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3. 03:28ㆍ집짓기
'펜화기행-1' 열고관(閱古觀)과 개유와(皆有窩)
'펜화기행-1' 열고관과 개유와
펜화로 그린 복원도를 보고 ‘상상으로 그립니까.’ 하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 하고 사진을 보고 그립니다.
문헌에 기록은 있으나 실물이나 사진이 없는 경우
전문가 고증을 받아 복원도를 그린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 주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앙일보에 연재한 그림은 모두 옛 흑백사진을 기초로 그린 것입니다.
힘든 것은 흑백 사진의 특성상 어두운 부분의 디테일을 구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럴 경우 컴퓨터에 올려놓고 밝기 조정을 하기도 하고,
같은 시기에 지은 다른 건물 사진에서 찾기도 합니다.
훼손된 부분도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 넣습니다.
복원도에는 세밀한 부분이 잘 보이도록 밝기를 조정하기도 합니다.
필요 없는 부분이나 현대에 첨가한 것은 삭제하기도 합니다.
와이드 렌즈를 쓴 사진일 경우 렌즈에 의한 왜곡도 바로 잡습니다.
창덕궁 안정렬 소장에게서 귀중한 자료를 받았습니다.
정조가 공부하던 서재인 개유와(皆有窩)와 열고관(閱古觀) 사진입니다.
창덕궁 후원 부용지 연못 북쪽에는 큰 서고인 규장각이 있었고
연못 남쪽 언덕에 중국책을 보관하던 열고관이 있었습니다.
열고관은 아래 위층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진짜 2층으로 당시에는 보기 드문 건물이었습니다.
법주사 팔상전이 5층이고, 금산사 미륵전과 화순 쌍봉사 대웅전이 3층이며,
화엄사 각황전 등이 2층입니다만 외부만 중층이고 내부는 위까지 터진 통층 건물 입니다.
1928년에 찍은 유리건판 사진이니
열고관은 그 후 일제 강점기에 없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서고인 열고관 2층 창은 들어열개문으로 만들어 통풍이 좋게 하였고,
처마를 길게 하여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2층 밖으로 마루를 덧붙이고 계자각 난간을 달았습니다.
마루를 받치는 낙양각도 크고 화려합니다.
세부 디테일은 같은 시기에 지은 규장각 건물을 참고 하였습니다.
서재인 개유와에 수입도서 서고를 붙여지은 것을 보면
정조의 학구열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이 됩니다.
정조는 무술과 학문 모두 열심히 하여 무술 수준도 높았고,
학문도 신하들에게 강연을 자주 하였다고 합니다.
*중앙일보에 연재한 내 칼럼의 그림과 글을 올렸습니다.
격주 간으로 금요일 색션면인 WEEK &에 연재 하고 있습니다.
오늘(19일)도 새로운 그림과 글이 발표 됩니다.
창덕궁 후원 자유관람과 '펜화기행-1' 에서 발췌 ......
www.slrclub.com/bbs/vx2.php?id=user_essay&no=14101&category=1
SLR클럽
열고관과 개유와 유리건판 사진
▼ 김관수
여유당건축사사무소㈜
문화재실측설계기술자
출처 : 경기신문(http://www.kgnews.co.kr)
열고관,개유와 - 上
어릴 때부터 책 속에 빠져 살아온 정조는 지식의 갈망이 높았다. 노자 도덕경에는 “학문을 하면 할 일이 날로 많아지고 도를 닦으면 날마다 할 일이 줄어든다.”라고 하였듯이 공부를 좋아하는 정조는 왕이 되기 전부터 다양한 지식을 얻기 위해 많은 책을 수집해 오고 있었다.
역사 이래 중국으로부터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아왔지만,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면서 청나라를 배척하고 조선이 작은 중국이라는 소중화사상에 만연하던 조선 후기에는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숙종 말기에 들어서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가 안정화 되면서 청의 서적들을 구매하기 시작하였으나 영조 말기에 청나라로부터 수입한 책에 태조 이성계를 깎아내리는 글이 발견되어 책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하지만 정조는 항상 지식에 갈증에 즉위하면서 좋은 책을 구하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다음 해(1777) 2월 24일(음력) 따스한 봄날 아침부터 까치 울음소리가 궐내에 펴졌다. 울음소리를 들은 정조 서둘러 선대왕을 기리는 여러 제사건물에 가서 예를 올렸다. 정조는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4개월 전 청나라에 진하 및 사은사로 간 이은, 서호수로부터 편지가 도착하여 글을 읽어 내려갔다.
까치 덕분이지 좋은 소식이었다. 기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을 정도로 매우 경사스런 소식은 정조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백과사전을 구했다는 것이다.
편지에는, 전하께서 명령하신 뜻대로 청나라에 와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구하기 위해 여러 계통으로 알아보니, 아직 책을 만드는 과정으로 목판으로 찍어낸 것이 4본 정도 있으나 이는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 중이며 정식 책으로 발간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자체적으로 차선의 방법을 찾아 해결하였습니다. “…『사고전서』는 『도서집성(圖書集成)』을 따라 그 규모를 확대한 것이기 때문에 우선 『도서집성』을 구하고 『사고전서』의 발간되면 그때 구매해도 좋을 것 같아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찾아냈는데 모두 5천20권에 5백2갑(匣)이었습니다. 그 값으로 은자(銀子) 2천1백50냥을 지급했는데, 지금 막 실려 오고 있습니다."라고 적고 있었다.
상부 두개의 도장은 왼쪽이 서울대, 오른쪽이 경성제국대학,하부 타원형도장이 '조선국', 아래 네모 도장은 홍제(정조의 호), 그 다음은 만기지가(바쁜 틈에도 공부한다는 뜻), 끝으로 극(極, 임금을 뜻)
도서집성 중 '기기도설'을 정조는 정약용에게 주고 이를 이용하여 녹노 등 기중기를 설계하였다.
『고금도서집성』은 1701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1726년에 완성되어 64부를 인쇄하였고 50년이 지나서야 조선은 이 책을 사들이게 되었다. 그만큼 조선은 국외의 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는 세계적으로는 10여 부 밖에 남아있지 않아 희귀본에 속하며 그중 하나가 정조에 의해 수입되어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것이다. 이 책은 백과사전으로 여러 분야의 책을 보고 중요내용을 발췌하거나 전체를 인용하였는데 이중 허준이 쓴 동의보감의 내용이 33항목이나 인용되어 있어, 상호 의학에 대해 교류도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서적이다.
힘들게 구하여 조선에 들어온 『고금도서집성』은 귀하게 대접받을 수 밖에 없었다. 보통 책을 만들 때, 국왕이 보는 책은 특별하게 좋은 종이로 만들게 되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책은 황제가 보는 용도가 아니므로 일반 종이로 만들었던 같다. 그리고 중국의 종이는 질은 우리나라 보다 떨어지므로 정조는 이 많은 책의 표지를 새로운 종이를 사용하여 교체하는데 그 업무량이 얼마나 많은지 많은 사람 동원되었는데도 40일이 걸렸다. 또 유명한 일화로 5,000여 권의 표지에 “도서집성”의 글을 쓴 사람은 당대 명필로 유명하던 조윤형인데 같은 글자를 5000번을 쓰면 도(道)를 트게 되었을 것으로 믿고 ‘도서집성’ 글씨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조윤형은 일전에 고찰했던 건물인 서향각의 현판을 쓴 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새롭게 표지를 단장한 청나라 책은 창덕궁의 왕립도서관 단지 안의 2층 건물인 열고관에 보관되었고 규장각 각신과 정조는 열심히 이 책들을 읽었다. 수원화성을 건설할 때 정조는 다산 정약용에게 설계를 지시하고 『고금도서집성』에 들어 있는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전해주고 정약용은 이를 참고하여 성설을 만들게 된다. 수원화성이 기존의 방법과 달리 과학적으로 건설되어 공사 기간을 줄이고 튼튼하게 만들 수 있게 한 중요한 책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런 중요한 책이 일반지식인에게는 열람이 허용되지 않고 규장각 각신에게만 허용되어 지식의 보급에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정조가 그만큼 이 책을 얼마나 귀중하게 생각했는지 짐작이 되며 다음 편에는 이 책을 보관하던 열고관과 개유와의 건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출처] 열고관,개유와 - 上|작성자 여유당
열고관,개유와 - 中
지금은 없어졌지만, 정조에 의해 건설된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라는 서고(書庫)가 있었다. 이 서고의 평면은 ‘丁’자형으로 머리 부분의 열고관은 2층이고 개유와는 본체로 1층이다. 위치는 규장각의 맞은편 언덕 위로 부용정의 뒤쪽이 된다. 하나의 건물에 2개 이름이 있지만, 당시에 증축, 용도 등에 따라 이름을 붙이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건물에 대한 자료 중 그림으로 남아있는 것은 김홍도의 『규장각도』와 『동궐도』 및 『동궐도형』과 1928년에 만든 『유리건판 필름』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앞서는 『규장각도』에는 1층의 개유와 건물만 보이고 열고관은 보이지 않고 있어, 정조가 규장각을 처음 건축할 당시 열고관은 계획에 포함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순조시기에 만들어진 『동궐도』에서는 열고관과 개유와 건물이 잘 표현되어 있으나 이름이 반대로 적고 있는 것이 확인되며, 위치도 부용정의 서쪽에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어 정조의 창건 의지를 파악되지 않은 채 화공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표현된 결과로 보인다.
『동궐도형』은 근대기술로 측정하여 위치에 대한 것은 정확하다고 보며, 또 근대 자료 중 유리건판의 사진 자료를 비교해 보면 두 자료는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열고당과 개유와 평면도
위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정조가 처음 이곳에 영조의 대를 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영조의 유품을 보관하는 어제각과 도서관을 이곳에 설립하고자 하여 추진하고 정조는 단원 김홍도에게 공사의 종합계획도를 그려오게 하는데 이것이 『규장각도』이다. 여기에는 주합루와 서향각 및 부용지, 부용정은 보이지만 서고(書庫)의 여러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주합루 어제각 단지는 정조의 즉위년(1776) 3월부터 시작하지만, 중간에 계획에 없던 열고관(중국서적 보관), 서고(西庫, 조선서적 보관), 수직간(守直間,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등 책에 관한 여러 건물과 같은 해 9월에 준공된다.
그러면 정조는 공사 중간에 계획을 왜 수정하게 되었을까, 아마 중국에서 엄청난 백과사전을 만들었으며 또한 그 책을 구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정조의 마음은 이미 책을 구해 읽고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가져와 어디에 보관하고 책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로 정해야 하나 등 여러 고민에도 빠졌을 것이다. 귀중한 서적이므로 지위고하와 관계없이 정조가 선별한 사람만 접근할 수 있고 정조도 쉽게 갈 수 있는 곳을 고려하여 궁궐의 후원인 이곳을 선정한 것 같다.
정조 즉위년(1776) 9월 24일 청나라에 조선왕의 등극을 알리러 가는 진하 겸 사은사로 서호수(徐浩修, 1736~1799년)를 부사로 선정하고 책을 구하도록 특명을 내리고 서호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책을 구해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청나라로 떠나게 된다.
사은사 일행이 떠난 다음 날 규장각을 조직을 편성하는데, 구하지도 않은 중국의 백과사전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연구하는 규장각 조직(친위부대)이 설립은 정조가 얼마나 이 책들을 기대하였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의 기록을 보면 정조실록(즉위년 1776년 9월 25일)에 나와 있는데 이곳에 “열고관은 상하 2층이고 북쪽으로 꺾어 개유와를 만들었는데 중국본 도서와 문적을 보관하고, 서향각의 서쪽에는 서고(西庫)인데 우리나라에서 만든 책을 보관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청나라에 갔던 서호수가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아직 일반화되지 못해 구하지 못하고 대신 70년 전에 만든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다음 해인 1777년 3월에 구해서 돌아오자 그들을 치하하고 벼슬을 높여주었다. 만약 이 책을 구하지 못했다면 정조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규장각각신이 아니면 벼슬이 높아도 책을 볼 수 없어 범위의 한계가 있었는데 만약 복사해서 지역별로 배분하여 많은 사람이 보았다면 아픈 근대기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규장각도에는 열고관과 개유와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부용정의 남쪽에 개유와로 보이는 건물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규장각의 왕실도서관단지를 준공할 때는 이 건물들이 함께 있었기에 중간에 설계변경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
동궐도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출처] 열고관,개유와 - 中|작성자 여유당
열고관,개유와 - 下
건물배치
이곳은 부용정의 남쪽 언덕 위에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지형은 동쪽이 낮아 동향을 하고 있다. 건물의 배면은 화계가 있으며 건물 외곽으로 담장이 둘려 있으며 문은 정문이 동쪽에 있고 부속문은 북쪽에 있다.
건물은 ‘丁’자 모양으로 남쪽 면이 2층인 열고관이고 북쪽 면이 1층인 개유와 건물이다.
동궐도형, 열고관과 개유와의 평면도
개유와
동궐도형을 분석하면, 주공간은 3칸으로 북측 2칸은 온돌방이며 남쪽 1칸은 마루다. 그리고 외부로 퇴칸이 붙어 전형적인 궁궐 침전건축 양식을 하고 있다.
유리건판(1928년)의 사진을 보면 마루칸과 옆 방1칸의 정면 퇴칸에 창호가 없이 출입구로 사용하고 북쪽 끝의 온돌방은 퇴칸 외부에 창호가 있어 출입은 제한되고 있다.
용도를 추정해보면 온돌과 퇴칸을 설치한 2중 공간으로 서고의 역할보다는 침실의 기능이 더 강하게 보인다. 즉, 열고관의 책을 이곳 개유와로 가져와 계절에 따라 대청과 온돌방에서 책을 보면서 연구를 한 열람실로 볼 수 있다.
열고관
정면 1칸, 측면 3칸의 2층 건물로 온돌 없이 모두 마루방으로 꾸며져 있어 서고의 역할은 이곳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외부는 모두 창문으로 되어 있어 전체를 개방할 수 있으며 환기를 원활하게 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당시 서고(書庫)는 인쇄용 목판을 보관하기에 벽체가 많고 창문은 목재 살창과 판문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은 종이책을 보관하는 곳으로 환기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방식은 이 건물의 북서쪽에 있는 서고(西庫, 조선본)도 마찬가지로 양 끝단의 온돌방을 제외한 6칸은 벽체 없이 창문으로만 벽을 구성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동궐도형을 측정하면 열고관의 정면 길이는 8자 정도인데, 유리건판의 개유와 사진을 보면 이보다 훨씬 크게 보이며 기왓골과 창문의 숫자를 보면 정면의 길이는 12자로 보인다. 도면보다는 사진이 실제에 가깝기에 열고관의 정면은 12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열고관의 특이한 점들이 사진에서 여러 부분이 발견되고 있는데 살펴보자
첫 번째 퇴칸 없는 들문 방식으로 2층의 정면 창문을 보면 6개로서 3개가 한 짝을 이루고 가장 외측의 창문은 삼배목(상부에 달린 정첩)이 있어 문을 들어 올릴 수 있게 되어있다. 들문이 외벽에 설치되는 경우 문이 외부로 나간 길이가 처마보다 더 멀리 나가 들문의 끝부분이 외부에 노출되어 비를 맞기 때문에 보통 퇴칸이 설치된 내부 벽에 설치된 문을 들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처마를 최대한 길게 내밀고 문(門)의 하부에는 머름을 두어 문의 길이를 짧게 하여 처마보다 짧게 나가게 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민가에서는 퇴칸이 없을 때 들문을 거는 방법으로 문을 길이 방향으로 접는 방법도 발견된다.
두 번째 열고관 1층은 외부 전체가 머름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정면에는 디딤돌이 있어 외부에서 열고관으로 직접 출입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머름이 있는 곳으로는 출입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방식을 채용한 것은 문의 길이를 줄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1층의 문도 들문으로 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세 번째는 2층 난간을 받치는 낙양(까치발)으로 대형 부재를 사용하고 있으며 낙양의 길이가 기둥 높이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어 매우 튼튼하게 처리된 점도 돋보인다.
열고관과 개유와의 건축적 특징을 보면, 개유와는 열람실로 궁궐의 침실 양식과 같이 이중 공간구조로 되어 있다. 열고관은 서고로 환기를 위하여 외부 벽면을 모두 들문으로 만들었고, 들문이 비에 맞지 않게 문의 하부에 머름을 설치하여 문의 길이를 줄이고, 지붕의 처마를 최대한 내미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특히 열고관은 들문에 대한 고급 지식이 담겨있는 곳이다.
열고관의 창호는 전체적으로 가설되어 있으며, 들문 양식으로 되어 환기를 위한 방식으로 보인다.
[출처] 열고관,개유와 - 下|작성자 여유당
moa2004.blog.me/220673315738 여유당건축
정의 1777년(정조 1)에 창덕궁 후원(後苑)에 고금의 도서와 문적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한 서고. 개유와(皆有窩)는 열고관(閱古觀)과 더불어 창덕궁 후원에 있었던 규장각(奎章閣)에 부속된 서고(書庫)이다. 건립 당시에는 모든 도서를 보관하였지만 규장각의 장서가 늘어나면서 조선본(朝鮮本) 도서와 문적(文籍)은 규장각 서북쪽에 있는 서고(西庫)로 옮기고 개유와와 열고관에는 중국본(中國本) 도서와 문적만을 보관했다. 개유와와 열고관은 1907년(융희 1)에 규장각의 기능이 바뀌고 서고가 종친부(宗親府)로 이관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제 기능을 잃은 개유와와 열고관은 정확한 시점을 알 수는 없지만 일제강점기 때 훼철되었다. 개유와와 열고관은 1779년(정조 3)과 1784년(정조 8)에 편찬된 『규장각지(奎章閣志)』와 각종 궁궐 그림에 따르면 주합루의 남쪽 부용지(芙蓉池) 건너편 언덕에 있었다. 도서와 문적을 보관하던 서고로 건립 초기에는 모든 도서를 보관했지만 1781년(정조 5)을 전후해서는 중국본의 도서와 문적만을 보관했다. 개유와와 열고관은 규장각의 부속 건물로 1777년(정조 1) 8월에 건립되었다. 영조의 어제봉안각(御製奉安閣)이었던 규장각과 주변 권역 공사가 1776년(정조 즉위) 3월부터 9월까지 진행되었지만, 이때 개유와와 열고관은 건립되지 않았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11일][『정조실록』 즉위년 9월 25일]. 1779년에 편찬된 『규장각지』에는 개유와가 1777년 8월에 열고관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정조는 1776년부터 시작한 영조 어제를 편찬하는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자신의 어제를 편찬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원래 어제는 왕이 사망한 후 남겨진 글을 수습하여 편집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정조는 영조대의 행적을 계승하여 당대에 자신의 어제집을 편찬하였다. 1777년 겨울부터 정리하여 1781년(정조 5)에 『홍재전편(弘齋全編)』을 완성하고 『영조실록』 편찬도 마무리하였다. 동시에 규장각의 어제를 분류하고 수집한 도서도 분류하여 『규장총목(奎章總目)』을 완성하였다. 이때 개유와와 열고관에 중국 도서와 문적을 분류하여 보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서고로서 개유와와 열고관의 기능은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던 시점까지 유지되었다. 1907년 11월에 규장각은 관제 개정으로 역대 왕의 유물과 저술을 보관하는 업무 이외에 종친부와 홍문관(弘文館)의 업무도 통괄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홍문관, 시강원, 집옥재(集玉齋), 춘추관(春秋館) 등에 소장되었던 책들과 지방의 사고에 보관되었던 전적 도합 10여만 권을 통합·관리하고, 이를 제실도서(帝室圖書)로 명명하였다. 1910년(융희 4)에 한일합병으로 규장각은 폐지되고, 제실도서는 잠시 이왕직(李王職)에서 관리하였다. 이듬해 11월에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에서 제실도서를 인수하여, 역대 왕의 어제·어필·선원보첩(璿源譜牒) 등은 창경궁 내에 일본식 건물 봉모당(奉慕堂)과 보각(譜閣)을 지어 보관하고 이왕직에서 관리하였다. 1912년에는 제실도서를 참사관분실(參事官分室)에서 관리하였고 도서의 명칭을 규장각도서로 바꾸었다. 1923년에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된 후, 조선총독부는 규장각도서를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928~1930년에 3차에 걸쳐 실행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도서가 조선총독부 학무국(學務局)에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현재 개유와와 열고관은 훼철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개유와와 열고관은 서로 이어져 ㄱ자형을 이룬다. 개유와는 온돌 2칸, 마루 1칸으로 이루어진 1층 건물이고, 열고관은 2층 건물로 상층은 루(樓), 하층은 각(閣)으로 건립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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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30
개유와(皆有窩)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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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개유와 |
한글표제 | 개유와 |
한자표제 | 皆有窩 |
상위어 | 규장각(奎章閣), 창덕궁(昌德宮) |
관련어 | 봉모당(奉謨堂), 부용지(芙蓉池), 서향각(書香閣), 열고관(閱古觀), 주합루(宙合樓), 태액지(太液池)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정정남 |
장소 | 창덕궁 후원(後苑) |
규모(정면/측면/칸수) | ㄱ자형 2층 |
관련 인물 | 정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개유와(皆有窩)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즉위년 3월 11일, 『정조실록』 즉위년 9월 25일 |
1777년(정조 1)에 창덕궁 후원(後苑)에 고금의 도서와 문적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한 서고.
개설
개유와(皆有窩)는 열고관(閱古觀)과 더불어 창덕궁 후원에 있었던 규장각(奎章閣)에 부속된 서고(書庫)이다. 건립 당시에는 모든 도서를 보관하였지만 규장각의 장서가 늘어나면서 조선본(朝鮮本) 도서와 문적(文籍)은 규장각 서북쪽에 있는 서고(西庫)로 옮기고 개유와와 열고관에는 중국본(中國本) 도서와 문적만을 보관했다.
개유와와 열고관은 1907년(융희 1)에 규장각의 기능이 바뀌고 서고가 종친부(宗親府)로 이관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제 기능을 잃은 개유와와 열고관은 정확한 시점을 알 수는 없지만 일제강점기 때 훼철되었다.
위치 및 용도개유와와 열고관은 1779년(정조 3)과 1784년(정조 8)에 편찬된 『규장각지(奎章閣志)』와 각종 궁궐 그림에 따르면 주합루의 남쪽 부용지(芙蓉池) 건너편 언덕에 있었다. 도서와 문적을 보관하던 서고로 건립 초기에는 모든 도서를 보관했지만 1781년(정조 5)을 전후해서는 중국본의 도서와 문적만을 보관했다.
변천 및 현황
개유와와 열고관은 규장각의 부속 건물로 1777년(정조 1) 8월에 건립되었다. 영조의 어제봉안각(御製奉安閣)이었던 규장각과 주변 권역 공사가 1776년(정조 즉위) 3월부터 9월까지 진행되었지만, 이때 개유와와 열고관은 건립되지 않았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11일)(『정조실록』 즉위년 9월 25일).
1779년에 편찬된 『규장각지』에는 개유와가 1777년 8월에 열고관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정조는 1776년부터 시작한 영조 어제를 편찬하는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자신의 어제를 편찬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원래 어제는 왕이 사망한 후 남겨진 글을 수습하여 편집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정조는 영조대의 행적을 계승하여 당대에 자신의 어제집을 편찬하였다. 1777년 겨울부터 정리하여 1781년(정조 5)에 『홍재전편(弘齋全編)』을 완성하고 『영조실록』 편찬도 마무리하였다. 동시에 규장각의 어제를 분류하고 수집한 도서도 분류하여 『규장총목(奎章總目)』을 완성하였다. 이때 개유와와 열고관에 중국 도서와 문적을 분류하여 보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서고로서 개유와와 열고관의 기능은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던 시점까지 유지되었다. 1907년 11월에 규장각은 관제 개정으로 역대 왕의 유물과 저술을 보관하는 업무 이외에 종친부와 홍문관(弘文館)의 업무도 통괄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홍문관, 시강원, 집옥재(集玉齋), 춘추관(春秋館) 등에 소장되었던 책들과 지방의 사고에 보관되었던 전적 도합 10여만 권을 통합·관리하고, 이를 제실도서(帝室圖書)로 명명하였다.
1910년(융희 4)에 한일합병으로 규장각은 폐지되고, 제실도서는 잠시 이왕직(李王職)에서 관리하였다. 이듬해 11월에 조선총독부취조국(取調局)에서 제실도서를 인수하여, 역대 왕의 어제·어필·선원보첩(璿源譜牒) 등은 창경궁 내에 일본식 건물 봉모당(奉慕堂)과 보각(譜閣)을 지어 보관하고 이왕직에서 관리하였다. 1912년에는 제실도서를 참사관분실(參事官分室)에서 관리하였고 도서의 명칭을 규장각도서로 바꾸었다.
1923년에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된 후, 조선총독부는 규장각도서를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928~1930년에 3차에 걸쳐 실행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도서가 조선총독부 학무국(學務局)에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현재 개유와와 열고관은 훼철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형태
개유와와 열고관은 서로 이어져 ㄱ자형을 이룬다. 개유와는 온돌 2칸, 마루 1칸으로 이루어진 1층 건물이고, 열고관은 2층 건물로 상층은 루(樓), 하층은 각(閣)으로 건립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궁궐지(宮闕志)』
- 『규장각지(奎章閣志)』
- 『내각일력(內閣日曆)』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서향각봉안총목(書香閣奉安總目)』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홍재전서(弘齋全書)』
- 김문식 외, 『규장각-그 역사와 문화의 재발견』,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09.
관계망
분류:
열무정(閱武亭)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열무정 |
한글표제 | 열무정 |
한자표제 | 閱武亭 |
상위어 | 창덕궁(昌德宮) |
관련어 | 군사훈련(軍事訓鍊), 궁궐(宮闕), 규장각(奎章閣), 동궐(東闕), 봉모당(奉謨堂), 열무(閱武), 정자(亭子), 주합루(宙合樓)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강민 |
규모(정면/측면/칸수) | 정면 3칸/측면 3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열무정(閱武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7년 11월 13일, 『세조실록』 13년 11월 25일, 『연산군일기』 10년 8월 28일, 『세조실록』 14년 5월 22일 |
조선초기 창덕궁 후원 봉모당(奉謨堂) 터에 있던 정자.
개설
열무정은 주변의 좋은 경치와 넓은 뜰을 배경으로 연회가 이루어지거나 군사훈련을 감독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면서 역대 선왕들의 유품을 열무정으로 옮기고 봉모당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위치 및 용도
열무정은 창덕궁주합루(宙合樓)의 남서쪽, 열고관(閱古觀)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운한문(雲漢門)과 통한다. 이곳에서는 연회를 열거나 군사훈련을 감독하였다.
변천 및 현황
세조는 열무정에서 연회를 베풀거나(『세조실록』 7년 11월 13일) 활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세조실록』 13년 11월 25일). 예종대에는 왕이 열무정에서 술자리를 마련하거나 군사들에게 진법을 훈련시키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열무정을 다시 짓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8월 28일).
1776년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였는데, 중심 건물인 주합루에 정조 자신의 왕위에 관련되는 어진(御眞)·어제(御製)·어필(御筆)·보책(譜冊)·인장(印章) 등을 보관하도록 하였다. 부설 기관으로 서향각(書香閣), 열고관, 개유와(皆有窩), 서고, 봉모당을 두었는데 봉모당이 바로 열무정이다. 주합루 남쪽에 열고관이 있었고, 봉모당은 열고관 서남쪽에 있었다. 봉모당은 규장각 부설 기관 중 가장 으뜸가는 기관으로 모훈(謀訓)의 자료를 받들어 보관하던 곳이다. 다시 말해, 주합루가 현재 왕들의 기록을 보관하는 곳이었다면 봉모당은 선대 왕들의 유품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봉모당에는 어제·어필·어화(御畵)·국왕의 유언을 적은 고명(顧命)·선왕이 남긴 교훈인 유고(遺誥)·밀교(密敎) 및 선보(璿譜)·세보(世譜)·보감(寶鑑)·지장(誌狀) 등을 보관했다. 그러나 봉모당에 있던 유품은 1857년(철종 8) 1월 이문원(摛文院) 북쪽에 있던 대유재(大酉齋)로 옮겨졌다. 정조가 죽은 뒤 규장각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면서 중요한 기능으로 남은 역대 왕들의 어제 관리를 좀 더 쉽게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8년(융희 2) 규장각의 기구가 새로 마련되면서 이곳의 업무는 전모과(典謨課)에서 관할하였다. 1911년 창덕궁 옛 이문원의 대유재와 소유재(小酉齋) 자리에 규장각 건물을 새로 지었다. 이때 봉모당 건물도 일본식으로 다시 지어 보첩류를 제외한 왕실 자료를 보관하였다. 1969년 7월 이 건물을 철거하고 장서를 창경궁장서각(藏書閣)으로 옮겼으며, 1981년에 다시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관하였다.
형태
열무정의 형태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세조대에는 열무정 2칸의 재목을 철거해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정자 건축에 쓰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세조실록』 14년 5월 22일). 이때 규모가 한 번 축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여지승람(輿地勝覽)』「궁궐지(宮闕志)」에서는 열무정, 즉 봉모당에 대해 고제(古制)를 따라 고치지 않고 다만 감탑(龕榻)을 설치하여 분봉(分奉)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원래 열무정의 형태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궐도(東闕圖)」의 묘사를 참고하면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며 화려하게 단청을 했다. 남쪽에는 행랑을 두고 나머지 3면은 담장을 둘렀다. 문은 동쪽, 서쪽, 남쪽에 있었는데 남쪽 정문은 3문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 『여지승람(輿地勝覺)』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용어 해설』, 문화재청, 2009.
관계망
분류:궁궐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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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전(仁政殿)
- 인화문(仁和門)
- 일영대(日影臺)
- 일영문(日永門)
개혁 군주 정조 - 정조, 왕권 유지를 위해 개혁을 펼치다
규장각에서 자신의 인재를 키우고 등용하다
정조는 할아버지에 이어 탕평정치를 합니다. 특히 사람을 쓰고 내침에 있어서 당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겠다고 선포해요. 일단 정치를 끌어나가려면 자기 사람이 있어야겠죠? ‘정조 LINE ’의 신하들을 키우기 위해 만든게 규장각이에요. 규장각은 그냥 겉보기엔 왕실의 도서관입니다. 이건 일종의 위장 전술입니다.
정조어필첩
대놓고 왕이 자기 사람을 키우겠다고 하면 반발이 있을 테니까 일단 규장각을 세우고 거기에서 인재를 키운 거죠. 규장각과 연계해서 실시한 제도가 초계문신제도입니다. 37세 미만의 신진 관료 중에서 똘똘한 사람을 신분에 상관없이 발탁해서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시킨 제도예요. 여기서 정약용이나 유득공 같은 인재가 발탁됩니다.
규장각
왕의 직속 군대, 장용영을 두다
또 왕권을 유지하려면 군사적인 힘도 필요하죠. 그래서 왕의 직속 군대인 장용영을 만듭니다. 장용영에 기존의 군대가 가지고 있는 군사력을 상당 부분 옮겨와요. 이렇게 어느 정도 왕의 기반이 마련된 게 정조2 년1이에요.
「화성원행반차도」에 그려진 장용영의 모습
장용영은 조선 최강의 전투부대입니다.
정조가 즉위한 후에 훈련도감의 정예무사를 선발해 호위를 맡긴 것이 장용영의 시작입니다.
어제제명첩 정판병사본정조 12년 이후 제작, 별군직제의 정화
수원으로의 천도를 계획하다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를 통해 정치적인 세력을 마련하고, 장용영을 통해 군사적 기반을 다져놨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자신의 지역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거였죠. 기존의 수도인 한양에선 정조의 입지가 약했습니다. 이미 기존의 정치 세력이 꽉 잡고 있으니 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거죠. 그래서 아예 새로운 곳을 수도로 삼으려 했어요.
수원화성
비밀리에 정조가 발굴한 새로운 지역! 바로 수원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수도 이전 계획이라고 볼 수 있죠. 수도를 옮긴다고 하면 한양에 기반을 둔 세력들이 반발을 할 겁니다. “어디 땅값 떨어지는 소릴 하고 있어?” 하고 버럭 했겠죠. 그래서 신도시는 아주 천천히 계획을 세워서 진행합니다. 이 계획은 3단계로 이뤄져 있어요.
1단계. 왜 수원이라고 하는 도시에 성을 세워야 하는지 명분 마련하기
2단계. 건축에 필요한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 계획 세우기
3단계. 실제 건축하기
화성성전도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며 화성 건축을 시작하다
정조는 수원에 화성을 지어야 하는 명분으로 자신의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내세워요. 조선 하면 효도의 나라 아닙니까. ‘죽은 아버지를 위해!’ 이 한 마디면 반대 세력들도 찍소리를 못했어요.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는 것으로 건설을 시작한 거죠. 무덤 이름도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바꾸고 수원으로 이장합니다.
경강상인들과 손을 잡고 재원을 마련하다
그럼 화성 건설에 필요한 돈은 어디서 마련했을까요? 바로 서울의 재벌 상인이었던 경강상인과 손을 잡습니다. 조선판 정경유착이죠.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과 재벌가가 손잡은 정도? 서울과 수원을 오갈 때 제일 힘든 일이 한강을 건너는 거였어요. 왜냐면 당시에는 배가 뒤집힐 위험이 있으니까 왕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지 않았거든요.
대신 많은 배를 연결하고 안전을 위해서 난간까지 설치한 배다리 위로 가마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럼 배다리를 가설하는 데 배가 많이 필요하겠죠? 이 배를 공급하는 일을 아까 말한 경강상인들한테 준 거예요. 그러니까 독점적인 계약 체결이라고 볼 수 있죠. 국가에서는 특정 상인층에게 일을 몰아주고, 경강상인들은 수원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해준 거죠.
「화성능행도」 중 '노량주교도섭'
배다리는 배를 통해 만든 부교의 일종입니다.
노량주교도섭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조대왕은 화성에 배다리를 활용하여 자주 능행을 다녔습니다.
화성 건축에 조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다
건축도 계획적으로 합니다. 조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요. 일단 건축에는 최신식 기술이 응집된 거중기가 도입됩니다.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기계예요. 앞서 말한 배다리와 거중기를 설계한 사람이 바로 조선의 다빈치! 천재 정약용입니다. 또 건축실명제를 도입해서 부실과 낭비를 원천적으로 없앱니다.
화성원행의궤도
건축에 동원된 못 하나, 돌덩이 하나, 인부 한 사람의 반나절 임금까지 모두 다 기록하게 해요. 그리고 당시엔 국가의 노역에는 농민들이 와서 무료로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는데 정조는 무료로 일을 시키면 의욕이 안 생긴다고 임금을 주고 일을 시킵니다.
화성성역의궤수원 화성의 건축 보고서
그러니까 전국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서 일을 한 거예요. 그래서 10년 계획의 화성 건축이 33개월 만에 완성됩니다. 총 길이 6미터에 달하는 성곽에 600칸에 달하는 대규모 행궁, 수많은 도시 기반 시설과 생산설비까지 33개월 만에 완공된 겁니다. 그리고 이 수원에 모든 물자와 사람을 집중시키려고 했어요.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개혁이 중단되다
파격적인 개혁도 이어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금난전권을 폐지한 거예요. 이건 경제편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게요. 공노비 처지 개선에도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도망 노비를 쫓는 관리인 추쇄관도 혁파해요. 서얼들의 차별 철폐에도 앞장섭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했던’ 서얼의 처지를 이미 정조 1년에 개선해줘요. 이를 서얼허통법이라고 합니다.
정조 개혁에서 가장 빛나는 점은 시행하고 끝난 게 아니라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관리를 했다는 거예요. 백성과 관련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민생과 가장 밀접한 관리인 수령들에 대한 감시였어요. 불시에 민생을 살펴 수령의 부정이 적발되면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감시관인 암행어사를 보낼땐 언제나 구체적이고 상세한 지침을 통해 제대로 체크하게 했어요.
다양한 개혁을 했으니 법전을 정비해야겠죠? 정조 때 편찬된 법전이 『대전통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조의 새로운 꿈이 시작되는 단계인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게 됩니다.
[ë¤ì´ë² ì§ì백과] 정조 - 개혁 정치로 조선의 중흥을 꿈꾸다 (이다지 한국사 : 전근대 편, 2015. 12. 11., 브레인스토어)
즉위하자마자 문화정치의 표방을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작성지화의 명분으로 초계문신제를 실시하는 등 인재를 끌어모으는 통로로 사용했으며, 우문지치를 명분으로 사고전서 등을 수입하고 동시에 서적간행도 진행하였다.
이 규장각을 통해 자신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해줄 인재들을 양성할 수 있었다. 특히 서얼 출신이자 박지원의 제자들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두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초계문신제를 통해서 정약용, 이가환, 서유구 등이 등용되었다.
2. 탕평책 - 준론탕평[편집]
정조는 자신의 할아버지 영조가 펼쳤던 탕평책을 역시 들고 나왔다. 하지만 정조의 탕평책은 영조의 탕평책과는 달랐다.
정조가 즉위하던 시기 때는 혼인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완론 탕평이 사실상 무너지고 척신들에 의한 정계장악이 심화되었던 때가 되었다. 즉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척족인 경주김씨 세력과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척족인 풍산홍씨 세력이 영조 말기에는 권력을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조는 이러한 점에서는 왕권의 추구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준엄한 의리를 중시하는 탕평인 준론탕평을 펼치게 된다.
우선 그동안 정계에서 소외당했었던 남인을 등용하면서 노론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조 스스로가 여러 당파를 등용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그동안의 파괴적인 정국운영에서 벗어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즉 영조의 탕평책보다는 좀 더 진전된 탕평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여러 정파를 등용하면서 동시에 사도세자 추숭문제로 그 세력이 다시금 두 계열 즉 벽파와 시파로 나뉘게 되었고, 이러한 당파다툼이 그동안 벽파와 시파를 온건하게 규합해오던 김종수와 체제공이 죽은 이후에는 두 세력을 막을만한 기재가 없었고, 그런 가운데 정조의 업무가 격화가 되면서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에는 그야말로 탕평정치가 다 소용 없어지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3. 장용영 설치와 화성 건설[편집]
정조는 상당히 많은 암살 위기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러한 암살 위기는 정조에게 결국 자신을 호위할만한 군사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게 하였다. 당시 군영은 대부분 주요 당파에 장악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금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당파를 위해 일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결국 1784년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축하하기 위해 경과를 실시 무과에서 무려 2000명의 합격자를 배출시켰고 이후 홍복영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1785년 장용위를 설치하게 된다. 그리고 1788년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개칭하면서 정조는 하나의 자신의 친위부대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면서 동시에 이상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바로 수원화성의 건설이다. 이 이상도시의 건설을 통해 당시 한양에서는 펼치지 못할 다양한 정책들을 펼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화성건설도 장용영과 마찬가지로 기존 체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자 했던 마음이 강했다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정조는 장용영의 외영을 수원화성에 설치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4. 신해통공[편집]
조선 전기 때만해도 상업이 억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들의 특권은 그대로 인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이들이 국역에 종사하고 있으면서도 특권이 적어지면서 불만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이들의 독점적 상권를 인정해주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금난전권은 결국 도시의 상업을 폐쇄적으로 바꿔놨고, 물가의 상승을 초래하여 영세상인과 수공업자 및 도시빈민층들에게 위협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러한 시전 상인들은 중앙의 고관들과 연계가 되면서 역시 폐단을 낳게 되었다.
특히 중앙의 고관 특히 노론들과의 연계는 노론의 세력을 약화시켜 탕평책을 펼치려는 정조의 정책에 이반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타개가 필요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바로 금난전권을 혁파하려는 통공발매정책이었다.
사실 통공발매정책은 영조 시기인 1764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오던 사안이었다. 그리고 정조는 1787년 일부 통공발매정책을 시행하였고 1791년에 이르러 남인의 영수 체제공에 의해 통공발매정책이 제기가 되었고 결국 시행을 하기에 이른다.
통공발매정책은 그동안 독점권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던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상인들의 특권을 폐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통공발매정책을 통해서 그동안 경화되어있던 상업구조의 변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노론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던 시전상인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면서 준론탕평책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조선이 한단계 발전되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중앙정부에 의한 특권이 없어지면서 상업이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5. 문체반정[편집]
정조 시대를 얘기하는데 있어선 문체반정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조의 개혁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문체반정은 북학이나 청나라 문물,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대표되는 새롭고 신선한 문체에 관심을 보이던 조선의 젊은 선비들을 탄압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중에서 문학으로 명성이 드높았던 이옥에 대한 탄압은 너무나 심했다. 이옥은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고도 문체 때문에 정조에 의해 꼴찌로 바뀌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는다. 후에도 이옥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자 정조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이옥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옥에 대해 예외를 인정하게 되면 그 또한 문제가 된다는 맹점이 있다. 역설적으로 박지원이나 김조순 같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타협을 하지 않은 이옥 본인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는 셈.
애초에 정치적 측면에서 정조는 문체반정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신해통공으로 왕이 노론을 타격 → 천주교 신앙을 문제 삼아 노론이 정조 측근 남인 시파들을 공격 → 이걸 다시 문체반정으로 박지원[48]이 포함된 노론에 재반격한 형국. 그리고 정조가 죽은 후에 이에 대한 벽파의 반격이 신유박해라고도 하는 신유사옥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 속에서 이해한다면, 박지원의 실학적 측면이나 문체반정이라는 명분은 의미가 약해지고, 대신 정치적 의미만 더 강해진다. 애초에 문체반정 자체가 청나라에서 유행한 문체와 유사한 박지원의 그것과 기존 노론의 대의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적 사상 간의 괴리를 찔렀기 때문에 성공한 측면이기 때문에 문학사적 의미를 제외한다면 애초에 반동적이냐 아니냐도 아리송하긴 하다.
문체반정을 보는 시각 중, 철저하게 보수적인 성리학자로서의 정조의 성향이 문체반정의 중요한 요소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정조가 자신의 일기에 "나는 본래 책을 읽어도 성현의 말씀만 읽었으며, 패관잡기에 대해서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아무 쓸데가 없을 뿐 아니라,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독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대목을 보면 정조는 진심으로 유학 경전만이 진리이며 다른 것에는 매우 적대적이었던 유교근본주의자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당시 사상계에서는 중국의 양명학, 고증학 등이 들어와서 성리학의 한계를 공격하는 상황이었으며, 이러한 흐름이 원칙주의자 성리학자였던 정조의 심기를 무척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조가 오늘날의 소설 격인 패관문학을 무척 싫어하여, 당시 소설 중독(…)에 빠진 관료를 징계한 사례가 있고, 김조순도 숙직 중 연애소설을 읽다가 걸려서 청나라 사신단에 포함되어 가는 길에 반성문을 써야 했다. 심지어 정조가 파발까지 보내 '반성문 내놔!'라고 독촉했을 정도. 하지만 그 반성문이 명문이라 왕을 감동시켰고 왕과 사돈지간이 된다. 유교 문화권에서 글이라는 것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해 보면… 새로운 문체를 구사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이옥의 경우, 문체 교정 안 하면 평생 과거금지라는 선비로서는 치명적인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49] 그래서 그는 온건한 분서갱유라 할 수 있는 문체반정을 한 것 같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정조는 문체 면에서는 노론, 그 가운데서도 벽파였다. 세손에서 즉위하여 척신과 홍국영을 물리칠 때까지 김종수를 위시한 노론 벽파와 정조는 사실상 동맹관계였으며,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에는 "우리 벽패는"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노론 정체성을 강조했다. 송시열에게 송자라는 호칭을 내리고 《송자대전》을 편집하게 한 사람도 정조다.
물론 그렇게 징계한 관료들이 자기 뜻에 맞게 반성하면 나중에 중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김조순이 반성문 잘 써서 정조의 용서를 받고 정조의 사돈으로까지 정해진 게 그 예. 실제로 정조는 문체가 난잡해진 원흉으로 지목한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에게도, 옛 고문 문체로 '반성문' 쓰면 크게 중용하겠다는 뜻을 전한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과거를 보지 않은 음서로는 절대 오를 수 없는 종2품 벼슬인 문임직을 주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당연히 박지원 주위 문인들은 기뻐하며 그들이 나서서 글 쓸 자료를 모아주겠다고까지 했으나, 박지원은 '나 같은 못난 놈의 못난 글에 전하가 관심 보이시다니, 더 이상 못난 글로 반성문 써서 전하의 눈을 썩게 하는 무례를 저지를 수 없어염. 전하께서 반성문 쓰면 중용해준다는 말은 사실 나보고 반성하라는 이야기일 뿐인데, 눈치 없이 반성문 써내서 벼슬 달라는 눈치없는 짓은 할 수 없잖아염? 그래도 혹 모르니 그나마 볼만한 글 몇 편 모아놓고 있다가, 전하께서 또 반성문 내라고 제출하시면 그때 그거 낼 거임.'이라는 반응으로 반성문 작성조차 회피하는 기염을 토한다.(…) 사실 계속 회피하기만 한 건 아니고, <과농소초>라는 농서도 지어 올리는 등 나름 성의를 보이기도 했다.
문체반정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재밌는 일화가 있다. 바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학에 관해 정조와 채제공 이하 신하들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채제공이 "말이 불교를 배척한다는데 하는 소리가 별반 다를 것도 없으니 그냥 불교의 한 별파라 하겠고,[50] 죽은 사람을 살리고 봉사를 눈뜨게 하고 천상의 문을 연다니, 어떤 멍청이가 그걸 믿습니까?"[51]라고 하자 정조가 "이게 다 패관문학을 하도 보니까 그따위 황당무계한 소리도 믿게 되는 것이니 이제부턴 순정고금체만 쓰라!!"고 했다.[52]
여담이지만 소설을 싫어했던 정조와 달리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후궁 의빈 성씨는 10책에 달하는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할 정도로 소설 애호가였다. 1773년(영조 49년) 봄, 《곽장양문록》의 필사 시기이며 문체반정보다 20년 정도 앞선다.
6. 서체반정[편집]
정조는 문체만 개혁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체까지도 개혁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를 서체반정이라고 한다. 문체반정과 더불어 정조의 문화 개혁 정책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
조선 개국기에는 반듯반듯한 고려풍 안진경체, 전기에는 정밀하고 우아한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하였고, 중기 무렵에는 품위 있고 강경한 왕희지체가 유행하였다. 안평대군이나 선조가 명필로 이름난 왕족들이다. 특히 선조는 워낙 유명해 그의 글씨를 명나라 사신들도 탐을 냈으며 본인도 자신의 글씨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고 한석봉을 매우 총애해 석봉체로 문서를 작성토록 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영조에 이르기까지 선조의 글씨에 기반을 둔 서체를 구사하였는데, 대가 내려갈수록 화려해졌다. 영조 즈음 되면 거의 이건 여자가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미려한 글씨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상님들과는 다르게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서예 철학이 매우 뚜렷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 철학은 유지되어 그는 글씨란 무릇 굵직굵직하게, 꾸밈없이 소박하게 써야 한다고 믿었으며, 양난 이후로 바뀐 서체를 점잖은 서체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런 영향을 받아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굵직하고 소박하며 남성적인 서체는 조선 후기에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비는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즉위
1759년(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되고, 1762년 세자인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동궁으로 불렸으며, 1764년 2월 어려서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 뒤의 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1775년 11월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홍인한(洪麟漢)이 "동궁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내세우며 반대했으나, 그해 12월 대리청정의 명을 받았고,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대보(大寶)를 세손에게 전하라는 유교(遺敎)에 따라 즉위했다. 왕위에 오르자 바로 효장세자를 진종대왕으로,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했으며, 세손 때부터 그를 보호한 홍국영(洪國榮)을 도승지로 삼고 숙위대장(宿衛大將)을 겸직시켜 반대세력을 숙청해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사주한 숙의 문씨(淑儀文氏)의 작호를 삭탈하고, 화완옹주(和緩翁主)는 사가(私家)로 방축했으며, 문성국(文聖國)은 노비로 만들고,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과 홍인한을 경원과 여산으로 귀양보냈다가 사사(賜死)했다.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며 권력을 남용하자 조신들의 탄핵에 따라 1779년 9월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듬해 2월에는 전리(田里)로 돌려보내 친정체제를 강화했다.
규장각 설치와 문운의 융성
정조는 즉위한 다음날 어제봉안(御製奉安)의 장소로 마련했던 규장각(奎章閣)을 9월에 준공, 역대 왕의 문적들을 수집해 보관하게 하고,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을 비롯한 많은 책들을 거두어 수장하게 했다. 1777년 12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외각(奎章外閣)이라 하고, 1782년 2월 강화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신축했다. 규장각에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 등을 각신(閣臣)으로 선발해 후한 녹봉을 주고 연구에 몰두하도록 했으며, 정조 자신도 이들과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누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학문을 논했다. 각신의 양성은 당파의 인물을 멀리하고 참신하고 유능한 신진들을 길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이었다. 1779년에는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으로 재주있는 인사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했다.
정조는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활자에 깊은 관심을 갖고 1772년 임진자(壬辰字), 1777년 정유자(丁酉字), 1782년 한구자(韓構字), 1792년 목활자인 생생자(生生字), 1795년 구리로 정리자(整理字), 1797년 쇠로 춘추관자(春秋館字) 등 도합 80여 만 자를 만들어 규장각에 비치해 서적 간행에 이용하도록 했다.
금원(禁苑) 안에는 규장각의 부설기관으로 봉모당(奉謨堂)·열고관(閱古觀)·개유와(皆有窩)·서고(西庫)·이안각(移安閣) 등을 두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활발한 서적편찬 작업이 이루어져 1781년 〈어정성학집략 御定聖學輯略〉·〈어정팔자백선 御定八子百選〉, 규장각 소장 3만 여 권의 분류목록인 〈규장총목 奎章總目〉, 1782년 〈동국문헌비고〉를 증보한 〈증보동국문헌비고〉(146권), 〈국조보감 國朝寶鑑〉, 1784년 〈규장각지 奎章閣志〉·〈홍문관지 弘文館志〉, 1785년 〈대전통편〉·〈태학지 太學志〉, 1786년 〈갱장록 羹墻錄〉, 1787년 〈문원보불 文苑黼黻〉·〈어제춘저록 御製春邸錄〉·〈전율통보 典律通補〉, 1788년 〈동문휘고 同文彙考〉, 1789년 〈해동읍지 海東邑誌〉, 1790년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 1794년 〈주서백선 朱書百選〉, 1796년 〈규장전운 奎章全韻〉·〈어정사기영선 御定史記英選〉, 1797년 〈오륜행실 五倫行實〉, 1798년 〈오경백편 五經百編〉, 1799년 정조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 弘齋全書〉 등이 편찬·간행되었다.
탕평책의 실시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했다. 아버지 장헌세자가 당쟁으로 희생되고 자신도 당쟁의 직접적 피해를 입음으로써 당쟁의 폐해를 절감하고, 자기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이름하는 등 당색에 구애되지 않고 인물 본위로 관리를 등용하려 했다. 정조의 탕평은 준론(峻論)의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이었다. 영조대의 탕평책인 완론탕평(緩論蕩平)은 척신과 권력을 장악한 간신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남을 억누르는 방편이 되었으며, 왕권에만 영합하여 권력유지에 부심하여 '세상에서는 탕평당이 옛날의 붕당보다도 심하다고 하는 말이 퍼지는' 정도가 되었다고 인식하고, 초기부터 홍국영·유언호(兪彦鎬)·김종수(金種秀) 등 노론 중에서 청론(淸論)을 표방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실시했다. 준론탕평은 완론탕평과는 달리 충역(忠逆)·시비(是非)·의리(義理)를 분명히 하는 탕평으로서, 임금의 은혜를 강조하고 각 당에서 군자를 뽑아서 쓰는 '붕당을 없애되 명절(名節)을 숭상한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영조대의 탕평이 세가대족(世家大族)의 화합에 우선하고 사대부의 화합에는 소극적이었던 데 대한 반성에서 의리의 탕평을 주장하고, 산림(山林)·궁중 세력과의 연결을 끊음으로써 청명(淸名)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즉위초 김귀주(金龜柱)와 홍인한의 외척당을 와해시켰으며, 홍국영도 제거했다. 1788년에는 남인 채제공(蔡濟恭)을 정승으로 등용하여 노론과 균형을 이루게 했다.
정조의 준론탕평은 결국 사림세력에 의한 공론정치의 방향보다는 관료제의 정점이 되는 재상권의 강화를 통한 사림정치 이념의 실현이라는 방향에서 왕권강화를 지향했다. 탕평의 강화를 위해 문풍(文風) 진작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규장각은 이제까지의 여러 관각(館閣)들의 기능을 병합(倂合)하여 권력을 일원화하려는 시도에서 만들어졌으며, 이를 통해 사기(士氣)·명절을 존중하는 청론을 강조함으로써 준론탕평을 달성할 수 있는 청류(淸流)의 인재를 키우겠다는 또 하나의 청요직(淸要職)으로서 기능했으며, 초계문신(抄啓文臣)은 새로운 인재양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ㅡ 다음 Tip :
요약 규장각에 소장되었던 중국 서적의 총목록.
4권 3책. 필사본. 1781년(정조 5) 서호수(徐浩修:1736~99)가 편찬하였다. 규장각은 한국본을 보관하는 서서, 중국본을 소장하는 열고관·개유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중국본의 서목을 편성한 것이 이 책이다. 1781년 2월부터 같은 해 6월에 걸쳐서 완성된 〈규장총목〉이 있고, 같은 해 가을(7~9월)에 완성된 목록이 있다. 전자는 서고(西庫)에 있는 한국본과 열고관에 있던 중국본을 합하여 만든 총목록으로 여겨지지만 현재 전하지 않고, 개유와에 있던 중국본만으로 편성된 〈규장총목〉과 열고관 중국본 목록인 〈열고관서목 閱古觀書目〉만 남아 있다.
목록은 총 1만 3,642책을 경사자집의 4부로 분류하고 그것을 다시 34류로 나누었다. 각각의 서적에 대하여 편저자의 성명과 저작의 의례를 표기하고, 서(序)나 발(跋)을 소개하여 그 책의 개략을 알리고 비평을 인용하여 책에 대한 평가를 내렸으며, 연혁을 살필 수 있도록 서질의 흥폐를 적어주었다.
현존하고 있는 4부법에 의한 우리나라 최초의 해제목록으로서 서지학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규장총목〉은 규장각에, 〈열고관서목〉은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요약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이면서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한 관서.
내용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궐내에 설치되었다. 역대 왕들의 친필·서화·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던 곳이었으나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해 갔다.
조선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의 건의로 일시 설치되었으나 폐지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세조가 친히 쓴 ‘奎章閣(규장각)’이라는 액자를 종정시(宗正寺)의 환장각(煥章閣)에 봉안하고 역대 국왕의 어필·어제를 보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군주의 권위를 절대화시키는 규장각의 설치를 유신들이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면서 외척 및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기 위한 혁신 정치의 중추로서 설립되었다. 이를테면 단순한 서고의 구실을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즉, 정조는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관료 선임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지양할 수 없으니, 왕이 의도하는 혁신정치의 중추로서 규장각을 수건(首建)하였다.”고 설각 취지를 밝힌 바 있다.
창설한 뒤 우선 영조의 어필·어제를 봉안하는 각을 창덕궁 내에 세워 봉모당(奉謨堂)에 모시고, 사무 청사인 이문원(摛文院) 등을 내각으로 하였다.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병합해 외각으로 했고, 활자를 새로이 만들어 관리를 맡는 일과 편서·간서를 내각에 맡겼다.
1781년에 청사를 모든 관청 중 가장 광활하다는 옛 도총부(都摠府) 청사로 옮겼으며, 강화사고(江華史庫) 별고를 신축해 강도외각(江都外閣)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서고(西庫 : 조선본 보관)·열고관(閱古觀 : 중국본 보관)·개유와(皆有窩 : 중국관 보관) 등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 보관하게 하였다.
장서는 청나라에서 구입한 1만여 권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포함, 약 8만여 권을 헤아렸다. 이것이 현재 총 3만여 권에 달하는 현재 규장각 도서의 원류이다. 규장각의 주합루(宙合樓)는 당조(當朝)의 어필(어진)·인장 등을 보관하며, 봉모당은 열조의 어필·어제 등을 봉안하였다.
열고관·개유와는 내각과 함께 서고로서, 이문원은 사무 청사의 구실을 하였다. 구교서관(舊校書館)은 외각과 열조의 어제·서적 등을 보관하는 강도외각(江都外閣)으로 구성되었다.
관원으로 제학 2인, 직제학 2인, 직각(直閣) 1인, 대교(待敎) 1인 외에 검서관(檢書官) 4인이 있었다. 각신들은 삼사보다도 오히려 청요직(淸要職)으로 인정되었다. 종1품으로부터 참하관에 이르는 노소 6인과 실무담당으로 검서관 4인을 두었다.
내각에는 검서관 외에 사자관 8인 등이 있었고, 다시 이속으로 70인이 있었으며, 외각에도 이속 20여 인을 두었다. 규모도 1781년까지 계속 정비되어갔는데, 열고관의 도서가 늘어남에 따라, ‘개유와(皆有窩)’라는 서고를 증축하기도 하였다.
규장각의 기능은 점차 확대되어 승정원·홍문관·예문관의 근시(近侍)기능을 흡수했으며, 과거 시험과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도 함께 주관하였다. 특히 초계문신은 글 잘하는 신하들을 매월 두 차례씩 시험을 치른 후 상벌을 내려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제도였다. 따라서 학문의 진작은 물론 정조의 친위(親衛)세력 확대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규장각의 도서 출판의 기능을 위해 예조 소속의 출판 전단 관서이던 교서관을 규장각의 속사(屬司)로 삼고, 정유자(丁酉字, 1777년), 한구자(韓構字, 1782년), 생생자(生生字, 1792년), 정리자(整理字, 1795년) 등의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수천 권에 달하는 서적을 간행하였다.
많은 양의 국내외 도서가 수집·간행됨에 따라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목록화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첫 번째 분류 목록은 1781년(정조 5) 약 3만여 권의 중국 책을 대상으로 서호수(徐浩修)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를 ≪규장총목 奎章總目≫이라 하며 이것이 오늘날 규장각도서의 시원(始源)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 책들만을 분류한 것이 ≪누판고 鏤板考≫와 ≪群書標記 군서표기≫이다.
각신들의 권한으로 시신(侍臣)은 승지 이상으로 대우를 받아 당직을 하면 아침 저녁으로 왕에게 문안했으며, 신하와 왕이 대화할 때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특히, 1781년부터는 일기를 기록해 ≪내각일력 內閣日曆)≫이라 했는데, ≪승정원일기≫ 이상으로 상세하였다. 또한, 2년 뒤부터는 각신이 매일의 정령형상(政令刑賞) 등을 기록, 왕이 친히 첨삭한 뒤에 등사하였다.
1779년에는 새로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서얼출신 임과(任窠)로 했는데, 국초 이래로 재주와 학문은 뛰어나도 입신의 길이 막혀 있었던 서얼들에게는 큰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또, 당하관의 소장관원 중 우수한 자로 뽑힌 초계문신(抄啓文臣)에게 매월 두 차례 시험을 치러 상벌을 내렸다.
각신은 초계문신 강제(講製)에 시관이 되어 일대의 문운을 좌우하였다. 또 실질적인 경연관(經筵官)으로서 왕과 정사를 토론하고 교서 등을 대리 찬술하는 일에서부터 편서와 간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규장각에서 양성된 학자들은 정조대의 문예 부흥을 주도하고 왕권 안정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사후 규장각은 그대로 존속했지만,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기능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차츰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만 남게 된 것이다.
설립 이후 그대로 존속되어오던 규장각은 1868년(고종 5)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창덕궁에서 이곳으로 옮겨지고 소장도서들도 이문원·집옥재(集玉齋)·시강원 등에 분산, 보관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궁내부에 두었다가 이듬 해 규장원으로 고쳐, 이때 한·중 두 나라의 도서와 각종 왕가 전보(傳寶)를 보관하였다. 그 뒤 1897년(고종 34)에 다시 규장각으로 환원시켰다.
1908년에 근대적인 직제를 편성해 전모(典謨)·도서·기록·문서 등 4과가 사무를 집행하였다. 이 때 ≪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 각 관서의 일기 및 등록과 정족(鼎足)·태백(太白)·오대(五臺)·적상(赤裳) 등의 사고 장서까지 관할하였다.
그 뒤 1910년에 이름이 없어지고 도서는 한 때 이왕직에 도서실을 두어 보관했으나, 이듬 해 조선총독부 취조국으로 넘어갔다. 이 때 넘어간 도서는 5,353부 10만187책, 각종 기록은 1만730책에 달하였다.
그러나 1912년 총독부에 참사관실이 설치되어 도서 및 관련된 사무가 참사관실로 이관되었다. 1922년에 학무국으로, 이어 다시 1928년에서 1930년사이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는데, 이 때 15만119권이 이 대학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일제가 규장각 도서를 보존한 것은 식민 통치를 위한 우리 나라 역사 연구에 이 자료들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창덕궁 안의 규장각 건물 가운데 서향각·주합루·부용정만 남기고, 그 밖의 열고관·개유와·서고·이문원·대유재(大酉齋)·소유재 등은 모두 헐리고 말았다.
이 책들은 광복 후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옛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건물)으로 이관되었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규장각도서 중 국보급 자료 8,657책이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환도 후 서울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이전하면서 규장각 도서도 함께 옮겨졌다. 이 때 경복궁 회랑에 있던 교서관 소장 목판(木版) 17,800여 장이 함께 옮겨졌다. 그리고 도서관 안에 규장각 도서관리실을 따로 두어 규장각 도서의 관리를 맡게 했으며, 도서관 소속의 일반 고도서와 문고본 도서 등을 규장각도 서로 편입, 약 20만 권의 장서를 헤아리게 되었다.
1990년에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의 보존·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독립 건물을 완공하였다. 이에 규장각도서가 신축건물로 이전했고, 1992년 3월에 서울대학교 설치령이 개정되어 ‘서울대학교규장각’이라는 독립된 기관으로 새롭게 발족하였다. 이로써 서울대학교규장각은 자료연구부·자료관리실·행정실의 부서를 갖추고 자료 보존·열람 기능 뿐만 아니라 국학 연구 기관으로서의 기능도 함께 수행하게 되었다.
규장각은 정조 때 다른 어느 기구보다도 넓고 중요한 비중을 가진 정치적·문화적 기구였다. 설립 당시 노론의 벽파 등 반대파를 숙청하며, 혁신정치를 위한 중추기구 내지는 기획 연구기관의 구실을 하였다.
원래 ‘규장(奎章)’이란 임금의 어필과 어제를 가르키는 것으로, 그것을 모아두는 제도는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고사를 따른다는 명분에 힘입어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정치적·문화적 기구를 마련했던 것이다.
교양 없는 인물로 문화와는 거리가 있던 홍국영(洪國榮)의 제거를 계기로, 문화 기관으로 충실해졌고, 각신의 권한도 날로 커져갔다. 설립 시기에는 정적 소탕을 주임무로 했던 규장각이 정세의 안정과 더불어 정치의 연구 및 기획 기관이 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소속된 각신은 승지 이상으로 왕과 친밀하였다. 밖으로는, 청나라 건륭 문화(乾隆文化)의 영향을 받아 내외 서적의 수집·편서·간서에 구심적 역할을 했으며, 우리 문화재의 정리와 보관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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