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스기가 찾던 최종도료, 어쩌면 '옻' 外

2018. 10. 10. 09:54과학 이야기



스텔스기가 찾던 최종도료, 어쩌면 '옻' [모든 것의 시작, 나노⑬] 더나인칼라, 전통 옻 과학적 성분 밝혀 산업화 개척
옻칠 도료 상품화부터 대전방지·전자파차폐 등 첨단산업 적용도료 개발 완료

입력 : 2018.09.27|수정 : 2018.09.28




"저, 옻 알레르기 있어요. 웃기죠?"
 
국가 연구소에서 25년간 일했던 그에겐 현대 화학이 환경을 오염시켰다는 마음의 빚이 있었다.
연구소를 나와 대학에 몸을 담으면서부터 기업을 이끌어 온 18년째 '옻'을 연구했다.
옻을 쫓아 아시아를 누비고, 옻 성분의 모든 분자구조를 과학적으로 밝혀내 객관적인 품질기준을 세웠다.
덕분에 장인의 동굴에서 나온 옻은 예술가의 물감으로 시작해 스텔스기에
 입혀질 새로운 쓰임까지 만났다.

 
물감이 묻어 얼룩덜룩한 가운을 입고 나타난 한종수 더나인칼라 대표는 마침 도료 원액을 생성 중이었다. 한 대표는 공정 확인 겸 설명 차 직원을 불러모았다.


   "이 과정이 천연 옻칠을 가공하는 마지막이잖아요. 처음에는 낮은 온도에서 용제를 뽑아내고, 높은 감압(high vaccum)상태로 더 이상 증발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완전하게 뽑아내야 합니다.이것으로 다양한 도료를 만들기 때문에 이 과정이 매우 중요해요."
 

옻 채취<사진=더나인칼라 제공>옻 채취<사진=더나인칼라 제공>

옻은 옻나무 수액으로 얻는 천연수지다. 굳으면 단단하고, 불과 물에 강하며 썩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선 기원전 4세기의 칠기가, 중국에선 진시황 무덤 병마총에서 옻칠 갑옷이 발견됐고 일본의 영문명인 '저팬'은 옻칠기를 뜻할 정도로 주 원산지인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애용해왔다.

한 대표는 가내수공 재료로 머물던 옻의 화학구조를 모두 밝혀 옻칠 지도를 만들고, 2013년 천연 옻칠도료 제품군인 '구채옻칠'을 생산 출시했다. 이로써 다루기 까다롭다는 옻을 누구나 쉽게 칠할 수 있도록 대중화시켰다.
 
옻은 산업화를 넘어 첨단화로 달려간다. 한 대표는 옻의 전자파차폐 성질을 극대화해 스텔스(레이더 회피)기나 EMP(전자기기 훼손 전파) 방호까지 쓰이도록 응용연구를 마쳤다.
 
전자파차폐 우수한 옻, 탄소나노튜브 혼합해 스텔스기 도료 가능
 
미군의 전투기 'F-22 랩터'는 모의전에서 한대가 144대를 격추한 전력을 자랑한다. 모의전 참가 조종사들은 "랩터가 눈앞에 보이는데 레이더에도 안 걸리고 록 온(조준 고정)도 안 되는 엄청난 스텔스 능력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적의 레이더를 회피하는 스텔스 능력은 현대 무기의 척도다.
 
스텔스기는 레이더 전자파를 흡수하는 탄소나노튜브가 함유된 특수 도료를 쓴다. 그러나 기동 중 도료가 벗겨져 재도색이 필요하다. 또한 탄소나노튜브는 스스로 뭉치는 성질이 강해 분산처리가 필수다. 스텔스 도색은 상당한 기술력과 비용이 따른다.
 

전자파차폐용 옻칠 샘플을 든 한종수 더나인칼라 대표<사진=윤병철 기자>전자파차폐용 옻칠 샘플을 든 한종수 더나인칼라 대표<사진=윤병철 기자>

"옻이 탄소나노튜브와 궁합이 잘 맞아요. 둘을 그냥 섞으면 됩니다."
 
한 대표는 "옻이 탄소나노튜브와 잘 섞이는 구조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2017년 출원한 '전자파 차폐용 옻칠 도료 조성물 및 이의 제조방법' 특허를 통해 옻칠이 전자파차폐 도료로서 우수한 재료임을 입증했다.
 
초경량·고강도에 전자파차폐 성질까지 갖춘 옻은 스텔스기와 무인자동차, EMP 차폐막 등 산업과 군사용 코팅재로 가능하도록 선행연구를 마쳤다. 

한 대표가 한밭대학교 산학협력단과 개발한 대전방지용 옻칠도료는 반영구적인 성능을 가지며, 전자파차폐 옻칠 도료의 수준은 표면저항 1x10 –1Ω/cm2, 전자파 차폐율 60dB(99.9999%) 이상 수준에 이른다. 또한 나노융합산업연구조합의 지원사업 'T2B' 도움으로 전자파차폐 소재개발을 준비하고 있다.
 
옻의 비밀 '우루시올' 화학식 전부 밝혀져 산업화···한국 토종 옻나무 보존해야"
 

옻으로 만든 각종 도료. 우하단은 스위스 회사에서 의뢰한 상온경화용 옻칠 샘플. <사진=윤병철 기자>옻으로 만든 각종 도료. 우하단은 스위스 회사에서 의뢰한 상온경화용 옻칠 샘플. <사진=윤병철 기자>


   "2013년 미국에서 열린 '아시아 레커 심포지엄'에 연사로 가 한반도의 황칠과 옻칠을 소개하니, 전 세계에서 온 500여명이 매우 높은 관심을 보였어요. 옻칠은 '검을 현(玄)'처럼 특유의 깊이가 있습니다. 다시금 옻의 저력을 확인했죠."
 
옻칠은 빛을 산란시켜 얇게 칠해도 깊은 색을 보인다. 이런 색상은 화학도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옻칠이 없는 서양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옻은 특이한 광택뿐 아니라 열과 물, 부식에 강하며 썩지 않고 절연의 특성까지 보이는데, 주성분인 '우루시올' 때문이다.
 
우루시올은 카테콜 구조에 긴 불포화 알킬 사슬이 연결된 화학 구조를 갖는데, 이는 옻나무에서만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분자구조다. 화공학 박사인 한 대표는 지구상 모든 옻칠 계열의 분자구조식을 규명했다.
 
또한 2013년 문화관광부의 지원으로 옻나무가 자생하는 아시아 일대를 탐방했다. 한국과 일본, 같은 위도의 중국에서 자라는 옻나무에서 채취한 성분이 고품질의 옻칠 재료임도 밝혔다.
 
'때를 맞춰, 얇게 덧칠함'은 그동안 장인들에게 전수되던 옻칠 요령이다. 이는 우루시올이 옻에 함유된 산화효소인 락카아제가 공기 중에 반응해 경화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경험의 산물이었다. 옻칠은 기상에 따라 건조가 어렵거나 부패하기 쉬우며 옻을 타는 일들이 잦아 까다로운 숙련의 작업을 필요로 했다.

한 대표는 경험으로 전수되던 옻칠의 특수성을 언제든 통제 가능한 과학적 데이터로 만들었고 다양한 기능의 도료로 대량생산했다. 옻이 대중화된 순간이다. 이 가운데서 그는 '황칠'을 특별히 여긴다. 

황칠은 투명한 황색을 띠는 옻으로 일반 옻보다 특효가 강하다. 고대 진시황이나 당 태종, 칭기즈칸 등 황제만이 사용했으며 북경 자금성 내부를 칠한 황금색 도료로도 알려졌다. 현재 황칠나무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한반도 서남해안의 난대림에서만 자생한다.

"황칠의 성분분석과 구조를 밝혀내고 정제방법 등 화학적인 연구를 마쳤지만 황옻이 귀하고 수급이 어려웠죠. 옻칠도 황칠처럼 황금색이 나도록 해보자고 시작해 황옻칠을 개발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한 대표가 직접 탐방 작성한 세계 옻나무 자생 분포지도 <그림=더나인칼라 제공>한 대표가 직접 탐방 작성한 세계 옻나무 자생 분포지도 <그림=더나인칼라 제공>

옻칠 주성분인 카테콜의 화학구조. 한 대표가 모두 밝힌 완성형이다. <사진=더나인칼라 제공> 옻칠 주성분인 카테콜의 화학구조. 한 대표가 모두 밝힌 완성형이다. <사진=더나인칼라 제공>
 

  현재 더나인칼라가 생산하는 브랜드 '구채옻칠'은 수성 물감부터 금속용 우레탄형, 프린트 잉크까지 도료 전 분야를 망라한다. 한 대표는 "옻칠의 대량생산은 옻칠 공예의 문턱을 낮추고 옻 문화의 대중화를 앞당긴 의미가 있지만, 더 큰 효과는 환경 안전"이라고 자평했다.
 
인공 화공약품을 쓰는 방부목이나 산업용 페인트는 주변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독성이 내재해 있다. 옻칠은 항부식성 등 산업에서 요구하는 요건에 맞으면서 환경친화적인 도료다.
 
한 대표는 "현재 유통되는 옻 도료는 중국산이 대부분인데 성분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쓰인다"며 "가장 품질이 뛰어난 토종 한국산 옻나무 생태가 교란되기 전에 품종 보존과 양식화가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지난 30년간 쌓아온 연구성과와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자했습니다. 단순한 사업이라 여겼으면 여기까지 못 오고 포기했겠지요. 옻은 우리 중 누군가라도 반드시 연구해야 할 한반도 미래의 농사이자 하늘이 한민족에게 준 선물입니다. 자연을 존중하는 화학을 옻을 통해 이뤄 보일 것입니다."

상호 '더나인칼라'는 일곱색깔 무지개색에 옻색과 황칠색이 더해진 아홉색깔 천연 색상을 뜻한다. <사진=윤병철 기자>상호 '더나인칼라'는 일곱색깔 무지개색에 옻색과 황칠색이 더해진 아홉색깔 천연 색상을 뜻한다. <사진=윤병철 기자>

2018.09.27 | 헬로디디





1. 천년의 빛 옻칠, 현대예술로 다시 태어나다

김선정 기자 | 승인 2018.07.31 10:17




국보 제140호 통일신라시대 나전 화문 동경







통영의 또다른 정체성,
옻칠의 본고장


   “옻칠의 본고장은 통영 아닙니까?”

우리나라 옻칠예술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내로라 하는 우리 옻칠 장인들은 모두 통영이 옻칠의 중심지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30년 전만 해도 통영의 젊은이들은 수산업, 철공업, 옻칠공예 중에 한 길을 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진로선택이었다. 천혜의 바다를 접하고 있으니 수산양식업이, 배를 수리하는 철공단지가 발달해 있으니 철공업이 발달했다.

그리고 또 한 길, ‘나전칠기’로 대표되는 옻칠공예의 길이 있었다. 통영이 옻칠예술의 본고장으로 인식된 데는 통제영 12공방에서 이어온 장인들의 명맥과 항남동에 있던 경남기술원양성소를 중심으로 한 인재양성 덕이다. 일제강점기 바로 직전까지 통제영 12공방이 있었고, 나라를 되찾은 1945년부터는 나전칠기제작소가, 1951년부터 1975년까지는 ‘경상남도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가 수많은 장인들을 배출해 냈다.

   명실공히 통영은 조선시대부터 전통을 잇고 있는 ‘옻칠의 본고장’이다.



경상남도 나전칠기 양성소는 현재 통영 항남동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옻칠예술과 나전칠기

   전통적인 한국의 옻칠은 나전칠기와 바꿔쓸 수 있는 말로 쓰였다. 소라나 전복의 껍데기를 벗겨내 만드는 나전이 옻칠로 만들어진 각종 공예품에 장식되면서, 옻칠로 된 것에는 어디나 나전이 붙는 것처럼 인식된 까닭이다.

하지만 고대의 우리나라 옻칠은 색 옻칠로 그림 문양을 그린 칠화칠기였다. 낙랑시대의 고분(평안남도)에서 출토된 채화칠협의 옷상자는 2천 년 전의 칠기 모습과 함께 천연 방부 방습의 옻칠의 기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고려시대 옻칠나전 바둑판과 바둑알 상자.

통일신라시대까지 우리나라 옻칠은 채색으로 멋을 낸 정제칠·채색칠·건칠이 주로 쓰였다.

나전으로 장식하는 나전칠기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운 옻칠공예의 한 분야다. 옻칠을 기본적인 바탕으로 하고 신비로운 빛깔의 나전으로 장식을 한 것이 ‘한국의 옻칠=나전칠기’라는 인식을 만들어냈다.

오직 동양에만 있는 옻칠

   사실 옻칠은 우리나라만의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8천년 전부터 옻칠을 사용했다고 하고, 일본은 9천 년 전부터 옻칠 그릇을 사용했다며 옻칠의 종주국임을 내세우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옻칠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중국, 일본, 베트남, 대만, 인도네시아, 미얀마, 태국 등 아시아에서 도료로 사용하는 재료다. 그리고 그 옻칠예술의 변별점으로 나전이 있다. 옻나무가 자생해 옻칠3국으로 불리는 한중일 중에, 중국은 계란 껍질을 이용한 조각기법이, 일본은 금을 사용한 마키에 기법이, 우리나라는 나전기법이 발달한 것이다.

옻칠이 나전을 포함하고 있는 셈이지만, 통영옻칠미술관 김성수 관장 ‘옻칠회화’라는 말을 만들어내기 이전, 고려시대부터 근대의 옻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나전칠기가 옻칠과 동의어처럼 쓰일 수밖에 없다. 통영 옻칠의 정체성도 나전칠기의 전통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원된 12공방.

12공방에서 꽃핀 통영의 나전칠기

   조선이 만든 군사계획도시 통영에는 12공방이 설치되어 있었다. 군영에 설치된 이 12공방에서는 궁궐에 진상되는 갖가지 공예품을 비롯해 종이, 가마, 솥, 부채 등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이 가운데 목공품을 만드는 소목방, 금속 장석을 만드는 주석방, 옻칠을 하는 칠방 등에서 나전칠기 작품이 분업 형태로 만들어졌다.

통영 나전칠기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나전칠기의 수요가 더욱 커진 19세기 중반에는 전문적으로 섭패작업과 자개무늬를 제작하는 패부방이 별도로 설치됐다. 이로써 통영은 조선시대 관수용 나전칠기를 생산 공급하는 최대 생산기지가 됐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피살된 1895년, 통제영은 조선의 지방제도 개편과 함께 폐영됐다. 12공방에서 일하던 장인들은 제각각 공방을 운영하며 민간에 제품을 판매하는 시장을 형성했다.

그로부터 15년 뒤 일본은 강제로 우리나라를 점령했다. 일제는 12공방 후예 나전장 10여 명의 공방이 있는 통영에 대형나전칠기공장을 여럿 설립했다. 통영나전칠기주식회사, 통영칠기제작소, 고우조다 나전칠기제작소 등은 일제가 설립해 수탈의 도구로 사용한 곳이지만, 통영을 나전칠기 명산지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게 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옻칠의 명소를 만든 통영 출신의 김봉룡 장인.

일제강점기에 희망을 이은 통영의 장인들

   통영의 중요무형문화재 제54호 끊음질장 故 송주안 선생은 신기에 가까운 곡선 끊음질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아들 송방웅 선생은 1959년 아버지인 송주안 선생에게 사사받아 최근까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으로 활동했다. 80년대에는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대통령상, 장관상 등을 수상한 바 있고 1990년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끊음질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대를 이어 통영의 장인으로 전통문화를 계승한 것이다.


통영에서 대를 이은 송주안(오른쪽), 송방웅(왼쪽) 장인.

통영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나전칠기를 배운 일사 김봉룡 선생은 청년시절(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장식공예품박람회에 대화병을 출품해 은상을 수상했다. 1927년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우량공예품전에서는 금패를 받기도 했다. 

1967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장으로 지정되었고, 서라벌예술대학에서 나전칠기공예를 가르쳤다. 1969년에는 옻의 산지로 알려진 강원도 원주로 이주, 나전칠기·이조목기연구소를 설립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김봉룡 선생이 발자취를 남긴 원주는 선생으로 말미암아 옻칠공예 문화를 꽃피웠다.

경남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

   6.25동란 기간인 1951년, 2년 과정의 ‘도립 경남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가 통영 항남동에 설립됐다. 나전칠기의 제작기술교육뿐 아니라 디자인교육도 하던 인재의 산실이었던 이 양성소는 11년간 이어오다가 1962년에 충무시(현 통영시)로 이관, ‘충무시공예학원’으로 8년간 존속했다. 본과 3년, 연구과 1년의 교육기관인 ‘충무시공예학원’은 1971년부터는 ‘충무시종합공예연구소’로 변경해 1975년까지 이어졌다. 11년간 양성소에는 입소자 429명, 전 과정 공식 수료자가 82명이었고, 공예학원은 8년 반 동안 210명이 입학해 공부했다.

이곳에 기술강사로 부임해 후학을 가르치다가 1956년 부소장(소장은 도지사)으로 임명된 이가 바로 김봉룡 선생이다. 이 양성소에서는 서양화가 이중섭이 2년 동안 데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통영에서 옻칠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전통의 현대화에 앞장서고 있는 통영옻칠미술관의 김성수 관장도 바로 이곳 경남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 졸업생이다. 김성수 관장은 김봉룡 선생에게서 나전을, 이중섭 화가에게서 데생을 배웠다.

1925년,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장식공예품박람회에서 스승이었던 전성규 선생이 동상을 수상하고 제자인 김봉룡 선생이 은상을 수상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다.

잃어버린 전통 옻칠

   빛과 그림자는 항상 공존하기 마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현대나전칠기는 산업화와 함께 죽음이 시작됐다. 1980년대 초, 통영의 나전칠기업소 수는 200여개에 달해 ‘통영은 한 집 건너 나전칠기공장’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그 호황은 벼랑으로 가는 길이었다.

6.25이후 먹고살기에도 빠듯한 우리 살림에서는 고비용 저효율의 옻칠을 사용한 전통공예가 설 자리가 없었다. 천연옻칠의 생산은 중단되었고, 그 자리를 화학옻칠인 캐슈가 차지했다. 가공이 쉽고 값이 싼 캐슈에 나전을 이용한 문양을 붙임으로써, 너도나도 값싼 자개장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됐지만 우리 옻칠공예의 가치는 급락했다.

빨리빨리 모양만 비슷한 작품을 만들어내야 하던 그 시절, 우리는 옻칠만 버린 게 아니었다. 재료도 건축용 합판을 사용하고 제작과정에서도 천바르기를 생략했다. 밑칠에는 눈속임하기 좋은 호분을 사용했다. 궁궐과 고관대작의 가정을 중심으로 작은 소품 위주로 만들어지던 옻칠공예품이 1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에 장롱과 대형가구로 생산돼 유통됐다.

하지만 이 가짜 옻칠 제품들은 밀폐된 아파트가 새로운 주거공간으로 등장하면서 본색이 들통났다. 소비자들은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자개장’을 버리면서, 우리 옻칠에 대한 인식도 버려 버렸다.

경남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3회 졸업사진. 2번째 줄 왼쪽 첫번째가 통영옻칠미술관의 김성수 관장이다.

자개장이 아닌 옻칠예술

   “우리 전통옻칠을 버릴 수는 없다.”

수천 년을 이어온 옻칠에 대한 복원 운동은 예술계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옻칠의 본고장인 통영에서는 김성수 관장‘통영옻칠미술관’을 설립, 옻칠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우리 전통옻칠을 현대화하고자 모든 열정을 쏟고 있다.



영옻칠미술관 김성수 관장.

옻의 원산지인 원주에서는 해마다 ‘옻칠공예대전’을 열어 옻칠공예 인구의 저변확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상주에서는 ‘지천아트센터’를 개관, 나무가 아닌 종이로 옻칠을 현대에 되살려내고 있다.

물질만능주의가 무너뜨려버린 옻칠을 살려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우리 전통문화를 살리고 있다.

한려투데이가 옻칠예술에 관심을 갖고 기획특집을 마련한 이유는 어떻게 우리의 소중한 전통인 옻칠을 오늘날 되살릴 수 있을까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인 이번 기획취재는 2차대전의 포화 속에서 옻칠예술을 지켜낸 일본의 옻칠예술과 한국의 옻칠예술을 살펴, 한국 옻칠예술의 본고장인 통영이 할 일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 본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통영옻칠미술관에서는 전통을 현대에 되살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은 2016 국제현대옻칠아트전 개막식.

통영옻칠미술관의 기념품판매장.

원주로 떠나기 전 김봉룡 선생이 통영의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김선정 기자  64440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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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옻칠의 나라 일본, 옻칠의 도시 와지마(輪島)
김선정 기자 | 승인 2018.08.20 09:17

*** 사진은 아래 링크된 기시 본문을 참조하세요~~
바닷가에 있는 작은 생활공원 벤치에 옻칠 작품이 들어 있다.

천연 방부, 방습, 방충의 옻칠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말이 있다. 밤의 캄캄함을 나타내기 위해 옻칠의 하나인 흑칠 이미지를 가져온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칠흑’이라고 하면 ‘아~’ 하고 알아들을 만큼 흑칠의 색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니, 옻칠이 얼마나 밀접하게 생활 속에 자리잡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옻나무에서 나오는 진액을 정제해 도료로 사용하는 옻칠은 천연 방부, 방습, 방충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내열, 내수성이 뛰어나 예부터 옻칠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

천년 전 옻칠 함 속에 보관된 자연소재의 옷이 썩지 않고 고스란히 발견되는 이유는 옻칠의 방부, 방습, 방충 기능 때문이다. 옻칠작품들이 가득한 통영옻칠미술관에는 여름에 문을 열어놔도 모기가 없단다.

하지만 옻나무 하나에서 뽑을 수 있는 옻액의 양이 적고 제작과정이 복잡해 옻칠은 생활 속에서 상용되기에 무리가 있는 재료다. 오죽하면 ‘옻 한 방울, 피 한 방울’이라는 말이 다 있을까. 옻칠은 궁궐을 비롯한 고관대작의 소품으로 이용됐다.

‘칠예’란 옻칠로 만든 작품을 이르는 말이다. 옻칠은 페인트처럼 한두 번 칠해서 색을 얻을 수 있는 도료가 아니기 때문에 ‘예술’로 불릴 만큼 제작 과정이 까다롭고 정성을 요한다.


금을 사용해 화려하게 장식하는 와지마누리.

기다림이 만드는 깊은 작품

   생활기물로 쓰이는 나무 목지든 회화를 위한 캔버스든 일단 바탕이 되는 ‘백골’에 생칠과 정제칠을 하는 과정만 해도 칠하고 건조하고 연마하고, 다시 칠하고 건조하고 연마하는 과정을 수십 번 반복한 끝에 제대로 된 옻칠 바탕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 바탕 위에 장인들은 나전을 입히거나 그림을 넣어 예술작품을 탄생시킨다.

아무리 작은 소품도 이런 과정을 생략할 수 없기 때문에 옻칠 작품은 몇 시간 만에 만들어낼 수 없다. 수없이 많은 덧칠과 건조, 그 긴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서서히 완성되는 인고의 작품이다.

오랜 기다림이 빚은 옻칠은 깊고 무거운 둔탁한 빛을 머금고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빛은 세월이 지날수록 맑고 가벼워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스스로 발색하며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런 매력 때문에 그 복잡한 제작과정에도 불구하고 옻칠예술은 계속 새로운 마니아들을 만들어내고 예술가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옻칠의 도시 와지마의 거리.

옻칠의 나라, 일본

   일본의 영문명 ‘Japan’을 소문자로 쓰면, ‘옻칠(japan)’이라는 뜻이 된다. 중국의 영문명 ‘China’가 ‘도자기(china)’에서 가져온 것처럼, 일본의 나라 이름은 옻칠에서 가져온 것이다.

일본 옻칠역사는 9천년이 된다고 한다.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죠몬시대’부터 옻칠로 된 장신구와 주술도구, 식기 등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홋카이도, 호쿠류와 동일본 지역에서는 칠기 제조 과정을 보여줄 만큼 다양한 주칠 칠기가 출토되기도 했다.

“칠기는 일본의 기반문화입니다. 옻칠의 도막은 철을 녹이는 염산이나 질산, 금을 녹이는 왕수, 도자기나 유리를 녹이는 불화수소에 대해서도 거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또 옻칠의 도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투명도를 더해 아름다운 광택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감성의 도료, 치유의 도료’라고도 불립니다. 칠기는 일본인들의 정신문화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와지마시청의 호소가와 씨는 칠기를 ‘일본의 근간’이라고까지 말한다.

일본은 옻칠을 ‘우루시’라는 고유의 이름으로 부르며, 지방마다 특색 있는 옻칠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그중 일본 내에서도 가장 인정받는 ‘옻칠의 본고장’은 혼슈지방 북쪽 노토반도에 있는 와지마시이다. 와지마시는 전통적인 옻칠 문화가 응집돼 있어 ‘옻칠의 도시’라고 불린다.


일본 최고의 옻칠 고장 와지마

와지마시는 전국이 옻칠공예의 명산지인 일본이 ‘옻칠의 본고장’으로 여기는 곳이다. 와지마에서 만들어지는 칠기는 ‘와지마누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옻칠 위에 금가루로 문양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일본에서 칠기는 어느 한 지방의 특산물이 아니다. 지방마다 고유한 기법이 있을 뿐, 나라 전역에 칠기 문화가 퍼져 있다.
옛날부터 일본은 결혼할 때 신부가 준비해 가야 하는 혼수품에 반드시 면기나 찬합 같은 옻칠 그릇이 포함됐다.

도자기보다 투명하고 화려한 와지마누리는 일본 전역에서 사러 올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산업화와 더불어 일본 전역의 칠기 산지들이 무너질 때, 와지마시는 오히려 각지의 장인들을 불러모아 전통문화를 지켜나가며 새로운 옻칠 공예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일본 칠기 산지 중 유일하게 ‘와지마누리’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조합에 의한 철저한 관리 덕에 와지마누리는 와지마를 벗어나면 가격이 더 높아졌다.
기술을 존중하는 일본인들은 와지마누리를 구입하러 기차를 타고 변방의 이 바닷가마을을 여행하기도 했다.


칼로 문양을 긁어 옻을 접착제 삼아 금분을 뿌리는 침금기법.

견고하고 아름다운 와지마누리

   와지마시는 우리나라와 동해를 마주대고 있는 작은 도시이다. 울창한 삼림과 밀가루분말보다 더 고운 규조토가 나서 예로부터 옻칠의 산지로 주목받았다.

와지마에서 생산되는 칠기는 ‘지노코’라 불리는 규조토를 섞은 옻칠 도료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초과정에서 옻액과 섞여 견고한 옻막을 만들어내는 이 규조토 덕에 와지마누리는 얇으면서도 견고한 작품이 된다.

바탕칠에서 파손되기 쉬운 부분에 천을 발라 보강하는 ‘누노기세’라는 공정을 거치는 것도 와지마누리의 특징이다. 여기에 조각칼로 문양을 파내고 금가루를 채우는 방식의 ‘침금’과 옻의 접착력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금가루를 뿌리는 ‘마키에 기법’으로 칠기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이 모든 공정은 철저한 분업으로 이루어진다. 2017년말, 와지마시에는 503개의 칠기 공방이 있다. 나무를 깎고 만들고 바탕칠을 하는 업체가 28개, 중칠을 하는 업체가 236개, 마지막 도색을 하고 침금이나 마키에기법으로 문양을 내는 업체가 228개, 그 외 종합 업체가 11개다. 칠기 관련 종사자 수는 1천 349명이다. 그릇 하나가 만들어지는 데도 수없이 많은 공방과 기술자가 관련되는 것이다.

그래서 와지마누리는 ‘아무개의 작품’이라고 불리지 않고 ‘와지마누리’라고 불린다.



고령의 장인들이 많다.

거스를 수 없는 경제논리 앞에서


   그러나 우리의 옻칠이 산업화와 더불어 급격한 사양길에 들어선 것처럼, 일본도 서구에서 밀려오는 산업화의 물결에 전통공예가 위기를 맞았다. 19세기 말, 메이지유신으로 급격히 서구의문화가 밀려들자 교토, 에도, 오와리 같은 칠기의 큰 산지들이 무너졌다.

제2차 세계대전도 전통문화의 큰 변수가 됐다.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전쟁에서 패배한 마당에 백여 가지 공정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옻칠공예 작품들은 정통성을 지켜나가기 힘들었다. 중국에서 옻칠 수입이 중단되고, 산지 대부분이 합성수지 도료로 전환했다.

일본 정부가 예방의학 차원에서 옻칠을 장려하며 옻칠그릇을 상용하도록 권했지만 값싸고 견고한 플라스틱 제품은 칠기의 자리를 서서히 밀고 들어왔다. 옻칠 그릇들이 일본인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국민의 건강을 지켜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일본이 전쟁과 산업화의 거센 소용돌이를 지나 환경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선진국이 되면서는 그마저도 명분이 퇴색했다. 옻칠의 예방의학도 필요없을 만큼 깨끗한 나라가 됐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일본의 젊은이들은 혼수로 옻칠 그릇을 준비하지 않는다.


바탕칠을 하고 있는 장인.

고비용, 저효율의 옻칠-와지마누리도 사라지게 될까?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이 거대한 흐름은 옻칠의 본고장 와지마시도 비껴갈 수 없었다. 다른 도시와 달리 2차대전과 산업화 위기에 오히려 장인들을 불러모아 옻칠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와지마시이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꾸준히 종사인구가 줄고 있다. 1990년에 878개 업체, 2천893명이던 것이 2017년에는 503개 업체 1천349명으로 줄었다.

물론 이는 고비용 저효율의 옻칠 자체의 문제 뿐 아니라 일본의 인구 감소와도 관련이 깊다. 일본의 인구는 2008년에 1억 2천808명으로 정점을 찍고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대로라면 앞으로 30년 뒤에 일본은 인구 1억 명 선이 붕괴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지마시에서는 계속해서 젊은 인재를 확보하고 종사자의 자질을 향상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해외의 판로를 개척하고 관광자원을 활용하여 와지마로 사람을 불러들인다.

이런 노력의 성과를 1:1로 증명할 수는 없다. 국가와 지자체가 나서 파격적인 지원을 하는데도 칠기관련 종사자와 수익금이 하향세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와지마 시청 관계자는 “와지마누리를 살리기 위한 여러 정책을 쓰고 있지만, 앞으로 10년 뒤에는 어찌 될는지 알 수 없다.”며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리고 효율적이지 않기에 와지마에서도 옻칠이 사라질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와지마누리는 ‘경제’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치를 일본에서는 오늘날 어떻게 일궈내고 있을까?

<다음 호에 계속>

• 본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선정 기자  64440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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