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환단고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영훈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2018. 11. 14. 12:31우리 역사 바로알기

한겨레신문의 기자 한 명이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를 보고 환단고기와 치우에 대해 열정적으로 쓴 글이 어제부터 이곳에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기자나 거기에 감명받는 사람이나 이해 안되기는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아래의 글을 읽어보면 좀 더 냉정해 질 수 있지 않을까해서 소개합니다.

이 글을 쓴 정영훈교수는 누구보다 단군조선의 복원을 위해 노력한 학자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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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영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한국정치사상)


<환단고기>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책도 많지 않을 것이다.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이 책을 ‘위서’라 규정하고 이 책을 토대로 우리 역사의 빈칸을 채우는 것을 위험시한다. 그러나 재야학계는 <환단고기>를 상고사의 진실을 전하는 바이블과도 같은 존재로 받든다.

이 책은 1979년말 필사본이 영인되어 공개된 이래, 위대한 민족상고사를 갈망하던 국민일반과 재야학자들 사이에 급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번역본도 7-8종이 나온 것으로 알려지며, 모두 100만부 이상이 팔렸다는 추정도 나와있다. ‘재야학계’는 이 책을 토대로 하여 상고사의 골조를 세워갔다. (흔히 ‘재야학계’를 말하지만, 70년대 중반에 ‘국사찾기논쟁’을 벌이던 ‘재야’와 80년대 중반 이후의 ‘재야’는 다르다. 70년대 중반의 재야학계는 단재 신채호나 정인보-안재홍 같은 일제하 민족주의사학자들의 학설에 토대해서 주류학계를 공격했었지만, 최근의 재야학계는 대부분이 <환단고기>에 토대하여 상고사를 채우면서 앞시기 민족주의사학자들의 민족상고사인식을 부인하기까지 한다)

이 책이 종교계와 사회에 미친 영향도 크다. 종교계의 일부 교단은 이 책을 민족사를 설명하고 자기 종교의 교리를 보강하는 기본자료로 채택하였다. 많은 소설작품과 시나리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다물’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것도 이 책이며, 따지고 보면 월드컵때 ‘붉은 악마’들이 치우를 마스코드로 삼은 것도 <환단고기>가 치우를 우리민족의 영웅으로 그려준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단군상을 전국의 학교에 세워서 단군상 공방을 야기한 단체도 설명문을 <환단고기>에 토대한 상고사로 채워서 시비거리가 되었었다.

이 책이 급속히 보급되어가면서 주류학계의 견해를 비판하는 전거로 이용되자, 주류학계는 이 책의 정체를 의심하는 ‘위서론’을 제기하였다. 이 책을 위서로 보는 주요 이유는, (1) 책속에 근대적 용어나 관념들이 너무 많고, (2) 이 책이 1911년에 편집되었다거나 1949년에 필사되었다는 것을 확증할 증거가 없으며, (3) 이암이나 이맥 같은 인물에 의해 고려조나 조선조에 저작되었다고 믿을 수 있는 증거도 없고, (4) 여러 정황이 일제기 이후에 알려진 책이나 사료를 보고 쓰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등 여러 차원에서 제기된다. 위서론자들은 이 책은 공개자인 이유립에 의해 1970년대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에 위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위서론자들은 물론, 이 책이 말하는 상고사 내용도 사실일 수 없다고 본다.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허구적 창작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위서론에 대해 이 책에 대해 애착을 갖는 이들은 반론을 제기한다. 반론자들은 책에 나오는 근대적 용어나 관점들은 전승이나 필사과정에서 추가되거나 바뀌었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위서론자들은 언제 누가 왜 이 책을 위작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대지 못하고 추측성의 정황증거만으로 이 책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는 근본적으로 이 책이 전하는 상고사의 진실에 위기감을 갖는 이들이 (식민사학에 물든 자들이) 이 책의 사료가치를 박탈하고자 내놓는 무리한 주장이라 규정한다. 이들은 특히 삼국정립이전의 상고사를 이 책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반문한다.

생각건대 이 책을 접하는 학도들은 이같은 상반된 논쟁 가운데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를 두고 혼란을 경험할 것 같다. 필자에게 원고가 요청된 것은 아마도 이같은 혼란속에서 갈피를 잡을 수 있는 조언을 기대한 때문으로 생각된다. 회고해보면 필자도 그와 같은 혼란의 과정을 거쳐왔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필자는 학계에서 활동하는 인사들중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에 <환단고기>를 접했던 사람중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의 공개자인 한암당 이유립선생으로부터 당신이 직접 수정한 영인본을 증정받았었으며, 이 책에 대해 한암당 선생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역시 의문의 핵심은 이 책이 과연 역사의 진실을 얼마나 진술하고 있는지 하는 것과, 이 책이 공개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한암당선생과의 대담을 통하여 또 나름대로의 추적을 통하여 필자가 내린 결론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현재 전해지는 책은 한암당선생이 최종적으로 손을 댄 (편집-가필한) 것이다.

 

(2) 그러나 한암당선생이 이 책의 모두를 조작했다고는 볼 수 없고, 적어도 한암당선생에게 전달된 모종의 문헌적 또는 역사인식상의 전승이 있었다.

 

(3) 그러나 현재의 책 내용중 얼마 만큼이 한암당선생이 추가한 부분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을 방증해주는 고고학적-문헌적 자료가 확보되기 전까지는 이 책을 토대로 상고사를 복원하는 것은 ‘보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접하는 이들은 이 책이 전해주는 민족사의 웅대함에 대해 감격할 것이고 이 책이 말하는 내용이 진실이기를 바라마지 않을 것이다. (필자도 그러하였으니까) 그러나 이 책을 토대로 상고사의 골조를 세우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이 책의 증언내용을 방중하는 자료들이 출현하거나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올 때를 기다려야 한다. 위대한 민족사를 희망하는 열정이 크더라도 우리는 합리적 지성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그에 접근해야 한다. 민족은 분명히 우리를 뜨겁게 할 가치가 있는 실체이다. 그러나 민족적 긍지나 소속감이나 애정의 근거와 계기는 일단은 <환단고기> 아닌 다른 어떤 것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북한 학계는 <환단고기>를 위서라 규정한다. 이 책은 근래에 편찬된 것이고, 이맥이나 이암 같은 앞 시기 사람의 이름을 거짓 거명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규원사화>에 대해서는 위서로 보지 않는다. <규원사화>가 1675년(숙종2년)에 북애라는 실존인물에 의해 저술되었다는 것은 믿어도 된다는 의미이다. <규원사화>는 환인에 의한 천지창조과정과 환웅(신시씨)에 의한 민족개창과정 및 단군에 의한 배달국-조선 건설과 47대를 거치면서 이어온 단국시대에 대해 적고 있다.

(<제대신문> 2004년 3월 31일자)

출처 : <환단고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영훈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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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환단고기 관련자료 | ‥‥‥‥桓檀古記의 역사
玄銀|조회 194|추천 0|2017.11.05. 15:57


환단고기 관련자료


  지난 해 고구려역사를 중국화려는 동북공정이 있고 나면서부터 우리국민은 인터넷이란 열린 공간을 통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한 1999년 전에는 대한민국 사학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초자 모른 체 국민들은 살아왔다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학계분들이 알아서 잘 하시겠지. 제대로 가르쳐 주시겠지'하며 지내온 광복 50년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역사로 인해 불거져 나온 한민족 역사의 문제점에 대해 이제야 많은 분들이 깨어나시는 듯싶습니다. 학교에 가면 고구려가 수나라 30만 대군과 싸웠던 내용을 삼국사기에서 인용하듯 6자로 줄여서 올려 두었더군요. 그것도 역사스페셜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웃기는 게 우리는 우리의 역사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우리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시작되자 반박하며 우리민족의 뿌리임을 주장해야 할 강단의 사학계는 고구려전공으로 학위를 받은 분이 한분이니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그 일을 계기로 국민의 강단사학계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고 열린 공간인 인터넷의 공간속에서는 제대로 의견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사학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광복 후 일제가 쳐놓은 그물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한국역사를 책임진다는 책임감으로 일하셨다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마땅히 국민에게 매를 맞아야 정상인듯 싶습니다. 한반도에 세계 고인돌의 60%가 분포되어 있는데 그 때의 문명의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는 사학계, 그저 막연하게 고조선이라고 하며 살았던 것이 현실입니다.


   솔직히 어디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막막하네요. 저는 역사학을 전공하는 이는 아니지만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종합해 보니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뿌리가 있는 민족인가요? 그렇다면 우리역사의 시작은 어디입니까? 왜 그렇죠? 얼마 전 발견된 고구려 합판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천손이라 불렀다 합니다." 천손.. 가끔 할아버지나 되시는 분들이 우리는 천손이다. 라고 하시던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계1%의 인구로 세계 경제 20%를 휘두르는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이라더군요. 이는 바로 하늘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는 의미로 선민사상의 시오니즘은 하나님께서 그들만의 위해 선택해주신 영생의 땅이 있다더군요. 그런데 왜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천손이라고 했을까요?

 

   일제 강점기 풀뿌리처럼 흩어진 한민족의 구심점을 찾고 나라를 되찾고자 뜻을 모으고 사상과 한민족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많은 독립투사들이 활동하던 기본 사상이기도 했는데, 거기 보면 왜 스스로를 천손이라 여기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뜻을 알고 이를 섬기며 스스로를 수행하던 민족, 그렇기에 동방의 등불로 불렸으며, 군자 불사국으로 불렸던 고대 부여, 수행과 수련으로 다져진 동아시아 최대군사강국 고구려, 이런 정신적 바탕 없이 사람은 강해질 수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을 나무랄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자신이 곰새끼인 줄 압니다. 곰의 탈을 쓰고 사는 인간이니 곰새끼처럼 행동합니다. 어려서부터 이런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커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는 듯합니다.


   바른 정신과, 바른 역사, 바른 사상 속에서 아이들은 진정 건강하게 자랍니다. 어른들이 잘못 가르쳐 두고 아무리 타일러도 그것은 그저 폭력이나 힘 앞에 잠시 수긍하는 듯 하지만 마음이 수긍하지 못하는 것은 가식일 뿐입니다.


   바른 정신과 사상, 삶에 대한 철학은 어디서 나올까요? 저는 단군할아버지께서 남겨주신 홍익인간에서 찾습니다. 사람의 인생이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다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천하다 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조선이 망하고 지난 2천 년간 한민족은 천 번에 달하는 왜침을 당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영토는 한반도 구석으로 오게 되었고 역사는 잃었습니다.


   7,000만 한겨레가 하나 될 구심점 하나 제대로 찾지 못해 오늘도 방황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려서는 일본이 만든 애니메이션을 보며 조금만 크면 영어를 배우는 나라, 살고 싶지 않은 나라, 삶의 목적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나라, 그저 경쟁만 일삼고 밟고 올라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 이것이 진정 우리가 원하던 모습인지 생각해 봅니다. 오늘 역사적으로 우리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네요. 이런 내용도 나누어 뜻을 같이하는 위대한 대한민국이기를 바래봅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지 모르니 시간 없으신 분은 낭비 마시길 바랍니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짜증 내시려면 더 읽어 내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환단고기는 한민족에게 한줄기 빛과 같습니다. 특히나 처한 상황이 어렵고 삶에 갈피를 잡기 힘들고, 죽고만 싶은 현실 속에서 한단고기는 독립투사들의 손을 거쳐 한민족의 마음속에 힘을 주는 듯합니다. 물론 위서다, 소설이다, 거짓이다. 라는 말도 많습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하나둘 나오고 진실을 찾고자 심혈을 기울여 오늘도 열정을 가지고 사시는 사학자분들이 있기에 희망이 있는 듯 합니다.


    환단고기한민족의 숨겨진 저력을 이야기 하는 듯 합니다. 폐허나 다름없는 곳에서 일어난 한강의 기적, 이제 역사의 기적이 시작될 시점인 듯 싶습니다. 일제가 소각한 51종 23만권의 한민족 역사서들을 복원하고 허위와 과장으로 얼룩진 중국사서 속에서 우리 동이족의 숨결을 찾아 수천 년을 지탱해준 바른 정신의 숨결을 아이들에게 불어줄 때에 더 이상 우리는 아이들을 나무랄 일도 사회를 나무랄 일도 세상을 나무랄 일도 없을 듯 합니다.


   어른들은 항상 그러십니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바르게 교육받지 못해서 저러는 거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저러는 거다. 맞는 말인 듯 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축소판입니다. 저는 하루 빨리 이 땅에 바른 역사가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1, 한국에서 보는 단고기


*강단사학계에서 보는 환단고기*


   위서라 주장하고 있으며 그 근거를 보자면 우선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하는 이유는

 

첫 번째, 환단고기 원본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환단고기는 30권까지 있는데 그 중 1부가 '이유립' 이란 사람한테 있었는데 방주인이 방세를 못 낸다고 책을 팔아 버려서 잃어버렸다고 하네요.

여기서 위서라고 하는 이유가 나오져.

환단고기를 잃어버렸는데 그 내용을 다 외우고 다시 썼다는 것이 우선 내용입니다. (책 한권을 완전 외웠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거죠)

 

두 번째, 너무 느닷없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걸 세상에 내놓았을 시기가 70년대(1979)에는 한참 경제개발정책 같은 것을 하고 있을 때 사실 이런 거 있는지도 몰랐는데 갑자기 나왔다는 거죠.

원래 이 책이 있었으면 진작 세상에 나왔어야 할 책이 갑자기 나와서 위서라는 이유가.. 그리고 진짜 본문 책이 발견 안 됐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 기록은 있지만 유물이나 터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선 그 옛 역사를 인정하려면 그 터전, 유물과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유물은 있는데 기록이 없으면 어느 나라인지 어느 역사인지 모르고, 기록은 있는데 유물이나 터전 같은 게 발견 안 되면 인정이 안 되죠

환단고기도 마찬가지로 기록은 있지만 유물이나 터전이 없다는 게 이유라서 인정이 안 된 다네요.

 

*재야사학계에서 보는 환단고기*


재야 사학계에서는 진서로 보고 있는데 그 이유를 보자면

 

첫 번째 연호입니다.

   대진국(대진국 : 발해는 자기 스스로를 발해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항상 대진국이라고 불렀습니다)의 문제(文帝: 중국 측 사서에서는 문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문제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인 대흠무(大欽武)연호대흥(大興)이었는데 이 사실은 정효(貞孝)공주의 묘비가 발견된 1980년 이후에야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환단고기""태백일사"에는 이미 대흠무연호 대흥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태백일사"는 1980년 이후에 조작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이유립 선생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초능력자라 천년의 세월을 넘어 보았다고 가정을 해보죠. 일단 넘어가고!

 

두 번째 치우천왕입니다.

   저들(중국, 지나족)에게는 액운을 멀리하고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하는 신으로 동이족인 줄만 알고 있는데 '환단고기'에는 버젓이 제위기간과 활동하셨던 내용까지 적어져 있습니다.


배달국 왕계표


BC 3898년 제1세 거발한 환웅천황 즉위

BC 3804년 제2세 거불리 환웅천황 즉위

BC 3718년 제3세 우야고 환웅천황 즉위

BC 3619년 제4세 모사라 환웅천황 즉위

BC 3512년 제5세 태우의 환웅천황 즉위

BC 3419년 제6세 다의발 환웅천황 즉위

BC 3321년 제7세 거련 환웅천황   즉위

BC 3240년 제8세 안부련 환웅천황 즉위

BC 3167년 제9세 양운 환웅천황   즉위

BC 3071년 제10세 갈고 환웅천황  즉위

BC 2971년 제11세 거야발 환웅천황즉위

BC 2879년 제12세 주무신 환웅천황즉위

BC 2774년 제13세 사와라 환웅천황즉위

BC 2707년 제14세 자오지 환웅천황즉위 (치우천왕, 중국 지나족의 시조 세 분 중 한 분인 황제헌원을 상대로 70번이 넘는 전투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으며 그 당시 철갑으로 무장한 모습을 지나족들이 두려워하여 오늘날 도깨비 형상과 같이 변하여 후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의 역대 왕들조차 출전하기 전에 제를 올릴 정도였으니 그 무위가 중원 전체를 떨어 울렸으며 중국의 황제헌원동이족 자부선인으로부터-신선의 뿌리는 동이족입니다. 절대 중국의 방중술이나 영생술이나 일삼는 천한 신선술이 아닌, 깨달음의 문화였습니다. -삼황내문경(날자를 세는 법과 요일법, 일 년을 나누는 법과 천체의 운영이 담긴 비서라 전해집니다.-


 (환단고기에 적힌 연대표-올해로 한기 9204년, 단기는 상식이죠? 단기 4340년)

 

세 번째 천문학입니다.

   박성수 교수단군학회 1999년 전반기 학술회의 지정토론에서 조선사편수회의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태종실록세조실록에 나오는 고기(古記)들이 고려왕실의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되어 있음을 시인한 바 있다고 밝히고 또 이병도가 쓴 진단학보 창간사에 현재 3종의 고조선비사 이본(異本)이 있다는 기록을 들어 일제 강점기 1920년대까지 상고시대를 밝혀줄 고서들이 남아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서론들 가운데는 독특한 방법으로 {환단고기}사료적 가치를 발굴해낸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환단고기} 내용에 나오는 기록과 중국사서와 발굴유물을 비교 검토하여 {환단고기}의 신빙성을 높일 수 있는 사실들을 찾아냈다. 이것은 {환단고기}가 누군가에 의해 완전히 날조된 책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문학교수박창범, 라대일{단군세기} {단기고사}천문기록에 주목하였습니다. 두 문헌에는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현상(五星聚婁)'이 기록되어 있고 일식 현상이 10건, 큰 썰물이 1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기록된 고조선시대의 천문기록 - 시기 기록내용


B.C.2183년 2세 단군 부루 58년 日蝕

B.C.1733년 13세 단군 흘달 50년 五星聚婁

B.C.1533년 17세 단군 여을 20년 여름 日蝕

B.C.935년 29세 단군 마휴 9년 南海潮水退三倜

B.C.918년 6세 기자 2년 7월 七月 日蝕

B.C.837년 32세 단군 추밀 13년 3월 三月 日蝕

B.C.765년 35세 단군 사벌 8년 4월 四月 日蝕

B.C.579년 19세 기자 1년 봄 日蝕

B.C.423년 44세 단군 구물 3년 2월 二月 日蝕

B.C.258년 47세 단군 고열가 48년 10월 十月 朔日 日蝕

B.C.241년 36세 기자 인한 35년 日蝕

 

   슈퍼컴퓨터를 동원한 조사결과 오행성 결집현상 부분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단군세기} 13대 흘달단군 50년, 즉 B.C.1733년에 다섯 개의 별이 누성(婁星) 근처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1년 전인 B.C.1734년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 해 7월 13일 저녁 다섯 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였습니다. B.C.1733년을 기점으로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 밖에 없었죠. 박교수는 1년 정도 오차가 발생한 점에 대해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현재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기록에 대해 누군가 중국문헌의 천문현상이나 혹은 컴퓨터를 동원해 측정한 기록, 또는 무작위로 {단군세기}에 기술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국문헌에 나타난 천문현상의 기록은 훨씬 늦은 기원전 776년이기 때문입니다. 컴퓨터로 천문현상을 관측하는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유립{환단고기}를 내놓은 1979년 이전에 이러한 기술을 동원하여 위작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작위로 천문기록을 기술했다 해도 맞을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결과 0.007%에 불과하므로 거의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큰 썰물에 대한 기록제29세 마휴 단제 9년(B.C.935년)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있는데 같은 방법으로 조사한 결과 전후 2백 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있었던 것은 4년 후였습니다. 누군가 작위로 기술해서 맞을 확률은 0.04%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식현상의 기록입니다. 일식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므로 일식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단군조선 때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뿐이므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기록주나라 때인 B.C.776년인데 비해, 2세 부루 단군 때인 B.C.2183년의 일식 기록중국의 기록보다 무려 1천 4백여 년이나 앞선다. 그리고 10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 중 두 개는 해 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창범 교수는 밝혔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문을 가져 봅니다.

   "BC2183년부터 현대까지 근 4천년이 기록된 천문학적 자료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우리는 역사만 도둑맞은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자료가 사라져간 것일까요. 도대체 어떻게 하면 4천 년간 관찰한 천문학적 자료들이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누가 무엇 때문에..사라진 것일까요. 생각 할수록 가슴이 미어집니다.

 

   유구한 역사의 흔적 중에 어찌하여 환단고기, 부도지, 규원사화만이 초라한 목소리로 세상에 우리민족의 위대함을 통곡으로 외치고 있는 것일까요. 아직도 많은 이들은 우리 조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합니다.

 

   특히나 현재 강단사학계에 계신 많은 친일 3.4세들, 그들이 배운 것은 철저히 식민사관에 물들어 있음을 알고 짐을 챙겨 일본 황제 서고에 있다는 우리 고대 사료나 탈취하심이 그동안 벌여 놓은 일에 대한 최대한의 성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잘못된 점을 알고 용기를 내어 고치는 것은 허물이 아닙니다. 잘못함을 알고 간직하고 감추려 해도 해와 달 같은 민심의 하늘을 어찌 피하려 하시는지 의문이 듭니다. 민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재앙을 피할 길이 없으니 헤아려 살피면 사람이 다치지는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제까지만 민족의 자비가 보듬어 줄 거라는 착각은 버리셨으면 합니다. 옛날에는 거지가 지나가도 밥 한 수저라도 먹여 보냈으나 그대들에게 그 밥 한 수저를 뜰 자격이 있나 심히 의심이 가는군요. 그리고 우리의 실질적인 역사의 기둥이신 재야사학자분들에게 힘을 실어 드리고 싶습니다.

 

   태극을 보아도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만물이 소생시키는 힘이 생깁니다. 생물은 양의 기운을 받아 성장하고 음의 기운을 받아 성숙을 이룹니다. 작금의 형태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서 오히려 부작용을 낳고 있는 듯 싶습니다. 한 집안에도 아내와 남편이 잘 어울려야 집안이 화목하듯 강단과 재야는 그 충돌의 핵심을 적당히 파악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하는 이때에 서로에게 등만 돌리고 계시니.. 집안이 개판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아내의 격인 재야분들이 너무 힘이 없어요. ㅠ.ㅠ 왜?! 친절하고 민족의 긍지로 똘똘 뭉친 강단의 친일사학자 3,4세들이 강단에서 애들 키워서 정부 주요 기관에 다 박아서리. 무슨 새끼치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믿을 것은 사실 정부도 아니요, 사학계도 아니고, 사실상 민심과 국민의 의식 뿐입니다.

 

   민심이 천심이니 예절과 제의는 조상을 섬기는 마음과 그 뜻을 받아 밝게 살고자 하는 조상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아비를 잊어버리고, 할아비를 잊어버리면 결국 인류에는 혼돈만이 있을 뿐입니다.

 또 하나 그 엄청난 천문학적 자료와 위대한 정신적 문화유산의 뿌리인 천부경삼일신고, 참전계경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되었는가? 그 먼 옛날에는 나라의 행동지침이요. 백성의 행동양식이였을 이 위대한 사상.. 하긴 한국인을 보면 아직도 배우지 않은 가운데서 그런 문화가 가르치지 않고도 분위기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뭐라 하기 전에 우리의 참 모습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투고 질투하고 헐뜯고 모함하는 민족은 우리 민족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도 중국처럼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하에 우리의 철학과 사상, 역사를 정돈할 필요성이 절실한데 정부를 믿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네 번째 홍산 문명입니다.

   고구려사는 중국사다? 그러나 고고학적 사료들은 오히려 반대로 중국사의 뿌리가 고조선의 문명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종종 발견되어 중국의 고대사 왜곡의 허점을 여실히 드러내곤 합니다.

 

환국(桓國)의 홍산문명 -황하 문명의 뿌리는 동이(東夷)


 중국의 요녕지역에서 홍산문명(紅山文明)이 발견 되었는데 중국(황하족)의 문명이 아니고 한(韓)민족의 문명으로 인식되는 증거들이 산적해 있어 주목된다.


발견의 위치와 그 파장 


   황하문명보다 고대국가를 먼저 형성시킨 문명이 요녕에서 발견되었는데 발해만 북쪽에서 신석기문명 중 가장 주목할 문명이 홍산문명입니다.

이 문명의 발견으로 중국은 황하중심 문명전파론을 철회하게 되었으며 '다중심문화론'을 인정하고 산동에서 발견되는 북신문화, 대문구문화용산문화가 바로 이 홍산문명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홍산문명이 바로 한(韓)민족의 나라인 고조선의 중심지로 인정되는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한국학계의 일부에서도 홍산문명을 보고 고조선이 실제로 BC. 2333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부근에서 발원한 부여고구려의 역사 또한 고대 황화중심의 한(漢)족이 아닌 환(桓)족..즉 한(韓)민족에 가깝다는 것이 중국 사학계의 터부시되는 고민입니다.

이 문명은 또한 강단 사학계를 '반도중심의 식민사관'이라 비판했던 사학자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홍산문명은 황하문명보다 먼저 고대국가를 형성한 유적으로 성곽과 왕궁가 발견되므로 고조선의 건국 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에서 나오는 환국이 바로 홍산문명(BC.4500~BC.2500)이고 홍산문명 흥륭와문화, 신락문화(BC.6000~BC.5000)을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산문명은 요녕지역과 내몽고 동부지역에 넓게 전개된 BC.4,000년의 신석기-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되고 있으며 사해문화와 연속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 등을 융합하여 한 단계 발전하여 전개 되었고 그 후에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며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반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동이족(東夷族)의 활동영역을 문헌으로 보면 하북성 동북부와 산동지역 그리고 양자강 하류지역인데 산동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유적북신문화이고 북신문화는 BC.5000년 전까지 소급되며 황하자산- 배리강문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리고 BC.4500년경에 이 지역에 있었던 대문구문화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습니다. 대문구문화는 하남성 서쪽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동이계(東夷系)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됩니다.

 

문명의 특징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의 장례의식은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홍산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인데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돌무지무덤)과 돌판을 잘라 묘실벽을 짜는 석관묘(돌널무덤)가 대능하 상류지역 요녕성 우하량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반면에 중국의 화하족은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였고 주(周)나라시대에 들어서 나무로 관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합니다.

 역사에서 홍산문명과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며 고조선의 전단계인 홍산문명은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돌을 이용해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 이후 부여, 고구려 그리고 백제에도 계속해서 계승되는 한(韓)민족 고유의 풍습이기도 합니다.

 이 곳 홍산문명은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헌원과 전쟁을 했던 치우의 근거지로 지적이 되는 곳 입니다. 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남, 산서와 산동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마천<사기>에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홍산문명 이후 하가점-하층문화(BC.2000~BC. 1300)가 그 지역에 광범하게 확산되는데 홍산문명은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문화는 고조선의 문화입니다.

 

 홍산문명은 소하연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문화로 연결되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공식화되었습니다. 더구나 소하연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하층문화, 구체적으로 풍하문화에서는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BC.2400년경으로 보이는 청동기유적이 발굴되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BC. 2333년에 고조선의 건국이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 요동, 요서일대에서 발굴된 청동기유물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 유물보다 연대가 앞서며 중국 동부에서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문명의 의미

 홍산문명의 발견은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파장이 큽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로 보았는데 홍산문명을 발견한 후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문명을 듭니다. 즉 홍산문명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므로 한(韓)민족의 선조들이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하북, 산동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북신문화, 대문구-용산문화, 악석문화로 이어지는 [산동문화]와 흥륭와문화, 신락문화, 홍산문명,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韓)민족 입니다.

 그래서 중국학자들도 산동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인지 밝히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전백찬 같은 중국학자의 일부가 개인적으로 고조선(古朝鮮-辰國)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홍산문명은 고조선의 선조가 일으킨 문명이고 그 당시에 화하족은 허베이 성과 산동성을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홍산문명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중국학계도 인정하고 있고 그 동이족이 고조선입니다.

 

 현재 한국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을 평양에서 요서, 요동의 요녕지역으로 보고 있으며 한(韓)민족의 기원도 요녕지역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중국문화에 중요한 획을 그었던 홍산문명이고 그 주인공은 동이족이 됩니다.

 

 이 홍산문명의 주인공이 고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이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설마, 중국의 동북공정이 끝났다고 보십니까? 중국이 동북공정을 중단했다고 보십니까? 아직까지 동북공정은 계속되고 있고, 중국의 역사교과서도 역사를 왜곡했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홍산문명마저 중국에 넘어가 버린다면 우리나라의 뿌리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 입장에서 보는 환단고기*


세계적으로 환단고기에 가장 민감한 나라는 중국과 일본입니다.


1, 일본의 입장


인조이재팬 역사토론장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일본에 일본판 "桓檀古記"를 번역 소개한 "가시마 노보루"는 내각총리대신 및 의원, 지방단체장, 종교단체장 등 무려 1,040여명의 추천을 받아"환단고기"를 일본국가에서 공인하는 "日本國史化" 하였다.

이 일본판 환단고기는 국내로 역수입되어 각종대학 등에서 추천록에 포함된다. 환단고기가 "일본사"가 될 뻔 한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가시마 노보루의 주장


- 환단고기를 자기들(일본)의 민족사라 우기며 "아시아의 지보"라 극찬했다.

- 환단고기를 "왜사화" 하여 일본의 기원을 끌어 올리려 시도하였다.

- 즉, 환단고기의 가치를 인정하고 근거사서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 가시마 노보루는 환단고기를 인정하고 기원을 끌어올리려 "일본서기"를 오히려 위서라 몰아붙이는 등 환단고기의 가치를 홍보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물론 일본서기는 소설이지만..


1982년 국내 각 대학에 소개되었을 때 일본총리까지 추천한 책이니 받아들이지 않는 대학이 어디 있었으랴. 일본 것이면 뭐라도 좋다는 사람들이 학자랍시고 앉아 있었으니 그 꼴이 오죽했으랴. 그런데 1986년 고 임승국 교수의 한글판 환단고기가 번역되어 나오자 안면을 싹 바꾸어 "위서, 쓰레기, 황당한 사서" 등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환단고기를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이해가 안 가는 게, 환단고기에서는 倭가 대대로 한국의 속국이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는데 어째서 일본에서는 그 뻔한 내용을 보면서도 그토록 이 책에 애착을 가졌던 걸까요?--


임승국 교수님이 어떻게 일본인들의 해석을 논파했기에 갑자기 또 반응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 걸까요?

인조이재팬에서 활동하는 일본 측 인사들이 사실은 한국계가 대부분일 것이라는 심증이 있지만, 뭐 그래도 일단 자기네는 일본인이라고 주장하고 누구보다 일본인인 것처럼 굴려고 하니까 일본인들이라고 쳐 주죠.

 

일본인들처럼 혈통의 순수성 따지기 좋아하는 인간들이 없는데, 중요한 것은 순수혈통이 아니라 국민성과 문화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안쓰럽기-_-까지 해요.

그토록 일본인 흉내를 내고 싶을까?

 

기왕 일본에서 살아야 하는 거라면 한국계의 피가 섞인 것을 숨기고도 싶어 하겠죠. 서두가 길었는데, 환단고기(환단고기 보다는 한단고기가 옳다는 것이 임승국교수님의 견해입니다)에 대해서는 좀 복잡한 기대감이 얽혀 있는 것 같아요. 정말 엉뚱하게도 이 책을 처음 번역하고 보급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은 일본인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우익-_-

그리고 한국인들 중에서 이 책을 번역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던 분은 역시 엉뚱하게도 조총련계의 천재학자였습니다. 도쿄대학 심리학과를 나오고, 조총련계 조선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박상득 교수님이죠.


누가 봐도 명백하게 환단고기는 동양의 역사는 처음 한민족이 주도했고, 그 다음에 하화족이 일어나 그들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倭(일본)에 대해서는 한민족의 속국정도로 계속 묘사되고 있지요. 그런데도, 일본우익들이 이 책에 대해 애착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오로지 일본왕실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우익들은 왜 왕가만 지켜 내고 권위를 세워 놓으면 그것이 일본의 구심점이 되고, 일본을 강고한 기반 위에 세워 놓게 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아요. 환단고기의 이야기들의 흐름을 가다 보면, 일본의 대다수 피지배층들과는 달리 적어도 일본왕실만은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여지가 있거든요.

일본의 神道 풍습이 정통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임승국 교수님이 그런 여지들을 모두 부숴 버리셨지요. 일본 우익들은 일본왕실이 본류이고 한민족이 가지라고 주장하고 싶어했는데, 환단고기의 엄밀한 해석을 통해, 오히려 일본왕실은 그야말로 짝퉁이고 삐져 나간 반란군 정도였던 것으로 되어 버렸지요.

그리고 임승국 교수님의 해석이 대체로 환단고기 자체를 놓고 볼 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환단고기 자체는 위서일까 아니면 진정한 역사서인 걸까?


대진국(대진국 : 발해는 자기 스스로를 발해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항상 대진국이라고 불렀습니다)의 문제(文帝: 중국측 사서에서는 문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문제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인 대흠무(大欽武)의 연호가 대흥(大興)이었는데 이 사실은 정효(貞孝)공주의 묘비가 발견된 1980년 이후에야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이미 대흠무의 연호가 대흥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태백일사"는 1980년 이후에 조작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용어상의 문제를 들어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모두 하나씩 따져보면 근거없는 비난, 비판을 위한 비판에 불과함을 알게 됩니다.


문화"라는 말이 Culture라는 개념으로 쓰인 것은 근래의 일인데, "환단고기"에서 쓰이는 문화라는 개념이 그와 같기 때문에 위서라고 규정짓는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문화라는 표현이 과거에도 "문치교화(文治敎化)라는 개념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과거에도 문화라는 말이 실제로 오늘날의 개념과 확연하게 구분되어 쓰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와 같이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한 경우는 골수 성리학자들과 그들이 편찬한 문헌에 지나지 않았죠.


또 "전세계" 라든가 "민중"이라는 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말이지 근대에 들어 만들어진 말은 아닙니다. 심지어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 ~ 846)는 자신의 시 제목으로 "상인처세계(上人處世界)"라는 말을 썼고,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국어(國語) 월어(越語)"에서도 "민중"이라는 용어가 인민대중의 약자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의 시조와 관련된 영고탑(寧古塔)이란 지명이 "환단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위서 시비의 좋은 빌미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요사(遼史)"에도 이미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비판자들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낙양(洛陽)이라는 지명만 하더라도 하나가 아닙니다. 황하의 중류에 있는 중국의 고도 가운데도 낙양이 있으며, 경상도 상주도 그 옛 이름이 낙양이었음을 구태여 예로 들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이상은 백산서당에서 나온 박현님의 한국고대지성사 산책을 참고했습니다).


그 이외 서울대 천문학과의 박창범 교수님이 환단고기의 천문기록들을 검토하고 연구해 본 결과, 환단고기의 기록들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는 사실을 발표하신 바 있습니다.


2. 중국의 입장


중국대륙에는 진시황이 지나[漢族]의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통일된 중국’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그 당시까지 동북아는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이 지배하였다.

 

중국정통의 역사서 ‘25사(史)’ 가운데 『사기』나 『후한서』, 『삼국지』 등을 비롯한 제사서는 우리민족을 「조선열전」이나 「동이전」에 따로 두어 지나족과 독립된 한민족으로 기록해 왔다.

 

모택동 주석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이후에도, 교과서는 물론 정치인도 고조선, 고구려, 발해가 고대 한국의 국가라고 쓰거나 말했다. 주은래 수상은 1963년 고구려나 발해가 한민족이 세운 나라라고 말했으며, 1950년대의 중국 교과서 『세계중세기사』, 1960년 주일량이 쓴 『세계통사』, 1981년 출판된 『중학 세계역사』도 고구려나 발해가 조선반도 북부의 독립된 국가라고 쓰고 있다. 길림성 연변대학 교수들이 쓴 역사책은 1994년까지도 고구려는 당연히 한국사라고 기술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은 1998년에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 연구중심’에서 『중국고구려사』를 펴내고 2002년부터 3조원을 들여 고구려, 발해, 고려는 물론 고조선사도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역사침탈 행위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중국 주류사학자인 북경대 송성유(宋成有) 교수는 역사 당시 환경에서 역사를 복원하는 역사주의 입장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외국의 역사다”라고 말하고, “고구려는 낙랑, 대방, 현도, 요동군까지 자신들의 치하로 삼았다”고 기술했다.


한국의 식민사대사학계가 더 큰 문제다


 한국사학계의 문제는 그 잘못된 뿌리가 너무 깊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적어도 우리나라가 통일될 때까지는 제정신을 가진 민족자주사학이 국사학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현재 남쪽엔 사대식민사학이 지배하는 실정이고 북쪽은 유물계급사관이 판치는 형국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도 자주사학자가 드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도 한·중 역사전쟁이 불붙은 2004년도까지 고구려를 전공한 박사가 1명도 없는 실정이었으며, 한국 전체에서 고구려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단 3명에 불과했다. 중국 측이 1970년대에 발해사를 침탈할 때도 우리정부나 강단 사대식민학계에서 아무런 대응이 없었고, 이제 중국이 고구려사에 이어 고조선사, 부여사, 백제사, 고려사를 침탈해 와도 사대식민사학계는 매국사학의 꿀 먹은 벙어리다.

 

더 큰 문제는 한국 강단의 사대식민사학자들의 기본논리는 나라역사 5천년을 통째로 중국에 바치기 좋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상을 보면 사대식민사학자들은 우리나라 최초 민족국가인 2천여 년의 단군조선을 잘 인정하지 않고, 사실이 아닌 중국 동래(東來)의 기자조선은 인정한다.

 

또한 진시황이 대동강까지 지배했으며, 요동·요서지방에 있던 한사군을 이병도설에 따라 한반도에 있는 것으로 보고, 중국이 고양씨(황제의 손자)의 후손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또한 사대식민사학자들은 남쪽에는 신라·북쪽에는 발해가 함께 있던 남북국시대도 잘 인정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고려 건국의 태조 왕건도 중국에서는 중국 쪽의 낙랑군 후손이라 하여 중국 속방이라 하는데, 한국사대식민사학자들은 지금까지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왕조는 억불숭유정책으로 본래 중국 속방으로 자처해 왔다.

 

그러면 한민족국가 역사 5천년 가운데 해방 후 50여년만이 한국의 자주국사로 남게 된다. 이들이 아무리 실증사학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이를 어찌 양심이 있고 애국심이 있는 사람들이라 하리오? 중국의 시선(詩仙) 이태백도 시문집 『옥진총담』에서 발해를 고려(고구려 이칭)라고 부르며 한민족 독자적 국가라고 썼는데, 우리학자들의 태도는 이렇게 해괴할 수 있는가?

 

-웃기는 대한민국 정부와 학계가 아닙니까? 역사를 다시 가르쳐야 합니다. 아주 머리 뿌리 세포까지 뜯어내서 한단고기부터 외우게 해야 합니다. 조상도 없는 후손은 이 땅에 필요 없습니다. 어찌 할아비가 없는데 아비가 있고 아비 없는 자식이 있단 말인가? 자신의 근본을 모르면 천박하다고 하기 십상이겠지요.

 

이럴 때 국민이라도 뭉쳐야 합니다. 이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라를 구한 것은 정부나 학계가 아닙니다. 바로 백성의 피로 지켜온 나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참고*

환단고기가 논란이 되는 내막을 잘 보셔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재의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제가 쳐 놓은 시커먼 연막탄을 친일사학자였던 이병도의 제자들이 현제까지 그걸로 연명하고 있는데 이 환단고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역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려 주고 있으니 자존심 강한 한민족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발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인7세의 환국, 한웅18세의 배달국, 단군47세의 단군조선! 너무도 위대했던 조상님들의 영토와 정신이 저 넓고 광활한 땅! 지금 우리는 조상님의 영토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입장에서 그 역사가 또 다시 다른 국가의 왜곡에 의해 더렵혀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기에 우리의 자존심은 이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2017.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