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19. 18:49ㆍ美學 이야기
조희룡의 생애와 예술(요약)
1.출생과 학습 [조선문인화]
조희룡의 생예와 예술(본문)
《차례》 2. 학습 - 시공부 "우연히 천축사를 찾아가다 도봉서원의 학생들이 조희룡과 이재관의 솜씨를 보고 사죄하였다. "시란 청화의 보고요 중묘로 들어가는 문이다" 청화(淸華)란 '맑고 빛남'이요 중묘(衆妙)란 '뭇 절묘함'을 말한다. - 그림의 시작 "시로써 그림에 들어가고 그림으로써 시에 들어가는 것은 한가지 이치이다. 요즘 사람들은 시를 지으면서도 그림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 시를 먼저하고 그림에 들어가는 것이나 그림을 먼저하고 시에 들어가는 것이 같은 원리더라는 말이다. 시를 먼저하고 그림으로 들어갔던 자신의 경험을 되살리면서 후배들이 시를 뗀 다음 그림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고 있다고 개탄한다. 3. 조선 진경의 시작과 쇄락 - 대안의 모색 "시문과 서화의 격이 무너짐은 속(俗)이라는 한 글자에 있다. 이 한글자의 무거움은 큰 기력이 아니고서는 뽑아낼 수 없다. 인품 또한 그러하다. 사람의 속됨은 어떠한 약물로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홍란음방(紅蘭吟房) 5. 조희룡의 작품세계 [탈속과 즐거움의 예술세계] "그림은 즐거움을 위하여 그린다. 그려 즐겁고 보아 즐거워야 한다. 강태공들에게는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것이 즐거움이듯 화가들에게는 붉은 물감 연지로 꽃을 그리는 것이 즐거움이어야 한다." "시경詩境, 문경文境, 화경畵境은 험준한 언덕과 골짜기에 가벼운 수레가 익숙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다. 이는 조희룡의 홀로 탄 수레, 외로운 길이다." 그가 연 진보적 삶의 행로는 홀로 길을 가는 수레와 같았으나 반드시 그 길은 외롭지만은 않았다. 그 길에는 반가운 이들도 있었다. 속기를 버리고 고답적 정신세계를 찾아 나선 문인화의 길에는 같이 갈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미투리를 신고 불긍거후라는 일산을 어깨에 둘러매고 아무도 없던 전인미답의 길을 함께 걸어나갔다. -장륙매화(丈六梅花) "석가모니불을 장륙금신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 매화를 장륙대매(丈六大梅)라 할 수 있지 않는가?" 조희룡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스스로 놀랐다. 그는 새로 발견한 이 세계를 부처의 장륙금신을 본따 '장륙매화'(丈六梅花)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그 뿌뜻한 자부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매화도(梅花圖)의 계보 *그림 : 양무구(揚无咎),사매화권(寫梅畵卷) 부분,북경고궁박물관 매화도(梅花圖)의 계보 가운데 조희룡 매화의 위치는 청나라 동이수(童鈺)와 나빙(羅聘)의 중간지점에 독자적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조희룡 스스로가 자신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림 : 왕면(王冕),南枝春早,비단에 수묵,臺灣 故宮博物院 소장
-용매도 *그림 : 조희룡,홍매도대련(紅梅圖對聯) 조희룡은 처음에는 육척의 매화를 창안하였다. 스스로 장륙매화(丈六梅花)라 이름 붙였다. 꽃도 변했다. 소략하게 핀 몇송이의 매화그림에서 천만송이의 꽃이 핀 그림으로 변모되었다. 또 매화의 이념도 선비들의 고결한 심성에서 부처의 자애로운 마음으로 변했다. 3단계의 변화를 거친 조희룡의 매화가 다시 한번 4번째의 진화단계로 돌입하였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매화를 그릴 때 얽힌 가지, 오밀조밀한 줄기에 만개의 꽃잎을 피게 할 곳에 이르면 나는 용의 움직임을 떠올리면서 크고도 기이하게 굽은 변화를 준다." 조희룡의 여섯자 매화줄기가 돌연 격렬히 떨기 시작하였다.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하였다. 대련을 다시 살펴보자. 매화의 줄기가 용이 되어 하늘로 비상하고 있다. 조희룡은 매화줄기를 나무에서 용이라는 생명체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조희룡의 홍매도를 용매도(龍梅圖)라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 묵란도에 있어서 불긍거후 -즐거움의 난 *그림 : 조희룡,난생유분도(蘭生有芬圖) '위천하지노인도'의 주제는 '애쓴 뒤의 즐거움'이다. 거기에는 힘들게 노동한 이들이 생각지도 않게 5일이나 10일간의 휴가를 얻었을 때의 기쁨이 흥분되어 나타나 있다. 답답한 일상과 거기에서 탈출하는 기쁨이 하늘로 날듯 위로 솟아오르고 있고 멀리 떠나가는 해방감이 좌측으로 주욱 뻗어있다. [수예론(手藝論)] "글씨와 그림은 모두 수예(手藝)에 속하여 수예가 없으면 비록 총명한 사람이 몸이 다하도록 배워도 할 수 없다. 그것은 그림이 손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향점의 차이] [조선에의 개안, 《호산외기(壺山外記)》의 저술] 4. 조선문인화(朝鮮文人畵) [벽오사(碧梧詩社)의 결성] [조선문인화(朝鮮文人畵)와 중국 정통 남종 문인화의 충돌] "난초를 치는 법은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치는 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이 있다면 그 화법대로는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조희룡의 무리(趙熙龍輩)들이 내 난초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기 때문이다." '조희룡의 무리'라 함은 벽오사의 맹원들을 말함이다. 조희룡과 김정희는 청나라의 문물을 도입하며 조선예술의 국제화를 추구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 살 터울로 태어나 중국의 신문물로부터 강렬한 영향을 받았다. 다만 김정희는 자신이 직접 청나라의 석학을 만나 중국의 문물을 직접 접할 수 있었고, 조희룡은 청나라에 직접 갈 기회가 없어 중국을 왕래하던 사람들이 들여온 전적을 통해 중국의 문물을 익힐 수 있었다. [조희룡과 김정희의 관계] 5. 조희룡의 관직생활 "신선이 영약을 씻는 곳에 이어 회갑 때(1849년 5월)에는 조정에서는 그에게 회갑을 축하하면서 먹과 벼루와 책을 하사하였다. 조희룡은 자기에게 내린 궁중의 빛에 감격해 했다. 그는 은혜를 잊지않고 임금의 명을 받아 글을 쓴 사람의 자부심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1849년에는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에 가서 금강산의 실경을 묘사한 시를 지어 바쳤다.
7.유배 [임자도 유배생활] [공포, '황산냉운도(荒山冷雲圖)'] *그림 : 조희룡,황산냉운도(荒山冷雲圖) "외로운 섬에 떨어져 살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친 산, 고목, 기분 나쁜 안개, 차가운 공기뿐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필묵에 담아 종횡으로 휘둘러 울적한 마음을 쏟아놓았다. 화가의 육법이라는 것이 어찌 우리를 위해 생긴 것이랴." 조희룡의 두려움과 위기감이 그림에서 흘러나온다. 피할 수 없는 공포가 그림 전체를 감싸고 있다. 그림 속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다면 조희룡이 거주하는 자그마한 집뿐이다. [유배지에서 얻은 두 제자]
-화아일체 -괴석도 "사람들은 실제의 돌을 사랑하지만 나는 그림 속의 돌을 사랑한다. 실제의 돌은 외부에 존재하고 그림 속의 돌은 내면에 존재한다. 그런즉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거짓 것이 되고 내면에 존재하는 것은 참된 것이 된다." 김태와 함께 괴석을 사이에 두고 사귀면서 괴석도의 화법을 새로이 터득하였다. 그는 농묵과 담묵을 마음 내키는 대로 종이 위에 떨어뜨리고 큰 점 작은 점을 윤곽의 밖까지 흩뿌려 농점(濃點)은 담점(淡點)의 권내로 스며들게 하고 담점은 농점의 영역에 서로 비치게 하였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준법( 法)과 전혀 다른 방법이었으나 괴석 특유의 기이한 격이 새로 나타났다. -매화도 "개펄 독기서린 바닷가에서 곤경에 빠져 있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와 매화그림을 그려 달라 한다. 그의 맑은 마음속을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죽지않고 살아 잠시라도 고향에 돌아가 나기(羅岐)와 같이 좋은 벗들과 함께 매화음을 벌일 수 있을까?" *그림:나기에게 준 매화 추운 날이면 추위에 곱은 손을 녹이며 매화도를 그렸다. 서울의 친구들이 임자도에 찾아와 그를 위로한 다음 매화도를 부탁하고 올라갔다. 조희룡은 친구들의 그림부탁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고마운 일이나 되는듯 정성을 다하였다. 어떤 날이면 매화의 화폭이 너무 커 달팽이 같이 작은 집속에서 그리지 못해 눈 내린 땅에 펼쳐 놓고 붓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림을 그린 다음 서울로 올라갈 인편을 구하여 어깨에 메고 올라가도록 하였다. *그림:임자도에서 그린 대작병풍 대작의 매화도를 그리려면 먹물을 많이 담을 수 있는 대형벼루가 필요하였다. 그 벼루는 우연히 얻은 남포석(藍浦石) 돌을 쪼아 만든 벼루를 사용하였다. 남포석 돌을 얻었으나 다듬을 힘도 없어서 평평한 부분을 대충 오목하게 쪼아 겨우 먹물 한 되들이 벼루를 만들었다. 엉성하게 움푹 패인 벼루에 먹을 갈아, 촌 늙은이가 쓰는 서푼짜리 큰 개털 붓으로 한 발 여섯 자 크기의 홍백매도를 그렸다. 힘들고 구차하였으나 좀벌레처럼 늙고 개똥벌레처럼 말라가는 조희룡에게는 과분할 뿐이었다. *그림:이화여대 소장의 매화도 조희룡의 매화도는 유배기간 중 최고의 경지에 오른다. 고목등걸에 연분홍 입술 연지같은 꽃을 피워 올려놓은 그의 묵매도는 먹이 피워 올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매화는 검은 곳에서 피어오른 순결한 백과 홍의 세상이었다. 격렬한 동선위로 그윽한 향기와 발군의 색감과 고결한 영혼이 흐른다. 조희룡이 기나긴 몰입의 과정을 통해 피어올린 매화는 아름다웠다. 미술 평론가 최열은 그의 매화를 "조희룡 이후 조희룡만큼 흐드러진 매화그림을 그린 이를 알지 못한다. 19세기 중엽 화단에 우뚝 서서 화려하고 섬세하며 풍요로운 양식의 매화를 그렸다."고 평했다. *그림 : 조희룡,묵죽도(墨竹圖) 그것은 '성난 기운으로 대나무를 그린다(怒氣寫竹)' 라는 대가 가진 분노의 세계였다. 조희룡의 유배지 만구음관 주위에는 오죽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의 집앞에 오죽을 심어 기르면서 대나무와 함께 마음속의 울분을 나누었다. 유배가 없었더라면 조희룡은 분노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그의 대나무 그림에 숨겨져 있다. -산수화 이론의 수정 "봄산은 담담히 꾸미어 미소짓는 것 같고, 여름산은 짙푸르러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고, 가을 산은 산뜻하여 분바른 것 같고, 겨울 산은 참담하여 조는 것 같다" 유배 초기 공포에 떨던 조희룡은 유배생활이 계속되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유배 2년, 그는 바다 섬의 사계를 모두 겪어 보았다. 바닷가의 산은 계절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면서 곽희의 그림으로는 설명되지 않은 조선의 미감을 조희룡에게 선보였다. 조희룡은 겹겹이 펼쳐지고 안개 몽롱하고 쌓여있듯 울창한 조선의 산수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봄산은 어둑하고 몽롱하여 안개가 낀 듯하고, 여름산은 깊고 울창하여 쌓여 있는 듯하고, 가을 산은 겹치고 끌어당겨 흐르는 듯하고, 겨울산은 단련되어서 쇳덩이와 같다." 6. 유배기 후의 은거생활 1853년 3월 18일, 조희룡은 마침내 해배되어 임자도를 떠나게 되었다. 만구음관을 나서며 마당의 대나무와 작별인사를 하였다. 유배를 와 수심 속에 심었던 오죽이 훌쩍 자라 자신보다도 더 커져 있었다. 3년 세월의 만단정회가 대나무 잎 잔가지에 걸려 흔들거렸다. 조희룡은 거룻배에 올라 임자도를 떠났다. 거룻배 위에서 임자도와 환송하는 제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후 공식적인 생활을 자제하며 근신하며 지냈다. 김정희와 권돈인(權敦仁)이 해배이후 은거하며였던 것으로 보아 조희룡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김정희의 두 번째 유배를 전후하여 '유배를 다녀왔으면 조용히 있다 죽을 일이지 함부로 돌아다녔다'고 김정희를 비난하였던 조정의 정서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네가 별안간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때부터 自子遽爲千古客 塵 餘債意全孤 1856년 겨울 김정희도 타계하였다. 조희룡은 김정희와 자신과의 인연이 다하였음을 아쉬워하면서 만사를 영전에 바쳤다. - 문인화의 흐름 *그림:장승업의 10폭 병풍 홍백매도 중앙에서 엄청난 규모감으로 팔을 벌리고 뻗어나간 매화나무 두 그루의 힘은 장엄하다. 꿈틀대는 먹선을 따라 눈송이처럼 흩뿌려진 흰색 붉은 색 매화송이들이 비상한 생명감을 자극한다. 조희룡의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매화도의 맥이 장승업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조희룡의 매화법에 그 연원을 두고 있음이 한눈에 분명하다. *그림 : 유숙(劉淑),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 이날 조희룡은 한 폭의 난을 치고 시를 지었다. 제자이자 후배였던 유숙(劉淑)으로 하여금 정경을 그리도록 하였으니 그것이 서울대 박물관 소장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 이다. 벽오사소집도는 조희룡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유일한 그림이자 조선문인화를 창안했던 벽오사 모임의 실경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 속에 조희룡이 있다. 그는 나이 서른에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하였고 수렴이 성성했다. 네모얼굴에 성긴 수염과 칠척의 풍모를 갖고 있었다. 칠척이라 하면 2m가 넘는 큰 키이다. 전체적으로 엉성 삐쭉하였다 한다. 그를 아는 사람들도 그의 외모를 "휘적휘적 학 나린 들판의 가을 구름"이라고 문학적으로 표현하였다. 벽오사소집도 중 가운데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가 조희룡이다. 그는 묵장의 영수라는 후인들의 평가처럼 모임의 한 가운데 학처럼 앉아 자신 이후 500년을 이어갈 조선문인화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은거 "위항(委巷)사람들의 글은 지는 꽃, 흩어지는 수초와 같은데 누가 주워 모으겠는가. 나 또한 위항(委巷)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후세 사람들이 위항(委巷)지사들의 시문학의 융성함을 알 수 있게 하였으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랴" 한해 뒤, 유재건이 또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이란 책을 탈고한 다음 다시 조희룡을 찾아왔다. 자신의 호산외기처럼 보통사람들의 일생을 전기형식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조희룡이 또 서문을 잡았다. 10. 조희룡의 사망
참고 및 인용문헌 강관식,《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돌베개,2001
조희룡 연보 1765년 홍대용, 사신일행을 따라 청나라 수도 연경 방문하고 신문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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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희룡의 생애와 예술 - 성헌기념회 제공|작성자 ddubugie
요약 1907년김광수(金光洙)가 지은 한문소설.
내용
1907년 김광수(金光洙)가 지은 한문소설. 1책(140면). 석인본. 작자의 문집 ≪만하유고 晩河遺稿≫에 수록되어 있다. 몽유록 유형의 한문소설이며, 6회의 장회(章回)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의 본래의 명칭은 ‘몽유록’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몽유록 작품과 구별하기 위해 작자의 호를 따서 ‘만하몽유록’으로 불리고 있다.
작자가 스스로 몽유자가 되어, 꿈 속 세계에서 대한반도와 남쪽 섬나라 이상국인 @@자하도(紫霞島), 중국의 전역, 선계의 무릉도원(武陵桃園), 천상계와 지옥계를 두루 넘나들면서, 시대상황에 따른 현실인식과 문학적 재능을 드넓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1907년 7월 1일 밤 작자는 꿈 속에서 괴안국(槐安國)에 들어가, 40년간 공명을 누리다가 고향에 돌아온다. 우리나라의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 난 후, 배가 풍랑에 밀려 중국의 태화산(太華山)에 이른다.
여기서 태을진인(太乙眞人)을 만나 사해유심주(四海遊心舟)라는 배를 얻어 무릉도원에 도착한다. 주옹(朱翁)과 진옹(陳翁)을 만나, 그들에게 중국의 역사와 지금의 세계 상황에 대하여 작자의 경륜을 피력한다.
유심주를 타고 조선 남쪽 바다에 위치한 ‘자하도’에 이르러, 수문장인 청포(靑袍)소년을 만나 조선의 인재 등용의 모순과 독립하려는 뜻을 말해 주고, 소년으로부터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이 곳의 정교·민속·위의·기상에 대하여 듣는다.
다시 유람하여 중국의 명승지를 두루 답사하면서, 옛사람들을 추모하는 시를 읊는다. 옥경(玉京)에 이르러 상제에게 조선의 운명이 위급함을 아뢴다. 팔황종의마(八荒縱意馬)를 얻어 중국 내륙의 여러 곳을 편람하며 고인을 추념하는 시를 읊는다. 임공(臨卭) 땅을 지나다가 옥계화(玉桂花)라는 미인과 만나 한 달간 사랑을 나눈 후 작별한다.
심양(瀋陽)에 이르러 삼학사(三學士)를 추모한다. 꿈에 지부(地府)의 해동충의지문(海東忠義之門)에서 삼학사와 담론한 후 헤어진다.
대한충신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의 문에서 그들을 만나 충절을 찬양한다. 대한의사(大韓義士) 송병준(宋秉濬)·최익현(崔益鉉)의 문에서 그들을 만나, 당대 현실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일본을 물리칠 방책을 묻는다.
해동난적지굴(海東亂賊之窟)·조선사흉지굴(朝鮮四凶之窟)·대한오적지굴(大韓五賊之窟)을 둘러본다. 조선 사흉 가운데 하나는 해외에 도주했다가 지금은 개과천선한 상태라 하고, 대한오적지굴은 비어 있는 채로 미리 지옥을 만들어 그들을 기다린다고 한다. 염라국왕에게 소를 올려 자신의 불평한 뜻을 아뢴다. 염라왕은 자신의 13대조 김인후(金麟厚)였다.
다시 심양으로 돌아와 잠을 깨었다. 걸어서 산해관을 지나 압록강에 이른다. 강을 건너려 할 즈음 태을진인이 다시 나타나 유심주를 주고, 황건역사가 나타나 종의마를 주어, 이를 번갈아 타고 고향집에 돌아와 꿈에서 깬다.
몽유록의 전통을 계승한 이 작품은 문학사에서 특이한 위치에 놓인다. 그것은 고전소설이 쇠퇴하고 신소설이 등장하는 시점에서 가장 고전적인 형식의 전통을 활용하면서, 한일합방이 눈앞에 닥친 1907년의 절박한 조국의 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현실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작자의 관점에는 유가 윤리의 보수적 인식과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의식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하몽유록>에는 당대 서구문명이 앞선 실상과 열강(列强)의 세계판도, 청과 조선의 멸망에 대하여 그 추이를 온전하게 파악하고 있는 작자의 시각이 전편에 걸쳐 나타나 있다.
나아가, 1907년 당시의 위태로운 국가의 상황에 대한 시대인식과 이를 타개해 보려는, 그러나 한편 절망감을 되씹어야 하는 작자 나름의 고뇌가 드러나 있다.
특히 옥경에 이르러 상제에게 올린 소에 보면, 을미사변(乙未事變)에 이은 일본의 침탈에 대한 위기의식과 신하들의 매국에 대한 분노가 드러나 있으며, 송병준과 최익현을 만난 자리에서는, 1907년 고종(高宗)의 양위(讓位)와 군대해산을 목도한 작자의 비분, 그리고 나라를 구할 방책이 더 이상 없다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이 토로된다.
http://scm9988.blog.me/10090501782
[책 소개]
그러나 옛사람들이 꿈꾼 세상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옛사람들은 한유의 「제도원도시」에 그려진 무릉도원을 이상향이라 여겼고, 이는 곧 노자의 무위무치 사상과 연결된다. 여기서 ‘무위’라 함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수탈 같은 부정적인 통치가 없다는 뜻이다. 곧, 학정이 없으며, 누구나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면 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평대군은 사라졌지만 그후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상세계를 머리로 그리며 꿈으로 꾸었다. 삼 년 아니라 삼십 년, 삼십 년이 아니라 삼백 년이 지나더라도 그림을 뒤척이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계속 이어지리라.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어서 세상은 좀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_본문에서 - 알라딘
[출판사 책 소개]
안평대군이 꿈에 본 도원을 그린 <몽유도원도>와 옛사람들이 꿈꾼 이상세계
옛사람들이 꿈꾼 세상, 그들이 살고 싶어한 세상을 안견의 <몽유도원도> 등 이상향을 묘사한 그림을 통해 재구성했다. 억압이 없는 무위의 통치, 누구나 땀 흘려 일해 먹고 사는 세상을 바랐던 옛사람들의 꿈을 되짚었다.
◆ 안평대군이 꿈꾼 <몽유도원도>에서 옛사람들의 이상향을 읽다
이 책은 <몽유도원도>에서 시작한다. 안평대군이 꿈에 본 이상향을 그린 <몽유도원도>에서 시작해 옛사람들의 이상향을 읽어내려가는 것이다.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복숭아꽃 무성한 무릉도원을 보았고, 안견으로 하여금 그때 본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다. 지난해, 일본에서 잠시 빌려와 <몽유도원도>를 전시했을 때, 열흘을 조금 넘는 전시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고, 사람들은 세 시간을 넘게 기다린 끝에 <몽유도원도>를 볼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사람들이 <몽유도원도>에 열광하는 것은 어쩌면 그 그림이 꿈속에 그린 꿈같은 세상을 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몽유도원도>에 담긴 이상향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 조선인의 유토피아, 잘 먹고 잘 사는 세상
옛사람들이 꿈꾼 세상은, 그러나 별다를 것이 없었다. 옛사람들은 한유의 「제도원도시」에 그려진 무릉도원을 이상향이라 여겼고, 이는 곧 노자의 무위무치 사상과 연결된다. 여기서 ‘무위’라 함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수탈 같은 부정적인 통치가 없다는 뜻이다. 곧, 학정이 없으며, 누구나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면 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옛사람들에게는 그조차도 이루기 힘들어 보이는 꿈속의 일처럼 아득했을 뿐이다.
◆ 지상에 건설된 낙원, 판미동―그리고 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꾸는가?
저자는 이 책에서 특별한 고사 하나를 소개한다. 1674년 오늘날 경기도 가평군 하면의 능재말고개에 건설된 판미동 고사가 그것이다. 신석은 판미동에 자리를 잡아 실제로 이상향을 건설했고, 마을은 100여 년 동안 유지됐다. 비록 영원하지는 못했지만, 누군가가 이상향을 실현해보려고 시도했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꾸는가? 옛사람들이 꿈꿨던, 누구나 땀 흘려 일해 배불리 먹는 세상은 과연 모두에게 도래한 것인가?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
[My review]
<몽유도원도>에서 시작된 우리 조상들의 삶과 꿈 이야기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여러 자료들을 통해 알아낸, 우리 조상들이 꿈에 그리던 세계와 그 세계를 실제로 만들려고 노력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보았던 도원을 안견에게 그리게 하여 탄생한 <몽유도원도>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옛 선조들의 문집이나 각종 설화의 도움을 받아 실제로 이상세계를 찾아 헤맨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넘나든다. 이 책의 소개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몽유도원도>라는 그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이 책은 우리 조상들의 다양한 흔적들을 통해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꿈을 엿보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상세계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현실의 간절한 희망을 꿈속에서 만나기도 한다. 안평대군은 자신이 꿈에 그리던 공간을 꿈속에서 만났고 그것을 안견으로 하여금 그림으로 표현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몽유도원도>는 그 당시 사람들이 꿈꾸던 이상세계를 잘 드러내준다.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그런 세계를 찾았지만, 글쓴이는 우리 선조들의 문집이나 설화를 통해 이상세계를 찾으려는 시도들이 많았음을 이야기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명에 이상향을 뜻하는 단어를 붙여 자신의 마을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을 드러낸 것에서부터 이상세계를 찾으러 떠났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는 일화들까지. 그리고 실제로 지금의 경기도 가평에 자신들이 꿈꾼 새로운 세상을 건설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게 읽혔다. 지금 문헌으로 전해져 오지는 않지만 그런 비슷한 사례가 어쩌면 많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조상들은 어떤 세계를 꿈꾸었을까
그럼 우리 조상들이 꿈꾸었던 이상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상적인 세계라고 하면,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겐 먹고 놀기 좋은 곳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꿈꾸었던 이상세계의 모습은 먹을 것이 풍부하고 일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아니었다. 글쓴이는 다양한 이상세계의 유형 가운데 우리 조상들이 주로 꿈꾸었던 이상세계의 유형인 무릉도원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우리 선조들이 이상세계로 그린 곳은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일하고 늘 근면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게을러짐으로써 물질적인 황폐함을 야기하고, 또 그것이 정신적인 황폐함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꿈꾸고 그렸던 이상세계가 똑같은 모습으로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상향의 모습이 변했다. 고을 아전의 쌀 내놓으라는 괴롭힘만 없다면 어디든 무릉도원이라고 읊은 시에서처럼, 열심히 일해도 관의 횡포 때문에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는 관의 수탈과 학정이 없는 곳을 이상향으로 생각했다. 한편, 유난히 전쟁이 많았던 조선 중기에는 목숨의 위협이 없는 곳을 이상향으로 생각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상향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그토록 이상향을 꿈꾸고 그곳을 찾기를 갈망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속한 사회의 모습이 소박한 희망마저 용인하지 않는 사회임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다면, 이상세계를 꿈꿀 이유는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소박한 모습으로 여겨지는 이상세계를 절실하게 그리워했던 우리 조상들의 자취를 더듬는 일이 한편으로는 서글프게 느껴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 조상들의 삶을 들여다보다
처음에는 단순히 우리 조상들이 꿈꾸었던 세계를 엿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시대를 엿보는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책장을 덮기 전에야 비로소 그들이 꾸었던 꿈을 통해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를, 우리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더듬어 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전쟁이 일어나 목숨마저 위협받기도 했고, 열심히 일해도 관에서 모두 빼앗아 가버려 절망적이기도 했을 어떤 삶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저 열심히 일하며 살고 싶은데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으니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나는 어떤 삶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그래서 깊은 산 속, 누구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어떤 곳에 대한 열망이 그토록 강하게 남아 지금까지 여러 흔적으로 남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꿈꾼 데에서 나아가
우리 조상들이 추구하고 세우고 싶었던 이상향을 여러 문헌과 자료들을 통해 살펴보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글쓴이는 “꿈꾼 데에서 나아가”라는 제목의 장에서, “꿈꾸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며 우리 조상들처럼 이상세계를 꿈꾸고 그런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며 글을 끝맺는다. 때로는 꿈을 꾸는 것조차 버거운 현실이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횡포들이 있다. 그래서 꿈을 꾸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꿈조차 꾸지 않으면서 행복해지기를 바랄 수 있을까? 모두가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이상세계를 꿈꾸는 일은 그런 세계로 가기 위한 첫걸음일 터이다. 이상향을 찾고 그런 이상세계를 실제로 건설하려 했던 우리 조상들처럼, 꿈꾼 데에서 더 나아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책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그림 한 장에서 문화를 엿보다
<조선인의 유토피아>는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다. 키워드 한국문화는 “한 장의 그림 또는 하나의 역사적 장면을 키워드로 삼아,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한국을 찾자”는 의도로 기획된 시리즈다. 책을 읽고 나서 기획의도를 들여다보니, 우리문화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어떻게 발을 들여놓아야 할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문화는 무턱대고 조금 지루하고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선입관에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 이 시리즈는 매우 유용하고 값진 선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나처럼 우리 것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너무 막연해서 한 발 물러 서 있던 독자에게 아주 쉬운 길을 안내해주는 책이었다. 한 장의 그림을 따라서, 남겨진 여러 가지 글을 따라서 우리 조상들의 삶과 꿈을 엿보고 나니 우리문화에 대한 막연한 거리감을 쉽게 지워버릴 수 있었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바라본 느낌이랄까. 우리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아주 쉬운 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넓혀나간 느낌이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듯이 쉽게 쓰여 있어서 생각했던 것보다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기획의도에 충실한 원고라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독자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 수많은 자료들을 찾아 헤매었을 글쓴이의 노력들이 책의 곳곳에서 묻어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 속의 그림이 흑백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책날개를 들여다보니, 5권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계속 이 시리즈가 출간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의 기획의도에 충실한 책들, 그래서 우리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책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출처] 조선인의 유토피아 - 서신혜|작성자 청산 신박사
우리 고소
설 조선 제일의 책 장수
조신선
曺神仙정약용, 조수삼, 조희룡의 공통점은? 모두 조신선이라는 일개 책쾌에 대한 전기를 지었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에는 수많은 책쾌가 있었다. 조신선 이외에도 배경도(裵景度), 홍윤수(洪胤琇) 같은 책쾌의 이름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홍윤수는 몰락했으나마 양반 출신이었다. 그런데 책쾌로서 전기에 등장한 이는 조신선 이외에 없다. 조신선이 책쾌 중 단연 돋보인다는 의미다.
아래는 정약용에 의해 입전된 내용인데, 일개 책거간꾼이 신선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정약용의 전집에는 모두 5편의 전이 있는데 〈조신선전〉도 그중 하나다.
위 전을 보면 조수삼이나 조희룡의 〈조신선전〉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 그런데 왜 일개 책장수에게 신선이라는 칭호를 붙였을까? 다산 선생은 이 글에서 조신선의 극단적인 양면, 즉 신선과 장사치를 그리고 있다.
우선 신선으로서의 면모부터 보자. 붉은 수염에 우스갯소리를 잘하고, 눈에는 번쩍이는 광채가 있는가 하면, 모든 책이란 책은 샅샅이 모르는 것이 없고, 여기에 술술 이야기하는 품이 군자와 같다고 한다. 더욱이 1백 살이 넘은 지 이미 오래다. 지금도 평균 연령이 여든을 넘기기 어려운 판이다. 조희룡은 한 술 더 뜬다. 조신선은 늘 나이를 예순 살이라고 한다면서, 일흔이 된 어떤 노인이 자기가 아이 때 조신선을 보았는데 그때도 예순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어 조희룡은 어림셈 쳐 조신선의 나이를 ‘백 살이 넘은 지 오래라’ 하고는, 그런데도 얼굴 모습은 마흔이 못 되어 보인다고 적어 놓았으니 저 말을 믿어야 할지 판단이 안 선다. 조신선을 신선으로 등극시키려니 그러하겠지만서도 조신선이라는 인물의 특이함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다산은 조신선이 장사치답게 욕심이 많았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하필이면 고아나 과부의 집에 소장되어 있는 서책을 싼값에 사들였고, 팔 때는 배나 이윤을 챙겼다. 지금도 우리는 서점을 운영한다면 일반 장사꾼과는 다르게 보는데, 책을 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언짢게 생각할 정도로 이윤을 챙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가족을 위해 썼다는 기록도, 그 자신이 부유하다는 기록도 없다. 조수삼이나 조희룡의 〈조신선전〉에서도 그 대답은 알 수 없다.
다만 조희룡의 〈조신선전〉에 그가 신선이 된 연유를 한 자락 놓고 있다. 그것은 ‘육서자오(鬻書自娛: 책 파는 것을 스스로 즐겼다)’ 네 자다.
책 쓰는 것을 스스로 즐겼다.
책 보는 것을 스스로 즐겼다.
그런데 신선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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