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14. 20:18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2006.11.14
cafe.daum.net/dlsqnrud/81e7/125 환국문화보존회
cafe.daum.net/moxoom/GZzf/54 바른말 바른사회
김지수는 비파형 동검을 5단계로 나누었다. 비파형 동검의 전반적인 형태변화를 보면 초기에는 검신(칼날)의 길이가 짧은 편이고 돌기가 상부에 치우쳐 있다가 후기로 가면서 검신이 길어지고 돌기가 점점 하부로 내려오며 칼끝이 날카로워진다.
우선 가장 이른 시기의 1단계는 검신의 길이가 20cm대이고 돌기가 검날 길이의 1/2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상부에 있는 비파형 동검이다. 이러한 동검은 요동 청원현 문검, 무순 대갑방, 요양 이도하자 등 6곳의 비파형 동검으로 요동지역이 5곳이고 길림지역이 성성초 1곳이다. 출토지는 모두 석관묘이며 미송리 토기가 함께 출토된다. 성성초 유적 인골에 대한 C14의 절대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1105+_100 ~ 기원전1305+_16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러한 1단계 비파형 동검 시기는 박진욱의 주장처럼 기원전 2천년 말기에서 기원전 1천년 말기 이전으로 설정해야 한다. 북한 학자들은 쌍방 유적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 자료를 근거로 기원전 12-13기까지 연대를 올려 보고 있다.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비파형 동검은 요동지역에서 처음 출현한 것이다. 나아가 요동지역의 청동기문화 개시가 기원전 2천년대 중반이며 비파형 동검 시기를 요녕 청동기문화의 후기로 보는 견해도 나타난다. 다음으로 2단계는 검신이 25-35cm에 이르고 검신의 돌기가 하부로 내려오며 칼끝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러한 2단계 비파형 동검은 요동과 요서, 길림 등 14곳에 고르게 분포하는데 미송리형 토기는 보이지 않는 반면 미송리형 토기처럼 입 부위가 넓어진 광구호(廣口壺)와 미송리형 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각형 토기, 장경호가 함께 출토된다. 이 2단계에 속하는 남산근 유적은 중국 서주 시기의 창과 같은 유물이 동반되므로 기원전 9-8세기, 요서지역 조양 십이영자 유적은 기원전 8-7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3단계는 검신이 30cm 이상 되는 것이 보통이고 돌기부가 등날이 검신의 1/2 지점을 넘어 하부까지 내려오고 칼끝이 현저하게 발달하며 검날 폭도 3cm로 좁아진다. 또 정(丁)자형 동검병(동 칼자루)이 요서지역에 등장한다. 이 3단계는 주로 요동과 요서지역 11곳에서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동검은 석곽묘 뿐만 아니라 토광묘(움무덤), 목곽묘(나무곽무덤) 등의 다양한 묘제에서 출토된다. 이 시기는 요양 정가와자 6512호 목곽묘를 기준으로 기원전 6-5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시기 동검은 중국과 북방문화의 영향을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 4단계는 돌기부가 완전히 사라져 세형동검과 같은 형태를 보여준다. 즉 다른 학자들이 말하는 초기 세형동검을 가리킨다. 이 4단계 동검은 요동과 요서 등 12곳에 이르는데 요서 건평과 하북성 계현, 신성현 등 3곳을 제외하면 모두 요동과 길림 지역이다. 이 시기는 길림성 서황산둔 6호 석묘에서 나온 목탄 절대연대 측정에 의거해 기원전 5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이 6호묘에서는 비파형 동검과 더불어 철가루와 쇠칼 등 철기도 동반하고 있어 기원전 5세기경 길림지역에 철기가 보급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5단계 비파형 동검은 검날 폭이 일정하고 하부와 기부가 직각으로 바뀌는 초기 세형동검이다. 이 시기의 동검으로는 길림지역 3곳과 단동 1곳에서 출토된 동검이다. 위와 같은 분류를 보면 비파형 동검은 기원전 12세기경 요동지역에서 처음 출현해 기원전 8세기경 요동과 요서, 길림지역으로 확산되며 기원전 6-5세기경엔 중국과 북방문화를 수용하고 기원전 5세기경엔 초기 세형동검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이러한 비파형 동검의 형태에 따른 분류와 달리 오강원은 청동 화살촉을 비롯한 공반 유물의 기종과 재질 등으로 요령지역 청동기를 5단계로 구분했다. 1단계는 요서지역 능원과 건평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으로 기원전 10세기-9세기, 2단계는 요서지역 조양, 건평, 객좌, 금서, 북풍, 의현 등에서 출토된 동검으로 남산근 유적과 소흑석구 유적을 근거로 기원전 9세기 후반-8세기 중반, 3단계는 요서지역과 요동 요양, 무순, 보란점, 대련 등의 동검으로 기원전 8세기 중반-7세기, 4단계도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출토되는 동검으로 기원전 6-5세기, 5단계는 비파형 동검 출토지역이 30여 곳에 이르지만 요서지역 객좌와 조양, 건평 등 3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동과 길림지역으로 전국시대 연나라식 유물과 철기유물이 공반되는 점을 근거로 기원전 4-3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오강원의 분류에 의하면 비파형 동검은 기원전 10세기경 요서지역에서 처음 출현해 기원전 8세기에 요동지역으로 확산되며 기원전 4세기에 연나라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병태는 요서지역의 청동기 문화를 고조선의 문화로 보고 그 중심지를 조양으로 보았으며 북한 박진욱은 비파형 동검의 연대를 기원전 2000년대 말까지 올려보면서 중심지는 요동지역이지만 그 창조자는 고대 조선족 중 예족으로 후에 고조선을 창조한 것으로 보고 있고, 근풍의와 윤무병은 요서지방 동검이 요동보다 앞선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박진욱은 비파형 동검을 세 부류로 나누었는데, 미송리형 토기를 동반하는 것들을 첫째 부류로, 동검에 가중기가 나타나고 미송리형 토기를 동반하지 않는 것들을 둘째 부류로, 청동 칼자루를 부착한 것들을 셋째 부류로 분류하고 동반유물을 참고해 분석했는데 미송리형 토기와 비파형 창이 요동지역과 길장지역의 특징임을 들어 비파형 동검과 청동문화가 요동지역에서 발원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학자인 곽덕방도 요동지역을 비파형 동검의 기원지로 인정하고 요동지역과 북방지역 동검이 융합해 요서지역 하가점 상층문화 동검이 창출되었으며 요동지역 문화는 예맥.진번.조선족의 선조들이 공유한 청동문화라고 주장했다. 주영강 역시 비파형 동검이 요동지역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파형 동검에 대한 분류나 편년은 학자들마다 다소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비파형 동검이 기원전 10세기경에 이미 요동이나 요서지역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또 비파형 동검은 요서, 요동, 만주, 한반도에서 출토되지만 북경지역에서는 극소수에 그쳐 대체로 난하 유역을 경계로 하고 있다. 이는 비파형 동검이 주나라 춘추전국시대 열국과는 관련이 없으며 나아가 요서와 요동, 만주, 한반도가 비파형 동검 문화를 공유한 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
2008.04.07
cafe.daum.net/realhistory/El/4489 바로잡아야 할 역사
요약 청동기시대의 무기 혹은 제기(祭器).
개설
검신의 형태가 비파와 비슷해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한 요령지방(遼寧地方)에 주로 분포하기 때문에 ‘요령식 동검’이라고도 하며, 광복 전에는 ‘만주식 동검’으로 불렸다. 학자에 따라서는 부여 송국리에서 출토된 예에 따라 ‘부여식 동검’이라고도 하며, 형태에 따라 ‘곡인청동단검(曲刃靑銅短劍)’으로 부르기도 한다.
내용
일반적인 형태는 검신의 아랫부분이 둥글게 배가 불러 비파형태를 이루었고 검신 중앙부에는 돌기부가 있고 이 돌기부 양쪽으로 날이 약간씩 휘어 들어갔다.
경부(莖部)가 그대로 연장되어 검신의 중앙부에서 등대〔背〕를 이루며 인부(刃部)의 돌기부와 병행한 등대부분에는 마디가 약간 도드라져 있다. 이 도드라진 마디는 비파형동검을 다른 동검들과 구분지을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마디 위쪽의 등대부분에는 등날〔稜角〕이 서 있는데 경부쪽으로는 대부분 등날이 서 있지 않다.
검파부(劍把部)는 ‘ㅗ’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손에 쥐어지는 부분은 속이 빈 나팔형으로 생겨 검의 경부를 삽입해 결합하게 되어 있다.
이처럼 검신과 검파가 따로 주조되어 결합시키는 조립식은 중국식 검 및 오르도스식 검과는 다른 뚜렷한 특징이며 한국식 동검에도 이어진다.
검파의 두부(頭部)는 대부분 평면이 호콩모양인 테두리를 가졌다. 속이 비어 있어 이 속에 같은 형태의 검파두식(劍把頭飾)을 맞추게 되어 있다. 이 검파부에는 삼각문(三角文)·뇌문(雷文) 등의 무늬를 베푼 것이 많다.
이 동검은 검파부의 형태에 의해 세 가지 형식으로, 검신의 형태에 의해 세 네 가지 형식으로 나눠볼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Ⅰ·Ⅱ기의 2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경부 끝쪽에 홈이 파인 형태가 우리 나라의 서남부 지역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어 새로운 형식으로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한반도 내에서는 현재까지 약 40여 자루가 알려져 있다. 함경도 지방을 제외하고 거의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주로 서부 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유적의 분포가 중국의 동북 지방과 한반도 서부 지방에 조밀한 것은 당시에 이 지역이 동일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적의 성격은 석관묘·고인돌(지석묘) 등이다.
최근까지 한반도에서는 고인돌에서 출토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왔는데, 전남지방 보성강유역과 여수반도의 남방식(南方式) 고인돌에서 수 점의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다. 해방 전에 비파형동검은 그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아서 세형동검의 이형(異形)에 지나지 않고, 전형적인 세형동검보다 늦은 형식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중국 차오양 쓰얼타이잉즈에서 한반도 세형동검과 잔무늬거울의 조형(祖形)으로 보이는 비파형동검과 거친무늬거울〔粗文鏡〕이 출토되고, 부여 송국리 유적 등 한반도 여러 곳에서 비파형동검이 발견되면서, 명실공히 세형동검에 앞서는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동검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반도 내에서 출토된 동검은 현지에서 직접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요령식 동모 및 비파형동검과 세트를 이루는 부채도끼〔扇形銅斧〕의 거푸집〔鎔范〕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이 비파형동검문화는 고조선사회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뒤의 한국식 동검〔細形銅劍〕문화는 이 동검문화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다. 공반유물로는 동포(銅泡)·동착(銅鑿)·선형동부·청동도자(靑銅刀子) 등을 들 수 있다.
부여의 송국리 석관묘에서는 마제석검·마제석촉 등이 반출되어 소위 마제석검의 한국식 동검 모방설을 뒤엎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문화의 주인공을 중국 동북부의 동호족(東胡族)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연대에 대해서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동검의 한반도 유입시기는 서기전 8세기설부터 서기전 4세기설까지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우리 역사 바로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대조영의 역사 (0) | 2018.11.17 |
---|---|
[스크랩]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31> 일본, 식민지, 그리고 철도 (0) | 2018.11.16 |
역사스페셜-환단고기 열풍(내용) (0) | 2018.11.14 |
[스크랩] <환단고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영훈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0) | 2018.11.14 |
[스크랩] 개천절에 다시 읽는 신시본기 (0) | 2018.11.11 |