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옥주의 얼(3) - 의제, 소전, 대금의 명인 박종기편

2018. 11. 4. 01:13美學 이야기

5. 해방후 이 나라 화단(畵壇)의 거성(巨星)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년 11월 2일 진도군 진도면(지금은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난 의재 허백련은

남종화의 전통을 꿋꿋이 지켜온 대가로서 75년 동안의 긴 작가 생활을 통해 1만여 점에 이르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 때는 명치대(明治大) 법학부에 입학하여 법관의 꿈을 꾸어 보기도 했으나 그림을 잊을 수

없어 곧 중퇴한 뒤 일본 남화의 대가 소실취운(小室翠雲)에게 사사, 남화의 기법을 익혔고

1922년 제 1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추경산수(秋景山水)』로 1등 없는 2등의 최고상을

차지한 후 그의 작품 활동은 본격화 되었다.

 

  의제는 일본에서 기법을 익혔으면서도 일본 색채에서 탈피하면서 소치와 미산의 남화산수를

계승하여 굳게 토착화 시켰다.

  처음에는 화조, 송학 등에도 손을 댔으나 만년에 들면서 산수화만을 즐겨 그렸으며,

채색을 하는 듯 마는 듯 엷디 엷은 담채(淡彩)가 아니면 묵으로 그린 그의 수묵 산수화는

선이 부드럽고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짙은 채색이 없어서 화사하지 않는 서민적이고도 토착적인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는

의제의 화풍은 한국적이면서도 호남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명예 철학박사 학위(전남대학교)를 받았고, 예술원 종신회원이기도 하였던

진도가 낳은 의제 허백련의 생애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아버지는 경언(京彦), 어머니는 박동애(朴東愛)로 다 같은 1870년(병오)생이다.

  의제는 양천 허씨로 진도에 처음 자리 잡은 허씨의 12대 손이며 현재 진도에 있는 대, 중, 계

3파 가운데 계파에 속한다.

  대파는 입도조인 허대(許垈)의 큰 손자 즙(葺)의 후손이며, 중파는 둘째인 순(珣)의 후손으로

소치와 미산, 남농이 여기에 속하고, 의제는 계파인 셋째 방(芳)의 후손으로 의재 때까지 해서

7대 종가이다.

 

  백련이란 이름은 태어난 지 몇일 되지 않아 지어졌다.

  하루는 어머니 박씨가 꿈을 꾸는데 백발 신선이 나타나 의제를 -『백년돌』이라고 불렀다.

꿈을 깬 어머니는 백년돌이란 말은 곧 장수한다는 말로 생각하고 아명을 『백년』으로 지었다.

  여기에 아버지 경언이 한문으로 백(百)자와 련(鍊)자로 붙여주어 결국 아명이 본명으로 되고 말았다.

  8살 때 의제가 찾아간 서당은 진도읍 동외리 원동에 있었는데 20여명이 다녔다.

 

  선생은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였다.

  1889년에 병과에 급제한 뒤 예조참의와 내부참의 등을 지낸 사람이나 1896년 무고를 받고

진도군 의신면 접섬(접도)에 귀양 와 있었다.

  이것을 안 소치가 진도군수에게 청을 넣어 소치 집이 있는 사천리로 옮겨 왔으며 그 뒤

진도면 동외리 원동에 글방을 열고 글을 가르쳤다.

 

  이 무정을 만난 것이 의재의 인생에 큰 자극을 주었다. 무정은 의재에게 학문과 글씨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주입하기도 했다.

   의재가 법률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에 간 것도 무정의 영향이 컷으며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뿌리치고 그림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무정의 격려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의제가 서당 동무들과 풍월을 즐기던 쌍계사 동남쪽엔 소치가 마련한

운림산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의재가 쌍계사에 놀러 다니면서 운림산방에 드나들 때 소치는 이미 타계(他界)하였고

그의 아들 미산이 집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의재 선생이 어렸을 때 마을에서 미산(米山)의 그림을 볼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큰 감동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림에 대한 잠재적인 소질이 싹텄다고나 할까?

 

  의재가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한 것은 11살 되던 1901년 부터였다.

  의재가 미산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할 때엔 어지간한 붓글씨는 익힌 뒤 였다.

  맨 처음 흰 모란을 그리는데 유의해야 할 붓 쓰는 법과 먹 쓰는 법 등 몇 가지를 가르쳐 준 뒤

그대로 그려보라 했다.

  대게 꽃을 그릴 때는 붓 쓰는 법을, 잎사귀를 그릴 때에는 먹 쓰는 법을 유의하면서 그리도록 가르쳤다.

  더욱이 의재 선생의 그림공부를 측면에서 적극 지원한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서당 선생인

무정 정만조였다.

 

  15살이 되자 『의재(毅齋)』라는 호까지 내려 주었다.

의재가 15살 되던 1905년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고향 진도에 와 있던 안국선이란 사람이

무정과 손을 잡고 당시 진도면 동외리 가마골에 있던 서당 자리에 광신학교를 설립 교장이 되었다.

  이때 의재 허백련도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18살 때) 가을에 의재의 어린시절 중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무정 정만조가

귀양이 풀려 진도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의재는 무정의 뒤를 따라 상경하기로 결심하고 서울에 간 의제는 무정 정만조 선생댁에

기거하며 김용식, 지석영 등이 세운 기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당시 한일합방으로 국치를 당하여

그만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일본에 들어갔으니 그 고생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었다.

   신문배달 등 일생에 가장 허기졌던 나날이었다고 하니 그런 중에서도 배워야겠다는 일념에

1913년 5월 도오꾜에 온지 두달 뒤 평소에 생각했던 명치대학에 등록하였으나 그해 11월에

그만 집어 치우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 당시 일본 남종화의 제 1인자였던 소실취운(小室翠雲

1874년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일본 미술전의 심사위원이고 도꾜 미술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있었으며 『우에노』공원 옆의

조용한 2층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의제의 말을 들은 그는 우선 그림을 그려 보라고 했다.

의재는 입학시험을 치루는 기분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산수 한 장을 열심히 그렸다.

『솜씨가 대단하군. 열심히 하면 대성할 소질이 있다.』하면서 자기 집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의재 허백련 선생은 안정된 일본 생활속에서 그림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알차진 것이다.

 

  우연욕서(偶然欲書) - 추사 김정희의 말과 같이 행동하던 시절이었다.

  『그림이고 글씨고 하고 싶을 때 그리고 써야 한다.』추사가 했다는 이 말은

의재가 오래전에 구전으로 들은 것인데 그림을 그릴 때마다 문득 문득 떠올라 자세를 가다듬게 했다.

 

  1918년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돌아왔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김영수를 만났다.

김영수는 강진 한 부호의 출신으로 변호사였고 일본에서 의재를 많이 도와준 친구였다.

  그때 김영수는 불치의 병인 폐병에 걸려 허덕이는 처지라 의재는 일본에 가려던 계획을 잠깐

멈추고 김영수를 광주부립병원(전남의대병원)에 입원시키고 병원 옆 여관방에 들었던 것이

후에 의재가 광주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의재는 광주에 정착해 그림을 그리면서 주로 목포와 강진을 자주 왕래 했다.

미산과 김영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인촌은 자기가 세운 경성방직 주식회사가 운영난에 봉착하자 주주인 반현경에게

출자를 요청하기 위해 화순까지 찾아 왔다가 의재와 만난 것이다.

  동갑인 두 사람은 도꾜에서 헤어진 이후 오랜만에 엉뚱한 곳에서 해후를 했다.

  의재는 법률 공부를 집어 치우고 그림을 그리게 된 그간의 사정을 쭉 이야기 했다.

『그래! 어디 그림 구경 좀 하지』의제는 그간 그려뒀던 그림 몇장을 꺼내 인촌에게 보였다.

  그림을 감상하던 인촌은 감탄하며 그 가운데 한 폭을 원하므로 옛 우정을 생각하며 기꺼이 주었다.

그 후 인촌은 그 그림을 가져가 서울에 있는 서화미술회 회원들에게 보였다.

 

  서화미술회라고 하면 당시 유명한 서화가들이 모인 단체로 1911년 3월 경성서화 미술회로

문을 열었는데 서화가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후진도 양성하는 모임이다.

  의재의 그림을 본 회원들은 좋은 그림이라고 감탄을 했다. 그들은 도대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인촌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삼절 허소치의 집안 손자라고 소개를 하여

서울 화가들의 머리속에 의재를 깊이 심어 주었다.

 

  1912년 저물어 가는 늦 가을이었다.

  의재는 금강산을 구경할 생각으로 개나리 봇짐을 챙겨들고 서울과 원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가

두달을 머물렀다. 금강산에 들어선 의재는 지금까지 그 많은 금강산의 그림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 장엄하고 아름답고 청아한 풍경을 어찌 붓끝으로 그려낼 수 있겠는가.

내, 외 금강을 두루 보고 장안사, 유천사, 신계사 등에서 묵으며 풍광에 취하여

스캐취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의재의 금강산 소묘는 수십장에 달했으나 6․25 동란 중에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금강산 나들이는 그의 산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의재는 금강산에 다녀온 다음해인 1922년 2월에 서울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때 나이 30살을 넘어 32살이었다.

 

  동대문 밖 여관에 여장을 푼 의제는 오랜만에 서울 거리를 구경하기 위해 나갔다가 뜻밖에

고하 송진우를 만났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던 그가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길가에 서 있는 의재를 보고 깜짝 놀라며

인촌을 만나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오후에 동아일보사로 오라고 했다.

  당시 동아일보사는 의재가 다니던 화동 기호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의재가 찾아가자

기다리고 있던 고하가 인촌에게 전화 연락을 해주고 찾아 가도록 했다.

  동아일보사 취재역이던 인촌은 계동 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 날부터 인촌 집 2층 방을 차지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촌은 항상 내가 어려울 때 나타나 도와준 은인이다. 그의 우정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술회하며 인촌의 우정에 감사했다.

  의재는 인촌 집에 있으면서 정말 차분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밖에 나갔다 돌아온 인촌이 조선미술 전람회 개최를 알려 주면서 작품을 내라는 것이었다.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는 문화 정치를 표방한 총독부가 제국미술전람회를 본 떠

1922년부터 열기 시작했다. 의재는 인촌의 말을 듣고 『하경산수』와 『추경산수』를

화선지 한 장 반 정도의 크기로 그려 출품하였다.

  『하경산수』는 완전한 묵화고, 『추경산수』는 담채(淡彩)였다.

  출품한 2점 가운데 『추경산수』가 2등상을 차지하고 『하경산수』는 입선을 했다.

이때 이당 김은호는 『미인승무도』라는 작품으로 4등을 했다.

 

  그 뒤 일본 명화와 중국 정통화법에 대한 견문을 넓혀 한국의 대가가 되라는 후원회의

격려를 받으며 의제가 다시 일본에 간 것은 1923년 5월이었다.

  의재는 도꾜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여러 친구들과 사귀었다. 무호 이한복, 수운 김용수 그

리고 독립운동가인 김철수 등이 그 때 사귄 사람들이다.

 

  어언 의재 20살 때 처음 서울 유학을 떠난 뒤 20여년을 방랑으로 보내면서 34살의 노총각에

22살의 성연옥과 결혼하였고 이제 불혹의 나이 40살이 되었으나 의재의 떠돌이 생활은 여전했다.

 

  1939년 광주에 있는 서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친목 단체인 연진회를 만들었고,

1946년에는 일본 사람들이 경영하던 차 밭을 구입하여 농업기술학교 건립도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1974년 10월 21일 단군 무등산 신전인 천재단에서 개천궁 건립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인걸은 세월에 쓰러지는가! 1977년 2월 15일 오후 2시 15분 남종화의 큰 한 별은 떨어졌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또 그림을 그려야지』평소에 이렇게 말하던 그는 지금도 저승에서

붓을 쥐고 있을 것이다.



6. 추사(秋史)이래 대가(大家)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추사이래의 대가로 추앙받을 정도로 우리나라 서예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소전 손재형은

우리나라 한자 문화의 정수인 서예를 오늘날에 이어온 서예계의 거목이다.

 

  호는 소전, 이름은 손재형, 아명은 판돌(判乭)이다.

  소전은 1903년 4월 28일 아버지 영환이 25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6일만에 진도읍 교동리에서

태어난 유복자다.

  당시 3천석군을 자랑하던 부유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란 그는 5살때부터 할아버지인

옥전(玉田) 손병익(孫秉翼)의 슬하에서 한학과 서법의 기본을 익혔으니 어릴적부터

서예에 남다른 재질을 가졌다.

 

  흔히 소전을 가르켜 앞으로 1세기 안에 나타나기 힘든 서예가라는 말을 한다.

것은 그가 독창적인 서체를 개발했다는 한국 서예 사상의 업적에도 있지만

그의 경력이 화려함 때문이기도 하다.

 

  나이 30전후에 특선을 마치고 곧 이어 국내 규모의 심사위원을 맡아 국전이 시작되면서

계속해서 9회나 단 한번도 심사에 참여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홉차례 심사위원을 지낸 뒤에는 두차례에 걸쳐 국전 고문을 지냈고 국전

심사위원장 한번, 국전 운영위원장 두 번, 예총회장 두 번 등을 지내 그가 활동하던 40년간

선전이나 국전에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을 때가 없었다는 것은 앞으로 그 기록이 좀처럼

깨뜨려지지 않을 것이다.

 

  일제시대 말기에 이르러서 우리 국어는 말살 당하고 민족문화로서 민족 서예는

그 존재성마저 잃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힘에 의한 억압은 얼마가지 못하는 법이니 8․15 해방을 맞으면서 소전은 본격적인

그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일본에서 통용되는 서도(書道)라는 용어 대신

(중국에서는 서법) 서예로 할 것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일본에서 통용되는 불쾌한 기억을 씻어 보자는 의미도 있지만 동양적 서예관에서

서즉화(書卽畵), 화즉서(畵卽書)라는 전통적 의미와 함께 현대의 예술성을 띄고 새로운

발상에 전 서예인들이 동조하고 나서 오늘날 서예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1945년 조선서화 동연회(同硏會)를 창립 선전이 없어진 문화적 공백기를 메웠으며

그것이 국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소전은 양정중학에 다닐 때는 서예보다는 서양화에 더 심취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다른 서예가와는 달리 글씨를 회화적으로 인식하는데 일가견을 가져 조형화(造形化)에

독창성을 발휘했으며 골동품을 보는 눈도 이론적 이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구김살 없이 자랐던 탓으로

그 성격이 깔끔하면서도 원만하고 여유가 있어 글씨가 그의 성격과 품성처럼 단아하고 세련미가

넘쳐 보는 이에게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문기(文氣)넘친 추사의 글씨와 그림을 좋아해 그의 당호를 존추사당(尊秋史堂)이라

이름하고 추사를 닮은 그림을 즐겨 그린 때도 있었다.

 

  흔히 소전을 서예가로만 인식하지만 학남(鶴南), 산정(山亭) 같은 제자들은 『선생님이 남긴

80여점 중에는 선생의 글씨보다 더 높이 평가할 그림이 있다』고 화가로서의 소전을 평가한다.

  선생이 즐긴 골동품 수집도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예술의 일부였다.

 

  해방 후 선생은 부산에 극장을 계약하러 갔다가 골동품 가게에서 발견한 경대에 반한 나머지

가지고 갔던 돈을 몽땅 털어주고 극장 계약을 포기한 채 돌아와 부인 홍여사와 크게 싸울 정도로

골동품 수집에도 거의 광적이었다.

 

  장년기에 들어 소전의 글씨는 더욱 원숙해 졌다. 자획과 구성에 무리가 없고 문기가 넘치는

그의 글씨는 보는 이의 저항감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데 특색이 있다.

  수차에 걸쳐 중국에 다녀와 중국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확립하여

이른바 소전체라 불리는 서체를 만들어 냈다.

  선생의 글씨에 나타난 완숙이나 세련도는 그만이 도달한 높은 경지라는 평을 받았다.

 

  특히 극치를 이룬 것은 1955년 고향인 고군면 벽파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비인 이충무공 전첩비문이다. 점, 선, 횡획, 종획 등의 변화무쌍한 조화다.

  전체적인 리듬이 금세의 역작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선생의 재질과 노력이 민족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어울려져 결집된 소전 예술의 정점이라 할수 있다.

  이 밖에 대표적으로는 진해 해군 충효탑 비문과 서울 사육신 비문 등이 꼽힌다.

 

  그는 제자를 사랑했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학남(鶴南)

정항섭(鄭恒燮), 경암(景岩) 김상필(金相筆),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 평보(平步) 서희환(徐喜煥) 등 한국 서예의 기둥들이 즐비하다.

 

  구철우(具哲祐)는 『우리나라 서예가들 두어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의 제자라고 말하는가』

하면, 31살때부터 소전의 가르침을 받은 하남호는 『작품을 쓰면 선생은 절대 잘못된 점을

 섣불리 지적하지 않아 몇 번이고 써보게 해 그 스스로 잘못을 발견하게 하여 최종적으로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해학이 넘쳐흐르고 많은 사람을 웃기며 사귀는 데는 천재란 편을 받는 소전은 예술에 대한 고집은

대단해서 종종 적을 사는 때가 있었다.

  그는 예술가의 기본적인 인간성과 생활 태도를 중시해 『멋과 풍류도 좋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축첩은 삼가하자』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를 어길 때면 『자네는 가화(家和)를 이루지 못해 화의통선(畵意通禪)의 경지를 맛보기

힘든 인물이니 내게 배울 것이 없네』하고 다시는 돌보지 않는 엄격함을 보였다.

 

  그는 술을 한홉 이상 마시지 않았으며 글씨는 대부분 새벽 4시에 일어나 쓰는 정성을 들였다.

  『역시 글씨는 마지막 10%가 신운(神韻)이다』고 곧잘 말하면서 기분이 내키지 않는 때면

수없이 썼다가 찢어 버리고 낙관을 않는 성미였다.

  권력이 있거나 돈 있는 사람의 청탁을 받으면 글씨에 신운이 안 내린다고 쓰기를 꺼렸고

친구나 선배가 청탁을 해도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좀처럼 붓을 들지 않는다.

 

  서울 홍제동 125번지 1,250평의 대지위에 세운 그의 집은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던 해 착수했다.

  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사랑채를 사들여 옮겨 짓고 옥전장(玉田蔣)과

문옥루(聞屋樓)등은 33년 전에 지은 효자동의 그의 집을 옮겨 왔다.

  소전은 이 집을 지으면서 『이것은 내 예술활동의 일부요, 도락이다. 내 자식들이 이 집을

지탱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나의 지식과 재력을 다 바쳐 이 집을 예술의 정수로 완성할 것이다.』

고 말했다.

 

  신들린 사람처럼 기둥 하나를 세워 놓고는 한달을 생각한 뒤 다시 뜯도록 하고 장소를 옮기는 등

마치 그가 글씨를 쓰는 듯 했음으로 목수가 견디다 못해 도망친 일까지 있었다.

  담장은 궁궐의 담벽을 헐면 그 돌을 사다가 쌓고 벽돌을 자신이 직접 제도하여 구워다가 맞춰갔다.

벽돌은 할아버지의 호인 『옥(玉)』자신의 이름 『형』자와 부인의 이름 『희』자를 문양화하여

맞추는등 돌담 하나 문짝 하나 하나에 신경을 썼다.

 

  이 때문에 1958년에 착공한 이 집은 16년간이나 계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완성하지 못한 채

병석에 쓰러지더니 『소전체』를 확립한 추사이래의 대가 소전은 1981년 6월 15일 오전 7시 30분,

이 민족의 현대사를 종횡무진하던 거목은 끝내 고향을 멀리 둔채 운명하고 말았다.

 

  여기에 노산 이은상 선생의 찬곡(贊哭)으로 그 뜻을 기려 본다.

 

찬 곡 (贊 哭)

                                                       노산 이 은 상

그대 가흥산 정기를 타고난 줄만 여겼더니

도리어 그대 때문에 오로운 섬이 빛나네 그려

진도여 이름 그대로 보배의 고장이 되었구나.

옥전(玉田)의 혈통으로 그의 학문을 이어 받고

소치도인(小痴道人) 끼친 숨결을 가슴깊이 마시고 자라

이 나라 서예의 주봉(主峰)으로 구름 뚫고 솟았네.


소전이 서실 이름을 존추사실이라 부른 뜻은

추사의 창조성을 높이 받든 때문이거니

자신고 고금체(古今体) 모두 묶어 독자세계(獨自世界) 열었네.


소전이 글씨를 대하면 피어나는 연꽃송이

교교(皎皎)한 달빛이 구름사이 빛나듯 하네.

하늘이 주신 재화(才華)지, 어찌 배워서 된 것이리요.

전예(篆隸)의 글씨속엔 묵상(黙想)하는 그대 모습

해서(楷書)를 써 놓으면 의젓이 서 있는 자세

행초(行草)는 경쾌한 걸음 달리는 듯 하데다.


점 하나 찍을 적마다 소리 쟁강 들리고

가로 세로 획(劃)을 그으면 무수(無袖)자락 눈에 뵈고

종이에 신운(神韻)이 어려 취하는 줄 모르네


재질이 저만하고야 소전이 어찌 서예만이랴

사군자 산수화조차 여유있는 묘품(妙品)이라.

속인(俗人)의 눈과 마음을 씻어주기 족하네.

전예와 해행초에 두루 능한 그 솜씨로 점과 획 새법내어

한글 서체 창안하니 소전은 그것 하나로도 역사의 인물이 되었네.


겨레의 해방과 함께 새로 출발한 우리 서법

고전의 법칙위에 새시대 예술성 살려 『서예』란 새이름 지은이가 바로 소전이었네

그대와 나 같은 해에 나서 남다른 인연으로

글짓고 글씨쓰고 금석(金石)에 같이 새겨

영원히 같이 가리니 잊지 못할 벗일네.


글자마다 풍기는 향기 멋과 정취(情趣) 누가 따르랴.

한평생 수로로 왔기 하늘이 짐짓 불러 가시다.

문하에 기른 용상(龍象)들 서예의 명맥 길이 전하리.


그대 벼루에 먹이 마른 것 우리야 애닯았어도

8년 병석이 지루하다 뿐이겠다.

다른데 선관(仙館)이 또 있는 건지 가서 편안히 쉬게.


 

7. 대금(大笒)의 명수(名手) 박종기(朴鍾基)

 

  휘영청 달 밝은 밤 광나루에 배 띄우고 / 진도아리랑 가락에 흐르다 멈춘 강물을 밀치고 가르며

두둥실 떠 내려가네 / 뚝섬, 금호, 한남동, 여의도를 지나칠 때 / 북한산이 어데인고 관악산을

굽어보니 / 인왕산 치마바위가 달빛에 어리우고 / 남산도 뒤로 밀려 절두산이 반기우네 /

긴 모래 사장은 달 빛에 그을려 은모래 깔리고 / 출렁대는 한강 물 은은히 울려 스치는 소리 있어 /

귀뚜라미 소리인가 했더니 꾀꼬리 울음이요 / 앵무새 지져기는가 알았더니 비둘기 소리라 /

 등불 높이 받잡고 두리번 거리니 / 산새도 물새도 아닌 신선인 듯 진도땅에서 온 박종기

절대의 명인이 부르는 대금 산조라 / 꿩꿩하다가 푸드덕 소리가 나니 꿩 날개치는 소리난다 /

유람선에 몸을 실은 서울장안 선비님들 기가차 혀 내두르니 밝은 달도 수줍어서 구름으로 가리우더라.



  애애절절이 끊어지는 듯 이어지고 밤바람을 타고 울려퍼지는 갸냘픈 절대(大笒)의 소리는

일제 무단정치에 몸부림치던 한 많은 이 민족의 애환을 길고 짧은 한숨소리에 실어 보냈는가?

 

  절대의 명인 박종기는 1879년 12월 12일 임회면 삼막리 138번지에서 부친 박기순(朴基順)과

모친 김사현(金寺玄)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구석진 이 고장에서 천인의 몸으로 태어나 그는 당시 국창급인 명창(名唱) 화중선, 임방울 등과

어울리면서 서울 장안은 물론 전국을 휩쓸었고 현해탄을 넘나들기도 하였다.

 

  그가 득음(得音)한 내력을 살펴보자.

  박종기 나이 5세때 어머니를 여의자 3년간 하루도 걸르지 않고 어머니 묘소(진도읍 포산리에 있음)에

찾아 다녔다.

  묘소에 찾아간 그는 어머님 묘소 옆에서 대금을 불면서 익히기 시작 하였다.

3년에 이르자 각종 새소리는 물론 가야금이나 거문고 산조를 타면 바로 같이 따라서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진 것이다.

 

  박종기는 나무를 하러 갈 때나 놀러다닐 때도 항상 대금을 가지고 다니며 바람소리,

물 흐르는 소리 등 소리나는 것은 모두 연주하게 되었다.

 

  한편 꿈에서 선몽이 있어 그곳에 가 보았더니 푸른 대밭에 오직 황색의 큰 대나무 한 그루가 있어

그 대를 뿌리까지 파다가 만들었다는 박종기의 절대는 밑 부분이 혹 같이 달렸고 벌어질까봐

그 부분을 얼마나 힘껏 조여맸는지 훗날에 무엇을 힘껏 조여 매면 『종기 절대 매듯한다』는

속담이 되기도 했다.

 

  진도군 임회면 안금산(按琴山) 턱 안금당(按琴堂-임회면 삼막리 소재)에서 인근 주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절대로 새타령을 한참 연주 중에 난데없이 주변에서 산새들이 박종기 어깨위에

또는 머리 주위에 날아와 떠날 줄 모르니 보는 이 어찌 탄복함을 참을 수 있으랴.

 

그후 절대의 명인 박종기는 서울 장안은 물론 전국에 그 명성을 떨쳤고 마침내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 등지에 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듯 대금의 창시자요, 진도아리랑을 만들고 널리 보급시킨 선생의 기예는 한주환이가

이어 받았고 이생강, 서용석은 또한 그 뒤를 이어 받았다.

 

  이와 같이 고명한 분과 함께 진도의 예술은 남도의 예향이라 불리어지고 중앙 무대에서 활약하는

박보아, 박옥진 가야금의 명수 박동준, 명고수 김득수 등 수 많은 자랑스러운 우리 군의 아들

딸들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박종기 절대의 명인은 효도와 청빈을 신조로 삼았으니

그의 친형 박종현(朴鍾賢)이 몹쓸 병에 걸려 사경(死境)에 도달했을 때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니 그의 형수 자매들이 잇달아 손가락을 잘라 형의 입안에 피를 쏟았으며

그 효험으로 수명을 연장하게 되었고 그의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앓고 있을 때에는

자기의 양 다리 허벅지 살을 베어 죽을 쑤어 잡수시게 하였다.

 

  이와같이 지극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에 감동하여 군민 모두가 함께 찬양하고 그 뜻을 받들어

마을 유지들이 면장에게 면장은 군수에게 천거하였더니 이를 알게 된 군수는 출천지효(出天之孝)라

감탄하여 널리 알려야 한다고 직접 천거장에 찬양의 뜻을 증명(證明)하기도 하였다.

 

  형제간의 우애와 효성이 지극한 박종기 절대(大笒)의 명인(名人)은 여름 어느날 완도에서

이름높은 인사(人士)들이 모인 연회석에 추청을 받고 대금(大笒)을 연주하던차 대금 끝에서

붉은 피가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앞에서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선생에게 알려 주었지만 선생은 그 사실을 알고도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연주하던 곡을

끝마치고 대금을 손에 꼭 쥔채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둔 것이다.

  때는 1953년 7월 7일 무더웠던 한여름 날의 비보였다.

 

  당시의 이 통분함을 어떠 하였으리오

  진도군민들은 나르던 새도 멈추게 하였던 절대의 명인 박종기 죽음에 접하여 군민장으로 하여

높은 공적을 추모 하였고 1974년 4월에는 『박종기 공적비 건립 추진 위원회』에서

그의 공적비를 진도 무형문화재 전수관 앞마당에 건립하였는데 한 나그네가 머물다 간 자취를

다시 한번 불현 듯 생각게 한다.

 

  자신의 피와 살을 도려내는 지극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는 진정 출천지효(出天之孝)이며,

이 나라 암흑기의 한숨 소리와도 같은 그의 생애는 대금산조와 진도아리랑 음률속에 나는 새도

머물게 하였으니 오늘을 살고 내일을 이어가는 뭇 사람들에게 수 많은 교훈을 깊은 감화를 줄 것이다.

 

  지금도 그의 손자인 인간문화재 박병천과 그 후손들이 박종기 절대의 명인에 대한 뜻을

이어가고 있으니 후손에 길이 빛나리라.

 

 

참고로, 대금의 명인 박종기님의 손자 박병천 선생님도 몇해전 돌아가셨으나

2007년 전통예술 명가로 지정되어 기념 공연때

(이때 박병천 선생은 몸이 안좋아 옆에서 지시만 했음)  

박병천님의 아들 박환영(부산에서 대학교수)이 박종기 선생이 즉석에서 연주했던 곡이

"봉장취"라고  소개하면서 대금을 연주하였고 손자인 박명규도  대금을 연주했는데

대를 이어 기가막히게 잘 연주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명가(名家) 집안 답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출처 : nami와 함께하는 행복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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