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 출토되는 [비파형 동검] ㅡ [고조선 이전에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있었다.] 外

2018. 11. 14. 20:18우리 역사 바로알기



남한에 출토되는 [비파형 동검]| 무학명상 

秘天|조회 16|추천 0|2006.11.14. 12:45


[고조선 이전에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있었다.]

 


   세계 고인돌의 반이상이 한반도에 있다.

한국은 세계 고고학계에서 고인돌의 나라로 유명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돌도 한국에 있다.

 

다음은 고인돌 분포도

 

 

( 일본 규슈[]지방에 분포하는 고인돌은 일본 최초의 벼농사,청동기문화.야요이[]시대 초기(약 2천4백년전) 등장하는데,

그것들이 한국계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어, 일본 야요이문화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고인돌은 밝혀진 것만해도 8천년 전 것도 있다.(전남 화순)

그러므로 고조선이 생기기 이전에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있었다는 얘기다.

 

이는 빙하기가 끝나면서 남하한 [바이칼리안(밝할인)]들이 한반도의 원주민과 함께 이룩한 [공동체]로 본다.

 

그 공동체는 [한] 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것으로 본다.

삼한(마한, 진한, 변한)도 그 [한국] 들의 후예인것으로 본다.

 

바이칼리안(밝할인)들은 바이칼호수 부근에 있었던 그들의 나라를 [한]이라 했었던 것으로 본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환(한)인(桓因)]께서 그 고대 한국(환국)의 지도자.)

 

( [한 -> 환]은 단순한 발음 변화)  

[한]이란 [하늘]이란 뜻이다.

 

원래 태양을 [하]라 했고 지금 우리는 [해]라 한다.

(우리 말이 전해진 일본은 태양을 [히]라 한다.

( 한민족은 떠오르는 태양은 [아] 라 했고 다 떠오른 태양은 [하]라 했다.

아침 - 태양이 떠오르는(아) 때(침)

아사달 = 아ㅅ달 = 태양이 따오르는 곳 = 조선(朝 - 아침 조)

아무르 = 아물 (태양이 떠오르는 곳에 있는 물 - 아무르강은 바이칼 호수의 동쪽에 있다.)

 

[아] 나 [하]나 원래는 감탄사다.

난방이 없는 곳에서 추위에 밤새 떨다가 태양이 떠오르면 [아] 하고 감탄사가 나오기 마련.

태양이 다 떠올라서 따뜻해지면 [하]라고 더 센 감탄사가 나오기 마련.

그래서 웃음도 [하하하 허허허 호호호 후후후]

 

ㅎ. -> 하,허,호,후

 

원래는 다떠오른 태양을 [ㅎ.] 라 했다 보는 것이다.

 

태양은 생명의 근원이다.

태양이 없으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다 얼어 죽는다.

(태양이 없으면 영하 270도 정도로 추워지므로)

태양이 없으면 식물은 광합성을 못해서 자라지 못하고 물론 동물도 다 굶어 죽는다.

 

그러므로 태양은 말하자면 [생명의 근원]이고 원래 하늘(天)은 허공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곳]을 이야기 하는 것.

 

그러므로 태양은 [눈에 보이는 하늘].

 

아버지의 [아]는 떠오르는 태양이라는 뜻.

할아버지는 원래는 한아버지인데 발음을 유연하게 하기 위하여 할아버지라 한다고 국어학자들은 주장한다. 

즉 한이나 할이나 원래 같은 뜻.(단순한 발음변화)

 

바이칼호수에서도 가장 신성하다는 알혼섬의 붉한 바위(영어로는 불ㅋ한바위)

바이칼의 원어로 보이는 밝할

 

붉한 = 밝할

붉이나 밝이나 밝다는 뜻이고 ( [ㅂ.ㄺ] -> 밝,붉 )

한이나 할이나 태양을 뜻한다.( 하 -> 한,할)

 

한하다(태양같다)는 말은 밝다는 말

[한하다 -> 환하다]가 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환인 = 한인]

[한인]께서 다스리셨던 나라는 [한국]으로 보는 것이다.

 

이 [(고대)한국]은 바이칼 호수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그 나라의 동쪽에 있는 큰 강이 [아무르(아물)강] [아물] , 즉 [해가 떠오르는(아) 곳에 있는 물]이라는 뜻으로 본다.

 

그 고대한국에서 내려온 분들이 한반도에 와서 세운 나라가 삼한(三韓 - 마한,진한,변한)으로 보는 것이고

 

이러한 [삼한(三韓) 공동체]는 단군왕검께서 고조선을 세우시기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었다.

 

즉 단군왕검께서는 [삼한(三韓)]의 공동체로 추대되신 것.

 

출처 - 중학교 교과서

 

(남한 지역에는 주로 [남방식 고인돌]이 잔뜩 있다.)

 

그런데 [비파형 동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남한 지역도 [고조선 연방]이었다.

단지 남한 지역은 [고조선 연방]의 일원이면서도 [마한(馬韓)] 고유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강력한 지방자치가 이루어진 것.

[마한(馬韓)]은 고조선이 망한 이후에도 살아남아 거의 삼국시대 말기까지도 존재함.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 특유의 것이고 이 [비파형 동검]이 나오는 지역은 [고조선연방]의 중앙정부가 파견한, 말하자면 지금의 군수,도지사가 있었던 지역.

 

그런데 위의 지도는 너무 (겸손)하게 그려졌다.

4천2백년전 책이라는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에도 [조선(朝鮮)은 한반도 북부, 만주, 중국동해안에 있다.]라는 기록이 나오듯이 

고조선의 실제 영역은 대강 다음 지도와 같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북방식은 대강 북한과 만주지역]에 있고 [남방식은 대강 남한지역]에 있다.  

 

이또한 남한지역은 [고조선의 일원]이면서도 [삼한의 전통도 강하게 남아있는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고조선의 검들]

 


 

위 그림에서도 나오듯이 고인돌 분포지와 난생신화(훌륭한 분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의 분포지가 일치한다.

 

(가야 허황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도 보여준다.

신라 석탈해임금, 가야 허황후 등은 한국에서 건너간 한민족의 후손들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본다.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돌이 있고 가장 많은 고인돌이 있는 (세계 고인돌의 반이상) 곳이 한반도이므로 한국이 고인돌의 종주국이라 봤을때

난생신화 역시 한국에서 시작하여 퍼져나갔다고 본다.

 

바다길을 통해 인도에도 고인돌과 난생신화가 퍼져 나갔다고 볼때

인도 남동부의 고대 언어인 (지금도 쓰고 있는) 타밀어가 한국어처럼 [주어+목적어+동사]형인 것등 유사점이 많다는 것도 자연스레 이해가 된다.

  

즉 신라 석탈해임금은 인도인이 한국에 와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인도로 건너간 분들의 후손중에 한분이 석탈해 임금이라는 것.

 

석탈해 임금의 성씨는 석씨인데

타밀어로  ‘석’ ‘석가(Soka)’등은 '대장장이 집안'을 뜻하는 것이었고

당시 금속을 만드는 (대장장이) 일은 첨단기술이었다. 

 

석가모니께서도 이 [석가]집안에 태어난 [모니(훌륭한분)]이시고 한민족의 후손 추정.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만주 에서 시작하여 시베리아와 유럽으로 전파 추정]

 

위에 보면 아무르(아물)강의 위치가 나와있다.

그리고 빗살무늬 토기는 최소한 8천년전부터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다.

 

즉 고조선의 시작 이전에도 한반도에는 고유의 문화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 문화는 중국과 별개의 독자적인 것이었다.


빗살무늬 토기 (한국)

 

한반도에는 고인돌도 8천년전 것이 발견되었고

빗살무늬 토기도 8천년전 것이 있는데

이렇게 중국과 관계없는 독립적인 문명이었다는 얘기다.

(당시 중국은 한반도보다 훨씬 수준이 떨어지는 문명)

 


위 연구 결과는 바이칼이안(밝할인)문명이 세계 문명의 근원이라는 것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문명이 원래 중국과 관계없는 독립적인 문명이라는 것은 보여주고 있다.

 

'헬리코박터균'의 분포로 본 과거의 인류이동

(Traces of Human Migrations in Helicobacter pylori Populations)

 

출처 - 사이언스 2003년 3월 7일자에 실린 논문

 

동아시아의 조상형 [헬리코박터균]의 유전적 분포

 

(노란색이 동아시아형)

[헬리코박터균]는 사람의 위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동아시아의 어떤 사람들이 어느 곳(바이칼호수 주변 추정)에서 오래도록 고립되어 살아서 생긴 [동아시아 고유의 헬리코박터균] (노란색으로 표시) 를  가진 사람들이 한반도, 만주 등에 가장 많은 비율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인디언이 되었으며(13번 , 14번)

더욱 내려가 남미 인디오들의 조상이 되었으며 (16번 , 17번)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한국인에게는 유럽이나 아프리카 고유의 유전자가 없고

오로지 동아시아형 고유 유전자만이 있다는 것이 같은 논문에 나오는 아래 표입니다.  


위의 표에 에 보면 1번이 한국인데

특히 한국인들에게서는 오로지 동북아시아 고유유전자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바이칼호수 주변으로 추정되는 [고대한국]에서 내려온 분들의 직계후손이라는 것을 또 한번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솔본님 등의 도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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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석가모니께서 인도인이라 한다.

과연그럴까.
[석가모니]라는 존칭은 [석가]족의 [모니(훌륭한 분)]라는 뜻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석가모니]의 표현을 '석씨'라는 말도 많이 썼다.
과연 그들이 무식해서 그랬을까.

흔히 알려졌듯이 [석가]족은 대장장이 집안이다.
즉 금속을 만드는 집안이라는 뜻이다.
당시 금속은 최첨단 기술이었다.

금속을 처음 만든 사람들은 [바이칼리안(밝할인)]으로 보인다.
1만년전~1만5천년전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바이칼호수 부근에 갇혀살던 바이칼리안의 놀라운 문명이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인류문명의 뿌리가 되었다는 것은 차츰 드러나고 있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한국인은 [바이칼리안(밝할인)]의 혈통이 세계에서 가장 순수하게 보존되고 있다.
쉽게말해서 추위를 견디는 특성들 - 얇은 눈, 두터운 눈꺼풀 , 큰 광대뼈 , 뒤통수가 비교적 덜튀어나온 비교적 둥근 머리 : 둥근 모양은 부피당 열의 발산을 줄인다.
흔히 말하는 '몽골리안의 특성'이라는 것은 사실은 [바이칼리안(밝할인)의 특성]인 것이다. )

즉 석가족은 이러한 금속 문명을 인도에 전해준 부족 중 하나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인도에 갈때 이미 [석]씨라는 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즉 석가족이란 석가(家) 즉 '석씨 집안'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3천년전 분이다.
가야에 시집온 허황후는 아유타국 공주다.
석가모니께서는 아유타국안의 작은 나라 카필라국의 왕자였다.
아유타국은 공주를 아무 연고없이 그렇게 멀리 보냈을까.
그것도 갑자기 배타고 나타난 아유타국의 공주.

신라 초기 임금은 박씨 석씨 이다.
즉 석씨는 아주 오래된 성씨 중 하나이고
신라 임금 석씨 집안 석家와 인도의 석가족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석가모니]의 [석가]는 석家
[모니]는 우리가 [어머니] 할때 [머니]와 같은 말로 보인다.
[모니]는 원래 [몬이]인데 [이]는 사람을 뜻하고 (가는이, 오는이, 지은이)

( 아버지 - 아벚이    
  어머니 - 어먼이
  누이
이렇게 사람을 뜻하는 말은 흔히 [이]로 끝난다.)

[모니(몬이)]의 [몬] , [어머니(어먼이)]의 [먼] 등은
만주의 [만]과 상통한다 보는 것이다.

ㅁ.ㄴ -> 만,먼,몬,문

 

만주는 원래 중국의 영토가 아니라 한민족의 활동영역.

 

한민족의 만주를 한국어로 [만]이라 불렀다.

쉽게 말해서 [어머니 땅]이라는 뜻.

그걸 나중에 한문으로 옮기면서 滿州(만주)라 적은 것.

서양 아이들은 [엄마]를 [마마]라 한다.
한국 아이들은 [엄마]라 하기 전에 처음엔 그냥 [마]라 한다.
그리고 옛날에는 자신을 돌보아주는 사람을 [마마]라 했다.(상감마마 등)

즉 자신을 직접 돌보아주는 고마운 분을 [마]라 표현한 것이다.
[마]를 좀더 힘주어 발음하면 [바]가 된다.(마->바->파)
즉 [어머니]의 [머]를 좀더 힘주어 발음한 것이 아바지의 [바]가 되는 것이다.
서양아이들은 [아버지]를 [파파]라 한다.

즉 한국아이들은 [엄마]를 [마]라 부르고
[아바]를 [바]라 부르고 (아바 ->아빠 )
서양아이들은 [마마] [파파(바바의 센소리)]로 부른다.


[마]란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고마운 존재
[바]란 [마]의 센소리

ㅁ. -> 마,머,모,무

( [무당]할때 [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고 봄.
무(巫) 자는 원래 사람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있는 모습.
[무당]이란 옛날에는 제사장(지도자)을 뜻하는 신성한 존재에 대한 표현)

ㅂ. -> 바,버,보,부

ㅂ.ㄹ -> 발,벌,볼,불

우리는 들판을 [벌]이라 한다.
들판은 사람 살기 좋은 곳이다.( 산(山)은 사람이 일상적으로 살기에는 어렵다.)

환웅(한웅)께서 사람들에게 문명을 전하신 곳을 흔히 [신시(神市)] 라 하는데
[신시(神市)]를 [벌]이라 표현한 기록이 많다.

즉 원래 [벌]은 그냥 들판이 아니라 [신성한 곳]을 뜻하고
[벌]에서 쓰던 것이 [불]이라는 것이다. (火)
즉 당시 원시인들에게는 [불]은 최첨단 기술이었던 것이다.
[불]이 있어야 [볼]수 있다.
즉 [벌]에서 [불]만드는 법을 배웠고 그리하여 (밤에도) [볼]수 있게 된 것인데

[불]이 있어야 [발]ㄱ아진다.

[ㅂ.ㄺ] -> 밝,벍,볽,붉

지구에서 보기 가장 큰 불인 태양은
처음 떠오를때는 [붉]고
다 떠오르면 [밝]다.

 

붉은 태양 -> 밝은 태양


흔히 알려졌듯이 [박혁거세]임금의 원래 표현은 [불거내(붉언아이)]이다.
바이칼호수에서도 가장 신성한 곳이라는 데가 알혼섬의 [붉한(불ㅋ한)] 바위이다.



                                               남한에 출토되는 [비파형 동검]

2006.11.14

cafe.daum.net/dlsqnrud/81e7/125  환국문화보존회





발해유물, 비파형동검,한반도의 검| 환국
알마자야|조회 502|추천 0|2006.07.23. 18:36

대진국(발해) 유물

 

        

 

     

         


 

 

 

 

[펌]浮萍草人生

 

발해와 고구려.비교

 

고구려온돌                                                            발해온돌

 

 

발해기와                                                                                 고구려기와

 

  

발해 돌사자상                      굴식 돌방무덤(정혜공주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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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파형동검(琵琶形 銅劍)

 

 

용흥리 출토 비파형동검(요녕식 비파형)       우산리 출토 비파형동검

 

지난 세기에 일제 식민사학이 고조선을 난도질했다면, 지금은 중국 동북공정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고조선을 평안남도 일대의 작은 소국(小國)으로 비정해왔다. 그러나 고조선 표지유물인 비파형동검 분포지역으로 살펴보면,서쪽은 난하(난河)유역에서,북쪽은 송화강(松花江)일대,남쪽은 한반도까지 걸쳐 있던 대제국이었음을 말해준다.

 

고조선 유물을 대하는 중국인들의 민감한 반응... 고조선 지역을 차지한 중국인들에게 비파형동검은 없애버리고 싶은 유물처럼 보인다. 심양(瀋陽)의 요령성(遼寧省)박물관이나 조양시(朝陽市)박물관에 있었던 비파형동검은 이미 치워버린지 오래다.

 

 내몽고(內蒙古)의 적봉(赤峰)박물관이나 오한기(敖漢旗)박물관 등의 비파형동검은 진열되었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근래에 일본인 방문객은 신경쓰지 않지만,한국인이 나타나면 관리인이 두세 명씩 따라붙으며 사진이라도 찍을까 엄중 감시한다.

 

고조선의 유물을 찾아다니다 보면,역사의 영토를 빼앗긴 민족의 슬픔뿐만 아니라 빼앗은 민족의 두려움도 느껴진다.

 

이덕일-역사평론가(newhis19@hanmail.net)  2006.3.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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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반도의 검,비파형동검(琵琶形 銅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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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형동검(琵琶形 銅劍)

 

 

 

 

세형동검(細形 銅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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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형 동검과 세형동검 분포도(사진을 누르면 원본크기로 보입니다)

 

[펌]http://course.knou.ac.kr/한국사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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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상징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청동거울과 함께 천부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칼이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는 운사가 ‘백 명의 무사를 데리고 대장을 검으로 호위하였으니…’라고 적고 있다. 운사가 든 칼은 왕권의 상징이었고, 천부인 가운데 하나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칼은 정치적 상징물로서, 이것을 받아야만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신물(神物)의 역할을 하고 있다. 요즘도 장군 임명식 때 대통령이 칼을 하사한다. 삼정도로 불리는 이 칼은 봉황과 무궁화,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다. 손잡이는 철갑상어가죽으로 만들었다. 군사력과 권력을 상징하는 칼의 이동이 고대국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조들은 언제부터 칼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을까? 청동기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돌로 만들었다. 고인돌이 만들어지던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진흙을 빚어 토기를 만들었으며, 돌을 곱게 다듬어 돌단검을 만들었다. 돌단검은 세석기(細石器)의 좀돌날을 끼웠던 뼈칼집에서 비롯하여, 돌활촉과 돌창촉과 함께 짐승의 정강이 뼈를 갈아만든 골검(骨劍)으로 발전했다.

 

검(劍)은 그 자체가 임금(王儉)
돌단검이나 후에 등장하는 청동검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의식용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본래 ‘검(劍)’이라는 명칭은 단군(檀君) 왕검(王儉)에서 보듯이 신적(神的)인 군장(君長)을 뜻하고 있다. 비파형동검은 몇가지 특징적인 유물이 동반하여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천부인(天符印)의 하나로 꼽히는 청동거울과 함께 출토되는 것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철기시대(鐵器時代)에 들어와서도 청동기의 세트(청동거울과 칼)가 계속적으로 발현되는 것은 이 물건들이 이전시기부터 어떤 상징적(象徵的)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칼로는 칼날의 중간부분이 불룩 튀어나온 이른바 비파형 동검이다. 비파형동검은 고조선의 고유한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로 비파모양으로 생긴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남해안지방과 요동지방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은 중국 오르도스(Ordos, 鄂爾多斯, 河套, 옛 綏遠省)지방과 러시아의 카라숙(Karasuk)지방의 청동검들의 모양에 비하여 앞선 시기의 모양을 보여준다.

 

조립식 청동검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細形銅劍)은 검몸(劍身)과 검자루(劍把), 그리고 마구리(劍把頭飾) 장식의 조립식(組立式)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이러한 조립식 청동검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중국의 요녕성(遼寧省)지역과 한반도(韓半島), 그리고 일본의 쿠슈(九州) 섬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전 세계 청동검의 모든 모양들은 대부분 하나로 이어진 구조(一鑄式)로서, 이러한 조립식 구조이거나 비파형동검에서 변화한 모습들이어서, 세계 모든 검들의 조형(祖形)이 동이족(東夷族)지역에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검의 기원,변광현,미리내,2002)


요녕지역(遼寧地域)을 중심으로 하는 비파형동검의 청동문화는 역사상 고조선(古朝鮮)과 연결되는 문화이다. 고조선은 이제까지 한반도 서북지방중심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비파형청동검 등의 출토로 인해 차츰 요동중심설(遼東中心說)로 이전되고 있는 추세이다.


비파형동검의 분포로 볼 때 고조선의 강역이 하북성(河北省) 동북부,지금의 요서(遼西)지역을 비롯한 만주의 유적과 유물까지 포함하고 있다.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세형동검 역시 비파형동검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연구결과 확인되었다. 고조선에서 청동기가 시작된 연대는 더욱 올라가게 되었다.

 

고조선 건국연대의 청동기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유적은 중국 길림성 영길현의 성성초(星星哨)유적이다.  방사선 동위원소로 연대를 측정해본 결과 이 지역의 비파형동검은 서기전 13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런데 요녕지역에는 비파형동검보다 더 빠른 청동기문화가 있다.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가 그것이다. 방사성동위원소 측정으로 볼 때 서기전 241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학자들은 하가점 하층문화를 비파형동검문화와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기도 하였으나,근래에 일부학자들은 이 두 문화를 동일한 계통의 것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서도 서기전 25세기로 올라가는 청동기유적이 두곳이나 발굴되었다. 전라남도 영암군 장천리 유적의 청동기시대의 집자리와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고인돌무덤은 방사성탄소 측정에 의하여 서기전 25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이같은 연구결과들을 종합해볼 때 단군조선의 건국연대가 고고학적 신뢰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기전 2500년이라는 연대는 고조선의 건국연대인 서기전 2333년보다 170여 년 앞선 것으로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고조선의 건국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단군신화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은 청동거울과 함께 천부인 가운데 하나이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神物)’, 즉 옥새라는 사실이다.

 

[펌]http://blog.naver.com/sinbiga?Redirect=Log&logNo=30006115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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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유물, 비파형동검,한반도의 검
2006.07.23

cafe.daum.net/moxoom/GZzf/54  바른말 바른사회




[고조선] 역사 바로잡기 71 - 비파형동검의 분류| 상/고대사 토론방

담인 | 조회 198 |추천 0 | 2008.04.07. 13:04

김지수는 비파형 동검을 5단계로 나누었다. 비파형 동검의 전반적인 형태변화를 보면 초기에는 검신(칼날)의 길이가 짧은 편이고 돌기가 상부에 치우쳐 있다가 후기로 가면서 검신이 길어지고 돌기가 점점 하부로 내려오며 칼끝이 날카로워진다.

우선 가장 이른 시기의 1단계는 검신의 길이가 20cm대이고 돌기가 검날 길이의 1/2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상부에 있는 비파형 동검이다.
이러한 동검은 요동 청원현 문검, 무순 대갑방, 요양 이도하자 등 6곳의 비파형 동검으로 요동지역이 5곳이고 길림지역이 성성초 1곳이다.
출토지는 모두 석관묘이며 미송리 토기가 함께 출토된다. 성성초 유적 인골에 대한 C14의 절대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1105+_100 ~ 기원전1305+_16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러한 1단계 비파형 동검 시기는 박진욱의 주장처럼 기원전 2천년 말기에서 기원전 1천년 말기 이전으로 설정해야 한다. 북한 학자들은 쌍방 유적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 자료를 근거로 기원전 12-13기까지 연대를 올려 보고 있다.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비파형 동검은 요동지역에서 처음 출현한 것이다. 나아가 요동지역의 청동기문화 개시가 기원전 2천년대 중반이며 비파형 동검 시기를 요녕 청동기문화의 후기로 보는 견해도 나타난다.

다음으로 2단계는 검신이 25-35cm에 이르고 검신의 돌기가 하부로 내려오며 칼끝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러한 2단계 비파형 동검은 요동과 요서, 길림 등 14곳에 고르게 분포하는데 미송리형 토기는 보이지 않는 반면 미송리형 토기처럼 입 부위가 넓어진 광구호(廣口壺)와 미송리형 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각형 토기, 장경호가 함께 출토된다. 이 2단계에 속하는 남산근 유적은 중국 서주 시기의 창과 같은 유물이 동반되므로 기원전 9-8세기, 요서지역 조양 십이영자 유적은 기원전 8-7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3단계는 검신이 30cm 이상 되는 것이 보통이고 돌기부가 등날이 검신의 1/2 지점을 넘어 하부까지 내려오고 칼끝이 현저하게 발달하며 검날 폭도 3cm로 좁아진다. 또 정(丁)자형 동검병(동 칼자루)이 요서지역에 등장한다. 이 3단계는 주로 요동과 요서지역 11곳에서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동검은 석곽묘 뿐만 아니라 토광묘(움무덤), 목곽묘(나무곽무덤) 등의 다양한 묘제에서 출토된다. 이 시기는 요양 정가와자 6512호 목곽묘를 기준으로 기원전 6-5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시기 동검은 중국과 북방문화의 영향을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 4단계는 돌기부가 완전히 사라져 세형동검과 같은 형태를 보여준다. 즉 다른 학자들이 말하는 초기 세형동검을 가리킨다. 이 4단계 동검은 요동과 요서 등 12곳에 이르는데 요서 건평과 하북성 계현, 신성현 등 3곳을 제외하면 모두 요동과 길림 지역이다. 이 시기는 길림성 서황산둔 6호 석묘에서 나온 목탄 절대연대 측정에 의거해 기원전 5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이 6호묘에서는 비파형 동검과 더불어 철가루와 쇠칼 등 철기도 동반하고 있어 기원전 5세기경 길림지역에 철기가 보급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5단계 비파형 동검은 검날 폭이 일정하고 하부와 기부가 직각으로 바뀌는 초기 세형동검이다. 이 시기의 동검으로는 길림지역 3곳과 단동 1곳에서 출토된 동검이다.

위와 같은 분류를 보면 비파형 동검은 기원전 12세기경 요동지역에서 처음 출현해 기원전 8세기경 요동과 요서, 길림지역으로 확산되며 기원전 6-5세기경엔 중국과 북방문화를 수용하고 기원전 5세기경엔 초기 세형동검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이러한 비파형 동검의 형태에 따른 분류와 달리 오강원은 청동 화살촉을 비롯한 공반 유물의 기종과 재질 등으로 요령지역 청동기를 5단계로 구분했다.

1단계는 요서지역 능원과 건평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으로 기원전 10세기-9세기,

2단계는 요서지역 조양, 건평, 객좌, 금서, 북풍, 의현 등에서 출토된 동검으로 남산근 유적과 소흑석구 유적을 근거로 기원전 9세기 후반-8세기 중반,

3단계는 요서지역과 요동 요양, 무순, 보란점, 대련 등의 동검으로 기원전 8세기 중반-7세기,

4단계도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출토되는 동검으로 기원전 6-5세기,

5단계는 비파형 동검 출토지역이 30여 곳에 이르지만 요서지역 객좌와 조양, 건평 등 3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동과 길림지역으로 전국시대 연나라식 유물과 철기유물이 공반되는 점을 근거로 기원전 4-3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오강원의 분류에 의하면 비파형 동검은 기원전 10세기경 요서지역에서 처음 출현해 기원전 8세기에 요동지역으로 확산되며 기원전 4세기에 연나라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병태는 요서지역의 청동기 문화를 고조선의 문화로 보고 그 중심지를 조양으로 보았으며 북한 박진욱은 비파형 동검의 연대를 기원전 2000년대 말까지 올려보면서 중심지는 요동지역이지만 그 창조자는 고대 조선족 중 예족으로 후에 고조선을 창조한 것으로 보고 있고, 근풍의와 윤무병은 요서지방 동검이 요동보다 앞선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박진욱은 비파형 동검을 세 부류로 나누었는데, 미송리형 토기를 동반하는 것들을 첫째 부류로, 동검에 가중기가 나타나고 미송리형 토기를 동반하지 않는 것들을 둘째 부류로, 청동 칼자루를 부착한 것들을 셋째 부류로 분류하고 동반유물을 참고해 분석했는데 미송리형 토기와 비파형 창이 요동지역과 길장지역의 특징임을 들어 비파형 동검과 청동문화가 요동지역에서 발원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학자인 곽덕방도 요동지역을 비파형 동검의 기원지로 인정하고 요동지역과 북방지역 동검이 융합해 요서지역 하가점 상층문화 동검이 창출되었으며 요동지역 문화는 예맥.진번.조선족의 선조들이 공유한 청동문화라고 주장했다. 주영강 역시 비파형 동검이 요동지역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파형 동검에 대한 분류나 편년은 학자들마다 다소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비파형 동검이 기원전 10세기경에 이미 요동이나 요서지역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또 비파형 동검은 요서, 요동, 만주, 한반도에서 출토되지만 북경지역에서는 극소수에 그쳐 대체로 난하 유역을 경계로 하고 있다. 이는 비파형 동검이 주나라 춘추전국시대 열국과는 관련이 없으며 나아가 요서와 요동, 만주, 한반도가 비파형 동검 문화를 공유한 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역사 바로잡기 71 - 비파형동검의 분류

2008.04.07

cafe.daum.net/realhistory/El/4489  바로잡아야 할 역사



한국민족문
화대백과사

비파형동검

동의어 요령식동검, 만주식동검, 부여식동검, 곡인청동단검(曲刃靑銅短劍) 다른 표기 언어 琵琶形銅劍

요약 테이블
시대 선사/청동기
성격 동검
유형 유물
재질 청동
제작시기 청동기시대
분야 역사/선사문화

요약 청동기시대의 무기 혹은 제기(祭器).

개설

검신의 형태가 비파와 비슷해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한 요령지방(遼寧地方)에 주로 분포하기 때문에 ‘요령식 동검’이라고도 하며, 광복 전에는 ‘만주식 동검’으로 불렸다. 학자에 따라서는 부여 송국리에서 출토된 예에 따라 ‘부여식 동검’이라고도 하며, 형태에 따라 ‘곡인청동단검(曲刃靑銅短劍)’으로 부르기도 한다.

내용

일반적인 형태는 검신의 아랫부분이 둥글게 배가 불러 비파형태를 이루었고 검신 중앙부에는 돌기부가 있고 이 돌기부 양쪽으로 날이 약간씩 휘어 들어갔다.

경부(莖部)가 그대로 연장되어 검신의 중앙부에서 등대〔背〕를 이루며 인부(刃部)의 돌기부와 병행한 등대부분에는 마디가 약간 도드라져 있다. 이 도드라진 마디는 비파형동검을 다른 동검들과 구분지을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마디 위쪽의 등대부분에는 등날〔稜角〕이 서 있는데 경부쪽으로는 대부분 등날이 서 있지 않다.

검파부(劍把部)는 ‘ㅗ’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손에 쥐어지는 부분은 속이 빈 나팔형으로 생겨 검의 경부를 삽입해 결합하게 되어 있다.

이처럼 검신과 검파가 따로 주조되어 결합시키는 조립식은 중국식 검 및 오르도스식 검과는 다른 뚜렷한 특징이며 한국식 동검에도 이어진다.

검파의 두부(頭部)는 대부분 평면이 호콩모양인 테두리를 가졌다. 속이 비어 있어 이 속에 같은 형태의 검파두식(劍把頭飾)을 맞추게 되어 있다. 이 검파부에는 삼각문(三角文)·뇌문(雷文) 등의 무늬를 베푼 것이 많다.

이 동검은 검파부의 형태에 의해 세 가지 형식으로, 검신의 형태에 의해 세 네 가지 형식으로 나눠볼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Ⅰ·Ⅱ기의 2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경부 끝쪽에 홈이 파인 형태가 우리 나라의 서남부 지역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어 새로운 형식으로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한반도 내에서는 현재까지 약 40여 자루가 알려져 있다. 함경도 지방을 제외하고 거의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주로 서부 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유적의 분포가 중국의 동북 지방과 한반도 서부 지방에 조밀한 것은 당시에 이 지역이 동일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적의 성격은 석관묘·고인돌(지석묘) 등이다.

최근까지 한반도에서는 고인돌에서 출토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왔는데, 전남지방 보성강유역과 여수반도의 남방식(南方式) 고인돌에서 수 점의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다. 해방 전에 비파형동검은 그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아서 세형동검의 이형(異形)에 지나지 않고, 전형적인 세형동검보다 늦은 형식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중국 차오양 쓰얼타이잉즈에서 한반도 세형동검과 잔무늬거울의 조형(祖形)으로 보이는 비파형동검과 거친무늬거울〔粗文鏡〕이 출토되고, 부여 송국리 유적 등 한반도 여러 곳에서 비파형동검이 발견되면서, 명실공히 세형동검에 앞서는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동검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반도 내에서 출토된 동검은 현지에서 직접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요령식 동모 및 비파형동검과 세트를 이루는 부채도끼〔扇形銅斧〕의 거푸집〔鎔范〕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이 비파형동검문화는 고조선사회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뒤의 한국식 동검〔細形銅劍〕문화는 이 동검문화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다. 공반유물로는 동포(銅泡)·동착(銅鑿)·선형동부·청동도자(靑銅刀子) 등을 들 수 있다.

부여의 송국리 석관묘에서는 마제석검·마제석촉 등이 반출되어 소위 마제석검의 한국식 동검 모방설을 뒤엎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문화의 주인공을 중국 동북부의 동호족(東胡族)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연대에 대해서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동검의 한반도 유입시기는 서기전 8세기설부터 서기전 4세기설까지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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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조선고고학전서(고대편)』(박진욱,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8)
  • 「세형동검의 형식분류와 그 변천에 대하여」(이청규, 『한국고고학보』13, 한국고고학회, 1982)
  • 「부여송국리 요녕식동검출토 석관묘(扶餘松菊里 遼寧式銅劍出土 石棺墓)」(김영배·안승주, 『백제문화(百濟文化)』7·8합집, 공주사범대학백제문화연구소, 1975)
  • 「한국청동유물(韓國靑銅遺物)의 연구(硏究)」(윤무병, 『백산학보(白山學報)』12, 1972)
  • 「한국청동단검의 형식분류」(윤무병, 『진단학보』29·30, 진단학회, 1966)
  • 「십이대영자(十二台營子)의 청동단검묘(靑銅短劍墓)」(김원룡, 『역사학보(歷史學報)』16, 196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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