알게 된 것으로 나온다. 이호는 鷄林府
院君 李守一(1554~1632)의 후손으로 충주에서 살다가 한양으로 와서 內
資洞에 살고 있었다. 詞翰에 뛰어나고 弓馬를 업으로 하며, 兵書와 諸家
에 통달했으며 한창 나이에는 하루에 280리를 갔다는 奇士이자 異人인 인
물이다. 그런 그가 黃胤錫에게 算家와 通相法에 대해 배움을 청했으므로
종종 왕래하곤 했다.
이해 4월 2일과 5일자 일기에는 이호가 兵家者流의 서책을 많이 소장했
을 뿐 아니라 武備志 51책이 실로 兵家의 大觀이라고 알려준 인물로 나
온다. 이호는 지금 宰相家에 이 武備志가 있지만 스스로 읽지도 않고
남에게 빌려주지도 않으니 수전노와 다를 바 없다는 얘기와, 세상에서 張
志恒이 易學과 兵家에 깊다고 하는데 직접 얘기해보니 虛名이더라는 얘
4) 이현직의 가계(家系)와 생몰년도에 대해서는 구만옥(2009b), 246면과 각주 103) 참조.
120 第53輯
기, 湖西에 閔應聖이란 인물이 중국인의 易學兵書秘法을 전수받았는데
장지항이 그 실마리를 얻은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 역시 이현직처럼 당
세의 奇士를 두루 알려주었다. 영변의 張䎘, 신천의 李宜白, 성천의 金河
道가 모두 은거하며 독서하여 널리 百家九流에 통한 자들이며, 안산에 거
주하는 李瀷이 저서를 여러 권 지었는데 그 설이 경륜에 뛰어나다고 평했
다. 黃胤錫은 1770년에 재야 지식인들에 대한 놀라운 소식들을 대부분 이
현직과 이호로부터 집중적으로 들었다.
黃胤錫이 한양에서 매일 듣는 지식 정보와 지적 동향은 그 범위가 넓고
신속했다. 橫城에 사는 安錫儆․安錫佺․安錫任 3형제에 대한 소식도 들
었다. 석경은 古文과 筮仕에 능하고, 석전과 석임은 易學에 뜻을 두고 공
부하는데 高攀龍이 편찬한 啓蒙翼註 全帙을 사방으로 구하고 있지만
못 구했다는 소식을 듣는가 하면, 安鼎福․李吉煥․尹東奎 같은 남인들의
학문과 저작에 대해서도 듣고 있었다. 또, 근래에 완성된 文獻備考의 輿
地考의 후일담까지 신속히 듣고 있었다. 11월 21일자 일기를 보면 文獻
備考의 輿地考는 申景濬이 수찬했지만 실은 柳馨遠ㆍ金崙ㆍ安鼎福ㆍ韓
百謙의 諸說을 사용한 것인데, 신경준이 안정복의 私藁를 활용하고도 그
공을 안정복에게 돌리지 않아서 안정복이 크게 화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黃胤錫이 한양에 와서 경화사족들의 장서에 감탄한 것은 徐浩修 家에서
였고, 洪啓禧 家에 대해서는 서적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 들었다. 그리고
경화사족도 각자의 지적 관심에 따라 소장하는 도서에 차이가 있음을 알
게 되었다. 10월 23일에 黃胤錫은 종부시 신임 이제조인 泥洞의 元仁孫에
게 인사를 갔다. 원인손 집에 장서가 제일 많다는 얘길 듣고서 조만간 책
을 빌려보고 싶다고 하자 자신은 文章家者流만 소장하고 있다면서 완곡히
거절했다. 黃胤錫이 算學이나 律曆 분야에 관심이 있음을 알고서 말했던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21
것이다. 아무튼 黃胤錫은 경화사족들의 장서와 정보력에 일종의 문화적
충격5)을 받았지만, 그러나 본인의 학문적 역량과 열정적 노력으로 홍계희
와 서호수에게서 모두 인정을 받았다. 홍계희로부터는 朱子大全을 鄕板
으로 다시 인쇄할 때 교정을 봐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서호수로부터는
文獻備考의 象緯考 編輯 可否를 논의하자는 요청을 받았다. 무엇보다
도 이해에 主上으로부터 ‘박학하다’는 칭찬을 4차례나 들었다. 5월 7일과
16일, 9월 9일에는 직접 들었고, 10월 27일에는 주상이 자신을 박학하다
고 칭찬했다는 소식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1770년은 黃胤錫이 도서 열람 및 필사와 구입 활동이 그 어느 해보다도
활발했던 해이면서 한양의 문화와 지적 분위기에 내심 놀라고 자극을 많
이 받았던 해이다.
(4) 1771년, 宗簿寺 直長으로 근무하다가 呈辭하고 故鄕에 다녀옴
월일
대출
경로
저자 도서명
가격
문의
필사/
구입
비고
01.07 金用謙
淸人爵秩全覽乾隆癸
未春季 印本 1부 3책
열람 김용겸 어른이 보내줌
01.25 閔鏽南溪禮說 1질 10책
열람
초록
방문하여 빌림
01.27
李命贊
(海運君
의 子)
金大谷
易學圖解 全帙
5책의 首冊
열람 이명찬이 빌려줌
02.18 金用謙甲申淸曆 一本열람 내게 두라고 하심
5) 문화적 충격이라고 할 만한 일은 한양의 쟁쟁한 가문의 선비들이 과거장에 편리하게
휴대하기 위해 사적으로 돈을 모아 도서를 인쇄하고 제작한다는 소식도 포함된다.
1770년 1월 21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黃胤錫, 頤齋亂藁 3책 24면.
“是午, 往訪沈碩士有鎭相語…… 又言: 東村蓮池洞, 近有書坊印役, 蓋故臺臣朴致隆
之子, 與趙統相德濬之子及諸人, 相約同事, 各出十兩錢, 先以鐵字, 印四書三經, 取便
科場. 其大小長廣, 與奎璧唐本, 相稱. 蓋早出十兩, 則所印書, 各一部, 猶可復有餘力,
更及於他書, 將次第印出耳.”
122 第53輯
02.23
≪萬國全圖≫와
≪赤道線南北兩圖≫
(手褙하고 裁粧하여
2책으로 만듦)
03.15
~16
金致九
溯源譜 (丁氏와
金氏 두 집안의
家譜를 略錄)
열람
略錄
<押漁丁氏直派>로 略錄함
<商山金氏 系略>
03.17 李顯直
鄭瑄
李瀷
昨非齋日纂 20책
<八道山水摠論>
<名談勝錄>
<名士大夫可居地記>
열람
필사
이현직을 방문
이익의 글을 3월25일 필사
03.24 金致九
演機新編 下二卷
文獻備考의
「新樂考」
대출
필사
演機 別本 가운데 下二卷에서
缺한 三板을 베껴 보완하고자 함
03.27
~29
金用謙
洪武正韻 全帙 5冊
16卷 (洪啓禧 대감이
사용하던 古唐本)
열람 후
평가
편지로 빌려달라고 요청
04.06
~07
金致九
(內兵曹
소장본)
金鍾秀가
편집
鄭存謙의
所管에
徐命膺이
대신함
文獻備考의 禮考
6책, 文獻備考의
樂考 4책
대출
열람 후
<樂考
略鈔>
4일에 빌려달라고 편지 보냈음
04.25 金用謙四聲通解
대출
필사
04.28 李顯直算學統宗 1帙
대출
필사
방문하여 빌림. 05.18일 필사
04.30 徐有防玄尙璧舟中錄
대출
요청
빌려달라고 편지함
05.13 魚錫九咸從世稿 4책 印本대출 어석구가 가져와서 보여줌
05.25 金致九袁中郞石公集
대출
열람
김성범이 보내줌
06.14 金致九翰林先生案
대출
열람
김성범이 빌린 것을 다시 빌려봄
06.16 金致九
七政算, 「內篇」
上ㆍ中ㆍ下 3책
碩士 金鍾純을 통해 보내줌
07.03 李頤命疎齋集
열람
초록
여러 가지를 抄함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23
07.04 李健命寒圃齋集
열람
초록
漢江에 관한 이야기를 抄함
07.05 金履長
疎齋․寒圃․二憂․
三集 도합 18冊
열람
초록
편지로 빌려달라해서 보고 돌려줌
07.09 李顯直
演機新編 3책
(顯宗 乙巳年에 相公
에게 內賜)
대출
필사
이현직이 洪沂川 相公 後孫 稷猷
에게 편지 보내 빌려옴
11.02 文德演
崔祏俟百錄 1부
(原冊과 함께 김용겸
어른댁에 있다고 함
필사
부탁
내가 베껴달라고 여름에 부탁했
었음
앞서 1770년은 文獻備考와 관련된 도서 열람 및 대출과 초록, 필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면, 이해에는 다시 黃胤錫의 원래 학문적 관심으
로 독서 비중이 늘어난 것이 보인다. 黃胤錫에게 책을 많이 빌려준 사람은
여전히 김용겸의 인맥과 관직 생활의 인맥이다. 이현직은 앞서 소개했고,
병조좌랑 金致九는 黃胤錫의 戚叔인 安致宅(1702~1777)의 사위로서 평
소에 가까이 알고 지낸 인물이며, 黃州牧使 金履長(1718~1744)은 김용
겸의 좌상에서 우연히 인사를 나누게 된 인물이다. 李命贊은 宗簿寺 一提
調인 海運君 李槤(1708~1774)의 아들이다.
이해에 黃胤錫은 과거시험의 부정부패가 소문이나 예상보다 심각하다
는 것을 깊이 실감하였다. 2월15일에는 어떤 과거장에서는 시험일 하루
전에 이미 科題가 전파되었고, 황해도와 평안도의 큰 부자들이 榜中에 포
함된 것은 모두 뇌물에 연유한다는 소문을 듣고 기록하고 있다. 과거시험
만이 아니라 관료들의 승진도 마찬가지 상황이라 기운이 빠졌다. 새 급제
자인 金鍾善은 원래 金致恭이지만 金致彦에게 出繼하여 지금 領相에겐
조카가 되는데, 어제 이미 直通으로 兵曹正郞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
다. 김종선은 작년에 黃胤錫이 그토록 구입하고자 애썼던 律曆淵源 1질
을 한발 앞서 구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124 第53輯
6월 22일에 黃胤錫은 陞六하여 司圃署 別提로 옮겨가고, 그 다음날 주
상에게서 다시 박학하다는 얘길 들었다고 말씀하신 것을 직접 듣는다. 黃
胤錫은 呈辭를 내고 고향에 다녀오지만, 휴가 기일을 어겼다는 이유로 해
직되고 말았다. 막막해진 黃胤錫은 10월12일에 雙湖로 趙晸을 찾아가봤
지만 조엄이 이조판서가 되면 반드시 복직될 거라는 얘길 듣는다. 그리고
그달 29일에 부친의 병환 소식을 듣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겨울에 부친
상을 당한다. 고향으로 가면서 鄭景淳에게 작별 인사하러 갔을 때 그에게
서 벌열들이 과거를 독점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지만 黃胤錫은 이미 과거
는 포기했다고 답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이해에는 도서 대출 및 필사 목
록이 앞의 해처럼 많지 않았다.
이상의 연도별 도서대출 및 필사 목록을 보면, 黃胤錫의 한양 생활과 학
문 발전에 가장 지속적이고 우호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金用謙이었다. 그
는 黃胤錫의 재능과 학문을 신뢰했으므로 여러 인사들을 만나게 해주었고
수많은 서적을 기꺼이 빌려주었다. 李顯直과 沈有鎭을 만나게 해줌으로써
律曆 분야의 수많은 인사들에 대해 근황이며 공부의 깊이를 알 수 있게
했고 발을 넓혀주었다. 1769년에 黃胤錫이 빌려본 책의 대부분이 김용겸
이 빌려준 것이지만, 그 해 뿐만 아니라 줄곧 김용겸은 黃胤錫이 보고 싶
어 하는 책들은 물론이고 黃胤錫이 모르고 있는 서적들도 자발적으로 먼
저 보여주곤 했다. 그리고 관료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에도 종종 담백한
조언6)과 격려7)를 아끼지 않았다.
6) 김용겸은 黃胤錫의 교유 인물과 서적구입 같은 것까지 솔직하게 조언을 해주었다.
1768년 6월 28일에 黃胤錫이 자신은 당색이 같지 않은 소론인 鄭弘淳의 추천을 받고
師門이 서로 먼 徐志修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니 그들과 정의가 두텁게 지내도
괜찮겠냐고 묻자 김용겸은 왕래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답했다. 다만 소론이더라도
鄭景淳만은 별 혐의가 없고 깨끗하니, 자네도 나도 상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1770년
4월 19일에는 律曆淵源을 70냥에 구입하려고 하니, 객지에서 지내면서 그렇게 비싼
책을 무리하게 구입하는 것은 너무 오활하지 않은가, 장차 전토를 팔아서 빚을 갚을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25
3. 한양의 지적 분위기와 黃胤錫의 도서 구입
黃胤錫은 스승인 渼湖 金元行으로부터 몇 차례에 걸쳐 직접적, 간접적
으로 충고를 들은 바 있었다. 1764년 7월 25일에는 “博雜한 지식에 뜻을
두지 말고 한 가지 뜻에 전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고,
1766년 4월 12일에는 미상으로 갔다가 詞章儒가 되지 말라는 말씀을 직
접 들었다. 그해 10월 5일에는 金士謙으로부터 스승이 黃胤錫에 대해 文
詞의 浮華함을 끊고 실질의 공부[實工]에 힘쓰지 않는다고 걱정하신 말씀
을 전해 들었다. 1769년 4월 10일에도 金士謙이 “가만히 丈席[金元行]의
의중을 살펴보니, ‘永叟(黃胤錫의 자)가 진실로 經學에 전념한다면 앞으
로의 성취가 어떠할지 알 만하다. 그런데 단지 文詞의 浮華를 면하지 못하
고 근년에는 또 벼슬에 종사하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참으로 애석해 할만
하다.’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8)라고 전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黃胤錫은 이렇게 일기에 썼다.
“아! 내 본디 ‘안을 향하는[向裡]’ 공부에 전념하기 싫어하는 자는 아니
나, 또한 이것을 標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어찌 부화한 문장에 힘쓰
것인가 라면서 만류하였다. 이후에 물론 黃胤錫이 律曆淵源을 볼 수 있도록 빌려주
었다.
7) 1769년 11월 14일, 黃胤錫을 벼슬길에 오르도록 추천해 준 사람 중 한사람인 참판
李最中이 조정에서 彊域志를 만드는 일을 맡아서 黃胤錫에게 도와달라고 직접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하자 김용겸이 그런 식으로 일을 하는 것은 재상이 선비를
대하는 예가 아니라고 말했다. 김용겸의 조언을 듣고 黃胤錫은 이 일을 거들지 않았다.
공식적인 역할과 직함 없이 사적인 심부름을 하듯 돕는 것을 거절한 것이었다. 1770년
1월 13일에 김용겸은 黃胤錫에게 文獻備考 편집 일을 맡은 堂郞들 중에 자네보다
나은 사람이 있지 않다고도 말했다. 일이 진행되면서 실무의 상당 부분을 黃胤錫이 했으
니, 그 칭찬은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용겸은 黃胤錫이 관직생활을 순조롭게 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었을 뿐 아니라 경우에 바르게 예우함으로써 격려했다.
8) 黃胤錫, 頤齋亂藁 2책, 383~384면. “士謙言: ‘窃觀丈席意下, 似謂: 永叟, 苟專意
經學, 前頭進就何可知也. 但未免文詞浮華, 近年, 又從官, 奈何? 殊可惜也.’”
126 第53輯
는 자이겠는가? 어찌 微官에 얽매이는 자이겠는가? 세간에서 나를 사랑해
주는 이는 오직 丈席뿐이건만, 사는 땅이 왼쪽에 치우쳤고 몸에는 병이 있
어 날마다 조용히 陪侍하지 못하니, 혹 밝게 살펴주심을 얻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홀로 궁색한 길 위에 서 있으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9)
黃胤錫은 누군가가 학문의 연원을 물을 때마다 한결같이 性理大全에
심취했고, 그로 인해 비로소 과거 공부 이외에 聖賢의 學問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답했다.10) 그것은 젊어서 공부하던 시절에는 사실이지만, 벼슬
길에 올라 그가 필사하고 구입하며 열독한 서적들은 거의 대부분이 스승
이 누누이 만류했던 ‘박잡한 지식’에 관한 서적들이었고 ‘事實 考證’에 필
요한 서적들이었다.
그는 1768, 9년에 다음과 같은 몇 종의 책들을 구입하려고 노력했고, 구
입했다.
날짜
정보
제공
서쾌[책주름]
책 목록
책값

사람
돈 마련
대책
비고
1768년
08.05
幾何原本,
數理精蘊
의영고書員 金興大가 그의 아
우가 이번에 연경에 가는 편
에 구입 부탁하겠다고 하여
부탁함
10.20 曆象考成 全帙
安正言이 이번 冬至上使 宗室
順義君과 친하니 그편에 구입
해주겠다고 말함
1769년
05.22
北關誌 3錢5分
저자에서 구입
北界故事 가 있어 후일에 살
펴볼 수 있기 때문
9) 黃胤錫, 頤齋亂藁 2책 384면. “噫! 余固非不欲專意向裡者也. 亦不欲以此標榜耳.
豈騖於浮華者乎? 豈縛於微官者乎? 世間愛我, 惟丈席是耳, 而地左身病, 不能日從容
陪侍, 宜乎或未蒙照察也. 獨立窮途, 可勝歎哉?”
10) 구만옥(2009b), 221면 참조.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27
10.04
高攀龍의 遺書2권
(我國活字飜印本) 3권 합계
5錢
저자에서
立新節用和國寶藏
(日本冊 1책)
10.12 沈有鎭唐詩品彙
심유진이 아는 冊牙人을 통해
구입 문의
北關誌는 李植이 북평사로 있을 때에 함경도 북부 지방의 각 郡邑誌
를 모아 편집에 착수한 것을 그 아들 李端夏가 계승하여 완성한 북관의
읍지인데, 그가 이것을 구입한 것은 北界故事가 있어서 후일에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고증을 하기 위한 참고용 도서였던 것이다. 高攀龍
(1562~1626)의 遺書는 高子遺書로 고반룡의 문집이다. 立新節用和
國寶藏은 1713년에 초판이 나온 일종의 사전류 서적이다. 이 책의 내용
을 별도로 확인하진 못했으나 일본에서 서민교육을 위해서 다양하게 편찬
된 절용집류의 하나로 추정된다. 그리고 구입하고자 문의했던 唐詩品彙
도 사전처럼 방대한 唐詩 選集이다.
이 해 12월 3일에 柳主簿가 黃胤錫의 처소에 방문하여 지금 세상에 누
가 能文博學한 선비인가를 얘기했는데, 유주부는 黃景源은 能文하고 洪
啓禧는 博學한데 黃直長은 능문에다 박학을 겸했다라고 답했다.11) 黃胤
錫은 언제나 성리학을 표방하며 性理大全을 말했지만, 한양에 와서 관
료생활을 하면서는 한양의 지적 분위기에 그대로 경도 되어 博學한 선비
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 점을 생생히 보여주는 것이 律曆淵源 구입 과정
이다. 黃胤錫은 1770년 4월 15일에 책 주름들로부터 唐本 律曆淵源을
살 수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6월 3일에 단념하기까지, 그리고 다시
11) 黃胤錫, 頤齋亂藁 2책, 650면. “余問柳主簿曰: ‘今世能文博學之士, 公論當擧何
人?’ 柳曰: ‘以通顯者言之, 黃台景源, 洪台啓禧, 一則可謂能文, 一則可謂博學矣, 但吾
近聞惟黃直長, 旣能文, 兼以博學耳.’ 余笑曰: ‘生長鄕僻, 豈能文博學耶?’”
128 第53輯
그 책이 어디로 팔려갔는지 알게 된 6월 14일까지, 총 2달을 맘 졸이며
동분서주 했다. 이 과정은 黃胤錫에게 매우 소모적인 경험이기도 했지만
그 후로 도서 구입을 위해 이런 열정을 보인 적도 없다.
그가 이 책을 이토록 구입하고자 했던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평소
학문적 관심이 깊은 책이라 주변에서 빌려보고 종종 토론을 했던 책이었
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을 구해서 남쪽으로 돌아가 四壁에 책을 쌓아두고
때때로 완상하며 그 사이에서 생을 마치기를 바랐을 만큼 이 책에 굉장한
소유 열망을 품었다. 둘째는 당시 한양의 지적 흐름 속에 어떻게든 뒤처지
고 싶지 않은 지적인 생존 열망 때문이었다. 4월 21일에 임성만(林成滿)
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쓴 편지에서 밝히고 있듯이 한양에서는 “세상의
총명 특달한 자는 거의 그 책을 궁구해보고자” 하는 분위기였으며, 李文兼
(문겸은 李勉의 字)이 편지로 알려준 내용과 같이, 上舍 林啓濬은 齋洞
金時黙 대감댁에 가서 이 책을 사기 위해 집을 팔려고 했다는 소문이 들
리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처음에는 자신에게 책값을 과도하
게 부르는 것조차 명예롭게 여기고 좋아하면서 어떻게든 돈을 빌릴 수 있
기만을 바랬다. 사방에 편지를 쓰고 사람을 보내고 초조히 기다리면서 공
금이라도 우선 빌려 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면서 한 달 이상의 시간을 맘 졸이며 보내는 동안 차츰 현실에 대해
물정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첫째,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는 김용겸 어른이
“객지에 있으면서 너무 오활하지 않은가, 장차 전토를 팔아서 빚을 갚을
것인가?”라고 하신 것이 적잖은 충격이었다. 둘째, 책값이 120냥부터 50
냥까지 오르내리는 가격에 대해 빚을 내서 구입하려는 처지에서는 신뢰하
기 어려웠다. 셋째, 북경 현지와 가격을 비교해 볼 수 있게 되면서 책값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黃胤錫은 1770년 6월 2일 일
기에 이렇게 썼다.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29
“지난 해 북경에 갔던 사신들이 500권의 책을 구입해 왔는데, 銀 70냥
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 권에 1錢 4分 꼴이다. 唐銀 1냥은 本國
돈 3냥에 해당하니, 한 권이 4錢 2分인 셈이다. 冊主가 이 책을 귀한 것이
라 일컬으니 값을 배로 하여 8전 4푼으로 친다 해도, 모두 69권이니 55냥
이면 충분할 것이다.”12)
그는 가격에 대해 이런 추정과 확신을 가지고 다시 흥정했고, 그것이 받
아들여지지 않자 공금을 빌려서라도 책을 구입하려던 생각을 깨끗이 단념
했다. 그 과정을 일정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날짜
정보
제공
서쾌[책즈름]
책 목록
책값 팔 사람 돈 마련 대책 비고
1770.
04.15
冊牙人
朴師億․朴
師恒 형제
및 李遠福
등 3인
冊牙人 朴師億․
朴師恒 형제 律曆
淵源 1大帙 70책
(曆象考成 上下
二編 兼 表, 律呂
正義 上下 續三
編, 數理精蘊 上
下 二編 포함하여
이상 摠 100권)
책 120냥
책 주름
수고비10냥
합계 130냥
참판
金善行家
1) 鄭得煥家에 빌릴 예정
2) 本寺書吏 趙德藺을 불
러 참의 李益焌家가
빌려 보라고 당부
이 책을 구해서 남쪽으로 돌
아가 四壁에 圖書를 쌓아두고
때때로 완상하며 그 사이에서
생을 마치기를 바람
李子敬이 와서 싼 편이고 드
문 기회이니 사라고 당부
04.16
李灝가 돈을 빌려오겠다
고 함
04.17
冊牙人
朴師億
재방문
심념조에게는
50냥으로, 黃胤錫
에게는 130냥을
부름(黃胤錫은 “내
가 책을 사랑 하여
값을 깎지 않는
까닭”이라고 해석)
金履祥
1) 승지 趙晸에게 政院
직중으로 편지를 보
내 호조나 군문에 돈
을 빌려줄 것을 요청
2) 鄭士良에게 편지를 보
내어 돈을 좀 빌려달
라고 함
3) 韓基孝 군의 거처로
편지를 보내어 책값
을 빌려 달라고 요청
그믐이나 초하루까지 구입일
자 유예 부탁
생원 李灝가 책의 원주인인 金
履祥에게 책값을 다시 확인해
주겠다고 함
12) 黃胤錫, 頤齋亂藁 3책 208면. “似聞: 北京上年使行所購書五百卷, 用銀七十兩, 一
卷直一錢四分. 唐銀一兩, 當本國錢三兩, 則一卷直, 或四錢二分, 冊主若以此冊稱貴,
要得峻價, 則依此倍之, 錢八錢四分, 而六十九卷, 當直錢五十五兩有餘.”
130 第53輯
04.18 생원 李灝
책 주인은 冊牙人 들
이 책값을 52냥으로
결정했다고 전함
권당 1냥씩 70냥
있어야 구매 쉬울 것
04.19 생원 李灝100냥
金履祥이
결정한
가격이라
고 함
종부시 서리배들이 빚돈
내는데 성의를 다하지 않
아 답답하고 불쾌함
이호가 심부름꾼을 시켜 律曆
淵源 首卷을 보냄
김용겸 어른께 律曆淵源 구
입 의사를 말씀드리니, 金履祥
의 집이 점점 가난해진다고 했
는데 지금은 책을 파는 것을 보
니, 과연 그러하다고 하며, 나
에게 객중에 있으면서 너무 오
활하지 않은가, 장차 전토를 팔
아서 빚을 갚을 것인가 물어봄
04.21 李文兼
林成滿에게 편지(근년에
律曆淵源 1大帙을 중
국으로부터 구입해 들어
왔는데 세상의 총명 특달
한 자는 거의 그 책을 궁
구해보고자 한다. 나에게
그 책을 살 돈을 빌려줄
것을 간곡히 부탁)
與林成滿書
上舍 林啓濬이 齋洞 金時黙 대
감댁에 가서 律曆淵源을 사
려고 집을 팔려고 한다고 이문
겸이 편지로 알려줌
04.23
冊牙人 朴師恒
․李元福 등
律曆淵源 首卷을 찾아감
04.24
李生[李灝]이 李仁海家에
돈을 빌리러 갔다가 빈손
으로 돌아옴
李灝가 春川妹家에 가서
妹夫 李君(故李相馨의 손
자) 100냥 돈을 빌려 다
음 달 초 5일에 돌아오겠
다고 함
04.25
冊牙人
朴師恒 등
3인
冊牙人 朴師恒 등
3인
책 주인에게 李顯直이 와서 값
을 묻더니 너무 비싸다고 하니,
京人에게 팔고 싶지 않고, 鄕人
에게 팔고 싶으니 기한을 늦추
겠다고 했다함
04.28
冊牙人
朴師恒 등
冊牙人 朴師恒 등
律曆淵源 1권을 다시 가져
다줌
05.03 沈有之冊儈 裵景度
심유지가 사람을 보내 배생이
律曆淵源을 양쪽에 값을 속
여 부르는 듯 하니 다시 廉價로
정하라고 말을 전함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31
05.03 沈有之冊儈 裵景度
심유지가 사람을 보내 배생이
律曆淵源을 양쪽에 값을 속
여 부르는 듯하니 다시 廉價로
정하라고 말을 전함
05.04 冊儈 裵景度80냥
배생이 또 심유지의 편지를 가
져옴. 책 주인과 값을 80냥으로
정했으니 오직 신속 구입 바람
05.06 李灝가 왔는지 확인
05.11
李灝가 돈을 빌리는데 실패.
이호가 안국동 金聖福에게 우
선 돈이 없으니 김성복이 먼저
사두라고 부탁했다고 함
05.17
沈有之에게 편지를 보내 고향
에 갔다가 다음달 20일경에 돌
아올테니 裵生이 처음 약속을
지키도록 해달라고 당부
06.02
沈有之
종부시 서리
劉成郁
官錢 유용 유혹 : 아전과
종들은 내가 서책 구입에
癖이 있음을 알기에, 오
늘은 官錢을 나누어 지급
하는 날인데 70냥돈을 책
값으로 貸納하고자 우선
기다리라고 명함
심유지에게 책의 소재 문의
劉成郁이 북경 구입가에 비하
면 1질 가격 60냥은 구매가로
좋다고 답함
06.03
沈有之를
방문
책 주인
에게 우선
55냥으로
재흥정하
다 실패
律曆淵源 구입을 단념
관전을 나누어 주라고
지시
06.14
승지
金致恭의
次子
75냥
金致恭 집에서 律曆淵源 69
권 1 대질을 구매했다니, 책도
주인이 아닌 곳에 잘못 갔다고
논평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흥정과정에서 드러나는 서울 선비와 지방 선비
에 대한 인식이다. 책 주름들이 북경 사정을 잘 알고 드나드는 沈念祖에게
는 50냥을 부르고, 黃胤錫에게는 130냥을 부른 것이라든가, 책 주인도
“책값이 비싸다고 말하는 서울사람[京人]에게 팔고 싶지 않고, 시골사람
[鄕人]에게 팔고 싶으니 기한을 늦추겠다.”고 말했다는 점에서 인식 차이
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양반도 아니고 黃胤錫처럼 책을 깊이 읽거나
132 第53輯
공부한 경우도 아닌데도 徐命膺을 따라 연행을 다녀온 종부시 서리 劉成
郁은 현지 책값을 알기에 “북경 구입가에 비하면 1질 가격 60냥은 구매가
로 좋다”고 단호하게 가격 평가를 할 수 있었다.
律曆淵源이란 도서 구입 상황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이 가
장 잘 보여주는 것은 18세기 후반 한양의 지적 동향이랄까, 분위기이다.
청나라에서 수입되어 들어온 새로운 서적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
고, 경학이 아니라 律呂․曆象․算數 같은 분야의 학문에 양반층들의 관
심이 쏠리고 있다는 것이다. 왜 경학이 아니라 수리․역법․천문 같은 분
야의 학문에 양반층들의 관심이 쏠리게 되었는가? ‘西學熱 現象’13)과 관
련이 있다. 順菴集에서 인용한 말대로 “서양서가 선조 말년부터 우리나
라로 들어왔으며 名儒碩學들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구만
옥은 조선 사회에서 서학서 유통 현황을 적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黃胤錫을 지목했는데, 필자도 공감한다.
黃胤錫은 언제부터, 왜 이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 黃胤錫이 性
理大全과 함께 율역학에 관심을 둔 것은 어렸을 때부터였다. 그는 西洋
曆法을 공부해서 國朝의 典故를 완비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다.14) 따라서 그의 박학적 학문 취향 역시 어렸을 때부터였으므로 앞서 제
시하였듯이 스승으로부터도 동학으로부터도 잡학에 흐르지 말라는 당부
를 일찍부터 들었다. 그런데 黃胤錫이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가진 중요한 동
기에는 우리나라의 학문적 흐름에 대한 나름의 진단이 작용했음을 볼 수
있다. 1766년 6월 25일에 李心海(李運海가 개명한 이름)에게 연경 가는
인편에 數理精蘊과 曆象考成을 구입해달라고 부탁한 편지를 보면,
“우리나라는 3백 년 동안 儒家들이 경학과 예학과 사장학에 있어서는 옛
13) 구만옥(2009a), 128면 참조.
14) 구만옥(2009a). 참조.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33
道에 쏠렸다고 할 만합니다. 오직 算數와 曆象에 있어서는 한두 사람도
그 울타리를 엿보지 못했습니다.”15)라는 진단이 나온다. 자신도 예외가 아
니지만, 궁벽한 전라우도에 거처하고 있다 보니16) 책을 구할 수가 없다면
서 간곡히 도서구입을 부탁하고 있다. 黃胤錫은 算數와 曆象 분야가 새롭
게 개척해야 할 유망한 학문분야라는 진단을 했던 것이다. 그가 한양 생활
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만나고자 애썼던 사람들은 사실은 이 분
야에서 이름난 학자들이었다. 결국 그는 이런 책들을 구입하지 못하고 나
중에 빌려서 필사했다.
그 외에 黃胤錫은 1770년에는 漢學老乞大와 韻府群玉을, 71년에는
理學宗傳을 구입했다. 둘 다 성리학에 관련된 서적이 아니었으며, 그가
구입하겠다고 했으나 판매자가 팔지 않겠다고 해서 구입에 실패했던 책은
安命老가 편찬한 병서인 演機新編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명나라 황실의
보훈을 수록한 皇明列朝寶訓이나 朱憙ㆍ張載 等의 말을 引用하고 歐陽
修와 蘇東坡의 글을 편집한 鶴林玉露 같은 서적 구입은 돈이 없다고 사
양했다는 점이다. 이런 서적들은 그에게 새롭지 않았던 것이다. 黃胤錫이
스스로 늘 얘기했듯이 일찍이 性理大全에 심취했고 만년에도 경전이며
性理大全에 대한 공부를 했지만, 이 시기에 구입한 서적들과 구입하기
15) 黃胤錫, 頤齋亂藁 1책, 「與李察訪(心海)書」, 605면. “竊念我東三百年, 儒家者流,
其於經禮詞章之學, 可謂駸駸然古道矣.…… 惟是算數曆象, 未有一二窺其藩籬.”
16) 黃胤錫이 자신이 서적 정보가 늦고, 또 맘대로 구입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한 것은 여러 군데서 볼 수 있지만, 한양과 지방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탄식한 곳도
있다. 1766년 3월 15일에 徐浩修의 집을 방문하고, 서호수가 律曆淵源, 幾何原本,
同文算指 같은 책부터 八線眞數와 三角比例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을 보고 ‘참으로 사람은 京華에 살아야 하는구나!’라고 탄식하였다. 그는 몇 해 뒤에
이런 책들을 정철조나 홍대용, 金種秀(1728~1799)을 통해 빌려서 필사했다. 만년에도
그는 전라도 같은 窮鄕에서는 이런 책을 구할 수 없으니 서울에서 구입해달라고 부탁
하는 편지를 썼다. 이 부분은 구만옥(2009a) 각주 34)와 76)번에 인용되어 있다.
134 第53輯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은 서적의 목록을 보면 그런 서적들이 아니었
다. 이런 현상이야말로 그가 한양에 와서 경도된 지적 분위기가 어떤 것인
지를 알게 해준다.
날짜
정보
제공
서쾌[책주름]
책 목록
책값

사람
돈 마련 대책 비고
1770년
02.25
~30
漢語老乞大新
釋, 諺解 4책
1냥 8전
5푼
校書舘 印出匠 韓巨福에게 명하여 印納
04.09 李灝
登壇必究初匣
(本冊은 4匣,
1갑에 각 8권)
이호가 사려면 사라고 권함.明나라 王
鳴鶴이 편찬한 병서
10.25
李子敬
[李顯直]
皇明列朝寶訓
鶴林玉露
돈이 없다고 사양함 그래도 한번 보여 달라고 부탁
11.29 冊儈 朴生
韻府群玉
10卷
3兩半구입 예정 내일 오후에 全帙을 가져오라
11.30
구입
종부시에서 돈 3兩 5錢 빌림
10권 중 제 10板이 없음
他本을 빌려 謄補해야 한다 함
1771년
03.05
李生
[李灝]
演機新編 3책 구입 실패 팔지 않겠다 한다고 돈 9錢을 돌려줌
05.17 四聲通解 2책 印出에 필요한 물품 값을 줌 校書館 印出匠 黃運昌에게 명하여 印納
06.10 金鍾俊
四書解義
13권(康熙
丁巳年에 所序)
2兩半일간에 팔겠다고 하여 내가 사겠다고 함
06.11
正言
金聖範
理學宗傳
(16책)
3냥 京人15일에 5전 보냄
김정언이 서울 사람이 팔려고 내 놓은
것으로 값이 4냥인데 1냥 깎아 3냥이니
살만하다고 함
黃胤錫이 한양에 와서 이런 수많은 책을 빌려 열독하고 필사하거나 구
입하려고 애쓰는 동안에도 ‘박학’의 경향을 도리어 우려하는 충고들은 계
속되었다. 1771년 1월 3일에는 우연히 興德縣監을 만났는데 그는 黃胤錫
에게 지금 이후로는 六經이라도 周易은 읽지 말고 六藝라도 算學은 연
구하지 말고 皇極經世나 律呂新書 같은 종류는 모두 내버려두길 바
란다고 하였다. 17) 이런 문자들은 雜術이 된 지 이미 오래고 문장에도 無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35
用하니, 이런 것으로써 이름을 얻는 것은 화(禍)를 취할 뿐이라는 이유였
다. 이런 충고들은 18세기 영남에서 四書를 중심으로 공부할 것이냐 六經
을 중심으로 공부할 것이냐 같은 주제로 심각한 논쟁18)이 일었던 것을 연
상케 한다.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학문의 방향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18세
기 후반의 경우에는 확실히 한양과 지방 사이의 학풍이랄까 지적인 흐름
에 일정한 지역차가 감지됨을 부정할 수 없다.
4. 맺음말
黃胤錫이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한 陞六 이전 4년 동안 그가 필사 및 구
입한 도서를 보면 은연중에 경향 간의 지적 분위기에 차이가 감지된다. 지
방에서는 여전히 과거를 염두에 두고 經學과 詞章學에 신경을 쓰고 있는
데, 한양에서는 청나라를 통해 유입되는 西學 관련 서적을 비롯하여 온갖
정보를 고증할 수 있는 사전류의 도서와 그 지식이 유통되고 있었다. 특히
청나라나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적과 지도, 劉松齡이라는 서양인에 대한
관심은 黃胤錫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황윤석이 한양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한 초기 4년 동안 도서를 대출하여
열람하고 필사한 경로 및 구입한 경로를 살펴보면, 주로 김용겸을 비롯한
노론 인맥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다음이 소론, 그 다음이 근기 남인들이
었다. 1774년 “黃直長은 관직을 少論 사람에게서 얻었지만 끝내 少論 집안
에는 드나들지 않는답니다.”19)라는 말을 본인이 다시 소문을 듣고 기록해
17) 黃胤錫, 頤齋亂藁 3책, 503면. “惟願自今以後, 六經之中, 雖周易勿讀; 六藝之中,
雖算學勿究. 以至皇極經世․律呂新書之類, 亦幷捨置, 此等文字, 無眼者指以爲雜術,
已久矣. 文章之無用, 尤可驗矣, 以之得名, 因或取禍, 士亦何必博學然後, 取功名乎?”
18) 이지양(199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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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정도가 되었다. 그런 말이 생겨난 이유는 황윤석의 학문적 관심에 노론
쪽 인사들이 주로 서적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었다. 文獻備考 편집 당상
관인 宗簿寺 二提調 鄭存謙(1722~1794)을 도와 실무를 담당하느라 官의
도서를 많이 활용하게 되었으며, 또 학문적 관심도 노론 인사들과 맥락을
같이 한 탓에 그가 빌리고자 했던 도서를 빌릴 수 있었던 통로가 대개 노론
층 인맥으로 통했다. 전체적으로는 金用謙의 호의와 도움이 매우 컸다.
그는 한양으로 벼슬살이 온지 4년 만에 주변의 선비나 관료들로부터 ‘百
家九流에 博識精解’하다는 평판을 들었고, 1770년 5월 7일에는 주상으로
부터 “내가 일찍이 너의 박심함을 들었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리고 大統
曆을 어째서 時憲曆으로 바꾸었는지 하문한 데 대답함으로써 “과연 박식
하다”는 인정을 받았다. 같은 달 16일에 다시 주상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국초 도성 안의 궁궐명호와 그 장소를 묻는데 답변하였다. 그해 9월 9일에
는 9월 7일에 주상이 경연에서 黃胤錫이 아직도 知遇를 입지 못했음을 염
려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성은에 감격하여 자신의 현재가 있기 까지
를 회고하는 일기를 썼다.
黃胤錫의 학문적 관심은 한평생 깊이를 더해가며 지속되지만, 도서구입
과 필사에 대한 열의는 그가 한양으로 온 초기 4년만큼 뜨겁진 않다. 1768
년~1771년 시기의 황윤석은 비록 관품이 낮은 7품직에 있었지만 주상에
게까지 박학함이 알려져 칭송을 거듭 들었을 만큼 그는 인정을 받았다. 그
것은 오로지 그의 박학에 대한 열정 덕분이었다. 그가 박학에 이토록 열정
을 보이고 노력한 이면에는 한양이라는 도시의 지적 분위기가 확실히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9) 黃胤錫, 頤齋亂藁 4책, 132면. “此邑寓人李命聃者, 出入本衙及興衙. 頃嘗爲興德
兼倅言: ‘黃直長得官於少論, 而終不往來少論家.’”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3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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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knowledge trend of Hanyang and country focused
on Hwang Youn-sek(黃胤錫)'s activities of transcription
and book purchase from 1768 to 1771
Yi, Ji-yang
*
20)
Yijaenango(頤齋亂藁), which are 57-volumed diaries written by Yijae
(頤齋) Hwang Youn-sek(黃胤錫, 1729~1791) for 53 years, include partly
the copies of others' books. The 4 years from 1768(40 years old) to
1771(43 years old) were special time in his life. At this period of life, He
growed from a mere local educated person to an intellectual of great
learning in the urban atmosphere of Hanyang.
This article is focused on Hwang Youn-sek(黃胤錫)'s activities of
transcription and book purchase from 1768 to 1771. And through his
activities, I have studied his intellectual growth and the knowledge trend
of Hanyang and country in this period.
In the second chapter, I present a transcription list by year from 1768
to 1771, and analyse book rental routes and the features of book transcription
list. Kim Yong-gyeom(金用謙) was a person who provided him with
informations about new books and stimulated Hwang Younsek intellectually.
Also he introduced him to Lee Hyeon-jik(李顯直) and Sim Yujin(
沈有鎭) etc.
In the third chapter, I present his book purchase list and purchase
routes per year in this period. And compare intellectual atmospheres of
Hanyang with those of country. The local scholars devoted themselves to
the study of Confucian classics(經學) and the study of classic literature
(詞章學) to pass the examination. But government officials of Hanyang
* Research-professor, Yonsei University,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E-mail : y529@korea.com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139
were absorbed in learning widely by reading the books of Western
Learning and encyclopedic books.
Hwang Youn-sek was also absorbed in transcription and book purchase
at this period of life. The knowledge trend of Hanyang must stimulate
his mental activities.
key words : the people of Hanyang(京人), country people(鄕人), Hwang Younsek(
黃胤錫), Kim Yong-gyeom(金用謙), Western Learning(西學), wide
knowledge(博學), Yijaenango(頤齋亂藁), Yulryeok-Yeonwon(律曆淵源)
본 논문은 2014년 2월 4일 투고되어 2014년 3월 7일 심사 완료하여
2014년 3월 17일 게재를 확정하였음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글쓴이 : 樂民(장달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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