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의 옛 모습

2018. 10. 4. 22:19집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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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직한사내 | 조회 43 |추천 0 | 2018.07.20. 12:49




창덕궁(昌德宮)



창덕궁(昌德宮)

   사적 제122호.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法宮)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지만, 이후 임금들이 창덕궁에 머무는 것을 선호해왔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 법궁인 경복궁이 복구되지 못하면서 창덕궁은 고종 때까지 법궁의 기능을 하였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되면서 다양하고 복잡한 왕실 생활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창건했지만 제2대 정종은 옛 도성인 개성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다. 제3대 태종은 개성에 남으려는 대신들의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1404년(태종 4) 다시 한양 천도를 결정하였다.

   이 때 경복궁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새로 창덕궁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는 경복궁에서 있었던 정치적 사건에 대해 태종이 꺼려한 이유가 컸지만, 두 개의 궁궐을 동시에 운영하는 양궐체제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405년 10월에 공사가 끝났으며, 10월 25일 창덕궁으로 이름 붙였다. 이 때 완성된 창덕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이었다.

「임진왜란 중 소실된 궁궐들 중 제일 먼저 복구를 시작한 것은 창덕궁이었다. 창덕궁이 먼저 복구된 까닭은 그전까지 임금들이 주로 거처하던 곳이 창덕궁이었으며, 경복궁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의견이 가세되었기 때문이다. 」

   창덕궁 복구 공사는 선조 말에서 광해군 초까지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건하고 약 10년 후 1623년 인조반정 때 외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25년간 방치되었다가 1647년에 복구되었다.

   이후 효종대에는 대비를 위해 수정당, 만수전 등이 건축되었고, 현종대에는 집상전이 건축되었다. 숙종대에는 제정각을 건축해서 각종 천문기기를 설치했고, 청심정, 영타정, 사정기비각, 능허정, 애련정 등을 지으면서 후원을 본격적으로 꾸몄다.

   정조는 학문을 중심에 둔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각종 시설을 건축했다. 규장각을 중심으로 봉모당, 개유와, 열고관, 서고, 서향각 등을 세워 역대 임금의 자료와 새로 구입한 도서류를 보관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세자를 위한 공간도 크게 확장했다. 중희당과 수강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1803년(순조 3) 12월 선정전 행각에서 시작된 화재가 인정전을 비롯한 내전의 상당 부분을 불태웠고, 곧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다. 창덕궁의 마지막 대화재는 1917년 11월에 일어났다. 대조전 서쪽 행각의 온돌에서 시작된 화재는 내전 영역 대부분을 불태웠다.

   복구공사는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등의 전각을 이건하는 것으로 주요 부분을 충당했다. 이때의 재건공사는 창덕궁의 원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또 자동차 차고와 전등, 탁자, 의자, 커튼 등 근대식 설비와 가구의 도입도 건축의 면모를 바꾸는데 일조했다. 대한제국의 황실 가족들은 창덕궁의 낙선재 영역에서 마지막까지 거주했다.

< 의의와 평가 >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   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경희궁이나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과 경계 없이 사용되었으며,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참고문헌

『창덕궁』(문화재청, 2011)
『조선시대 궁궐용어해설』(문화재청, 2009)
문화재청(www.cha.go.kr) 



창경궁(昌慶宮)



창경궁(昌慶宮)


   사적 제123호. 창경궁은 조선 9대조 임금인 성종이 1483년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창경궁 터의 역사는 고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이 즉위한 1418년 고려의 남경(南京) 이궁(離宮) 터에 상왕 태종을 위한 수강궁(壽康宮)을 세운 것이다.

   성종은 창덕궁이 좁아 세 명의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 보완하면서 공사 도중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경궁은 창건 초기에는 쓰임새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후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하면서 이궁(離宮)으로서 활용 빈도가 높아졌다.

   창경궁의 전각은 영건, 화재, 훼손 등으로 인하여 변화하였으며, 변화에 따라 크게 다섯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성종 때 세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 터를 확장하여 별궁을 세운 시기이다. 명정전을 정전으로 하여 편전인 문정전, 침전인 수령전 그리고 환경전, 경춘전, 인양전, 통명전, 양화당, 여휘당, 사성각 등을 이 시기에 영건하였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시작하여 광해군 때에 이루어진 1차 중건 시기이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던 것을 명정전, 문정전, 환경전, 인양전등의 중심 전각들을 위주로 중건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인조반정과 인조 2년(1624)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인해 내전의 전각들이 대부분 소실된 것을 인조 11년(1633)부터 중수하였다. 네 번째 시기는 순조 30년(1830)에 일어난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의 대부분이 소실된 때부터 순조 34년(1834)에 창경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다섯 번째는 일제강점기에 들어 많은 전각들이 헐리거나 일제에 의해 훼손과 변형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1907년부터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일반에 공개하였으며, 1911년에는 이름마저 창경원(昌慶園)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부분에 도로를 개설하여 맥을 끊었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아직 많은 전각을 복원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의 모습에서 왕실 생활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현재 창경궁은 홍화문 및 궁장, 명정전 권역, 환경전 권역, 통명전 권역, 수강재 권역, 통화전 권역 등을 구성되어 있다.

   창경궁에서 특히 중요한 건물은 명정전과 명정문 그리고 홍화문 등인데, 이들은 현존하는 궁궐 건물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하는 건물들로 건축기법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의의와 평가 >

   창경궁은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 참고문헌 >

『창경궁』(문화재청, 2011)
『한국의 건축문화재–1서울편』(홍대형, 기문당, 2011)
『창경궁 복원정비 기본계획』(문화재청, 2010)
『조선시대 궁궐용어해설』(문화재청, 2009)
문화재청(www.cha.go.kr)


창덕궁 부용지(芙蓉池)와 주합루(宙合樓)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못과 누각으로 낮은 골짜기에 연못을 만들고 부용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어수문(魚水門)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2층 건물이 나타난다.

1층 규장각(奎章閣)은 수만 권의 책을 보관하던 서고였고, 이층 주합루는 도서를 열람하며 풍치를 즐기던 곳이다.



창덕궁 관람정(觀纜亭) 존덕정(尊德亭)과 반도지(半島池)

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정자로 관람정은 지붕이 합죽선 부채꼴이며 존덕정은 2층 겹 육모지붕의 정자다.
아래로 흐르는 물은 한반도 지형을 본떴다는 반도지로 추정된다.



1910년 창경궁 항공 사진




1917년 내전 일대에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의 창덕궁 모습이다.




1922년에 고국을 방문한 이왕세자 일행이 동경으로 돌아가기 전 어느 날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기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첫줄 왼쪽부터 정무총감 부인, 사이토 총독 부인, 의친왕비, 이방자 여사, 순정효황후, 순종, 이왕세자, 의친왕, 

사이토 총독, 정무총감 등의 순서다.




1922년 이왕세자 내외의 창덕궁 체류 중 후원 나들이를 촬영한 장면으로 보인다.

건물은 영화당이며, 맨 앞부터 뒤로 순정효황후, 이왕세자, 이방자, 덕혜옹주 등이 보인다.




1926년 6월 10일 오열하는 궁녀들.

조선 마지막 순종효황후 윤씨의 승하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황실의 궁녀들이 오열하고 있다.




1926년 6월10일 순종이 승하하자 순종의 빈전이 있는 창경궁앞에서 곡을 하는 학생들




1926년 6월10일 순종이 승하하자 순종의 빈전이 있는 창경궁앞에서 곡을 하는 학생들




일본 칙사가 창덩궁 희정전앞에 도착했다.




일본 칙사




일제 강점기 창덕궁 인정전 앞 마당의 박석을 없애고 화초를 심고있다.

조선의 문무고관들이 왕에게 하례하던 상장적인 공간을 일제가 훼손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1930년 창경원




1930년대 서울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근처에서 통학중인 배재고보 학생들




1945년 10월 창덕궁 후원의 모습




1955년 창경궁 산업 박람회




1955년 창경궁 산업 박람회




1956년 서울 창경궁에서 열린 반공 전람회 인파




1959년 창경원의 벚꽃놀이를 즐기러온 시민들로 경내를 가득 메웠다.




1961년 창경원 경내의 연못에서 보트 놀이는 즐기는 시민들




1962년 창경궁 춘당지




1963년 창경원 동물원에서 코끼리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코끼리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1967년 창경원의 벚꽃놀이를 즐기려 온 시민들이 한데 모여 춤을 추고 있다.




서울 창경궁 정문 홍화문 앞 도로의 지프형 승용차와 국산 디젤 버스




박정희 대통령이 창덕궁 후원과 창경원을 예고없이 방문해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창경원 내 동물축사 앞에서 동, 식물원 개원 60주년 행사를 하고 있다.




1970년대의 창경원




1970년대의 창경원.

코끼리 들어오는 날




1970년대의 창경원

완연한 공원의 모습이다.




1970년대의 창경원




1976년 창경원의 봄나들이 인파




창경원의 정든 우리를 떠난 동물들이 서울대공원으로 가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창경원에 새 식구로 입주하는 기린의 키가 정문인 홍화문보다 높아 

이 곳을 통과시키기 위해 사육사들이 매달려 고개를 숙이게 하려 하고 있다.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의 옛 모습
2018.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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