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유인첩(黃裳幽人帖)에 제함 / 다산시문집 제14권 / 제(題)

2018. 10. 11. 22:42다산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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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시문집 제14권 / 제(題)


황상유인첩(黃裳幽人帖)에 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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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周易)》이괘(履卦)가 무망(无忘)으로 변하는 효사(爻詞)에,
“유인(幽人)이라야 정(貞)하고 길(吉)하다.”
고 한 것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간산(艮山)의 아래와 진림(震林)의 사이에서, 손(巽)으로써 은둔(隱遯)하여 천명(天命)을 우러러 순응하며, 간산에는 과일을 심기도 하고 진림에는 채소를 심기도 하면서, 큰 길을 밟으며 평탄하게 걷고, 천작(天爵 인간 본연의 덕성)을 즐기며 화락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은사(隱士)의 느긋함이니 유인(幽人)의 일이 그야말로 길(吉)하지 아니한가. 하지만 하늘은 매우 청복(淸福)을 아껴서, 왕후(王侯)ㆍ장상(將相)의 귀(貴)와 도주(陶朱 월(越)의 여(范蠡)의 별명)ㆍ의돈(猗頓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의 대부호)의 부(富)는 세상에 거름과 흙처럼 널려 있으나 이괘(履卦) 구이(九二)의 길(吉)을 얻은 사람은 세상에 알려진 일이 없다. 옛 사람의 기록에, 장차 전원(田園)으로 나아가려고 한다고 하였는데, 장차 나아가려고 한다는 것은 분명 나아간 것은 아니다. 탐진(耽津 전라남도 강진(康津)의 옛 이름)의 황상(黃裳)이 그 세목(細目)을 물어왔으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역을 선택할 때는 모름지기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골라야 한다. 그러나 강을 낀 산은 시냇물을 낀 산만 못하며, 마을 입구에는 높은 암벽이 있고, 조금 들어가면 눈이 시원하게 확트인 곳이라야 비로소 복지(福地)인 것이다. 중앙에 국세(局勢)가 맺힌 곳에 초가집 3~4칸을 짓되, 나침반을 가지고 좌향(坐向)을 정남향으로 정하고 아주 정교(精巧)하게 지은 다음, 순창(淳昌)의 설화지(雪華紙)로 도배를 하고, 문미(門楣 문 위에 가로 댄 나무)에는 담묵(澹墨)으로 그린 산수화(山水畫)의 가로 그린 그림을 붙이고 문 곁에는 고목(槁木)과 죽석(竹石)을 그리거나 시를 쓰기도 한다. 방 안에는 서가(書架) 두 개를 놓고서, 1천 3~4백 권의 책을 꽂되 《주역집해(周易集解)》ㆍ《모시소(毛詩疏)》ㆍ《삼례원위(三禮源委)》와 고서(古書)ㆍ명화(名畫)ㆍ산경(山經)ㆍ지지(地志), 그리고 성력(星曆)의 법칙, 의약(醫藥)의 설명, 진련(陣鍊 진법과 훈련)의 제도, 군자(軍資 군수 물자)의 법식과 초목(草木)ㆍ금어(禽魚)의 계보(系譜), 농정(農政)ㆍ수리(水利)의 학설이라든가 기보(棊譜)ㆍ금보(琴譜) 등에 이르기까지 갖추지 않은 것이 없게 한다. 책상 위에는 《논어(論語)》 1권을 펴놓고, 곁에는 화리목(花梨木 열대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나무)으로 만든 탁자를 두고서, 도잠(陶潛)ㆍ사영운(謝靈運)ㆍ두보(杜甫)ㆍ한유(韓愈)ㆍ소식(蘇軾)ㆍ육기(陸機)의 시와 중국의 악부(樂府), 그리고 열조(列朝)의 시집(詩集) 등 몇 질(帙)을 올려놓고, 책상 밑에는 구리로 만든 향로(香爐) 한 개를 두고 아침 저녁으로 옥유향(玉蕤香) 한 잎씩을 피우며, 뜰 앞에는 향장(響墻 가림벽) 한 겹을 쌓되 높이는 두세 자가 되게 한다. 그리고 담장 안에는 갖가지 화분을 놓되, 석류(石榴)ㆍ치자(梔子)ㆍ백목련(白木蓮) 같은 것들을 각각 품격(品格)을 갖추되, 국화를 가장 많이 갖추어 되도록이면 48종류의 구색이 갖추어져야만 비로소 겨우 구비되었다고 할 것이다.
  뜰 오른편에는 조그마한 못을 파되, 크기는 사방이 수십 보 정도로 하고, 못에는 연(蓮) 수십 포기를 심고 붕어를 기르며, 별도로 대나무를 쪼개 홈통을 만들어 산골짜기의 물을 끌어다가 못으로 대고, 넘치는 물은 담장 구멍으로 남새밭에 흘러 들어가게 한다. 남새밭을 수면(水面)처럼 고르게 다듬은 다음 밭두둑을 네모지게 분할하여 아욱ㆍ배추ㆍ마늘 등을 심되 종류별로 구분하여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며, 씨를 뿌릴 때는 고무래로 흙덩이를 곱게 다듬어 싹이 났을 적에 보면 마치 아롱진 비단 무늬처럼 되어야만 겨우 남새밭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오이도 심고 고구마를 심어 남새밭을 둘러싸게 하고 해당화 수십 그루를 심어 울을 만들어서 진한 향기가 늦은 봄 초여름에 남새밭을 돌아보는 사람의 코를 찌르게 한다.
뜰 왼편에는 사립문을 세우되 쪼갠 대나무를 엮어 사립짝을 만들고, 사립문 밖으로 산 언덕을 50여 보쯤 올라가서 석간(石澗) 가에 초각(草閣) 한 칸을 짓고 대나무로 난간을 만들며, 초각 주위에는 무성한 숲과 길게 자란 대들을 모두 그대로 두어 가지가 처마에 들어오더라도 꺾지 않고 그대로 둔다.

  그리고 개울을 따라 1백여 보쯤 가서 좋은 전답(田畓) 수백묘(數百畝)를 장만해 두고 늦은 봄철마다 지팡이를 끌고 전답 가에 나가 보면 못자리의 새 싹이 파랗게 돋아나 푸른 빛이 사람을 엄습하여 한 점의 티도 없다. 그러나 몸소 농사에 손대지는 않는다. 또다시 개울을 따라 두세 궁(弓 여섯 자 되는 거리) 남짓 나가서 큰 못이 하나 있는데 둘레는 5~6리가 되게 하고, 못 안에는 연[芙蕖]과 가시연[菱芡]이 덮여 있다. 거룻배 하나를 만들어 그 위에 띄워놓고 달뜨는 밤마다 시호(詩豪)며 묵객(墨客)을 데리고 배를 타고 퉁소(洞簫)를 불며, 거문고를 타면서 못을 3~4바퀴 돈 다음 술에 취해 돌아온다.
그 못에서 몇 리를 가서는 작은 절 한 채가 나오는데 그 안에는 명승(名僧) 한 사람이 있어서 참선(參禪)도 하고 설법(說法)도 하며, 시를 즐기고 술도 좋아하여 중의 계율(戒律)에 구애받지 않는다. 때때로 그와 오가면서 세정(世情)을 잊고 유유 자적하게 지낸다면 이 역시 기쁠 것이다.

   당(堂) 뒤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용이 휘어감고 범이 움켜잡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고, 소나무 밑에는 백학(白鶴) 한 쌍이 서 있다. 그리고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작은 밭 한 뙈기를 마련하여, 인삼ㆍ도라지ㆍ천궁ㆍ당귀 등을 심고, 소나무 북쪽에는 작은 사립문이 있어서 이곳으로 들어가면 잠실(蠶室) 3칸이 나오는데, 이곳에 잠박 7층을 설비해 두었다. 낮차[午茶]를 마시고 잠실로 들어가 아내에게 송엽주(松葉酒) 몇 잔을 따르게 하여 마신 다음 방서(方書 누에 기르는 법을 기록한 책)를 가지고 아내에게 누에를 목욕시키고 실을 뽑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서는 서로 쳐다보고 빙긋 웃는다. 그런 다음에는 문 밖에 징서(徵書 조정에서 벼슬하라고 부르는 글)가 왔다는 소리가 들려도 빙그레 웃기만 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이 곧 구이(九二)의 길(吉)함이다.”

[주-D001] 이괘(履卦)가 …… 효사(爻詞) : 
《주역》이괘 구이(九二)의 효사를 가리킨 것이다. 이괘 구이의 양효(陽爻)가 동(動)하면 음효(陰爻)로 변하여 무망괘(无妄卦)가 되므로, 무망(无妄)으로 변한다고 한 것이다.
[주-D002] 간산(艮山) …… 하면서 : 
이괘(履卦)구이효(九二爻)가 음효(陰爻)로 변하여 무망괘(无妄卦)가 되는 것을 가지고 해석한 것이다. 간산(艮山)은, 무망괘 중에서 위로 상구(上九)ㆍ구오(九五) 두 양효(陽爻)와 아래로 초구(初九) 한 효를 떼면 간괘(艮卦)로서 산(山)의 괘상이 되는 것을 뜻하고, 진림(震林)은, 무망괘 중에서 위의 양효 셋을 떼면 진괘(震卦)로서 목(木)의 괘상이 되는 것을 뜻한다. 손(巽)은, 위의 양효 하나를 떼면 손괘(巽卦 겸손하여 자신을 낮추는 괘상)가 되는 것을 뜻하고, 천명(天命)은, 위의 건괘(乾卦)를 뜻한다. ‘간산의 과일’이란 《주역》설괘전(說卦傳)에 “간(艮)은 산이 되고 …… 과일이 된다.” 한 데서 온 말이고, ‘진림의 채소’란 역시 설괘전(說卦傳)“진(震)은 곡식 등을 심었을 때 싹이 터나오는 괘상이다.” 하였으므로, 이 곡식을 채소로 전용해서 쓴 말이다.




黃裳幽人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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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易》履之无妄曰:“幽人貞吉。” 余釋之曰:“艮山之下,震林之間。” 巽以隱遯,仰順天命,或蒔艮菓,或種震菜,履大道而坦坦,樂天爵以熙熙,此碩人之寬也。幽人之事,不已吉乎!顧天甚惜淸福,王侯將相之貴,陶朱猗頓之富,散之如糞土,而〈履〉九二之吉,世無聞焉。昔人有記,將就園者,將就也者,明未就也。耽津 黃裳,請問其目,余曰:“擇地須得佳山麗水。然江山不如溪山,洞門須有峻壁側石,稍入開朗悅眼,方是福地。就中央結局處,搆茆屋三四間,正子午盤針,匠治須極精巧,用淳昌雪華紙塗飾,楣上傅澹墨山水橫圖,門旁畫槁木竹石,或題小詩。室中置書架二部,揷架書一千三四百卷,《周易集解》ㆍ《毛詩疏》ㆍ《三禮源委》,及古書ㆍ名畫ㆍ山經ㆍ地志ㆍ星曆之法ㆍ醫藥之詮ㆍ陳練之制ㆍ軍資之式,及草木禽魚之譜ㆍ農政水利之說,以至棊譜ㆍ琴譜之等,無所不具。案上展《論語》一卷,旁有花梨几子,之詩,及《中州樂府》ㆍ《列朝詩集》等數帙,案底置烏銅香爐一口,曉暮燒玉蕤香一瓣,庭前起響墻一帶,高可數尺。墻內安百種花盆,若石榴ㆍ巵子ㆍ㬅陀之等,各具品格,而菊最備,須有四十八般名色,方是僅具也。庭右鑿小池,方數十武,便止。池中植芙蕖數十枋,養鮒魚,別刳䈽竹作水筒,引山泉注池,其溢者從墻穴流于圃。治圃須碾平如渟水然,割之爲方畦,蔡ㆍ菘ㆍ葱ㆍ蒜之等,別其族類,無相混糅,須用碌碡下種,苗生視之,有斑紬文,纔名爲圃也。稍遠,種瓜種甘藷,繞圃,植玫瑰累千株成籬,每當春夏之交,巡圃者得香烈觸鼻也。庭左立衡門,編白竹爲扉,扉外緣山坡行五十餘武,臨石澗起草閣一間,用竹爲檻,繞閣皆茂林修竹,枝條入簷,不須折也。沿溪行百餘武,得良田數百畝,每晚春,曳杖至田畔,見秧針齊綠,翠色染人,無一點塵土氣。雖然,勿躬治也。又沿溪行數弓許,得大隄一面,周可五六里,堤中皆芙蕖ㆍ菱芡,造艓子一枚泛之,每月夜,攜詩豪墨客,泛舟,吹洞簫,彈小琴,繞隄行三四遍,醉而歸。自隄行數里,得小蘭若一區,中有名僧一個,能參禪示法,嗜詩縱酒,不拘僧律,時與往還,忘情去留,斯足歡也。堂後有徂徠松數根,作龍拏虎攫之勢,松下立白鶴一雙。自而東,開小圃一區,種人蔘ㆍ桔梗ㆍ江蘺ㆍ山蘄之等。松北有小扉,從此入,得蠶室三間,安蠶箔七層。每午茶旣歠,至蠶室中,命妻行松葉酒數盞,旣飮,持方書,授浴蠶繅絲之法,嫣然相笑。旣已聞門外有徵書至,哂之不就。此卽〈履〉九二之吉也。”

173 ~ 1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