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문자입니다. 왠지 낯이 익은 문자지요. 이것은 환단고기에만 나타나는 문자인데, 이 책에서는 가림토 문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한글과 꼭 닮은 이 문자가 이미 4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가림토 문자를 쓰기 전에는 태고의 문자인 녹도문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녹도문자의 구체적인 형태는 환단고기에 적혀있지 않습니다.
이런 내용이 실려있는 환단고기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문자를 만든 최초의 민족이 됩니다. 더 크게는 최초로 문명국가를 세운 민족이자, 중국과 아시아 각국에 문명을 전파한 하늘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솔직히 믿고 싶은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상반된 마음은 환단고기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환단고기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고, 그 열기 또한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른바 '한단고기 열풍'의 현주소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
최근 PC 통신의 한국사 동호회 난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상고사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그 중에서도 단연 최대 관심은 환단고기다.
한국사 동호회 중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되고, 회원수가 가장 많은 하이텔의 한국사 동호회. 한달에 한 번씩 있는 정기모임에서는 환단고기와 관련된 상고사에 대해서 토론하는 일이 많다. 회원들이 자비를 들여 교재를 준비하고 강사에서부터 회원들까지 열띠게 토론에 참여한다. 이날은 환단고기에 담겨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중국에서 발견되는 관련 유물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다.
최근 이렇게 우리 상고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모임이 부쩍 늘어났다. 대학마다 상고사 동아리가 생기고 있을 정도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환단고기에 열광하는가?
동호회의 수준을 넘어서 본격적으로 환단고기의 내용을 연구하는 모임들도 나타나고 있다. 한배달의 역사천문학회도 그 중에 하나다. 이 모임에는 대학교수를 비롯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가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환단고기에 기록된 천문현상을 통해서 그 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밝혀내려고 하고 있다.
박희준 (한배달역사 천문학회)
우리의 선조들은 하늘의 천문학에 아주 밝았다.. 그런 기록은 삼국사기나 유사보다 환단고기에 더 많다.. 환단고기에 감성이란 직책이 나온다..별자리를 관측하는 독특한 관직.. 고구려 시대 천문관측이 있기 전에 우리 조상은 이미 하늘에 주목.. 그런 기록들이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상고사와 고대사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사람들에게 환단고기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등장했다. 이 책의 대중적인 인기는 서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환단고기를 번역한 책만 해도 열 종류가 넘고... 지금까지 100만 권 이상 팔린 것을 추정된다. 비소설에서 이 정도 팔리면 꾸준한 스테디셀러다.
환단고기뿐만 아니라 몇 년 전부터 상고사, 고대사 관련서적이 활발하게 출판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책 중에서는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 '고려도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책들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환단고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환단고기의 주장을 훨씬 넘어서는 것들도 있다.
--------------------------------------------------------------------------
이러한 환단고기 열풍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습니다. 환단고기가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게 된 것이 1980년대 초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책의 내용만큼이나 환단고기가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습니다.
환단고기는 네 권의 책을 묶어서 한 권의 단행본으로 만든 책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성기와 단군세기, 그리고 북부여기, 태백일사... 그 중에서 삼성기는 상,하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 다섯 권의 저자는 각각 다르고, 저자들이 살았던 시대도 신라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틀립니다. 이 저자들 중에는 이암과 이맥, 범장처럼 다른 사료에서 행적이 확인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단군세기와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썼는 지 다른 사료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자들 중에는 다른 사료에서 그 행적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어서, 실존 인물인지 확실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저자들이 썼다는 책들은 남아있지 않고, 1911년에, 네 권의 책을 한 권으로 묶여서 환단고기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네 권의 책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펴낸 인물에 대해서 이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범례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신시개천 5808년 곧 광무 15년 신해 5월 광개절날에 태백 유도 선천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
범례에 의하면 1911년 네 권의 책을 묶은 사람은 계연수라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필사한 장소는 묘향산 단굴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1911년, 계연수가 펴냈다는 환단고기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환단고기는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일까요?
--------------------------------------------------------------------------
계연수가 펴낸 환단고기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환단고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9년이다.
재야사학자 송호수씨는 줄곧 환단고기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데, 1979년에 인쇄된 환단고기 영인본을 가지고 있다. 최초의 영인본을 가지고 있고 20년 가까이 환단고기를 연구해온 그도 환단고기 원본을 본 적이 없다. 환단고기를 펴냈다는 계연수에 대해서도 소문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송호수 박사 (재야사학자)
계연수는 애국투사.. 감시 심하니까 채약꾼으로 위장.. 주로 묘향산 단군굴에 있었다. 천부경을 탁본해서 보냈다. 일설에 의하면 왜놈들이 압록강에 시체를 던졌다는 설이 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계연수에 대한 이야기. 계연수의 행적을 찾아보기 위해서 수안계씨 종친회를 찾았다. 족보를 샅샅이 뒤져서 계연수의 이름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확인할 수 없었다.
현재로서 계연수의 행적을 더 이상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계연수가 펴냈다는 환단고기 서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계연수가 어떤 사람인지 추정해보기로 했다.
'한단고기는 모두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치고 또 내가 정성을 다하여 옮겨 적었다. 또 홍범도, 오동진 두 벗이 자금을 마련하여 인쇄에 부쳤다'
먼저 환단고기를 감수했다는 이기. (사진 우측)
이기는 한말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애국계몽운동가였다.
책을 인쇄하는데 자금을 댔다는 홍범도. (사진 중앙)
홍범도는 간도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였다.
홍범도와 함께 자금을 댔다는 오동진. (사진 좌측)
오동진 역시 간도에서 활약한 독립투사였다.
이기와 홍범도, 오동진은 모두 독립운동가들이자, 대종교와 관련있는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계연수도 대종교도이자 독립운동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최홍규 교수 (경기대 사학과)
1910년대 민족운동사적인 측면에서 환단고기, 단기고사 등이 발행.. 망실된 우리나라를 회복하는 중심에 단군을 두고 역사관을 표출하고 대종교도가 중심이 돼서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대종교에 입교해서 민족운동에 투신..
그러나 환단고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70년 후. 이유립이란 인물이 공개한다. 원본이 전하지 않는 점, 그리고 70년 후에야 책이 나타난 점 때문에 환단고기의 편자는 계연수가 아닌 이유립이라는 의심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이유립은 이미 사망한 상태다. 그는 어떻게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것일까?
이유립은 단군사상을 연구하는 단단학회의 회장을 지냈다. 단단학회에서는 계연수도 전임 회장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 인연 때문에 계연수의 환단고기를 제자인 이유립이 펴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유립의 부인이 단단학회를 지키고 있다. 부인은 이유립이 평생 책을 읽고 글을 썼던 학자였다고 증언했다.
이처럼 우리의 뿌리, 역사찾기를 평생 소원했던 이유립은 생전에 많은 책을 썼다. 그리고 그런 이유립의 글 중에는, 환단고기와 비슷하거나 같은 내용이 많이 발견된다. 실제로 이유립은 생전에 환단고기를 번역해서 자기 나름대로 책을 내려고 했다고 한다.
이 환단고기 평주는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풀이해 놓은 것으로, 이유립은 이것을 책으로 펴내기 직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취재 중에 또 한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유립이 환단고기 원문을 직접 수정한 흔적이다. 1979년에 펴낸 환단고기 중에는 정오표가 달린 책이 있다. 정오표란 책에서 틀린 글자나 잘못된 내용을 고쳐서 추가한 것이다. 이 정오표의 글씨는 이유립의 글씨가 분명했다. 이것은 이유립이 환단고기의 내용을 어느 정도 수정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1979년, 이유립이 세상에 공개한 환단고기는 당시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환단고기가 주목받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1982년에 일본에서 일본어 번역본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일본어 번역본은 신국민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가지마 노보루가 펴낸 것이다. 이것이 국내에 역수입되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가지마 노보루는 본래 변호사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환단고기를 번역하게 되었을까?
평소 한국과 중국에서 고서적을 수집해온 그는 1979년, 한국에서 환단고기 영인본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영인본을 입수한 경위나 그것을 번역한 이유에 대해서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다가, 잠깐 이런 대답을 했다.
"나는 환단고기를 이해할 수 있다. 거짓이 아니고 진짜 책이기 때문이다. 진실의 역사를 아는 혼이 생기면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지마 노보루가 이해한 진실은 환단고기가 일본 천황가의 뿌리를 밝히는 책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환단고기를 통해서 동양 역사의 근원을 파악했는데, 일본의 신도가 본류이고 단군은 지류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책이 국내에 들어와서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그 후 한국에서는 가지마 노보루의 해석과는 다른 독자적인 번역본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
이처럼 환단고기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수수께끼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1911년 계연수가 처음 필사한 원본이 사라진 점, 그 후 70년이 지나서야 이유립에 의해서 세상에 공개되는 점, 그리고 1979년 이유립이 펴낼 당시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가 일본어로 출판하면서 국내에서 주목받게 된 점 등.
이런 미스테리한 부분 때문에 환단고기를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세상에 나오기까지 과정이 모호하기 때문에 책의 가치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지만, 환단고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책에 사료로서 검토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환단고기에는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실려있습니다.
단군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실려있는 책은 삼국유사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단군에 대한 기록은 아주 짧고 압축적입니다. 단군이 고조선을 통치한 기간이 1500년이며 수명은 1908세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환단고기에는 2천 년이 넘게 지속된 고조선을 한 사람이 통치한 것이 아니라, 47명의 단군이 통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47대 단군의 이름과 재위기간, 치적을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환단고기의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에는 다양한 천문현상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오성취루 현상이다. 오성취루란 목성과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 나란히 늘어선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장관이 단군조선 때 나타났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다.
최초로 이 기록에 주목한 사람은 서울대 천문학과의 박창범 교수.
그는 단군조선 시대의 천문현상을 과학적으로 검증한 논문을 발표했다. 천문현상을 추적해가면 그 현상이 나타나는 시기는 물론 관측자의 위치도 알 수 있기 때문에 연대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오성취루 현상은 서기전 1733년에 나타난다. 천문관측 프로그램에 입력해본 결과, 일 년 전인 서기전 1734년 7월 13일 초저녁에 다섯 개의 별이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 1년의 오차가 나지만 천문학계에서는 거의 정확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동훈 (코스모피아)
천문현상은 과학이다.. 연도, 날짜를 입력하면 행성의 위치가 표시된다. 기록과 오차가 거의 안난다.. 천문현상은 잘 짜여서 움직이는 시스템.. 그 당시 기록이 맞는다.
또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고조선의 영역이다. 환단고기의 기록을 토대로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해보면. 지금의 북경에서부터 만주의 전 지역과 한반도 전체를 포함한다.
한 시대의 영토를 추정하는 방법 중에는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과 함께 그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을 참고로 추정하는 방법이 있다.
이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기로,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지역을 살펴보면, 고조선의 영역도 좀 더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이 비파형동검은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됐다.
윤내현 교수 (단국대 사학과)
고조선의 대표적인 청동무기인 비파형동검이 지금의 북경근처에서부터 만주 전지역, 한반도 남부해안까지 출토.. 청동기 시대 청동 무기는 당시 지배층의 독점물이다.. 그래서 중앙에서 만들어서 공급했기 때문에 같은 청동기가 통치되는 지역은 한 통치집단에 의해서 통치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자료를 보면 고조선의 영토는 지금의 북경에서 만주 전지역과 한반도 전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역과 환단고기의 고조선 기록을 비교해보면, 지금의 북경에서부터 만주, 한반도 전체를 포함하고 있어 상당부분이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의 사료적인 가치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근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단서는 바로 수서령이다. 수서령이란 조선시대 세조와 예종, 성종 때 8도 관찰사에게 명령해서 옛부터 전해져온 희귀서적을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일이다. 지금 이 서적들은 전하지 않지만, 우리 역사의 자부심을 담고있는 책들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수서령이 내려진 책들 중에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책과 제목이 일치하는 것이 발견된다. 삼성기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 당시 이러한 책들은 왜 거두어들였을까?
박성수 박사 (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그대로 두면 역사관이 문제가 되고 중국에서 의의를 제기할 우려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생각해서 이런 책을 비밀리에 가두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
수서령의 대상이었던 책들 중에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책 제목이 나타나는 것은 1911년,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펴낼 당시, 옛부터 전해지는 책들을 있었고, 그것을 참고했다는 것이다.
--------------------------------------------------------------------------
이런 것을 볼 때 환단고기는 그냥 무시하거나 버려둘 수 없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대부분 환단고기를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고 평가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결정적인 이유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책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먼저 환단고기를 이루는 다섯 권의 책의 저자들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인데요. 다른 사료에서 이름이나 행적이 발견되는 저자들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환단고기 말고는 그 책을 썼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1911년에 다섯 권의 책을 묶어서 환단고기라는 단행본으로 펴냈다는 계연수에 대해서도 그가 펴낸 원본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마지막으로 70년 후에 계연수의 제자인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공개한 것도 납득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책의 출처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사료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근거는 환단고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 두 문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백성들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리니...한 사람도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이가 없었다'
'학교를 세워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가 크게 진보하여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
이 두 문장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사람인 행촌 이암이 썼다고 서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군세기에 나오는 '산업'이나 '문화'와 같은 용어는 근대에 등장한 것으로, 고려시대에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환단고기 곳곳에는 '국가'와 '인류', '전세계', '남녀평등'이란 말이 등장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용어가 네 명의 저자들이 살았던 신라와 고려, 조선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용어의 문제 말고도, 여러가지 측면에서 환단고기를 사료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
그 근거는 먼저 다른 책을 베낀 흔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라가 형이라면 역사는 혼이다.' (단군세기 서문)
환단고기에 나오는 이 문장은 박은식의 <한국통사>에서 나오는 대목과 일치한다.
'나라는 형체요 역사는 정신이다.'
이것은 환단고기가 네 권의 책을 그대로 묶은 것이 아니고 편찬자가 가필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고구려 연구회의 박찬규 박사는 환단고기에 나타나는 고구려 관련기록을 다른 사서의 기록과 비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환단고기의 기록 중에서 많은 부분이 다른 사서와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다.'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박찬규 박사 (고구려 연구회)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라면 성이 해씨여야.. 고씨성은 후대인 고주몽 이후부터 쓴다..
또한 환단고기에서는 찬란한 역사를 강조하다보니, 지금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기록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단군조선 시대의 인구.
'호구를 조사해보니 모두 1억 8천만 구였다.'
서영배 교수 (인하대 사학과)
환단고기에는 단군조선시대 호구가 1억 8천만구, 인구는 약 9억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동이전에는 만주부터 한반도 남쪽까지 당시 인구가 140만 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고구려, 백제 두 나라 인구가 725만명.. 조선시대 각종 인구통계를 보면 천만을 넘지 못한다.."
환단고기가 사료적인 가치가 없다고 보는 또 하나의 근거는, 이 책이 역사책보다는 경전에 가깝다는 것이다. 특히 태백일사의 삼신오제본기와 소도경전본훈에서는 종교적인 경전의 색채가 강한 대목이 많다. 소도경전본훈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천제님이 가라사대 너희 5가와 중생들아!
저 푸른 것이 하늘이 아니며
저 까마득한 것이 하늘이 아니니라.
하늘은 얼굴도 바탕도 없고 처음도 끝도 없으며
위아래 사방도 없고 겉도 비고 속도 비어서
어디나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무엇 하나 싸지 않은 데가 없느니라.'
이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에는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실려있다. 이러한 천부경는 대종교의 핵심교리이고 삼일신고는 대종교의 경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단고기를 역사책으로 보기에는 종교적인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환단고기는 내용 하나하나까지 검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편찬자가 가필한 흔적이 나타나는 점, 다른 문헌과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점, 책의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점 등 때문에 사료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이렇게 환단고기를 둘러싸고 진위논쟁, 가치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최근 상고사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상고사의 화두는 단연, 단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이 단군을 둘러싸고 신화로 볼 것인가, 역사로 볼 것인가라는 논란이 새롭게 일고 있습니다.
이렇게 단군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는 것은 환단고기를 둘러싼 논쟁과도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이러한 환단고기 논쟁의 바탕에도, 상고사 열풍의 핵심에도 단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런 단군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인식이 나타나게 된 배경, 그리고 최근에 나타난 현상을 살펴봅니다.
--------------------------------------------------------------------------
몇 몇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교정에 세워진 단군상의 목이 잘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표면적으로 이 사건은 종교계의 갈등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은 단군에 대한 혼란된 인식때문이다.경기도 여주의 한 초등학교. 교정에 세워둔 단군상의 목이 감쪽같이 잘린 일이 벌어졌다.
사건이 발생한 당일, 여주에서는 이 학교 말고도 두 학교에서 똑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학교에서는 파손된 단군상을 철거해서 창고 옆에 보관하고 있다.
이 단군상을 세운 단체는 한문화운동연합. 이 단체에서는지난 4월부터 민족정신을 회복하고 통일을 기원하는 목표로 전국의 학교에 단군상을 건립하는 운동을 펼쳐왔다.
한문화운동연합 관계자
한문화운동연합에서는 전국 368곳에 단군상을 설립.. 지난 7월 4일 여주 세 군데 학교에서 단군상 훼손사건 발생.. 그 뒤로 마산, 창원, 삼천포, 울등도 등 7건 이상 사건 발생..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뿌리 바로 알자는 취지에서 세운 것인데 안타까워..
그러나 단군상을 건립하는 것에 대해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컸다. 단군이 역사적인 인물로 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단군상을 건립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김경재 교수 (한신대 종교학과)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은 종파를 떠나서 단군신화를 역사적인 국조로 전제해서 공공건물이나 장소에 단군상을 세우는 것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합의가 안된 것이다..
현재 단군에 대해서 이렇게 신화와 역사라는 두 가지 시각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단군을 바라보는 시각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금세기 초만 해도 단군에 대한 인식은 비교적 통일되어 있었다. 그것은 1900년대 초반에 발행된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교과서에는 고조선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국조로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고조선 역사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이 교과서에는 단군의 초상화는 비롯해서, 고조선과 삼한의 지도가 실려있다.
1900년대 초까지 단군에 대해 뚜렷한 역사의식이 나타나는 것은, 조선시대까지 단군은
역사적인 실존인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대 왕들이 단군을 국조로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박성수 교수
단군을 모신 성전은 평양 숭령전이 있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단군을 모시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강화도 마니산 제천.. 태백산에서도 제사. 조선왕조는 명백하게 단군조선의 후신이라서 단군을 모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까지만 해도 역사적인 존재였던 단군이 신화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는 일제의 상고사 말살 정책 때문이다. 일제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우리의 역사를 축소하는 일이었다.
양태진 (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일본의 역사가 기원 2600년으로 되어있는데 우리는 5-6천년.. 반도 안되는 역사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무리.. 후대에 역사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자기 역사 의 우수성을 확보해서 교육해야.. 그를 위해선 우리 역사 의 우수성을 말살해야.. 그에 관련된 기록을 다 없앰..일본에서는 우리 역사, 단군조선 생략하고 바로 상고삼한으로 들어간다.. 그 뒤를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 그리고 일본의 식민정책사로 역사를 꿰어맞춘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서 일제는 조선사편수회 사업이란 이름으로 서적을 색출한다. 1910년 11월부터 14개월 동안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책이 무려 51종 20만권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 거두어들인 책은 모두 사라졌다. 그 후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신화로 축소됐고 아직까지 완전하게 역사로 인정받고 있지 못한 상태다.
최근 잃어버린 상고사를 회복하고 신화로 머물러 있는 단군을 역사로 받아들이려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중심에 시인 김지하씨가 있다.
.
김지하
기초적인 상고사, 고조선사를 열어야 그 안에 들어있는 문화적인 자산, 신시, 화백, 풍류, 유목문화의 첫 고대국가.. 상고사에 대한 비젼, 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초입에 단군조선을 막아버리니까 상상력을 자극할 수 없다. 그것을 열자는 것이다..
이런 상고사회복 운동에 대해 한쪽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민족주의, 국수주의라는 비판이 일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도 사실이다.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그리고 학문적인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단군은 역사와 신화 사이에서 끊임없이 표류할 것이다.
--------------------------------------------------------------------------
개천절 때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마니산 참성단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렇게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단군을 모셨던 곳은 여러 곳이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단군은 실재했던 역사로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최근 일고 있는 환단고기 열풍의 이면에는 이처럼 단군과 고조선을 역사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의 열망이 잠재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80년대 환단고기가 알려진 이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며 끊임없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이런 관심과는 달리 학계에서 환단고기를 대하는 반응은 냉담합니다. 사실 환단고기에 대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학자들의 의견을 듣기가 어려웠습니다. 학문적인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접근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렇게 환호와 비난이 엇갈리는 책. 환단고기를 둘러싼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지 생각해봤습니다.
--------------------------------------------------------------------------
환단고기를 취재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학계의 도움을 받기가 힘들었다. 그동안 도움을 주었던 학자에게서 제작을 우려하는 팩스가 날라들기도 했다. 학계에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이 환단고기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재야사학계에서는 이 책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기존 학계에 대해서 불만을 감추지 않는다.
송호수
환단고기를 부정하려면 육하원칙을 제시해야지, 자기 종교성이나 학파와 안맞는다고 부정하는 것은 학자다운 자세가 아니다..
이런 학계와 재야사학계 간의 대립은 이미 1970년대 상고사 파동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재야사학계에서는 단군을 역사상의 인물로 규정하고 기존의 국사학계를 일제 식민주의 사관파로 비난한다. 일명 단군파동이라고 하는 이 사건은 1978년에 법정으로까지 비화된다. 그리고 1980년대 환단고기가 등장하면서 양쪽의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환단고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학자들에게 몇차례나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고 전화상으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화녹취 내용
환단고기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인사들의 태도, 이런 것도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주장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식민사관에 물들었다고 매도하고 심지어는 인신공격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학계에서 환단고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지 못하는 것은, 이 책에 대해서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연구와 학문적인 접근이 어렵다고 대답했다.
정영훈 교수 (정신문화연구원 사학과)
환단고기는 성립되고 공개되기까지 과정이 매우 문제가 많은 책이다.. 국사연구와 국사교육이 우리사회성원에게 민족적인 정체성과 자긍심을 심어주어야한다는 논리는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가치가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가지고 그런 목적에 접근하는 것은 기초공사없이 고층빌딩을 세우는 것처럼 위험하고 무모한 태도다.."
노태돈 교수 (서울대 사학과)
환단고기는 한마디로 우리 상고사를 복원하는데는 자료적인 의미가 없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후에 쓰여진 책이기에.. 그런 만큼 이 책을 통해서 우리의 상고사를 복원할 수 없다. 단 이 책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후에 우리 선인들이 우리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려고 했는가라는 당시인들의 역사인식을 파악하는데는 유효한 자료가 될 수 있다.
환단고기에 대해 학계에서는 학문적으로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실증적인 역사가 아니라 믿고 싶은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고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나타난 갈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환단고기 열풍은 학계와 재야사학계 양쪽에 상고사 연구라는 과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
환단고기
지금 이 책의 의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고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입니다. 지금 바로 환단고기를 사료로서 채택하는 것은 어려울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책은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참고가 되거나,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고사를 연구하고, 역사의 지평을 넓히는 적극적인 자세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이나 일본만 해도, 신화로 알려진 그들의 상고사를 연구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학계나 재야 구별없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서 끊임없이 역사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상고사는 민족의 보고입니다. 어쩌면 미래의 씨앗이 될 값진 자신이 아직 완전하게 개척하지 못한 그 영역에 숨어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단고기가 촉발시킨 상고사에 대한 뜨거운 관심만큼은 되새겨 봐야 하겠습니다. 그런 관심이야말로 상고사에 대한 대장정의 출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