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무산소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김창호(49) 대장을
포함한 한국인 5명이 네팔 히말라야
다울라기리산 구르자히말 원정 도중에
실종된 김창호 대장 등 한국인 5명 시신을
13일 새벽(현지) 베이스캠프 인근에서 발견.
2018.10.14
산에 미친 두 남자
고 '김창호 & 임일진'
30년 동행, 한날 떠났다.
- 2018년 10월 13일 -
히말라야에 잠든., 김창호 대장.
여기는.,안나푸르나
2010.04.28 오은선 산악인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14좌 완등
국내 남자 히말라야 14좌 완등자., 6인.
2000년 7월 엄홍길, 2001년 7월 박영석,
2003년 7월 한왕용, 2011년 9월 김재수,
2013년 5월 김창호, 올해 7월 김미곤 등
.
엄홍길 산악인은 2000년 7월 K2를 끝으로 14좌 완등했으나 그 과정에서 시샤팡마와 로체 등정 여부로 시비
이에 따라 국내 최초의 14좌 완등자를 놓고 엄홍길이냐 박영석이냐 논쟁이 일기도 했다. 엄 대장은 2001년 9월 로체 & 시샤팡마 재등정
엄 대장은 이후 14좌 외에 그 부속 봉우리 '얄룽캉 & 로체샤르'까지 올라서., 16좌 등정
박 대장 실종 소식에 오열했던 엄 대장은 “일부에서 라이벌 의식을 부추겼지만 우리는 '산에서 경쟁은 곧 죽음을 의미.'를 알고 있기에 산악인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했다.”고., 회고.
2018년 10월 김창호 대장의 죽음. 故 박영석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2011년 10월 안나푸르나 남벽 실종.
당시 히말라야를 등반 중이던 김창호 대장은
자원해서 박 대장의 시신 수색조에 합류했다. 박 대장의 시신은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2018.09.06
세계., No 1. '산악강국'의 선도적 역활을 한.,'한국산악회',
故 박영석 산악인(1963.11.2 ~.2011.10.18 )
항공구조대.,빙벽훈련
우리나라 고산 거벽등반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둔.,박정헌.
안나푸르나 남벽(8,091m. 1994년)
에베레스트 남서벽(8,8848m. 1995년)
2000년 K2(8,611m) 남남동릉 무산소 등정
2002년 시샤팡마(8,027m) 남서벽 신루트 개척
2005년 네팔 히말라야의 촐라체 북벽 등정 성공
공기 희박한 히말라야 고봉에서
남들이 피하는 위험한 곳을 오르는
일은 일반인의 시각에서 보면 ‘미친 짓’.
하지만, 그 행위에 대한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일이었다.
높은 고도에서 펼치는 고난도 거벽등반.
고산 거벽 등반은 많은 위험이 따르는 행위.
작은 손짓에도 목숨이 좌우되는 순간의 연속.
신들린 듯 여러 개의 고산을 연이어 오르기 시작.
K2 남남동릉 무산소 등정,
시샤팡마 남서벽 신루트 등정,
가셔브룸 2봉(8,035m)
남남동릉 등정 성공 후
패러글라이딩 하산까지,
진보적인 등반이 이어졌다.
많은 이들의 극찬을 들었지만,
2005년 촐라체(6,440m) 북벽은
박정헌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등반에 성공했으나
하산 도중 부상을 당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것.
히말라야 난공불락 거벽등반이 시작되는
해발 4,900m 지점에서 정상까지 고도차가
무려, 1,500m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곳이다.
예전에 프랑스팀이 등반에 성공했지만,
알파인 등반으로 돌파한 유일한 박정헌 팀.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지 나흘 만에 거둔 성과.
하지만 그것으로 등반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하산 중 최강식이 커다란 얼음 틈 사이에 빠지며
박정헌은 묶고 있던 줄이 몸을 휘감으며 갈비뼈가
부러졌고 손에는 동상, 최강식은 두 다리가 부러졌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이틀 밤을 노지에서 보낸 끝에야
겨우 탈출했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박정헌은 사고의 후유증으로
손가락 8개., 한두 마디씩 절단
일부 발가락도 조금씩 잘라 냈다.
최강식은 양쪽 손가락과 발가락 절단
박정헌 산악인 & 후배 산악인 최강식'
산악인 박정헌 - "우리는 끝내 서로를 놓치 않았다."
도봉산 오봉., 3봉 등반
도봉산 오봉.,애기봉 하강
북한산 숨은벽 릿지등반
북한산 만경대 릿지등반
1920년 인수봉.
우리나라 근대등산은
1926년 5월 영국인 아처 &
임무(林茂)의 인수봉 첫등반.
만경대.,야마나카 ^
1929년 아처와 함께
인수봉을 오른.,일본인.
이보다 앞선 기록은 영국인 아처와
일본에 있던 영국인 매크리(Macrae)
두 사람에 의한 도봉산 만장봉 남벽 초등.
만장봉 낭만길 릿지
초등 발표연도가 ≪영국산악회보≫에 1931년
이로 미루어 본다면 1930년 4월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1925년 5월
일본인 이야마(飯山達雄)와 임무
두 사람의 북한산 보현봉과 비봉,
그리고, 백운대 암벽 초 등반 기록.
보현봉 릿지
비봉., 굴통 릿지
어쨌든 1925년 또는 1926년에 걸친
근대적 등반의 시작은 임무·이야마·
아처·매크리 등에 의해 개화되었다.
서울 근교 암벽을 차례로 초등하면서
1930년대부터 국내 알피니즘이 광역화
금강산·백두산·관모산, 북한산 적설기 초등
1927년 박석윤(朴錫胤) 알프스 몽블랑 등산
1920년대에는 한국여성산악부가 설립되었다.
1931년 재한 일본인 중심인 ‘조선산악회’ 창설
1935년까지 일본인에 의한 근교 암벽 초등 성행
1934년 도봉산 만장봉 등벽을 김정태·엄흥섭 초등
백령회
1942년 금강산 집선산장.
백령회 리더들.
1938년 말 ‘산악인금요회’가 ‘백령회’(회장 엄흥섭)로 결성
양두철(梁斗喆)·주형렬(朱亨烈)·김정태(金鼎泰)·이재수·방현(方炫)·
채숙 등이 서울 근교 암벽에서 새로운 코스에 의한 초등에 성공하였고,
적설기등반에서 '1941년 12월~1942년 1월'에 걸쳐 31일간 마천령산맥을
전산종주(全山縱走)함으로써 한국산악인의 저력을 과시하였다.
비록 일본인이 동행한 기록이 적지 않았으나
한국인에 의한 근대등산 실천과 선구적 업적은
1945년 8.15 광복 이후 산악운동의 기틀이 되었다.
1947년 지리산 노고단
백령회 & 조선산악회
(오늘날, 한국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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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인들은 금강산암벽이나
함경북도 산에서 기록을 남겨놓았으나
패전이 가까워지며 등산은 군사목적을
위한 훈련연습 성격으로 차츰 변질되었다.
죽음도 불사하는 자유등반이.,그것이다
오늘날, 국내 성행하는 릿지등반과 유사.
옛사람들은 등산을 시야 범위 내로 국한. 생존수단을 위한 수렵행위가 고작이었다.
우리 나라는 숭천숭산사상(崇天崇山思想) 여기에서 등산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단군신화에서 단군 강림은 대표적인 예
국내 산에는 어디를 가든지 사찰이 있다.
이는 산이 곧 '심신 수련장'을 의미하는 것.
화랑도 ‘유오산수무원부지(遊娛山水無遠不至)’
우리나라 민족이 일찌기 산과 가까이 하고 산을
문화의 무대로 인식하였다는 자랑스런 기록이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시조 온조 왕조에는 기원전 30년
“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溫祚)와 비류(沸流)가 부아악(負兒嶽)에 올랐다.” 기록
비록 택리적(擇里的)인 목적일지라도 2천년전 기록으로서 유럽과 비교할 때 세계적으로 선각적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육당 최남선(崔南善)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백(白)’자와 연유한 민족신앙으로서 산은 우리 민족의 독특한 자연관이었다.
이러한 민족적인 토착신앙 외에도 민속신앙으로도 볼 수 있는 기우(祈雨)· 기자(祈子)·초복(招福)을 산신령에 기원
산이 애니미즘(animism)의 구체적 상징.
삼국시대로부터 산은 가사(歌辭)문학의 대상.
723년(성덕왕 22)~ 727년
혜초가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 힌두쿠시·아프가니스탄 일대 구도 여행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에 기록,
이는, 곧 해외등산의 효시로 삼을 수 있다.
고려 말 정도전(鄭道傳)이 백두산을 등산한 기록.
조선시대에 와서 이성계(李成桂)가 덕유산 남봉에 제단을 쌓고 기원한 기록과 무학(無學)이 무악(母岳)과 삼각산 (만경대)를 오른 것은 도읍선정을 위한 등산이었다.
북한산 만경대.,릿지
그 이후 세종 때
수양대군 안평대군
북한산 보현봉 등산.
이는 당시 태양관측소가
보현봉이었기에 올랐던 것.
보현봉
세종이 국태민안 목적으로
왕세자들에 오르라고., 명령.
문종은 중도에 등반을 포기했다.
보현봉은 근래에도
오르기 힘들었던 곳.
현재, 출입금지 구역.
조선시대 보현봉은
조선왕실의 상징이자
보신각(종각)의 상징이다.
오늘날에는, 산에 오르는 행위를
모두 다 등산이라 정의할 수 없다.
산에 가는
모든 이들을
산악인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산에 가는 목적은
분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광부는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산에 가기 때문에 이들까지
산악인이라 하지 않는 것.
순수하게 산을 오르기 위한 목적으로
산에 오르는 것을 '등산'이라고들 한다.
등산은 그 결과에 만 주목하지는 않는다.
등산은 단지
정상 등정을 위해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정상에 오르는 과정에서
산의 혹독한 환경과 기상조건에
맞서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며 얻어지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하는 것이 등산의 목적이다.
근대 등산은
자기한계 극복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내기 어려운 수직 등반
3,000~4,000m높이 알프스에서
8,000m 높이 히말라야로 무대 이전
히말라야
미국 요세미테 자유등반
단독등반과 무산소등반을 시도하는 등
인간한계 극복의 도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암벽등반 역시 장비에 의존한 인공등반에서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만
오르는 자유등반의 시대를 맞이한다.
산악인은 스스로 어려운 과제를 선택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즐기며
궁극적으로는 자아실현에 가치를 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강한 정신력과 건강이
부산물로 얻어지는 것이다.
북한산 영봉.,응응바위.
인수봉
'고독의 길'
클라이머에게는
첫사랑 같은 곳이자
마지막 사랑 같은 곳이다.
첫사랑
'마지막 사랑'이게 하소서
仁壽奉 90~100 루트 중 族譜에 없는‘고독의 길’
그곳 루트 중 가장 쉬운 大衆的인 릿지 루트이다. 119구조대 활성화 전 孤獨한 조난자 哀歡 가득한 곳.
'인수봉 전면 오른쪽 끝.,'고독의 길' 들머리.
오랜세월 동안에 패인 물길 & 바위동굴 틈새 길. Z기류에 패인 정상부 거대한 침니 위로 펼쳐진 숲. 인수봉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긴장감 떨치기 어렵다.
인수봉은 믹스 클라이밍 동계훈련장으로 각광 받는 길. 믹스 클라이밍이란 한발에 플라스틱 등산화, 한발에 암벽화. 빙벽등반과 암벽등반이 뒤섞인 형태의 등반방식을 의미한다.
고독의 길에서 가장 하일라이트로 알려진., <영자크랙>
닳고 달아 미끄러운 '참기름 바위' 직전에 있는 어려운 구간. 참기름 바위는 사람들의 손때 묻고 발길에 닳아 붙여진 이름. 영자 크랙은 그 바로 아래 女性의 性器와 恰似한 포켓홀드 구간.
'그곳이 영자 크랙이라 불리우는 理由는 무엇일까?'
닳고 닳은 바위벽 한가운데 오름짓을 유혹하는 구멍. 그곳에서 안간 힘 다하는 山嶽人들 숨벅찬 오름짓 소리. 영자 크랙은 정상 문턱을 마지막으로 거부하는 듯한 크럭스.
영자의 全盛時代를
연상(聯想)케 하는데서
비롯된 이름이.,,O字 크랙
영자는 1960年代 儒敎的 倫理 道德의 嚴格한 틀을 깬 여인. 家族 扶養 멍에 짊어진 家長의 責任感 굴레에 갇힌 男性들 固定觀念에서 탈피해 破格的인 代理滿足을 안겨 준 新女性
"별들의 故鄕의 女主人公" 경아와 雙璧. 萬人의 戀人으로서 알려진 여인이 영자. 40/50대 추억속 사랑스러운 女人의 代名詞.
영자 크랙을 오르고
참기름 바위를 지나면
작은 숲 지나 인수봉 정상.
19세기에 생을 마감한 니체(1844 ~1900).
20세기 초 알피니즘을 지배했던 ‘단독 등반’
그때 젊은이들은 자일없이 맨몸으로 릿지등반.
단 한번의 실수도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위험한 등반이 성행했다.
20세기 초, 1차대전 2차대전
이 시기에 홀로 산에 오르다
숨진 산악인들 수는 부지기수.
그런데 당시 산을 오르다
숨진 산악인들 배낭 속에서는
니체의 철학 서적들이 있곤 했다.
목숨을 내걸고 단독 등반에 나선
염세주의적 경향 젊은이들의 죽음.
니체 영향을 받아 현세를 혐오한 흔적.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초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대표되는 니체의 초인사상이 과연
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신(神)은 죽었다."
니체의 초인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한 것.
결국 니체는‘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사(死)의 찬미자'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1,2차 세계대전 사이는 알프스 고봉들을
경쟁적으로 오르던 일피니즘 전성기였다.
그당시 알프스 초등 경쟁은
‘국가주의적’ 색채가 짙었다.
당시 누구보다 치열하게
이 경쟁을 주도해 나갔던
민족은 바로 독일인들이다.
히틀러는 니체의 초인사상을
정치 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켜
나치즘을 전파하는데 이용했다.
결과론적으로 니체가‘죽음을 무릅쓴
단독 등반’과 ‘국가주의적 등반 경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그렇다면 니체는 생전에
등산을 해본 적이 있을까?
니체는 여러 해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등산을 즐겼다.
한동안 산에 미친 '등산 마니아'
니체는 25살에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가 될 만큼 수재.
그러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1870년에 벌어진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에서 부상 후유증.
평생 편두통과
정신착란 증세에
시달려야 했을 정도.
게다가 호감을 주지 못하는
외모로 여인들과의 사랑에서도
번번이 실연의 쓰라림을 맛봐야 했다.
삶에 지친 그가 교수직에서
사퇴하고 이곳저곳 여행하다가
정착한 곳이 스위스 알프스 엥가딘
지역에 '질스-마리아' 작은 마을이었다.
유명한 산악관광지 생모리츠에서
수 km 떨어잠 해발 1,800m 고지대.
1879년부터 8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요양과 집필에 몰두하며 수도자 같은 삶.
그의 대표작들로 꼽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을 넘어서’, ‘도덕의 계보등
저서는 이곳에서 쓰여진 것들.
그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자주 올랐던 산들은 코바치봉,
라그레브봉, 데 라 마그나봉 등.
그중에서도 코바치봉(3,451m)은
그가 가장 즐겨 올랐던 산이어서
현지에서는 ‘니체산’으로 불린다.
이곳을 떠난 니체는 건강이 다시 악화.
마침내 바이마르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기간은 알프스 자락 엥가딘에
머물며 산을 오르내리던 8년 간 뿐이었다고 한다.
니체가 남긴 많은 명언
중에는 이런 말도 있다.
“진실(眞實)이라는 산맥을
타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다. "
"그러면 오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든지,
그렇지 않다면 내일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힘을 단련하는 결과가 될 것."
"신은 죽었다."
화장실벽 낙서.,명언.
.....................니체.........................
독일 태생의 철학자. 실존철학의 선구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생일날 태어난
아들 이름을 프리드리히로 지어준 아버지.
어려서부터 특출 나 주변의 인정을 받았고,
십대 나이에 벌써 자서전을 쓸 준비를 했다.
음악에 심취했던 그
《비극의 탄생》을 써
바그너에게 바치지만,
바그너가 기독교 예술을
추구하자 결별을 선언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이것은 쇼펜하우어가 자신을 위해 써놓은
책이라고 말하며 깊이 빠져들었다.
박사 학위 없이 추천사 만으로
바젤 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끊임없는 병마와 싸워야 했다.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와중에도 집필을 계속했고,
거리에서 쓰러져 12년간 혼수상태로 있다가 운명했다.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는 서구 기독교 전통을 부수고
그곳에 새로운 가치를 세우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
니체는 독일 동부 작센 주('체코 폴란드' 국경선)
뢰켄에서 개신교 목사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세 공주 가정교사.
왕의 특별한 주선으로 독일 '뢰켄'의 목사가 되었다.
왕의 생일 축제날 태어난 아들 니체.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여 아들의 이름을
'프리드리히 빌헬름'으로 지어주었던 것.
.
그러나 니체의 아버지는
어느날 밤늦게 귀가하다가
집 현관 앞 층계에서 넘어져
뇌진탕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25세 아내와
3자녀를 남긴 채.,
그리고나서 8개월 후에는
2돌 남동생 요제프마저 죽었다.
그후, 5세 니체는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함께 외가 생활.
그때부터 그는 외할머니와
어머니, 노처녀인 이모 두 명,
여동생 등 여자들 틈에서 성장.
그런데 이 여인들은
집안의 유일한 사내인
니체를 너무나 귀여워한
나머지 그가 여성적이고
섬세하며,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로 자라게 만들었던 것.
어린 시절의 니체는
무엇보다 기억력이 뛰어나
'꼬마 목사' 별명이 붙었을 정도.
그는 성경 구절과 찬송가를 기가 막히게 암송했고,
사람들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워서 즉흥 연주를 했고,
8세 때부터 작곡을 하는 등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다.
14세 때에 벌써 자서전을 쓸 준비를 했다.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특출한 학생으로
손꼽혔는데, 무엇보다도 음악과 독일어 작문에서
월등한 재능. 그러나 수학과 철자법은 다소 부진했다.
니체는 학교의 경직된 분위기와
낡은 도덕을 비웃으며 반항적 기질
한번은 학생들을 감독하고 보고서를
제출하는 일을 맡았는데, 다소 장난기
섞인 익살스러운 내용으로 기록했다.
엄격한 선생님들은 토요일에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했고,
벌칙으로 세 시간 동안의 감금과
몇 차례의 외출금지를 선고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본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입학 직후부터 대학생 사교 클럽에 들어가
회원들과 함께 극장출입, 담배와 술, 여자에 탐닉한다.
자신의 서투른 사교성을 극복해보려는
것이 클럽에 가입한 주목적이었지만,
곧 염증을 느끼고 탈퇴해버린다.
그는 어머니의 희망대로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과에
들어갔으나 성적은 신통치 못했다.
기독교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을 무렵,
리츨(개신교 신학자 자유주의 신학 거두)
교수의 권유도 있고 해서 결국 신학을 버리고 만다.
이듬해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가
본 대학에서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자세로 문헌학 연구에 정열을 쏟았다.
그러던 어느 날, 헌 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구입해서는 새벽 6시부터 다음날 밤 2시까지 꼬박
2주일에 걸쳐 탐독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꼭 나를 위해서 이 책을 써놓은 것 같다."
쇼펜하우어
이것은 니체가 철학과 관계를 맺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부터 그는
쇼펜하우어 철학에 심취해 친구들 여동생에게
까지 쇼펜하우어를 공부하도록 설득했다.
23세때 군대에 징집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1년 간 포병대에서 근무.
그러던 중, 말에서 떨어져
가슴에 타박상을 입고 제대.
이 사건은 그후에도 그를 평생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원인이 된다.
복학하여 대학을 졸업한 니체는
리츨 교수의 추천으로 박사 학위도 없이
스위스 바젤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다.
리츨 교수의 추천사 내용을 보자.
"나는 벌써 39년이란 세월 동안 젊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내 앞에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니체처럼
이렇게 젊은 나이에,
그리고 이렇게 빨리 성숙한
청년을 일찍이 본 일이 없다.……
니체는 천재다. 그는 하고자 하는
일을 무엇이나 이룰 수 있을 것이다."
25세 되던 해에 니체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그는 이미 교수이므로 우리는 동료를 테스트할 수는
없다'는 교수회의 결의에 의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물론 2년 전에 써놓은 다소 의심스런 논문
〈디오게네스 레어티루스〉를 학위 수여의
근거로 삼는다는 전제가 붙어 있긴 했지만.
그는 바젤 대학에서 대학이라는
울타리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풍부한 강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편두통, 치질, 가슴앓이, 류머티즘, 지독한
근시 같은 각종 질병으로 시달리던 니체는
보불전쟁이 나자 위생병으로 지원하여 종군.
그러나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
약을 잘못 쓴 탓에 이때부터
극심한 신경쇠약과 위장병으로
평생 병마와 싸우게 되는데, 항상
소화제와 수면제를 복용해야 했다.
27세에는 병으로
휴가를 얻었는데,
그 와중에서도 6주 만에
《비극의 탄생》을 써서 출판.
이 책은 기독교를 비방한 것,
음악가 바그너와 몇몇 친구
들로부터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학계는 이 책에 지독한 반감을 나타냈고,
학생들마저 그를 외면함으로써 다음 해 겨울 학기에는
단 한 사람의 청강자가 있었을 뿐이다. 물론 얼마 후 학생들이
되돌아오긴 했으나, 그 이전에 니체의 명성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니체는 여성에게 비정상적일 정도로 수줍음을 탔다.
하루는 하인에게 억지로 이끌려 사창가에 갔는데,
그는 잠시도 참지 못하고 재빨리 도망쳐 나왔다.
한번은 먼발치에서 본 여배우에게 푹 빠져
특별히 그녀를 위해 작사 작곡한 노래를
그녀의 집으로 보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또 음악가 바그너의 부인
코시마를 연모했으나 훗날 그녀를
자기 작품의 등장인물로 형상화했을 뿐.
스위스에 머물 적에는
자신의 머리에 떠오르는
젊은 여자들에게 모두 초청장
하지만 역시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
38세 때 21세 여성에게 사로잡히는데,
그녀 이름은 루 살로메로 젊고 총명하고
또한 그녀는 니체를 몹시 숭배하고 있었다.
........................루 살로메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꺾으세요. 나는 당신을 내 마음으로 잡을 것입니다. 내 심장이 멈추게 하세요. 그러면 내 머리가 고동칠 것입니다. 당신이 내 머리에 불을 지르면 그때는 내 핏속에 당신을 실어 나를 것입니다.
이 처절한 시는 천재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
'내 눈을 감기세요'(Lösch mir die Augen aus).
릴케가 애절하게 찾는 '당신'이 바로., 루 살로메.
루 살로메는 인정받은 작가이자 평론가였으며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저술이나 학문적인 업적보다는
'신은 죽었다' 니체(Friedrich Neitzsche)와
릴케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여인으로 유명.
그 시대의 뛰어난 남성들로부터
일방적으로 사랑받았던 루 살로메.
본명은 루이자 살로메(Luíza Gustavona Salomé)로
1861년 2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
루 살로메는 뛰어난 군인으로 차르의 측근이었던
구스타프 폰 살로메 장군 외동딸이자 막내 딸이다.
그녀 위로는 오빠만 다섯이 있어 귀여움을 독차지.
그녀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프로이트(Sigfmund Freud)는
그녀를 유심히 관찰한 후 이 시기에 다섯 오빠들이 지나친
관심과 애정으로 이 어린 소녀를 '공유'했기 때문에 후일 루가
남성들과의 일대일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루 살로메 전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특이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
그녀는 이들 중에 가장 특이하고
복잡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 인생에서 아버지와 오빠들을 제외하고
가장 처음 등장하는 남성은 네덜란드 출신의
루터교 목사인 길로트(Heinrich Gillot)였다.
그녀를 '루이자' 이름 대신
'루'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한 사람도 바로 이 사람
17살 루는 25살 연상 길로트 목사를 만났다.
당시 루는 지적으로 이미 성숙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회의론자였다.
그녀가 유부남 길로트를 처음 찾아간 것은
그가 황실에도 드나드는 유명한 목회자이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총아였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루는 종교에 대한 교육을 받으러
그를 매일 찾았지만,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길로트는 그녀의 연인이자 스승이었던 것이다.
루는 맑고 푸른 눈과 오뚝한 콧날,
육감적인 두터운 입술, 조그마한 얼굴,
날씬한 몸매, 가는 허리, 긴 다리 절세가인
기묘한 중성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여인이었다.
아주 납작한 가슴만이 그녀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길로트는 그녀에게 매료되었으며,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그녀에게 쏟아 부었다.
신학, 철학, 논리학, 비교종교학,
불문학, 독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길로트로부터 루에게 전수되었던 것이다.
루는 길로트의 무릎에 앉아
그 깊고 푸른 눈을 반짝이며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고,
길로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
이러한 순수하면서도 부도덕한 관계는
무려 2년이나 지속되었다. 길로트의 비극은
루를 성숙한 여인으로 오해했다는 사실이었다.
길로트는 자신의 무릎에 앉아 있는 루를 자주 애무
세게 껴안기도 했으며, 루는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이 루가 그에게
육체를 허용하겠다는 의사표현은 아니었다.
루는 육체적으로 아직도 어린아이와 마찬가지
길로트의 행위에 대한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
어느날 길로트는 루에게 진한 키스를 했다.
그녀는 대단히 혼란스러워했다. 그날 루는
길로트가 부인과 이혼하고 그녀와 재혼할
준비를 오랫동안 해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단호하게 결별을 선언했다.
"나는 영원히 당신의 아이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중략)
니체가 루를 처음 만났을 당시 니체는
젊은 시절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쇼펜하우어의 '미학적 염세주의'의 그늘에서
막 벗어나 고유의 철학체계를 구축하던 시기.
당시 그의 저술은 지나치게 난해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유럽을 통틀어 수천 명 정도의 마니아만이 그에게 매료
니체에게는 건강도 항상 골칫거리였다.
그는 평생을 심한 편두통에 시달렸는데,
바젤 대학교에서도 교수로 재직한 지 10년이
조금 지났을 때 편두통 때문에 교수직을 사임.
니체는 20세기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의
정신병이 발병하기 전까지는
그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
니체가 그녀를 처음 한 말.
"어떤 운명적인 힘이 우리를
서로 만나게 했던 것일까요?"
그녀를 자신의 유일한 제자라
여긴 니체는 그녀를 믿고 마음 속에
깊숙이 감추어둔 비밀까지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해 마침내 한 친구를 전령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친구 역시
루 살로메에게 반했기에
자신이 먼저 청혼을 해버렸다.
물론 니체는
일이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당연히 그 친구는 부정적인 대답을 알려왔고,
이렇게 하여 니체와 루의 관계는 끝나고 말았다.
니체는 이때를 '내 생애 최악의 겨울'이라고 회고.
결국, 니체 곁에 남아 있던
유일한 여자는 누이동생 라마.
그녀는 니체를 두고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나의 남자'라고 선언했다.
라마
그녀는 니체를 교묘하게 휘어잡아 꼼짝
못하게 하고, 심지어 그의 유고를 발간하는데
있어서 서류를 위조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볼 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 속에 나오는 '너, 여자한테 가니?
그럼 채찍을 잊지 마라!'라는.,구절.
이는 여성에 대한 니체의
태도를 잘못 전하고 있다.
니체는 여자 앞에서
채찍을 들 만큼 용감한
사나이가 아니었다.
그는 여자를
경멸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이중성은
어릴 때 집안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지낸 환경과 종교적
교육 때문에 생긴 결과로 보인다.
한편으로 그가 대학 시절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한 결과 매독에 걸렸고,
말년의 정신마비 증세 역시
이 후유증이라는 설이 있다.
"음악이 없었던들 나에게는
인생이 무의미했을지 모른다"
말할 만큼., 음악을 사랑한 니체
시간가는 줄 잊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즉흥곡을 연주하여 청중을 사로잡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마침내 바그너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니체는 바그너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최초의 저서이자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한
《비극의 탄생》을 써서 바그너에게 바친다.
그러나 4년 후인 1876년,
바그너의 새로운 오페라를
보러 갔다가 환멸을 느낀 니체
결국 그와 결별한다.
그가 보기에 바그너는
기독교적 예술을 추구
개인적으로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권력의 시녀
니체는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아아, 너도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구나.
너마저……. 아, 정복당한 자여!"
니체에게 적나라한
비판을 받은 바그너는
공격적인 내용이 담긴
편지를 잡지에 실어 공개
이 일로 극심한 타격을 받은 니체는
그후로 바그너를 마음속에서 지워버렸고,
어쩌다 마주쳐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외면.
건강 때문에 강의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니체는
네덜란드 여성 음악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성급하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한다.
또 다시 여성에게 상처를 입은 그는
알프스 산중으로, 지중해 연안으로 방황.
몸의 병 역시 극도로 악화되어 마침내 죽음을
각오해야 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는데, 심지어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약속해라! 내가 죽거든 내 관 옆에는
친구들만 서게 하고, 쓸데없는 조문객을
거절한다고. 목사나 누구를 막론하고 말하지
못하는 내 시체 옆에서 거짓말을 못하게 하고,
나를 정직한 이교도(기독교 외 종교를 믿는 사람)
로서 무덤에 들어가게 한다고."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는 바람에
그의 장례식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35세 때에는 교수직을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가지 원인이 겹쳤는데, 먼저 견디기 힘든
두통과 눈의 통증, 우울 증세를 들 수 있다.
또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
대학교수의 의미에 대한 회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보 같은 학생들을 상대하고 있다가는 자신까지
바보가 되고, 재능 없는 다른 교수를 상대하고 있다가는
자신의 재능까지 더럽혀진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니체는 불과 10여 일 만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2, 3부를 완성했다. 하지만 이 책은
1년 동안 겨우 60부가 팔려 나갔을 뿐이다.
그나마 제4부는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자비로 출판해야 했다.
그는 40부를 인쇄하여
친구 7명에게 증정했다.
무엇보다 니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외로워했고, 그리하여
어떤 때는 자기 책을 보며 몇 시간씩 울기도 했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고백했다.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외침에 대해 한마디의 대답도 듣지 못하는 것,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체험이었다."
44세 되던 해에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이사한 뒤,
니체는 점점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세가 심해지는 가운데에서도 《우상들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 등과 같은 마지막 저작을 써냈다.
이 책들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경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설가들은 이것들을
단순히 '정신병자의 넋두리'일 뿐이라고 혹평했다.
그 누구도 자유로운 정신의 반란이
숨어 있는 글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
이 상태에서 가치의 전도를 위해
여러 해 동안 벌여온 고독한 투쟁은
니체의 체력만 아니라 정신력까지 탕진
급기야는 시력마저도 거의 잃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말년에 쓴 그의 저작들은
악화되어가는 그의 신체적 조건을 이겨내는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45세 때에 급속히 몸이 쇠약해진 니체는
토리노 길거리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졌다.
그는 마부에게 학대받는 말을 끌어안으며 흐느껴 울었다.
혼란스러운 이야기로 횡설수설
그를 사람들은 집으로 옮겼다.
이틀 만에 깨어난 그는 완전한 정신착란에 빠졌고,
예나 대학병원에서 진행성 마비증 진단을 받았다.
기독교인들은 그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평생을 불우하게 보낸 니체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가 쓰러진 뒤였다.
그 후로 그는 계속하여
악기를 치고 노래를 하면서
거리를 배회했는데, 간혹
"나는 신이다.
다만 변장하고
있을 뿐이다"고
외쳤다고 한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간호와 여동생의 보살핌 속에서
12년이라는 세월을 혼수상태에서 헤매던 니체는 끝내
1900년에 심장 쇠약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그의 희망에 따라 친구 몇몇이 고별사를 낭독했다.
니체가 죽은 뒤
방대한 양의 유고와 편지는
누이동생 부부의 손에 넘어갔다.
사실 니체는
바그너의 신봉자이자
지독한 반유대주의자인
매부를 매우 싫어했다.
그렇지만 결국 유고가
누이동생 부부에 의해 멋대로
왜곡되고 꾸며져 출판됨으로써
그의 저작은 오랫동안 반유대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에 의해 악용되었다.
사실 니체는
독일의 군국주의를 거부하고
히틀러를 증오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서구문명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새로운
유럽 건설을 주창한 히틀러에게
유리한 입장을 마련해주고 말았다.
니체는 기독교와의 대결을 통해
모든 기존 가치에 대한 거부를 선언.
니체는 천박하고 병들고 약한 자만을 위하는
기독교 도덕은 노예도덕으로서 마땅히 파기
되어야 하며 대신에 고귀하고 건강하고 힘센
자들을 위한 군주도덕이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
그리하여 이제까지의 모든 가치 기준이었던
신에 대해 그 죽음을 선고하고('신은 죽었다!'),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초인(超人)사상을 피력했다.
초인이란 첫째, 대지(大地)의 의미다.
이 땅에 충실할 뿐, 하늘나라의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않는 자다.
둘째, 초인은
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자다.
셋째, 초인이란
영겁회귀의 사상마저
깨달을 수 있는 자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한 윤회를 거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런 자가 바로 초인이다.
니체는 머지않아
유럽에 허무주의(니힐리즘)가
도래할 것을 예언했다. 그러나
그 허무주의를 '동일한 것이
계속하여 다시 돌아오는'
영겁회귀의 사상으로
붙잡으려 했다.
그리하여 선악을
초월한 입장(선악의 피안)에서
도리어 현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강조하고 나섰던 것이다.
.
이성의 왕관을 벗기고 야성을
영광의 자리에 앉힌 사상가 니체.
사회개혁, 의회 정부, 보통선거제를 비난하고
과학에 의한 진보라는 당대의 풍조를 조롱하고
기독교 도덕을 매도하는가 하면 인간의 본성이
선하고 도덕적이라는 자유주의 사상을 비웃었다.
니체는 당대를 이렇게 진단하였다. 부르주아 사회는 퇴폐적이고 연약하다.
의지와 본능을 희생하며 합리성을 지나치게
발전시켜 탄생한 희생물이 부르주아 사회이다.
본능적인 욕구는
생명의 참된 동력이다.
이 어둡고 신비스런 세계에
대하여 충분히 인식해야만 한다.
지나친 지식으로
의지가 질식 당하면
삶의 창조력이 파괴되고
인간의 가능성이 제약받는다.
니체의 주장은 전통 서구의 사상흐름을 빗겨간
이단 사상으로 인간의 숨겨진 본능의 개발을 강조.
특히 기독교 윤리가
금지, 억제, 절제, 순종 등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본능의 자유 활동을
방해하는 원흉이라고 비판하였다.
기독교 윤리란 연약한 노예에게나
유용할 뿐이라 조롱하며 고대 세계에서
기독교의 승리란 강자로부터 용기를 빼앗은 약자의 혁명이라고 당시 니체는 혹평을 하였다.
또한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내세는
현세를 다스리려는 인간의지를 좀먹는다고
비난하며 기독교가 인간 본성과 정반대되는
금욕주의를 덕으로 키운다고 니체는 몰아세웠다.
계몽철학자들이 기독교 체계는 비판하되
기독교 윤리는 받아들인 것과 니체는 달랐다.
기독교가 이성과 어긋난다는 점에서
비판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윤리가
굴종의 정신을 전파한다고 부정하였다.
니체의 유명한 선언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신에 대한 생각을 잘 드러낸다.
신이 인간에 의해 창조된 허상이라 믿었다.
결코 죽음 이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과 기독교의 윤리를 없앰으로써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는 인간에게 신의 지위를
차지하도록 만드는 시도였다.
니체는 인간은 허무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여 인간 자신의
주인이 됨으로써 지금껏 상상할 수도 없던
새로운 세계를 만들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
그의 외침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했지만
사상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였다.
현대 문명이 내세우는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라는
평범한 세계를 없애고 초인과 영웅이 나타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니체는 유럽의 구원은
초인 등장으로 가능하리라 믿었다.
평등사상을 중시하는 노예적 사고에서
벗어난 초인은 열등한 인간들이 만든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파멸시키고 그의 도덕을 세워 열등한 인간을
이끌며 초인의 의지대로 새로운 세계를 다스릴 것이라 생각하였다.
또 전통 가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새로운 가치도 만들 것이라 기다했다.
니체 철학은 젊은이들에게 특히 인기을 얻었다.
현대 서구 문명의 본질적 폐단을 날카롭게 드러낸
니체의 초인 철학은 그 공과에 대하여 아직도 논쟁 중.
그러나 모든 사회복지정책을 무시하고,
전통 유럽의 제도와 가치관을 부정하면서
야성의 본능과 초인의 의지를 내세운 나치
집단의 대두에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하다.
니체는 독일의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폐쇄적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히틀러를
증오했음에 틀림없지만 그의 서구 문명
전통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유럽 건설을
자처한 히틀러의 입장에서 서도록 도왔다.
대중 문화에 기반을 두었던 나치가
열등하고 비겁한 대중 문화를 거부하였던
니체를 공식 이데올로기로 이용한 것은 아이러니.
.............
45세 때에 급속히 몸이 쇠약해진 니체는
토리노 거리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졌다.
그는 마부에게 학대받는 말을 끌어안고 울었다.
혼란스러운 이야기로 횡설수설하는 그를
사람들은 집으로 옮겼고 이틀 만에 깨어나
완전한 정신착란에 빠졌고, 예나 대학병원에서
진행성 마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를 두고
기독교인들은 그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평생을 불우하게 보낸 니체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바로 그가 쓰러진 이후였다.
그후로 그는 계속 악기를 치고 노래
거리를 배회했는데, 간혹 "나는 신이다.
다만 변장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외쳤다.
어머니의 간호와 여동생의 보살핌 속에서
12년이라는 세월을 혼수상태에서 헤매다가
끝내 1900년에 심장 쇠약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 그의 희망에 따라 친구 몇몇이 고별사.
니체가 죽은 뒤
방대한 양의 유고와 편지는
누이동생 부부의 손에 넘어갔다.
사실 니체는 바그너의 신봉자이자
지독한 반유대주의자 매부를 싫어했다.
그렇지만 결국 유고가 누이동생 부부에 의해
멋대로 왜곡되고 꾸며져 출판됨으로써 그의 저작은
오랫동안 반유대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에 의해 악용되었다.
사실 니체는 독일 군국주의를 거부
히틀러를 증오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서구문명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새로운 유럽 건설을 주창한 히틀러에게
유리한 입장을 마련해주고 말았다.
철학 속으로 니체는 기독교와의 대결을 통해
모든 기존 가치에 대한 거부를 선언.
니체는 천박하고 병들고 약한 자만을
위하는 기독교 도덕은 노예 도덕으로서
마땅히 파기되어야 하며 대신에 고귀하고
건강하고 힘센 자들을 위한 군주도덕이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의 모든 가치 기준이었던
신에 대해 그 죽음을 선고하고
('신은 죽었다!'), 새로운 개념
으로서의 초인(超人)사상을 피력.
초인이란
첫째, 대지(大地)의 의미다.
이 땅에 충실할 뿐, 하늘나라의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않는 자다.
둘째, 초인은 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자다.
셋째, 초인이란 영겁회귀의 사상마저
깨달을 수 있는 자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한 윤회를 거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런 자가 바로 초인이다.
.
니체는 머지않아
유럽에 허무주의(니힐리즘)가
도래할 것을 예언했다. 그러나 그
허무주의를 '동일한 것이 계속하여
다시 돌아오는' 영겁회귀의 사상으로
붙잡으려 했다. 그리하여 선악을 초월한
입장(선악의 피안)에서 도리어 현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강조하고 나섰던 것이다.
니체의 대부분 삶은
질병과의 싸움이었고
그의 하루 24시간 동안에서
2~3시간만 두통없는 편안한 삶.
그의 하루에 2~3시간 동안에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간 니체.
등산 명언.,모음
..............
등산에서
꾸준함이란
새로운 도전보다
훨씬 더 어려운 행위.
.............................
산에서 속도는 필요 없다
산에서는 돈과 벼슬이 필요 없다
산은 높고 크다
높은 곳에서는 멀리 볼 수 있고
부분이 아닌 전부를 볼 수 있다
산의 인내를 배우고
산의 침묵을 배워 지금은
다만 미소 만을 안다
산행을 통해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다시 채워준다
고되지 않은 산행은 즐거움이 따르지 않는다.
좋은 산행은
하루를 짧게 하지만,
인생을 길게 해 준다.
배낭이 무거워 죽지는 않는다.
필요한 것이 없어서 죽지...
옷은 덥기 전에 벗고, 춥기 전에 입어라.
산을 오를 때는 심장으로 하고,
산을 내려올 때는 무릎으로 한다.
배낭은 무겁게,
걸음은 가볍게,
마음은 즐겁게...
고통,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힘들 때 한 걸음 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山'이다.
우리의 발이 떠날 수는 있지만,
마음은 그곳을 떠날 수 없다.
등산의 기쁨은 정상에 올랐을 때 가장 크다.
그러나 나의 최상의 기쁨은
험악한 산을 기어 올라가는 순간에 있다.
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가슴이 뛴다.
인생에 있어서 모든 고난이
자취를 감췄을 때를 생각해 보라!
그 이상 삭막한 것이 없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정상에 서고 싶어 한다.
그 정상이란 반드시 산의 꼭대기가 아니며
하나의 종점이고, 모든 선이 모여 드는 곳,
소재가 생성하고 그 모습을 바꾸는 지점이라는 뜻이다.
이 지점은 적어도 상징적으로 세계가 ‘無’로
바뀌는 곳으로 모든 것이 완결되는 끝이며,
마력이나 자력처럼 나를 끌어당긴다.
등산은 길이 끝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왜 나는 산에 오르는가?”
이 물음에 대답할 말이 없다.
다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올라가야 한다는 것뿐이다
온갖 일들이 규칙적으로 묶여있는 오늘날,
우리 생활속에 남아 있는 비록 일시적이나마
완전한 자유로운 삶의 방식의 하나가 등산이다.
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알고 싶고
또 새롭게 느끼고 싶어서이다.
걸음은 어깨로 걷는다.
사람이 미끄러지는 것은
미끄러질 자세를 취하니까 미끄러지는 것이다.
하늘은 그의 사람됨을 키우기 위하여
먼저 그 심신을 괴롭히듯 산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사과나무는 영원히 사과 맛을 모른다.
앙상한 모습으로 겨우내 떨고 섰던 그 가지에
철만 되면 힘에 겹도록 사과를
주렁주렁 매어 달 줄만 알 뿐
사과나무는 그렇게 고생 하며
자신이 익혀낸 사과를
한번도 먹어보지 못했으면서도
늘 즐겁기만 하다
산은 누구나 오를 수 있다.
그러나,누구에게나
너그럽지 만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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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가는 산의 법칙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며 언제나
배워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헤르만 후버-
인간이 살지 않는 지구 위의 별천지! 그러나 이 오지에는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아름다움이 있으며 숲과 야생화와 초원의 천국이다. -라인홀트 메쓰너-
1978.낭가파르맛 무산소 단독 등정자
인간이 이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이루려고
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목표다 -모리스 에리족-
등산은 길이
끝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알랑 드 샤뗄리우스-
죽음과 암흑과 다시 없는 인생찬가. 산에서는 이두가지가 무서울 정도로 서로 등을대고 있다. 그사이에 좁은길이 지나간다. 한 줄의 발자국이 달리고 있을 따름이다. 이 갸냘픈 줄을 타고 알피니스트들이 행동한다. -토니히벨리-
우리가 암벽에얻는 즐거움은
어려운일을 성취했다는 기쁨과
수직으로 상승한다는 느낌이다.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이 마치
창공을 날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인간은 결코 대지에 매여 있는
벌레가 아니라 알프스의 영양이 된다.
아니 새가 되는 것이다.
-리오넬 테레이-
클라이밍은 위대한 행위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서가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위대한 것이다.
온갖 힘을 다 쏟아야 하는 행위이기에 멎지다. 언제나 최선이 요구되는 것이 클라이밍이다.
-로열 로빈슨-
확실히 내가 큰우정을 느낀 것은
어려운 등반을 하는 동안이며 산이
무서운 힘으로 저항해왔을때다.
-로베르 파라고-
황량한 산중에서 꼬박하루를 보내고 나서
문명의 불빛으로 밝은 인간의 세계를보면,
이를데 없이 멀고머 길이 오랜 시간에 걸쳐
나를 인류로부터 떼어놓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도 레이-
'왜 나는 산에 오르는가 ?'
이물음에 대답할 말이 없다.
다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올라 가야 겠다.` 는 것뿐이다 -마르쿠스 슈무크-
등산을 실천하는 속에는
어려운 산을 기어 오르려는
단순한 야심과는 다른 것이 있다.
어떤 정신이 있다
나는 가장 아름다운
정열을 산에 바쳤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받지 못한 보수를
산에서 받았다. -기도 레이-
등산가는 배꾼이나 시인처럼 선천적인 것이다. 만약 등산가가 될 팔자를 타고 났다면 언젠가는
어쩔 수 없는 힘으로 산에 끌려 가리라. -리카르도 카신-
온갖 일들이 규칙적으로 묶여있는 오늘날,
우리 생활속에 남아 있는 비록 일시적이나마
완전한 자유로운 삶의 방식의 하나가 등산이다. -폴베이사르-
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온게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알고 싶고
또 새롭게 느끼고 싶다.
-라인홀트 메스너-
인간이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이 인간을 허락하는 것. -존 무어
계곡에서는 안 보일지라도,
모든 산에는 길이 있다.
-시어도어 로스케
정상은 내려오고 나서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그 전에는 진정 오른 것이 아니다. -조지 말로리
(“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느냐?”는 우문에 “그것이
거기 있기에”라는 현답을 남긴 영국의 등산가).
최고 높이의 산을 오를 때에도
한 번 한 걸음에서 시작한다. -바바라 월터스
문제는 고도(Altitude)가 아니라 태도(Attitude)다.
산행의 본질은 정상을 오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다. -앨버트 머메리
등산은 인내의 예술이다.
- 보이테크 쿠르티카
굳이 정상에 오를 필요는 없다 –보이테크 쿠르티카
(히말라야 가셔브롬 Ⅳ의 위험한 서쪽빙벽을 오르고
눈앞의 평탄한 정상을 오르지 않고 하산하며)
등산은 길이 끝나는
데서 부터 시작한다.
-알랑 드 샤뗄리우스
등산가는 산의 법칙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며,
언제나 배워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헤르만 후버
우리가 정복하는 것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에드먼드 힐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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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최고 높이의 산을 오를 때에도
한 번 한 걸음에서 시작한다. -바바라 월터스
②우리가 정복하는 것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에드먼드 힐러리
③계곡에서는 안 보일지라도,
모든 산에는 길이 있다. -시어도어 로스케
④나는 국가의 위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등반할 뿐이다.
-주스트 제르바수티
⑤문제는 고도(Altitude)가 아니라 태도(Attitude)다.
산행의 본질은 정상을 오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다. -앨버트 머메리
⑥등산은 인내의 예술이다. - 보이테크 쿠르티카 ⑦굳이 정상에 오를 필요는 없다 -보이테크 쿠르티카,
(히말라야 가셔브롬 Ⅳ의 위험한 서벽을 오르고
눈앞의 평탄한 정상을 오르지 않고 하산하며_)
⑧등산은 길이 끝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알랑 드 샤뗄리우스
⑨등산가는 산의 법칙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며
언제나 배워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헤르만 후버
⑩그것이 거기 있기에 -조지 말로리,
(“왜 에러베스트 산에 오르냐”는 물음에 대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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